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계산해본 박정희 횡령 규모 - 박정희의 정치자금 규모
글 : 한은경
1996년 검찰에서는 전두환전대통령이 통치기간 7년간 7천억을 정치자금 명목으로 모았다는 조사결과를 밝혔다. 통치하던 줄곧 매년 일천억씩 거둔 수준이다. 전두환 때는 그나마 잘 살기 시작하던 때다. 전두환은 월간조선 인터뷰에서 박정희정권이 깨끗하게 비치게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이 전임정권의 비리 조사 요구서를 - 한 트럭분이나 쏟아진 - 정권차원에서 중지시켰기 때문이라고 직접 발언한 적 있다.
박정희는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1979년10.26 사태로 비명횡사하기까지 18년간 대한민국을 독재했으며, 그가 정권을 잡던 무렵에는 남한경제가 북한보다 훨씬 못 살던 때였다. 그렇던 나라에서 오가는 거래, 계약에서마다 리베이트 5%를 떼었다면?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이토쿠상사의 서울사무소장은 1995년 모신문 인터뷰에서 1967년 영동화력발전 프로젝트를 계약한 건으로 총 계약액2천6백만불 중 7%(**3%는 김형욱 분?)인 1백80만달러를 리베이트로 박정권에게 주었다라고 발언한 게 있다.
"일본 이토추 (伊藤忠) 상사 서울사무소장이었던 고바야시 유이치 (小林勇一.작고) 는 95년 일본 교도 (共同)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67년 총공사비 2천6백만달러인 영동화력발전소 프로젝트를 따면서 김성곤 (金成坤.작고.쌍용그룹 창업자.SK)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김형욱 (金炯旭.실종) 중앙정보부장에게 공사비의 7%인 1백80만달러를 커미션으로 주었다" 고 밝혔다. 당초 정치자금 창구인 SK에게 4%의 커미션을 지불하고 계약을 체결하려는데 갑자기 김형욱이 소환해 3%를 내놓으라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
71년엔 박태준이 포철의 보험금에서 나온 리베이트 6천만원을 박정희에게 갖다 바쳤다가 박으로부터 그 돈은 박회장의 용돈으로 쓰라는 말을 듣고 거절한 이야기가 있다.
"71년 박태준 (朴泰俊.70.자민련 총재) 포항제철 사장이 보험금 리베이트로 받은 6천만원을 "정치자금으로 써주십시오" 라며 박정희에게 가져갔다. 朴대통령이 "가져가 마음대로 써 봐" 라며 돈을 돌려주자 朴사장은 "제가 쓰기에는 너무 많습니다" 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통이 그렇게 작아" 라며 웃었다. "
6천만원을 안받겠다고 한 박회장에게 통이 그래 작냐고 박정희가 반응한 것을 보면, 박정희에겐 6천만원은 부하들에게 상시 나눠주는 껌값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나온 자료에 의하면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차지철이 쓰던 단독 금고에서만 150억이 나왔다고 한다.(10.26 때) 박정희에게는 제1금고와 제2금고가 있었고 금고1에는 각처에서 받은 비자금 뭉치들을 그대로 넣어두었으며 금고2에는 그날 그날 쓸 돈을 금고1에서 꺼내두는 용도였다라고 비서들은 증언했다. 전두환은 훨씬 돈이 더 많았다는 금고1은 열쇠 채 박근혜에게 넘기고 금고2만 열고 9억을 꺼내어 전부 박근혜에게 보냈다가 3억을 다시 수표로 돌려 받았다. 그 며칠 사이에 박근혜가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번잡한 사이에도 현찰 9억을 은행에 입금시켰다가 수표로 전두환이 돌려달라던 3억을 되돌려줄 정도로 돈관리에 밝았음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박근혜는 이후, 금고1에 관한 한, 그 안에서는 서류 밖에 나온 것 없다는 입장을 변치 않고 있다.
그런데, 차지철의 금고에서 150억이 나왔을 정도인데, 박정희의 금고에서 - 유신말기 - 9억 밖에 안 나오고 첫째 금고에는 종이 밖에 없었다는 것을 믿으란 말인가.
김정렴씨는 그의 구술에서 박정희 정치자금으로 각 기업에서 일년에 두 차례 일천만원부터 일억까지 거두기로 박대통령과 얘기되었다는 구술을 남긴 사실이 있다. 유신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리함으로써 정치자금 수령액은 줄어든 것 처럼 피력했다. 이 때 박정희가 김정렴에게 말했다는 년간 정치자금 필요액수는 30-40억이다.
전두환이 매년 천억을 거뒀는데 그보다 훨씬 더했던 박정희 정권에서 유신말기에 매년 고작 30-40억을 거뒀을 거라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토추 상사맨으로부터 나온, 1967년 영동화력발전 고작 한 기의 수주때문에 거둔 리베이트 금액이 180만 불이었다는 것을 기준삼았을 때, 다른 박정희 시대의 소위 "업적"이란 기록 등을 참조한다면, 박정희가 거둔 리베이트 금액 총합산이 어느 만큼의 규모일 지 대충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하는 통치기간 내의 업적이다. (** 참조: 박정희 사이트)
1961년06월10일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06월11일 재건국민운동전개(국민의식개혁)
1961년06월14일 부정축재 처리법 공포
1961년07월03일 반공법 공포
1961년06월30일 능의선 개통
1961년07월14일 원자력개원
1961년07월22일 경제기획원신설
1961년08월03일 김포가도 포장 기공
1961년08월08일 황지지선 기공(1961.6.13~1962.12.10)
1961년08월19일 섬진강 수력발전소 건설
1961년09월21일 춘천수력발전소 기공
1961년09월23일 대한 중선창연(蒼鉛)자가제련공장 준공
1961년12월22일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1962년01월01일 연호를 서력으로 변경(연호에 관한 법률 제정)
1962년01월13일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62년01월20일 상법제정공포
1962년02월01일 국민은행 발족
1962년02월02일 기술진흥 5개년계획 발표
1962년02월03일 울산공업지구설정 및 기공
1962년02월10일 국토건설단 창단
1962년03월01일 공문서의 한글전용실시(70년1월1일 관계법 제정)
1962년03월19일 핵분열 연쇄반응 일으키는 원자로의 임계도달 시험-양주군 노해면
1962년04월02일 농촌진흥청 발족
1962년04월30일 해양경비대창설
1962년05월12일 반공센터창설
1962년06월01일 무역진흥공사발족
1962년06월18일 건설부 신설
1962년07월13일 국민 의무교육 실시
1962년07월19일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낙성
1962년09월10일 남양송신소 준공
1962년10월20일 해운센터기공식
1962년10월23일 한국케이블공업주식회사 송배전신 및 케이블공장 기공
1962년11월04일 광주디젤발전소 준공
1962년11월06일 동해북부선(옥계-경포대간)개통
1962년11월18일 과학자 우대정책 발표
1962년11월20일 제4시멘트공장건설
1962년11월25일 부정거래단속법을 제정
1962년11월28일 난민정착사업장 제방준공
1962년12월01일 마포아파트준공
1962년12월15일 김포,강화간 대교건설(~1970.1.26)
1962년12월24일 생활보호법제정
1962년12월28일 호남 비료 나주 공장 준공
1963년01월01일 교육자치제 실시
1963년01월10일 외자도입 강력추진
1963년01월18일 원호센터 준공
1963년01월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1963년02월01일 장충체육관 건립
1963년02월04일 지방문화재육성
1963년03월15일 동진강지역 종합개발공사 기공, 김해, 진도(63~69)
1963년03월21일 감사원 개원
1963년03월30일 원자로 가동식
1963년04월02일 무제한송전실시
1963년04월10일 부녀회관 건립 기공
1963년05월14일 남대문중수공사 준공
1963년07월20일 제대군인 개간농장 입주
1963년08월08일 한국나이론 공장 건설(대구)
1963년08월08일 국사교육통일방안 확정
1963년09월01일 철도청 발족
1963년09월01일 노동청 발족
1963년09월06일 국토종합개발계획조사착수
1963년09월06일 동대문 개축준공
1963년09월10일 문화재 보수 5개년계획확정
1963년09월17일 가족계획사업추진
1963년09월25일 직업재활원 개원
1963년09월26일 PVC 제조공장 기공
1963년10월10일 가정법원 개원
1963년12월22일 서독광부·간호원파견(1963.12.22~1966.1.30)
1964년01월01일 미터제 실시
1964년05월07일 울산 정유공장 건설
1964년05월07일 국립 중앙 의료원 설립
1964년07월01일 경주석굴암복원준공
1964년08월20일 감천화력발전소건설(부산)
1964년11월29일 울산 제3비료 공장 기공식-매암동, 충주비료와 미국 스위프트 투자단의 공동투자
1964년12월05일 제1회 수출의 날 제정, 1억불 달성/70년 10억불/77년 100억불/82년 200억불/85년 300억불/88년 500억불 달
1964년12월06일 서독방문(유럽국가 첫 방문), 8일 뤼프케 대통령, 9일 에르하르트 수상과 정상회담
1965년01월25일 제2한강교 개통
1965년02월24일 한국원양어선단 결단(원양어업추진)
1965년03월19일 방공 포병대대 창설
1965년03월23일 청소년 선도 국민 궐기 대회
1965년04월01일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확정
1965년06월01일 김해간척공사 기공
1965년06월22일 한일협정 정식조인(동경), 8월14일 국회비준(야당불참), 12월18일 비준서 교환(서울) 즉시 발효, 국교정상화
1965년08월31일 해인사 경판고 보수
1965년09월15일 제2 영월 화력발전소 준공
1965년10월15일 율곡사 및 율곡기념관 낙성
1965년11월13일 경호천 종합개발 준공식-칠곡군 북삼면
1965년11월23일 민방위법 제정(민방위대창설:1975.9.22)
1965년12월02일 식량증산 5개년계획 확정
1965년12월03일 서울·춘천간 도로포장공사 준공
1965년12월07일 진삼선 개통(사천~삼천포)
1965년12월16일 국내(텔레스)개통
1966년01월19일 정선선 개통(예미, 증산, 고한 간)
1966년01월27일 경북선 개통(점촌~예천 간)
1966년01월27일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6년02월04일 한국과학기술 연구소(kist)발족
1966년03월03일 국세청 발족
1966년03월03일 수산청 발족
1966년04월09일 인천제철공장 기공
1966년04월29일 경인공업단지 건설
1966년05월03일 울릉도 추산 수력발전소 준공
1966년06월08일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지구 전천후 농업용 수원개발사업 준공
1966년06월09일 팔당수력발전소 기공
1966년06월22일 한군군장비현대화계획발표
1966년08월03일 산림청 신설
1966년11월09일 김삼선 기공
1966년11월09일 충남선 기공
1966년11월28일 서울 분묘 보수
1966년11월30일 밀양 영남루 보수
1966년11월30일 서울 종각 보수
1966년12월06일 부여 정림사지 정비
1966년12월17일 아시아 개발은행 건설
1966년12월18일 법주사 대웅전 보수
1967년01월24일 청평·의암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1967년02월10일 대도시 그린벨트설정(서울, 부산 등)
1967년03월04일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
1967년03월30일 원자력청 발족
1967년03월30일 과학기술처 신설
1967년04월01일 구로동 수출 공업단지 준공
1967년04월13일 서해안 철도건설
1967년04월25일 종합민족문화센터 준공
1967년04월26일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
1967년04월29일 천체과학관 준공
1967년05월01일 국립광업연구소 설립
1967년09월19일 구미전자공업단지건설
1967년09월23일 제1한강대교, 강변도로건설
1967년10월01일 국립묘지정화, 현충탑건립
1967년10월03일 포항종합제철공업단지기공(1973. 7. 3 완공)
1967년11월2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01일 농어촌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20일 성산포 어업전진기지 준공
1968년00월 0일 포항항 건설(~1973)
1968년01월22일 대간첩작전본부발족
1968년02월07일 경전선개통
1968년02월11일 병기공장(M16소총)건설착수
1968년03월22일 석유화학계열공업 기공
1968년04월01일 예비군 창설
1968년04월13일 서울대학교 이전 건설
1968년06월13일 「레이다」기지 준공
1968년07월05일 방위산업육성3개년계획확정
1968년07월22일 중앙선,태백선전철화(~1974.6.20)
1968년07월23일 동해안공업도시개발착수(묵호,북평, 삼척)
1968년07월24일 해양주권선언발표(대륙붕 자원확보 및 개발)
1968년07월29일 축산개발 4개년계획 확정
1968년08월30일 영남화력발전소(울산가스터빈)건설
1968년09월09일 제1회 한국 무역 박람회
1968년02월01일 경부고속도로(대구-부산간)기공식
1968년11월01일 제주도 포도당공장준공
1968년11월08일 동양화학공업주식회사준공
1968년12월02일 소수서원 해체 복원
1968년12월0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년12월07일 지리산 등 9개지역국립공원지정
1968년12월11일 광화문복원
1968년12월16일 한국 투자개발공사 설립
1968년12월21일 경인·경수고속도로준공
1969년00월00일 교육제도개혁(중학교무시험, 고교평준화, 대학입시예비고사제)
1969년02월05일 농업진흥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지하수개발공사발족
1969년02월15일 한국도로공사발족
1969년02월22일 농업기계화 8개년계획확정
1969년03월01일 국토통일원 개원
1969년03월01일 가정 의례 준칙 공포
1969년04월28일 현충사 중건 준공식
1969년04월28일 불국사 복원 정화작업(1969~1973)
1969년06월04일 부산 화력발전소 준공(21만Kw)
1969년06월17일 마산수출자유지역공업단지조성
1969년07월03일 울산 알미늄 공장준공
1969년07월29일 서울신도시건설착수(한강이남.여의도.한강개발)
1969년08월19일 범어사 대웅전 보수
1969년10월07일 남강「댐」준공
1969년11월0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발표
1969년11월29일 관악산 기상레이더 건설
1969년12월26일 제3한강대교 건설
1970년02월29일 금산사대적광릉 해체 복원
1970년03월07일 비적성공산권에 문호개방
1970년03월22일 정부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마련-86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의무교육9년으로로연장,교육제신설,교원에게병역
1970년04월15일 남해고속도로기공(~1973.11.14)
1970년0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1970년05월16일 서울대교 건설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0년06월02일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1970년07월01일 우편번호제 실시
1970년07월04일 배창 방직 기계 준공식 참석(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1970년07월05일 직기 공장 준공-유사시엔 총포 생산도
1970년07월07일 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970년0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1970년08월02일 낙동, 영산강 종합개발안 영구수해방지 위해 다목적댐 건설 수운 개설
1970년08월15일 8.15기념식에서 북한이 무력포기하면 남북간의 인위적 장벽 단계적 제거 선언
1970년09월16일 공군 전천후 해상소형공격기 S2A배치
1970년10월22일 수도권(경인,경수,경원)고속전철화(~1974.8.15)
1970년11월10일 행주산성 복원 준공
1970년11월19일 세종대왕기념관 준공
1970년12월08일 도산 서원 보수 정화 공사 준공
1970년12월17일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 확정(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1970년12월25일 화엄사 대웅전 보수
1970년12월31일 남원 광한루 보수
1971년01월31일 제주도 일주 도로 준공
1971년03월19일 원자력발전소 기공
1971년03월23일 금강·평택 지구 다목적 농업 개발 사업 기공
1971년04월08일 거제대교 건설
1971년04월12일 서울 지하철 기공
1971년04월13일 칠백의총 보수 정화 준공
1971년06월12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제의, 북한측 거부
1971년08월12일 한국적십자연맹, 남북가족찾기회담을 북측에 제의
1971년08월30일 속리산 법주사의 사천왕문 복원
1971년09월08일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
1971년09월10일 서울 북악 터널 개통
1971년09월25일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
1971년09월29일 여의도 5·16광장 준공
1971년11월14일 각종 무기 생산 개시
1972년01월04일 전국 10대 관광권 개발 확정
1972년01월05일 군산항 개발 착수
1972년00월00일 제주관광개발사업추진(~1977년)
1972년02월09일 녹색혁명추진(통일벼 개발)
1972년03월10일 경주 고도개발 10개년획확정
1972년03월23일 현대 울산 조선소 기공
1972년04월05일 산림보호, 육성, 산지개발(입산,수렵금지)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04월21일 새마을 운동 노래 작사, 작곡
1972년06월07일 교육용 한자1,781자 선정 발표
1972년06월26일 전국702개섬 개발계획확정
1972년07월04일 한국 개발연구원 설립
1972년07월0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09월30일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1972년10월31일 석유화학공장 합동 준공, 울산 석유화학8개공장 건설
1972년11월04일 육산리 고분군 정화
1972년11월13일 시외전화 자동화
1972년11월24일 부산항 대단위종합개발 추진(~1978.9.29)
1972년11월25일 소양강 다목적댐 담수
1972년12월11일 지리산,설악산,낙동강 하류철새보호지역 지정
1973년00월00일 이리 수출 자유 지역
1973년01월12일 공업진흥청 신설
1973년02월16일 제주도 종합개발 착수
1973년03월03일 한국방송공사 설립
1973년05월04일 8개 공업장려지구지정 공업개발(춘천,청주,원주,대전, 전주, 이리, 목포, 군산)
1973년05월05일 어린이대공원 개원
1973년05월11일 해운항만청 신설
1973년05월24일 중화학공업건설발표
1973년06월20일 중앙선(청량리-제천)전철 개통
1973년06월22일 남해대교 건설
1973년06월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 7개항 발표(6.23선언)
1973년06월26일 대덕연구단지 건설(10개연구소)
1973년07월03일 포항 종합 제철 준공
1973년07월05일 한일대륙붕 협상 완전 타결
1973년07월10일 전국91개 공업고등학교 신설, 확충계획발표
1973년07월20일 여천 석유화학 공업단지 건설
1973년08월15일 남북 UN 동시가입촉구
1973년10월11일 옥포 조선소 기공
1973년10월17일 국립극장 개관
1973년07월18일 정수직업훈련원 개관
1973년10월19일 문예중흥5개년계획추진
1973년06월06일 창원 기계 공업단지 조성
1973년11월07일 국민연금복지법 제정
1973년11월10일 죽도조선소 건설
1973년12월15일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체결 제의
1974년01월24일 최대임해공업벨트개발(제2제철-조력발전소 건설)
1974년03월28일 영동.동해고속도로기공
1974년05월22일 아산·남양방조제 준공
1974년06월10일 낙성대 정화 사업 준공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
1974년12월10일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
1974년12월27일 이경관문 해체 복원
1975년01월10일 구미대교 건설
1975년01월21일 농어촌지역의 상수도 시설5개년계획추진
1975년02월01일 대단위농업개발사업추진(금강,평택,광주, 삽교천,계화도)
1975년03월27일 대청 다목적댐 건설
1975년04월11일 중앙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0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1975년09월01일 국회의사당 준공
1975년10월10일 서울 어린이회관 이전 개관
1975년10월28일 전국 성곽 보수 사업 추진
1975년10월30일 정립회관 건립(장애인보호육성)
1975년11월07일 함대함 미사일 개발
1976년01월20일 옥산서원보수
1976년01월20일 강화 지역 유적 개발
1976년01월20일 신안 해저 문화재 발굴
1976년03월17일 모산 저마 공장 준공-충남 아산군 배방면 공순리
1976년04월10일 밀양 포충사 정화사업
1976년04월10일 유관순 유적지 정화사업
1976년04월17일 국어 정화, 순화 운동 전개
1976년05월10일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1976년05월18일 한국 인력 검정공단 법안 확정(기술인력관리,자격,검정의 일원화)
1976년06월24일 유적지전적지 개발을 위한 특별법제정
1976년06월24일 구마고속도로 착공
1976년07월16일 잠수교 개통식 참석
1976년10월02일 반월공업도시 건설
1976년10월12일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
1976년10월14일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사업준공
1976년10월30일 한산성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 참석
1977년01월12일 대북식량원조 제의,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힘
1977년01월28일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
1977년00월00일 남서울대공원 건설
1977년02월15일 산업체부설학교 및 특별학급설치
1977년02월17일 증권감독원 개원
1977년00월00일 전국 도서관 확충
1977년04월30일 초고압송변전시설 완공
1977년05월25일 미군철수 정책 저지(선보완, 후저지)
1977년06월15일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1977.6.15 ~1982.3.10)
1978년07월01일 부가가치세, 의료보험 실시
1977년07월10일 자동차공업 육성책 발표
1977년07월30일 경주통일전조성
1976년11월03일 안동 다목적댐 건설
1977년09월22일 소비자보호기본법제정
1977년10월07일 육림의 날 선포
1977년10월09일 여주 영육 성역화 사업
1977년10월09일 부석사 정화 작업(1977~1979)
1977년10월25일 군산화력발전소
1977년10월25일 부평화력발전소
1977년11월04일 아산화력발전소건설
1977년12월07일 전주권 광역도시개발 및 공업단지 조성
1977년12월22일 1백억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01월01일 동력자원부 신설
1978년01월09일 충주 다목적댐 건설
1978년01월18일 군수산업의 육성(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공기 산업과 특수전차 개발에 착수)
1978년02월20일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 확정
1978년03월30일 호남선 복선 개통
1978년04월01일 국민체조보급
1978년0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1978년05월03일 월정사복원
1978년05월10일 김덕령장군 유적지 정화사업(광주)
1978년05월10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충주)
1978년05월22일 부마고속도로건설(1978.5.22 ~ 1980.10.5)
1978년06월05일 태양에너지 연구소 발족
1978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8년06월23일 남북간의 교역, 기술, 자본 협력 위한 민간 경협기구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78년0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8년08월15일 해남 표충사 보수
1978년09월26일 국산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 다연발 로케트, 대전차 로케트 시험발사에 성공, 세계 7번쨰 개발 보유국됨.
1978년10월0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1978년10월20일 서해안 일부지역 국립 해안 공원 지정
1978년10월30일 직지사 정화사업
1978년11월08일 관광산업진흥책 발표
1978년11월30일 곽재우장군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1978년12월06일 광주박물관 개관
1978년12월30일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 시대 개막
1979년03월27일 토지개발공사 설립
1979년04월06일 경주 보문 관광단지 개장
1979년04월18일 잠실체육관 건립
1979년05월30일 상주 정기룡장군 유적지 정화 사업
1979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9년06월13일 수도권 광역수도사업 추진(팔당)
1979년07월05일 천호대로 준공
1979년10월02일 환경청 신설
1979년10월12일 국제 올림픽대회 서울 유치 언명
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
위 자료들은 얼핏 보면, 이야, 박정희가 저렇게 국가를 위해 많은 업적을 이룩했구나, 나라를 많이 발전시켜 놓은 대통령이다고 보여지게 된다. 그러나, 오퍼업을 하던 사람들은 위 자료를 보면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위에 나온 사업 껀수들마다 5%~7%의 리베이트를 붙였다면, 그것이 얼마나 잘되는 장사였을지 나아가 더더욱 거래성사해보려 그들은 정권 차원에서 혈안이 되어 뛰었을 것이라는 점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업체에 전기로 한 기를 넣는다라고 할 경우 리베이트라는 것은 그 한 기 전체 수주액수의 몇 %로 받게 된다. 남들은 모르는 언더테이블 마니이다. 헌데 그 업체에는 그 전기로 한 기만 들어가지 않으며 주변 기기와 앞으로도 계속 신규설비가 증설될 것이다. 그런 껀수 껀수 마다에 리베이트가 붙었다는 말이다.
이런 구조적 리베이트 관행은 박태준 회장의 발언에서 너무나 잘 드러난다.
-교육재단을 만들 때 종자돈이 큰 화제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외자를 받아 사업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정치자금을 내야 했어. 하지만 난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런 돈을 내고서는 제철소를 지을 수 없다’고 설득해 여기서 예외가 됐어. 그런데 어느 날 공돈이 생겼어. 용광로 설비를 들여오면서 보험에 들었는데 보험사에서 리베이트로 6000만원을 주는 거야. 평소 대통령에게 은혜만 입었지 뭐 하나 갚은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난 그 돈을 들고 상경해 박 대통령에게 드렸어. 그분은 바로 나에게 돌려주면서 ‘술을 받아 먹든지 임자 맘대로 쓰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다시 포항으로 내려오면서 이 돈으로 교육재단을 만들기로 결심했지.”
6천만원을 거부한 박태준에게 "통이 작다"라고 말한 박정희 반응을 보면, 박정희가 독재하던 동안, 얼마나 통크게 논 지도자였는지 감이 온다. 그 돈으로 시작된 학교가 지금의 포항공대이니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엄청나게 큰 돈이었다. 참고로 당시 환율로 바꾸면 6천만원은 15만달러다. 15만달러가 한 개 용광로의 설비도 아닌 고작 "보험금"에서 생긴 리베이트 액수이니, 다른 회사 다른 숱하게 들어왔던 (위 박정희 업적에 기록된 것들 이외에도) 설비들은 말해 무엇할 정도이겠는가.
- 화수력전력증설만으로 파악해본 간략한 리베이트 -
이토추 서울사무소장이 95년에 밝힌 리베이트가 걸렸던 영동화력발전 프로젝트는 영동화력의 1호기 125MW 짜리급이다. 125 MW 급에서 리베이트 180만 불이 떨어졌다는 것은 1MW 설비 당 1.44만불씩의 리베이트가 얻어지는 것으로 보고 - 딱히 전부 그런 비율이라 볼 순 없겠지만 & 다른 기기들의 리베이트에 관해 자발적으로 증언할 사람은 거의 전무하다고 보고 - , 다른 박정희 시대 건설된 다른 화력발전들도 비슷한 비율로 리베이틀 갈취당했다라고 보고 박정희 시대 확충된 전력발전량으로 계산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추정리베이트 금액이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순전히 발전설비 분야에서만 추정한 리베이트다.
남한의 1960년 발전량은 1,697GWH이고 [통계청자료] 박정희가 죽은 직후인 1980년 발전량은 37,239 GWH이다. 그러면 그 20년 간 증설된 발전량은 35,542GWH로 계산된다. 이것을 MWH로 환산하면 35,542,000MWH이다. 이것에 메가와트당의 리베이트 액수인 1.44만불을 곱하면 무려 5,118억 달러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계산일 때의 이야기이다.
보다 분류해서 화수력의 제1차경제발전계획에서 잡혀진 발전설비의 경우로만 보았을 경우, 화수력발전 증설에서 쏟아지는 리베이트 총액은 1,962만달러다.
부산화력132MW
군산화력66MW
의암수력45MW
청평수력40MW
영동화력125MW
서울화력125MW
영남화력200MW
팔당수력80MW
영남화력200MW
서울화력200MW
충주수력150MW
서울화력200MW
위의 총 박정희 1차경제개발계획기간 증설된 발전설비 합계 1,262메가와트 곱하기 1.44만불하면 1,962만7천달러가 나오고 이 돈은 당시 환율가치로는 78억5천만원(400원/$)이다. 발전설비70년 이전에 된 것에서만그렇다. 참고로 1970년까지 도입된 외자총액이 10억달러였다. 위에는 70년대 이후와 원자력 관련은 빠졌다.
박정희 인터넷 기념관에서 홍보하는 자료에 의하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7년)의 초년도인 1962년의 우리나라 수출액은 5천5백만달러, 외환보유고는 1억6천8백만달러, 경제성장률은 2.2%였고 그후 1963년 6월에는 외환보유고가 1억1천4백만달러까지 감소되었고 수출 1억달러를 힘겹게 달성한 것은 1964년 11월말이었으며 미국의 無償경제원조로 어렵게 한나라 경제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
수출1억달러를 힘겹게 달성했다고 마치 그 공로가 다 박정희 대통령을 잘 두어 그런 듯이 굶주리던 국민들에게 홍보하던 이면에서 저들은 그렇게 매 해외계약건마다 5% 또는 그 이상씩 리베이트를 차곡차곡 거두고 있던 산적두목 같던 정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단순 계산만 해보더라도 이토추 상사에서 125메가와트 발전설비 1기 공사하며 박정권에 갖다바친 돈 180만불이 당시 국가사정으로선 얼마나 부담되는 액수였던지 알 것이다. 영동화력발전은 1967년 건이며 공사가 시공- 완공도 아니고 - 되던 때에 먹은 돈이다.
- 총수입금액으로 본 리베이트;38억3천만달러 -
또 다른 자료가 있는데 그것은 박정희 통치기간 중의 수입액으로 계산하는 방법이다. 5% 리베이트 룰을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들어온 총수입금액 - 외국에서 들여오는 - 에다 적용하면 그 금액은 다음과 같이 계산된다.
76,606.1백만불(하기 각년도 수입액 합산)X5%=3,830.305백만불=3,830,305,000불[38억3천만달러]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일달러당 2,523원-한국은행** 매일경제기사발췌"박대통령 서거 당시 재외공관의 애도분위기도 전해졌습니다. 공관 직원과 교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위금을 모아 일본은 202만 5,000엔, 미국은 650달러를 보내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1970년대 환율을 고려하면 현재 통화가치로 엔화는 약 2,337만 원, 달러화는 약 164만 원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그 대략의 18년 통치기간동안 대외에서 거두어들인 소위 리베이트, 속어로 삥땅친 금액은 9,663,859,515,000,000원(9,663조8,595억원)에 달한다. 가히 벼룩 간에 붙은 기생충 수준이다.
1979-20,338,6(백만불)
1978-14,971.9
1977-10,654.(백만불)
1976 - 자료를 못 구해 제외
1975-7,274.4(백만불)
1974-6,851.8
1973-4,240.3
1972-2,522.0
1971-2,394.3
1970-1,894.0
1969-1,823.6
1968-1,465.2
1967---996.2
1966---716.4
1965---463.4
1964- 자료를 못 구해 제외
1963- 자료를 못 구해 제외
1962- 자료를 못 구해 제외
1961- 자료를 못 구해 제외
- 차관도입으로 본 리베이트: 11억7,255만달러-
또 다른 박정희 정권 리베이트 규모를 구하는 방법으로 차관도입으로 산정해본다. 1962년최초상업차관제6시멘트 건 7억980만불의 최초 상업차관이 도입된 이래, 박정희가 죽기 일년전인 1978.10.16. 당시 경제기획원장관 남덕우는 국회에서 당시까지 들어온 총차관규모는 168억5,100만달러였다고 밝혔다.
헌데 1978년에만 따로 들어온 차관실적규모 33억달러에다, 1979년 도입확정 차관 중화학공업분야29억달러, 교육차관4억달러로 이 단 두해 동안에만 66 억달러가 더 들어왔다. 이들은 이자는 제외된 금액이다. 이자는 통상 리보금리 더하기 1.5%였으며 바쁜 차관에는 리보+2%까지도 갔다.
1979년6월22일 보도자료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은 앞으로 매년 45억달러의 차관도입이 필요하다고 강변하고 있으니, 해가 갈 수록 차관은 줄기는 커녕 더 늘어날 추세라는 것은 이미 뻔했다.
동아에 의해 알려지게 된 박정희가 해외에서 들어온 차관마다 5%씩 떼었다는 기사에 따라, 박정희 통치기간동안 늘어났던 총차관액의 5%를 계산하면, 대략의 박정희가 삥땅한 돈액수가 드러날 것이다.
168억5,100만불+33억불(78년)+33억불(79년)을 하면 총차관액234억5,100만불이다. 그 5%는 11억7,255만달러다. 이 금액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약 3조가 된다.
수입에서 받은 리베이트와 차관에서 뗀 리베이트를 합산하면 50억26만달러다. 이 돈의 원금과 이자 상환은 물론 국민들의 몫이다.
오늘날 김정일의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 잔고를 약4억달러로 말하고 비판하지만, 박정희는 지금부터 30년전이던 당시, - 국민들의 월평균소득이 6천원 가량이었다.- 50억달러 (추정금액)나 뒤로 횡령하여 그 권력일당과 및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나누었을지 모를 일이다.
다음은 박정희의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에 대한 이후락 아들의 증언이다.
"HR의 아들 이동훈 (李東勳.49.제일화재 회장) 씨는 미 의회 증언에서 "아버지가 스위스은행 비밀계좌 등을 통해 돈을 관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대통령(박정희)의 정치자금" 이라고 증언했다." - XX신문
- 기업체 수로 추정해본 떡값 추렴 73~79년 사이 최소 30조4,920억원 -
박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김정렴은 이렇게 말했다. 유신 이후부터 국민들 원성을 덜 듣도록 기업체마다에 돈 받아내는 것을 줄여서 일년에 두 차례 큰 곳은 일억, 작은 곳은 일천만원으로 하여 돈을 받기로 대통령에게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1960년, - 6.25가 끝난지 7년째이던,- 해에 국내의 5인 이상 기업체 숫자는 약 8,800곳이었다. 국민총생산지수는 1963년 970억달러에서 1973년(유신이 시작되던)엔 1,330억달러로 약4.5배가 성장했으므로, 국내 기업체 숫자 역시 4.5배로 성장했다고 보면 8,800곳의 기업체수는 39,600곳으로 늘어난다. 39,600곳에서 절반은 일억을 걷고 절반은 일천만원을 매년 2회씩 걷었다라고 친다면,
19,800기업x2억x7년=27조7,200억 및 19,800기업x2천만x7년=2조7,720억원를 더하면, 국내에서 73년이전은 제외하고 1973년부터 1979년까지만 줄이고 업체수도 대폭 줄여 단순 계산만 해도 30조4,920억원이다. 이 때의 30조4,920억원은 현대의 가치로 따지면 약 100배로 봐야 하고 그러면 3,000조가 된다.
- 총합산: 수입리베이트+차관리베이트+국내리베이트:
앞서 계산한 수입 및 외자도입차관액수 50억 달러는 현재적 가치(당시 달러당 2,523원 가치)로 약12조6,150억원이다. 국내 기업체에서 과거보다 줄여받기 시작한 돈액수를 더하면 총 액수는 42조6,150억원이 나온다. 하지만 당시 화폐가치는 지금의 100배로 보아야 하게 되면, 금액은 천문학적으로 높아진다. (3천12조6천억원)
걸프사는 1971년에 그들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1천만 달러를 선거자금용으로 지원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간신히 깎아서 3백만달러만 줄 수 있었다 라고 미의회에서 증언했다. 미쓰비시는 나중에 화력발전 1기를 수주할 때 받기로 하며 외상으로 먼저 박정희의 선거자금으로 1963년 백만달러를 주었다고 한다. 문제는 박정희 일당이 - 가난하기 그지없던 - 미쓰비시, 걸프, 이토츠 삼사에만 이런 요구를 가하지 않았으리란 점이다. 한국에 들어온 외국사들에마다 그런 요구를 하였으리라고 볼 때 금액은 상상이상이다.
한국의 오퍼관행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박정희가 저토록 한국 국토위에 벌려놓은 온갖 공단과 중공업 현장들이 한편으로는 그야말로, 그런 식 - 건 당, 기 당 5% 씩 붙이고 떼먹는 - 이었다면, 정말 글자 그대로 땅 짚고 헤엄치며 줍는 황금알사업 - 벌리면 벌릴 수록 황금알, 다이아몬드 알들이 줄줄 튀어나오는 - 이 박정희의 국책사업, 1차, 2차,3차, 4차까지 간 5개년개발계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짚을 것은 더 있다.
1963년 국민들의 제조업체 종사자 평균 월급여가 3,180원이었다. 그렇던 배고프던 시절에 박정희 부부는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을 시작하는데 이미 그 해2월에 지방"문화재" 보수사업을 시작했다. 이 일은 한 마디로 부족한 국가재원을 허물어져가던 전국 사찰들을 - 문화재란 이름으로 - 포장하고 부흥시키는 데 퍼붓게 했다. 그 결과 산속 깊은 곳까지 사찰들 앞마당까지 - 전국 도로도 안 깔리던 때 - 포장도로가 닦였다.
이 문제에 대해 본 필자가 보는 관점은 이것이다. 1963년은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선언하고 스스로 군복을 벗고 윤보선과 치열한 대선접전을 벌였던 때다. 선거일은 10월15일로 잡혀 있었다. 헌데 바로 그 해에 국책사업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방사찰 도로 닦아주고 현판 달아주는 사업이 그 해2월에 시작되고 게다가 9월12일엔 소위 문화재 5개년보수계획이란 거창한 이름까지 달고 나온 것은, 그들 부부가 육영수의 불심을 이용, 전국 사찰들의 힘을 빌어 선거에 이기기 위한 정략적 이유가 컸을 것이다.
또 하나 이들 박정희 부부가 종신형 독재정치를 꿈꾸었던 것 아니냐는 짐작이 가게 하는 항목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 업적의 1965.10.15.에 기록된, 뚱딴지 같은 "율곡기념관" 사업 때문이다. 더 조사해보면 바로 한 달 후, 육영수를 고대로 닮은 모습을 한 신사임당 영정이 이 때 탄생한다. 그리고 신사임당 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신사임당상 수상자가 배출되었다.
육영수를 국모급으로 올리기 위한 고도의 이미지 정치를 박정권이 폈던 것이다.
지금의 오만원 권에 등장한 신사임당 모습이 박근혜와 그대로 닮아서 박빠들이 환호하게 된 것도 바로 1965년 그려진 신사임당의 영정- 이전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 이 육영수를 그대로 바꿔치기해 그려놓았던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 부부가 진정 1963년 선거하며 단선만 하고 그만 둘 것이라고 외쳤던 대로라면, 육영수를 고차원적 국모 이미지 만들기 작업은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1979년까지 걷은 42조원대의 정치자금 용 리베이트들 중에서 소위 정치자금이 박정희가 김정렴에게 말한 대로 기껏 매년 30~40억만 필요했다면, 남았을 돈은 엄청나다. 게다가 이자까지 감안한다면. 전두환이 7년간 걷은 7천억의 100배에 해당하는 돈이 박정희 18년간 사라진 것이고 보면, 지금 수도권의 엄청나게 오른 부동산 가격의 거품과 막대한 외채빚은 그 때 해외로 사라진 - 박정희의 비밀계좌 뿐 아니라 이후락, 김형욱 들의 - 검은 돈들이 남긴 그림자인 지도 모른다.
정부는 스위스 은행에 박정희 비밀계좌가 과연 이후락 아들의 증언대로 지금도 있는지, 정말 있었는지, 박정희 시대에 치부했던 집단에 대해서도 반드시 조사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일제과거사나 민주화과거사를 밝히는 일보다 더욱 중대하지 않을까. 자칫했으면 이 나라도 김일성의 북한과 같은 종신세습독재체제로 갔을 지 모를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는 저토록 막대한 리베이트가 박정희에게는 필요없었으며, 육영수 국모만들기 역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는 박정희가 강탈한 김지태 부산장학회나 영남대학교 같은 사안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므로.
솔직히 이런저런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저토록 뜯기고도 이 나라 경제가 성장한 것은 - 아프리카 짝이 나지 않고 - 그야말로 기적이구나 는 생각이다. 그리고 저토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던 독재자가 하루 아침에 부하의 총구에 의해 사라지게 된 일도 기적이다.
퍼스트 레이디로 박근혜를 당시 세웠던 것도 박정희 일가의 장기집권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국모 육영수의 이미화 사업에 이어. 박정희가 그토록 열심히 조국근대화를 일군 이유는, 모르는 국민들이 본다면, 박정희의 위대성 때문이라 말할 것이고, 오퍼나 리베이트 개념을 조금이라도 아는 국민이 본다면, 엄청 해먹었고 해먹을 만 - 저리 열심히 - 했구나 고 보게 될 것이다.
박정희가 얼마나 횡령하고 얼마나 남겼던지 그가 국가외채에 끼친 영향과 국민들에게 대신 물게 한 이자금액까지도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서는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 어제 이 글 써놓고 두 번이나 다 쓴 것을 날렸다. 덕분에 오늘 더 자세하게 썼다.)
2010.2.24. 파아란 한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