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수 석인(麗水 石人) 소개
여수에는 임진왜란 및 이충무공 관련 유적으로 국보 제304호인 진남관을 비롯해 통제이공수군대첩비(보물 제571호), 타루비(보물 제1288호), 충민사(사적 제381호), 여수 선소유적(사적 제392호), 여수 석인(도 유형문화재 제33호), 석천사, 오충사, 이충무공 어머니 사시던 곳, 영당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여수 석인(麗水 石人)은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 뜰안에 서 있는 것으로, 돌로 만든 사람의 모습이다.
1972년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2번지 진남관 경내 앞뜰 화단에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李舜臣)이 거북선 등의 조선(造船)이 한창일 때 왜적들의 공세가 심해지자
침공을 막아내기 위하여 석인을 만들어 세워 의인전술(擬人戰術)로써 승전을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석조물이다. 원래 7구의 석인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6구는 없어지고 현재 1구만 남아있다.
석인상(石人像)은 기단석 위에 화강암으로 조각하였는데, 관모(冠帽)를 쓰고 단정한 관복에 두 손을 공수(拱手)하고 있는 문반(文班)의 모습을 표현한 문인석(文人石)의 전형이다. 전체 높이 2m이며, 폭 43cm, 두께 33cm 머리높이 60㎝, 둘레 140㎝으로 시선은 유유히 적을 바라다 보는 듯하다.
2. 동아일보(1934년도 4월19일) 내용에 보면 중간에 여수석인에 대한 자료가 있어서 스크랩하였습니다.
水軍節度使의 統制營 設置
여수는 백제시대의 원촌현(금쌍봉면여천리인바 그 성지가 상존하다)을 위시하야 신라의 해읍현과 고려시대의 여수부를 거처 충정왕시에는 현령을 치하엿고 이태조시대에는 내례포(금시외봉산리국포) 만호를 치하엿다가 성종십오년 기해3월에 이르러는 순천에 도호부를 치하여 관할케하고 여수에는 일약 수군절도사영을 별로히 설치하엿섯다. 그후 일백이십구년을 경한 선조이십오년 신묘년에는 조선반도에 무서운 저기압이 돌기 시작하엿다. 그리하야 동년 이월에는 조선사상에 특기되어 잇는 遺芳不朽의 위인 이충무공이 절도사로 부임하엿으니 당년사십칠세이엇다.
이공은 부임직시 철쇄를 제조하야 사면해저에 횡철하여 적선이 잇을 때는 전복케 함과 동시에 만하정에서 석인칠구(금군청사내에 일구가 상존함)를 제작하야 화전을 돌리어 적군이 침입치 못하게 한 후 삼월부터는 전비공작에 착수하엿다.
당시의 함대로는 세계적 무비인 귀선수십소과 장병겸사조조 등을 농구정에서 제작하는 한편 운주헌에서 조총과 만노루에서 자모포(금 대포류)와 만노 매 삼족철을 제조하야 보핵대에서 습사하고 해운대(해운대라 서한 이공의 필적은 상금도 역력하야 340여년의 역사를 가르키고 잇다)에서 군사를 조련하고 고소대에서 점고한 후 관덕정에서 호口하였다. 그리고 척산(금 등대)에 올라 망료하며 장대(금 야구장)에 무과를 설하야 넓이 인재를 구함에 의용병이 운집할 뿐 아니라 흥국사로 부터 자운, 옥동 양대사사 인솔한 300 승병은 일당백의 정예부대이었다. 이와 같이 군비 충실에 노력한 지 1년을 경하여 익년 임진3월을 당하야 부산이 함락되는 동시에 평화의 감몽에 잠겨 잇든 삼천리 강산에는 본격적으로 전운이 무루녹게 되엇다.
이공은 정운, 송희립 등으로 선봉을 정한 후 건곤일척의 최초 출동이니 만큼 요패귀도하고 구선에 등하야 대장령패와 곡나팔로 280여 전선의 수만 군사를 지휘함과 아울러 "서해어용동 맹산초목자"란 장지의 시를 읊으며적군을 향하야 등정하엿다. 제일착으로 한산전양에서 대승첩이엇고, 동년 8월에는 수군절도영에 충청,전라, 경삼삼도의 통제영을 설치한 동시 이공으로 잉겸본직케함에 군세 더욱 대진하였다. 그후 검단포, 이의암, 무신항, 도독포(전부 여수만)에서 대승첨이엇으며 각처에서 "범군임적 불용명자 처참" 한다는 독전기를 날닐이든 이공도 천운이 그 뿐이엇음인지 선조32년 무수11월 18일 순천예교에서 평소에 신임하든 박대복이 전망 "이공 증시일사윤강식 공능보국은 상금수 말허응유와신(미상)" 하였으며 익일인 19일 미명 이락포(일명 남해관음포)에서 54세를 일기로 비환에 명중되엇으니 삼군의 비애는 새벽하늘의 저윽한 공기를 더욱 무거웁게 하엿다.
여수는 이러한 역사를 거쳐 동 35년에는 통제영을 우수영에 이치하고, 다맛 절도영만 존속하야 좌수영이라 칭하였다. 그 후 123년을 경하아 영조원년 을사에 도독부를 치하엿다가 익년에 폐하고 다시 168년을 경하여 이태왕32년 을미 7월에 절도영을 폐한 후 광무원년 임인에 여수로 개칭한 동시 군수를 치하고 대정3년 돌산군을 병합하야 금일에 지한 것이다. 그리고 거문도는 고종 을유에 영국의 동양함대가 조차주둔하엿든 바 그 후 3년에 청국수사제독정여창이 군함을 영솔하고와서 영국함대의 "하미루돈" 중장에게 철퇴를 요구한바, 누차상륙하야 주민과 회견할 때 절해고도임에 불구하고 문호재사가 많음을 찬양하야 거문도라 칭한 것이 그대로 금일에 지한 것이다.
3. 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전라좌수영)
전라도 지역에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자 전라좌도 수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1479년(성종 10) 정월에 內禮萬戶鎭에 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이 신설되었다. 전라좌수영의 위치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內禮浦로 기록되어 있으며, 『世宗實錄地理志』에는 내례만호는 며포(旀浦)에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아 며포와 내례만호진은 서로 다른 곳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며포는 대경도와 소경도가 위치한 菊洞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내례만호진은 여수시 군자동·동산동·관문동·고소동·중앙동의 남쪽에 인접한 해안, 즉 지금의 麗水舊港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4. 전라좌수영의 변천
1479년 3월 內禮浦를 철폐하여 수군절도영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를 두었다. 1485년 3월 城堡 축조를 시작하여 1491년에 완성하였다. 1498년 절도사 이량이 돌을 운반하여 장군도 왼쪽에 축대를 쌓았다. 1591년 2월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여 1592년 1월 성문 해자를 축조하고 3월 서문 밖 해자와 성곽을 축조하였으며 4월 품방 해자를 축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왜군과의 해전에서 여러 번이나 크게 승리한 1593년 7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거제 한산도에 진을 설치하였다. 1598년 절도사 이시언이 충청병마절도사에서 본직으로 옮겨 삼도를 통제할 제영사를 건설하였다. 1599년 이시언이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진해루지에 객사 진남관을 건립하였다.
1664년 절도사 이도빈이 진남관, 망해루, 결승당을 재건하고 화약고, 水軍器, 戶庫, 解懸倉을 새로 지었다. 1673년 절도사 원상이 보군창을 새로 짓고 1684년 절도사 한근이 완경루를 창건하였다. 1694년 절도사 정동망이 紙倉을 창건하였다. 1716년에 진남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1718년 절도사 이제면이 진남관을 중건하였다.
1722년 박세정이 도무창을 창건하고 1729년 절도사 우하영이 주사창을 창건하였다. 1741년에는 전반집물고, 병반집물고, 외창을 창건하였다. 1759년 절도사 이윤덕이 완경루를 재건하고 1767년 절도사 김종만이 보군창을 증창하였다. 1770년 절도사 김상옥이 각 창고의 병기고와 광양둔창, 보선고를 중수하였다.
1773년 절도사 김영수가 體城을 보축하고 여첩을 개척하였으며 曲城 6곳에 포루를 세우고 화기포 6좌를 설치하였다. 1774년에는 동문루를 철문으로 건립하고 장대를 겸하는 동문좌포루, 서문우포루, 수성중군청, 의승청, 수첩군관청, 수성고를 창건하였다. 1895년 전라좌수영을 철폐하였다.
5. 경국대전에 나타난 전라좌수영의 편제(참고문헌: 전라좌수영의 역사와 문화, p.17, 1993, 여수시)
직책 | 직명 | 위치 | 현재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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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절도사 수군우후 | 전라좌수사 우후 | 전라좌수영(순천내례포) | 여수시 |
수군첨절제사 | 사도진관 사도첨사 | 흥양 | 고흥군 영남면 금사리 |
수군만호 | 회령포만호 | 장흥 | 장흥구 회진면 회진리 |
달량만호 | 영암 |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
여도만호 | 흥양 | 고흥군 점암면 여호리 |
마도만호 | 강진 | 강진군 대구면 마량리 |
록도만호 | 흥양 |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
발포만호 | 흥양 | 고흥군 도화면 내발리 |
돌산포만호 | 순천 |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
6. 여수 석인상을 가만히 들여다 보노라면 "若無湖南 是無國家"의 이순신의 사헌부 현덕승에게 보낸 보배의 글이 생각 납니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에서 憂國衷情의 영혼을 담아 침략왜군을 물리치며, 국가의 안위와 평안한 남해바다를 지키고 만들기 위한 이순신의 혼이 여수 석인상에 베어 있는 듯하며 지금도 여수석인상을 통하여 지나온 역사 속에서 지켜보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에 나는 이순신의 정신과 얼을 기리며, 석공의 나라 위한 장인정신를 기리고, 그 장소에서 발을 담그며 애국하는 마음을 간절히 가져 봅니다. 이러한 연유로 닉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카페 여러분 오늘도 행복한 날 되세요.
닉 사용자 여수석인 정 경 삼 드림.
첫댓글 열심히 숙제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수석인이 여수를 지켰듯이 이배사 여수지부를 든든히 지켜주시리라 믿겠습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구국의 상징이기도 한 여수 석인은 유수의 4백20여년 역사가 지난 지금도 진남관 뜰에서
우국충절의 모습으로 지키고 있는 것 처럼 저역시도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노고가 크시었사옵니다!
곧 우수회원으로의 승격이 있을 것입니다.
미리 감축드리옵니다!
감사합니다.
이배사를 통해서 많은 지식이 쌓이도록 배우겠습니다.
처음부터 "여수석인"이란 닉이 흥미로왔습니다. 불과 1년전 여수지역 답사시 찾았던 진남관 경내에서 무심코 본
석인이란걸 이제야 알았네요.
연구 자료처럼, 여수지부장 비격진천뢰님의 말씀처럼 여수의 충절을 지키는 지킴이가 될실것 같습니다.
귀한 자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수백년의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되어 있는 여수석인이 있는 것 처럼 이배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많은 유물과 유적이 있을 것입니다. 귀중한 유산들이 후 대 역사에서도 계승될 수 있도록 유지관리하는게 현재 우리의 의무라고 여겨집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여수석인님 ~~환영합니다. 짝짝짝~~여수지부 화이팅하시게요~~~
@천자총통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닉 연구를 며칠 전에 하셨는데 제가 어디 돌아다니느라 이제야 보게되었습니다. 여수 석인에 대해서 잘 소개해 주셨습니다. 숙제를 하신 188번째 회원으로서 우수회원에 등업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수회원에 등업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일반적인 카페가 아닌 스스로가 주인이되어 공부하며 현장에서 답을 찾는 이배사에서 카페지기님의 노고가 많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역사의 현장과 토론의 장 이배사 카페에서 자주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수회원으로 등업되심을 감축드립니다
환영해 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