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대중화의 깃발
-장영희론
백남오
1. 수필가 장영희는
오늘날 수필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수필이 대중화를 이룬 것은 2천 년대의 초입이라 할 수가 있다. 이 시기는 21세기의 진입과 함께 밀레니엄시기와도 맞물린다. 새로운 세기의 첫 해를 보기 위하여 온 국민들이 밤잠을 설쳐가며 국토의 일출명소로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들던 때가 눈에 선하다. 그게 벌써 24년 전의 일이다. 이 거대한 시기의 수많은 변화중 하나는 수필이 문학의 중심으로 한 걸은 성큼 다가섰다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수필가 장영희 교수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한다.
그렇다. 2천 년대의 출발점에서 수필의 대중화를 논의할 때 우리는 장영희의 강을 반드시 건너야만 한다. 2000년에 나온 그의 수필집 《내생에 단 한번》은 2008년까지 48쇄를 찍었고, 2008년 5월에 나온 작품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한 달 만에 20쇄를 돌파했으며, 2005년에 출간된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3년 만에 28쇄를 기록했다.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 책은 2019년 5월 9일, 장 교수의 10주기에는 100쇄 돌파라는 기적 같은 일을 현실화 시켰다. 참으로 놀라온 성과가 아닐 수가 없다. 지금까지 그 어떤 수필가의 작품집도 이정도의 폭발적인 반응은 없었다. 현대 수필문학의 위상과 수필대중화 중심에 장영희 교수가 우뚝한 이유다.
장영희 교수는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대학에서 번역학을 공부했으며, 모교인 서강대영문과 교수이자 번역가, 칼럼리스트, 수필가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중고등학교 영어교과서 집필자로서도 많이 알려져 있다. 1981년 김현승의 시를 번역하여 한국문학 번역상을 받았으며, 2002년에는 삶에 대한 진지함과 긍정적인 태도를 담은 수필집 《내생에 단 한번》으로 올해의 문장상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이자 서울대영문과 교수인 고 장왕록 박사의 추모 10주기를 기리는 기념문집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을 엮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도 있다.
그는 장애인으로서, 세 번에 걸쳐 암과 사투를 벌였다. 2001년에 유방암 선고를 받고 세 번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았으며, 2004년에 다시 척추에서 암이 발생하였고, 2008년에는 간암까지 발병하여 학교를 휴직하고 치료를 받던 중, 2009년 향년 57세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럼에도 평소에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며, 투병 와중에서도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와 사랑으로 살아온 그녀의 삶은 아름다운 영혼의 빛과 향기로 가득하다. 문학에세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생일》《축복》등의 책을 펴내며 문학전도사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그의 첫 수필집 《내생에 단 한번》(2000년, 샘터)을 개관해 보고, 문학에세이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2005, 샘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한권의 책이 100쇄 이상 찍힐 수 있는 그 힘은 도대체 무엇일까. 요즘 책이 나와서 서점에 깔아도 어쩌면 단 한권도 팔리지 않을 수 있다는 애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런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분명 기적 같은 일이다. 그의 수필집 《내생에 단 한번》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자.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악몽은 항상 내 몸과 다리를 지탱해주는 목발, 그리고 보조기와 연관된 것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길바닥에 앉아있고, 사람들은 길을 가다 말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지만, 목발과 보조기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다.
-수필집 서문 〈꿀벌의 무지〉 부분
내가 소유한 물건들 중에 가장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것은 단연 목발이다. 차가 없으면 불편하긴 해도 택시를 타면 될 것이고, 컴퓨터나 책이 없으면 선생노릇 하는 데는 지장이 있겠지만 사람노릇 하는 데는 그다지 큰 걸림돌이 아니다. 하지만 목발이 없다면 나는 단 하루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중략) 그런데 얼마 전에는 학생하나가 내게 꿈속에서도 목발을 짚고 다니는지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새삼 생각해보니 나는 꿈에도 분명히 목발을 짚고 있었다.
-〈나의 목발〉 부분
그의 장애는 태어나서 첫돌을 지날 쯤 소아마비에 걸려 두 다리와 오른손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평생 목발에 의존하며 거동해야 했으며, 왼손잡이로 생활했다. 학창시절 성적이 우수한 편이었지만 1960-70년대 한국사회의 학교들은 장애인에게 시험기회 자체마저 허락해주지 않으려했다. 이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마다 아버지 장왕록 교수가 직접 나서서 시험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해야만 했다. 1971년, 당시 개교한지 11년 밖에 되지 않았던 서강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할 무렵에는 예외적으로 장애인 학생의 입학시험 기회를 허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도 영문과 학과장이었던 외국인 제롬 브루닉 신부의 결단 덕분이었다.
그러니 그의 내면에는 언제나 창피하고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은 무의식이 잠재하고 있었음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조그만 결점하나만 있어도 세상 사람들이 다 볼 것 같은 부끄러움이 밀려오는 것이 사람일진대 그에게 장애가 일상화되기까지는 얼마나 수많은 악몽과 절망감을 감수했어야 했는지를 상상해 볼 수가 있다. 심지어 악의는 없겠지만 제자들까지 “꿈속에서도 목발을 짚고 다니는지” 의 질문을 받았을 정도다. 그럴 때마다 평온하게 무수히 대답을 하게 될 정도의 수행까지는 하나의 도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육체적인 장애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희망과 사랑을 노래했다.
꿀벌은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수 없는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가 날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당연히 날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날갯짓을 함으로써 정말로 날수 있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꿀벌과 같이 그냥 무심히 날갯짓을 한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재능이 아니라 본능이다.
-수필집 서문 〈꿀벌의 무지〉 부분
그는 첫 책을 펴내면서 재능도 재주도 없으면서 꿀벌의 무지 같은 심정이라고 고백한다. 그런 무지와 만용에 스스로 갈채를 보낸다고 말한다. 못한다고 아예 시작도 안하고, 잘못한다고 중간에서 포기했다면 지금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 이겠느냐고 되묻는다. 사대육신 멀쩡한 사람들에게 목발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준엄한 질타이자 희망의 메시지다.
불가에서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야말로 넓은 들판 가득히 콩알을 널어놓고 하늘 꼭대기에서 바늘 한 개를 떨어뜨려 콩 한 알에 박히는 확률과 같다고 한다. 억만 분의 일의 확률로 태어나는 우리의 생명은 그러면 무엇을 약속함인가. 다른 생명과 달리 우리의 태어남은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의 약속이다. 미움 끝에 용서할 줄 알고, 비판 끝에 이해할 줄 알며, 질시 끝에 사랑할 줄 아는 기적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은 이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괴물같이 어둡고 무서운 이 세상에 빛 동그라미들을 만들며 생명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약속〉 부분
태어남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의 약속이라는 인식이다. 나무로 태어남은 한여름에 한껏 물오른 가지로 푸르름을 뽐내라는 약속이고, 꽃으로 태어남은 흐드러지게 활짝 피어 그 화려함으로 이 세상에 아름다움을 더하라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작은 풀 한포기, 생쥐 한 마리, 풀벌레 한 마리도 그 태어남은 이 우주 신비의 생명의 고리를 잇는 귀중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남은 가장 큰 축복이고 약속이 아닐 수가 없다. 그만큼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랑해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 당연함을 잊어버리고 게으르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능력을 비하하며 쉽게 포기하고 희망을 잃어버린다면 사람의 도리를 져버리는 일이다. 그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약속의 어김이다. 그의 희망의 메시지는 계속 이어진다. 다음 작품을 보자.
노인과 바다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물고기와 싸우면서 노인이 되뇌는 말,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인간의 육체가 갖고 있는 시한적 생명은 쉽게 끝날 수 있지만 인간 영혼의 힘, 의지, 역경을 이겨내는 투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지속되리라는 결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말은 노인이 죽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상어와 싸우며 하는 말,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 라는 말이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 부분
《노인과 바다》는 한편의 장엄한 서사시 같은 인류의 고전이다. 주인공인 노인은 고통과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침착성과 불굴의 용기로 진정한 희망의 의미를 가르쳐준다. 삶의 마디마다 위험과 불행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고비마다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다. 그러한 여정에서 희망이 없다면 그 싸움은 너무나 허망하고 슬프다. 지금의 고통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 누군가가 손을 잡아 주리라는 희망,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것이라는 희망이 필요하다. 그래야 삶의 투혼도 빛나고 살아갈 용기와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 희망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자 생명에 대한 약속이다. 희망을 저버리는 것은 죄악이며 자살행위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를 통하여 독자들은 어떠한 현실적 고통 속에서도 투혼을 가지고 인내하며,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과 재능을 발휘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장영희의 수필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라면 희망과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본다. 이상에서는 희망을 주제로 한 작품 몇 편을 살펴보았다. 다음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 작품들을 일별해보고자 한다.
17세기 영국시인 존 던 은 “나는 두 가지 면에서 바보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는 바보-사랑할 수밖에 없는 바보,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바보-가 될 용기가 없는 나는 글로나마 바보연습을 해 보려고 한다.
-〈사랑합니다〉 부분
장영희는 살아가는 그 자체를 사랑하는 일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신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장미와 괴테와 모차르트를 사랑하고, 커피를 사랑하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일에서 사랑을 뺀다면 삶은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설파한다. 그리하여 그는 행여 사랑하는 일이 바보 같은 것이라면, 글로서라도 바보연습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짝사랑이란 삶에 대한 강렬한 참여의 한 형태이다. 충만한 삶에는 뚜렷한 참여의식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환희뿐만 아니라 고통역시 수반하게 마련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다른 모든 일들처럼 사랑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짝사랑이야말로 성숙의 첩경이고 사랑연습의 으뜸이다. 학문의 길도 어쩌면 외롭고 고달픈 짝사랑의 길이다. 안타깝게 두드리며 파헤쳐도 대답 없는 벽 앞에서 끝없는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만이 마침내 그 벽을 허물고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승리자가 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짝사랑하라. 사람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저 푸른 나무 저 높은 하늘을 사랑하고, 그대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을 열렬히 사랑하라.
-〈아프게 짝사랑하라〉 부분
제자이자 대학생들에게 들려주는 글이다. 장영희 교수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영작문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영어로 일기를 쓰게 했다. 조금이라도 영어를 더 잘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그들을 통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청춘을 대리경험하고 싶은 이기적인 목적도 있다”고 말한다. 이때 학생들의 중요한 고민거리는 공부에 대한 어려움, 전공에 대한 회의 등도 있지만 사랑에 대한 고뇌가 핵심이라고 했다. 그 중에서도 짝사랑에 대한 고뇌와 슬픔, 좌절감이 중심을 이룬다는 것이다. 남보다 잘생기거나 예쁘지 못해서, 키가 작아서, 집안이 가난해서,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라서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누군가를 짝사랑하면서도 괴로워하거나 지독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학생들에게 스승으로서 참되고 진실 된 메시지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이때 장영희 교수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의 슬픔에 취해서 자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짝사랑이야말로 젊음의 특권이자 의무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난주에는 아버지가 전공하시던 미국작가 헨리 제임스의 〈귀부인의 초상〉을 영화로 보았다. 부잣집 아들이지만 병약하고 못생긴 랠프 타칫이 사촌인 여주인공 이사벨을 짝사랑하다가 결국 모든 재산을 그녀에게 물려주고 죽으면서 하는 말이 인상 깊었다. “고통은 사라지지만 사랑은 남는 것이다.” 원전에는 없는 말인데, 영화의 주제가도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이라는 제목의 연주곡이었다.
어쩌면 영매 존이 말하는 저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다는 ‘기氣’는 아마도 사랑의 기억을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의 고통, 고뇌, 역경이 아무리 클지라도 모두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이 세상 사람들과 저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사랑이라는 커다란 고리로 연결되어 있나 보다.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끝부분
장영희 교수는 아버지인 고 장왕록 박사의 추모 10주기를 기리는 기념문집 제목을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으로 지었다. 그리고 위의 인용 수필 제목역시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장영희 문학의 핵심 정수리라고 생각한다. 이 수필은 얼마 전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토크쇼인 래리킹 쇼에 요즘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 저자인 젊은 남자 영매가 출연자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그는 저 세상에 살고 있는 죽은 이들과, 이 세상 사람들을 연결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시청자들이 바로 전화를 해서 죽은 가족의 이름을 대면 존이라는 이름의 영매는 금방 그 사람이 저 세상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 세상의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모두 알려주는 프로였다.
그 영매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껍데기뿐인 육체가 제 역할을 다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죽는다는 것은 이제껏 몰고 다니던 자동차가 수명을 다해 그 차를 이 세상에 두고 걸어서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들은 저 세상에 살지만 마치 어떤 기를 가지고 있듯이 이 세상에 관한 분명한 기억을 가지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들어갈 때는 “이 세상에서의 고통, 고뇌, 역경이 아무리 클지라도 모두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만,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이 세상 사람들과 저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사랑이라는 커다란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업보만 남는다고 했는데 장 교수는 사랑만 남는다는 상상력이 이채롭기만 하다. 이렇게 장영희 사상의 핵심은 사랑인 것이다.
3. 문학의 숲을 거닐며
2005년 샘터에서 출간된 문학에세이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는 2008년 까지 3년 만에 28쇄를 돌파할 정도로 파괴력을 가진 작품집이다. 이 책은 2001년 8월부터 3년간 <조선일보>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북 칼럼으로 게재되었던 글을 모은 것이다. 2004년 9월 말, 두 번째로 척추 암이 발병하여 중단되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책에는 약 50여 편의 세계명작이 소개되어 있다. 《오만과 편견》, 《위대한 개츠비》, 《이방인》, 《월든》, 《호밀밭의 파수꾼》, 《주홍 글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변신》, 《백경》, 《안네의 일기》, 《돈키호테》 등등 주옥같은 인류의 고전들이다.
신문의 특성상 각 칼럼의 길이를 원고지 10매에 맞추었지만 이 위대한 명작들을 그렇게 짧은 호흡으로 소개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장 교수가 보고 느낀 현실세계의 아름다움과 누추함을 작품과 비교분석해서 다시 그것을 비평적으로 의미화한 후, 독자들의 삶에 새로운 충격을 던짐으로써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를 되돌아보게 해준다. 주로 서두에서는 자신의 학교 제자들의 이야기, 일상적이고 사적인 삶의 이야기를 끌고 와서 작품의 내용과 결합해서 풀어놓는 방식이다. 이런 유기적 결합의 글쓰기방식이야말로 문예창작의 기본이기에 더욱 빛나고, 또 하나의 새로운 창작품으로 태어난 것이다.
사실 우리는 학창시절, 이 세계명작 한편을 읽으려면 너무나 난해할 뿐만 아니라, 다 읽고 나서도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작가역시 “욕심을 버리고 단지 아주 솔직하게 그 책들을 하나하나 내개 소중한 만큼, 독자들에게도 그 소중함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문학교수로서 비평적으로 고전의 요건에 어떻게 걸 맞는지 분석하기 전에 단지 하나의 독자로서 그 작품이 내 마음에 어떻게 와 닿았는지, 어떤 감동을 주었는지, 그래서 그 작품들로 인해서 내 삶이 얼마나 더욱 풍요롭게 되었는지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 어려운 고전작품들을 장영희 교수가 대신 읽고 독자들의 입에 넣어주는 격이니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환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세계명작을 자신의 삶과 대입하여 풀어낸 작품집으로서는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더욱 가치 있는 책이다. 다음 작품을 한번 보자.
6,7년 전 법학과 2학년 학생들이 수강하는 교양영어과목과 영문과 2학년 영작과목을 동시에 맡았던 때의 일이다. 우연히 두 반의 수강생 수가 스물네 명씩 똑같고 법학과 학생들은 모두 남학생, 영문과는 여학생만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 나는 두 반 학생들에게 영어로 펜팔을 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첫째 주에 영문과 여학생 하나가 휴학을 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그 여학생의 자리를 내가 메우기로 했다. 편지가 오감에 따라 나는 점차 명호가 내게, 아니 내가 가장한 ‘캐서린’ 이라는 영문과 2학년 여학생에게 마음을 주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여덟 번 가량의 편지 교환 후에 종강이 되었고 나는 학생들에게 모르는 사람과 편지를 나눈 기억을 대학 생활의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찾지 말라고 당부했다. 마지막 편지에서 명호는 “이제껏 네가 나의 외로움을 많이 달래주어서 힘든 대학생활을 너 때문에 잘 넘길 수 있었다. 너무나 고맙고, 너를 생각하며 꼭 사법고시에 붙겠다.”고 다짐했다.
-〈마음의 성역〉 줄거리 요약
위인용 작품은 19세기 미국의 극작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대표작인 《주홍글씨 The Scarlet Letter,1850》를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이 소설은 아름답고 젊은 부인 헤스트와 불륜을 범한 딤즈데일 목사에게 접근해 복수를 다짐하며 그의 영혼을 고문하는 늙은 칠링워스의 이야기다. 헤스터는 아이의 아버지를 밝히라는 주위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간통녀Adulteress를 상징하는 주홍글자 ‘A’를 달고 딸 펄과 묵묵히 살아간다. 딤즈데일 목사 역시 죄의식과 고뇌로 점차 쇠약해지지만 아이로니칼 하게도 더욱 감동적이고 호소력 있는 설교를 한다. 이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통해서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데, 이 소설에서 호손이 말하고자하는 것은 미로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헤스트에게 딤즈데일이 말한다. “우리가 지은 죄는 남을 헤치지는 않았으나, 냉혹하게 남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한 칠링워스야 말로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이요.”
아내와 불륜을 범한 남자를 벌하고 싶은 것은 인간적인 욕망이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간교한 수법으로 남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한 칠링워스가 호손의 입장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주홍글씨의 주제인 “가장 악한 자는 남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는 자”라는 것을 말하기위해 지난날 학생들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는 명호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한 것이 지상에서 지은 죄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마음아파 한다.
이 작품은 호손의 주홍글씨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한 상태에서, 학생들과 작가와의 추억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또 하나의 철학적 사유를 낳게 하는 작품으로 승화되고 있다. 이처럼 장영희 교수의 작품은 늘 일상에서 겪는 학생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어떤 철학적인 명제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풀어낸다. 다음 작품을 보자.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변신 The Metamorphosis, 1915》 이 단지 기괴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인간실존의 허무와 절대고독을 주제로 하는 《변신》은 바로 이렇게, 사람에서 벌레로 변신變身을 말한다.
가족의 생계를 떠맡고 상점의 판매원으로 고달픈 생활을 반복해야하는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벌레가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중략) 겨우 문밖으로 기어 나갔을 때 식구들은 경악하고 그를 한 낱 독충으로 간주한다. 그는 변신 이전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유지하며 벌레로서의 삶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가족의 냉대는 더욱 심해진다.(중략) 어느 날 그림에 달라붙어있는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기절하자 아버지는 그에게 사과를 던져 큰 상처를 입힌다.
-〈변신〉 부분
며칠 뒤에는 각별히 아끼던 누이동생이 하숙생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려 나가지만 벌레의 존재를 보이지 않으려고 가족들은 그를 방안에 감금시킨다. 그 이튿날 청소를 하러 왔던 가정부가 그레고르의 죽음을 알리지만, 가족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풍을 떠난다. 너무나 비정한 인간의 모습이고 가족의 실체에 연민과 슬픔이 몰려온다.
이 작품은 벌레라는 실체를 통하여 현대문명 속에서 기능으로만 평가되는 인간이 자기존재의 의의를 잃고 서로 유리된 채 살아가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그레고르가 생활비를 버는 동안에는 그의 기능과 존재가 인정되지만 그의 빈자리는 곧 채워지고 그의 존재 의미는 사라져버린다. 인간 상호간은 물론, 심지어는 가족 간의 소통과 이해마저도 비정하고 철저하게 단절되어 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존재의 본질임을 강조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장영희 교수는 기계처럼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질타하며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생활 속에서 그야말로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 허무할 뿐만 아니라 죄의식마저 느낀다고 말한다. 하루하루의 귀중한 삶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아파한다.
필자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이 어떠한 자리일지라도 그 자리는 자기가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며, 자신만이 유일하며, 자신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절대는 있을 수가 없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과 임무가 사라진다면 그 역시 잊혀 짐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절대고독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 이 책은 그야말로 광활한 문학의 숲속을 하염없이 걸을 수 있다. 소설뿐만이 아니고 세계적인 명시와 작가를 소개하고 있음도 물론이다. 다음 작품은 시와 시인의 이야기다.
사랑은 –생명 이전이고
죽음-이후이며
천지창조의 시작이고
지구의 해석자
시라기보다는 마치 경구와 같이 짧은 이 시는 영미문학을 통해 가장 위대한 여류시인으로 평가되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1830-1886)의 작품이다. 미국문학 전공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데, 청송감옥에 있는 어느 수인이 내게 보낸 편지에 이 시를 인용하고 있었다. (중략) 사랑이야말로 ‘천지창조의 시작’이며 ‘지구의 해석자’라고 정의한 에밀리 디킨슨의 삶은 역설적으로 매우 평범하면서도 특이한 것이었다. 1830년에 메사추세츠 주의 앰허스트에서 태어나 1886년 5월, 55년 5개월 5일을 살고 나서 죽을 때까지, 표면적으로 아무런 극적사건도 없이 평범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골수까지 파고드는 강렬하고 열정적인 삶이었다.
-〈어느 수인과 에밀리 디킨슨〉 부분
에밀리 디킨슨은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한 번도 앰허스트를 떠나지 않았다. 자기 집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은둔생활은 철두철미했다고 전해진다. 30대 후반부터는 죽는 날까지 흰색 옷만 입었다고도 한다. 또한 그녀가 그토록 절실하게 사랑했던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사랑은 마치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슬픔과 기다림의 갈증을 견뎌내야 하는 아픈 경험이었다. 그 필연적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시인으로 새로 태어나고 시의 세계에서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새로운 돌파구를 찾게 한 것이다. 또한 그녀 생전에는 서너 편의 시가 발표되었을 뿐이다. 그녀가 죽은 후에 서랍장에는 약 2천여 편의 시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시는 제목이 없는 것이 특징이며, 아주 짧고 압축적이며 전통적인 시형을 무시하는 난해시가 주류를 이룬다는 점도 특이하다. 장영희 교수는 이러한 위대한 시인의 이야기를 어느
수인의 편지를 인용하며 조곤조곤 우리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4. 마무리를 대신하여
《문학의 숲을 거닐다》, 이 책의 서평을 쓴 이태동 교수는 “장영희 교수가 이렇게 우리들을 무한한 기쁨이 가득한 문학의 숲으로 이끌어 갈수 있게 된 가장 큰 힘은 그가 지닌 고전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따뜻하고 지적인 문장, 명료하면서도 섬세한 구성, 그리고 유려한 번역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고전적인 문학작품을 통해 조명한 현실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구김살 없이 진솔하지만 날카롭기가 그지없는 그가 지닌 마음의 눈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그의 글이 가져다주는 매력은 천부적인 그의 재능도 재능이겠지만, 장애인이라는 인간 조건을 말없는 침묵으로 극복해온 불굴의 인간의지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장영희 교수가 남긴 수필집은 IMF직후 실의에 빠진 국민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하였다. 그가 전한 메시는 감사와 희망과 사랑이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해야하며 포기해서는 안 되며 사랑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메시지다. 소중한 생명으로 태어남에 대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신체적으로 불완전하고 아픔이 많은데도, 정상인들과 똑같이 공부를 하고, 교수가 되고, 넓고 깊은 지식으로 감동적인 수필을 쓰려고 노력하는데, 보통사람이 이룰 수 없는 꿈이 무엇이겠느냐는 용기를 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위로받지 않을 독자가 어디 있을 것인가 싶다.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아프고 열악할지라도, 그녀를 생각하면 어떠한 절망감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장영희 교수는 1999년부터 월간《샘터》의 고정필진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샘터》는 피천득 수필가, 법정 스님, 이해인 수녀 등 당대 네임 급 작가들의 글을 오랫동안 게재해오며 대중성을 확보한 바다. 이러한 제반 요인들이야말로 장영희 교수의 작품집이 그렇게 많은 독자들에게 열광적으로 읽히는데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장영희 교수는 평소에 수필문학의 대접에 대해서도 아쉬워한 바가 있다. 대학에서 교수를 평가할 때, 국내학술지 논문 한편 발표에 100점, 전공서적 한권출판에 500점, 소설집 시집 간행이 권당 500점, 동아리 지도활동에 5점 등을 인정해 주지만 수필집이나 칼럼을 묶어서 낸 책은 0점을 준다며, 자신은 업적이 안 되는 일만 골라 한다고 몹시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찰스 램,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헨리 데이빗 소로우, 제임스 서버 등의 작가나 사상가들은 모두 위대한 수필가로 알려져 있다며, 학계와 문단풍토를 비판했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다. 시, 소설, 희곡이라는 고착된 3분법의 벽도 서서히 허물어지는 징조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수필은 결코 주변문학이 아니다. 현재 수필인구는 이미 타 장르를 압도했다. 양적인면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것은 장영희 교수 같은 훌륭한 학자들이 수필을 그 어떤 학문이나 문학보다 더 귀중히 여기며 직접 수필 쓰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은 결과이다.
문학작품집이 팔리지 않는 시대임에도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은 무려 100쇄 이상이나 찍혀 팔려나갔다. 만약 장 교수가 500점짜리의 전공서적만 고집해, 0점짜리 수필쓰기를 포기했다면 오늘날 그가 대중으로부터 이렇게도 사랑받는 존재로 설수 있었을 것인지도 묻고 싶다. 역설적으로 그는 0점짜리 수필쓰기를 그 무엇보다 중시했기에 수필대중화의 깃발로 우뚝 설 수 있었음이다. 그는 우리 수필문학사에 영원한 별빛으로 빛날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는 전 수필가의 이름으로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한권의 가치를 500점이 아니라, 1000점 이상을 부여해 주고자 하는데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첫댓글 백남오 교수님,
장영희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장영희교수 찐 팬으로서
《문학의 숲을 거닐다》와 함께
오늘 하루 행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