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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현대사 고스란히 간직한 유일한 ‘굴뚝’
1930년대 지어진 25m 높이의 굴뚝
일제강점기 제지공장의‘마지막 흔적
“역사적 시설물, 보전방안 마련 필요”
이종관 기자 | leejk@agoranews.kr
[92호] 승인 2015.06.26 10:05:38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경 제지공장을 건설할 때 함께들어진 콘크리트 굴뚝. 순천 현대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까지의 순천 현대사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시설물이 있어 보전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물 뿐만 아니라 순천에서는 유일한 아파트 10층 높이의 콘크리트로 된 거대한 굴뚝이다.
굴뚝은 순천역에서 여수방면으로 500m를 지나다 보면 왼편에 있는 옛 삼립자동차공업사 터에 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굴뚝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경 당시 제지공장을 건축하면서 함께 지어졌다. 당시 종이 수요가 늘어나면서 지어진 제지공장에서 닥나무를 삶아 종이를 만들었는데, 이를 위해 굴뚝을 함께 올렸다. 높은 건축물이 없었던 당시에는 두께가 2m를 넘기고, 높이도 25m에 달하는 굴뚝은 순천에서도 가장 높은 시설물이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지공장은 적산으로 불하되었다. 황의병(80세. 민주평통 순천협의회장) 씨는 “승주의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김정기 씨가 적산을 불하받아 ‘천보제지주식회사’로 운영했다”고 밝혔다. 순천시 풍덕동에 있는 ‘천보교회’도 당시 천보제지 사장 김정기 씨의 도움으로 설립된 교회라고 한다.
벙커C유로 닥나무 원료를 삶아 종이를 생산하던 이 제지공장은 전남에서도 유일한 제지공장이었다. 순천은 종이의 원료가 되는 나무가 많은 지리산과 가깝고, 순천에는 철도가 연결되어 있어 물류환경이 좋았기 때문이다.
70년 경 천보제지 바로 옆에 있던 보해양조의 주정공장에도 천보제지와 같이 벙커C유를 태우는 콘크리트 굴뚝이 지어졌지만 크기는 천보제지 굴뚝보다 작았다.
천보제지는 이후 경상도 사람에게 넘겨져 운영되었지만 외국에서 종이를 수입하면서 결국 문을 닫았다.
이 굴뚝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1980년 7월이다. 당시 장천동에서 영업하던 삼립자동차공업사가 옛 천보제지 공장 터 2970평 중 1670평을 1978년에 사들여 1980년 현재의 부지로 이전해 오면서 굴뚝에 도색작업을 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지금도 그 때의 모습을 보전하고 있는 이 굴뚝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후의 산업화시기 등 순천 현대사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한때 매연을 뿜어내던 굴뚝이 이제는 현대사의 유일한 증거가 되고 있다. 황의병 씨는 “한국전쟁 당시 순천역을 폭격했는데, 당시 기관총 사격으로 굴뚝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끊어지기도 했다”며 “지금도 굴뚝에는 기관총 총격을 받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 한국전쟁 당시 순천철도를 폭격할 때 함께 공격을 받은 굴뚝 한쪽에 기관총 총격의 흔적이 남아있다.
1980년 천보제지 터로 확장 이전했던 삼림공업사도 한 때는 직원이 수십 명에 달할 정도로 성업했지만, 자동차공업사와 소규모 카센터가 난립하면서 최근에 폐업해 이 공장의 굴뚝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굴뚝을 소개하는 황의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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