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갑 육군중장 [태극무공훈장]
![](https://t1.daumcdn.net/cfile/cafe/110FB039511699D318)
※약력
*1922. 10 충남 서천 출생
*1946. 1 군사영어학교 졸업 및 육군참위(소위) 임관
*1949. 8 제 18연대장
*1949. 11 제 7사단 참모장
*1950. 7 제 1군단 작전참모
*1950. 9 제 1군단 참모장
*1950. 9 육군준장
*1950. 12 제 9사단장
*1951. 3 국민방위국장
*1951. 5 제 5군단 부군단장
*1951. 11 제 2훈련소장
*1952. 8 제 5사단장
*1953. 1 육군소장
*1955. 7 육군대학 부총장
*1956. 7 육군중장
*1956. 7 예편
*1966. 11 타계
1. 생애
1922년 10월 10일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한 김종갑(金鍾甲) 본관 김해 (金海) 육군 중장은 1940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복지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조국의 광복 이후 ‘학병단’에서 활동하던 중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다음해 1월 28일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 참위(소위, 군번 10030)로 임관하였다. 임관 직후인 2월 8일 춘천에 있는 제8연대의 A중대장으로 임명됨과 아울러 중대 창설의 임무를 부여받고 하우스만 대위와 소위 1명 그리고 김형일(金炯一), 황헌친(黃憲親) 참위(소위)와 함께 3월초 춘천에 부임, 모병을 통해 4월 1일 A중대를 창설하였다. 이후 1946년 12월 7일 원용덕 대령이 제8연대장으로 부임하면서 부연대장에 오른 그는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여 총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1947년 12월 1일 김종갑 소령은 최남근(崔楠根) 소령의 후임으로 제6연대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제8연대를 창설한 후 총사령부 작전국장과 군기대사령관에 재직 중 연대장으로 전보되었는데, 그 이유는 부하인 김종원(金宗元) 중위와 최홍희(崔泓熙) 소령이 벌인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과의 언쟁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통위부 고문 프라이스(Terrill E. Price) 대령이 제6연대장으로 발령을 낸 것이었다.
제6연대장으로 부임한 김종갑 소령은 1948년 6월 15일 제3대대를 편성하여 연대를 완성하였고, 동년 6월 27일 연대 내에 ‘중화기학교’라 지칭되었던 제1훈련학교를 개설하여 훈련소장을 겸직하며 미군이 국방경비대에 이양한 기관총, 박격포, 2.36인치 로켓포, 중기관총 57㎜에 대한 교육을 실시, 연대를 현대화된 부대로 탈바꿈시켰다.
그러나 7월과 8월 제주도진압작전에 참가했던 연대내에서 11월 2일 반란이 발생하자 연대장 김종갑 중령은 적극적으로 진압에 나서 이를 수습하고 1949년 1월 육군사관학교 생도처장으로 전출되었다. 이어 1949년 8월에 보병학교로 전임된 최석(崔錫) 대령의 후임으로 제18연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불과 3개월 만인 11월에 후임을 임충식 중령에게 인계하고 제7사단 참모장으로 전보되었다.
제1군단 참모장과 작전참모로 전쟁을 맞은 그는 제3사단장으로 휴전에 임할 때까지 지휘력을 발휘하였다. 1953년 5월 1일 육군본부 명령에 의거 미 육군지휘참모학교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던 중 6.25전쟁의 휴전협정 조인의 소식을 접한 그는 1년 후인 1954년 6월말 귀국과 동시에 제5사단장으로 복귀하였다. 1년여 기간의 사단장 임무를 원만하게 수행하고 다음해 6월에는 육군대학 부총장에 전보되었으며, 이어서 국방부 관리국장 대리로 재임하던 중 1956년 7월 2일 육군 중장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
예편과 동시에 제7대 국방부차관으로 발탁되어 1957년 8월 7일까지 1년여의 기간동안 국군의 현대화계획을 수립.추진하였다. 국군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던 그는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 공화당 서천, 보령지구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으며, 국회국방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72년 선인학원 이사 및 부관페리 고문을 역임한 그는 1996년 11월 3일 7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서울 동작동국립현충원 장군묘역 3-57에 안장되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출신으로 당시 임관에 필요한 영어회화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다른 응시자들처럼 일본군 장교복을 입지 않았던 관계로 아고 대령은 그를 장교출신으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날 시험에서는 불합격되었다.
다음날 다시 응시한 김종갑 장군은 어제 입었던 학병단복 대신 헌 양복을 입고 시험에 응했다. 아고 대령이 “왜 장교복을 입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일본에서 귀국할 당시 부산에 도착하면서 버렸다”고 대답하였다. 그때서야 그는 임관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장군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확신에 찬 품성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전장에서의 작전지휘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승리의 밑받침이 되었다.
2. 공적
제5사단장 김종갑 육군소장은 1952년 8월 1일 사단장으로 취임한 이래 맡은 바 소임을 수행하여 오던 중, 1952년 11월 9일 전개된 351고지 탈환작전에서 적의 2개 대대 병력을 추격 적을 격퇴시킨 후 고지를 완전 탈환한 공로로 1953년 5월 18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07호)을 수여받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김종갑 대령은 제1군단 작전참모와 참모장으로 취임, 군단장 김홍일 소장을 보좌하며 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총반격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공헌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육군준장으로 진급하는 영광을 맞기도 하였다.
1950년 12월 30일 김종갑 준장은 제9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사단은 10월 25일 서울에서 창설되어 후방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실시한 후 대전-원주-진부로 이동하여 서림리-현리-부평리 간의 38도선을 방어하는 한편 일부 병력으로 설악산-오대산지역에서 북한군 유격대에 대한 소탕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해가 바뀌자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가 시작되었다. 일명 중공군의 ‘신정공세’라 불리는 이 공세로 김종갑 준장은 사단을 이끌고 현리-속사리-춘양으로 철수하였다. 1월 19일 제1군단에서 제3군단으로 예속이 변경되어 춘양-장성-하진부리로 진격을 감행한 제9사단은 2월 12일부터 개시된 중공군의 2월 공세로 하진부리에서 철수하여 정선-창리를 잇는 선에서 방어에 돌입하였으며, 3월 3일 사단장 김종갑 준장은 국민방위국장에 임명되어 제9사단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국민방위국장과 제5군단 부군단장, 제2훈련소장 등 주로 후방근무 직위에 임명되었던 그는 1952년 8월 1일 제5사단장으로 취임, 전선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당시 제5사단은 중동부전선의 작전지역을 제3사단에 인계하고 양양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한 후 동해안 거진으로 진출, 제11사단을 교대하여 제1군단의 우익으로 캣트(cat)선을 방어하던 중 7월 10일부터 351고지에서 북한군 제9사단의 공격을 맞아 치열한 혈전을 전개하였다.
351고지는 김일성이 “금강산을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 월비산은 확보하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 월비산과는 동쪽으로 2㎞ 지점에 있으며, 이 월비산을 거점으로 그를 연하는 동쪽 능선 일대와 월비산 동쪽 2㎞의 무명고지, 그리고 동북쪽의 148고지-187고지는 351고지에서 감제 당하며 특히 무명고지는 1㎞의 최근거리에 위치하기 때문에 직접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 반면 제5사단의 입장에서는 351고지를 기점으로 동측방과 남쪽을 연하는 주봉에 전진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이 고지를 잃게 될 경우 동부전선이 위태롭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고지는 공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까닭에 기필코 고수해야만 하는 요충으로서 휴전 성립시까지 쟁탈을 위한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7월 10일부터 14일까지 제1차전을 종료한 장창국 전임 사단장으로부터 지휘권을 넘겨받은 김종갑 준장은 일부 부대를 해체하여 전력을 정비하였다. 제2차 월비산전투에서 실패한 적은 장기간 전선에 투입되어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공격을 위한 특수편성과 장비까지 갖춘 제9사단 85연대의 증강된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11월 9일 351고지를 공격해왔다.
351고지를 방어하고 있던 제27연대 2대대 9중대는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여 육박한 적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지만 적의 인해전술에 밀려 철수함으로써 351고지를 적에게 넘겨주고 말았으며, 이어 전개된 역습도 완강한 적의 저지로 실패하였다. 대대 규모의 병력으로 351고지를 탈취한 적은 계속 확보할 목적으로 진지를 보강하고 화력거점까지 보완하였다.
아울러 적은 다음날 01시 30분에 제1대대가 방어중인 345고지와 263고지에도 중대 규모의 병력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전황을 예의 주시하던 사단장 김종갑 준장은 제27연대만으로는 현 주저항선의 방어임무를 수행하면서 351고지를 탈환하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군단장의 결심을 얻어 예비대인 제36연대 병력을 주저항선에 증원하기 위해 사단작명을 하달하였다.
351고지를 점령한 적은 이 무렵 345고지, 195고지, 154고지 등 도처에서 양공을 벌여 역습부대 병력과 지원화력의 분산을 꾀하면서 지휘관의 전황판단을 흐리게 하고 한편으론 351고지에 병력증원과 화력증강을 시도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351고지 탈환임무를 맡은 제2대대는 주저항선 방어임무를 제36연대 2대대에 인계하고 각 중대를 철수하여 대강리에 집결한 다음 장비를 점검하면서 세부 공격계획을 세웠다.
07시 10분 공격제대인 제6중대와 제7중대는 함포와 지원포격이 351고지 정상을 강타하는 가운데 저항선을 출발하였다. 제7중대는 208고지 쪽에서 연결된 교통호를 따라 적진을 향해 전진하였으나 351고지를 점거한 후 진지보강과 장애물 가설, 화력거점을 완비한 적의 맹렬한 포격에 의해 3부 능선에서 진출이 좌절되었다. 중대는 대대 OP에 지원화력으로 적진을 계속 강타하도록 요청하고 다시 공격을 감행하였다.
측방에 위치한 적의 기관총진지를 특공조가 제거에 성공하는 순간 중대 주력은 적진으로 돌진하여 육박전을 전개하였으며, 서남쪽에서 제6중대와 수색중대가 돌진하여 협공을 가하자 적은 10시 05분에 A, B 고지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렇게 하여 351고지는 피탈된 지 10시간만에 제7중대와 제6중대, 연대수색중대에 의해 탈환되었다.
이 전투에서 사단장 김종갑 준장은 351고지가 피탈되자 적에게 재편성 및 진지보강의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적의 혼란상태를 포착하여 과감히 역습을 단행, 최소의 희생으로 적에게 최대의 타격을 가하며 고지를 탈환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승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351고지전투를 끝내고 1953년 1월 육군소장으로 진급한 김종갑 제5사단장은 작전지역을 제15사단에 인계한 후 간성으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다시 중부전선의 김화로 이동하여 제3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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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동국립현충원 장군묘역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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