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중 목사
2010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는 계획하는 일들이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형통하게 되길 바랍니다.
더욱 기도 많이 하시고 말씀 위에 굳게 서길 바랍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에디슨은 결점투성이 아이였습니다.
머리가 유달리 크고 못생겼으며, 자기 멋대로 행동하기 일쑤였고,
성격도 차분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
에디슨은 문제아로 분류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부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아이들은 다른 아이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에 매우 민감하다고 합니다.
비교당하며 성장한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다른 아이와 비교하면 아이의 마음에 소리 없이 불안감이 싹트고,
그 불안감은 이윽고 스트레스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에디슨의 어머니 낸시는 호기심 덩어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골칫덩어리 아들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므로 에디슨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내가 불리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히려 잡음이 들리지 않아 집중력이 높아져 훨씬 좋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전폭적으로 나를 지원해 준 어머니가 계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만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해해 주셨다.
아무리 괴로워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에 계속 노력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어머니 덕분이다.”
어떤 자아상을 갖느냐에 따라서 삶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큽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겸손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회개하며 기도할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타다 남은 부지깽이만도 못한 존재, 벌레만도 못한 존재 그러나 과연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올바른 평가일까요?
반대로 자신을 과대평가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면 자아상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남의 말, 이를 테면 부모나 친구의 생각이 나의 자아상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만든 이미지로부터 자아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기 성격이나 외모, 능력, 업적에 따라 자기 맘대로 자화상을 그려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아상이 하나님의 음성과 정확히 일치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아상을 갖고 있습니까?
긍정적인 자아상입니까? 부정적인 자아상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실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로 보십니다.(4절)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1절)
하나님은 우리의 잠재력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굳게 믿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한 큰 계획이 있으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2절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그런데 자아상이 부정적인 까닭에 우리는 늘 김빠지는 소리만 해댑니다.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저 말고 능력이 많고 배운 것도 많은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제겐 능력이 없어요.”
구약 시대에 기드온이란 친구가 꼭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기드온에게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우리가 믿든 말든 하나님은 우리 역시 이런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불굴의 용기와 힘과 잠재력을 소유한 용사입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저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예요.
저는 용사가 아니에요. 용기도 없고 강하지도 않아요.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기드온이 저랑 같아요?
기드온은 자신감과 결단력이 있는 위대한 리더니까 하나님이 그런 엄청난 말씀을 하신 거죠.”
정말 그럴까요?
당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악한 미디안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자 기드온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저 같은 것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겠습니까?
저의 집안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습니다.
저는 그런 제 아버지 집에서 가장 못난 사람이고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닙니까?
바로 우리 입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말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기드온이 자신을 보는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이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두려움이 앞섰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강하고 용감한 자로 대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강한 자로 보셨습니다.
기드온의 눈에 자신은 부족하고 결단력이 없는 존재였지만,하나님이 보시는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전투에서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능하고 담대한 리더였습니다.
결국 기드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용사로 보십니다.
우리 스스로 보기엔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자격이 없고 결단성도 없으며 약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나 한 몸 챙기기도 바쁜 하찮은 존재라고 자기를 비하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뛰어난 용사입니다. 할렐루야!
누구나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이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견에 동의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큰 영광과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보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여러분은 교회에서 맡겨주신 직분을 할 수 없다고 변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변명 따위는 이제 그만하고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하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큰 능력을 잠시나마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완벽한 사람만 사용하신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나의 약점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우리가 약할 그 때가 곧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을 더욱 바라보게 되고 그 때가 사실은 가장 강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약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난 다음에 돌아와서 보고하는 내용 중에 자신을 메뚜기에 비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눈앞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은 기골이 장대한 용사들입니다.
그들에 비해서 자기는 메뚜기 같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만한 존재들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오직 거인들만 보았고, 문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태도로는 전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해 갈 수 없었습니다.
차라리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절망에 빠져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메뚜기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명령을 실천할 능력과 자세를 갖춘 적극적인 사람을 원하십니다.
긍정적인 자세를 가졌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일그러진 자아상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환경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부모님이나 친구의 상처 주는 말과 행동, 의견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습니다.
이런 그릇된 이미지를 받아들일 때 낙심과 가난, 아니 그보다 훨씬 무서운 파괴의 힘이 우리를 파멸로 이끕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런 깨진 거울에 비쳐진 우리의 모습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과 승리는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죽을 때까지 인생의 쳇바퀴 속에서 맴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생각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올바른 우리의 자아상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왕자였고, 다윗은 목동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마치 친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삼상18:3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18:4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이제 두 사람은 둘 중 하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남은 형제가 죽은 형제의 가족까지 돌봐주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후에 사울 왕과 요나단은 같은 날 전쟁터에서 전사하였는데 이 소식이 궁으로 전해지자 유모가 어린 므비보셋을 안고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황급히 나오다가 유모는 그만 아이를 안은 채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므비보셋은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유모는 므비보셋을 주변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외딴 도시들 중에 하나인 로드발로 데려갔고, 그 끔찍한 환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에 이어 왕이 된 후 수 년이 흘러 사울과 요나단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생존한 가족을 찾았습니다.
로드발에 살고 있는 므비보셋에 대한 소식을 듣고 데려오라고 지시합니다.
이제 궁에 도착한 므비보셋은 당연히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과거에 그의 할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므비보셋은 마지막 남은 후손,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 아버지 요나단 때문에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한다.
과거 네 할아버지 사울의 땅을 모두 돌려주겠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내 아들과 마찬가지로 내 식탁에서 식사하거라.”(삼하9:7)
이때 므비보셋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삼하9:8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
여기서 므비보셋의 자아상이 보입니까?
그는 자신을 죽은 개, 패배자, 걸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자아상 때문에 왕 앞에 담대히 나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실수를 자주 저지릅니다.
우리는 자아상이 하나님의 시각과 완전히 달라서 하나님의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사’로 보시지만 우리는 종종 자신을 ‘죽은 개’로 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자아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실수를 했든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려고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는 더 이상 죄책감과 수치심 속에 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놀라운 복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제 그 복을 찾고 기대하면 됩니다.
지난 8월 31일부터 5일간 수원에 있는 경기도 문화의 전당에서 ‘제10회 아시아 태평양 장애인 음악제’가 열렸습니다.
3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제적인 장애인 문화예술 축제입니다.
교통사고로 ‘고차뇌기능장애’를 입고 그 장애를 감사로 승화시키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일본 팀의 ‘해방’이란 곡이 있었습니다.
참석한 이들에게 공감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얼굴이 기형이 돼 말을 못하게 됐지만 피나는 연습 끝에 말을 하고 노래까지 하게 된 베트남 여자 가수가 한 손으로 치는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모습은 눈물겹게 아름다웠습니다.
청각, 시각장애인들로 구성된 몽골 팀, 네팔 팀의 전통춤이 있었습니다.
참가 팀 중에서 가장 많은 9명으로 구성된 ‘삶의 힘을 주는 사람들’이 부른 ‘난 살아 있어!(I Am Alive)’는 관중들을 뜨겁게 사로잡았습니다.
“그래 우린 달라/ 하지만 우릴 봐/ 노래 부르고 기타치고/ 남을 돌보기도 해/ 우린 미래를 꿈꾸지/ 우린 살아있어/ 우리의 심장은 불타올라/ 우린 자신 있어/
우린 활짝 웃어/ 당당하게 살아가/ 우린 살아 있어!”
생각해 보십시오.
장애인들은 누가 봐도 참으로 불쌍하고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비참하게 여기며, 일그러진 자아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자기의 장애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고, 동정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당당하게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비장애인인 우리가 오히려 이 장애인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가장 정확한 우리의 자아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며, 신기하고 놀랍게 지으신 걸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그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볼 때 우리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떠한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는 담대하게 앞을 향해 전진해 갈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올 한해 승리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