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Essay 225 - 중종(中宗)의 몰인정
♣ 歷史 Essay 225 ♣
☞ 중종의 몰인정
중종(中宗)은 이기적이고 냉혹한 사람이었다.
1515년 3월 장경왕후(章敬王后)가 훗날 인종(仁宗1515-45)을 낳고 6일 만에 죽었는데
당시는 반정세력들이 모두 죽고 중종이 마음껏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때였다.
그래서 갓난 원자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를 복위하자는 목소리가 있었고
실권자 조광조(趙光祖)도 간원했지만 중종은 이상하리만치 민감하게 신씨에 대한 언급자체를 막았다.
원자가 있는데 폐비를 복위시키면 혼란이 있을 거라는 핑계였지만 실제의 이유는 뻔했다.
거창 신씨는 이미 몰락했고 장경왕후의 삼촌인 박원종(朴元宗)이 충성을 보였기에
명문 파평 윤씨(坡平尹氏)가의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歷史 Essay 226 - 윤씨(尹氏)들의 자충수
♣ 歷史 Essay 226 ♣
☞ 윤씨들의 자충수
1515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왕(中宗 1488/1506/1544)이 조강지처의 복위를 꺼리자
눈치 빠른 모후 정현왕후(貞顯王后 1462-1530)가 나서 자기 문중에서 연이어 왕비를 뽑기로 작정하고
1517년 장경왕후의 오라비 윤임이 천거한 문정왕후를 세 번째 왕비로 간택한다.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중종의 모후 정현왕후와 두 번째 장경왕후에 이어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65)는 조선의 네 번째로 파평 윤씨(坡平尹氏) 왕비가 된다.
그녀를 천거한 윤임(尹任1487-1545)의 대윤 세력은 나중에 아들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남편 생전시 몸을 사리던 문정왕후에 의해 몰살당하니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었고
조선(朝鮮)은 다시는 파평 윤씨를 왕비로 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