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전 예정설인가 타락후 예정설인가?
:차이점은 무엇인가?
Rev. Cornelis. Pronk
박상현
최근에 나는 그랜드 레피즈에 있는 우리 신학교에서 분리파 신학 한 강좌를 가르쳤습니다. 한 강좌에서 타락전 예정설과 타락후 예정설을 다루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용어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이 두 용어는 1892년 연합 전후로 네덜란드 개혁교회 분리(혹은 환원)파 교회와 돌레앙띠 교회 사이에 핵심역할을 했습니다. 이때에 1834년 분리에 뿌리를 둔 대부분의 교회는 1886년 화란 개혁교회로부터 나왔던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를 따랐던 돌레앙띠(불평) 교회에 가담했습니다. 이 새로운 교단은 네덜란드 개혁교회들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이라는 이름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분리파 사람들이 이 통합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소수의 목사들과 교회들은 그들이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 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로 계속 지내기로 결정했습니다.[이 교단의 또 다른 영어식 이름은 자유개혁교회Free Reformed Churches이다.]
비록 모든 사람이 카이파가 위대한 사람이었다는데 동의했다고 할지라도, 이 말은 카이퍼가 했던 혹은 가르쳤던 모든 일이 다 옳았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목사들과 사람들 가운데 훨씬 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카이퍼의 몇 가지 견해들에게 점점 더 불편을 느꼈습니다.
카이퍼는 타락전 예정설을 주장하는 사람이었고, 반면에 분리파 대부분 사람들은 타락후 예정설을 견지했습니다. 기본적인 관점에서 이 차이점은 구원의 몇 가지 핵심 교리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를 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유 개혁교회 선조들을 나누었고 그리고 여로 모로 돌레앙띠 영향력을 겪었던 이 개혁교회들로부터 우리를 계속 구별시키는 쟁점을 바르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쟁점 정의
타락전 예정설과 타락후 예정설이라는 이 생소한 용어들은 무슨 뜻입니까? 타락전 예정설은 “위에” 혹은 “앞에”라는 뜻을 가진 “supra”에서, 그리고 “타락”이라는 뜻을 가진 “lapsus”에서 나왔습니다. 이 양편들은 소위 그들이 신적인 경륜의 논리적인 순서를 생각하는 다른 방식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해당 쟁점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예정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벌코프L. Berkhof는 이렇게 말합니다. “해당 사안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택과 유기의 세상을 창조하고 그리고 타락을 허용하는 경륜 앞에 오는가 아니면 뒤에 오는가 여부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질문을 포함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정 경륜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이미 타락한 것으로 간주하시는가, 아니면 여전히 창조되어져 타락으로 운명 지워진 대상으로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타락전 예정설 순서
1. 하나님이 먼저 일부 사람의 구원과 또 다른 사람의 정죄 안에서 당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결정하셨고, 그리고 이 국면에 하나님의 마음에 오로지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했다.
2. 그 다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
타락후 예정설 순서
1.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다.
2. 그 다음 하나님은 사람의 타락을 허용하기로 결정하셨다.
3. 그 다음 하나님은 타락하여 공의롭게 정죄받은 사람들 가운데 특정수를 영원한 생명으로 선택하시고, 또 다른 사람을 간과하여 그들의 죄에 대한 영원한 파멸에 처하기로 결정하셨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택자를 위한 구원을 방법을 제공하기로 결정하셨다.
타락후 예정설 순서는 우리 모든 신조에 따른 순서입니다. 특별히 돌트 신경과 벨직 신앙고백서의 순서입니다. 하지만 타락 전 예정설 입장은 훨씬 더 논리적인 순서를 가지고 있어, 이 순서를 더 체계적으로 배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타락전 예정설은 피조물이자 도덕적인 주체로서 사람의 역할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타락전 예정설과 타락후 예정설 사이의 논쟁 전체를 조롱하더라도, 교리의 스콜라적인 것처럼 보이는 자세한 논점들에 관해 견지하는 입장이 또 다른 많은 사활이 걸린 중요한 교리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합니다. 이 사실이 카이퍼 박사와 그의 반대자들의 경우에 해당되었습니다. 맹렬하게 타락전 예정설 주의자인 카이퍼 박사는 은혜 언약, 칭의, 중생과 세례와 같은 교리들에 대한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이것들을 카이퍼 반대자들은 비성경적인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언약과 칭의
은혜 언약으로 시작합시다. 카이퍼는 은혜 언약이 택자를 대표하는 그리스도와 맺어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 회원권은 택자에게만 제한되었습니다. 복음의 약속들은 결과적으로 오로지 택자들에게만 해당되었습니다. 카이퍼에게, 언약과 선택은 실천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택자들은 영원부터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다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아들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으로 본다는 것을 함축한다고 카이퍼가 가르쳤습니다.
이미 영원 전에, 그들이 창조되기 전에, 택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목전에서, 어떤 죄책과 형벌이 없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권리를 받은, 의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서, 카이퍼 박사는 요한계시록 13장 8절과 같은 본문을 강조했습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들”과 “세상 기초 전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 대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카이퍼가 이것이 어린양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했다는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카이퍼는 어린양이 시간 속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비슷하게 이 희생제사에 포함된 택자들은 시간 속에서 의롭다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영원 전에 결정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실제로 영원 전에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카이퍼는 이것이 실제적인 칭의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칭의는 이미 영원 전에 일어났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로마서 5장 1절에서 칭의는 무슨 뜻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카이퍼에 의하면, 이 말은 단지 믿음으로 우리가 우리의 영원한 칭의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분리파 사람들은 이 개념을 철저하게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영원 전에 그리스도와 택자 사이의 결속이 있었고, 그리고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전가된다는 의미에서, 영원 전에 청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을 통한 시간 속에서 실제적인 칭의를 불필요한 것으로나 아니면 필수적이지 않는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영원 전에 일어났던 것이 오로지 이것이 실제로 시간 속에 일어날 때에만 실재가 됩니다. 우리 개혁파 선조들은 카이퍼의 가르침으로 칭의가 죄인이 경험할 필요가 없고, 실제적인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는 일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중생, 회심과 세례
중생 교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카이퍼는 믿는 부모의 자녀들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중생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정적인 중생교리는 교회에 큰 풍랑을 일으켰고, 우리 가운데서 계속 논쟁적인 주제가 되었습니다. 카이퍼가 은혜 언약이 단지 택자와 맺어졌다는 그의 주장 때문에 이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약속들은 단지 택자들을 위해서만 의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고자 의도하지 않는 것을 결코 약속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택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이 모든 세례 받은 자녀들이 택자로 판명되거나 중생의 증거를 내놓는다는 입장을 반대합니다. 참으로 카이퍼는 우리가 자녀들의 생활에서 정반대가 보일 때까지 이를 전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간접적인 혹은 직접적인 이러한 중생설과 관련하여, 카이퍼는 도구인 말씀 없는 직접적인 중생을 믿었습니다. 카이퍼에게, 설교는 주로 양육의 수단이지 죄인들을 향한 회개의 요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중생하지 않는 한 들을 수 없습니다. 이 전통에서 설교자들은 단지 생명, 즉 중생의 씨앗을 소유하는 사람들에게만 설교합니다. 그들이 영원 전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자신들이 믿기 때문에 믿으라고 요구받습니다. 카이퍼의 전통에 따르면, 구원의 순서에서, 중생이 믿음과 회개 요구 이전에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만사가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자랄 위험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진노, 죄에 대한 평결, 아니면 그들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교회 생활에 대한 카이퍼의 가르침의 함축된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졌다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카이퍼의 가르침은 교회 안에서의 설교와 목회사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이퍼는 죽은 죄인들이 복음을 들 수 없으며, 그러므로 성령께서 말씀과 무관하게 중생을 일으키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그들이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성령에 의해 살리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가 나사로에게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무덤에서 살리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5장은 우리에게 죽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본문들은 죄의 어둠 속에서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은 성령을 동반한 말씀이라고 가르칩니다.
카이퍼는 회심의 필요성을 설교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카이퍼는 택자가 중생되었다는 가정된 바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회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는 택한 자녀에게 있다고 생각되는 가정적인 은혜를 토대해서 집례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분명한 함의는 자녀가 택자가 아니라면, 세례는 공허한 의식이라는 것입니다.
분리파 사람들은 세례가 하나님의 객관적인 약속을 토대해서 집례된다고 믿었습니다. 세례 시에 객관적인 약속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약속들은 믿음과 회개를 방편으로 해서만 성취됩니다.
심지어 연합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조차도 카이퍼의 신학에 대해서 심각하게 유보입장을 보였습니다. 긴 투쟁 끝에 드디어 1905년 위트레히트 대회의 결론The Conclusion으로 알려진 타협안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세례와 관련하여 이 타협안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우리 교회의 고백서에 의하면,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견지에서 언약의 자녀들이 분별할 나이가 되어서 그들의 고백과 행실로 정반대의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 한,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되고 거룩하여 진 것으로 간주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정된 중생을 토대로 해서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집례된다고 말하는 것은 별로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례 근거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유 개혁교회 선조들은 위트레히트 결론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별로 적절하지 않다less correct”는 표현은 카이퍼 견해를 세례와 중생에 대한 옛 분리파 입장에 대한 합법적인 또 다른 대안으로 문을 넓게 열어두었습니다. 판명이 났듯이, 카이퍼 견해는 연합 교회에서 압도적인 견해가 되었고, 참으로 잠시 뒤에 이 견해가 공적인 견해로 선포되었습니다.
카이퍼의 가르침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 전통 안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대체로 확신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죄된 것으로 거부합니다. 그들에게 믿음은 그분에 의해서 구원받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 위에 자신의 죄책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약적인 약속들
그렇다면 이 쟁점에 대한 자유 개혁교회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은혜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 사람에게 오는 형태를 상징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이 언약은 영원 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세워졌습니다. 은혜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과 나중에 신약시대 신자들과 그들의 후손들과 맺어졌습니다. 은혜 언약은 택자와 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자들과 그들의 자녀들과 세워졌습니다. 여기에 신자들만 아니라 유기된 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은혜 언약은 이삭만 아니라 이스마엘도, 야곱만 아니라 에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혜 언약의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혹은 구원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오로지 믿음과 회개라는 방편으로만 실현됩니다. 믿음과 회개는 은혜 언약의 조건이라고 부르게 불려질 수 있습니다. 이 둘이 사람의 힘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성취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요구하시는 바를 제공하십니다.
구속언약은 은혜 언약의 영원한 국면을 상징합니다. 구속언약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구원에로 선택된 사람들의 수와 신분에 관한 협약 혹은 언약입니다. 은혜 언약은 구속언약의 역사적인 외적인 일이며,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택자들에게 구원을 전달하시는 방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성령께서 일으키시고 하나님을 향해 회개하도록 하는 구원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라는 [거짓된] 확신에 비스듬히 기대기 위한 긴 의자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달라고 주님께 요청하기 위한 탄원 근거입니다. “주여 말씀하신 바를 행하소서!” 다윗은 주님께서 자기 보위를 영원토록 견고하게 세우실 것이라고 자신에게 약속하신 바를 간구했습니다(대상17:23). 이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되리라”(롬10:13)는 약속을 모든 죄인이 굳게 붙들면서 본질적으로 말하게 될 내용입니다.
주의를 기울이라는 경고
타락전인가 타락후인가가 차이가 있습니까? 참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타락전 예정설” 입장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이미 중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양육 받는 탁아소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타락후 예정설” 입장은 교회를 성령의 “구원-기관” 혹은 성령의 “일터”로 간주합니다. 여기에서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이 구원 받으며,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위해 가르침을 받고 구비됩니다.
텐 홀 교수가 1905년에 기독 개혁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타락전 예정론 입장의 설교[아브라함 카이퍼와 그의 제자들이 실행에 옮기는 바와 같이]는 지옥으로 향해 진군하고 있는 영적으로 죽은 죄인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진군하고 있는 하나님의 중생한 백성들에게 하고 있다, 설사 그들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서 정죄 아래 있는 사람들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되고, 사람의 비참함의 깊이와 가공스러움에 맞추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가 설교하는 대상은 더 이상 이런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내적으로 어떠한지 본성상 우리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모든 영적인 경험과 조건과 더불어 영적인 삶은 깊이 있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어떤 설교들은 석의 논문이나 교리 강의에 지나지 않으며, 의심의 여지기 없이 자신의 권리에서 건전하고 귀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을 건드리지는 않는다. 영적인 생활을 발가벗기고 활기를 띄게 하지 않는 것은 복음 설교가 아니다.
이 경고가 여러 모로 돌레앙띠 정신에 젖어 있는 다른 사람들과 기독 개혁교회에 의해 거의 주목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를 주목해왔습니까? 우리의 유산을 1834년의 분리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우리가 언약적인 자동주의와 라오게디아 교회의 안주의 위험에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생각해봅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22)
출처: Supra or Infra: What is the Difference? in No Other Foundation than Jesus Christ, Cornelis Pronk, 2008, Free Reformed Publication, Mitchell, pp. 185-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