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력 있는 부르심
지금부터는 성령이 구원을 적용하기 위해 우리에게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시는지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따르려 하는 순서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이 순서가 반드시 연대기적으로 배열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효력 있는 부르심
어떤 사람은 “그러면 어떻게 그런 순서에 이르게 되신 거죠?”라고 묻습니다. 저는 우리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 일을 주로 영원 속에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계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이 방법이 가장 제 마음을 끌었으며, 또 가장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이 방법은 경험이나 경험적 관점의 가치를 폄하 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험을 강조하고 거기서부터 순서를 끌어내겠지만, 저는 단순한 경험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저는 그 경험에 대해 알기를 원합니다. 즉. 제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런 일을 경험하는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저 경험을 즐기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것은 어린아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은혜 안에서 자라나가고 지각을 사용해 연단을 받으려 한다며(히 5:14), 반드시 몇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하며,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 실제로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알기를 간절히 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접근합니다. 복음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의 일부임을 이미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일반적 부르심이라고 부르며, 일종의 보편적인 복음 제시입니다. 이어서 외적 혹은 일반적 부르심은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고 남는 사람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일부의 사람들만 그 부르심에 의해 구원받기 때문에 새로운 구분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확증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고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 복음의 부르심이 오직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성경 본문이 있습니다. “제자”라고 묘사된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도 두 집단으로 나뉘어졌습니다. 한 집단은 다시는 그리스도의 말을 듣지 않겠노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떠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스도가 다른 집단을 향해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7-68)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집단은 믿지 않고 집으로 갔으며, 똑같은 말을 들은 다른 집단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러 있으면서 더 많은 것을 듣고 싶어 했고, 그것을 즐거워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차이가 생길까요? 그 말씀이 구원받는 자들에게는 유효했으나 그것을 거부한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경우에는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명확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부르심 외에도 이런 효력 있는 부르심이 존재하며, 어떤 사람이 구원받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복음의 부르심이 유효하게 임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확증해 주는 성경 구절을 몇 가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먼저 로마서 8장 28-39절은 이 사실에 대한 위대한 진술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효력 있는 부르심에 대한 성경의 진술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전서 1장 2절에 나옵니다. 그것은 성경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진술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called to be saints)....”그들은 단순히 성도로 불리 우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도는 같은 장에서 이 말을 반복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그 다음에 주목하십시오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는 전하는 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구원받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라고 묘사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위대한 진술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10)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 내셨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효력있게 부르신 것입니다. 복음의 부르심은 다른 많은 사람에게도 임했으나 그들은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육신을 따른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십계명과 도덕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던 때와 같은 용어를 이 사람들에게 적용합니다. 베드로는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즉, 그들은 부르심을 받는 하나님의 이스라엘로서 그의 찬송을 전파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 안에서는 그 부르심이 유효했음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이 구절들의 가르침입니다.
이 사실을 완벽하게 말해 주는 또 다른 논증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독교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무엇입니까?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를 번역한 것입니다. 에클레시아는 '부르 받은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부르심 받는 자들, 그리고 그 부르심의 결과 구별된 자들의 모임입니다. 베드로의 표현처럼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단어 자체가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는 것이 분명히 있음을 확증하기에 충분합니다. 같은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졌지만 그들만이 세상에서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외적인 부르심과 이 효력 있게 된 부르심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부르심은 내적이고 영적인 부르심이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단순히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르심은 외부에서 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외적 부르심에 덧붙여 그리스도인이 될 사람에게 오는 내적인 부르심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효력 있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과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 대조를 이룹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적이고 영적인 부르심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을 제시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보여드린 성경 구절들을 통해 일반적인 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구절들은 단순히 묘사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것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구체적으로 말해 주는 구절들을 보여 드리려 합니다. 먼저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요한과 사도 바울을 굳이 비교하자면, 이 특별한 교리는 요한이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가 오직 바울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 교리는 요한복음 그중에서도 특히 이 위대한 6장에 훨씬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 중 하난가 45절에 있습니다.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 정보를 주셨고 선지자는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에게 가르침을 받는 특정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에게뿐 아니라, 하나님께, 그리고 성령께 가르침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내적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45절). 그리스도께 오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배운 사람들입니다. 성령에 의해 아버지께 대해 배운 사람들, 오직 그들만 그리스도께 옵니다. 이것은 중대한 진술입니다. 우리 주님은 63-65절에서도 이 말을 반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걸림이 된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요한은 여기에 덧붙여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부르심에 반응했으며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껍데기인 외적 말씀에 매달렸을 뿐,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아버지가 이 사람들을 오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오지 않고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오게 하셨고 그들은 남아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이며 내적인 부르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구절을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1장 17절부터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인들을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지 않으시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그들이 성령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이러한 지식에서 점점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령의 이러한 역사가 없이 우리는 그런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빌립보서 2장 12-13절입니다. 거기세서 바울은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하나님은 내적으로 역사하시며 그 결과 우리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두고”행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이 주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진술을 합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리.” 이 서신서, 특히 첫 두 장을 읽어보면 사도가 이 구절을 여러 방법으로 반복해 말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임한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 말씀으로”(살전 2:13)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도는 복음이 물론 말로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데살로니가인들을 성도로 만든 것은 말로 이른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일을 했습니까? 복음이”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을 죄인에서 성도로 바꾸는 것은 이러한 내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은 성령과 능력의 나타남으로 하는 설교입니다.
사도는 디모데후서 2장 25절에서도 대단히 유사한 진술을 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젊은 디모데에게 반대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이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바울의 말은 ‘디모데야, 나는 너를 반대하는 이 사람들을 네가 훈계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하라는 이유는 너의 논증이나 논리로 그들을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그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은 결코 진리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신다면 그들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이 한 구절 안에 담겨 있습니다. “청함을 받는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이 구절을 복음서에서 실로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도 이미 인용했습니다. 이 구절을 특히 혼인잔치라고 하는 문맥 가운데 살펴보십시오.“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즉 외적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은 입은 자는 적으니라”, 즉 효력 있는 부르심을 입은 자는 적습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구원받은 자들은 효력 있게 부리심 받은 자들이며 그들이 효력있게 부르심 받은 이유는 그들 안에서 진행되는 사역 때문이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나요?” 이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 역사 없이는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역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증거를 제시하겠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개정표준역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일에 관심이 있고, 성령을 따르는 자 혹은 성령 안에 있어 있는 자들은 성령의 일에 관심이 있다.” 자연인들- “육신의 따르는 자”-은 성령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 일들 지루하고 따분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매우 싫어합니다. 하지만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의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육시이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6-7절). 이것은 결정적인 논증입니다.
대단히 강력한 진술이지만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타락의 결과 본성상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리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7-8절). 제가 보기에 이것은 결정적 진술입니다. 사람들은 본성상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싫어하며 하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에도 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진술로부터 저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복음을 ale고 받아들여 그것을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심령의 내적 사역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추론합니다.
같은 취지의 구절들을 더 살펴봅시다. 고린도 전서 2장 14절의 유명한 구절을 읽어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이것은 정언적(定言的)진술입니다다만, 그렇다고 갑자기 철학자가 되어 “그게 사실이라면 이러 저러한 일은 이해가 안돼요”라고 말하지는 마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직면합시다. 우리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측량할 수 없는 목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만일 어리석게도 정언적 진술에 반대하여 우리의 이해나 철학을 내세우려 한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남아 있어 마땅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 을 이해라 수 있다고 자만하면서 성경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딤전 3:16). 특히 이 문제가 그렇습니다. 여기서는 육에 속한 사람이 성령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받을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들은 영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분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3-4절도 있습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었으면”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어떤 사람들에게 가리었다는 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듣지만 그 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원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모독하고 비웃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 세상 신 - 마귀 - 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영광스러운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있을까요? 그들은 믿지 못합니다. 사탄이 그 말을 가리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2장 1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었던”! 그보다 더 강한 표현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이모든 구절들은 복음의 외적이고 일반적인 부르심이 효력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효력있고 내적인 부르심이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실은 -이상의 구절들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은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내적인 부르심이란 영혼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성령이 직접 작용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각적이고, 영적이며,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입니다. 이 부르심은 우리 안에서 새로운 양식의 영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 작용이 없이는 우리는 어떤 참된 영적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이렇게 작용하신 결과 우리는 처음으로 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며, 이렇게 해서 부르심이 효력 있게 되고, 우리가 그 부르심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그것이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부르심이 사람들에게 효력있게 임할 때 일어나는 일은 단순히 그 사람들이 진리의 도덕적 영향을 받게 되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이 전파되며 진리가 사람들에 일종의 도덕적 영향을 주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적인 예를 들자면, 유능한 연설자은 사람들이 특정 정당에 투표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유창한 연설을 하여 도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르심은 이 경우와 다릅니다. 그것은 성령이 사람들 자신의 깊은 곳에서 작용하시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령이 우리의 타고난 재능과 능력을 고양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영에 작용하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새로운 영적 행동의 원리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부르심은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 이하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이런 일들은 모두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에 속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전에도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누군가가 “기독교는 절대 옳을 리가 없어요. 이 위대한 사람이 믿지 않는 것을 보세요.”라고 주장할 때, 그런 말에 놀라거나 조금이라도 실망하거나 당황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 “나는 이걸 믿을 수가 없어요. 기독교가 가실이라며 이 모든 철학지와 과학자와 이 위대한 정치가들이 그걸 믿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실들에 비춰볼 때, 이런 현상은 매우 자연스럽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가장 위해한 자연적 지성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는“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한 위격 안에 있는 두 본성이라는 놀라운 진리, 삼위일체에 대한 엄청난 교리, 성육신과 속죄에 대한 모든 교리 등을 받아드리기 위해서는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진리이며,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전적으로 어리석고 우둔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믿을 수 있게 만드실 때, 그것은 분명 우리의 자연적 능력을 고양시키는 것 이상의 일입니다. 성ㄹ령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진리는 단순히 훌륭한 도덕적 권고가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능력, 새로운 원리가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이 새로운 영적 원리, 영적 활력과 활동의 원리를 심어 주시며, 그결과 복음의 일반적인 부르심이 우리에게 효력있게 임합니다.
이에 대한 성경 증거도 제시해 보겠습니다. 그런 증거가 정말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 실제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빌립보성에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첫 번째 유럽 방문이었으며 거기에서 처음으로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때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본문입니다. 유럽에서 복음을 듣고 최초로 회심한 사람이 루디아라는 여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녀는 유럽 역사상 최초로 복음의 부르심이 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다른 많은 사람이 들었던 것처럼 그녀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앉아서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거기에 외적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 및 그 사실들에 의미를 말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말했으며, 듣는 사람들 중에는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나 예배당에서 선포되는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 불신자로 죽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루디아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었습니까? 주목하십시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더할 나위없는 예입니다. 말씀이 전파되지만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이 전파되는 동안 서로를 바라보거나 그들의 책에 무엇인가를 써 넣거나, 속으로 시를 낭송하거나 서로 바라보고 미소를 짓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듣고 있지만 경청하지 않으며, 경청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루디아는 왜 경청했습니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녀의 마음에 뭔가 내적인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경청했고, 복음을 알게 되었고 받아드렸습니다. 외적 부르심이 내적 부르심으로, 일반적 부르심이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믿고 세례 받았고, 그 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틀림없는 사실은 주님이 그녀의 마음을 여심으로써 차이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15절의 위대한 신학적 진술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비밀한 지혜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8절)것이기 때문입니다. 통치자들은 이런 것들에 대해 들었으나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는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와 이 세상 통치자들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것입니다. “오직(그러나) -대비가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주목 하십시오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우리 신자들, 그리스도인들 -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나 -왜 그렇습니까?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신령한 자 - 바로 우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분별하나 또는 이해하나 - 자기는 아무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 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리.”
에베소서 1장 18절과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 그리고 빌립보서 2장 13절을 다시 한 번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구절들에는 부르심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과 마음에 대한 성령의 내적 작용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는 증거가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이 그 일을 하실 때 그 결과는 절대적으로 확실합니다. 그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불가항력적은혜(irresistible grace)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저는 이 용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말이 어떤 사람들의 의지를 계속 두들겨 굴복시키고 강요하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은 내 생애 처음으로 이 영광스럽고 놀라운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를 내 안에 심으십니다. 성령은 나의 의지에 역사하십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성령은 나를 때리거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내 의지에 작용하여 나로 이일들 바라고, 기뻐하고,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도하시고, 설득하시고, 나의 의지에 작용하셔서 복음의 부르심을 효력 있게 만드십니다. 이 일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 실패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사람들 안에 역사하실 때 그 역사는 효력이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린 위대한 성경 구절들을 고찰해 보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 본문을 연구하고, 그것을 놓고 기도하고, 묵상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오직 다음과 같이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제 말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