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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문학의 과거와 현재
-미얀마 작가 초청 국제문학 심포지엄 참관기
<2008 만해축전의 일환으로>
2008 만해축전 행사가 8워 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 동안 강원도 백담사 인근 만해마을에서 있었다. 이미 6월 14일과 15일에 시조문학 심포지엄(1)이, 7월 8일에 종교자유정책 심포지엄이 만해축전의 일환으로 행해졌으므로 만해축전은 3개월에 걸쳐 진행된 것이었고, 하이라이트가 8월 12일에 있은 입재식과 만해대상 시상식이었다.
마침 2008년도는 건국 60주년, 현대시 100주년, 만해축전 10년째가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만해축전 본 행사가 행해진 8월 중순은 중국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로서 연일 대한민국 선수들의 승전보가 전해지고 있었다. 축전의 일환으로 창작21작가회에서는 국제문학 심포지엄을 주관하게 되었는데 심포지엄의 주제는 ‘미얀마 불교사상과 문학의 전통과 현대’였다.
창작21작가회 대표 문창길 시인은 미얀마를 2월과 7월에 두 차례 방문하여 대사관 관계자와 교민작가 김모 씨의 도움을 받아 현지 문학인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진 뒤 3명의 작가를 초청했다. 이 글은 8월 13일 오후에 있은 미얀마 작가 초청 국제문학 심포지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미얀마와 한국과의 관계>
미얀마는 우리나라와는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1961년에 영사관계를 수립했으며 1975년에 정식으로 수교하여 상주대사관을 설치했다. 국교 수교가 쉽게 이루어진 것은 두 나라 다 군인 출신의 정치가가 통치하는 ‘군사정권’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역협정과 항공협정을 체결하는 등 양국의 관계가 꽤 우호적으로 전개되던 중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나게 된다. 1983년의 ‘미얀마 아웅 산 묘역 폭파 사건’이 그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 중 미얀마에 들렀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미얀마가 자랑하는 독립의 영웅 아웅 산 장군의 묘역에 들러 참배하던 중 폭탄테러사건이 일어나 부총리, 외무부장관, 동력자원부장관, 비서실장, 대통령 경제수석 등 17명이 순직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게 된다. 미얀마인도 4명이 죽었다.
이 사건은 북한 정찰국 소행으로 미얀마 정부는 특별재판부를 열어 테러범들을 엄벌에 처했다. 북조선 국적의 범인 3명 가운데 신기철을 사건 난 해에, 진모씨를 이듬해에 사형시켰다. 무기징역에 처한 강민철은 미얀마에서 복역하던 중 2008년 5월 18일 53세를 일기로 중증의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사건 직후 미얀마는 북조선과는 국교를 중단했다.
아웅 산은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독립전쟁의 영웅인데 1947년에 정적의 손에 암살당했다. 우리들의 귓가에 자주 들려오는 아웅 산 수치 여사는 아웅 산 장군의 딸이다.
수치 여사는 1988년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결을 가한 군부에 맞서 야당을 결성,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 의석 81%를 차지했다. 하지만 군부는 야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는 당원들을 무더기 체포하고 군사정권을 이어갔다. 수치 여사는 1991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미얀마 군사정권은 전 세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수치 여사를 장기 감금상태로 두면서 바깥 세계와 소통을 철저하게 금하고 있다. 1989년 7월부터 감금상태에 들어가 지금까지 두어 번 감금에서 풀려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잠시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녀는 감금되어 있으며 정권은 민주화의 싹을 억누르고 있다. 게다가 지금 혈압 이상으로 위독한 상태라고 한다.
우리도 419혁명이 종식시킨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유신통치,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서 집권의 명분을 공고히 한 5, 6공화국 군사정권의 민주탄압을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 아직도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는 사례를 수도 없이 보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미얀마의 현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미얀마는 원래 왕국이었다. 1824~1855년에 걸쳐 전개된 세 차례의 미얀마‧영국 전쟁을 통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서 1948년부터 다시 영연방이 아닌 식민지로 환원되는데, 독립운동을 거쳐 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미얀마는 지금 유일의 합법정당인 미얀마 사회주의계획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외부세계와 단절한 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와는 그런대로 사이가 좋은 편이다. 1983년의 아웅 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덕분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과 미얀마의 정식 수교 35년째이고 일제 강점기 경험도 공유하고 있으며 오랜 세월 군사독재에 시달린 경험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문학인들끼리의 교류는 거의 전무하였다.
동남아 여러 나라 중 베트남은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 덕분인지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고, 베트남 문학작품도 상당수 번역되어 있다. 구엔 반 봉의 『사이공의 흰옷』, 응웬반봉의 『하얀 아오자이』,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이 번역되어 있고, 최근에도 응웬옥뜨의 『끝없는 벌판』같은 작품이 번역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작가 목타르 루비스의 『자카르타의 황혼』은 이미 1977년에, 프라무디아 아난따또르의 『조국이여 조국이여』는 1986년에 번역된 바 있다. 타이완의 작가 황춘명의 소설집 『사요나라, 짜이젠』은 우리나라에서 꽤 많이 읽혔다. 그런데 지금까지 미얀마 작가들의 소설과 그곳 시인들의 시는 번역된 바가 없는 것 같다.
미얀마에서는 2007년 11월에 반정부 시위기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일본인 기자가 총탄에 맞아 사망함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당국은 오불관언으로 일관했다. 게다가 사이클론 피해가 심해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음에도 국제 구조대원들의 손길을 거부해(나중에 제한적으로 입국을 허용했다) 군사정권의 악명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세 분의 초청 작가는 어떤 사람들인가>
심포지엄의 통역을 맡은 이는 비구니인 범라 스님으로, 한국마하시선원의 고문이며 동두천 생연암의 주지로 있다. 미얀마에 1989년 1년 동안 가 있었고, 그 후 ·1993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동안 미얀마에 머물면서 수도를 했다. 미얀마의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미얀마어만 잘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체류한 덕에 그곳 사회의 실상을 잘 알고 있어 택하게 된 통역자인 모양이다. 범라 스님이 자세히 설명해준 세 분 작가의 이력이다.
치 우 뇨(남) :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는데 역사학과 불교교양 문학에 대한 학위도 있다. 소설을 60편 쓴 소설가로 시나리오와 연극 대본도 다수 있다. 지금은 양곤문화대학 희곡과 고문으로 있다.
미야 니홍 뇨(여) : 소설가이면서 의사이다 .장편 25편, 단편 200편을 발표했다. 직업이 의사인지라 의학 관련 소설을 많이 쓰고 있다.
윈 윈 민(여) : 단편 200편, 시 50편 이상을 발표한 시인 겸 소설가이다. 동화도 쓰고 있다. 미국과 일본 등으로 많은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 외국인들에게 미얀마어를 가르치는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기형 시인 등 문단원로의 축사>
축사를 해준 이는 창작21작가회 고문 이기형 시인이었다. 만해마을에서 열리는 행사라서 그런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는 1938년 가을에 만해 선생을 성북동 자택으로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자택을 심우장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앞서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 조선 독립 이야기를 들었고 뒤이어 선생을 만났습니다. 선생은 ‘조선의 청년 학생은 우리 역사를 알아야 한다’ 고 역설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이광수를 만나 내선일체를 따졌습니다. 그때로부터 70년이 지났습니다. (…) 오늘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단 종식, 통일 완성의 글을 피눈물로 써야 하지 않을까요?”
이와 같이 한용운과 이광수를 직접 만나보았을 때의 일화를 들려준 이기형 시인은 1917년 함경남도 함주 태생이다. 약력을 살펴보니 12세 때 야학을 통해 독립운동에 눈을 떴고, 한설야 ‧ 여운형 ‧ 임화 ‧ 이기영 등을 만나 조선 독립과 문학의 역할에 대해 모색했다. 1938년 함흥고보를 졸업했으며, 1942년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수학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지하협동단사건, 학병거부사건 등 지하 항일투쟁 관련 혐의로 수차례 피검되어 1년여 동안 복역했고,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동신일보>와 <중외신보> 정치부 ‧ 사회부 기자로 일하면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과 이승만 ‧ 박헌영 ‧ 김삼룡 ‧ 이주하 등도 만났다.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기형 시인은 올해 92세이다.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시종일관 카랑카랑했고, 청중은 모두 숙연한 얼굴로 노익장의 불호령 같은 축사를 들었다.
그 다음으로 축사를 해준 분은 한국문인협회 김년균 이사장이었다.
“저희 문협에서는 200명의 회원이 엊그제 민통선 안 통일촌에서 문학작품에 나타난 평화를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습니다. 어제는 1군 사령부 영내에서 현역 사병들과 함께 시낭송과 사물놀이 공연, 백일장 시상식 등 문학 행사도 다채롭게 가졌습니다. 미얀마에서 온 작가분들을 보니 작년에 왔던 팔레스타인 시인이 기자회견 자리에서 한 말이 생각납니다. 문학이란 어둠 속에서 빛을 캐내는 작업이라고 했었지요. 빛을 만드는 것이 문인이고 바로 그 빛이 작품이라고 한 말도 기억납니다. 그런 좋은 문학적 대화가 이 자리에서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토론자 박정애 교수와 치 우 뇨와의 대화>
첫 번째 기조 발제는 치 오 뇨의 ‘소설과 소설가’ 였다. 발제문은 소설의 구성 요소 일곱 가지에 대한 짧은 설명과 소설의 주제에 대한 간단한 논의, 그리고 한 편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문학심포지엄의 방향과 걸맞지 않은 색다른 발제문인데 강원대 스토리텔링학과 박정애 교수가 토론문을 잘 작성했다. 소설 ‧ 청소년소설 ‧ 동화 ‧ 비평 ‧ 에세이 ‧ 번역 등 전방위적으로 활동 중인 박 교수는 일단 치 오 뇨 씨의 소설 일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면서 질문을 했다.
겨울은 소설이 되기 전에 그 자신의 철학을 갖고 있다. 소설가는 자신의 철학으로 겨울이라는 ‘왕국’을 이해한다. 그가 겨울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소설가가 ‘왕국’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것은 매우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이다.
이상 소설 속 문장을 제시한 뒤, ‘겨울’은 사계절 중 가장 추운 계절이므로 작가가 쓴 ‘겨울’도 한국어의 의미 맥락에서처럼 ‘엄혹한 시대’를 상징하는가를 물었다.
대답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미얀마에서는 ‘작가의 날’이란 것이 겨울에 있어 그렇게 썼다고 했다. 양성우의 시 「겨울 공화국」을 염두에 두고서 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야말로 동문서답이었던 것. 치 우 뇨는 미얀마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질문임을 눈치 채고는 이런 식으로 넘어가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닌 게 아니라 전날 저녁 간담회에서 범라 스님은 미얀마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답변을 요하는 질문이 나와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사회자인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이것이 3명 작가의 뜻인지, 미얀마 당국의 뜻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 범라 스님 자신이 이 문제를 터부시하고 있었는데 성직자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통역자 본연의 일보다는 세 작가의 안전을 위해 더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강한 의지를 시종 보여주었다.
박 교수는 다소 당황해하며 다음 질문을 했다. 소설의 1인창 화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는데 밤새 잠들지 않는 화자인 ‘나’는 마헤인다 박사의 새로운 논문 자체인지 아니면 논문 원고를 고정시키고 있는 클립들인지를 물었다. 또한 겨울 왕국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유쾌한 노래, 기쁨에 찬 춤, 욕망을 잠재우는 지혜 등이 있다고 본 것 같다면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렸다.
작가는 소설의 1인창 화자가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소설에 나오는 ‘로카나트’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세상을 보호해주는 천신이라는 답변. 결국 박정애 교수가 애써 한 질문에 대한 미얀마 작가의 답변에서 건질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도 없었던 셈.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와 정치적 상황의 차이를 절감케 하는 시간이었다.
<토론자 박찬두 시인과 미야 니홍 뇨와의 대화>
미야 니홍 뇨의 발제문은 미얀마의 문학적 현실과 미얀마 작가들의 참여의식인데 내용은 이 제목과 무관하게 6세기 몬 왕국부터 시작되는 미얀마의 문학사였다. 토론자는 중앙승가대 외래교수인 박찬두 시인이었다.
박찬두 시인은 미얀마의 문학작품을 읽어본 것이 없음을 아쉽게 생각하고 있다고 밝힌 뒤 몸 왕국 시기→ 바간 왕조 시기 → 고전문학 → 식민문학 → 식민지 후의 문학 → 독립 이후 문학 → 현대문학으로 이어지는 발표문의 시기 구분을 언급한 뒤 식민지 시대의 작가 중 킨 코도 호민이 우리나라의 만해와 마찬가지로 사회참여의식이 짙은 작품을 썼다고 했으므로 두 사람의 참여의식 양상을 비교해주기를, 나아가 킨 코도 호민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도 말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 질문도 미얀마어로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한 듯했다. 미야 니홍 뇨의 대답은 이랬다. 미얀마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의 밑바탕이 불교이고 부처님이다. 부처님의 수행록인 바라밀 10가지 이야기 중에서 6개를 번역해놓기도 했는데 미얀마에서 나오는 작품은 거의 다 부처의 가르침, 즉 인과응보와 선업선과란 주제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보면 된다. 16세기 불교문학이 특히 성했다고 답변을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발제문의 일부를 인용해놓는 것이 좋겠다.
승려들 역시 미얀마 문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신 아가탐마디는 자카타 설화를 운문으로 고쳤으며, 이 시기에 신 마하 틸라운타(1453~1520)는 불교의 역사에 대한 연대기를 서술하였다. 그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신 오마타 교는 유명한 서사시 「톨라」를 썼으며, 계절, 숲, 방랑의 아름다움을 예찬하였다.
18세기에 태국을 두 번째로 정복한 이후 많은 전쟁문학이 미얀마 궁정에 소개되었다고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가 소개된 것도 이 시기였다. 박찬두 시인은 미지의 세계였던 미얀마의 문학에 대해 개략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표한다면서 토론을 끝마쳤다.
<토론자 엄경희 교수와 윈 윈 민과의 대화>
윈 윈 민트의 발제문 역시 미얀마의 문학사이다. 하지만 미야니응 뇨의 글이 통론이라면 이분의 글은 각론이라고 할까, 미얀마인들의 특성, 미얀마의 언어, 글쓰기 시스템 및 문법, 문학과 민족적 정체성, 문학적 장면, 현재의 미얀마 운문, 현재의 출판계 상황 등 미얀마의 문학적 현실을 보다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글이다.
문학평론가인 숭실대 국문학과 엄경희 교수는 한국에서 요즘 동아시아 문학과 문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환기시키면서 토론을 시작했다. 이는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담론화되었던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동아시아를 분리해냄으로써 우리의 동질성과 정체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판단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미얀마의 문학에 대해 알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엄경희 교수의 질문은 이랬다. “한국과 미얀마는 식민지 지배하에 있다가 해방된 나라이다. 미얀마는 영국과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적이 있었으므로 민족주의문학 경향이 강한 듯한데 미얀마는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윈 윈 민트의 답변은 이러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4년밖에 되지 않았고, 그렇게까지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 이전 영국 식민지 때도 그랬었고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지하문학이 성행하였다. 국민들로 하여금 독립의 의지를 다지게 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문학이 적지 않게 씌어졌다.
엄경희 교수의 다음 질문은 미얀마의 문학적 뿌리가 궁정문학이라고 발제문에 적혀 있는데 궁정문학의 양식적 특성이 현대문학과 비교할 때 어떤 차이를 가지며, 현시점에서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 설명을 부탁했다. 이 질문도 통역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전달이 제대로 안 된 듯했다. 그래서 신통한 답변이 나오지 못했다. 발제문의 일부를 인용한다.
미얀마 문학사의 새로운 전기는 1752년, 북부 미얀에 콘 바웅 왕조가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옛 형식이 여전히 잔존하긴 했지만 드라마와 시가를 중심
으로 다양한 문학적 혁신이 일어났다. 더 자유로운 운율과 패턴과 더 길어진 구절 등이 그 특색이었으며, 태국에서 유입된 서사시 「라마야나」 같은 비
불교적 소재들이 자주 사용되었다. 문학활동은 여전히 궁정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오락 및 계몽을 위한 작품들도 씌어지기 시작했다.
윈 윈 민트는 제대로 답변을 해주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던지 자작시 한 편을 낭송했다. 코끼리 인형을 갖고 율동까지 해가며 시를 읊었고 통역을 통해서 듣기도 했지만 시의 내용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았다.
<종합토론에서 나온 이야기들>
제2부 종합토론은 동원대 교수로 있는 고명수 시인이 맡아서 진행하였다. 우선 토론을 해준 세 분에게 발제문이나 토론문과 상관없이 한 가지씩의 질문을 더 해줄 것을 부탁했다.
박정애 교수는 외국의 문학인들 가운데 누구의 작품을 좋아하는가. 또 어떤 작가를 존경하는가를 물었다. 치우 뇨와 윈 윈 민트는 인도의 시인 타고르를 들었고 미야 니홍 뇨는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말했다. 왜 좋은가에 대한 설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박찬두 교수는 미얀마에서의 세 작가의 상호 교류에 대해 물었다. 자주 만나고 있는지, 작가들 상호간 교류가 활발한지. 워낙 폐쇄적인 사회라서 이런 질문이 나왔을 터인데, 이들의 답변은 작가들 간의 교류는 비교적 자유롭고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한국 방문이 어떻게 이뤄졌냐는 질문에는 한국대사관 쪽의 연락을 받고 문창길 주간과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반체제작가가 아닌, 관에서 인정해준 작가인 것이다.
식민지 치하에서의 문학에 대한 질문이 다시 나왔다. 영국과 일본이 지배하던 시절, 지하에서 출간한 작품들은 독립과 자유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을 한 것일지라도 당국의 눈에 뜨이면 압수가 되곤 했다니 식민지 지배 국가의 검열은 이 땅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책 출간의 권수가 19세기 때까지는 많지 않았고, 1915년부터 책들의 활발히 출간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문학작품을 읽은 것이 있는지, 작품을 통해 알게 된 작가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단호했다. 미얀마어로 번역된 한국문학 작품은 없다. 그래서 전혀 알지 못한다.
어떤 언어를 쓰고 있는지, 미얀마의 언어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127개 부족이 살고 있는 미얀마는 말도 다르고 풍습도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언어의 기원은 모두 지나 티베트어족이고 각기 일정한 수준의 언어학적 동일성을 공유하고 있다고.바간 왕조에서부터 미얀마어가 정치 ‧ 사회 ‧ 문화 발전의 수단이 되면서 미얀마어는 나라 전체에 걸쳐 일상적 담화의 매체가 되었다. 즉 미얀마어가 표준어이며, 수많은 지방어가 있는 셈이다.
바간 왕조 때 왕 국가의 종교로 상좌부 불교를 수용했으며, 실론으로부터 많은 팔리어 문헌을 입수했다. 인도의 원시불교가 미얀마에 전해진 미얀마는 불교국가가 되었는데 영국의 침략으로 기독교 문화가 이식되었다. 많은 부족들이 기독교도가 되었고, 몇몇 부족은 카톨릭, 몇몇은 침례교를 받아들였다. 영국의 식민지 기간이 길어 영어가 많이 침투되어 있지만 일본의 식민지 기간은 짧아 일본어의 영향은 그리 많이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이다. 4년 동안의 짧은 지배 기간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라 일본의 공출이 극도로 심했다. 수확되는 쌀과 콩 대부분이 공출되어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그 다음 질문은 미얀마의 베스트셀러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책이 독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가, 몇 권 정도가 팔리면 베스트셀러라고 하는가. 대답이 재미있었다. 미얀마에서는 귀신 이야기가 제일 인기를 끌고 잇는데 10만권은 너끈히 팔린다고 한다. 그 다음 많이 팔리는 책이 러브스토리들. 그 다음 인기를 끄는 소설이 역사물인데 내용의 깊이가 있는 높은 수준의 책이며 자기네들이 쓰는 소설이 바로 이런 부류라고 했다.
그 다음 질문은 ‘미얀마에서의 작가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인가’였다. 미얀마에서는 예술가를 작가와 영화배우, 연극인, 무희로 나눌 수 있는데 작가가 가장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하지만 영화배우가 가장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연극인에 화가, 작곡가 등이, 무희에 가수 등이 포함되어 있는 듯했다.) 한국의 TV 드라마는 너무나 인기가 있어 재방송, 세 번째 방송을 한다고.
처음에 답변을 한 ‘작가의 날’(Sarsodaw day)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나라 전체가 이날을 대대적으로 기념하는데, 70세 이상의 원로작가에게 선물을 드리면서 공로를 치하하고 각종 행사를 하는 문단의 큰 축제라고 설명했다. 이날은 국가문학상과 14개 문학 장르에 대한 최고상 시상식이 거행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행사의 주체가 ‘관’인지 ‘민’인지가 궁금했지만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등단제도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우리나라는 신문사에서 공모하는 신춘문예와 문예지에서 운영하는 신인상 제도가 있는데 미얀마는 어떤지? 신춘문예는 없고, 문예지나 문학단체에서 상금을 내걸고 공모하는 신인상 제도가 여러 개 있는데 상금의 고하에 따라 수준이 결정된다고 한다. 상금은 꽤 높은 편이라고.
오늘날 미얀마에서는 매달 40가지의 문학잡지가 발간되고 있고 정기간행 잡지에는 어김없이 시가 발표되고 있다. 이 시들은 사랑, 민족주의, 애국애족사상, 인생과 휴머니즘을 노래하고 있다. 현재 미얀마에서는 2,000명 남짓 되는 시인이 있는데 절반 정도는 정기적으로 작품 발표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세 작가는 자카타 설화집을 산문으로 고친 승려작가 우 오바타, 고전적인 시가를 창작한 수상 우 사, 당대의 정치적 사상을 문학적으로 향상화한 수상 요민 기가 있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온 세 작가는 심포지엄이 끝난 뒤 참석자들에게 작은 인형과 부엌에서 쓰는 수건 등을 선물했다. 물론 주최측에서도 민속화를 그린 예쁜 액자를 선물했다. 이어 함께 사진을 찍으며 따뜻한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만해축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미얀마 작가 초청 국제문학심포지엄은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양국간 문인들의 첫 대면 첫 대화가 아닌가 싶다. 미얀마의 문학이건 한국문학이건 문학에 관한 한 문외한인 스님이 통역자로 나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미얀마의 문화와 문학을 이 기회에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기에 이번 심포지엄은 양국간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일행은 저녁 공양을 든 뒤에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처 : 이승하
글쓴이 : 이승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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