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산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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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용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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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隆熙) 2년 봄 2월이었다.
담산(澹山) 안공(安公) 규홍(圭洪)이 보성(寶城) 동소산(桐巢山) 아래에 의장(義將)의 깃대를 세웠다.
이 때 8도 안 의사(義士)들이 계속하여 패망하게 되자 공은 항상 격분하여 죽고자 하기만 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피를 뿌려 맹서하고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의사는 염재보(廉在輔)로 부장(副將)을 삼고, 이관회(李貫會)로 선봉을 삼고, 손덕호(孫德浩)·정기찬(鄭基贊)・송경회(宋敬會)로 좌우익(左右翼)을 삼고, 안택환(安宅煥)·소휘천(蘇輝千)으로 한후장(捍後將)을 삼고, 오주일(吳周一)·나창운(羅昌運)으로 참모관(參謀官)을 삼고, 임정현(任淨鉉)으로 서기(書記)를 삼고, 박제현(朴濟鉉)으로 군량을 맡아서 내응하게 하였다.
이 때 적군이 조성(鳥城) 근처에서 왕래한다는 소문을 듣고 장차 바른 길로 가서 섬멸시키려 했는데 마침 파청(巴靑)에서 적군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사는 영호(永戶)·평정(平井) 2괴수를 죽이고 나서 대원산(大院山) 속에서 쉬고 있었다.
여기에 적군이 따라와서 포위하므로 분노하여 이를 격퇴시키고 또 동복운월치(同福雲月峙)에서도 적을 깨친 다음, 서봉산(棲鳳山) 속에서 군사들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때 적군에게 습격을 당해서 크게 함몰되었으나, 다시 사졸들을 불러 모아서 진산(眞山)의 큰 승리를 이루었었다.
나창운(羅昌運)은 적군에게 포로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장경선(張景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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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를 대신하게 했는데 적군이 이르기를, “안모(安某)는 비장(飛將)이라”고 했다.
이에 의병(義兵)의 소문이 크게 떨치게 되자 황해(黃海)·평안(平安) 2도에서도 역시 공이 한 번 와 주기를 손들어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왜의 임금이 걱정하여 장차 크게 동병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왔다.
이어 의사는 원봉(圓峰)에 주둔해 있는 마병대(馬兵隊)를 격파시키고 그 장소를 불살라 버리니, 그곳에 있던 적장 도변정추(渡邊政秋)는 도망해 버렸다.
또 순천(順川)에 있는 적병을 병티(並峙) 고개로 유인하다가 격파했는데, 이 싸움에 이관회(李貫會)와 안택환(安宅煥)이 죽었으므로 임창모(林昌模)로 그 자리를 대신시켰다.
또 임정현(任淨鉉)도 적에게 잡혀 굴하지 않고 죽으니 송기휴(宋基休)로 대신시켰다.
이에 배를 타고 고흥(高興)으로 들어가서 고을 사람들과 함께 합세하여 패배시키고, 또 그날 밤에 마륜(馬輪)에서도 접전을 했다. 이 싸움에 불리하여 송기휴(宋基休)가 죽었으나, 이 뒤에도 장흥백사정(長興白沙亭)에서 적을 패멸시켰다.
기유(己酉) 정월에 국가에서 밀칙(密勅)을 내려 빨리 올라오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에 공은 감격한 마음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이것을 보고 임창모(林昌模)가 말하기를,
“이것은 저 적군들의 절제로 인연된 것이 아니겠읍니까?”
했다.
공은 이 말을 듣고 대성통곡했으며, 사졸들도 이 말을 듣고 모두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적군의 척후대(斥侯隊)가 복내시(福內市)에 잠입했다. 이에 정예 부대를 보내서 이를 격멸시키니 온 시장에 피가 흘러 가득 찼었다. 이것은 유도삼(劉道三)의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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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적을 박곡(亳谷)에서 패멸시키고, 그 장수 탄시(灘市)를 쏘아 죽였다. 이 외에도 크고 적고 간에 승리한 것을 이루 기록할 수 없다.
왜적의 임금은 더욱 군사를 동원하여 그 대위(大尉)인 부석(富石)에게 위임시키고 광고하기를, ‘안대장(安大將)을 토벌한다’하여 호남(湖南) 일대를 포위하고 그물을 쳤다.
이에 공은 일을 해낼 수 없음을 짐작하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계획을 잘해서 각각 뒷날의 일을 도모하라.”
하고 드디어 군사를 해산시켰다.
임창모(林昌模)는 흑석산(黑石山) 속에 들어가서 다시 일을 계획하려고 하다가 적군에게 포박되어 부자가 한꺼번에 포탄을 맞고 죽었으며, 소휘천(蘇輝千)도 역시 죽었다.
공은 그 어머님께 고하고 장차 멀리 떠나 버리려 했으나, 적군에게 아첨하는 자의 고발을 당하여 체포당했으니, 이때는 기유(己酉) 9월 초8일이었다.
염재보(廉在輔)·손덕호(孫德浩)·정기찬(鄭基贊) 등과 함께 광주(光州)에 구금되었다가 다시 대구(大邱)로 옮겨 갔었다. 그러나 의기가 양양하고 꾸짖는 말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그는 말과기를,
“당당한 예의지방(禮義之邦)으로서 너의 돼지 같은 놈들의 해독을 입고서 어찌 앉아서 그대로 보겠느냐? 내가 전날에 한 일은 우리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을 통분히 여긴 때문이다. 장차 우리 나라 안에서 의사들을 주워 모아서 더러운 티끌을 씻으려고 했었는데, 오늘날 불행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죽는다 할지라도 하늘이 어찌 낙심하겠느냐? 나의 눈은 비록 땅 밑에 가서라도 감지 않고 10년 이내에 너희들이 남아 있지 않고 없어지는 것을 보겠다.”
하였다.
저들이 말하기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너의 임금의 칙서(勅書)이니 너의 나라는 이미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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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공은 이 말을 듣고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있다가 공은 큰 소리로 말하기를,
“너희는 빨리 나를 죽일 뿐이다. 나는 잠시라도 살아 있지 않겠다.”
하고 앉아 있던 의자를 들어 던지니, 저놈은 얼굴에 상처를 입고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필경은 공을 교수형에 처했으니 이때는 신해(辛亥) 5월 5일이었다.
염재보(廉在輔) 등도 이 때 함께 죽었는데 형을 당하기 전에 같이 구금된 자가 자살하고자 했으나 공은 이를 정지시키고 말하기를,
“그대들은 겁이 나느냐? 장차 우리 의리를 크게 말하고 나서 조용하게 죽는 것이 옳다.”
고 했다.
사형을 집행할 임시에 저놈들은 큰 상에 성찬을 갖추고 대접했다. 그러나 공은 상을 날리라 하고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의 음식을 먹겠느냐? 우리 나라 식품으로 고쳐 오라.”
하고 손을 걷어들고 실컷 먹으니 보는 자들이 모두 장하다고 했다.
공의 키는 7척도 못 되었고 성음은 적으면서도 확실했기 때문에 비유하기를 용맹한 표범이라고 했다.
젊었을 때로부터 고용살이로 생활을 했는데, 가는 곳마다 친구들과 놀 때면 진치는 법을 하면서 놀았고, 그 용감하고 날래고 담략이 많기로는 능히 당할 사람이 없었다.
공은 매양 밭두렁 위에서 하늘을 쳐다보고 탄식하기를,
“나라가 원수놈들에게 망하고 말 것인가?”
했다.
남들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자네가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면서 무슨 그런 걱정을 하는가?”
하니 공은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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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고 금수와 어육이 된다면 우리 무리도 또한 살아날 수가 없을 것이며, 또 살아난다고 할지라도 나로서는 차마 이것을 볼 수 없노라.”
하고 드디어 여러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저 도둑놈들과 함께 살지 않기로 맹서하는 것이니 그대들도 나에게 따를 자가 있는가?”
이 말을 듣고 겨우 수10 명이 그의 뒤를 따르려 했다.
이 무렵, 관동(關東) 사람 강성인(姜性仁)이란 자가 사람 여럿을 데리고 왔는데, 그 형세가 쓸만하게 보이므로 공은 이들을 부하에 두어 소속시켰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성인(性仁)은 탐욕만 갖고 의리는 모르기 때문에 공은 그에게 권면하기를,
“우리들이 오늘날 거사한 것이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했으나, 성인(性仁)은 종시 이를 고치지 않았다.
이에 공은 정의를 들고 그를 베이니 여러 사람들은 모두 공에게 복종했다.
이리하여 여러 사람들은 공을 추대하여 대장을 삼으니, 이 때 오주일(吳周一)도 서울로부터 소년 수10 명을 거느리고 보성(寶城)까지 와서 공의 설계를 보고 소속이 되었다.
공은 여러 사람들에게 맹서하고 말하기를,
“왜적은 우리 나라에 대해서 대대로 원수이다. 우리 무리가 그놈들의 소혈을 다 쓸어 헤치고 나라의 원수는 완전히 설치하지 못할망정, 한 놈만 죽이고 죽는 대도 또한 족히 우리의 의리는 펴는 셈이다. 원수놈들의 노예가 되어 구차하게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했다.
공은 또 말하기를,
“오늘날 의병이 옛날과 다른 것은 시대가 그렇게 되었다. 모든 호령이 조정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일을 보고할 곳이 없으나, 저 안으로 흉한 무리와 밖으로 원수 도둑들이 호랑이도 되고 도깨비도 되어 우리들로 하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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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붙일 곳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당한 깃발과 정정한 행진으로 나갈 수는 없으나, 백 가지 기묘한 술책으로 한 놈이라도 죽여야 한다는 마음을 갖아야 할 것이다."
하고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분개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니, 온 군사들이 다 감동되었다.
이에 공은 항상 바위가 높고 험한 곳을 점거하고 다니기 때문에 오고 가는 행적을 남들은 측량하지 못했었다.
공은 재물과 여색을 멀리하고, 남의 물건을 뺏고 침략하는 것을 엄금했기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이 도시락밥과 병 속에 장을 넣어 가지고 환영했다.
진산(眞山)에서 싸울 때도 온 마을 남녀들이 돌을 모으고 작대기를 가지고 합력해서 도왔기 때문에 이 싸움에서 이정표(李貞杓) 내외는 포탄을 맞고 죽었으며, 서봉산(棲鳳山)에서 싸울 때에도 다시 여망이 없게 되었건만 군사들이 다시 모여 들었으니, 남들로 하여금 죽기를 잊어버리고 싸워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하지 못했다면 어찌 능히 할 수가 있겠는가?
아아! 슬프다. 그 뜻도 강개했으며 그 마음도 괴로왔으며 그 절의도 씩씩하도다.
공이 만일 문장도 잘 했더라면 그 호령과 시설하는 것이 더욱 볼만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명색으로는 글을 읽는다, 의리를 강론한다 하면서도 아무것도 이루어 놓는 것이 없이 구석방 안에서 늙어 죽는 자가 공을 본다면 과연 어떠했겠는가?
오늘날 도둑놈들이 이 천지 사이에서 편케 살 수 없게 된 것은 이 누구의 공이라 하겠는가?
공이 절명하던 날, 그 혼령의 기운이 어느 곳에고 가지 않은 곳이 없어서 온 8도 안 모든 의사들이 혼령과 함께 구름으로 둔을 치고 바람으로 몰아가는 열렬한 기운이 위로 하늘에 통했기 때문에, 상제(上帝)께서 진노하고 저 서양 만리 밖에 새 무기를 만들게 하여 천둥치듯이 모기와 날파리 떼를 일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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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도가 어찌 소소(昭昭)하게 밝다고 하지 않겠는가? 모든 공의 혼령도 저 명명(冥冥)한 속에서 뛰고 춤출 것이로다.
세상에 죽은 자가 또한 많지만 이것을 감히 의병(義兵)이라는 말도 하지 못한 지가 40년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성명조차 잃어 버려서 다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애석한 일이다.
본군(本郡) 여러 선비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날에는 상 주고 자랑해 주는 국전(國典)을 받을 곳이 없으니, 저 비석에나 새겨서 우리들이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나마 보여 주는 것이 옳다.”
하고 이에 정관섭(丁涫燮)·박규석(朴奎錫)을 내게 보내서 말하기를,
“장차 동강(東江) 김영공(金令公)의 문하에 가서 비문을 받아야 하겠으니 자네가 그 사실을 기록하라.”
하므로 이에 그 전말을 위와 같이 쓰는 것이다.
정해(丁亥) 12월 초1일에 연창(延昌) 안규용(安圭容) 지음.
부군(府君)의 휘는 규홍(圭洪), 자는 제원(濟元), 성은 안씨(安氏),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우산선생(牛山先生) 문강공(文康公), 휘방준(邦俊)의 10대손이다.
증조(曾祖)의 휘는 호(浩)니 홍릉참봉(弘陵叅奉)인데, 뜻과 기상이 호매(豪邁)하고 뛰어나서 강호(江湖)에 시(詩)를 읊고 강절(康節)의 학문을 흠모했다. 그래서 호를 서운정(棲雲亭)이라 했었다.
조부의 휘는 방수(方秀)인데 숨은 덕이 있었고, 처사(處士) 휘달환(達煥)은 곧 공의 아버지다.
어머니 선씨(宣馥)는 인복(寅馥)의 따님인데 전모(前母)이고, 정씨(鄭氏)는 부군(府君)의 소생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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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府君)은 고종(高宗) 기묘(己卯) 4월 10일에 택촌(宅村) 자택에서 출생했다.
타고난 성품이 강하고 정직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로부터 너무 강직하다고 남에게 미움을 받았다. 또 조금 자라서는 호방하여 사물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고 의탁할 곳이 없어서 고용살이를 해서 어머니를 봉양해서 효자라는 칭찬을 들었다.
담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매양 나무꾼을 모아 놓고 전쟁하는 방법을 연습하니, 식자(識者)들이 이르기를 이는 장수가 될 재목이라 했다.
어느 날 나무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마침 어느 관리 하나가 세금을 받으러 와서 방자한 행동으로 마을 사람을 때리는 것을 목도했다.
이에 부군(府君)은 분노하여 말하기를,
“세금 받는 것이 너의 직책인데 마을 사람을 때리다니 이게 어찌된 일이냐? 너는 이 마을에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하고 즉시 마을 장정들을 시켜 그 관리를 결박해 놓고 꾸짖기를 마치 옛날 장장군(張將軍)이 독우(督郵) 때리 듯하니, 보는 자들이 모두 벌떨 떨고 저 놈도 역시 감복했다.
항상 밤이 깊은 때면 긴 한숨 짧은 탄식으로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것같이 했으나 남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을사(乙已)에 나라에서 왜적의 위협으로 소위 5조약(五條約)이란 것이 이루어졌는데, 사실은 역적 신하들이 왜적을 끌어들여서 장차 우리 나라를 통치하게 만든 것이었다.
또 이와 반면에 우리는 나라도 없고 임금도 없게 된 것이다.
이에 분노한 마음으로 사방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자 부군(府君)은 눈물을 뿌리고 말하기를,
“차라리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위해서 죽을지언정 오랑캐가 되고 짐승이 되어서 살지는 않겠다.”
하고 즉시 동지 몇 사람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맹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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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은 옛날부터 우리 나라의 원수이며 임진(壬辰)년 이후부터는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리 나라를 삼켜 버리고 우리 임금을 욕뵈고 우리 백성을 노예로 만들게 되었다. 우리들은 이 선왕(先王)의 신민이요, 선조의 자손으로서 이 광경을 차마 보고만 있겠느냐? 한 도둑놈만 죽이더라도 실로 이것이 나의 일이다.”
하니 모두들 이 말에 순종했다.
이에 무신(戊申) 2월에 이르러 비로소 의병(義兵)이라는 깃발을 들고 염재보(廉在輔)로 부장(副將)을 삼고, 이관회(李貫會)로 선봉장(先鋒將)을 삼고, 임병국(任秉國)·손덕호(孫德浩)·정기찬(鄭基贊)·장재모(張載瑁)·송경회(宋敬會)로 좌우익(左右翼)을 삼고, 안택환(安宅煥)·소휘천(蘇輝千)으로 후군(後軍)을 삼고, 오주일(吳周一)·나창운(羅昌運)으로 참모(叅謀)를 삼고, 임정현(任淨鉉)으로 서기(書記)를 삼고, 박제현(朴濟鉉)으로 운량관(運粮官)을 삼았다.
이 때 오주일(吳周一)은 서울로부터 왔는데 그 역시 장사였다. 그는 군사 수10명을 거느리고 말하기를,
“안공(安公)은 대장재목이니 우리들에게 맹주(盟主)가 생겼도다.”
하고 함께 협력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왜적과 파청(巴靑)에서 크게 싸우고 그들의 2장수 영호(永戶)와 평정(坪井)을 베이고 그들의 병기까지 빼앗으니, 군성(軍聲)이 비로소 떨치고 사방이 호응하게 되었다.
이 때 강성인(姜性仁)이란 자도 군사를 거느리고 왔기로 재능이 있다 하고 정사를 맡겼는데 재물을 탐하고 포학하여 백성들을 착취했다.
부군(府君)께서는 이를 의리로 효유하기를,
“지금 우리들의 할 일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것인데, 일도 하기 전에 포악한 짓만 한다면 무슨 꼴이 되겠느냐?”
했으나 그는 말을 듣지 않으므로 그의 목을 베어서 여러 군사를 경계하니 모두들 여기에 복종했다.
동복운월치(同福雲月峙)에서 의병(疑兵)을 매복하여 크게 승리했다. 이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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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 도변(渡邊)이 몹시 완비하게 동복(同福)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부군(府君)께서는 낮이면 잠뱅이 입고 가래를 메고 다니면서 그들의 내용을 탐지했다가, 밤이면 군대를 정비하여 적을 습격하자 도변(渡邊)은 도주해 버렸다.
기유(己酉)에는 불행히도 서봉(瑞峰)에서 패진(敗陣)했다.
이 해 2월에 국가에서 밀칙(密勅)을 내려 빨리 올라오라는 명령이 있었다.
부군(府君)께서는 감격하고 황송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임창모(林昌模)가 말하기를,
“이것은 저 왜적의 절제로 연유한 것이 아니겠는가?”
했다.
부군께서는 이 말을 듣고 대성통곡하니 사졸(士卒)들도 모두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7월에 석호산(石虎山)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킬 때 심남일(沈南一)과 안재찬(安載瓚)도 역시 왔었다. 그러나 패진한 나머지에서 군대도 아직 정비되지 못했다.
이 때 부군께서는 자기 몸을 낮추고 말도 낮추어 죽은 자를 조상하고 살아있는 자를 위로하니, 부로(父老)들이 그 자제들을 걱정하지 앉고 더욱 분발해서 도시락밥을 싸고 병에 간장을 담아 가지고 서로 환영하여 말하기를,
“안 장군이 빨리 다시 나와야 한다.”
했다.
8월에 진산(眞山)에 주둔하고 있더니 적군이 밤을 타서 철통같이 포위했다.
그러나 부군께서 크게 호령하고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먼저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손수 천보총(千步銃)에 불을 붙여 들고 적군의 선봉장의 예기를 꺾으니, 적군들은 포위망을 걷고 달아나면서 말하기를,
“안모(安某)는 참으로 비장(飛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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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이 때에 목 베이고 사로잡은 적이 제일 많았다. 따라서 더욱 군기를 정비해서 오는 자는 대항하고 가는 자는 추격하여 혹 성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혹 덮어 놓고 적을 치기도 하여 오고 가는 것이 비상하고 신기한 계획을 쓰기도 했다.
이에 순천(順川)까지 추격하여 장흥(長興)에서 적을 패진시키고, 대원(大原)에서도 승리하고, 고흥(高興)에서도 승리하고, 복내(福內)·박곡(亳谷)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것은 마치 귀신이 도운 것 같아서 의기가 등등했다.
왜적의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걱정하여 연대장(聯隊長) 부석(富石)으로 하여금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공을 습격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호남(湖南)의 모든 고을은 병참(兵站) 아닌 곳이 없이 밤·낮으로 경찰해서, 밥 먹는 자에게서도 약탈해 가고 잠자는 자도 놀라게 하며, 의병(義兵)으로 나간 부모 친척까지 모두 어육(魚肉)을 만들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옛날 장수였던 나창운(羅昌運)은 적에게 붙잡혔어도 굴하지 않고 죽었으며, 이관회(李貫會)·안택환(安宅煥)도 죽었으며, 임정현(任淨鉉) 또한 잡혔어도 굴하지 않고 죽었다. 또 송기휴(宋基休)·임창모(林昌模)·소휘천(蘇輝千) 등도 모두 죽었다.
이에 부군께서는 스스로 이미 일은 이루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본래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가를 위하고 민생을 위하려던 것인데, 하늘의 도가 일정하지 못하여 적군의 형세가 이같이 강성해졌으니, 적은 숫자로 많은 숫자를 당해낼 수 없는 것은 또한 이치로서도 그러한 것이다. 밖으로는 날파리만큼도 후원할 힘이 없는데다가 안으로는 범이 잡아먹으려는 위급한 경지에 놓이게 되어 공연히 선량한 백성들에게 해독만 끼치게 되었으니 나의 죄가 참으로 크다 하겠다. 그대들은 각자 스스로가 잘 계획해서 다시 뒷날 일을 도모하라.”
하고 드디어 의병대장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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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공은 장차 어머님께도 이 사실을 고하고 멀리 피신했다가 다시 일을 주선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 때 마침 적군에게 아첨하는 자가 저놈들에게 고발해서 필경 적에게 잡혔으니 때는 기유(己酉) 9월 초8일이었다.
이 때 부군께서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했다.
이리하여 광주(光州)로부터 대구(大邱)로 옮겨 구금하니 이제 일은 다시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담판하는 자리에서 공은 큰 소리로 꾸짖기를,
“우리의 당당한 정기(正氣)로 개돼지 같은 너희들은 다 섬멸시키고 우리의 옛 자취를 회복하려 했더니, 이제 스스로 한 되는 것은 내가 계획을 잘 못 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은즉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오직 죽고 말 뿐이다.”
했다.
이 말을 듣고 저들은 말하기를,
“너희 나라 임금도 이미 머리를 깎고 복색도 변했으며, 법령까지도 모두 개정되었는데, 너희들이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했다.
부군은 말하기를,
“슬픈 일이다. 사람이 되자면 오직 인의로 할 뿐이다. 임금이니 신하니 아비니 자식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인의로 정해져 있는 것인데 너희가 어찌 안단 말이냐? 슬픈 일이다. 우리 당당한 인의지방(仁義之邦)으로서 오랑캐와 금수에게 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하고 의자를 들어 적들에게 던지면서 말하기를,
“원수놈아! 빨리 나를 죽여라.”
했다.
이에 적은 상처를 입고 달아나면서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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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해를 넘도록 구금되어 있으니 기골도 쇠약해지고 얼굴도 파리해졌다.
어느 날 적들은 좋은 음식을 차려 놓고 먹으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군께서는 상을 물려 버리고 말하기를,
“나는 너희 나라 음식은 먹지 않으니 우리 나라 음식으로 만들어 오라.”
했다.
이에 적들은 우리 음식으로 바꾸어다가 드리자 부군께서는 손을 걷고 이것저것 먹으면서 이야기와 웃음이 보통 때와 같으니 보는 자들 모두 탄복했다.
부군께서는 마침내 교수형(絞首刑)으로 돌아가셨으니 이 때는 신해(辛亥) 5월 5일이었다.
형을 당하던 전날 밤에 같은 죄수가 자살하려고 하자 부군께서는 소리를 가다듬고 말하기를,
“저놈들이 필경 우리를 죽이고 말 터이니 정대하게 죽는 것이 옳으리라.”
했다.
염재보(廉在輔) 등도 역시 굴복하지 않고 죽으니 성 안에 가득찬 백성들까지 모두 장하다고 애석하게 여겼다.
아아! 슬프다. 부군께서는 일찌기 글도 읽지 않았건만 뱃속에 가득찬 것이 모두 충성과 효도뿐이었다. 그런 때문에 오늘날 그 졸한 것도 그 지성과 간절한 마음으로 어진 것을 이루고 의리를 취하자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있는 어진 군자들은 마땅히 권장하는 뜻으로 공의 이 사실을 천양하는데 한 말씀을 아끼지 않을 것으로 안다.
부군께서 처음에는 호(號)도 없었는데 오늘에 와서 여러 선비들이 모두 담산(澹山)이 라고 부르고 있다.
슬프다! 공이 순의(殉義)하는 날에는 시국의 금령이 가혹했기 때문에 시체를 모셔 오지 못하고 대구(大邱) 성 밖이 거적대기로 장사라고 지냈다가, 그 뒤 계해(癸亥)에 이르러 비로소 유해(遺骸)를 파다가 보성(寶城) 고을 조성면(鳥城面) 은곡리(隱谷里) 계좌(癸坐)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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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군의 행적은 대개 이러하니 글을 쓰는 군자(君子)들은 봐 주시기를 공손한 마음으로 비는 바이다.
계해(癸亥) 섣달에 아들 종련(鍾連)은 삼가 지음.
이 가장(家狀) 1편은 종련(鍾連)같이 학식도 없고 문견도 없는 자로서 감히 보고 들은 말을 가지고 기록하는 것이니, 사실도 소루함이 많고 기록도 자세하지 못하며, 말솜씨도 순서가 몹시 모호하게 되었다.
황송하고 죄송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정양공(靜養公)이 지은 바 전문(傳文)을 참고해 보면 조금 자세할까 생각된다. 엎드려 원하건대 이 글을 보시는 군자들께서는 모두 용서해 주시기를 비는 바이다.
사행략(事行略)
대개 임금이 욕보고 나라가 위태할 때는 녹을 먹는 세신(世臣)들과 글을 읽고 이치에 통달한 선비들은 마땅히 물고기를 버리고 어진 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저 초야에 묻혀 있는 필부(匹夫)거나 농사를 짓는 어리석은 백성으로서는 능히 의리를 떨치고 용기를 내어 나라 일에 과감하게 죽는 사람이 세상에 흔히 있으랴?
그렇다면 담산안공(澹山安公)은 바로 여기에 꼽히는 사람이라 하겠다.
아아! 슬프다. 어찌 차마 그 사실을 말할 수 있겠는가?
지나간 무신(戊申)년 무렵에 섬 오랑캐가 제 멋대로 우리 나라를 어지럽혀 우리 임금을 위협하고 우리 백성을 더 할 수 없이 위협했었다.
이 때 안공(安公)은 학식도 없고 문견도 없는 자로서, 나무 지던 지게와 밭 갈던 농구를 걷어치우고 궐기하여 동지 수10명을 모집한 다음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이 살 수 없다고 죽기로 맹서했다.
이리하여 부하를 이끌고 전쟁으로 나섰다. 우선 파청(巴靑) 고을과 이현(梨峴) 고을에서부터 시작하여 적군 중의 거두 2사람을 마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물건 꺼내듯 쉽게 죽였다.
이로부터 군세가 점점 떨치기 시작하자 이영삼(李泳三)·임정현(任淨鉉)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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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도 여기에 따라 죽기로 협력하려 했다.
이에 이들로 선봉과 후군(後軍)을 삼고 군사를 몰아 진산(眞山)까지 나가서 말 탄 적군 수10명을 만나 종일토록 접전했다.
이 싸움에 공은 지붕과 담을 뛰어 넘으면서 사자 같은 목소리와 범 같은 고함을 치면서 좌충우돌하여 적을 거의 다 잡아죽이니, 나머지 두어 사람이 머리를 흔들고 혀를 빼물면서 수군거리기를,
“안대장(安大將)은 과연 비장(飛將)이로군!”
하고 항복하려 하다가 틈을 타서 도망해 갔다.
그 뒤에 병치(幷峙)에 이르러 선봉장 이영삼(李泳三)은 포탄에 맞아 죽고, 후군 임정현(任淨鉉)은 적군에게 붙잡혀서 시천병참(詩川兵站)에 구금되었는데, 적의 대위(大尉) 부석(富石)은 그를 위협하고 꾀어서 안(安) 대장(大將)의 지략과 군사의 내용 등을 물었다.
이에 임정현(任淨鉉)은 몇 마디 꾸짖었으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입을 다물고 그대로 형을 받았다.
아아! 슬프고 애석한 일이다. 하늘이 이 땅을 돌봐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인가?
이로부터 공은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며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면서도 역시 적을 죽이고 포로로 잡은 것이 많았다. 그러나 적의 형세가 더욱 강성하게 되자 적은 숫자로 저 많은 적을 대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에 공은 산골 마을에 자취를 감추고 뒷날 일을 계획했다. 그러나 적의 무리는 사방으로 그물을 펴고 어진 백성들을 학살하였고, 공은 시기하는 자의 모해를 받아 마침내 대구(大邱)로 구속되어 갔다.
감옥에 있는 동안 공은 입에서 적들을 꾸짖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다가 적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아아! 공의 한 일은 국가의 녹을 먹고 글 읽은 자로서도 능히 하지 못할 일이라 하겠으니 슬프고도 장한 일이다.
가령 온 나라 사람이 모두 담산(澹山)만 같았다면 경술(庚戌) 7월의 국가의 수치가 싹트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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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저 임금을 협박하고 나라를 팔아먹은 무리들이 땅 속에 가서도 부끄럽다고 하지 않겠는가? 또한 안공(安公)에게 죄 지은 자들도 모두 통탄할 일이로다.
이제 그 형의 아들 종련(鍾連)도 역시 효도하고 우애한 사람이다. 그 당시 나이가 겨우 20여 세 밖에 되지 않았는데, 천리 길에 감발을 하고 대구(大邱)에서 보성(寶城)까지 영구(靈柩)를 모셔다가 산을 사 가지고 장사지낸 다음 그의 제사를 주장해 내려왔다.
이제는 섬 오랑캐가 쓸어 없어지게 되자 그 묘소에 비석을 세우니, 이 일에 협조한선비들이 무려 수천 명이나 되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모두 타고난 양심이 있는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도 역시 시종 이 일을 돌봤기 때문에 내가 들은 것을 대강 서술해서 담산의 혼령을 위로하고, 따라서 종련(鍾連)의 계술(繼述)에 대한 정성도 느끼게 되는 바이다.
진실로 백 대가 지난 뒤에 붓을 잡는 군자가 이것을 채택할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성인(聖人)의 집 종이 다시 땅 속에서 일어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갑자(甲子) 맹춘(孟春)에 관산(冠山) 임석모(任奭模) 지음.
전(傳)
안규홍(安圭洪)의 자는 제원(濟元)이니 죽성군(竹城君) 원형(元衡)의 후예이다. 보성(寶城)에서 대대로 살아 문학으로 저명한 집안이다.
중시조 문강(文康) 선생(先生)은 도학(道學)과 절의로 세상에 유종(儒宗)이 되었고, 증조 호(浩)는 강직한 의지와 호방한 기개로 강호(江湖)에서 글을 읊고 있었다. 그는 강절(康節)의 학문을 흠모하여 능참봉(陵叅奉)의 직함을 사양했고, ≪경세서(經世書)≫·≪대학귀극(大學歸極)≫·≪서운헌시서(棲雲軒詩序)≫ 등 저술이 있었다.
아버지는 달환(達煥)인데 정씨(鄭氏)에게 장가들어 규홍(圭洪)을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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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어렸을 때로부터 개결하고 강직하여 너무 곧다고 해서 시골에서 미움을 받았다.
돈을 보기를 흙덩이같이 하고 의리에 나가기는 목마른 것같이 했으니 이것은 그의 천성이 그러했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고용살이를 해서 그 어머니를 봉양했건만 조금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천만 명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동료들도 항상 그의 뛰어난 기품에 탄복했었다.
을사(乙巳) 10월에 변고를 듣고 항상 분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으며, 혹은 깊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천정을 쳐다보고 앉았기 여러 번이었다.
곁에서 같이 자던 사람이 혹 그를 위로하여 그러지 말고 세상이 되는 대로 살자고 했다. 그럴 때면 공은 멍하게 앉아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한숨만 길게 쉴 뿐이었다.
정미(丁未)년에 와서 양회일(梁會一)이 맨 먼저 일을 해 보려다가 아무 결과가 없자 그는 이를 통분히 여기어 거사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에 동지들에게로 돌아다니면서 말하기를,
“지금 시국은 날로 글러가고 나라도 반드시 없어질 것이니, 구차하게 살아 봐도 더럽기만 하고 억지로 목숨을 유지한 대도 도리어 욕만 당할 뿐이니, 차라리 죽을 자리에 죽는다면 이것은 영구히 살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제 담 밖이나 담 안 할것 없이 세력을 저 사람들이 잡고 있으니, 만일 일도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탄로된다면 이것은 한갖 웃음거리만 되고 말 것이다.”
하고 사람을 시켜 비밀히 병기도 찾아 들이고 유지(有志)들에게 널리 일을 의논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이듬해 무신(戊申)년 2월에 드디어 크게 거사하여 약간 명의 사람을 모았다.
그러나 선비란 자들은 그를 무식하고 물망(物望)이 없다 하여 함께 일을 계획하기를 부끄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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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에게 따르는 자는 구름이 모이고 가마귀 떼가 몰려들 듯했지만 그들이 가진 물건은 모두 호미·괭이·나무 작대기 등속에 불과하니, 이는 이른바 굶은 범에게 먹이를 주는 것 밖에 되지 못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참으로 위태로운 일이었다.
이 때 서울에 있는 오주일(吳周一)이란 자가 손·오(孫吳)의 병법을 조금 통했기 때문에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앉겠다는 뜻을 품고 소년 수10명을 거느리고 보성(寶城)에 왔다가 공을 만나보고 나서 말하기를,
“일을 하자면 반드시 맹주(盟主)가 있어야 한다.”
하고 공을 따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전후에 일을 계획한 것은 그의 지도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얼마 뒤에 본군(本郡) 파청(巴靑)에서 왜병을 만나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짧은 칼을 가진 군사와 긴 총을 가진 군사가 양쪽 산등으로 나뉘어서 좌우로 공격하여 적의 괴수 영호(永戶)·평정(坪井) 2놈을 베어 죽였으니, 이들은 소위 적의 육군대장(陸軍隊長)이었다.
이로부터 의병(義兵)의 소문이 크게 떨쳐 여러 고을에서 쫓아오는 무리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강성인(姜性仁)이란 자는 역시 무뢰한(無賴漢) 몇 10명을 거느리고 부락에 다니면서 난잡한 짓만 일삼고 있었다.
공은 처음에는 그가 그런 사람인 줄 알지 못하고 함께 손을 잡고 일해 오다가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공은 타일러 말하기를,
“물에 빠지는 백성을 건져 주자고 우리가 일을 시작한 것인데 도리어 그들에게 해독을 입힌다면 이것은 도둑이 아닌가?”
했다.
그러나 강성인은 끝끝내 버릇을 고치지 않으므로 정의를 들고 목을 베이니 여러 무리들이 모두 감복했다.
6월에 동복(同福) 고을 운흘티(雲敭峙)에서 흰옷 차림으로 의병(疑兵)을 만들어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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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왜정 도변정추(渡邊政秋)가 동복(同福)을 수비하는데 군대의 위엄이 매우 웅장했었다.
공은 이쪽에서 군사 두어 사람을 시켜 불을 지르고 쫓아 들어가게 했더니 적은 담을 더욱 튼튼히 수리하고 몇 갑절로 군사를 불러 방비를 한층 엄중히 했다.
공은 낮이면 잠뱅이를 입은 채 가래를 들고 농사꾼들과 섞여 일하고, 밤이 되면 군대를 정비한 다음, 기이한 술법으로 습격하여 적을 죽이고 병기를 무수히 빼앗았다.
이렇게 되자 도변(渡邊)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달아나고 말았다.
기유(己酉) 2월에는 서봉(瑞峰)에서 군대를 쉬게 하고 있더니, 도망해 간 군사가 밀탐을 한 까닭에 전군이 함몰되었다.
이 해 가을 7월에 이르러 석호(石虎)에서 다시 크게 회합하여 적을 제거하기로 맹서했다. 이 회합에는 심남일(沈南一)·안재찬(安載瓚)도 역시 모였었다.
그러나 전군이 서봉(瑞峰)에서 함몰당한 뒤인지라. 죽은 군사는 묻어 주지도 못하고 상처 입은 군사는 일어나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용기가 꺾이고 기운이 쇠잔해지게 되었다.
공은 이에 죽은 자를 조문하고 살아 있는 자는 방문해서 흩어져 도망한 무리들을 집합시켜 군기(軍紀)를 다시 떨치게 했다.
이에 고을 부로(父老)들도 자기 자제들이 피해를 입었다 해서 감히 원망하지 못하고, 더욱 분노한 모습으로 기운을 내어 아비는 자식에게 가르치고 형은 동생을 권면하여 다투어가며 서로 나와서 도시락밥과 병에 담은 간장으로 길거리에서 군사들을 환영하고 말하기를,
“우리 안장군(安將軍)이 다시 거사해야 한다.”
했다. 그러니 옛날로부터 인심을 얻은 자는 대개 이와 같았다.
8월에 진산(眞山)에 주둔하고 있는데 왜적이 밤을 타서 습격하고 2겹으로 포위하였다. 이에 온 군사가 장차 범의 입에 들어가게만 되었는데 공은 몸을 일으켜 서서 크게 호령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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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이 모두 숨어 있기만 하라.”
하고 손수 천보대총(千步大銃)에 불을 켜 가지고 이것을 적군의 선봉장에게 떨어뜨렸다. 이것을 보자 포위했던 군사의 세력이 크게 무너지게 되었다.
공은 다시 불을 붙여 들고 앞으로 달려서 후군을 시켜 산을 타고 가서 적군을 놀라게 했다. 이리하여 이 싸움에 적을 사로잡고 노획한 물건이 많으니 적군들은 모두 말하기를,
“안모(安某)는 참 비장(飛將)이다.”
했다.
비장(飛將)이란 명칭은 실상 이 때로부터 쓰게 되었다.
이에 오는 자는 대항하고 도망하는 자는 추격하여 혹 성에서도 적들을 무찔러 버리고 혹은 들판에서도 병기를 빼앗았다. 또는 불시에 습격을 당할 때라도 서로 돕고 응해서 일찌기 꺾이지 않고 도리어 얻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숨고 나타나기를 무상히 하고, 나가고 들어오기를 측량할 수 없이 했다.
대원(大原)에서 승리를 거둘 때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으며, 고흥(高興)에서 승리할 때는 적의 주둔하고 있는 곳까지 적을 무찔러 버렸다.
그런 때문에 왜적의 임금은 밤·낮으로 근심한 나머지 연대장(聯隊長) 부석(富石)을 시켜서 거국적(擧國的)으로 책임을 지게 했다.
이에 남도(南道) 모든 고을을 둘러싸고 마을마다 병참(兵站)을 두고 집집마다 수비대(守備隊)를 세워, 산과 들에 그물을 펴고 밤·낮으로 사찰하게 했다.
이리하여 밥먹는 자도 노략질하고 잠자는 자도 위협하게 되니 마을과 거리가 모두 파멸되어 버리고 친척들까지 멸망하게 되었지만 원망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설사 앞에 간 자가 항복을 했어도 뒤에 있는 자를 걸어 넣지 않고 서로서로 숨겨 주었으니,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 어렵다는 것을 여기에서 또 볼 수가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일을 하기에는 어쩔 수가 없이 되었다. 공은 부득이 여러 군중들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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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 했더니 이제 적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공연히 선량한 사람들만 애쓰게 되었도다. 하늘 운수에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러나 저놈들에게 신하 노릇하고 종노릇하는 누추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살아서도 나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고, 죽어서도 선왕(先王)께 저버린 것이 없다 하겠으니, 우리들은 이것만으로도 족한 일이 아닌가? 그대들은 각각 스스로 계획을 잘 세워서 뒷일을 다시 도모하기를 기다리라.”
하고 드디어 대장의 직책을 사면했다.
이 때 부석(富石)은 교묘하게 체포령(逮捕令)을 내려 소위 범죄자로 하여금 자수하게 해서 앞길을 열어 주게 하니 의병(義兵)이란 사람들은 모두 그 면목을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의병의 거두(巨頭)와 원범(原犯)은 잡지 못했으므로 그물질하듯 비질하듯 수색하기를 더욱 급하게 했다.
이에 공은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장차 어머님께 여쭙고 멀리 피신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공을 미워하는 자의 고발로 인해서 체포되고 말았으니 때는 곧 기유(己酉) 9월 8일이었다.
심문을 받는 자리에서 공은 씩씩한 기품과 준절한 말씨로 노여워하고 꾸짖기를 간단없이 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장차 다시 일어나서 너희들의 씨를 모두 없애 버리고 나의 공을 이루려 했더니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내가 내 몸을 위해서 계획을 일찍 못 세운 것이 한 될 뿐이다.”
하고 여유있는 모습으로 형을 받으러 나갔다.
이것은 즉 이 때에 형세가 이렇게 될 줄을 알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숨어 있어 내 몸이나 보호하는 것이 나았다는 의사를 보인 것이었다.
광주(光州)에서 대구(大邱)까지 해를 계속해서 구속되어 있었는데, 그 동안 고문도 여러 번 당했건만 사색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자기가 한 사실에 대해서도 조금도 은휘한 것이 없었다.
판사(判事)가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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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임금도 벌써 머리를 깎고 의복까지 변경했으며, 정령(政令)·병형(兵刑)·절복(節服)·역수(曆數)도 벌써 모두 옛날에 있던 것이 아니고, 호부(戶部)·탁지(度支)로부터 주부(州部)·군면(郡面)·대역(臺役)에 이르기까지 모두 새 법으로 행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 임금의 법령을 좇지 않고 너희 백성들의 직분을 닦지 않으니 이것은 다만 스스로 혼란만 저지르는 것이다.”
했다.
그러나 공은 한참 한숨만 쉬고 있다가 오랫만에 말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천지 사이에서 사람을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은 사람으로서 사람 된 노릇을 하는 때문이다. 아비는 아비 노릇을 하고 자식은 자식 노릇을 하고 임금은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을 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당당한 예의를 가진 나라로서 돼지 같고 이리 같은 네놈들의 해독에 빠졌으니 하늘이 어찌 무심 하겠느냐? 이제 어떤 사람이 짐승에게 침해를 당하고 있다면 혈기 있는 자로서 누구인들 미워하지 않겠느냐? 토지와 재물은 이리떼 같은 너희들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 예물(禮物)과 하늘의 법에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너의 말은 너무 지나치다. 여기에 사람이 있는데 갑자기 도둑놈에게 침략을 당하고 또 아내와 자식을 빼앗아 간다든지, 그 조상을 욕보인다든지, 그 의관을 찢어 버린다든지, 그 면목에 상처를 입힌다면 그 자식 된 자로서 이런 일을 당장에 못 하게도 하지 못 하고 또 뒤에도 핑계하기를, 그 때에 내가 그 일을 미쳐 하지 못 했다고만 하고 끝끝내 덮어 두고 말 것이냐? 아무리 굴복하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임금이 계신데 네가 무엇을 하는 자냐?”
했다.
이 말을 듣고 판사(判事)란 자는 코를 돌리면서 말하기를,
“네가 이것을 봤느냐? 이것은 너의 임금의 칙서(勅書)인데 너희 나라는 벌써 합병(合倂)을 하고 말았다. 너의 나라가 지금 어디 있느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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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경술(庚戌) 7월 뒤의 일이었다.
공은 이 말을 듣자 입을 다물고 말이 없다가 크게 소리치면서,
“빨리 나를 죽여라, 빨리 나를 죽여라.”
했다.
이날 밤 같이 있던 죄수 중에 자결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은 이를 정지시키고 말하기를,
“저들이 반드시 우리를 죽이고야 말 터인데 어찌 가만히 죽는 일을 하겠느냐?”
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심문이 있었지만 공은 다만 눈만 부릅뜨고 입은 다물고 앉았다가 손으로 의자를 집어 들어 저놈에게 집어던졌다. 그러나 저놈은 감히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껄껄 웃기만 했다.
공은 드디어 저들의 국법에 의하여 처형되었으니 때는 신해(辛亥) 5월 5일이었다.
아아! 8도의 의사(義士)를 말하면 호남(湖南)이 가장 많았었다.
남원(南原)의 양한규(梁漢奎), 능주(綾州)의 양회일(梁會一), 창평(昌平)의 고광순(高光洵), 장성(長城)의 기삼연(奇參衍), 광주(光州)의 김준(金準)과 그의 동생 김율(金溧), 진안(鎭安)의 전기홍(全基泓), 임실(任實)의 이석용(李錫庸), 함평(咸平)의 심수택(沈守澤), 보성(寶城)의 안규홍(安圭洪) 등이니 안규홍은 즉 공이다.
공과 김준(金準)·김율(金溧)이 가장 노획한 공적이 있었고, 그 규모와 계획이 치밀하고 전쟁에 임해서 실수 없기로는 공을 따라갈 이가 없었다.
또 2양씨(梁氏)와 기씨(奇氏)·고씨(高氏)는 부자들의 난리를 미쳐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김씨(金氏)·이씨(李氏)는 부자들의 난리를 보기는 했어도 모두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또 심씨(沈氏)와 공은 대구(大邱)에서 같이 살해되었다.
공은 키가 작고 몸이 작은 편이며, 성음은 빠르고 강직했는데 남들이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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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모(安某)는 표범이라.”
했다.
공을 담산(澹産)이라고 칭호한 것은 그간 고용살이를 했기 때문인데, 지금 와서 담산(澹山)이라고 고친 것은 세상 사람이 부르는 바에 의해서 여러 군자(君子)들의 뜻을 취한 것이다.
담산(澹山)의 막하 중에도 염재보(廉在輔)·이관회(李貫會)·임창모(林昌模)·나창운(羅昌運)·송경회(宋敬會)·장재모(張載瑁)·손덕호(孫德浩)·정기찬(鄭基贊) 등이 가장 저명한 자이다.
이관회(李貫會)는 선봉장(先鋒將)으로서 가령(加嶺)에서 패진할 때에 죽었는데, 죽은 뒤에도 늠름한 모습으로 포탄을 손에 들었었고, 나창운(羅昌運)은 호군(護軍)으로서 진산(眞山)에서 포로당했으나 죽을 때에 임해서도 정신을 잃지 않고 문서와 장부를 더럽히지 않았다.
이 2사람은 청렴결백하고 용맹이 있었기 때문에 담산(澹山)에게 등용 되었는데, 그가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담산(澹山)이 매우 애석하게 여겨 군사를 거느리고 친히 제사를 지냈다.
염재보(廉在輔)는 적을 공격하는데 공로가 많았는데 담산(澹山)과 같이 대구(大邱) 감옥에서 죽었다.
정기찬(鄭基贊)·장재모(張載瑁)는 부석(富石)에서 자수했고, 송경회(宋敬會)·손덕호(孫德浩)는 광주(光州)에서 형을 받았다.
또 임창모(林昌模)는 의병이 해산하던 날 부자 2사람이 묵석(墨石)에서 같은 날짜에 살해당했다.
평론해 말하기를, 담산(澹山)은 밭두렁 위에 농사짓는 농부로서, 3년 동안 대장 노릇을 했으나, 군사가 5백 명에 지나지 않고 노획한 것도 2백 명에 지나지 못했다. 착한 이름이 나라 안에 넘치고 길이 후세까지도 그의 말이 남았으니, 옛날의 이름난 사람과 함께 거의 비슷하다 할 수 있는 것은 무슨 때문인가? 형세는 역순(逆順)이 있고 일이란 어렵고 쉬운 것이 있는 때문이라 하겠다. 저들이 편안히 앉아서 뱃 속에 만 권 서적을 감추고서도 다만 자기 하나의 목숨을 위해서 이록(利祿)에만 꾀하는 자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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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그의 창자가 녹아 버릴 것이다.
계해(癸亥) 10월에 죽산(竹山) 안종남(安鍾南) 지음.
전기(傳記) 뒤에 씀
담산(澹山)이 젊어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할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세금을 받으러 온 관리가 동리에서 갖은 횡포를 부리는데 감히 이것을 말리는 자가 없었다.
이 때 마침 담산(澹山)은 나무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이 꼴을 보자 즉시 마을 장정들에게 호령하여 그 자를 결박해 놓고 말하기를,
“세금을 독촉하는 것은 너의 직책이라고 하겠지만 죄없는 사람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은 무슨 때문이냐? 이런 놈은 때려 죽여야 마땅할 것이다. 너는 이 마을에 아무도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했다.
그 관리란 자는 싹싹 빌어서 겨우 풀려 돌아갔는데, 그 뒤로는 다시 그런 폐단이 없었다 한다.
신해(辛亥)에 대구(大邱)에서 형을 받을 때의 일이다.
장차 공을 형무소로 데려갈 참인데 큰 탁자에 음식을 갖추어 놓고 공에게 먹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공은 노여워하는 표정으로 좌우를 흘겨보면서 말하기를,
“나는 벌써부터 네놈들의 음식은 먹지 않았다. 그러니 이 음식은 걷어치우고 다시 우리 나라 음식으로 바꾸어 오라.”
했다.
공은 이리하여 바꾸어 온 우리 음식을 손을 씻고 맘껏 먹었다.
이 때 공은 구금되어 있기 여러 해가 되었기 때문에 근력이 기거도 잘 못 할 지경이었건만, 기풍은 오히려 이와 같으니 보는 자들이 모두 장하다고 했다.
이 때 마침 본군 대곡(大谷)에 사는 김씨(金氏)라는 사람도 역시 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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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류 중에 있었는데, 밤으로 출역(出役)을 나갔다가 당일의 이 광경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 한 말은 최가(崔哥) 관리에게 들었는데, 최가는 늙게까지 항상 머리를 흔들고 눈짓을 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소년 시절에 본 일인데 마음속으로 장하게 여겨 참 장수될 재목이라 했더니, 급기야 그가 의병을 일으키고 나섰다는 소문을 듣고 나서 보니 과연 그 사람이더라.”
고 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그같이 약한 형세로서 용감하게 앞에 나섰으니 뒷날의 수립하는 것이 근본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 뒤에 한 말은 고담(高潭)과 김도명(金道明)이 자기 일가 사람이 친히 목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라 한다.
이것은 그가 구금당해 있는 동안에 신체는 뼈만 남고 정신도 없어질 지경이었건만 능히 그 지키는 마음을 잃지 않고 뜻과 기품이 평상시와 다름없었으니 앞날에 수립할 바가 보통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다 하겠다.
눈으로 글짜도 볼 줄 모르면서 어찌 이런 일을 이루었을까? 과연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이상의 2조목은 늦게야 들은 사실이기 때문에 전문(傳文) 속에는 미쳐 기록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이제야 기록해서 후일에 참고가 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계해(癸亥) 중동(仲冬)에 안종남(安鍾南) 적음.
전문(傳文)은 전후 2편이 있다. 전편은 경술(庚戌)에 군대를 해산하던 뒤에 바로 썼기 때문에 듣고 본 바를 적은 것이나, 시국에 저촉될가 염려하여 이것을 깊이 감추어 두고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후편은 을유(乙酉)년 해탕을 맞이한 뒤에 쓴 것이기 때문에 전해 오는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앞 뒤 글이 그 자세하고 간략한 것이 서로 같지 않으니 보는 자들이 이 점을 알아주기 바란다.
전기(傳記) 뒤에 씀
안규홍(安圭洪)의 자는 제원(濟元), 본관은 죽산(竹山)으로서 그 조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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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寶城)에 살았다.
10대조 은봉(隱峰) 선생(先生) 방준(邦俊)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임금께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그 뒤로부터 선비의 집으로 이름이 났었다.
규홍(圭洪)은 평생에 글을 알지 못했으니 그것은 집안이 가난해서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한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강개한 뜻이 있고 담략이 있어 나무꾼을 데리고 진치는 법으로 놀이를 했다.
일찌기 어느 관리가 마을에 와서 세금을 독촉하는데 폭행으로 사람을 구타하고 있었다.
이 때 마침 규홍(圭洪)이 나무를 지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 노여워하여 말하기를,
“이런 버릇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네가 이 마을에는 사람이 없는 줄 아느냐?”
하고 마을 장정들을 불러서 그 관리를 결박해 놓고 그 죄를 세면서 매를 때리니 곁에서 보는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왜적은 병자(丙子)년에 소위 수호조약(修好條約)을 체결한 뒤로부터 우리 나라를 엿보고, 인하여 청국(淸國)과 노국(露國)으로 더불어 전쟁해서 승리한 다음, 그 세력을 빙자해서 우리 나라를 짓밟을 생각으로 소위 통감부(統監府)라는 것을 설치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나라 안에 의병(義兵)이 계속 일어났지만 혹은 잠시 사이에 패망해 없어지곤 했다.
규홍(圭洪)은 뜻을 쌓아 거사를 하고자 했으나 인망(人望)이 적었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비적(匪賊)의 무리들이 마을로 다니면서 횡포를 부리자 마을마다 장정 수백 명씩 모집해서 북을 치면서 비적을 방비했다.
이에 규홍(圭洪)은 그 장소에 가서 자기의 뜻을 비로소 발언하자 여러 사람들은 뛸 듯이 기뻐하고 거기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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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부터 군량을 모으고 병기도 만들며 각 지방으로 통문을 돌려 군대를 모았다.
이렇게 할 무렵에 관동(關東) 사람 강성인(姜性仁)이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왔다. 보기에 그의 형세가 좀 장해 보였기 때문에 병권을 그에게 위임시켰었다.
그러나 그 뒤에 보니 성인(性仁)은 물욕을 탐하고 큰 소리만 칠 뿐, 아무런 굳은 뜻도 없는 인물이었다.
규홍(圭洪)은 내심으로 후회하고 있던 터에 어느 날 어느 여자를 간음하는 것을 보고 즉시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들고 여러 사람에게 호령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실색했다.
이에 규홍(圭洪)은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래 역적과 원수놈을 쳐 버리고 나라의 난리를 없애려 했던 것인데 이제 장수라는 자가 이 꼴이니 어찌 인심을 복종시키겠는가? 그러나 군대에게는 하루도 장수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그대들이 선택하는 자로 대장을 삼으리라.”
했다.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규홍(圭洪)으로 장수를 추대하고, 염재보(廉在輔)로 선봉을 삼고, 손덕호(孫德浩)·정기찬(鄭基贊)으로 좌우장(左右將)을 삼아 석호산(石虎山)에서 크게 음식을 먹게 했다. 이 때는 무신(戊申) 3월이었다.
이 길로 행군하여 파청역(巴靑驛) 구현(鳩峴)까지 가서 적군 8중대(中隊)를 만나 접전했다.
이 싸움에 적의 장수 영호구웅(永戶久雄)을 베이니 여러 적군들은 요란스럽게 도망해 버렸다.
그 뒤에 적군은 대원사(大原寺)를 공격하고 포위하여 형세가 몹시 위급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규홍의 군사는 싸움을 중지하고 정신이 없을 판이었다.
이에 규홍이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니 적군은 바로 절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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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규홍(圭洪)이 미리 짐작한 대로였다. 다시 적군을 포위하여 격파시켰다.
이로부터 그의 군대의 이름이 크게 떨치기 시작했다.
이 때 적의 기정대가 원봉(元峰)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의 장수 도변(渡邊)은 순천(順天)에 있는 적군과 함께 근처의 의병(義兵)을 모조리 없애 버리려는 계획을 하는 판이었다.
규홍(圭洪)은 이 소문을 듣고 상진산(上眞山)에 진을 치고 미리 대나무 숲 속에 군사를 매복한 다음, 마을에 사는 남녀들과 약속하여 돌을 던져 호응해 달라 하고 적군을 꾀어서 마을로 들어오게 했다.
이에 포탄을 쏘고 돌을 던져 마치 비오 듯하니 적군이 많이 죽었다.
이 싸움은 반일이나 계속되었으며 싸움이 매우 격렬했기 때문에 적장 도변(渡邊)은 겨우 몸만 빠져가서 이를 갈면서 보복할 생각을 가졌다.
그 날 밤에도 또 원봉(元峰)을 습격하여 적 몇 놈을 죽이고 그들의 병기까지 빼앗으니 도변(渡邊)은 크게 두려워하여 장흥(長興)으로 도망했다.
규홍(圭洪)은 또 가령치(加嶺峙)에 복병을 시키고 순천(順天) 적군의 후원하는 길을 끊었는데, 이 싸움에서 포장(砲將) 이영삼(李英三)이 죽었다.
다시 배를 타고 흥양(興陽)으로 들어가서 적의 재물과 병기를 무수히 얻었다. 이 외에는 창졸간의 싸움에 실수한 때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곤경을 당해서도 계획을 잘 세워서 모면했었다.
일찌기 마을에서 적군에게 포위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그는 잠뱅이만 입고 마을 사람과 섞여서 싸우기도 했으며, 또 장차 동쪽으로 달아나려면 먼저 서쪽을 향해서 포 소리를 내어 적군을 서쪽으로 모이게 하는 등, 그 임기응변의 술법이 대개 이와 같았다.
규홍(圭洪)은 오합(烏合)의 무리를 모아 초동 목수만을 데리고 2년 동안을 계속하여 적과 싸워서 수백 명 적군을 죽였으니 이로써 적들은 매우 걱정했다.
기유(己酉) 가을에 드디어 적군이 2대대를 풀어서 온 고을에 군사를 벌여 놓고 산과 들판을 누비듯이 하여 의병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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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규홍(圭洪)은 울먹이면서 군대를 해산시키고 어머님께 작별한 다음 멀리 피신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때 그를 고발한 자가 있어서 적에게 잡히게 되었다.
이 때 염재보(廉在輔) 등도 역시 잡혀서 광주(光州)에 구금되었다가 다시 대구(大邱)로 옮겼다.
규홍(圭洪)은 몸이 작고 목소리도 작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말도 능히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대구(大邱)에 이르자 스스로 모면하지 못할 줄 알고 적을 꾸짖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예의로 온 천하에 소문이 났는데 이제 미친 개 같은 너희 놈들에게 물린 바가 되었으니, 내가 아무리 벼슬은 없을망정 어찌 그대로 보고만 말겠느냐? 우리 임금이 우리 나라에 군림하고 계신데 너희 무리가 무슨 간섭이냐?”
했다.
판사는 이 말을 듣자 종이 하나를 내 놓고 말하기를,
“네가 이것을 봤느냐? 이것은 너희 임금의 칙서(勅書)인데, 너희 나라는 벌써 우리 나라에 합병되었다.”
했다.
이 말을 듣자 규홍(圭洪)은 눈을 부릅뜨고 의자를 들어서 판사에게 던져 버리고 큰 소리로,
“나를 빨리 죽여라.”
했다.
이 때 판사는 손만 내젖고 말았다.
드디어 그는 교수형을 당하여 신해(辛亥) 5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형을 당하던 전 날, 같이 있는 죄수 하나가 자살하려 했다. 규홍(圭洪)은 이것을 보고 말리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마땅히 조용하게 죽어야 할 것인데 왜 비겁한 짓을 하느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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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홍(圭洪)은 홍릉(洪陵) 기묘(己卯)에 났으며 죽을 때 나이가 33세였다.
그 뒤에 12년 만인 계해(癸亥)에 입후한 아들 종련(鍾連)이 그 유해를 수습하여 보성(寶城) 고을 은곡(隱谷)에 장사지냈다.
의논해 말하기를, 이 때 호남(湖南)에서 의리를 들고 일어난 선비로서 고광순(高光珣)·이석용(李錫庸)·기삼연(奇參淵) 같은 모든 사람은 모두 글을 읽고 고금 역사에 능통했건만, 규홍(圭洪)은 품팔이꾼과 함께 짝지어 놀았고, 눈으로 시서(詩書)도 못 읽어 봤건만 그래도 능히 분발한 기품으로 이런 일을 했으니 참으로 장하다 하겠다.
이 때 바야흐로 왜놈의 세력이 펴지기 마치 큰 바다에 조수가 몰아닥치듯 할 때였다. 굶주리고 파리한 군사를 모아 가지고 무디고 떨어진 기계만 가지고, 날카로운 병기를 가진 군사와 충돌한다는 것은 실로 아이들의 작란과 마찬가지로서 일이 성공되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의관하고 예의를 지키는 민족으로서 하루 아침에 저 개 같고 이리 같은 놈의 밥이 되는 데도 손을 묶고 감히 호령 한 마디도 못 하게 되었으니, 이러고서 우리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저 기구한 바위 틈으로 10번 엎어지고 1번 일어나는 고생을 하다가 필경에는 자기 몸까지 형틀에 기름칠을 해도 후회가 없다는 자들은 그 사람이 실로 옛날 열사(烈士)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데도 저 왜적들에게 아첨하는 자는 이를 허망한 짓이라 비웃고 말만하여 성공한 것이 없다고 탓하기만 하니, 아아! 슬픈 일이로다.
정해(丁亥) 중동(仲冬) 하순(下旬)에 광산(光山) 김문옥(金文鈺) 지음.
후서(後叙)
대개 충성과 효도는 천지 사이에 떳떳한 법이며 고금에 통하는 의리이다. 그런 까닭에 효도와 충성에 한 가지만이라도 마음에 얻은 자가 있다면 선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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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찬양하고 국가에서는 표창을 하게 되는데 즉 이것이 법칙이고 공론이라 하겠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사람은 드물다.
오직 안공(安公)이 보성(寶城) 남쪽 택촌(宅村) 마을에서 출생했으니, 그 이름은 규홍(圭洪),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인데,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젊었을 때에는 고용살이를 해서 부모를 봉양했고, 장정이 되어서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적을 토벌했다. 싸움에 법도가 있게 해서 목 베이고 포로로 잡기를 무수히 했다.
또 적에게 체포되었을 때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죽었다.
이상 여러 가지 말은 여러 사람들이 기록한 데에 구비하게 써 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거듭 쓸 것이 없다.
아아! 슬프다. 공의 붉은 충성은 태양과 더불어 같이 밝다 하겠다.
적은 숫자로서 여럿을 대항하는데, 그 기품은 천고에 장했고, 의리를 가지고 나라를 붙잡은 것은 옛날 제갈무후(諸葛武侯)와 마찬가지라 하겠다.
사문(斯文) 임낙기(任洛圻)가 나에게 찾아와서 김영한공(金寧漢公)이 지은 ≪승첩비(勝捷碑)≫ 비문을 보이고 한 마디 기록하기를 청하기로 감히 금관(金管)을 잡고 위와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임진(壬辰) 중동(仲冬)에 밀양(密陽) 손제영(孫濟英) 기록함.
부록(附錄)
부장(副將) 염재보(廉在輔) 행록(行錄)
염재보(廉在輔)의 자는 인서(仁瑞), 본관은 파주(坡州)이다.
젊었을 때는 재간이 있고 겸해서 무예를 연습했으며 사람됨이 장대하고 또 강개한 모습이었다.
대체 모든 기계를 만드는 데도 정묘하려니와 총 쏘는 방법이 더욱 절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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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 백중 적(的)을 맞추었다.
사냥을 즐겨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집안 살림살이는 대단히 여기지 않는 때문에 종형 되는 재업(在業)이 이를 경계했었다.
이 말을 듣고 공은 대답하기를,
“형님 말씀이 마땅하긴 하오나 눈을 떠서 산천을 돌아다 본다면 오늘이 어느 때입니까? 형님께서는 가만히 계십시오.”
했다.
병신(丙申)·정유(丁酉) 무렵에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이 거의 하다가 잘 못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마지 않았다.
공은 이 때로부터 산골짜기나 들판으로 다니면서 세상에서 낙오되고 불우한 사람들을 찾아 비밀히 교제했었다.
병오(丙午)에는 최면암(崔勉庵)의 곡성의막(谷城義幕)에 들어가려 하다가 못 가게 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매양 면암(勉庵)이 지은 격고문(檄告文)을 딴 사람을 시켜 읽게 하고 이것으로 종맹(宗盟)을 삼는다 했다.
무신(戊申) 봄에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군대에는 장수가 없어서는 일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듣건대 안규홍(安圭洪)은 나이는 비록 젊다고 해도 몸은 작고 담이 크며, 또 그는 은봉(隱峰) 문강선생(文康先生)의 후예라 하니 그를 장수를 삼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에 여러 군중들도 모두 이를 허락하자 재보(在輔)는 손덕호(孫德浩)·정기찬(鄭基贊) 등 50여 명과 함께 안규홍(安圭洪)을 추대하여 대장을 삼고 대략 부서를 짜고 군기도 세밀하게 정비한 다음, 대장기를 만들어 걸고 이해 3월에 서봉산(瑞鳳山) 속에서 크게 군사들을 먹이니, 이 소식을 듣고 향응하는 자가 많았다.
이 때 적군의 세력이 퍼져 나오기를 마치 조수 밀어오 듯하여 막아낼 수가 없고, 불이 번져나가 듯해서 이를 잡아낼 수가 없었다. 이에 조정과 시골 할 것 없이 겁을 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즈음 호남(湖南) 일대에는 장성(長城)에 기삼연(奇參淵), 창평(昌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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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高光洵), 능주(綾州)에 양회일(梁會一), 나주(羅州)에 김태원(金泰元) 형제들과 순천(順天)에 조국주(趙國柱) 등이 모두 계속해서 패해 버리고, 오직 함평(咸平)의 심남일(沈南一) 혼자만이 조금 노획한 공적이 있게 되었는데, 이 때 남일(南一)이 공을 찾아와서 합세하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재보(在輔)는 말하기를,
“의리가 같으면 뜻도 같고, 뜻이 같으면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적을 공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어찌 반드시 합세를 해야만 성공한단 말인가?”
하니 남일(南一)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재보(在輔)는 안 장군과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래 농촌 백성으로서 저들의 만행을 견딜 수 없어서 1만 번 죽어 지내던 나머지에 이 거사를 했으나, 위로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못했고 아래로는 싸움의 효과도 없이 오직 먹기만 일삼고 있어, 백성들의 목숨을 구해 주지 않는다면 어찌 국가를 사랑하고 민간을 돌봐 주며 원수를 갚는다는 의리라 하겠는가?”
하고 2번째로 동소산(桐巢山) 속에서 군사를 먹인 다음 법령을 내걸고 말하기를,
“군대로서 민간을 침략하는 행위는 일체 금해야 하며, 민간에서 곡식을 거두는 행동도 일체 금해야 한다. 또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민간을 좀먹는 자는 모두 잡아야 하며, 소위 관리라고 하면서 민간에게 횡포한 짓을 하는 자도 엄하게 다스려야 하며, 먼저 이런 일을 창도하는 자부터 죽여서 우익(羽翼)들을 없애야 한다. 외국 도둑놈들을 잡아서 그 새떼 같은 무리들을 섬멸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는 동시에 우리 나라 근본을 보호하고 우리 나라의 명맥을 길게 보존해야 한다.”
하였다.
공은 또 말하기를,
“오늘날 천지에 5백년 종사(宗社)가 어디에 있으며 삼천리 강토가 어디로 돌아가며, 2천만 동포가 이제 뉘 집의 노예가 될 것이며, 누구의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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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육이 될 것인가? 짐승 노릇을 해가면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죽더라도 제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도둑 한 사람을 죽이고 군대 한 놈을 죽여도 족히 귀신의 분노를 씻는다 할 것이며, 장수의 마음도 쾌하게 한다고 할 것이다. 하물며 우리 군대의 소문이 점점 떨쳐지고 군사들의 의기가 바야흐로 날카로와지는 오늘날에 있어서랴?”
했다.
이에 행군해서 조내(鳥內)에 이르자 먼저 파견된 군사 1사람이 군사 일에 법을 범하니 이를 즉시 처치한 다음, 적의 육군 대장 영호(永戶)·평정(坪井)과 함께 파청(巴靑)에서 싸워 섬멸시키니 적군들은 정신을 잃고 도망해 버렸다.
이에 재보(在輔)는 적의 병기·복장·탄환 등을 얻어 가지고 대원사(大原寺)로 들어가서 주둔했다.
그러나 적의 헌병대 일부가 뒤를 따라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의형은 절 문루를 먼저 점거해서 적군 몇 명을 쏘아 죽였다.
이로부터 의병의 소문이 크게 떨치게 되고 적의 기세가 조금 꺾이었다. 형세가 이렇게 되자 이웃 고을에 주둔한 적군들이 서로 연락하여 길을 막았다.
이에 공은 또 안 대장과 함께 계획하기를,
“군사 하나를 내 보내서 적군들의 연락하는 길 요새지에 매복시켰다가 기회를 봐서 습격하도록 하자!”
하고 미리 준비시켰다가 4월달에 적군 4명을 내가령(內加嶺) 고개에서 죽였다.
그리고 동복(同福) 고을 헌병대와 함께 운월치(雲月峙) 고개에서 접전했다. 이 싸움에서는 흰 옷차림으로 의병(疑兵)을 만들어 매복시켰다가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통에 의병도 크게 상처를 입었었다.
그 뒤에는 되돌아 와서 서봉산(瑞鳳山) 속에 주둔하고 있는데, 토적(土敵) 조병기(趙秉琪)가 적군을 거느리고 새벽에 몰려와 포위하고 포탄을 퍼부어 마침내 의병은 함몰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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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재보(在輔)는 안 대장과 함께 먼저 뒷산에 올라가 적군 2, 3명을 죽이고 각각 흩어졌다.
이 해 7월에 다시 석호산(石虎山)에서 크게 모여서 여러 군사와 맹서했다. 바야흐로 이 때는 적군의 세력이 더욱 강성하고 사찰하는 것도 더욱 세밀해 갔다.
적군의 기병 대장 도변정추(渡邊廷秋)는 부하를 거느리고 원봉(元峰)에 주둔하여 순천(順天)의 헌병대와 연락하여 안티(鞍峙) 고개에서 넘어오기 시작하니 화색이 박두하여 피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재보(在輔)는 안 장군과 함께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상진산(上眞山)에서 밥을 먹게 한 다음 먼저 헌병대와 교전했다. 이 싸움에 도변(渡邊)은 기병대를 거느리고 좌충우돌하면서 달려왔다.
그러나 의병들은 마을 뒷산에 숨어 있다가 헌병대 수10명을 포살시켰으나 화약이 떨어져서 산을 타고 달아나게 되었다.
이 때 적군의 포탄은 비오 듯했으나 의병의 피해는 별로 없었다. 이것을 보고 적군은 말하기를,
“안 대장은 비장(飛將)이로다.”
했다.
도변(渡邊)은 마을 사람을 협박하여 저들의 시체를 실어갔는데, 마을 사람 이정표(李貞杓) 내외가 적군의 포탄을 맞고 죽었다.
이 달 8일 밤 원봉(元峰)기병대의 주둔소를 습격하여 적군 2명을 죽인 다음, 그 부대를 불사르니 도변(渡邊)은 크게 두려워하여 장흥(長興)으로 도망해 갔다.
9월에 순천(順天) 적군과 외병티(外並峙)에서 싸워 포장(砲將) 이영삼(李英三)이 죽었다.
11월에는 배를 타고 흥양(興陽)에 들어가 헌병대의 청사를 파멸시키고 장수동(長水洞)에 들어와 크게 군사들을 먹였다.
12월에 동북쪽에 있는 헌병대를 부수려고 했는데 일이 누설되어 달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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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그 모임은 기회가 있고, 그 흩어지는 것은 표신이 있기 때문에 나뉘이고, 합하고, 나가고, 물러가는 것이 1번도 잘못이나 또는 어김이 없었다.
기유(己酉) 2월에 장흥(長興) 고을의 세금 받는 관리들이 민간에 몰려 다니면서 세금 독촉을 성화같이 하여 백성들이 울상이 되었었다.
의병이 이 광경을 막으려고 군사를 집합하여 부락으로 나가니 본군에 있는 세무 주사라는 자가 헌병대를 거느리고 와서 평주리(平舟里)에서 교전했다.
적군들은 민간 수10호를 불사르고 의병을 향하여 포를 쏘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었다.
이에 세무 주사는 말 위에서 포탄을 맞고 죽었으며, 감독관들은 겨우 죽음을 모면하고 도망해 버렸다.
재보(在輔)는 이때 어머님의 초상을 당하고서도 집에도 가지 못하고 의병에 종사했다.
4월에는 또 군대 몇 명을 동북쪽 읍내에 잠입시켜서 적군 3명과 통역관 1명을 죽이고, 병기를 모조리 탈취한 다음 유차삼(劉且三)·이경삼(李京三) 등을 시켜 적병의 육군 7중대와 박곡(亳谷)에서 접전하도록 했다.
여기서 적의 대장 평정탄시(平井灘市)를 죽이고 병기도 빼앗았다.
6월에 흥양(興陽)헌병대와 마륜(馬輪)에서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자 드디어 회군하여 전후에 죽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장사 지내고 상처 입은 자를 치료했다.
8월에는 적군들이 의병을 토벌한다 일컫고 수천 명의 연대를 분대별로 병참(兵站)을 설치하고 온 고을 안을 수색했다. 이것은 마치 그물질하는 것과 빗질하는 것 같아서 한 자되는 땅도 빠뜨리지 않고 한 남자도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렇게 되니 의병들은 외롭고 약한 군사로서 어찌 저항할 수가 있으랴? 그 위에 화약은 떨어지고 군량도 없어져서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위에 적군의 세력은 산골이나 들판을 구별할 것 없이 가득 차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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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들이란 머리를 맞대고 죽을 도리 밖에 없었다.
아아! 슬프다. 보성(寶城)이란 고을은 한쪽은 산이고 한쪽은 바다로써 그 중간에 끼어 있는 보잘것 없는 지대이다.
그러나 옛날 임진(壬辰) 난리에도 박죽천(朴竹泉)·안은봉(安隱峰) 같은 2선생은 선비 집의 덕 있는 분으로서 의병을 일으켰었고, 또 임양주(任楊州)와 선수사(宣水使) 같은 분도 전후로 일어나서 국가에 중흥하는 공적을 이루어 그 이름을 역사에 드리웠다.
염재보(廉在輔)도 안규홍(安圭洪)과 함께 밭두렁 위에서 농사짓던 자로서 위로는 보고할 곳도 없고 아래로는 의지할 곳도 없는 그 판국에 있어 2년 동안 의병을 이끌고 나서서 낮으로는 잠복해 숨고 밤으로만 나타나서도 그 혁혁한 이름이 국내외에 넘치게 되어 반만년 우리 나라로 하여금 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도록 했으니 슬프고도 장하다 하겠다.
갑자(甲子) 중동(仲冬) 상순(上旬)에 파주(坡州) 염재업(廉在業) 지음.
참모관(叅謀官) 송기휴(宋基休)의 행록(行錄)
송기휴(宋基休)의 자는 사일(士日), 호는 의재(毅齋), 본관은 여산(礪山)이니 단종(端宗) 때 명신 충강공(忠剛公) 서재간(西齋侃)의 자손이다.
나면서부터 특이한 바탕이 있고 성품이 강직하며 또 힘이 월등했다.
글을 배우게 되자 선생의 독려가 별로 없었는데도 문장도 잘하고 필법도 정묘, 그 위에 명서를 더욱 탐구해 보았다.
옛 사람의 입절(立節)한 글을 볼 때는 책장을 덮어 놓고 초연히 즐거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 옛 글에 뜻있는 선비는 비록 개천에 있어서도 그 뜻을 잊지 않고, 용감한 선비는 그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하는 귀절에 이르러서도 하루에 3번씩 이 글을 외우지 않을 때가 없었다.
고종(高宗) 말엽에 여러 간흉들이 일을 꾸며 정치의 기강은 문란해지고 나라의 명맥이 떨어지게 되자, 왜놈들이 이 틈을 타서 저희들 맘대로 도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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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 정부를 협박하고 백성들을 공갈해서 소위 을사조약(乙已條約)을 협박으로 성립시켰다.
이에 일부 충신들은 혹 자결해 죽기도 하고 혹 음독해 자살하기도 했으니 이것을 어찌 차마 다 말하겠는가?
공은 안담산(安澹山)이 보성(寶城)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어깨를 추켜세우면서 뛰는 듯이 그곳으로 달려갔었다.
담산(澹山)도 반가와하면서 그를 영접했는데, 공은 담산(澹山)을 처음 보고나서 그의 용감함을 알아보고 옛날에 이름난 장수나 지모 있는 군사들의 성공하고 패한 사실을 역력히 들어서 이야기하자, 담산(澹山)은 크게 기뻐하고 오히려 만나기가 늦은 것을 한탄했다.
그 뒤로 담산(澹山)을 따라 2년 동안 적군과 접전하는데, 시종이 여일하게 보좌하여 군대를 점고하고 조정하기를 방법이 있고 묘리가 있게 해서 의병의 세력을 크게 떨치게 했다.
여러 곳에서 계속하여 승전하여 목 베이고 노획한 것이 많았던 것은 모두 공의 지모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차! 슬프다. 강한 도둑은 크게 이루고 후원하는 군대는 계속되지 않자 공은 드디어 낙안(樂安)에서 잡히고 말았다.
공은 이에 북쪽을 향해서 통곡한 다음 마치 당(唐)나라 안고경(安杲卿)이 상산(常山)에서 안녹산(安祿山)을 꾸짖던 것처럼 적을 꾸짖고 굴하지 않다가 죽었다. 이리하여 하늘이 무심하고 나라 운수가 길지 못하게 되자 산하(山河)를 다시 이룩하는 공적을 이루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충성과 의리는 일월과 함께 빛을 다투게 되었으니, 저 나라를 팔아먹고 왜놈들을 섬기는 간흉들이 공의 소문을 듣는다면 오직 얼굴이 붉어지고 이마에 땀이 흐를 뿐만이 아닐 것이다.
공은 포의(布衣)의 한사(寒士)로서 능히 강개한 뜻을 품고 마땅히 죽을 자리에 죽었으니, 우리 나라에도 가위 사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참 슬프고도 장한 일이로다.
아들 남석(南錫)도 능히 아버지의 일을 이어 하고 있다 하니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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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壬辰) 정월 상순(上旬)에 진원(珍原) 박경진(朴璟鎭) 지음.
부장(副將) 안택환(安宅煥) 행록략(行錄略)
공의 성은 안(安), 이름은 택환(宅煥), 자는 일언(一彦), 본관은 죽간(竹山)이니 우산선생(牛山先生) 문강공(文康公)의 9대손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모(模)이며 어머니는 달성배씨(達城裵氏)다. 임오(壬午) 동짓달 16일에 택촌(宅村) 마을 본댁에서 출생했다.
어렸을 때로부터 특이한 바탕이 있었으며, 성품은 강직하고 키가 후리후리했는데, 사랑하고 공경할 줄을 알아서 능히 부모에게 효도했다.
글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으나 재주와 생각이 뛰어났고, 글씨 쓰는 법도 또한 정묘했으며,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즐겨 보았는데 여기에서 반드시 비밀한 법을 얻어서 연습했다.
살림살이에는 등한하고 동료들과 함께 비밀히 진치는 법을 익힐 뿐이었다.
항상 옛날의 충신이나 열사(烈士)의 전기를 읽을 때면 혹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대장부로서는 마땅히 ‘용감한 선비는 그 근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는 말로 주장을 삼아야 할 것이니 어찌 구구하게 아녀자의 손에 살고만 있으랴?”
했다.
매양 산이 돌고 물이 구비치는 곳을 만나면 진을 치고 진터를 쌓을 생각을 가졌으니, 그의 계획과 방략은 넉넉하고도 깊었다고 말하겠다.
본래 담산공(澹山公)과 함께 뜻이 같고 기미도 부합되었기 때문에 시국이 잘 못되는 것을 함께 탄식했고, 또한 역적들이 왜놈과 함께 나라를 망친다는 것도 미리부터 짐작했었다.
그러나 초야에 묻혀서 그들을 토벌할 길이 없고 다만 과부의 걱정처럼 어찌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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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가 없어서 서로 대해서 슬프다고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을미(乙未)·병신(丙申)년 무렵에 이르자 나라의 역적들은 벌써 더할 나위 없는 짓들을 했다.
이 때 최면암(崔勉庵) 선생이 거의한다는 소문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고 그리로 가고자 했지만 오래지 않아서 일이 잘 못되자 탄식함을 마지않았다.
무신(戊申) 봄에 이르러 담산공(澹山公)과 함께 먼저 의병을 일으켜 군사를 모집하고 말도 사들이며 군기도 만들고 군량도 모아서 담산공(澹山公)과 함께 맹서하고 말하기를,
“우리들이 부득이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게 되었으니 의리대로 따라서 해야만 일이 순조로이 될 것이요, 만일 불의로 한다면 패하고 말 것이니, 절대로 백성을 해치거나 재물을 훔치거나 술을 마시거나 여색을 탐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몸가짐을 반드시 바르게 하고 맹서가 있는 이상 반드시 이를 지켜야 할 것이니 만일 약속을 어기는 자는 먼저 죽여야 한다.”
했다.
이렇게 맹서한 다음 군대를 모두 모아 가지고 파청(巴靑)에서 왜적과 교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어 왜놈 장수 2명을 죽이고 험한 지대에 웅거하여 기이한 방략을 세워 왜적만 보면 반드시 죽여 버렸다.
또 대원(大原) 진산(眞山)에서도 여러 번 승리를 거두고 노획한 것도 많았으며 병티(並峙) 고개에서도 승전하여 앞으로 진군해 나갔는데, 불행하게도 적의 포탄을 맞고 이관회(李貫會)와 함께 죽게 되었다.
담산공(澹山公)은 군대를 수습하여 돌아왔으나 공의 죽음을 슬퍼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공이 먼저 죽게 되니 나의 좌우수족을 잃은 듯하다.”
하니 온 군중도 모두 흐느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아! 공은 한 포의(布衣)의 선비이다. 그러나 우산(牛山)선생의 후손으로 끼친 교훈을 받들어서 오직 충성된 마음과 의리 있는 심장을 지켰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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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도리와 이름 있는 절조를 길러왔기 때문에 세상 걱정을 차마 보지 못하여 적수공권으로 천 명이 넘는 저 억센 적군을 대항해서, 적들의 장수를 죽이고 군사들의 힘을 꺾어 의병의 이름을 크게 떨쳤으니 참으로 한 덩어리 담략이 보통 사람보다 지나친 자였다.
그러나 하늘이 마침내 복을 주지 않고 먼저 죽게 하니 어찌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의리가 있는 곳에는 성패와 잘되고 못된 것은 의논할 것이 아니다. 그 높은 충성과 외로운 절조는 비록 천 년을 지난다 할지라도 오늘의 일을 의논하는 선비들은 반드시 정론(正論)이 있을 것이다.
아아! 슬프다. 대략을 이와같이 기록하여 공손히 그날을 기다릴 뿐이다.
계사(癸巳) 섣달 상순(上旬)에 죽산(竹山) 안규열(安圭烈) 삼가 지음.
부장(副將) 소휘천(蘇輝千) 사실략(事實略)
공의 이름은 휘천(輝千), 자는 춘화(春花), 성은 소씨(蘇氏),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임진(壬辰)년에 창의(倡義)했던 증병조참의(贈兵曺叅議) 상진(尙眞)의 9대손이며 준술(準述)의 아들이다.
고종(高宗) 경진(庚辰)에 나서 용맹과 힘이 보통에 뛰어나고 뜻과 기질이 강개하여 본래부터 담산안공(澹山安公)과 더불어 의기로 서로 허여했었다.
무신(戊申)에 국가의 망극한 변고를 당하자 드디어 담산(澹山)을 좇아 거의하기로 결심하고 그 아버님에게 고하기를,
“어려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효도이고, 커서 나라 일을 돕는 것은 의리입니다. 이제 저는 장차 동지들과 함께 거의해서 나라와 사직을 편하게 하려 하오니 부득히 동생 휘열(輝烈)에게 부모 봉양하는 것과 집안 일 보살피는 것을 맡기고 저는 군대를 따라가야 하겠읍니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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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그 아버지도 장하다고 여기고 이를 허락했다.
공은 이 승낙을 받고 족숙 천술(千述)과 함께 칼을 집고 일어서서 의병을 모집하여 담산(澹山)과 함께 동소산(桐巢山)에서 여러 군사와 맹서하고 약속을 정했다. 파청(巴靑)까지 행군하여 격전한 끝에 적의 괴수를 죽이고 적을 추격하여 흥양(興陽)·순천(順天) 2곳에서 교전하여 의병의 이름을 더욱 떨쳤다.
그 후 혹은 교전도 하고 행군도 하면서 동복(同福)·화순(和順)·월송산(越松山) 고개까지 따라가서 연승했다.
이어 서봉산(棲鳳山)에 이르러 험한 곳에 웅거하고 기이한 방략을 써서 노획한 것이 더욱 많았다.
또 진산(眞山)에 이르러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것은 의병의 싸움 중에서 이르는 바 보성대첩(寶城大捷)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묵석(墨石)에서 대전을 벌였을 제 공이 먼저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다가 불행히 적의 포탄을 맞고 죽었다.
아아! 슬프다. 대개 공은 포의(布衣)의 선비로서 나라를 붙잡아야 한다는 뜻이 간절하여 외짝 칼로 왜적들을 쾌히 죽이고 그 분노를 설치했으니 이것은 참으로 장사(壯士)라 하겠다.
또 그 의리의 열렬한 것은 천추(千秋)에 없어지지 않을 것인데 하늘이 어찌 공을 돕지 않고 이에 이르게 했는가? 슬픈 마음 견딜 수 없도다.
이에 그 사적의 대략을 기록하여 붓을 잡는 군자의 채택할 자료로 하는 바이다.
갑오(甲午) 3월에 진주(晋州) 소신규(蘇臣奎) 지음.
서기(書記) 임정현(任淨鉉) 사실(事實)의 대략
임공(任公) 정현(淨鉉)의 본관은 관산(冠山)이니 관산군(冠山君) 광세(光世)의 자손이다.
나면서부터 아름다운 바탕이 있어 총명하고 강개하며, 재주와 생각하는 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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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뛰어나고 학문도 온자하며 필법도 굳세었다.
성품이 또 효도하고 우애하며 옛일을 좋아하며 인륜을 사랑했기 때문에 충신과 열사(烈士)의 전기를 읽기 좋아했고, 또 천문(天文)과 술수(術數)도 좋아하니 남들이 많이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항상 나라 일이 혼란한 것을 걱정하여 매양 탄식하고 한숨을 지었다.
무신(戊申) 봄에 담산안공(澹山安公)이 거의하여 적을 칠 때에 공이 밤낮으로 와서 상의하고 계획하여 많은 방략을 제공했다.
담산공(澹山公)은 이것을 기뻐하여 공으로 기실(記室)을 삼고 조용히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파청대첩(巴靑大捷)과 대원(大原)·운월(雲月)·서봉(棲鳳)·진산(眞山) 등 여러 곳의 승전은 공의 공로가 많았다.
병티(並峙) 고개에서 교전할 때 불행히 적에게 붙잡혔으나 적을 꾸짖기를 더욱 굳세게 하여 굽히지 않고 죽으니 담산공(澹山公)은 슬피 울면서 제사를 지내 주고 온 군중도 눈물을 뿌렸으며 의사들도 그를 애석히 여겼다.
아아! 슬프다. 공은 포의(布衣)의 선비로서 나라 걱정하는 정성을 이기지 못하여 충성하고 격렬한 마음으로 의리를 잡고 적을 토벌했다. 불행히 중도에서 적에게 피살되었으나 그 충성과 의리는 천고에 스스로 남아 있으니 붓을 잡고 역사를 쓰는 군자들은 마땅히 이 재료를 채택하게 될 것이다.
갑오(甲午) 3월에 관산(冠山) 임낙기(任洛圻)는 삼가 기록함.
부장(副將) 임민호(任珉鎬) 사행략(事行略)
임민호(任珉鎬)의 자는 병국(秉國), 본관은 관산(冠山)이니 관산군(冠山君) 광세(光世)의 13대손이다.
그 할아버지의 이름은 호(浩)요, 호는 석천(石泉)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사년(思年), 호는 유담(柳潭)인데, 이들은 모두 선비로서 행검이 있었다.
병국(秉國)은 날 때부터 자질이 보통과 달라서 성품이 정직하며 힘이 세었으며 총명이 특이하여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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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서(兵書) 읽기를 즐겨하고 인륜을 사랑하며, 기품이 높고 담략이 커서 사소한 일은 생각지도 않고 항상 이름을 남기고 절조를 지키는 일만을 기대했다.
살림살이는 대단히 여기지 않고 군사일만 익혀갔다. 옛날 이름난 장수가 위급한 때를 당해서 기이한 방략을 계획하고 전쟁에 임해서 용감하게 싸운 일을 즐겨 이야기하고, 또 오늘날의 윤리와 기강이 없어지는 것은 사사집이나 국가가 반드시 망할 징조라고 매양 탄식하여 이를 분노하고 슬퍼하는 모습으로 혹 눈물까지도 흘렸다.
무신(戊申) 봄에 담산안공(澹山安公)이 의병을 일으킬 때에 병국(秉國)은 자청하여 여기에 따랐기 때문에 담산(澹山)은 기뻐하여 그로 부장(副將)을 삼았다.
병국(秉國)은 또 방략을 세워 기이한 계획으로 험한 곳을 잘 방어하며 능한 지모로 사세를 잘 판단하며 무엇이고 물으면 옳은 말로 충고했었다. 그리고 담산(澹山)은 이러한 지모를 잘 알고 받아들였었다.
파청(巴靑)·진산(眞山)에서 큰 승리를 거둘 때와 송곡(松谷)·갈치(葛峙)에서 노획할 때와 그리고 복내(福內) 시장에서 충돌할 때에도 병국(秉國)의 공로가 많았다.
불행히 시천(詩川)헌병대에 체포되어 광주(光州)재판소에 구금되어 갔다.
여기에서 왜적들은 그를 꾀고 위협하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했으나 병국(秉國)은 죽기로 맹서하고 항거하는 말로 끝끝내 굽히지 않다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렇게 되자 사방에서 백성들의 호소가 계속 이르고 저놈들도 역시 차마 죽이지 못할 마음이 생겨서 석방시켰다.
병국(秉國)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살아 있는 것이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여 매양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담산(澹山)과 함께 죽지 못하는 것을 한탄했다.
그는 이에 산골짜기로 들어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 나무꾼 행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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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자취를 감추고 죽는 날까지 세상길에 나서지 않으니 세상 공론들이 그를 장하게 여겼다.
태면(泰冕)은 공과 함께 친구인 때문에 그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여기 그 대략을 초잡아 당세의 붓을 잡고 역사를 쓰는 군자의 채택을 공손히 기다린다.
계사(癸巳) 섣달 중순(中旬)에 진원(珍原) 박태면(朴泰冕) 지음.
부장(副將) 김도규(金道珪) 사행(事行)의 대략
김공도규(金公道珪), 자는 인언(仁彦),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이조참의(吏曹叅議) 일송선생(一松先生) 현(俔)의 10대손이며 형국(炯國)의 아들이다.
감동리(柑洞里) 본가에서 낳아서 어렸을 때로부터 이상한 모습이 있었다. 몸이 강건하고 지기(志氣)가 호매(豪邁)했으며,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 밖에 나가서는 동료들과 함께 무사(武事)를 배우고 진치는 법을 연습했다.
매양 산이 돌고 물이 꼬부라진 곳을 만나면 반드시 진터를 세워 보려 했고, 살림살이는 돌보지 않으면서 항상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통분한 생각을 갖고 길게 한숨만 쉬었다.
이 때는 바야흐로 무신(戊申)·기유(己酉) 무렵으로서 왜적들은 이미 우리 나라를 집어삼키고 소위 통감(統監)이란 자가 왔었다.
공은 담산안공(澹山安公)이 거의(擧義)한다는 소문을 듣고 칼을 집고 쫓아가서 모든 시설과 방략에 대해서 기이한 계획을 많이 제공했다.
박곡(亳谷) 싸움에서 먼저 왜적의 괴수를 목 베이게 되자 백배의 용기를 갖게 되어 담산(澹山)은 드디어 공으로 부장(副將)을 삼았다.
공은 군대를 거느리고 적을 공격하며 노획할 때에 분대별로 정비하기를 법도가 있게 하며, 험한 곳을 웅거하여 기이한 방법을 벌였기 때문에 적을 목 베이고 포로로 잡은 것이 매우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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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월(雲月) 싸움에서는 먼저 대포를 쏘아 왜적의 장수를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병티(並峙)·진산(眞山)에서도 한 번도 의기를 꺾이지 않고 성공한 일이 많았건만 자기가 잘해서 공을 세웠다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공로를 윗사람에게 돌렸다.
또 공은 부하들과 함께 달고 쓴 것을 같이 겪어 술 한 잔이나 고기 1조각이라도 반드시 골고루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천운이 불행하여 담산공(澹山公)이 붙잡히게 되고 군대도 해산하게 되고 말았다.
이에 공도 역시 도피하여 이름을 숨기고 수10년 동안 강호(江湖)에 돌아다니면서 군사 일은 이야기도 하지 않고 항상 담산(澹山)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기고 그를 따라서 같이 죽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그러므로 자기 몸이 살아 있는 체하지 않고 물고기나 잡고 나무나 지는 노릇을 하며 자취를 감추어 마치 버려진 사람으로 자처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장하게 여겼다.
공은 젊었을 때에 집안이 가난해서 글을 배우지 못했으나 역량이 크면서도 정직하고 경위가 분명하며 충성과 의리가 본래부터 나타났었다.
어른과 늙은이를 공경하고 어린 젊은이를 사랑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재물에는 소홀했다. 그래서 구차하게 사소한 일은 하지 않고 큰 일을 성공 못한 것만 지극히 한탄했다. 일평생 동안 숨은 생활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여 바위 틈에서 죽기로 맹서했으니 과연 어질다고 하겠다.
옥기(玉基)는 같은 일가로서 공의 사실을 자세히 아는 때문에 간략하나마 그 대개를 써서 뒷 세상 공론이 크게 정해지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갑오(甲午) 3월에 분성(盆城) 김옥기(金玉基) 삼가 씀.
담산실기발(澹山實記跋)
아아! 이것은 담산실기(澹山實記)이니 하나의 엉성하게 만들어진 책이다. 어찌 사실이 있다 없다 하리오만은 여기에 하늘 이치가 항상 있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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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도 아주 죽어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겠다.
슬프다! 담산(澹山)은 한 밭갈던 지아비이고, 한 소먹이던 심부름꾼이었다. 조그마한 7척의 몸뚱이로서 머리에는 갓도 쓰지 못하고 뱃속에는 경서도 쌓지 못했으니 어찌 세상에 이 일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 떨어지고 못 쓰게 된 군사만 주워 모아 가지고 구구하게 백 번 자빠지고 천 번 엎어진 나머지에 여러 곳으로 출입하면서 저 하늘을 찌를 듯한 불꽃과 불어닥치는 조수를 막으려 하다가 필경에는 몸을 죽이고야 말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우리 나라 천여 년을 길러온 예의와 문물을 보답하는 동시에, 사람마다 모두 사람으로서 사람 노릇하는 것과 나라로서 나라 노릇을 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이었다. 또 이것을 저 뒷세상에까지 보여 준다면 이것은 하늘 이치가 항상 있고 사람의 마음도 죽어 버리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슬프면서도 또한 영화로운 일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 엉성한 책일지라도 책장에 산더미처럼 많이 쌓아 둔 책보다도 낫다 할 수 있겠다. 또 이 밭갈던 지아비와 소먹이던 심부름꾼 일지라도 저 뱃속에 경서를 감추고 입으로 인의(仁義)를 말하는 선비보다 낫다 하겠다. 어찌 이것을 적은 일이라고 보겠는가?
이와 같다면 1편의 전기(傳記)만 가지고서도 넉넉히 알 수 있겠는데, 무엇 때문에 기(記)니, 표(表)니, 비문이니, 축문이니, 만사(輓辭)니, 제문(祭文)이니 하는 것과 또는 그의 막하(幕下)에 있던 모든 사람까지 각각 그 사실을 기록하게 되었느냐 하면, 이것은 여러 가지로 쓰고 한 가지만 쓰지 않는 것이 역시 역사 쓰는 사람들의 통례인 것이니 어찌 말 수가 있겠는가?
그 아들 종련(鍾連)이 천리 길을 도보로 걸어서 시체를 모셔다가 장사 지낸 다음 묘비를 세워 그 사실을 표하고 또 파청(巴靑) 고을의 승전한 장소에 큰 비석을 세워 그 사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장차 이 실기를 출판하여 영원토록 보여 주겠다는 의미로 나에게 요청하여 이를 수집해 보자고 한다.
내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기고 또 그 뜻을 슬피 여기어 책에 대한 차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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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잘못 전하는 것을 시정하여 여기에 주는 것이다.
임진(壬辰) 동짓달 보름날 죽산(竹山) 안종남(安鍾南) 지음.
윗 글은 안의사(安義士) 담산공(澹山公)의 실기(實記)이다.
공은 본래부터 집안이 가난하여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해서 어머니를 잘 봉양했다. 그는 사람됨이 강개하고 뜻과 절조가 있었는데, 이것은 모두 천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않았어도 능히 일을 처리해 나갈 수가 있었다.
을사(乙已)·정미(丁未)년 간에 변고를 당하자 벌떡 일어나서 눈물을 씻고 몇몇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토벌하는 데 백 가지로 설계하여 승리를 거두고 목 베이고 노획한 공적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필경은 형세가 다하게 되자 적에게 붙잡히고 말았으나 끝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그 당시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모두 공과 같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죽기에 임해서도 굴복하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어찌 없어지게 되었으며 임금이 어찌 감옥살이하듯 자유를 잃게 되었으며, 수 백만 백성이 갈 곳이 없게 되고, 수천 년 내려온 의란 문물이 더러운 흙덩이 속에 빠지게 되었으랴? 슬프고 원통한 일이다.
세상이 갑자기 변하게 되자 나라에서 표창하는 은전은 없어졌다 할지라도 떳떳한 마음을 잡는 하늘은 그대로 있기 때문에 모든 선비들의 찬양하는 문귀가 뒷세상에 증거할 수가 있고, 남의 신하와 자식된 사람을 위해서 권장 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 어찌 갸륵한 일이 아니겠는가?
공의 조카 종련(鍾連)이 공에게 입후하여 제사를 주장하는 동시에 시체를 모셔다가 장사 지내고 비석을 세우기까지 온갖 정성을 다했다. 또 공의 사적을 수습하고 모든 선비들에게 글을 받아서 실기(實記)를 출판하여 세상을 격려하려 하니 그 선열(先烈)을 추모하고 덕의(德義)를 숭상하는 효도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일을 능히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글은 잘하지 못하지만 그윽히 그 충성과 효도에 대한 감동을 참지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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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실기(實記) 뒤에 이같이 쓰는 바이다.
신묘(辛卯) 중양절(重陽節)에 탐진(耽津) 최상률(崔相律) 지음.
우리 홍릉(洪陵) 무신(戊申)·기유(己酉)년 무렵에 나라 운수가 망극하게 되자 적신들이 나라를 팔아먹어 이를 왜놈이 삼켜 버리게 되었다.
이에 사방에서 의사들이 의리를 앞세우고 적을 토벌하여 인(仁)을 이루고 의리를 취한 자가 많았으니 담산안공(澹山安公)도 그 중의 한 분이다.
공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은봉선생(隱峰先生)의 후손이다.
공은 키가 7척이 넘지 못하나 소리는 웅장하고 기품이 호맹(豪猛)하며, 꾀와 생각이 넓고도 깊었고 능히 병법에도 익숙했다. 충성과 효도는 그 천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배우지 않고서도 능히 행할 수가 있었다.
어렸을 때로부터 곤궁하여 고용살이를 해서 생활했으나, 마음만은 만 사람이라도 당할 만큼 씩씩했었다. 매양 시국이 그릇되는 것을 보고 밭 갈던 일을 걷어치우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왜놈은 우리 나라의 원수놈이다. 그놈들과 함께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지 않겠다.”
하고 즉시 의병을 모집하자 용사들이 구름 모이듯 따라왔다.
공은 험한 지대에 웅거하여 기이한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여러 번 승전하니, 왜적의 괴수까지도 도망해 버리고 우리 군사는 기세를 펴게 되었다.
이에 의병의 소문이 크게 떨쳤는데 하늘이 어찌 복을 주지 않고 공을 체포당하게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그 당당한 절조와 의리를 사람마다 모두 감탄하며 애석하게 여겼던 것이다.
아아! 슬프다. 의리가 있는 곳에는 이기고 패하는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거니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는 것도 역시 하늘의 시키는 일이라면 또한 어찌 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국가가 망하게 될 때는 모두 소인(小人)놈들이 일을 꾸며서 되는 법이다. 우리 나라 정치를 말하자면 그런 중에서도 더욱 참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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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겠다.
소인들만 조정에 가득차 있고 어진 이는 들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법도와 기강을 유지할 줄 알지 못하고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찍부터 공 같은 이로 하여금 조정에 참여시키고 여러 가지 방략으로 같이 보좌하게 되었다면 그 어려운 경지를 무사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말았으니 또한 천추에 유한이 된다고 하겠다.
공이 졸한 뒤에 온 도내에 사림(士林)들이 슬피 여겨 충효당(忠孝堂)에서 위령제를 올리고 또 시골 안 선비들이 비석을 세워 그 공적을 기념했다. 그리고 어진 아들 종련(鍾連)은 또 실기(實記) 1권을 엮어서 뒷세상에 전하려고 하는데 임군낙기(任君洛圻)가 그 일을 보다가 나에게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감개한 마음을 견디지 못해서 여기에 이 말을 써서 돌려주는 바이다.
임진(壬辰) 동짓달 상순(上旬)에 유주(儒州) 유영(柳泳)은 삼가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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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규홍(安圭洪, 1879∼1909)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죽산(竹山). 별명은 계홍(桂洪)·안담살이·안진사. 자는 제원(濟元), 호는 담산(澹山). 전라남도 보성 출신. 아버지는 달환(達煥)이다. 매우 가난하여 머슴살이(담살이)로 편모를 봉양하였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점차 심화되어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거의토적하기 위하여 담살이 동지들과 모의하는 한편, 주인에게 거사할 자금으로 전곡포백(錢穀布帛)을 요구하였다. 또한, 보성의 우국지사인 참봉 안극(安極)의 묵계 아래 안극의 집에 침입, 그의 무기와 가재를 몰수하고 점차 동지를 규합하였다. 1908년 2월 관북 출신 강성인(姜性仁)이 무장한 의병 수십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병력은 70명으로 불어났다. 먼저 보성 동소산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데, 강성인의 민폐가 매우 심하자 그를 참형시키고 군기를 엄히 하였다. 이로써, 대오를 정비하고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진을 부장·참모장·선봉·좌우익부장·유격장·좌우부 참모·서기·군수장(軍需將)으로 편제하였으며, 휘하에 염재보(廉在輔)·송기휴(宋基休)·이관회(李貫會)·송경회(宋敬會) 등의 용장이 활약하였다. 1908년 2월 일본군이 보성군 조성에서 벌교·순천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여 수색작전을 전개하자 평소 이 일대의 산악지리를 자세히 파악, 파청의 험한 곳에 복병을 매복시켜두었다. 미도(米戶)와 히라이(平井)의 2개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들이닥치자 일제히 맹사격을 가하여 적군을 괴멸시킨 뒤 적의 무기와 서류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여 대원산으로 들어가 호군하였다. 이것이 파청대첩이다. 이에 일본군은 복수하고자 대원산을 포위, 공격하여 적지 않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한편, 장경선(張京善)을 참모로 임명하고 병력을 증강하여 1908년 8월 24일 진산에서 수비대 및 기병과 격전을 벌여 대첩을 거두었다. 또, 화약과 군량을 준비하여 태세를 갖춘 뒤 1909년 3월 25일 원봉에 주둔하고 있던 적을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진산대첩과 원봉대첩으로서 파청대첩과 더불어 보성의진의 3대대첩이다. 보성 병치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유격장 안택환(安宅煥), 서기 임준현(任準鉉)이 전사하는 등 그뒤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장흥 백사정(白沙停)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패전의 원인을 분석, 적에게 의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토왜(土倭)의 제거가 시급함을 깨닫고, 복내시장과 호곡 등지에서 토왜섬멸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의병·혈족을 통한 회유·협박 및 기만책으로 점차 의진 이탈자가 늘자, 1909년 7월 일단 의진을 해산하였다. 같은해 9월 25일 귀향하던 중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에서 부하 염재보·정기찬(鄭基贊)과 함께 토미이시(富石)부대에 붙잡혀 광주에 수감, 그뒤 대구로 옮겨진 뒤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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