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3.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4. 모세의 명한 예물
8: 3.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나아와 그의 병 고침을 간청한 그 나병환자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7: 7-8).
1]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구약 율법에 따르면 나병환자와 접촉한 자는 나병환자가 상징하는 죄성(罪性)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하여 의식법상 똑같이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다.
율법대로라면 예수는 이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심으로써 부정한 자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율법의 완성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즉, 그는 율법에 갇혀있지 않고 율법을 지배하신다. 더욱이 구약의 제사장들은 나병환자의 치유 여부를 판별할 때 그에게 접촉해도 부정하지 않았다.
* 레 11: 40 -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주검을 옮기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 레 13: 46 -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지니라.
* 레 13: 2-8 – 2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3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4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5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6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7 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8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예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셔도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지 않게 된 것은 그분이 곧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해 이 땅에 오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심을 증명해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예수는 부정한 자에게 '대심으로'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 역(逆)으로 부정한 자가 주님의 '대심으로' 정(淨)하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해졌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의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이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롬 4: 17)의 바로 그 능력이었다.
어떤 이들은 '손을 내밀어'란 본문의 표현을 능력 행사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다.(J.D. Kingsbury) 이는 잘못 이해한 해석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손을 펴신다'는 말이 신인 동형 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이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긴 하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손을 내미신 것은 실제 병자를 만지기 위함인 것으로서 상징적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부언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말씀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 말씀에 기록된 사건을 사실 그대로 이해해야지 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의 메시지를 방해받게 해서는 안 된다.
2] 이르시대 내가 원하노니
2절의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문둥병자의 믿음에 찬 간구에 대한 신적 권위의 답변이다.
이는 결국 당신이 원하시면, 즉 병을 고쳐주시겠다고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권세와 능력의 말씀이다.
3]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이는 육체적 치유와 더불어 의식적 정결까지를 포함한(문둥병 판별을 맡은 제사장으로서) 완벽한 치유를 뜻한다(Westcott).
예수님의 치료는 의학적 치료와 달랐다. 의학적 치료는 대개 점진적이고 많은 경우에 불완전하다. 심각한 질병의 경우, 부득이 수술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치료나 회복보다 차선책일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졌다. 그것은 그의 완전한 신적 능력의 치료였다.
4]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치유(healing) 선언과 동시에 일어난 결과이다. 이는 예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능력의 초월성을 입증해준다. 실로 예수는 손(죄인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상징)과 말씀(어떠한 장애도 극복 치유시키는 능력)으로 한 생명을 새롭게 변화시키신 것이다.
사람의 의학적 치료는 대개 점진적이고 많은 경우 완전한 방법이 아니다. 중한 질병의 경우, 수술을 통하여 절단할 수 있지만 받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흔히 우리의 의학적 치료는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기보다는 차선책을 구한다.
그러나 주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했다. '즉시' 깨끗하여졌다. 그의 신적 능력은 그의 신적 인격을 증거 한다. 그는 단순히 유대인의 청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오신 분이다. 그 증거는 그의 능력의 일들이며, 그중의 하나가 여기 나병환자를 고치신 사건이다.
이 치료의 사건은 영적 구원에 비교될 수 있다. 모든 죄인들은 영적 나병환자와 같다. 그러나 주께서는 원하시는 자를 즉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죄인들을 죄에서 건져내시고 새로운 삶을 주시는 구주이시다.
5]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이다. 주님은 이러한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메시야 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도래를 선포하셨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능력 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기적을 베풀고자 하는 대상의 믿음과 함께 역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거기에는 나병환자의 자발적인 행위가 나타나 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건설을 비롯한 모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힘과 자발적인 노력이 함께 있어야 함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1) 나병환자의 믿음
① 예수님을 찾아왔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사실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병자가 찾아와 '그 앞에' 섰다는 것일 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수 있는 것이 어떤 장소에 나아감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뜻하고자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면 된다. 이것은 어떤 준비 태세를 의미합니까? 어떤 것을 들을 수 있고, 말씀하여 주기를 원하는 간절한 자세를 말한다. 이러한 자세를 갖추었을 때 그의 구원과 축복이 임할 수 있다.
② 예수님께 절하였다.
우리는 병자가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겸손이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자세는 엎드려 절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 자세는 자기를 포기하는 자세이며, 그의 명령대로 하겠다는 자세다. 성도들에게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이러한 자세가 요구된다.
둘째는 경배다.
절하는 자세는 자기를 종으로 낮추며 상대방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세이다. 그러므로 병자가 예수께 나아와 엎드렸다는 것은 예수님이 주되심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가장 빨리 움직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러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③ 예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의지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병자는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이 있음을 확신했다. 두번째로는 그 능력이 더럽고 추한 자기에게 베풀어지기를 위해선 자기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자기와 같이 추하고 더러운 자를 뜨겁게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이 그를 담대하게 예수님께 자기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누구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다.
(2) 예수님의 치료하심
① 안수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병환자가 가졌던 확신을 배반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본다. 예수님은 피고름이 나고 육체가 썩어가는 냄새나는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자기의 병약하고 추한 자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친히 입증하셨다. 말씀만으로도 능히 환자를 깨끗케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에 손을 대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는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흉한 죄의 모습 그대로 나병환자와 같은 확신으로 주님 앞에 나오기를 원하신다.
②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태초에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씀으로 인생의 삶의 원리와 근거로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나 힘이 우리를 살릴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인간을 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다.
③ 깨끗하기를 원하셨다.
성도는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주님이 소원하시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받는 것이며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매일매일을 죄 가운데서 죄로 인한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도 이러한 인생들을 향하여 말씀하신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우리가 주의 능력에 대한 확신으로 겸손하고 간절한 자세로 주를 바라고 그의 도우심을 기다린다면 주님의 창조 능력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8: 4. 모세의 명한 예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
예수님이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병 고침이 그가 세상에 오신 주된 임무가 아니었음을 보인다.
근본적으로, 그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었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하여 오셨다.
* 마 9: 13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눅 5: 32 -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또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복음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었다.
* 막 1: 38-39 –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 막 16: 15 -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가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지만, 그것은 단지 부수적인 일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1) 공관복음서에 수차 거듭되는 예수의 함구령 중의 하나로서 마태복음에서는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 마 12: 16 -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 마 16: 20 -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마 17: 9 -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 막 3: 12 -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 눅 8: 56 -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2) 예수님이 이 같은 명령을 내리신 이유
Ⓐ 이적에 따른 허황된 소문이나 백성들의 그릇된 신앙관을 방지하시기 위해,
Ⓑ 치유 받은 자의 교만을 예방키 위해,
Ⓒ 유대인,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견제와 시기를 받고 이로 인해 복음 전파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Plummer) 등이 있다. 마지막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예수께서는 허다한 무리가 목격하는 가운데 이적을 베푸셨기 때문에 당신의 소문이 전파되는 것을 막을 의향은 없으셨다. 단지 치유 받은 자가 율법의 예를 따라 제사장에게 나아가기 전에 미리 이적(miracle)의 소문이 전파됨으로써 나타날 제사장의 편견 어린 판결을 의식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사장들이 순수한 의식으로 그 치유를 받아들이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치료받은 자가 함구령을 무시함으로써 그 후로 복음 전파에 많은 장애를 맞이하게 된다.
* 막 1: 45 -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병자들을 고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은 영적 구원보다 단순히 육신의 병 치료에 관심을 두기 쉽다. 그러므로 병 치료를 선전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부수적이다. 중요한 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2]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예수님은 고침을 받은 이에게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병 고침 받았음을 확증하고 또한 율법의 규정을 지켜야 함을 보이신 것이다.
①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하게 이루기 위해 오셨다.
* 마 5: 17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앞 절에서 예수는 율법의 소극적 조항을 적극적으로 극복하셨지만 그것은 율법을 부정하고 파괴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보듯이 레 13: 4-17의 나병 규례에 따를 것을 당부하심으로써 예수는 율법을 이기고 극복하시지만 율법을 파괴하려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들어주고 완성하는 방법을 택하셨다.
② 문둥병자의 정결 절차는
ⓐ 신적 권위자인 제사장의 판결을 받고 (레 13: 16-17),
ⓑ 정결의 선언이 주어지면 산새 두 마리와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헌상하고(레 14: 4),
ⓒ 8일 후 흠 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를 바쳐야 했다(레 14: 8).
이런 의식법상의 규례는 예수의 운명 시에, 구약의 모든 의식 규례를 집약적으로 상징하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므로 폐지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구약 의식의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으나 내용은 존중해야 한다.
* 히 10: 14-18 –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3]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문둥병자가 율법 의식에 따라 완치된 사실을 확증함으로써 율법을 통해 예수의 능력과 권위를 인증하게 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율법은 예수께서 원하기만 하면 어떤 질병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도구의 역할, 곧 예수의 권능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4] 제사장을 찾아가라.
우리는 지극히 작은 사건 속에서 예수님의 깊고 세심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마친 후 산에서 내려오실 때 병고침을 원하여 찾아온 나병환자를 아무 조건 없이 치료하신 것으로 그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친 후에 그가 완전히 나았으니 모세의 율례를 따라 법적 사회적으로 보장을 받도록 안심시키며,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 것을 함께 권면하셨다. '이제 제사장을 찾아가서 네 몸을 보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살펴보자.
(1)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① 소동을 막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직무를 생각하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일이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을 자기의 사역을 돕는 도구나 방편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고친 사실이 사람들에게 요란스럽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이적이 사람들의 사행심만 자극할 뿐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다.
② 이적이 예수님의 사역 목적을 가릴 염려가 있다.
이적은 단순히 이적으로 그쳐야 한다. 우리는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어떠한 일이든지 못하시는 것이 없음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 현상에만 집착하고 거기에만 매어달리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이적이 인간들에게 전파해야 할 예수님의 사역의 메시지를 가리울 염려가 있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본문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이적을 하시고 나서는 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③ 장로를 초청하라.
오늘날에도 우리의 주변에는 수 많은 질병과 환우들이 존재한다. 그러면 교회는 세상의 의사와 병원에 이들을 떠맡기고 모른 체할 것인가? 사도 야고보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 14)고 하였다.
(2) 법적인 확인을 받아라.
① 예수님의 치유가 완전한 것임을 확인받으라.
당시의 나병은 불치병으로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병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병의 발병과 치유를 제사장이 확인하게 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병자를 치료하신 후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으라는 명령을 하신 것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그를 완전하게 치료하셨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시에 그가 사회에 조화되어 거리낌 없이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성경 어디에서든지 항상 완전한 치료를 하셨으며, 이는 모든 사람이 온전한 가운데 세상을 살도록 함이다.
② 법의 보호를 받아라.
신앙인 중에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은 세상과 상관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들은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고 세상의 모든 문화와 문명을 등지고 산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과 무관할 수 없다.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인간이 타락한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구속사가 전개되는 장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성도들이 삶을 살아가는 곳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곳이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세상 법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문둥병자에게 가서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원리에서 세상의 법적인 보호를 받으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3) 율법의 규례를 따르라.
모세는 나병이 치유되었을 때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므로 완전한 치유의 의식을 행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말씀을 비추어 볼 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의 규례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입증하라'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시의 사회적 제도와 율법을 얼마나 중히 여기셨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요 완성하러 오신 분이심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으로 이미지를 가질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분명 예수님은 친히 율법을 가르치신 분이요, 몸소 지키신 분이요, 그것을 완성하신 분이다. 우리는 본문과 같은 내용을 복음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도 율법이 말하는 율법 정신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고난 후에 영광을 나타내자.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 간구해야 한다. 고난은 우리에게 힘든 일이지만 유익이 있는 일이다.
고난을 겪을 때가 곧 하나님께 기도할 때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환난과 고난의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아야 한다.
* 시 50: 15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시 119: 67, 71 – 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유익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낙심치 말고 힘써 기도해야 한다.
둘째, 겸손하게 경배하자.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겸손히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예수께 나아오지 않았을 때 그 나병환자는 그에게 나아왔다. 그는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주께 나아왔고 그에게 엎드려 절하였다.
불치의 병인 나병이 그에게는 오히려 주 예수께로 나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고난은 그의 어두운 마음에 깨달음을 주었고 교만한 마음을 깨뜨려 온유하고 겸손케 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과 주 예수께로 나아오지 못한다.
주 예수께서는 그 나병환자를 고쳐주셨다. 불치의 병인 나병을 고쳐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겸손히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
셋째, 죄 사함을 받자.
우리는 나병 치료보다 더 중요한 죄 사함을 받았다. 나병 치료의 사건은 죄 사함의 구원에 비교될 수 있다.
영적으로, 모든 죄인은 나병환자와 같다. 죄는 나병보다 더 무서운 죄다. 죄는 모든 죄인을 영원한 지옥의 멸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든 자의 모든 죄를 즉시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의 신적 구주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