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나라 몽골을 가다
여행은 설렘이다. 그것은 또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만남을 위해 사전 준비를 한다. 첫째는 계약이다. 이 계약이 성사되고 나면 일정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일정이 다가오면 그 지역의 상황과 각자가 준비해야 할 사항을 여행사로부터 전달받는다. 우리는 그에 따라 준비를 하고 주의 사항을 익히고 그 지역의 문화적 환경과 볼거리를 살펴본다. 이렇게 준비를 하여 여행사 담당자의 안내에 따라 움직인다.
2023년 5월 30일 오후 6시에 김해국제공항에서 일행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오후 9시에 몽골로 가는 에어부산 비행기에 탑승했다. 오후 9시에 김해국제공항을 떠나 0시 15분 몽골 울란바타르 칭기스칸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기다리던 관광 안내원을 따라 호텔로 가는 25인승 버스에 승차했다. 가이드와의 만남! 그가 자기 소개하는데 한국에서 7년 동안 생활했고 국민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이름은 ‘가나’라고 했다. 그런데 한국말이 조금 서툴렀고 소개도 조금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버스는 1시간 정도 달려서 호텔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 달려도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호텔에 도착해 배정된 방으로 갔다. 우리의 방은 918호였다. 방에 들어가 세면대에서 물을 틀고 세수했다. 호텔인데 찬물이 왜 나오지? 의구심을 갖기도 했다. 8시(우리나라 6시)쯤 일어나 머리를 감으려고 다시 세면대의 물을 틀어도 역시 찬물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니고 동행한 파트너도 이상하다고 하셨다. 머리를 씻어야 기분이 상쾌하고 하루의 시작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찬물이라도 머리를 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욕조의 샤워기를 틀었다. 아니,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가? 욕조 안에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욕조에 드리워진 커튼을 욕조 안으로 넣지 않고 머리를 감았기 때문에 물이 바닥으로 흘러 바닥이 미끄럽게 되었다. 파트너에게 바닥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서 들어가시라고 했다. 우리는 겨우 머리를 감고 식당에 갔다.
식당은 16층에 있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것 같다. 소답식당이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밥을 먹었고 파트너는 빵을 잡수셨다. 식사 후 우리 방에 들어와 짐을 챙겨 프런트로 내려갔다. 너무 일찍 내려가 프런트에서 한참 동안 기다렸다. 일행들이 식사하고 프런트로 모였다. 그때 내가 세면대에 찬물이 나와서 어제는 제대로 씻지 못했다고 하니, 사람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씀이 왼쪽으로 틀어서 찬물이 계속 나오면 오른쪽으로도 틀어 봐야 합니다, 고 했다. 경험의 차이일까. 우리나라와 다름을 인식하지 못해 우리는 약간의 수고를 하게 되었다.
버스에 짐을 싣고 시내로 들어가니, 도로에 늘어선 차들 때문에 교통 체증이 심했다. 시내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그렇다고 한다. 도로에는 도요다 승용차가 꽉 메우고 있었다. 도요다 차가 많은 이유를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연비가 적게 들어서 많이 산다고 했다. 한국 차는 왜 수입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더니, 부품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맨 처음 간 곳은 자이승 전망대였다. 이 전망대는 울란바토르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것은 몽골이 소련과 함께 손잡고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1971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입구에 탱크가 있었는데, 우리는 보지 못했다. 올라갈 때 쇼핑몰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까지 갔기 때문이다. 내려올 때 본 이 탱크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와의 전투에서 이용했던 몽골군 탱크라고 했다.
그다음으로 간 곳이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이다. 공원 입구에서 중앙으로 보면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이라고 적힌 기념비가 보인다. 입구의 안내판에 새겨진 글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이태준 선생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11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했다. 선생은 1914년 울란바타르로 이동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운반하고 의열단 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선생은 또한 인술을 베풀어 당시 몽골에 만연해 있던 질병을 퇴치하여 1919년 몽골 정부로부터 ‘에르덴 오치르’ 훈장을 받았다.
선생은 1921년 러시아 백군에 의해 피살당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국과 몽골 정부는 독립운동가이며 위대한 의사인 이태준 선생의 고귀한 삶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 7월 이 공원을 조성하였다.”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 관리위원회
공원 한쪽에는 이태준 기념관이 있다. 그곳에 들어가 선생의 일대기를 보고 나왔다. 이국 몽골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하신 이태준 선생의 조국 사랑을 되새기며 다음 장소로 향했다.
울란바타르로 시내를 벗어나 국립공원인 태를지를 향해 떠났다. 이 나라의 영웅이고 이 나라 국민이 길이 기억할 사람, 칭기스칸! 그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초원은 우리가 사는 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 산인데, 이곳은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미국이나 캐나다같이 큰 나라에 가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넓은 초원을 본 적이 없다. 이 넓은 공간을 달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 가운데 이 토지를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다른 분들도 우리나라 사람 같으면 이 많은 땅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차는 초원으로 난 도로를 따라 달렸다. 1시간 넘게 달렸을까? 식당에 들러서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속으로 고국에서 얼마나 살기 힘들었으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이곳에서 삶을 영위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는 달려 칭기스칸 마 동상 광장에 도착했다. 차 안에서 칭기스칸의 삶의 흔적이 담긴 기념관을 관람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입장료가 5$가 되고 크게 볼거리가 없다고 하니 모두 거절했다. 그래서 밖에서 마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쪽에는 독수리를 팔에 얹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3$를 지출해야 한다. 그것도 가격이 올랐다고 한다.
마 동상의 겉만 보고 거북바위 쪽으로 돌아와, 승마 체험하는 곳으로 갔다. 차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데 몸은 균형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이곳은 우리나라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조금씩 내리는 관계로 도로가 질퍽하였다. 푹 파진 도로를 갈 때는 차가 기우뚱기우뚱하여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이 움직여 피로가 가중되었다.
말의 속성에 대해 말해 주었다. 말은 반드시 왼쪽에서 타고 왼쪽으로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은 성질이 민감해서 사고가 날 수 있다고 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탈 때 왼쪽에서 탄다. 이것이 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전거를 오른쪽에서 타는 법을 익혔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혹시 습관적으로 나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내릴까 봐. 그리고 말의 뒤쪽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이 말 언은 어릴 적에 많이 들었다. 말이 뒷발질을 잘하기 때문이다. 뒷발에 맞으면 상처를 입게 된다.
마구간에는 말들이 많이 있다. 바닥에는 말똥이 싸여 냄새도 났다. 우리는 말 주인에 의해 말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주인의 딸이 이끄는 쪽으로 갔다. 개울을 지나고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런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였다. 사극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하기도 하였다. 처음 타보는 것은 아니지만 1시간가량 타고 움직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승마체험을 끝내고 우리는 머물 곳을 향하여 갔다. 기사가 숙소를 못 찾아 헤매기도 하였다. 가이드가 내려서 방향을 현지인에게 물어서 찾아갔다. 기사와 가이드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길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내비게이션도 안 되는 곳이다. 우리는 안 할 고생을 더한 것이다. 우리가 머물 게르로 향해 갔다. 멀리서 보니 정말 아늑해 보였고 경치도 좋아 보였다.
게르에 도착했다. 우리는 가방을 차에서 내렸다. 게르를 운영하는 직원이 와서 가방을 챙겨서 우리가 머물 곳에 두고 갔다. 게르 앞에 아가씨들이 조그마한 그릇에 흰 음식을 갖고 있었고, 가이드는 그것을 먹어라, 고 했다. 이 음식을 왜 먹느냐고 하니, 손님을 맞이하는 풍습이라고 했다.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하얀 음식’이라고 했다. 나는 개념을 잡을 수 없었다. ‘환영 음식’을 하얀 음식이라고 하는가 보다, 하고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그것을 정확하게 몰라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을 해 보았다.
몽골 음식은 하얀 음식(차강이데)과 빨간 음식(올랑이데)이 있다. 하얀 음식은 여름에 먹는 음식이고 빨간 음식은 겨울에 먹는 음식이다. 전자는 5종의 젖으로 만든 각종 유제품으로, 여름에 손님이 오면 내놓는다고 한다.
그들이 내놓은 하얀 음식을 먹고 배정된 게르에 들어갔다. 가운데 난로가 있고 둘레에는 침실이 있었다. 여행 가방을 놓고 난로에 지필 장작을 갖고 왔다. 그들이 다 챙겨주겠지만, 조바심이 앞서 우리가 게르 주변에 있는 장작을 가져왔다. 왜 그랬을까? 나의 파트너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게르 앞에 펼쳐진 초원은 광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맑은 공기와 푸른 하늘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경치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 식당으로 갔다. 우리처럼 고국에서 여행 오신 분들도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샤워실에 갔다. 거기에서 양치질하고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라 피로가 확 풀렸다. 밤의 공기는 우리나라 3월의 날씨와 비슷해 작은 패딩을 입어야 할 정도로 차갑다. 여행 계획서에 나와 있는 별자리체험은 어릴 때 시골에서 본 밤하늘의 풍경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날씨의 영향이었을까. 망원경도 배치해 놓았지만, 육안으로 보기를 원했던 나로서는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다.
게르 안은 뜨근뜨근해서 찜질방에 온 기분이었다. 파트너는 몸살기가 있는지, 앓는 소리를 하면서 자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초원은 답답한 나의 가슴을 확 트이게 했다. 날씨도 좋고 뻐꾸기 울음
소리도 들렸다. 생존 전략이 뛰어난 뻐꾸기 소리는 이곳 6월 하늘을 수놓았다. 그리고 나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 심정을 여기에 옮겨 본다.
유월의 숲에 들어서면
숲속 길을 따라 걸으면
낯익은 울음소리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어디서 우는지
소리만 들리고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나!
너의 모습을 찾으려고
숲과 나무를 바라보아도
그 모습 찾을 길 없다.
어릴 적 보리밭에서
어머니와 함께 듣던
바로 그 울음소리,
너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정겨운 고향 모습이
다가온다,
소리만 들리고
모습을 볼 수 없어
애태웠던 어린 시절
네가 있어 너의 울음소리
다시 들으니
꿈 많은 시절로 돌아가는구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유목민 마을로 갔다. 게르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좁은 공간에 잠을 자고 살림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아내 되는 분이 수태차를 끓여 손님 앞에 내놓았다. 여행 계획서에는 수태차, 아롤, 으름을 시식한다고 돼 있다. 수태차는 찻잎을 끓이고 거기에 우유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춘 차, 아롤은 말린 우유가루로 반죽을 해 틀에 찍어 말린 몽골의 유제품을 말하고, 으름(urum)은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몽골식 치즈라고 한다.
유목민의 생활 체험을 마치고 우리는 아리야발 사원으로 갔다. 우리나라 불교는 중국에서 들어온 소승불교이지만, 이곳의 불교는 티베트에서 전해온
것으로 대승불교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에 해당하는 곳으로 들어가니 사원은 이 산의 중간쯤에 있다. 입구에서 사원까지 가는 길옆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영어와 몽골어로 표기해 놓은 간판이 길을 따라 세워 놓았다. 영어와 함께 쓰인 몽골 문자는 러시아 문자의 영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 문자에 맞춰 몽골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마치 일본이 한자를 빌려 일본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 무슨 내용인지 알고 싶어 스마트폰에 담았다. 길 따라 올라가니 몇 마리의 말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말은 거사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거시기가 축 늘어져 그 길이가 가관이었다. 어떤 여성분은 이것 하나만 보아도 여행 본전을 완전히 뽑았다고 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사원 가까이 갈수록 샤마니즘의 형태를 띤 탑도 있었다. 사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가파르기도 하였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중간에서 내려다보니 아래로 보이는 경치도 아주 볼만했다.
사원 안은 우리나라 절 안의 풍경과는 다르게 소박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공간의 배치도 우리나라 절과는 사뭇 달랐다. 다른 길로 내려오지 않고 올라갈 때 갔던 길로 되돌아왔다. 그 이유는 아까 놓쳤던 말의 그 모습을 찍기 위해서였다. 인생이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고 했던가. 역시 그때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평화롭게 풀만 뜯고 있었다. 올라갈 때 찍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여기에 옮겨 본다.
Devote yourself to your precious teacher who grows the great grass of blessing.
(큰 축복의 풀을 키우는 소중한 선생님께 직접 헌신하세요.)
사원 관광을 마치고 시간이 여유가 있어 거북바위 앞에 잠시 머물렀다. 그곳에서 앞에 보이는 산의 모습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일부는 거북바위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마침 전날에는 독수리가 없었는데 오늘은 있었다. 나도 독수리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가이드가 찍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없다. 조금 아쉽다. 우리는 식당으로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나는 이곳 마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차에서 내려 마트 구경을 하고 나왔다. 마트 앞, 뜰에는 세 마리의 늑대 조각상이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고 하다가 뭔가 의미가 있을 듯해서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았다. 차 안에서 가이드에게 늑대 조각상에 대해 질문했다. 그의 대답은 “한국에서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 토템과 마찬가지로 몽골에서도 늑대 토템이 있다.” 하였다.
아이스크림을 사 온 분이 일행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가격은 저렴했지만, 맛은 참 좋았다. 우유인지 마유인지 모르지만, 많이 들어간 것 같았다. 이 아이스크림을 먹은 기사는 맛에 취했는지 식당 가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되돌아와 찾은 곳은 어제 우리가 승마체험을 했던 곳이었다. 주변에 말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게르 안에 들어가니 식당이었다. 우리가 앉아 먹을 식탁은 정해져 있었다. 그 자리에 앉아 준비된 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통음식인 만두였다. 이곳 용어로는 ‘호쇼르’라고 하는데 ‘양고기 튀김만두’라고 한다.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좋아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었다. 느끼한 느낌이 들어 밀양에서 가져온 고추를 곁들여 먹었다. 여행지에서 우리가 가져간 음식을 먹는 것도 특별한 의미를 갖게 했다.
올레길 걷기가 계획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숙소인 게르로 왔다. 좀 쉬었다가 식당 뒤에 있는 산마루에 올라갔다. 초원에는 여러 가지 식물이 있었다. 여성분들은 관심이 많아 스마트폰으로 찍기 시작했다. 무슨 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스마트폰에 식물 이름 알기 앱에 접근하면 알 수 있다. 여기는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카톡이나 SNS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일상과 동떨어진 답답한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다, 고 해야 할 것이다. 1시간 정도 걸었을까? 언덕에서 산으로 가는 길에서 되돌아왔다. 평지에 있는 또 다른 게르를 만나고 승마 체험하는 곳을 지나서 우리의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와 식당으로 갔다. 우리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좌석 배치를 보니 2인석, 4인석 두 개로 되어 있다. 우리는 2인석에 앉았다. 오늘 밤을 자고 나면 우리는 게르에서 떠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식사는 몽골인의 전통음식인 허르헉을 준비한다고 한다. 이것은 몽골 유목민이 귀한 손님이나 집안 대소사를 치를 때 내는 음식으로 양고기를 채소와 함께 익힌 것이다. 조금 있으니 다들 모이고 식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 먹어 보는 허르헉이었다. 칼로 고기 부분을 썰어 먹었다. 맛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파트너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적은 양만 먹고 일어섰다. 나는 끝까지 앉아서 내 몫을 다 먹었다. 파트너의 몫은 옆자리에 앉은 분이 가지고 가서 잡수셨다. 우리 쪽에 맛있는 부위가 많이 있다고 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별이 한두 개씩 보이기 시작했다. 밤 9시쯤 캠프파이어를 한다고 했다. 구경할 겸 나섰지만, 시작도 하지 않았다. 게르에 들어오니 파트너는 정신없이 주무시고 있었다. 난로의 열 때문에 게르 안은 약간 더웠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시다고 하더니, 계속 안 좋으셨던 모양이다.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이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에 짐을 실었다. 차는 울란바트르로 향했다. 첫날 스치고 갔던 강이 톨강이었던 것이다. 가이드에게 톨강에 대해 질문했다. 자꾸 묻는다고 옆에서 그만하라고 했다. 그래서 웃기만 했다. 강 주위에 게르를 지어놓고 힐링할 수 있도록 마련해 놓았다.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궁금했다. 강은 항상 문화의 발상지가 아닌가. 큰 도시 주변에는 강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르막길에 오르니 ‘어워’가 있다. 차를 세워 길 반대편에 있는 곳으로 갔다. 그야말로 돌무더기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돌무더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처럼 크지 않았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돌을 놓고 소원을 빌었다. 공통적인 것은 신앙이다. 몽골에서도 어워에 돌을 얹고 어워 주위를 세 바퀴 돌며 소원을 비는 전통 신앙이다. 여행 온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울란바트르로 이동했다. 울란바트르에 도착하기 전에 가이드가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소주가 중국을 통해 짝퉁도 많이 들어온다고 했다. 요즈음 한국 관광객이 많아진 까닭이라고 했다.
몽골 역사박물관에 갔다. 그 나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몽골은 세계를 정복했던 나라로, 그들의 조상이 살았던 원나라는 고려 시대 우리 조상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나라에 정복당한 고려는 처녀를 차출해서 몽골로 보냈다. 원나라의 요구로 시작된 공녀 차출은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80년간 50여 회 이상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면 몽골은 왜 우리나라 여자를 차출했을까. 몽골 여인은 말을 많이 타기 때문에 골반이 약해 아이를 잘 낳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종족을 퍼트리기 위해 각 나라의 여자를 차출했다. 그중에 고려 여인이 가장 순하고 말도 잘 듣고 아이를 잘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 여인을 가장 많이 차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몸에 몽골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몽고반점이 증명해 준다. 우리 조상들이 몽골인의 겁박에 숱한 고통을 받았음을 알게 한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머릿속에 그리며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주마간산으로 둘러보고 왔지만, 유심히 본 것은 몽골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의상보다 머리 위에 얹은 장식품이었다. 가이드가 설명하기로는 키가 작아 높게 보이기 위해 얹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장식품이 고려의 풍습에 영향을 준 것이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들었던 내용인데, 우리나라 풍습에 없었던 족두리가 이때부터 생겼다고 했다.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에 대해 해설해 놓은 책이 있는 줄 몰랐다. 일행 중에 한 분이 이 책을 샀다. 이 책이 있었더라면 몽골문화의 정수를 전달하고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 안에서 가이드에게 레슬링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레슬링을 잘하게 된 것은 몽골의 민속 씨름 덕분이라고 했다. 몽골의 씨름인 ‘버흐’는 나담축제 때에는 전국에서 선수들이 모여 경기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씨름, 일본의 스모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몽골인이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몽골 씨름의 영향이라고 했다.
역사박물관에서 나와 다음 장소인 몽골 정부청사로 갔다. 광장에 들어서니 학사복을 입고 꽃다발을 안고 사진 촬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이곳 학기는 한국과 달리 9월 학기라 지금 졸업 시즌이라고 했다. 청사 정면으로 가서 청사를 바라보았다. 정중앙에는 칭기스칸의 좌상이 있고 좌우로 기마상이 있다. 기마상의 주인공은 보오르추와 무칼리라고 설명했는데, 그때는 몰라 인터넷으로 확인했다. 멀리 보이는 기마상에 관해서도 물었다. 기마상의 주인공은 현대 몽골의 공산혁명가 및 독립운동가인 ‘담딘 수흐바타르’라고 했다. 이 광장의 이름도 이분의 이름을 가져와 명명했다고 한다.
이 광장을 나와 점심 먹으러 갔다. 식당 이름이 ‘동대문 포차’, 이국에서 보는 이름이라고 정겨움마저 들었다. 이곳에서 식사하고 백화점에 들렀다.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둘러보았다. 3층인가? 그곳에 가서 몽골의 고품질 캐시미어매장에 갔다. 여성분들은 죽 둘러보고 가격과 품질에 대해 알아보곤 하였다.
나도 여행 가기 전에 이 나라의 주요 산업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여행 계획서를 들여다보았다. ‘캐시미어 공장’이라는 말이 있어서 그 공장에 견학하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에게 캐시미어가 어떤 것인지 물었다. 농 안에 있는 옷을 보이며, 이것이 캐시미어 옷이라고 했다. 왜 묻는데? 하기에 그곳이 캐시미어가 유명한 모양이지. 여행 계획서에 ‘캐시미어 공장’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걸 봐서. 나는 아내의 사이즈가 얼마인가를 물었다. 아내는 사이즈가 얼마라고 말하고는 사 올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 집에 있으니까. 이렇게 주고받은 말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인솔 책임자인 임이사께 하나 골라 달라고 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권유를 안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크게 반응이 없었다. 나는 속으로 겨울에 입는 옷이라, 당장 입을 옷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구경만 하고 가격과 품질에 관해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선물을 안 사 왔다고 했다. 아내의 반응은? 말은 그렇게 해도 속은 아니었을까? 크게 티 내지는 않아도 아쉬운 느낌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나라의 중심 상가인 백화점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도로에서 사람들과 부딪쳤는데, 그들의 얼굴이 우리나라 사람과 너무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고려의 할머니들이 공녀로 와 그들의 피를 받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았다. 버스는 마사지하는 장소로 이동하였다. 마사지는 전신 마사지인데 크게 시원하지 않았다. 어떤 분은 잘하더라고 하는데, 나는 잘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나를 담당한 자는 초보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만 그렇게 느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태국처럼 마사지 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자가 아니기 때문에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했다.
이번 여행은 대체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바삐 움직이지 않아도 되고 동행한 분들과 대화도 할 수 있었다. 마지막 여정으로 몽골 전통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곳에 갔어도 공연 시간에 맞춰야 했기 때문에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가까이 어린이 공원이 있었는데, 그곳에 특이한 동상이 있었다.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가이드에게 물었다. 동상에 새겨진 글자를 읽으면 알 수 있잖아, 하고 되물었다. 그런데 그 글자는 예전 글자라 읽을 수가 없다고 한다. 중국 젊은이들이 우리 한자를 고전 글자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공연장 이름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뭐라고 말하는데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카톡 메모난에 적어달라고 했다. ‘강참팔라스’라고 적어 놓았는데, 와서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그런 단어가 없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예쁜 얼굴의 여자분이 손님맞이 하얀 음식을 먹게 하였다. 내용물의 이름은 아직도 모르지만, 그들의 풍습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상한 악기로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또 가이드에게 물었다. ‘마두금’이라고 하였다. 몽골의 민속 악기로 두 줄로 된 현악기이다. 이것을 찰현악기라고 한다. 두 줄로 되었는데, 머리 부분은 말머리 장식이 있다. 연주는 현을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오거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활을 마찰하여 소리를 낸다. 우리나라 해금과 같은 소리가 나는 것 같다.
공연 관람을 마치고 저녁 식사하러 갔다. 가는 도중에 울란바타르에 대해 가이드에게 물었다. 인구는 2020년 기준 1,597,290명이며 현재 1,448,642명으로 약 9만 2천명 가까이 6개월 이상 외국에서 체류하고 있다, 고 한다. 몽골 전체인구의 약 47.6%를 차지한다.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인구는 5만 명 가까이 되며 이 중 1만 명 정도는 불법체류자라고 한다.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에서 소고기 샤부샤부로 식사했다. 주인이 서비스로 말고기와 닭고기 샤부샤부를 주었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만찬인 것 같았다. 성찬으로 차려진 음식은 입맛을 돋웠다. 맥주 한 잔을 곁들이니까, 여행 기분을 더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인원이 10명인데 나를 제외한 분들은 여행 경험도 많고 예의도 있었다. 여행을 어디로 가느냐? 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가느냐? 가 더 중요함을 느꼈다. 서로 소통할 수 있었고 내가 준비하지 못했던 반찬을 가지고 오신 분, 사과와 고추를 가져와, 여행 분위기를 고조시킨 분, 여행인솔자인 임이사님의 따듯한 배려도 잊을 수 없다.
2023년 06월 24일 여행 후기를 마무리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