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2, 5.18 그리고 '서울의 봄'
0 다시 보는 ‘12·12, 5·18’ 實錄
12·12 사태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 이 화제다. 흥행리에 상영 중인 이 영화를 관람하며 나는 오래전 출판된 ‘실록 12.12, 5.18’(대한민국 재향군인회 호국정신선양운동본부 1997년 5월 30일 발행, 국판 683쪽)을 다시 펼쳐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이 책 특별감수를 맡아 밤새워 원고를 검토했던 일이 엊그제 같아 더욱 감회가 새롭다.
이 책은 일부 정치군인들이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후, 그들의 정통성과 정당성이 오도되어 왔음에 분개한 나머지 얼룩진 역사를 바로 잡자는 취지에서 재향군인회가 심혈을 기울여 발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군인세력들이 자행한 군란에서 내란으로 이어진 헌정질서 파괴행위의 진상을 객관적 史實에 입각하여 책을 간행함으로써 실추된 군의 명예와 신뢰를 회복시키고, 정치군인세력들의 쿠데타를 예방 또는 진압하지 못한 군부(지금은 예비역)의 대국민 참회와 자성의 계기로 삼고, 앞으로 쿠데타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구하는데 기여하여 자유민주주의의 헌정수호에 일조 하겠다’는 것이 이 책 출판의 취지였다.
이 책은 제1편과 제2편에서 일부 정치군인들이 군사반란과 내란을 일으킨 배경, 실행과정, 결과 및 평가를, 제3편에서는 정치군인들의 부도덕성과 부정행태, 제4편에서는 법의 심판을 통한 역사 청산과업을 다루고 끝으로 교훈 및 결언 순으로 구성돼있다.
내용면에서 이 책은 철저한 사실위주로 서술돼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유혈사태 국보위 설치 우영, 언론인 해직과 언론 통폐합에서부터 정치군인집단의 강압통치와 인권 탄압 단죄와 뒤처리 등 역사청산 작업, 12.12 5.17 및 5.18 사건의 공판기록까지 제목만 봐도 실록의 무게를 더해준다.
영화 ‘서울의 봄’(감독 김성수)은 많은 면에서 이 책을 근간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0 황정민등 출연배우들 연기 압권
‘서울의 봄’ 영화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필두로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 일원이 1979년 12월12일에 일으킨 군사 반란을 그린 영화다. 모두 가명으로 등장하지만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한 인물들과 무능한 탓에 반란군 승리에 길을 터준 인물들이 적나라하게 등장해 긴장감속 흥미를 더해준다.
특히 출연배우들이 모두 리얼하게 실제 상황을 연기하고 있어 장 장 두 시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이른바 하나회 멤버들의 맹활약(?)은 물론이고 전두환 역(영화에선 전두광 이름으로 나온다)을 맡은 황정민의 연기가 압권이다.
영화 중 일촉즉발의 광화문 대치 장면은 허구지만, 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노재현씨가 군사 반란의 시작과 함께 공관에서 달아나고, 이후 반란군 승리에 밑돌을 놓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린 건 사실이다. 1996년 12·12 주범들에 대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그는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께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벌어진 총격전 소리에 놀라 단국대 체육관에 피신했다가 이후 합동참모본부 작전국장의 여의도 소재 아파트, 한미연합사령부를 떠돌며 몸을 숨긴 것으로 밝혀졌다.
영화 속에서 민성배(배우 유성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공관에서 하나회 일당에 불법 체포당한 뒤 육군 지휘계통에 따라 진압 책임을 지게 됐지만, 우유부단한 처신으로 반란군 승리에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반란군이 육군 지휘본부가 대피했던 수도경비사령부를 점령할 때 무장해제당해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다.
영화 속에서 전두광(배우 황정민)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육군 통신 감청을 맡았던 문일평(배우 박훈) 대령의 실제 모델은 허화평 대령이다. 12.12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0- 정우성이 열연한 장태완 수경사령관
배우 정우성이 열연한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의 실제 모델은 장태완 장군이다. 1931년생인 장태완은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를 다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19세의 나이로 전시 장교양성 기관이었던 육군종합학교 11기로 입교했다. 당시 부산 동래에 있던 육군종합학교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보병학교의 교육기능을 통합해 9주~16주간의 단기교육을 거쳐 초급 장교들을 배출했다. 이른바 갑종(甲種)장교들이다.
1950년 12월 소위로 임관한 장태완은 수도사단(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예하 26연대에 소대장으로 부임해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1951년 9월 향로봉 전투에 투입되어 결사대를 이끌고 향로봉 북쪽 924고지를 탈환하는 전공을 세웠다. 당시 신문에는 '장태완 소위가 이끄는 결사대가 혈전 끝에 향로봉을 점령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후엔 중대장으로 수도고지 전투, 금화지구 전투를 치렀다. 그는 영관 장교 시절부터 군인들의 정치개입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1965년 수도사단 작전참모(중령) 시절 사단이 베트남 파병부대로 선발됐는데, 그는 신원조사 과정을 통과하지 못했다. 장태완이 육군대학 졸업논문에서 '정권유지 차원에서 지나치게 비군사적으로 활용돼 군 기강을 문란 시키고 군의 단결을 저해시킨 보안사령부를 해체하고 모든 정보부대를 통합해 순수 군사정보지원 업무만 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한 대목을 보안사가 문제 삼은 것이다.
졸지에 '사상 불순자'가 되어 파병 부적격 판정을 받았던 장태완은 우여곡절 끝에 1965년 10월 맹호사단 1연대 1진으로 베트남에 파병되어 이듬해 9월 대령으로 승진한 후 귀국했다. 부임한 지 24일 만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한 12.12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장태완은 군사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수경사 근무 장교 450여 명 중 대다수가 반란군의 회유에 넘어갔고, 그날 밤 수경사령관의 명령에 복종한 장교들은 60여 명에 불과했다.
장태완은 사령부에 근무하는 100여 명의 장병들을 긁어모아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반란군 지휘부를 진압하려 했지만, 끝내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13일 새벽 장태완은 자신의 직속 부하였던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육사21기, 육군본부 헌병참모부장)에게 체포되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압송됐다.
장태완의 불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보안사에서 풀려난 후에도 반년 동안 사실상 가택연금을 당했다. 관악구 봉천동의 24평짜리 좁은 집에는 보안사 요원들이 상주하며 장태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풀려난 지 두 달 만에 그는 부친상을 치러야 했다. 장태완의 아버지는 아들이 반란군에게 체포된 후 '옛 부터 역모자들의 손에서 (충신이) 살아남을 수 없는 게 우리 역사'라면서 막걸리 외에는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1982년 1월에는 외아들 성호(1962년생)가 행방불명됐다가 한 달 만에 부친의 무덤 근처인 경북 왜관의 낙동강 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자신이 반란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고, 보안사 요원들이 수시로 집을 드나드는 어수선한 환경에서도 공부를 곧 잘해 1981년 서울대학교 자연대에 수석 입학했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성호의 시신을 싣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장태완은 꽁꽁 얼어붙은 아들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부벼대면서 피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사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0-비운의 장태완 ' 폭력으로 군권, 정권 장악 끝까지 형사책임' 물어
군사반란을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언제나 장태완을 괴롭혔다. 사건 직후부터 화병에 시달렸던 그는 하루 세 갑 이상의 담배를 피웠고, 정신을 잃을 때까지 독한 술을 들이켰다. 수면제를 먹고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어 10여 가지의 약을 달고 살아야 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학대한 결과 1987년에는 10여 시간의 심장 수술을 받아야 했다.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장태완은 1993년 7월, 12·12 당시 육군본부의 정식 지휘계통 아래 있었던 장군 22명과 함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군사반란에 참여했던 34명을 반란 및 항명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했다. 이듬해 검찰은 12.12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하면서도 관련자들을 기소유예하거나 불기소 처분했지만, 장군들의 고소는 이후 1995년 12월 '5.18특별법과 공소시효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디딤돌이 됐다.
12.12와 5.18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를 정지하도록 한 특별법에 따라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황영시, 차규헌, 최세창, 장세동,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박종규, 신윤희, 정호용 등이 구속·기소됐다. 장태완은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하기도 했다. 1997년 대법원은 "12·12는 명백한 군사 반란이며 5·17과 5·18은 내란 또는 내란목적 살인행위였다"고 적시,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설령 성공했더라도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장태완은 1994년 사상 처음 경선으로 진행된 27대 재향군인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후 한차례 연임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인재 영입에 따라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장태완은 2002년 16대 대선에선 노무현 후보의 보훈특보를 맡기도 했다. 2004년 은퇴 선언을 한 후 정계를 떠난 뒤 2008년 폐암으로 폐의 3분의 1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았다. 이후 2010년 7월 26일 79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쿠데타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었던 걸로 알려졌다. 결국 이 책은 영영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장태완은 2010년 1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난 국가와 민족과 역사 앞에 속죄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면서 "국가가 맡겨준 수도경비사령관과 비상계엄하의 수도계엄사무소장의 책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속죄를 비는 마음으로 살아갈 뿐"이라고 괴로움을 토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가족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2012년 1월 17일 부인 이병호씨가 거주하고 있던 아파트 10층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이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앓고 있던 우울증이 더 악화돼 치료를 받아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태완은 ‘12.12쿠데타와 나’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2·12 사태로 인해 그동안 천직으로 알고 자부심을 느껴 온 군대를 떠났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는 그야말로 감당키 어려운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 혼자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결혼 이후 30여 년 동안 군인의 아내로서 남편을 성실하게 내조하면서 가정을 이끌어 오다가 뜻하지 않았던 12·12 사태로 인해 겪어야 했던 내 아내의 비극과 고통도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컸던 것이다."<일부 내용 sns 자료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