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씨도 차갑고 또 2월 1일은 봄비를 상징하듯이 생명을 약동시키는 봄비라고 생각을 했는데, 갑작스레 기온이 내려가는 관계로 오늘 교당에 오시는데 상당히 불편함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쪼록 도반님들 지난 한주일 행복하게 지내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당, 법도량, 행복의 발전소, 강동교당에 오셔서 우리 도반님들께서 용심법을 닦아서 가치있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이 부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유무념정진, 선정진, 기도정진, 의두정진, 4정진운동으로써 자신의 성업봉찬의 밑거름이 되기 때문에 그만큼 여러 도반님 마음 머무는 곳이 행복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도반님들 행복하신가요? 그럼 박수한번 치셔야죠.
우리 모든 것은 행복한 마음으로부터 시작되고, 꽃이 활짝 피고 그향기도 무궁무진하고 열매도 탐스럽다고 합니다. 오늘 법회는 정타원 주임교무님께서 주관을 해 주셔야 하는데, 여러 도반님들께서 익히 아시다시피, 우리 교당의 어른이신 우타원 추도권 정사님께서 지난 2월 1일 열반하셨기 때문에 교당장으로 열반의 독경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침 발인식까지 주관하시고, 장지에서 하관식까지 주관하시는 관계로 법회에 참여하지를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우리 도반님들과 함께 우리 삶을 조명하면서 신앙과 수행에 더욱 발원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마음이 머무는 곳에 주인이 된다!>고 하는 주제로써 생각을 한번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생활속에서는 본래 마음자리를 잃고 있지는 않는가. 순간순간 와닿는 경계에 노예는 되지는 않는가. 아픔과 상처와 실연과 어두움을 지혜롭게 해결하고 있지는 못하는가. 내 습관의 벽은 높지는 않나 등을 한데 모아 우리 도반님과 하나되어 생각을 한번 해봤으면 합니다.
원기 98년 계사년의 새해가 엊그제 맞은 거 같습니다. 그때 저희들은 내삶의 행복과 가족과 사회와 함께 가치있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간절한 서원속에 지극정성으로 그 목표를 향해서 관심도 갖으시고 정성도 갖으시고 분발심하는 그 의지로써 열심히 실천하는 노력의 한달이 지났습니다. 제가 항상 새해를 맞을 때마다 저는 코카콜라 회장인 더글라스 데톡트라는 회장님께서 회사직원들에게 신년 메세지로 전하는 메세지로 항상 생각을 해보고 음미를 해봅니다. 올해도 역시 그와 같은 과정을 가졌습니다. 이 회장은 사람의 일생은 5개의 공을 가지고 산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지글러스라고 하는데 5개의 공은 첫째 일, 둘째 가족, 세째 건강, 넷째 친구, 다섯째 영혼입니다. 이 5개공을 공중에 던저 올리고 손에 돌아오면 다시 공중에 던져 올려 땅에 떨어지지 않게끔 반복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중에 5개 공중에서 딱 하나 고무공이 있습니다. 이 고무공은 바로 일이라는 공입니다. 고무공은 흔히 다 아시겠지만, 땅에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다시 뛰어올라서 잡을 수가 있습니다. 4개의 공은 고무공이 아니고 다 유리공이었습니다. 가족, 건강, 친구, 영혼. 한번 놓치면 깨쳐서 잡을 수 없고 이것은 영원히 내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이 5개의 공을 비유해서 가르침을 준 것이죠. 지글러스라고 하는 이 공놀이를 통해서 우리는 나의 일생을 음미하는 순간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내 꿈은 앞만 보고 내달려가는 경주자가 아닌가. 내 자신이 걸어가는 각자의 발걸음을 음미하는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나는, 한달이 지났지만 쫓겨가는 생활은 아닌가. 바로 우리는 신앙과 수행을 통해서 여유있는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인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모습을 조명하는 순간을 한번 가져 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고, 오늘을 보게 하는, 그 혜시가 있기 때문에 오늘 이시간, 현재 이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일이라는 것은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일을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놓쳐도 다시 잡을 수 있는 고무공이기 때문이라고 볼수 있겠죠. 그러나 한 번 놓치면 영원히 깨져버리는 4개의 유리공을 등한하고 있지 않나. 내자신을 조명할 때 오늘 이순간부터 내 자신을 살펴보면서 정말 여유있는 내 생활을 갖기 위해서는 내 자신의 삶에 신앙의 등불과 수행의 등불을 밝히는 강렬한 그 서원을 할 때 우리는 행복의 꽃으로 피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결국은 대종사님께서 우리에게 밝혀주신 신앙문과 수행문을 열어주지 않으셨나 합니다.
오늘 2월 3일, 2월중 첫 법회입니다.
참으로 엊그제 1월달을 만나서 서원정진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벌써 2월을 맞으면서 '야, 세월이 이렇게 무상하구나' 느끼실 줄 믿습니다. 새해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담배를 끊어보겠다고 간절히 약속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의점에서는 그 담배수요자가 한겨울동안에 15% 감소한다고 합니다. 그대신 입맛을 돋구기 위해서 달콤한 과자류라든가 음료수등의 판매수요는 약 30% 정도가 증가한다고 합니다. 일전에 어느 통계자료를 봐서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면서부터 서서히 담배수요자가 늘어나면서 그에 반비례하여 과자 수요자는 줄어들어서 이게 바로 작심삼일이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담배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습관을 바꿔보고자 서원하고 정성을 들이지만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죠. 목표설정에 성취되기까지는 그리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원한 목표에 도달하기까지는 수많은 걸림돌이 있습니다. 아마도 내 생활습관에, 제일 큰 벽은 이 생활습관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불가에서 말하기를 '이 생각을 돌려봐라, 이 생각을 뒤집어 봐라' 하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결국 나의 평안함과 나의 행복을 챙겨주는 것이죠. 아마 이말씀을 의미해보자면 나를 조명해 본다는 것이 쉬운것 같으면서 생활습성을 바꾸어 간다는 그 자체는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주제 <마음이 머무는 곳에 주인이 된다.>는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은, 여러 도반님들 다 알다시피, 무형무취하기 때문에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을 운전하는 거대한 에너지는 분명하다고 봅니다. 불가에서는 그래서 일체유심조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음이 우리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한분도 안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대단할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관심이 많고 산업화 이후에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막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머무는 곳에 선업의 밭과 악업의 밭이 있습니다. 이 밭에 주인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준비된 주인, 맞춤형 주인이고 또 하나는 비준비된 주인, 비맞춤형 주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두 주인은 기대치가 엄청 차이가 있을 거라고 도반님들도 미리 짐작을 하실 것입니다. 선업의 밭과 악업의 밭의 경우는 수없이 많죠. 여기서 말하는 선업과 악업은 명암이 분명합니다. 선업과 악업은 우리 마음을 생활속에서 어떻게 비우냐, 내려놓느냐 , 겸손하게 하심하느냐에 좌우됨이 분명합니다. 만약 선업의 밭에 주인으로 임한다면, 그 결과는 경산 종법사님께서 신년법문으로 말씀하신 인정미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주역이 될 것이다는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선업의 밭을 만드는 일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선업의 밭을 만들기 위해서 내 마음을 살피고 알아차리는, 원래 내 마음 찾기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원불교 출가교역자인 교무님들께서 수없이 강조하고 저희들은 수없이 들어서 이를 실천하려 하고 있죠. 원래 마음이라는 것은 내 성품자리를 말하기도 하죠. 우리 생활속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공부를 신앙과 수행을 통해서 많이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자리를 찾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본래자리이고 이것이 본래 마음을 돌아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내 마음을 살피고 알아차림은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깨달음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서로의 삶이 상생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단계가 오기까지가 상당히 나를 무명으로 만들고 나를 터널의 어둠으로 만드는 것이죠. 일상생활에서 내자신을 힘들고 아프게 하는 경계가 결국은 내 자신을 발전시키고 이익주는 은혜로운 존재임을 알아야 하는데 저 자신도 생활속에서 경계를 부딪히면 모든 것은 다 타인으로부터 시작된고 하는 원망하는, 원성하는 그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생활에 큰 병이구나 하는 것을 그동안 내가 원불교를 만나서 생활하면서 수없이 느끼고 이벽을 어떻게 깰꼬 하는 것이 화두였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 1조 2조 3조, 심지는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람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과 혜와 계를 세운다. 내마음, 원래 마음을 찾기 위해서, 내 성품을 찾기 위해서는 있다와 없다, 분별이 없는 자리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마 여러 도반님들 잘 아실 것입니다. 분별심과 주착심을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것, 그래야 내 본래 마음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조금 느끼는 상황을 여러번 겪어 봤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기상해서 자기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흩어버리고 도적맞고 살아가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저는 아침 4시반이면 기상하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이런 마음을 느낄 때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생활속에서 수시로 도둑맞는 일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쉽고 빠르게 관리하도록 일상수행의 요법 1조, 2조, 3조를 내려주셨습니다. 1조 2조 3조가 삼학공부로 정하는 마음, 혜하는 마음, 계하는 마음으로 원래 내 마음을 찾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알아차린다면 상대가 자신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깨달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 경지에 간다는 것은 행복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상대방만이 바꿔주기를 굉장히 원하죠. 저도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교직원과 생활하면서 바라는 것이 상대방이 좀 바꿨으면 내가 좀 행복할텐데, 왜 바꾸지 못하고 그럴까 하면서 상당히 내자신이 원망에 찌들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가 왔을 때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때문에 내 자신이 무명에 가려져 있구나, 다시말해서 창공의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하는 것이죠. 바로 보면 지나친 욕심, 이기심이 어두움의 산실입니다. 언제나 터널을 벗어날 수 없고 그 결과는 내 성품자리 내 본래 마음 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일상생활속에서 내 마음자리를 찾을려면 내 욕심을 비우고 내려놓고 하심을 가질 때 거기서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내 의식이 일상생활속에서 깨인 만큼 그 잣대로 상대를 재고 인정하고 있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생활에 꽁꽁 매여 있습니다. 따라서 내 무지를 털어내야 창공하늘을 볼 수있다, 내 본래자리, 내 본래 마음을 볼 수 있고 거기서 선업의 토양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내 본래 자리, 내 본래 마음이라는 토양이 원망, 원성, 원착으로 가득차서 악업의 토양이기 때문에 이속에서는 이기심과 편협함의 싹이 무성하고 그렇기 때문에 감각이 없고 무감각해서 일상수행의 요법 1,2,3조를 수시로 대조하면서 본래 마음을 찾아가는 것이 내가 머무르고 있는 마음의 토양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내자신을 위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대방을 바꾸기보다는 자기공부를 하게 된다는 것을 저뿐아니라 도반님도 많이 경험을 하셨을 거예요. 더 나아가 공부할 수록 상대에 대해서 내 뉘우침, 참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죠. 그 결과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과 상식보다는 경전의 법문을 그대로 하면서 자기 자신만을 살피고 알아차리기 때문에 자신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상대방을 쉽게 배려할 수 있고 상대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소생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보는 지혜를 얻을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행복한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주착심과 분별심이 있어서 불행한 모습을 정말 보기 싫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행복한 모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러니 우리는 수시로 일상수행의 요법 1,2,3조를 대조해서 본래 마음을 찾도록 노력한다면 내 마음이 머무는 것에 선업의 밭이 틀림이 없고 상호간의 섭섭함과 실망감이 없이 내 자신의 성업봉찬을 잘 실천할 수 있는 길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지혜는 바로 내 자신을 알아차리는, 내 본래 마음을 찾도록 노력하는 자신의 성업 봉찬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지금 교단의 5대과제, 교화대불공을 이룰 수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나 자신의 개인의 성업 봉찬 없이는 교화의 대불공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선업의 밭에서 준비된 주인과 준비성이 없는 주인의 역할을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활속에서 준비성 있는 주인이나 준비성 없는 주인이나 그 나름의 과정이 있습니다. 이를 일러 흔히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여행을 할때 기억이 잘 되어지는 것이 무엇일까. 여행을 갔다 와서 곰곰이 생각을 해본다면 아마 이름난 공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지만 여행중에 무의식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맞닥드린 순간이 아마 많을 것입니다. 한 개인이 죽기까지 지워 버릴 수 없는 기억은 예기치 않게 겪은 삶의 순간들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말을 모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유리창 너머의 여성을 보고 아름답고 멋있구나 생각을 하지만,그러나 그 정답은 없습니다. 아름답고 멋있는 것이 어디까지인가. 그 답은 간단하지 않고 섣불리 결론을 내릴 수 없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시응용주의사항 6조와 교당내왕시 주의사항 6조가 있죠. 상시응용주의사항 2조 '응용하기 전에 응용의 형세를 보아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하는 이 부분을 잠시 생각을 해보기로 하겠습니다. 2조는 준비성있는 주인의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행보를 그리고 있죠. 우리의 행보가 행복하기만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내 마음에 따라서 명암이 섞여 있습니다. 참으로 내 자신이 빈수레의 삶인가, 내마음이 요란한 삶인가, 내 마음이 어리석은 삶인가, 내 마음이 그른 삶인가. 절대 절제된 용심법을 잘 활용하고 있는가, 내마음에 구름이 덮여 있는가. 감사함을 저버리고 욕심으로 가득차 있는가. 내 욕심을 비우고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면 수없는 마음의 교체가 시작됩니다. 아마 도반님들께서는 어떤 마음이 교체되고 계십니까? 저는 평상심을 찾아서 준비성을 있는 주인의 마음이 선업의 밭에서 경작을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게 바로 유비무환의 정신이 아닐까, 또 그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일화를 간단히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편안하게 잠자는 사나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나이는 농장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는데, (중략) 농장주에게 자기 소개서와 추천서를 줬다고 합니다. 거기에 이 사나이는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잠을 잔다는 구절이 써 있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 해보세요. 폭풍우가 치는 날에 잠은 잔다는 게 있을 수 없죠. 농장주는 일손이 모자라서 급해게 그 사나이를 고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에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거센 비바람 소리에 놀래 농장주는 깜짝 놀라서 그 사나이를 깨웠습니다. 그 사나이는 깊이 잠이 들어서 농장주는 할 수 없이 혼자서 외양간에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그 가축들이 넉넉하게 여물을 옆에 놓고 편안한 모습으로 잠자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농장주는 다음 밀밭으로 뛰어갔습니다. 밀짚단들이 단단히 묶여진 채 방수천이 덮여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곡물창고로 가 봤습니다. 곡물창고의 문에는 빗장이 닫혀 있었습니다. 빗장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보니 곡물은 비 한방울 맞지 않았습니다. 그 때 농장주는 깨달았습니다. 이 사나이가 폭풍우치는 날에도 잠을 잔다는 말이 정말 이런 의미였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은 평소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사람에게는 폭풍우가 두렵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폭풍우가 오히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인과응보의 진리를 일깨워 주고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종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용맹있는 사람은 강적 만나기 쉽고, 재주 있는 사람은 일을 그르치기 쉽다." 무슨 일이든지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실수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날씨가 좋을 때 우산을 준비해 두어야 하듯이 폭풍우 속에서도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유비무환의 삶이 주인의 마음 자세임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 도반님들 동의하시나요? 동의하시면 박수한번 쳐볼까요? 아마 우리교도님들은 이러한 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교당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머무는 곳에 주인이 될려면 우리는 생활속에서 마음 가는 곳마다 선업의 땅을 만들고 언제나 갖춘 곳에 근심없는 주인이 되도록 용심법을 바로 활용하면서 언제나 준비하는 주인될 수 있도록 우리 다 같이 노력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