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교육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교사의 권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아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유명한 식물학 교수가 있었는데 그 딸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식물학의 대가여서 딸도 식물에 관심이 많고 관찰력이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학교 가는 길에 길가에 핀 아주 예쁘고 신기한 꽃을 발견하였는데 그 꽃을 정성껏 캐서 학교 선생님께 가져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처음 보는 꽃인데다 갑자기 질문하는 바람에 당황했지만 곧 그 학생의 아버지가 유명한 식물학 교수임을 생각하고는 ‘아버지는 유명한 식물학 교수이니 아버지한테 알려달라고 하렴.’하고 아이를 돌려보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가 묻자 아버지께서 ‘먼저 선생님에게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는데 잘 모르겠다고 해서 여쭙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래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선생님께서 네 질문을 받으셨으니 내일 다시 선생님께 여쭈어 보렴, 아마 선생님께서 자세히 가르쳐 주실 것 같구나.’하고 아이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이튼 날 아이가 선생님께 다시 질문을 하니, 선생님이 아주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생각하기를 ‘식물학 박사인 아버지도 모른다고 한 것을 우리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다. 우리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어른이다.’ 그 아이는 그 후 열심히 공부해서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식물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아버지는 그 꽃이 무슨 꽃이고 학명이 무엇이고, 언제 피고 지는지 어느 곳에 쓰이고, 어떤 꽃말을 가지고 있는지 상세히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서 그날 저녁 선생님을 찾아 말씀드리고 ‘내일 딸이 오거든 가르쳐 주십시오.’하면서 술을 한잔 대접하였던 것입니다.
얼마 전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을 빗자루로 때리고 아이들이 웃고 선생님께 욕을 하고 동영상을 찍어 올리고, 학생들을 징계하고 사회적 여론이 들끓고 이만저만 야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뉴스를 들으면서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의 교육현장과 교육현실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우리의 교육현장의 교권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인성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정말 암담한 현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론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권위를 네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사회적 권위(社會的 權威 : social authority)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를 보고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권위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권위를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정치가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고, 사회적 인물을 가지고 있지도 못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둘째, 문화적 권위(文化的 權威 : cultual authority)입니다.
이는 문화 안에서 만들어지는 권위로 교회의 성직자나, 교사 등이 바로 이러한 분들입니다.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도 많이 떨어졌고, 교사의 권위도 상대적으로 아주 약해졌습니다. 이제 학교는 권위가 없는 것만 같아 안타깝습니다.
세째, 관계적 권위(關係的 權威 : relational authority)입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권위로 인격적이며 상호 존중의 가치에서 권위를 갖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식, 친구사이, 직장에서 갖는 것 등이 모두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네째, 영적 권위(靈的 權威 : spiritual authority)입니다.
이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권위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해서 우러나오는 하느님의 권위입니다. 이 권위의 특별한 은사를 우리는 카리스마(charisma)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 특별한 은총을 베푸시어 신앙과 생활에서 권위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서 영적 권위로 충만해져서 많은 사람들을 신앙 안에 이끄는 사람들은 바로 이 영적 권위의 특은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사회적, 문화적인 권위로 그들을 대하지 않으십니다. 관계속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가르치셨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존경과 사랑으로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악령을 쫓을 때에는 하느님의 권위 즉 영적인 권위로 악령을 내 보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회적, 문화적, 관계적 권위이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면 그는 우선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권위를 인정받아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자기가 세우고자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존경과 사랑으로 권위를 세워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모든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겸손하고 자기희생적인 삶을 살아야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으며, 참된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고 나의 권위를 인정해 주기를 고집부리고 있습니다. 본당회장이나 Pr. 단장이라도, 구역 반장이라도, 본당 신부님이라도 하느님의 권위에 순종할 때 사람들이 그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지켜 주실 때 나의 권위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흠숭과 찬미로 하느님의 권위가 높아질 때서야 비로소 나의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하느님으로 흠숭할 때 그 자녀인 우리가 주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주님께 흠숭과 예배를 드릴 때 진정한 권위가 살아납니다. 미사에 참례하지도 않으면서 회장이라고 권위를 내 세울 수 없답니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권위는 섬기기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권위가 크신 것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섬기고자 하셨기에 그분의 권위는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종의 신분을 취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위가 무한대로 커지는 것처럼 우리도 섬기러 오신 주님을 닮아 세상 모든 사람을 섬길 때 우리의 권위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 섬길 줄을 모르고 섬김만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권위는 희생과 봉사가 권위의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권위를 가지든 의지할 최종의 권위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영적인 권위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권위 안에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은총으로 우리는 권위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도우심을 무시하고 권위만 내세운 자신을 반성합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5-12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축일1월 10일 성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 (Leonie Francoise De Sales Aviat)
신분 : 설립자, 수녀원장
활동 연도 : 1844-1914년
같은 이름 : 방지가, 살레시아, 프란체스까, 프란체스카, 프란치스까, 프란치스카, 프랜시스
성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는 1844년 9월 16일 프랑스 북동부 샹파뉴(Champagne) 지방의 세잔(Sezanne)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트루아(Troyes)에 있는 성모 방문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그녀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준 마리 드 살 샤퓌(Marie de Sales Chappuis) 원장수녀와 루이 브리송(Louis Brisson) 교목신부를 만났다. 이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녀가 앞으로 살레시오회의 영성을 기반으로 젊은이들의 복음화에 헌신하는 수도회를 설립하는 기틀이 되었다.
1866년 산업혁명에 따른 산업화로 인해 저임금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는데 트루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수많은 어린 소녀들이 방직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열정적인 사목자인 브리송 신부는 19세기 말에 본격화된 사회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858년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들에게 완벽한 인성 교육과 그리스도교 교육을 위한 센터를 열었다. 그런데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사업’으로 알려진 이 센터에 적합한 책임자와 안정적인 관리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영감 안에서 수도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그는 더 없는 조력자이자 수도생활을 향한 성소를 간직한 레오니 아비아를 발견했다. 사실 레오니 아비아는 공부를 마친 후 성모 방문 수도회를 떠났다가 수도자가 되려는 굳은 의지를 갖고 돌아왔다. 하지만 브리송 신부와 샤퓌 수녀는 그녀에게 기다리도록 권고했고 그녀는 이에 순명했다. 얼마 후 그녀는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받았는데, 이는 그녀를 자신의 고향인 세잔에서 유리제품을 만들고 수리하는 공장에 들어가도록 이끌었다. 작업장 안에는 젊은 공장 노동자들이 쉼 없이 일하고 있었고, 그녀의 마음 안에서는 그들 가운데서 함께 하며 그들을 상담하고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이 솟아올랐다. 이러한 열정은 브리송 신부가 자신이 트루아에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한 센터에 그녀를 초대했을 때 더욱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1866년 4월 18일 그녀는 성모 방문 수녀회의 학교 동창생 중 하나인 루시에 카뉘에(Lucie Canuet)와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며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사업’에 동참했다. 1868년 10월 30일 젊은 설립자인 그녀는 수도복을 입으면서 프랑수아즈 드 살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이 이름은 그녀의 일생의 사업이 무엇일지를 가리키는 상징이었다. 그녀는 이 작은 그룹을 주네브(Geneva) 교구 주교의 보호 아래 두고 이끌었으며, 그의 영성과 교수법의 방법을 완벽하게 적용하였다. 그 후 그녀의 공동체는 자신들의 전 생애를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헌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오블라티 수녀회(Oblate Sisters of St. Francis de Sales)로 그 명칭을 정하였다.
1871년 10월 11일 프랑수아즈 드 살 수녀는 서원을 발하고 새로운 수녀회의 총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에 교회법적 인준을 받은 수녀회는 설립자의 지도 아래 급속히 발전하며 사회 사도직을 확장해 갔다. 동시에 본당들에 학급을 열고, 파리(Paris)에 젊은 여성들을 위한 첫 번째 기숙학교를 열어 8년 동안 프랑수아즈 드 살 수녀가 교장을 맡았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오블라티 수녀회의 사도직은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교육 형태로 확장되었다.
1893년 그녀는 다시 총원장 수녀에 선출되어 죽을 때까지 그 책임을 맡았다. 그 동안 그녀는 수녀회를 유럽과 남아프리카와 에콰도르에 진출시켜 교육 사도직을 전파하는데 힘썼고, 1903년에는 프랑스 내에서 수도회에 반대하는 반종교적인 박해의 시류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수녀회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그녀는 이탈리아의 페루자(Perugia)로 본원을 옮겼다. 1911년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로부터 수녀회에 대한 최종 승인을 받았다. 연로한 프랑수아즈 드 살 수녀는 1914년 1월 10일 페루자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고요함 중에 선종하였다. 그녀는 1992년 9월 2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1년 11월 25일 같은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오늘 축일을 맞은 레오니 프랑수아즈 드 살 아비아 (Leonie Francoise De Sales Aviat)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