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기도/찬송
제목 :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
성경 : 약 5:12~20
찬송 : 361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40324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약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약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약 5: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약 5: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약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사람의 눈에는 천동설이 맞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아이들 노래에 “둥근 해가 떴습니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지동설이 맞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 삶의 중심이 바로 ‘나’라고 착각하며 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계십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피아노 치는 변호사, Next’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저자 박지영 변호사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사업의 부도로 단칸방으로 이사하면서 피아노를 처분했습니다. 어렵게 피아노를 마련하였지만 둘 곳이 없어 주인집 거실에 두고 연습을 하였습니다. 예원 중학교를 거쳐 서울 예고를 졸업할 당시 19세 나이에 ‘호치킨스 디지즈’라는 희귀성 임파선암에 걸렸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을 때마다 몸 안의 장기가 입으로 딸려 나올 것 같은 토악질을 했습니다. 물을 넘기기가 어려웠고 주사 바늘을 많이 꽂아 혈관들이 숨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잠을 잘 때도 가위에 눌렸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생명이 남아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기자 항암치료를 중단했습니다. 병원에서 경고했지만 현미와 채소의 자연식을 먹으면서 1년 동안 암세포와 싸웠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처럼 암이 치유되었고 서울대 음대에도 합격하였습니다. 그 후 15년 동안 임파선 암과 관련해 병원을 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긴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함께 해주신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하면서 자신이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이웃을 기쁘게 하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선교단체에 들어가서 농촌의 오지, 도시 빈민, 소년 소녀 가장, 장애우들을 섬겼습니다. 서울법대에 편입하여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법무법인 변호사로 어려운 이들의 변호를 맡아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로서 직업적 소명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궁극적 소명을 분리하지 아니하고 세상 한복판에서 예수를 닮아감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잘 소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예수의 사랑을 가장 잘 변론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 내가 받은 예수의 사랑을 법과 음악을 통해 잘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박지영 변호사, 그녀는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심을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삶
√약 5: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왜 야고보는 12절에서 맹세에 대한 문제를 다룰까요? 12절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어떻게 보면 생뚱맞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아무런 연결 없이 엉뚱하게 끼어든 교훈에 불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2절을 중심으로 전후 문맥을 가만히 살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대귀적 구조가 나타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9~16절까지는 ‘서로 원망-주의 이름으로-고난-「맹세하지 말라」-서로 고백-주의 이름으로-고난’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장 중앙에 핵심적으로 위치해 있는 명령은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맹세하는 것이 야고보가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말의 사용’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왜 이런 구조가 되었는지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구조의 핵심에는 가장 중요한 ‘말의 사용’으로써 ‘맹세하지 않는 것’이 제시되어 있고, 그 주변에 대귀적으로 ‘서로 원망하는’ 부정적인 말의 사용과 그 반대로 ‘서로 죄를 고백하는’ 긍정적인 말의 사용이 선명히 대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맹세에 관한 교훈을 다시 재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왜 이 대목, 이 문맥에서 맹세에 대한 가르침을 다시 풀어 설명할까요? 사실 맹세를 아예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람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탐욕을 위한 죄를 가리기 위해 하나님이나 하나님에 준하는 성전, 발등상, 예루살렘 등의 이름을 빌어 거짓이나 ‘빈말’로 맹세하는 악한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금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말의 진실성’에 대한 강조인 것입니다.
사람의 말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머리카락 한 터럭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습니다.’(마 5:36). 말씀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주권자이신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은 단지 ‘예’라고 대답해야 할 때 ‘예’라고 하고, ‘아니오’라고 단호히 말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선 맹세에 대한 금지 명령이 ‘하나님의 주권’과 ‘말의 진실성’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때, 바로 앞 문맥인 4:13~17절의 세속적인 상인들의 경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이 땅을 주관하지 않으시는 듯이 ‘오늘이나 내일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라고 말하며 허탄한 자랑을 합니다(4:16). 그러나 야고보는 그들이 도리어, ‘주의 뜻이면’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말로 하나님의 주권을 실제로는 부인하며 남용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두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예’해야 할 때 ‘예’하지 못하고, ‘아니요’라고 말해야 될 때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예하고도 예로 살지 않고, 아니요 하고도 아니요로 살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12절의 맹세에 관한 교훈은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헛된 맹세, 헛된 자랑, 헛된 말을 하지 말고,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예, 예, 아니요, 아니요’하라는 것입니다. 예 할 일에 예라고 하고 아니요 할 일에 아니요 하라는 것입니다. 예 했으면 그렇게 살고, 아니요 했어도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라는 것입니다. 곧 두 마음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은 매우 핵심적인 구절이 됩니다. 두 마음을 치유 받고 회복한 사람은 세상에 대하여 ‘아니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니요 한 것을 그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예할 수 있는 사람, 예 한 것을 그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가 인내 성공하여 결국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하십시오. 분명히 할 뿐 아니라 그렇게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두 마음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찬송으로 이어지는 삶
√약 5: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야고보는 서신을 마감하면서 기도와 믿음에 대한 목회적 권면을 합니다. 먼저 그는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며 핍박을 참고 견디는 성도들을 생각합니다. 야고보는 핍박 받는 자들에 대항할 것을 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라고 권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입니다.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즐거워할 수 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천국의 소망을 잃지 않음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선교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들은 매 맞고 착고에 채여 옴짝달싹 할 수 없었지만 한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핍박이 심하고 괴로움이 심했지만 그들은 기도하고 찬송하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며 모든 매인 사람들의 착고가 다 풀어졌습니다.
고난당하는 자는 기도하고 즐거워하는 자는 찬송하라는 말씀은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성도들 중에는 본인에게 원하는 대로 상황은 하나님이 기도 응답으로 주신 것이고, 본인이 원치 않는 상황은 하나님이 기도 응답을 주시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중심축으로 삼을 때 고난이 찾아왔을 때에 기도하라는 뜻으로, 즐거움이 찾아왔을 때에는 찬송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중심의 사람은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고난을 당해 기도하고, 기도를 응답받는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는, 기도와 찬송으로 이어지는 성도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사요 영적 예배입니다.
√히 13:15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병든 자가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고 장로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약 5: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약 5: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믿음의 기도는 육신의 병을 고칠 뿐만 아니라 혹시 죄를 범했으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서로 죄를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서로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는 사랑의 행위에 대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야고보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교수님은 좋은 가문 출신에 어릴 때부터 늘 1등만 할 정도로 머리가 좋아 일류 대학을 나온 재원이었습니다. 기업체를 운영하는 훌륭한 남편을 만나 결혼 후에도 부유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절박한 심정을 가져 본 적 없는 그에게 교회는 그야말로 취미, 여가 활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가 갑자기 앓기 시작했습니다. 괜찮아질 줄 알았던 병이 점점 악화돼 여러 큰 병원에 데려가 보았지만 병명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아이의 생명 줄이 끊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때 그분은 깨달았습니다. 인생에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랑하는 딸아이의 생명을 건질 수 없는 돈도, 박사 학위도 아무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교만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몇 개월간 기도하는 중 권사님 한 분이 이 가정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기도해 주러 오셨습니다. 흔히 말하는 신유의 은사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딱한 사정에 공감하고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권사님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부터 아이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불치병을 앓으며 죽음을 기다리던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그 후부터 이 교수님은 마음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을 따르며 하나님만 증거 하는 종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그 증거로 야고보는 어떤 예를 듭니까?
√약 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약 5: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는 북 이스라엘 아합 왕 시절에 활동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강조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같은 성정’(호모이오파쎄스)입니다. 엘리야는 비느하스와 더불어 하나님의 열심을 가진 사람으로 유대교에서 추앙받는 특별한 인물입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치유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바나바와 더불어 신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을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호모이오파쎄스)으로 소개하며 기적의 주체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행 14:15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엘리야도 하나님이 만드신 같은 피조물이고, 우리도 그와 같이 기도할 수 있음을 본문은 강조합니다. 엘리야의 기도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한편 땅이 열매를 맺었다는 구절은 아담 이후 저주를 받은 땅이 열매를 맺었다는 의미로, 피조물이 기다리는 근본적인 회복을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주는 시험의 목적은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여 떼어 놓는 데에 있습니다. 시험을 당하고 계십니까? 생각을 멈추십시오. 무조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다른 어느 곳에서처럼 여러분의 생각 속에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토해야 합니다. 관건은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묻고 듣고 대답하고, 또 묻고 대답하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욥처럼 끝까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당하는 문제 속 깊이 하나님이 개입하시게 하십시오. 사실, 간구하는 내용을 얻는 것이 응답이라기보다는 간구하는 동안 그의 심령이 치유 받는 것이 진정한 응답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실로 기도 중에 옵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삶
√약 5: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약 5:20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
야고보가 진정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까요? 야고보의 심정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흩어진 열두 지파’(1:1), 곧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 하나님의 새로운 교회가 진정 ‘진리’에서 떠나 헤매지 않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을 ‘돌아서게’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돌아서게 하는 것이 야고보가 이 편지를 썼던 가장 가슴 뜨거운 목적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 속에 흩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양 무리인 교회가, 그들이 처한 세상 한복판에서 온갖 유혹에 미혹되어 죄에 붙잡히고 그것을 잉태하고 거기서 사망으로 내달리는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심령은 둘로 ‘나뉘고’ 있었습니다. 한쪽은 하나님께 발을 딛고, 다른 한쪽은 세상을 향해 발을 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은 진리를 떠나 미혹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돌이켜야 합니다. 정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진리를 떠난 자를 보거든 그를 붙들어 돌이키게 해야 한다는 야고보의 호소는 절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중심에 불타오르는 간절한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그가 던지고 싶은 목회적 메시지입니다.
야고보는 서신의 마지막 메시지로 진리를 떠난 자, 곧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자에 대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소수 종파 취급을 받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유지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곧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하는 것이라며 신앙을 잃은 자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합니다.
한국교회에도 속칭 ‘가나안 성도’란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코로라 시절을 보내면서 현장 예배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온라인 예배로 대충 때우려고 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가 무엇이든 다시금 신앙의 공동체로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를 사용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하나님은 최고로 기뻐하십니다. 허다한 죄를 덮는 일이기도 합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영혼 구원은 뜨거운 사랑의 열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뜨거운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단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많은 선행이 있지만 영혼을 구원하는 행위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삶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삶, 기도와 찬송으로 이어지는 삶, 뜨거운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