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현은 눈앞에 앉아있는 28살먹은 능구렁이를 바라보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어릴 때부터 자주봐오던 주치의의 하나뿐인 외동아들로, 가끔 찾아와 함께 놀거나 과외를 시켜주는등 오랫동안 안면이 있던 사이였지만 안정현 저리가라할정도의 능구렁이였다. 지금도 사람속을 박박 긁는 말을 서슴없이 하며 빙글빙글 웃는 모습에 칠현은 과연 이 인간을 부른게 잘한일인지 고민했다.
"...... 정.동.욱.씨. 후우...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해주겠습니까?"
"아아~ 당할 때의 상황과 느낌을 자세히 서술해 달라고 했어."
칠현은 능청스런 동욱의 말에 자동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오른손을 겨우 달래었다. 어릴 때부터 자주봐온 주치의에게 비밀리에 정신과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사를 구해달라고 한게 실수였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되버린.... 그것도 정신과전공을 해버린 자신의 아들을 보낼 것을 어느정도 예상했었지만, 몇 년만에 보는 이 인간이 여전히 원조 능구렁이였다는걸 잊고있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 완전 나 놀러왔소~ 라는 차림으로 즐겁게 오더니 상담을 한답시고 앉혀놓고 하는 말이 그 때 그 상황과 느낌을 상.세.히 서술하라는 것이었다. 칠현은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 흥분을 가라앉히곤 눈앞에서 여전히 빙글거리고 있는 동욱을 노려보며 단조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만... 덩치 큰 7명의 남자에게 말 그대로 강간당했습니다. 자세한 서술까지는 필요없을 것같으니 넘어가죠. 길이 1미터짜리 거대 지렁이 수십마리와 바퀴벌레, 송충이들이 온몸을 기어다니는 것은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흥분을 가라앉히고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말하는 칠현의 모습에 동욱을 호오~ 호오~ 해가며 열심히 경청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음.... 대체적인 느낌이군. 그런데 칠현군. 옛날에는 그래도 동욱형이라고 불러줬는데 정동욱씨라니 거리감이 생기잖아? 말까지 높여가면서.... 역시 예쁜 건 칠현이 제일이지만 우현이 녀석이 정말 귀여웠는데."
"...... 상담이나 계속하시죠."
"아아. 그래야지. 흠....."
능청을 떨던 동욱은 낮게 깔리는 칠현의 말에 헛기침을 한번하곤 진지한 얼굴로 의사다운 면모를 드러냈다.
"특별한 증상은?"
"피부간 접촉이 있으면 잔 경련이 일어나면서 구토감과 혐오감이 일어나더군요. 심하진 않지만 접촉한 사람을 난도질해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들기도 하고.... 그 외엔 없습니다만...."
동욱은 칠현의 마지막에 잠깐 표정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증상이야. 보통은 구토감이나 극심한 혐오감을 느끼는 걸로 마무리 되지만..... 상대를 난도질해버리고 싶다니..... 어쨌든, 다들 하는 말이겠지만 특별한 치료라는 건 없어. 가끔 상담을 하면서 편하게 쉬는게 제일 좋지. 이런건 시간이 해결하도록 자연스럽게 두는 것이 좋을꺼야. 뭐 여기까지 온걸로 봐선 너도 이미 알고있었겠지만."
"다행이군요."
"자자~ 그럼 상담은 여기까지 하고, 점심 먹어야지?"
"......................."
칠현은 장미정원에 있는 그녀의 비석에 기대앉아 벌써 와인한병을 거진 다 비워나가고 있었다. 낮시간이라 그런지 머리위로 쏟아지는 햇볕이 따스해 조금씩 올라오는 취기와 함께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평소 양주를 즐겨마시는 칠현이었지만 이곳에서만은 항상 레드와인을 가지고와 비석근처에 조금 뿌려주곤 몇병이든 내키는대로 마시고 있었다.
별장에 내려온지 대략 2주일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빌어먹을 증상은 여전했고, 그 때이후로 때때로 느껴지는 묘하게 자조적인 느낌 역시 가실 줄 몰랐다.
예전에 이 별장에 와서 얻던 안식은 온데간데 없이 그녀처럼 이곳에 묻혀가는 느낌마저 들기 시작했다. 칠현은 오후에 하는 잠시의 상담과 식사, 잠자는 시간만 제외하면 매일같이 이 무덤가에서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당신..... 당신도..... 이랬습니까? 이렇게 몸도 마음도 가라앉아가면서 이곳에 묻혀져 갔습니까?........ 쿡...... 항상 당신에게 바보라고 했었는데... 저도 바보가 되가는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미련스럽게 굴었는데..... 피는 못속이는지 이렇게 당신을 닮아가는건지도......... 훗............"
"웬 청승이냐?"
눈을 감고 중얼거리던 칠현은 기척없이 들려오는 동욱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망할 정현과 꼭 닮은 빙글거리는 얼굴로 와인병을 내미는 모습에 술병을 받아들어 옆에 내려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완전한 무시를 의식도 하지 않는지 옆자리에 털썩 앉더니 손에 들고 있는 와인잔을 뺐어가버리자 칠현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동욱을 노려보았다.
"어이.... 이러다 알콜중독될지도 모른다구. 난 어디까지나 의.사.로.써 조치하는 것뿐이야. ok?"
"흥...."
도무지 들어먹지 않는 동욱의 모습에 한숨을 살짝 내쉬고 하늘을 잠시 바라보던 칠현은 와인을 입에 머금고 갑자기 입을 맞춰오는 동욱의 행동에 잠시 움찔했다 몸에 힘을뺐다. 동욱이 혀를 자극해와 와인을 삼키도록 유도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꿀꺽 삼키고 나자 잠시 눌러참던 것이 한계였는지 늘어뜨리고 있던 팔이 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강도가 심해지며 떨려오는 칠현을 무시하고 턱을 잡아 각도를 바꿔가며 키스를 하던 동욱은 잠시 후 칠현의 입술을 핥아 정리하곤 몸을 땠다. 칠현은 동욱이 떨어져나가자 오른팔을 들어 덜덜 떨려오는 왼팔을 잡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이게 치료의 일환이라니, 정말 속편한 치료군요."
"흠. 환자를 위해 몸바쳐 치료를 하는 의사에게 너무 심한 말이야. 가련한 칠현군. 그래도 처음보다 훨씬 나아졌는데? 역시 참아가며 익숙해지는게 중요한거야. 않그래?"
동욱의 말에 칠현은 픽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훗..... 그래도 당신을 당장 난도질하고 싶은 것은 그대로입니다만?"
"괜찮아. 어차피 진짜 난도질할 것도 아니잖아?
칠현은 눈을 뜨고 동욱을 가만히 응시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만약 진짜 난도질 했다면? 내 몸에 집어넣었던 페니스를 잘라내고 몸에 닿았던 피부를 난도질해서 저민다음 소금을 끼얹어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감상했다면? 욕망에 차서 나를 봤던 그 눈을 뽑아버렸다면? 내 몸을 더듬던 손가락을 마디마디 잘라내 버렸다면?"
동욱은 잠시 가라앉은 눈으로 조용히 칠현을 응시하다 손을 들어 칠현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칠현이 잠시 움찔하자 동작을 멈춘채 몸의 긴장을 푸는 것을 기다리다 천천히 부드러운 동작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의 이미지와는 달리 쓰다듬는 손길이 묘하게 안정적이어서 칠현은 조용히 눈을 감고 그 느낌을 즐겼다.
"넌.... 너무 미련스럽게 모든 걸 떠맡으려고 하는구나..... 죄를 지은사람은 그 대가를 받기마련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다른사람의 손에 맡겨서 해결하려고 하지만, 너는 니 자신의 손으로 해결한 것뿐이야. 너는 모든 일을 피하지 않고 직시할 줄 아니까......
다시 보기 힘겨웠을 얼굴을 직접보고 자신의 손을 더럽혀 대가를 치루게 한 것 뿐이다. 조금은 남에게 기대는 방법을 배워라. 그러면 훨씬 편해질꺼다."
칠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루만지던 동욱은 자신의 말을 들으며 파르르 떨리는 칠현의 속눈썹을 보곤 조심스레 끌어당겨 가슴에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원래라면 잘게 떨며 거부감을 표시했을 칠현의 몸은 완전히 이완된 상태로 얌전히 동욱의 손길에 순응하고 있었다.
"저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른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구나........"
"나는....... '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랬구나....."
조용히 응답해주는 동욱의 목소리에 칠현은 눈을 감은채 잠시 침묵하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 기대어도..... 의지해도.... 힘들다고 말해도......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길..... 그래도 '짐'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줬으면 하고...... 바랬던 것...... 같습니다."
울음기 없는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흐느끼듯 나직하게, 천천히 말하는 칠현을 동욱은 마치 어머니의 손길인양 부드럽게 쓰다듬고 다독거리며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기대도 돼."
"........."
"의지해도 괜찮아."
".........."
"힘들다고 말해도 괜찮아."
"........"
"울어도 돼."
"........."
"그래도.... 어떻게 하든...... 절대 '짐' 따위가 아니니까."
"..........."
"기대어도, 의지해도, 힘들다고 말해도, 눈물을 흘려도..... 안칠현은 절대 '짐'이 아니야."
"네......."
"짐따위는 절대 아니야."
"네..............."
동욱은 마치 아이인마냥 조용히 대답한 칠현의 이마에 깃털이 내려앉듯 살며시 입을 맞추고, 이어서 양 눈꺼풀과 볼, 입술에 경건하게 입을 맞추었다. 입술에 한 키스를 마지막으로 칠현이 눈을 뜨자 동욱은 앞머리를 살짝 쓸어올려주며 눈을 살짝 휘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자..... 이제 다 나았다. 몸도 마음도 다 나았구나. 칠현아."
동욱의 마치 단정하는 듯한 말에 칠현은 눈이 뜨거워지며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동욱의 그 간단한 말이, 마치 아이를 달래듯 딱잘라 단정지어주는 말이 항상 한구석에 응어리져있던 그 무엇을 순식간에 녹아내리게 하는 듯 했다.
어린시절, 그 때 이후로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생모가 죽어도, 부모님이 죽어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눈물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자신의 마음속이 녹아내려 나오는 이 눈물은 희준의 가슴에서 흘리기 위해 칠현은 눈물을 참았다.
피와 살점으로 빨갛게 물들었던 자신의 손이..... 어쩌면 마음 속 깊은곳에서 느껴지던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약간의 죄책감이.... 납치됐던 이후로 희준이 조심스럽게 대하기만해서 마치 짐처럼 느껴지던 자신에 대한 자조가.... 가슴속에 있던 차가운 응어리와함께 조금씩 녹아내렸다.
자신의 나약함을 혐오하고 증오했던 것이 바로 5살 어린아이의 자기보호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도 형제도, 친구도..... 어느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말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풀려버렸다.
조금은 약해도, 어리광부려도 칠현은 짐이 아니었다.
희준이 조심스레 다정하게 대해줬던 것은 칠현이 약하고 보호해줘야할 '짐'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다정함과 세심한 무언의 위로에 기대어 울어도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