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가야지역을 정벌하여 한국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학설. 이는 일본이 날조한 대표적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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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가야지역을 정벌하여 한국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학설. 이는 일본이 날조한 대표적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의 하나이다. 일본은 메이지시대[明治時代]부터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를 연구하던 간 세이유[菅政友], 쓰다사유키치[津田左右吉], 이마니시류[今西龍] 등의 문헌고증을 거쳐 제 2 차세계대전 뒤 스에마쓰[末松保和]에 의하여 학문적 체계를 갖춘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으로 완성하였다. 그러나 임나일본부설의 주근거사료인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일본왕가를 미화하기 위해 편찬된 책으로, 원사료 편찬 과정에서 상당한 조작이 가해진 것으로 보이며, 5세기 이전의 기록에 대해서는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또한 여기에 관계된 《송서(宋書)》 <왜국전>이나 광개토대왕비문을 과장되게 해석함으로써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연구에 의하면 일본의 야마토세력[大和勢力]이 일본열도를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이후이며, 그 이전에 내부성장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외적 팽창을 시작했다는 주장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또한 일본이 가야지역을 200여 년간 지배하였다면 그 지역에 일본 문화유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야 함에도, 최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단절된 유물이 아니라 지속적인 연관을 가진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의 문헌사료 해석에 큰 오류가 있었음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임나일본부설은 가야사와 일본 고대사 연구가 체계적으로 재검토된 뒤에 다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720년에 성립된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 신대(神代)부터 지토천황[持統天皇, 재위 645∼702]까지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였다. 성립 초기에는 <일본기(日本紀)>라고 하였으나 헤이안[平安] 초기부터 <일본서기>라고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성립시기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밝혀져 있으나, 편찬 개시 시기와 편찬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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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0년에 성립된 일본 최초의 정사(正史). 신대(神代)부터 지토천황[持統天皇, 재위 645∼702]까지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하였다. 성립 초기에는 <일본기(日本紀)>라고 하였으나 헤이안[平安] 초기부터 <일본서기>라고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성립시기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밝혀져 있으나, 편찬 개시 시기와 편찬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편찬개시는 기기(記紀;《古事記》와 《日本書紀》) 2책에 나타난 편찬사업을 같은 것으로 보는가에 따라 기전기후설(紀前記後說)과 기전기후설(記前紀後說)로 나뉘나, 《속일본기》로 미루어 기전기후설(記前紀後說)이 더 타당하게 여겨진다. 한편, 편찬은 덴무왕자[天武王子;舍人親王]가 총괄했고, 덴무의 황손인 겐쇼여왕[元正女王] 때에 완성되었다. 《일본서기》의 편찬자료는 제기(帝紀)·구사(舊辭)는 물론 가기(家記), 정부의 기록, 한국의 사료 등을 널리 활용하였다. 《일본서기》의 연구는 성립 직후부터 궁정에서 감독, 많은 사기(私記)가 만들어졌는데, 중세 이후 이것을 신전(神典)처럼 숭상하기에 이르렀다. 이 경향은 과학적 연구를 저해하는 결과를 낳다가 제 2 차세계대전 뒤 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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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서 [宋書]
중국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의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 정사(正史)의 하나로, 문인 심약(沈約)이 487년 남제무제(南齊武帝)의 칙명을 받들어 편찬했는데, 본기 10권과 열전 60권은 1년 만에 완성했으나 지(志) 30권은 10여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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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조(南朝) 송(宋)나라 때의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 정사(正史)의 하나로, 문인 심약(沈約)이 487년 남제무제(南齊武帝)의 칙명을 받들어 편찬했는데, 본기 10권과 열전 60권은 1년 만에 완성했으나 지(志) 30권은 10여년이 걸렸다. 곡필(曲筆)로 비판도 받았으나 인물·사물의 개성과 풍요함을 중시한 남조귀족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고 서술은 상세하며 소칙·상주문·사신(私信)·문학작품을 많이 실었으며, 지(志)는 여러 제도의 변천을 한(漢)나라나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 더듬고 있어서 더욱 가치가 있다.
백제시대의 철제 칼. 육차모라고도 한다. 칼날 수가 총 7개로, 곧은 칼날 양쪽에 작은 칼날이 각각 3개씩 더 붙어 있다. 한국에는 실물과 문헌이 전해지지 않으나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그 이름이 보이고,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그 실물이 전해진다. 이 칼의 몸체에 상감되어 있는 명문의 내용은 표면에 <태화 4년 9월 16일 병오 정양일에 백련강철(百鍊鋼鐵)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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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의 철제 칼. 육차모라고도 한다. 칼날 수가 총 7개로, 곧은 칼날 양쪽에 작은 칼날이 각각 3개씩 더 붙어 있다. 한국에는 실물과 문헌이 전해지지 않으나 일본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그 이름이 보이고,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그 실물이 전해진다. 이 칼의 몸체에 상감되어 있는 명문의 내용은 표면에 <태화 4년 9월 16일 병오 정양일에 백련강철(百鍊鋼鐵)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많은 적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제후국의 왕들에게 나누어줌이 마땅하다. ○○○가 제작함>이라 하고, 뒷면에는 <선세(先世) 이래로 아직 이 칼이 없었던 바 백제의 왕세자 기생성음(奇生聖音)이 왜왕지(倭王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라>라고 하였다.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점과 표기된 제작연대를 고려할 때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에 하사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1935년부터 1936년에 걸쳐 발굴조사하였던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에서 칠지도의 일부로 생각되는 유물이 발견되어 보고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