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가평 연인이씨 이정구의 묘역(제천 작대기풍수가 국풍 박상의 보다 낫다)
1 연안이씨 이석형과 이정구
* 연안이씨 시조는 이무로서 660년 소방정의 부장으로 신라에 왔다가 귀화한 사람이다. 후손들은 계대(繼代)를 잃고 계대를 알 수 있는 고려말경 선조를 기세조(1세)로 하는 4대 계파 즉, 태자첨사공파(이습홍) 소부감판사공파(이현려1136~1216, 2006 파명변경) 통례문부사공파(이지) 대장군공파(이송)로 분파되었다. 전체 인구는 16만명이다.
* 소부감판사공파가 현달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는데 9세손 문강공(文康公)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 1415 태종~1477 성종)이 중시조가 되고 13세손 월사 이정구(李廷龜 1564 명종~1635 인조)이후 손세(孫世)와 고관(高官)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었으니 이정구로부터 7대(秀자 항렬)까지 정승6명 대제학6명을 배출하였고 판서급은 부지기수이었다.
이정구 전후의 계대를 보면, 1세 이현려(고려 의종 때)---9세 이석형(세종 때 장원급제하여 성종 때까지 6대를 섬긴 대신)---10세 이혼(판사공)---11세 이순장외 5남---12세 이두---13세 이정구(대제학)---14세 이명한(대제학), 이소한---이명한의 아들 15세 이일상(대제학), 이가상 (효자), 이만상(24세에 요절), 이단상(부제학). 이소한의 아들 이은상(형조판서).
2. 이석형문중 묘역
* 이석형의 묘는 정몽주선생의 묘 옆에 있는데 그 연유인 즉, 정몽주의 증손녀가 이석형에게 시집가서 친정에 아이 낳으려 왔다가 판사공 이혼(1445~1483)을 낳고 산고로 요절하자 친정 아버지 정보가 불쌍히 여겨 정몽주 옆에 있는 자신의 신후지를 양보해주었고 30년 뒤에 이석형이 죽어 합장한 것이다. 정씨들은 명당을 이씨에게 주었다고 애석해한다. 어떤 스토리텔링은 증손녀가 정몽주 묘지예정지에 물을 부어 묘자리를 뺏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몽주 묘를 선죽교부근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할 때 증손녀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터이니 황당한 이야기이다. 이석형 묘가 정몽주 묘보다 명당이라는 견해가 많으나 이는 이석형의 후손이 더 번창하였다는 발복에 비중을 둔 주장이다. 그러나 이석형의 4대 후손인 이정구가 배출되기까지 큰 인물은 없다. 주혈은 정몽주선생 묘라고 본다(필자의 간산기 참조)
* 이석형(9세손)묘 일대는 후손들의 종산으로 많은 묘가 산재해 있다. 그중 이혼(10세손), 이순장(11세손, 최근 파묘), 이순장의 장남 이두(12세손, 가평이장) 차남 이계(이만상묘 아래, 도로개설로 가평이장), 이정구(13세손, 이석형 묘와 지근거리, 가평이장), 이만상(14세손, 이정구의 손자, 이명한의 3남)묘가 있었는데 이혼과 이만상 묘이외는 전부 자리를 옮겼다. 다수 풍수가 명당으로 감평하는 이만상의 묘는 흉지에 가깝고(그 후손의 발복은 이정구 이명한 묘의 발복이다) 나머지 분들의 초장지는 평범하다고 본다.
* 선조들의 묘 위치---이순장(능원리산5-31) 이만상(동림리71의4 중 北端)
3. 월사 이정구와 박상의
* 박상의(1538~1621)는 장성 출신으로 능과 궁궐 선정에 관여한 지관이다. 월사의 천거로 봉훈랑이 되어 절충장군에 올랐다. 그 보답으로 월사에게 선영일대에 묏자리를 여러개 잡아주었다고 추측한다. 이만상의 증손이 세운 묘비에 박상의 소점이고 박상의가 그 산등에는 혈자리가 이만상의 묘하나 밖에 없으니 더 이상 묘를 쓰지 말라고 주의하였다고 쓰여 있다. 이만상은 1645년 외동아들 이봉조(옥천군수) 하나를 두고 아버지 이명한의 병 개호에 무리한 탓으로 24세에 요절했다. 박상의가 죽고난 뒤 20년이 지나서 이만상이 박상의 소점지에 묻혔다는 것은 미리 묏자리를 점지받아 두었다는 말이 된다.
* 박상의(1538~1621)가 잡아준 묏자리는 어디인가? 이정구(1635卒) 초장지, 이만상(1645卒) 묘가 비석의 기재로 보아 확실하다. 박상의 소점이라는 설화가 있는 묘는 많으나 확실한 증거 있는 곳은 적다. 월사의 부친 이두(이순장 묘역)와 숙부 이계(이만상 묘 아래 있었는데 도로개설로 가평이장)가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명한 계열은 박상의를 믿지 못하여 이정구 묘를 이장하였고 이명한의 동생 이소한은 가평 조종면 현리13-6에, 그 아들 이유상은 현리150-7에 묘가 있다.
4. 이정구 묘의 이장 경위
* 비문에 의하면 월사는 1635.4 향년72세로 卒하여 용인 선영(이석현 묘의 지근거리)에 장사지냈다. 그런데 흉사가 끊이지 않고 장남 이명한 꿈에 옮겨달라고 현몽하였다. 이명한 형제가 2년여 구산한 끝에 제천 풍수사 이삼등을 만나 1639년(3년 탈상후) 가평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산 위에 영창대군의 태실이 있었는데 대군이 1614년 의문의 죽임을 당하면서 태실도 허물어져 있었다. 인조로부터 일대의 토지를 하사받았는데 이장을 고하여 하사받은 것이라 추측된다.
* 흉사가 끊이지 않았다는 사유인 즉, 이명한 가족은 1637년 병자호란을 만나 많은 흉사를 격었는데 특히 장손 이일상이 척화를 주장한 탓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①강화도가 함락되자 명한의 동생 이소한의 처 전주이씨와 명한의 장남 이일상의 처가 자결하고 ②명한의 둘째 이가상은 어머니를 찾아 적진을 돌아다니다가 사망하고 그의 부인 나씨도 그 소식을 듣고 죽었고 ③명한의 三男 이만상과 四男 이단상이 포로가 되어 개성까지 끌려갔다가 귀환하자 그들의 어머니(명한의 처)와 월사 부인(명환의 어머니)이 사망하였다. ④이일상은 청에 인질로 잡혀 고생하다가 귀환했다.
5. 三代 대제학의 묘(경기 가평군 태봉리산115-1)
* 삼봉(三峯)이 세자리 혈처를 만들었는데 평지에 떨어진 것도 아니고 높은 곳에 앉은 것도 아니다. 삼봉이 반쯤 떨어진 삼태반락형(三台半落形)이다. 삼태는 일직선이 아닌 조금씩 자리를 틀어 변화를 보이면서 공중에 반쯤 걸려있다. 힘차고 아름답다. 세 곳이 모두 중상급이니 합치면 상등초급 대혈이 되어 조선백대명당 중에도 상위의 반열에 속한다.
* 위에서 아래로 3대에 걸친 대제학이 이명한 이일상 이정구의 역순(逆順)으로 썼다. 조선 중기까지 역장(逆葬)은 관행이었으니 이상할 것 없다. 서열을 거꾸로 쓰는 것을 도장(倒葬)이라 하고 역장은 용이 진행해 오는 쪽을 보고 쓰는 것을 말한다고 구분하는 사람도 있으나 후자는 역룡장(逆龍葬)이라 함이 적합하다.
①이정구(李廷龜)는 예조판서 좌의정 우의정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연안이씨 중 후손들이 가장 현달하였다. 또 다른 중흥 가계는 인조반정의 주모자 이귀(李貴, 1557~1633)이고 서로 9촌간이다. 부인 권씨와 합장묘이다. ②이명한(李明漢, 1595~1645)은 예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동생 소한과 더불어 각기 아들 4명을 낳아 중흥을 뒷 받침했다. ③이일상(李一相, 1612~1666)은 예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했다. 병자호란의 어려운 시기를 잘 버티었고 살아 남은 동생 이단상(부제학)과 우애가 깊어 20년간 이웃해 살았다.
* 중국---
* 묘역---세 뫼가 자리를 틀어서 앞 뫼에 많이 가리지 않는다.
* 어떤이는 이장(1639년)후 6년(1645년)에 장남 이명한 51세卒, 차남 이소한48세卒, 손자 이만상 24세卒한 사실을 들어 흉사가 있었으니 명당이 아닐 것이라 한다. 병자호란 때에는 부인들이 많이 죽었고 1645년에는 남자들이 죽었다. 그러나 당시 평균수명이 40세 남짓하였으니 장차남이 자연사한 것은 흉사라 할 수 없다. 손자 이만상은 부친 이명한의 병간호에 진력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던 것이다. 이만상의 효행에 그의 아버지가 감동하여 이만상의 후손에게 음복을 많이 챙겨준 것은 아닐른지?
* 국풍 박상의가 소점했다는 이정구의 초장지는 흉지 또는 평범했던 것이고 제천의 무명 풍수가 잡은 현재의 이장지는 대명당이다. 무명의 작대기 풍수가 국풍보다 낫다.(2024.3)
첫댓글 이선생님 벗꽃 만끽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