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여년전 이 일기와 도망시를 쓴 조선의 선비 임재당(任在堂, 1686년∼1726년)은 1686년 출생해 21때인 1707년 풍산 홍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19년을 살았는데, 전라도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에서 살았던 임재당(任再堂)이 1724년 6월 20일부터 1726년 5월 1일까지 2년 동안 매일 죽은 아내를 추모하며 기록한 일기이다.
이 쓴 일기인 ‘갑진일록(甲辰日錄)’이 2014년 발굴되어 번역 출판되었고, 이 일기에는 남편인 임재당이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며 쓴 ‘도망시(悼亡詩)’가 100여편 실려 있다.
이번 출판기념회를 주최한 장흥임씨대종회 임기호 회장은 "약 300년 전 선조님의 일기에는 부부애와 부인을 잃은 후 한과 슬픔에 젖은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면서 "조선시대 장례 풍속과 상부상조 미덕, 양자 입양 시 형제들이 모여 작성한 협의문서 등 당시의 사회풍속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고 했다.
2017년 10월 12일 전남 보성문화원에서는 '조선시대 선비 임재당 도망시(悼亡詩)-나 죽어서 당신 만나면 이 슬픔 그치겠지요'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사단법인 나라얼연구소 황영례 소장은 “ 약 300년 전 전남 보성의 임재당 선비가 한문으로 쓴 일기가 3세기 가까이 지나 선비의 출생지나 세거지가 아닌 경상도 땅에서 발견돼 누구나 읽기 쉬운 한글 번역본으로 재탄생 했다. 이 출판기념회를 계기로 나라 얼을 더욱 계승 발전시키고 영`호남 문화의 민간교류가 활발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임재당의 '갑진일록'은 일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사료를 수집해오던 사단법인 나라얼연구소 조원경 이사장이 2014년 8월 우연히 고서적 경매사이트에서 발견 구입해 '나 죽어서 당신 만나면 이 슬픔 그치겠지요'라는 책으로 번역 출판한 것이다.
사단법인 나라얼연구소 조원경 이사장은 "'갑진일록'이라는 표지를 포함해 22장 44쪽의 정자체 한자로 쓰여진 글 첫 줄에 ‘부인이 병에 들었으니’라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조선시대 일기는 부인에 대해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데 첫 줄이 이렇게 돼 있어 관심을 확 끌었다. 이 일기를 사 며칠을 두고 읽었다. 조선시대는 유교의 영향으로 남성들이 감정표현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하지만 임재당의 일기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을 그리워하며 눈물겹게 써내려간 시가 너무 감동적이라 번역을 했고 책으로 출간하게 됐다"고 말했다.
장흥임씨대종회는 2017년 10월 14일(토요일) 보성군 서편제보성소리전수관에서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임재당 도망시(悼亡詩) 1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용부 보성군수는 "고향의 임재당 선비가 약 300년 전 남긴 일기와 일기 속 도망시라는 귀중한 자료가 경상도 땅에서 발견돼 한글판으로 누구나 읽기 쉽게 재탄생한 데 대해 기쁘고 감사하다"면서 "앞으로 이 일기와 도망시가 한문 원본과 한글 번역본이 함께 출판돼 국립박물관 등에 소장`전시, 우리 국민들 모두가 흠모하고 사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한글 번역본을 출판한 조원경 이사장은 “조선시대 여러 학자와 선비들이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는 시나 제문을 남겼지만 남을 의식해 형식적인 것이 많다. 하지만 임재당은 타인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심정을 일기와 100편의 한시로 표현한 것은 분량상으로 볼 때 매우 많고, 그 내용 또한 애틋하고 감동적이라 읽는자가 눈물없이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원경 이사장은 "경북 안동의 400여 년 된 무덤에서 발견된 '원이 엄마의 편지'가 남편을 그리워한 사부(思夫)의 편지라면, 임재당 일기는 눈물없이 읽을 수 없는 300여 년 전의 매우 독창적인 사부(思婦) 일기"라며 "스토리텔링과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엄청난 자료가 가문과 지역을 넘어 세계적으로 널리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박규홍 경일대 교수는 "언어의 한계를 넘는 슬픔이 담겨 있다. 시대를 뛰어넘어 동서고금에 드문 절절한 부부애의 특별한 경지를 보여준 정신문화의 유산으로 자리매김해도 좋다"고 했다. 임미정 연세대 강사는 "일기 속에 시 102수가 수록된 덕분에 전후 사정과 배경을 함께 고찰할 수 있어 연구가치가 높다. 현전 도망시가 300여 수 정도인 상황에서 임재당의 도망시 102수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고, 새로운 연구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했다.
다양한 장르에서 활용이 필요함을 강조한 박인기 경인교대 명예교수와 임선하 서경대 초빙교수는 "원이 엄마의 한글편지가 박물관 전시, 테마공원, 테마길, 영화, 오페라 등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며 "임재당의 도망시도 교과서 소개와 극'영화'뮤지컬 제작, 가칭 부부사랑박물관 건립 등 지역연계형 체험벨트로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조원경 이사장은 “앞으로 장흥임씨대종회와 보성군이 임재당이 남긴 이 일기와 일기 속 도망시에 대한 학술심포지엄을 열어 안동의 400여 년 된 무덤에서 발견된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쓴 '원이 엄마의 편지' 못지않게 갑진일록의 가치와 감동을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임재당도망시학술대회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목적은 임재당 도망시의 학술적 가치를 찾아 후속 연구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여 독창적인 문화콘텐츠로서의 위상을 정립하여 이를 토대로 문화 자원과 교육 자료로 그 활용성을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목적은 임재당 도망시의 지역 자원화 가능성을 탐색하여, 이 일기가 보성군에서 살았던 사람에 의해 집필되었다는 점에서 소중한 문화 자원으로 활용이다. 조선시대는 남존여비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애를 바탕에 둔 진솔한 부부의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임재당(任再堂, 1686년∼1726년)은 21세 때인 1707년 부친 풍산홍씨 14세 홍처일(洪處一, 1638년~1709년)과 모친 나주정씨 정원립(丁爰立)의 3남1녀중 외동딸인 3살 연상인 풍산 홍씨(1683∼1724)와 결혼한 후 19년을 함께 살았다. 임재당의 부친은 찰방을 지낸 임대년(任大年)이고, 임재당의 양자는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낸 임태관(任泰觀)이고, 손자는 과거에 급제해 정6품 이조좌랑에까지 올랐다. 부친 풍산홍씨 14세 홍처일(洪處一, 1638년~1709년)은 풍산홍씨 남평공계 경력공파 인물로 고조부는 통훈대부훈련원주부 홍연(洪漣), 증조부는 사복시주부 홍민언(洪民彦), 조부는 통훈대부도총부경력을 지낸 홍시현(洪時顯), 부는 홍종응(洪鐘應), 모는 참봉 서유진의 따님이다.
선비 임재당이 쓴 갑진일록
풍산홍씨 부인이 사망하기 9일 전인 1724년 6월 20일부터 돌림병에 걸린 부인을 걱정하며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6월 29일 아침 10시에 부인이 사망하자 1726년 5월 1일까지 약 2년간 부인을 잃은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갑진일록을 기록하였다.
아내를 염습한 내용, 문상을 온 사람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 장례에 대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당시의 상례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2년간의 생활상을 기록한 내용 외에도 부인을 추모하며 임재당이 직접 지은 100편의 도망시(悼亡詩)와 각종 제문들이 일기에 함께 기록되어 있다.
'갑진일록'은 갑진년(1724) 6월 20일인 임재당의 부인 풍산홍씨가 죽은 날 바로 9일 전부터 시작한다. ‘부인이 병에 걸렸는데 열병이나 돌림병인 듯하다. 정신이 흐릿해 약을 몇첩 먹었는데 차도가 없어 이미 죽은 사람과 같다…’라는 내용으로 서두를 뗀다.
갑진년(1724) 6월 29일 아침 10시 (아내를) 도저히 살리지 못해 삶을 마치게 했으니 참으로 슬프다. 지금 비참한 마음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6월 30일. 시신을 염습했다. 이게 꿈인지 사실인지. 대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갑진년(1724) 6월 30일
“집사람은 42살에 세상을 마쳤다. 그녀는 마음이 매우 아름답고 행동이 단정하며 말수가 적고 여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집에 홀로 있을 때도 쓸데없는 말이나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부부 사이에 서로 공경함은 언제나 똑같았다. 오랫동안 자녀가 없어 손수 익모환을 지어 많은 양을 오랫동안 먹더니 끝내 속이 막히는 증세가 나타나고, 자신의 본 모습도 흐트러져 친정집에서 온 사람들 모두가 얼굴 모습이 바뀌었다고 말하였다. 또 검소한 생활을 하여 집에 있을 때나 밖에 나갈 때나 다 옷들은 있는 그대로 입어 화려한 꾸밈 같은 것이 없었다. 집안에서도 직접 부엌일을 하며 웃어른 받들기를 극진히 하였다. 그다지 필요 없는 비용은 애써 다 생략하였다. 아내로서 생활공간에 스스로. 법도가 있고 엄격한 질서가 있어 문란함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지낼 때도 늘 화목한 모습이었다.“
그는 아내를 염습한 날 부부가 함께했던 19년을 회상했다. "1722~1723년 두 해 동안 내가 병으로 회복하기 어려울 때 (아내는) 아침저녁 쉼 없이 병을 고치려고 간호했다. 그때 주위 사람들에게 '하늘이 나를 돕는다면 반드시 남편보다 나를 먼저 데려가라'고 했다…."
이 일기에는 언제 누가 문상을 왔고, 당시 국장이 있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다가 그해 11월에 장례를 치렀다는 내용 등이 적혀 있어 당시의 상례 문화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로도 평가받고 있다.
‘꿈에 어머니와 부인을 보았다. 양자로 임태관(任泰觀)을 들였지만 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고, 서로 알릴 길도 없어 슬프고 슬플 뿐이다…’라는 등의 일기는 병오년(1726) 5월 1일까지 2년 가까이 계속된다. 임재당은 이 일기가 끝난 후 2개월 지나 아내 곁으로 간다.
선비는 복받치는 슬픔과 그리움 등을 100편의 한시로도 표현했다.
'마당의 모과 벌써 처음 익어/ 영전에 바치니 마음 더욱 슬퍼지네/지난날 그대와 함께 모과 열매 보았어도/오늘 함께 맛볼 수 없음 어찌 알았으랴.' 아내와 함께 심었던 모과나무에서 열매가 익었으나 함께 맛보지 못하는 애절한 심정을 표현한 시다.
첫댓글 (보성)장흥임씨(長興任氏)대종회 관여하시는 분이 이글을 보신다면 임재당께서 쓰신 갑진일록 해석본을 구할수 있도록 도움을 부탁합니다. 홍기택핸드폰 010-9578-5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