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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부계 홍씨(缶溪 洪氏) 또는 부림 홍씨(缶林 洪氏)라 불리는 집성촌인 것 같다.
부계라는 지명은 뒤에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缶林 洪氏나 缶溪 洪氏는 같은 성이지만 필자는 부림홍씨로 부르고 있다.
왜냐고요? 필자가 문경군 영순면 소재 홍귀달 묘소와 그 주변 묘소들의 비문을 살펴본
바 모두 부림 홍씨로 기록되어 있기때문이다.
부림 홍씨는 홍란(洪鸞)을 시조로 하고 고려 중엽 직장(直長)을 지낸 홍좌(洪佐)를 기세
조로 한다고 한다.
남의 성씨를 실수로 기록하면 큰 잘못이 되기에 조심스럽다. 필자가 어릴 적 작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동생 부인 : 종조모님)의 성씨가 부림 홍씨로 족보에도 그렇게 실었기 때문
이다.
이 마을은 홍노(洪魯, 1366년 ~ 1392년)라는 분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마을이라 한다.
일찍 생을 마감한 분인 것이다.
1392년? 이 해는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해가 아닌가?
좀 더 탐색을 해 보아야 겠다.
▷홍노(洪魯)라는 분에 대하여
홍노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이었다.
홍노는 조선이 개국한 날이자, 고려가 망하던 날인 1392년 음력 7월17일에 불귀의 객이
됐다. 이날에 맞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니다.
그의 행장(行狀)에 전하는 그날의 전경을 들여다보면, 7월 초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홍노
는 7월17일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더니
“내 어젯밤에 태조 대왕(왕건)을 꿈에서 뵈었는데 오늘 돌아가리라”
고 말했다.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사당에 배알한 뒤 아버지 진사공께 문안을 드렸다.
이어 마당에 자리를 펴고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뒤
“신은 나라와 함께 죽사오니 무슨 말을 하겠나이까”
라고 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와 눕더니 정오가 안 된 사시(巳時·오전 9~11시)에 운명하고
말았다. 개성과 천 리나 떨어진 팔공산 자락에 살던 홍노가 특별한 예지력을 발휘하듯,
고려 왕조와 한날한시에 운명을 다한 것이다.
홍노가 운명한 이후로, 부림 홍씨 집안에서는 해마다 음력 7월17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마치 스러진 고려를 기리는 것처럼. 그리고 홍노가 살던 마을은 그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팔공산 북쪽 제2 석굴암이라고 불리는 군위삼존석굴이 있는
마을,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와 남산리가 바로 그 동네다.
부계면 남산리는 필자가 너무도 잘 아는 곳이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여행과 탐방활동으로 아주 익숙한 곳이다.
몇 해 전 양산서원이 복원되었을 때도 방문하여 자료를 얻어온 적도 있는 곳, 그 책자
에도 분명 홍노, 홍귀달, 홍언충 세 분의 부림홍씨 선현들을 배향하는 서원이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FD14355ABD59D402)
근세에 이르러 불교가 번창하고 유학이 쇠퇴하면서, 삼존석굴 밑에 석굴암이라고 부르는
큰 사찰이 들어서 양산서당을 압도하는 상황이 됐다. 양산서당 자리에는 원래 홍노를 배
향한 양산서원이 있었는데, 대원군 때 훼철된 뒤로 훗날 서당이란 이름으로 재건되었다.
높다란 사찰 연수원 옆에는 홍노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삼존석굴을 바라보고 있는 비석
에는 ‘首陽白日 栗里淸風(수양백일 율리청풍)’이라는 글이 쓰여 있다. 백이숙제가 숨어들
었던 수양산의 해처럼 밝고, 도연명이 칩거하던 율리의 바람처럼 맑은 홍노의 기상을
기리는 글귀다. 양산서원이라는 이름도 수양산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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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의 사진을 찾아 기억을 새롭게 한다.
이 고을은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세거지(世居地)로 고려말의 충신 문하사인(門下舍人) 경재
(敬齋) 홍노(洪魯)선생과 조선조 좌참찬 겸 양관 대제학(朝鮮朝 左參贊 兼 兩館 大提學)을
역임한 시호(諡號) 문광공(文匡公) 허백(虛白) 홍귀달(洪貴達)선생, 이좌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한 대학자 우암 홍언충(大學者 寓庵 洪彦忠)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 분
선생의 영위(靈位)를 봉안한 묘우(廟宇)를 비롯하여 유생 강학을 위한 흥교당(興敎堂)을
중심으로 입나재(立懦齋), 구인재(求仁齋), 읍청루(挹淸樓), 반무당(半畝塘) 등의 부속 건축
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으나, 1868년 고종(高宗) 5년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묘우를 비롯한
전 건물이 훼철(毁撤)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 후 1897년 광무원년(光武元年)에 현 규모의 강당을 중건한 후 1989년에 중수를 하고 강당
후정에는 장판각(藏板閣)을 지어 경재 선생 실기(實記)목판과 조선조 후기 사학자이며 성리학
의 대가인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선생이 수찬한 휘찬려사(고려사)[彙纂麗史(高麗史)] 목판
(경북유형문화재 251호)을 보존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주소 :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296
![](https://t1.daumcdn.net/cfile/cafe/9903D4355ABD59D402)
자연절벽 동굴 속에 석불이 조성돼 있다. 부계면 남산리에 있는 국보 제109호인 군위
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이다. 신라 소지왕 때 조성된 것으로 전한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
보다 조성 연대가 앞선다. 석굴사 서편 암벽 20m 높이의 동굴에 아미타 삼존석불(三尊
石佛)이 안치돼 있다. 경주 석굴암의 모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존석불 앞 경내에는
모전석탑(경북문화재자료 제241호)과 비로자나불좌상(경북유형문화재 제258호)이 있다.
늘 이런 시간이 즐겁다.
모르거나 더 알고싶은 사실을 찾는 것은 우리의 역사에 숨은 진실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인물을 탐구하게 되면 그 분과 관련된 인물을 알아야하고 그 당시의 사건을 공부
하게 되는 것이다.
탐구를 하다보면 간혹 좋은 벗을 만나서 함께 토론을 하기도 한다.
논어 학이편에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라는 글귀가 있다.
때로 배우고 익히면 즐거운 일이고, 좋은 벗이 있어 찾아오는 것도 즐거움이며,
특히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할 일 없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