경기 여주 북내면 장암리 원두표 묘(조선백대명당)와 원유남 묘(박상의 소점?)
1 원두표 가계
* 원주원씨(原州元氏)는 고려 때 당에서 귀화한 원경(元鏡)이 도시조이고 그 아래 원성백계, 시중공계, 평장사공계(우곡계)가 있다. 인구는 12만(2015년), 조선시대 문과급제60명 무과급제136명이다.
* 시중공계는 고려문과급제를 하고 우시랑을 지낸 원익겸을 기세조(1세)로 하는데 16세손 원두표의 가계가 번성하였다. 즉, 12세손 병마절도사 원팽조---13세손 첨지중추부사 원송수---14세손 강원방어사 원호(元豪)---15세손 지중추부사 원유남(元裕男)---16세손 좌의정 원두표(元斗杓)---17세손 황해관찰사 원만석, 병조참판 원만리---이하 손자 대(代)에 우의정 부마, 증손 대에 판돈녕부사등을 배출하고 많은 음관으로 진출했다.
* 조부 원호(1533~1592)는 1567년 무과에 급제하고 경원부사등을 역임한 뒤 은퇴하였다가 임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조방장으로 패잔병과 의병장을 규합하여 여주에서 적을 섬멸하였다. 1592.8 철원 근동면 하소리(옛 지명 김화군)에서 왜병과 전투 중 순절하였다. 김화 고을 사람들이 애통해하며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고향인 경기 여주까지 운구하여 장암리에 안장하였다.(사후177년에 건립된 신도비에서)
* 부친 원유남(1561~1631)은 1586년 무과에 장원급제후 사헌부감찰 재령군수를 역임하고 임란 때 권율휘하에서 용약했다. 정유재란 때 장령(지방군의 대장)으로 활약했고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청렴 강직하여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원두표가 부친상을 당하자 꾀를 내어 복면을 하고 국풍 박상의를 납치하여 산중에 묶어두었고 이를 원두표의 형이 우연히 발견하고 구출한 양 꾸며서 박상의로부터 보답으로 명당을 소점받아 장사를 치렀다. 박상의가 정승날 자리를 잡았는데 상주를 보니 정승재목이 아니므로 상심하던 중 뒤늦게 나타난 원두표를 보고는 정승감이라 하여 좋아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이와 똑 같은 설화는 울산 온양에도 있다.
* 원두표(1593~1664)는 사형장에서 탈주하였다는 설화, 반정구이 진입할 수 있게 궁궐문을 도끼로 부수었다는 설화로 보아 상당히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던 인물인 것 같다. 1623년 인조반정에 앞장서서 공을 세우고 원평부원군이 되었고 1624년 이괄의 난 때 공을 세우고 전라관찰사가 되었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방어한 공이 있었고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함으로써 병조판서 호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쳤다. 1664년(현종5년) 병사했다. 초장지는 영평(지금의 포천)이었고 1667년 이곳으로 이장했다(신도비에서)
2. 답사(장암리 산1-1, 348-1)
* 묘역의 중국--- 묘역은 장암리 산1-1, 348-1로 구성
* 묘의 위치도---
* 원호 원두표 원몽은(원두표의 손자)의 묘가 명당이다. 조금씩 몸을 틀어 앉았다. 룡이 내려가면서 이 묘역에 대하여 자기안을 만들어 주었다. 그 넘어 다시 8진안이 배알한다. 내청백이 없어서 다소 바람이 올 수 있으나 외청백이 정다워서 피해는 없겠다. 아래에 있는 원유남의 묘역에는 바람이 침범하여 큰혈은 없다. 두 개의 묘역이 단절되지 않고(절벽으로 斷山이 되어 있으면 흉지가 된다) 연결되어 있으므로 기룡(騎龍)혈이라 할 수 있고 물형은 장군행진형이다. 원호와 원몽은은 중등초급이고 원두표는 중등중급인데 합쳐서 중등상급이라 할 수 있다.
* 원유남 묘는 겨우 초등급이다. 당시 원호 묘가 설치되어 있었을 뿐 명당자리가 비어 있는데도 박상의가 작은 자리를 소점하였을가? ① 박상의는 생존기간이 1538~1621이라는 설 ②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풍수들이 인조반정(1623)후 처형을 당하자 박상의등은 뿔뿔이 흩어져 행적을 감추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원유남이 죽은 시점은 1631이므로 박상의와는 10년의 시차가 있다. 박상의에 관한 설화는 각 지역에 상당히 많이 있으나 대부분이 가짜이다.(2024.3)
* 원두표 묘역---위는 원호 묘, 아래는 원두표 묘
* 원유남 묘---
* 두 묘역의 연결---
첫댓글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벗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