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아리랑/ 惠庵 박 상 국
태백산의 지맥인 연악산이 낙동강을 끼고 연봉을 이루어 마치 봉황이 비상하려는 모습 단종때의 사육신(死六臣) 하위지(河緯地)선생이 태어나자 비봉산 앞을 흐르는 냇물이 사흘 동안 붉게 흘렀다하여, 단계천이라 명명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하위지의 호(號) 또한 단계(丹溪)인 단계천이 있는 선산(善山) 선산의 관문인 감천교는 그 옛날 왕건(王建)이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을 치고자 일리천(一利川: 감천)을 중심으로 양군이 대치 하던 중 갑자기치는 번개에 놀라 백제군이 도망쳐 이에 기세를 올려 퇴각하는 신검을 사로잡았다는 일화가 있는 곳이다 옛날 울창한 소나무 숲에 정자(亭子)가 있어 송정이라 전해진 곳엔, 속리원(俗離院)이 있었다 하여“속리”이고, 잣나무 울창했던 뒷산은 백산(柏山) 푸메(豊厓) 마을 앞 풍덕지(豊德池)에만 사는 풍덕새가 울면 풍년이 든다는 전형적 농촌마을이었던 지금의 송정동은 구미시청. 경찰서. 문화예술회관. 교육청. 그리고 은행 백화점이 자리한 구미의 중심지(中心地)이다 솔밭이 우거진 뒷산은 그 옛날 후삼국(後三國)시대에 왕건장군과 최후의 일전을 하기위해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장수가 이끄는 백제군사가 주둔했던 울주산(蔚州山)이 있는 지금의 신평동은 낮은 언덕인데도 동남쪽으로는 구릉지대 였고, 북쪽으로는 깍아지른듯 한 절벽이며 그 앞으로는 울주천(지금의 구미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울주천 넘어는 넓은 들 발검평야(발검들) 가 펼쳐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요긴한 곳이었다.
금오산 아래 펼쳐진 시가지 원평동은 김천에서 금오산 남쪽 부산고개를 힘겹게 오르던 기차가 경부선로를 구미 쪽으로 우회하게 되어. 1916년 구미역이 들어서며 황무지에 이룩한 시가 지이다. 지금 구미역 자리에는 둘레가 20m정도 되는 큰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는 황소산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로 그 모양이 쇠죽통 같다하여 죽통바위라 하였다. 칠곡군 인동면 이었다가 구미시로 통합된 인동, 임진왜란 때 망우당곽재우(忘愚堂郭再佑) 장군이 항전했던 천생산 아랜 구미2.3 공단이 저리하고 있다 인동향교와 동락서원이 있으며, 옛날에는 동락나루 비산나루를 배를 타고 건너야 했으나 지금은 구미대교가 놓여있다. 인동은 당시 270여호의 초가집으로 형성된 마을이었으며, “반달밭”이란 마을에 지금의 3공단이 자리하고 있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던 선산구미 금오산 상봉분지에 10여 호가 살았는데 이곳이 성안 고랭지 성안배추를 안주하여 마신 감자로 빚은 감자 막걸리가 유명 했던 곳, 영지버섯이 많이 난다고 지산(芝山)이라 했고, 시무실 사창. 수락등으로 불렀던 형곡동은 구미의 제2상권을 유지하고 있다
소로골 이었던 도량동, 갓골이었던 봉곡동은 아파트가 산처럼 들어서며 형성된 시가지이다. 낙동강 천리뱃길 중앙에 위치한 강정나루터 강가 우뚝 솟은 곳에 고산(孤山)이 있는데. 조선조시대의 명필로 초서(草書)의 대가인 초성황기로(草聖黃耆老)선생이 율곡의 아우인 이우(李佑)를 사위로 맞고 벗 삼아 고산에 정자를 짓고 매학정(梅鶴亭)이라 이름 하여, 매화나무를 심고 학 (鶴: 두루미)과 더불어 지냈던 곳이 있는데. 지금은 숭선대교가 놓여있고 강 건너편에는 옛날에 이룩한 방풍림(防風林 솔밭) 이 있는 강정나루터 강정마을, 신라 35대 경덕왕(757) 숭선군(崇善郡)일 때 군주가 상주하였고, 조선조 때는 관심원(官心院:국립여관)이 있던 곳.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 고려 왕건(王建)장군의 마지막 격전지인, 어갱이. 점갱이 들판이 펼쳐진 고아면 관심동, 구미가 시(市) 승격을 앞둔 1972년 만해도 전형적 농촌마을로 가난을 대대로 물려받고 살아 온 땅이다.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고 공단(公團)이 들어서고부터 구미(龜尾)는 차츰 도시(都市)로 모습을 탈바꿈 한 것이다. 저자(著者)가 막 제대(除隊)하고, 경부고속도로 현장 감독관(監督官)으로 왔던 1972년 5월만 해도, 시내(市內) 중앙통 좁은 길 양편엔 낡고 허술한 양철지붕들이, 역(驛)에서 내리는 손님을 맞고 있었으니 말이다.
고속도로 공사로 사람이모이고, 공단이 들어서 코오롱. 한국도시바 오리온전자. 가미전자. 고려전기. 등 1공단이 가동되면서 구미는 급격히 늘어나는 인구에 흥청흥청 살맛을 가졌었으니. 그때 그 시절을 회상(回想)하면 아이러니한 일들도 많다. 비산동 신평동에 집을 가진 사람들은 방(房)을 늘여 셋방을 만들었다. 한집에 많은 집은 50명이 넘는 아가씨들이 새들어 살았으니, 웃지 못 할 일이 왜! 없었을까? 이렇듯, 구미가 번성하기까지 우리가 잊고 지내는 과거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 아프다. 배고팠던 보릿고개 그 빈곤(貧困), 새마을 정신(精神)으로 퇴치한 조국(祖國)의 무궁한 영광(榮光) 상모동 초가에서 태어났으니, 우리 구미사람들은 자랑스러워해야 옳으리..... 축복의 땅 구미아리랑 아리랑, 대혜폭포 우렁찬 물소리 조국근대화(祖國近代化)의 표상(表象)이다. 소금 배 드나들던 구포나루 거슬러 올라 홍등가(紅燈街) 불 밝혔든 하장의 저잣거리 소금 짐 지고 연악산을 넘었든 그 열망이 4공단이 되었다. 대대(代代)로 이어갈 우리들의 웅지(雄志) 한시라도 방관(傍觀)하거나 소훌 해선 아니 되리니, 아들아! 딸아! 노래 부르자! 아리랑 아리랑 구미아리랑을.....
[블로그] 혜암의 시 향기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반추라고 생각한다, 慶北 예천에서 태어나 “月刊” 文學世界에서 詩와 隨筆을 登壇하였다 2004-2005년 “月刊”문학세계 운영위원 한국 문인협회 구미지부 전/ 부지부장을 역임하고 시집/ 연꽃잎 터지는 소리/ 분청사기 그릇에 담긴 사랑 /꿈꾸는 미루나무/ 그대나루에 앉아 붉은 해 지는 것 보았다. 에세이/ 낙타가 하늘로 가는 것 보았다 장편소설(戱曲)/ 전장의 꽃 / 어둠의 딸/이 있으며 사단법인 재능문화와 한국일보가 주관하는 전국 시낭송 경연대회에서 2006~2007년 (慶北大會) 우수상을 받아 慈善公演團體 龜尾文化마당(詩 낭송. 詩劇. )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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