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十二章 숨은 힘이 드러났을 때.
1
백여 명이 비가보를 급습한지 이레나 지났건만 적들은 모습
을 비치지 않았다.
비가보는 낮이고 밤이고 적막했다.
폭풍의 핵이 해남도를 지나갈 때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날씨가 지속된다. 지금이 꼭 그때와 비슷했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을 기다리느라고 비가보 식솔들은 바짝
긴장한 채 고요한 세월을 보냈다.
노방은 재정비되었다.
구덩이를 파고 죽창을 설치하고 거적을 덮고 흙을 덮고……
밧줄이 발에 걸리면 암기가 발사되도록 만들고……
위치가 발각난 노방은 이미 노방이라고 할 수 없다.
황유귀가 설치했던 노방은 모두 메워버리고, 새로 다른 노
방을 만들었다. 황유귀가 없어서 그가 만든 노방을 참조하여
새로운 노방을 만드는 작업은 어려웠다.
이상한 일이다.
급습이 있고 난 다음날이나 다다음날 또 다시 기습을 가해
왔다면 노방을 설치할 여력이 없었을 게다. 허나 적들은 조용
했다. 인원이 적은 비가보로써는 다행한 일이지만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적엽명은 비가보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빠질 경우, 비가보를 지킬만한 사람은 화문 한 사람
밖에 남지 않는다. 호귀가 있지만 그가 구사하는 무공으로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도 급급하리라.
몸을 빼야겠는데 뺄 수가 없다.
한시라도 빨리 정체 모를 존재들이 누군지 알아내야겠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황유귀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데 그마저 소식이 끊겨 버렸다.
적엽명은 답답했다.
적도 답답할 것이다.
다른 무장들은 이쯤에서 죽었다. 죽이는데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화를 죽이듯이 자연스럽게 죽일 수 있었
다. 허나 지금 그들은 백 명이나 되는 시신을 남기고도 단 세
명을 죽이지 못했다.
그들은 적엽명 일행이 아무 것도 알아낸 것이 없다는 사실
을 알고 있을까?
적엽명의 판단은 '모른다'였다.
화문과 한백은 빠져나오기 극히 힘든 상황까지 치달렸다.
비가보를 급습한 것 또한 방비하기 힘들었다. 그들은 기필코
죽이려는 의사를 보였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그들이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면 적엽명 일행은 아직도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으리라.
'마수광의가 알아낸 것을 알아내야 해.'
적엽명은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마냥 서있었다.
답답했다. 지금쯤 유소청은 무슨 고역을 겪고 있을까……
적엽명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두두두두……!
분명히 말발굽 소리다. 그것도 한두 필이 아니다. 묵중한
바퀴소리도 들린다.
'마차……'
마차를 타고 비가보를 방문할 사람이라면……? 없다. 적엽
명이 생각하기에 해남파와 등을 지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비가보에 서슴없이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적엽명은 검을 툭 건드려 본 후,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렇게 날씨가 궂은 날에 누구 오는 거지? 어멋! 저건 팔
두마차네? 어, 어…… 저, 저것……!"
바퀴 구르는 소리를 듣고 적인가 싶어 한달음에 뛰어나온
호귀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적엽명도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해남파 장문인의 마차.
주위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공을 모르는 마부만
이 어자석(馭者席)에 앉아 힘차게 말을 몰고 있다.
장문인이 공식적인 나들이를 할 경우, 어자석에는 늘 두 명
이 앉는다. 한 명은 마부이고, 또 한 명은 추운단 무인이다.
뿐만 아니라 추운단 무인들은 길목 요소요소를 장악하여 암살
기도를 사전에 분쇄한다. 방문지에는 장문인보다 추운단 무인
이 먼저 도착한다. 그는 장문인이 거처할 곳부터 먹는 음식까
지 일일이 사전 점검한다.
그런데 오늘은 장문인 혼자서 오고 있다.
마차를 잘못 보았을 리는 없다. 틀림없는 장문인의 전용마
차다. 또한 바다물결과 검이 어우러진 깃발은 장문인이 마차
에 타고 있다는 표식이다.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떠올리지 않고 있는 사람은 화문뿐이
었다.
화문은 장문인의 마차를 알아보지 못했다.
마차는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지 않고-그러려면 비가보로
달려오지도 않았겠지만- 일직선으로 달려와 대문 앞에서 멈췄
다.
마차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뛰어내리는 사람은 리아였
다. 어린 리아. 그리고 유소청이 고운 걸음으로 내려섰다.
"소청!"
적엽명은 뜻밖의 일에 눈을 부릅떴다. 허나 곧 활짝 핀 웃
음으로 바뀌었다.
마음으로는 달려가 얼싸안고 싶은데…… 그러지는 못했다.
유소청의 뒤를 이어 내리는 사람, 장문인. 해남파 장문인 뇌
공검 한민이 틀림없다.
화화부인과 취영은 오랜만에 방에서 나왔다.
장문인이 방문한 마당에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화화부인이나 취영누이에게는 지난 싸움이 큰 충격이었으리
라. 이해할 수 있다. 사실 화화부인이나 취영누이는 무가 사
람이라고 하지만 목장에서 생활했다는 편이 더 어울리리라.
그녀들이 무림을 알게 된 것은 청천수가 불구가 된 다음부
터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그게 가장 큰 충격이었고, 무림이라는 실체를 안 최초의 계
기였다.
그 후로도 무림을 알 수 없었다.
전에는 무림사에 간여하지 않았지만, 비가가 몰락한 후에는
누구도 비가를 무가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실제로 무
공을 익힌 사람도 없었고.
해남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무림과는 전혀 동떨어진 세계에
서 살아온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앞마당이 피로 얼룩진 광경은 청천수가 당
한 것 이상으로 큰 충격이었다.
화화부인은 이틀동안이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비가
를 지탱하겠다고 억척스럽게 살았던 취영누이도 마찬가지였
다.
"처음으로 본 살육 아니니?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청천수 본인도 낯빛이 핼쑥했다. 무공은 익
혔으되 수십 명이 몰사한 광경을 처음 본 때문일까? 아니면
한광에게 패한 옛날 일이 떠올라서일까. 싸움이 있으리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이토록 처절한 싸움일 줄은 몰랐던 때문일
까?
모두들 오랜만에 방에서 나왔다.
취영누이는 차를 대접했고, 화화부인과 청천수는 옛날의 관
계를 생각해서 좋은 낯빛으로 대하고 있다.
그럴만한 사이는 아니다.
청천수가 바로 한민의 아들인 한광에게 당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장문인은 모든 한인들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다.
"옛날 일이 생각나는군. 비가주는 용정차(龍井茶)를 무척
좋아했지. 본문에 올 때도 항시 잊지 않고 챙겨왔어. 허허
허!"
비가주는 용정차가 아니면 마시지 않을 정도로 용정차를 애
호했다.
해마다 차를 구하기 위하여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풍
황령(風篁嶺)까지 사람을 보낼 정도였다.
당시는 편하게 마시던 차였다. 용정차 정도는 부담 없이 마
셨다. 하지만 지금은 구할 수도 없다. 차를 사기 위해서 절강
성까지 사람을 보낸다는 자체가 현재 비가보로써는 꿈도 꾸지
못할 사치다.
"그 동안 무심했습니다."
"바쁘신 탓이겠지요."
장문인과 화화부인은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그 외에
도 장문인은 두어 마디를 더 했지만 장문인이 직접 비가보를
방문할 만큼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일상사가 중요할 리 있겠
는가.
눈치 빠른 화화부인은 취영을 이끌고 나갔다.
그래도 장문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청천수의 근황이라던가, 몸의 상태라던가, 여족인들이 들떠
있는데 비가보는 어떠냐는 둥의 말만 간간이 던졌다.
"몸이 안 좋아서…… 괜찮으시다면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사지가 굳어 있어서 그런지 오래 앉아있으면 몹시 괴롭군요."
"허허허! 무인의 운명이지. 운명이야. 그래, 가서 쉬게나.
내 염려는 말고."
장문인은 오늘따라 힘이 없어 보였다.
유소청이 청천수의 동의를 밀고 물러간 다음에도 장문인은
한참동안 뜸을 들였다.
이윽고 장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못난 자식이 일을 벌였어."
"우화를 죽인 것 말입니까?"
장문인은 고개를 끄덕인다.
"깨끗한 물에서는 고기가 살지 못하는 법이지. 적당히 혼탁
해야 마음껏 뛰어 노는 법인데……"
"……"
"어려운 부탁을 하러 왔네."
"말씀하시지요."
"내 아들…… 한광을 죽여주게."
"……!"
적엽명은 일시간 대답하지 못했다.
정녕 장문인의 본심이란 말인가. 본심으로 자식을 죽여달라
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유를…… 여쭤봐도 좋습니까?"
"사마외도(邪魔外道)를 걷고 있다면 이유가 되겠는가?"
"사마외도라 하시면……?"
"탈혼검을 익혔네."
우선 놀랬다. 그리고 할 말이 없었다. 탈혼검이라니. 이해
가 되지 않았다. 한광이 무엇이 부족하다고 탈혼검을 익힌단
말인가.
한가에는 뛰어난 검법이 많이 있다.
적노검법(寂鷺劍法), 일지검법(一枝劍法), 환우검법(環雨劍
法), 건곤검법(乾坤劍法), 대념검법(大念劍法).
어느 것 하나 절기(絶技)가 아닌 것이 없다.
궁극에 이르면 검을 버리고, 검을 익히지 전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다는, 뛰어남을 넘어 평범에 이른다
는 입전수수(入廛壽手)에 도달할 수 있는 검법들.
한광은 특히 적노검법에 뛰어났다. 들리는 말로는 적노검법
만으로 검신일체(劍身一體)라는 지검귀가(持劍歸家)에 올라섰
다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십검(十劍) 중 팔검(八劍)에
해당하는 인검구망(人劍俱忘)에는 빨리 오를 수 있지만 마지
막 십검(十劍) 입전수수에는 결코 오를 수 없다는 탈혼검을
익혔단 말인가.
"해남파에도 고수가 많은 줄 압니다만……"
적엽명은 정중히 사양했다.
부득불 한광과 검을 맞대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
지만 이렇게 장문인의 청을 받고 한광을 죽여서는 안될 것 같
았다.
"고수라…… 허허허! 내 손으로 내 자식을 죽이란 말인가?"
"장문인."
"이렇게 생각하게. 자네를 이용하는 거라고. 자네가 내 자
식을 죽인다면 마인(魔人)을 제거하는 것이고, 자네가 죽는다
면 골치 아픈 자를 없앤 것이고…… 나야 손해볼 것이 없지
않은가."
진심이다. 장문인은 진심으로 한광을 죽이려 하고 있다.
장문인의 말을 미루어 보면 한광은 탈혼검을 상당한 경지까
지 익힌 듯 하지 않은가. 전가주를 죽인 검공, 전검만이 탈혼
검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다. 해남파에도 고수가 많지
만 탈혼검에게는 필승을 확신할 수 없는 게다.
한광이 그토록 강했단 말인가.
한가에서 한광을 상대할 만한 사람을 꼽으라면 건곤검 한혁
과 장문인이다. 이 두 사람은 절대 강자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한광에게 검을 들이댈 수야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누가 죽을 지는 모르지만 검을 맞대겠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군. 나는 지금 당장 한광을 찾아가
죽여달라고 말하는 것이네."
"죄송합니다. 지금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중
요한 일이 있어서."
"휴우! 그런가…… 모두 운명이겠지. 자네 말대로…… 기회
가 생긴다면…… 검을 맞대주게. 허허허! 내가 자네에게 청부
를 한 겐가? 허허허! 그럼 대가를 줘야지."
장문인은 마차에 내릴 때부터 들고 왔던 목함을 만졌다.
"이것이면 대가로는 충분할 걸세."
적엽명의 눈가는 암울하게 젖어들었다.
산 넘어 산이요, 강 건너 강이다.
해남도로 들어올 적에는 밀명만 해결하면 될 줄 알았는
데…… 비가보를 재건하는 문제는 어머니와 누이, 형과 형수
의 생명이 되어버렸다. 해남 무인들의 끝없는 도전도 밀명을
수행하는데는 장애가 된다. 우화도…… 돌보아줘야 하는 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또 한광까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는데 할 일만 태산같이 불어나고 있
다.
어쩌란 말인가.
"부탁이 있습니다."
적엽명은 힘들게 말했다.
"말해보게."
"해남 무인들…… 저에 대한 비무 요청을 중지시켜 주십시
오. 장문인의 특명으로 비무는 절대 안 된다고. 중양절까지만
부탁드립니다."
"허허허!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게. 해남파는 자네에게
신경 쓸 틈도 없네. 본문만 말하는 것이 아닐세. 십이가문 모
두 제 코가 석 자야. 제 코가 석 자."
장문인의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깊이 물어
볼 수도 없는 일. 적엽명은 장문인의 말을 가볍게 흘겨듣고
말았다.
장문인도 상세한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
장문인은 비가보가 습격 당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장문인
이 비가보에 들어섰을 때는 시신이 모두 치워진 다음이었고,
마당 하나 가득 흐르던 핏물도 깨끗이 씻긴 다음이었다. 무엇
보다 비파가 떠난 다음 비파를 대신할 정보력이 대체되지 못
한 상태였다.
적엽명이 조금만 더 파고들었어도, 장문인이 조금만 부언설
명을 해주었어도.
"자네에게 꽃을 선물하지. 예쁜 꽃이니까 시들지 않게 정성
을 다해야 하네."
장문인은 씁쓸하게 농담을 건넨 후 마차를 타고 떠나갔다.
장문인이 건네 준 목함.
목함 안에는 한가의 모든 재산이 들어 있었다.
용뇌향(龍腦香), 청피(靑皮), 파누(坡壘), 현목( 木), 철
력목(鐵力木), 해남석자(海南石梓), 개목련[綠楠], 철도목(鐵
刀木)의 벌목권(伐木權).
안엽유( 葉油), 향모유(香茅油)의 채취권(採取權).
사십여 종의 약초를 재배하는 약초 밭도 포함되어 있다.
유소청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도,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응? 장문인께서 무엇 때문에 이
걸 주고 간 거야?"
그녀는 서신 한 장을 손에 들고 발발 떨었다.
서신에는 한가의 모든 재산을 적엽명에게 양도한다는 내용
이 적혀있고, 한가주의 인장과 장문인의 인장이 같이 찍혀 있
었다. 완벽한 양도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장문인이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모든 재산을 양도한
단 말인가. 그것도 자신의 혈족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
아있는데 모든 기득권을 양도한다니.
적엽명은 장문인의 부탁을 말하지 않았다.
탈혼검을 상대해야 한다면 그 역시 승부를 장담하지 못한
다. 귀신을 영혼을 빌린 검이라는 소리는 들었어도 실체는 한
번도 대해보지 못한 검.
한광은 걱정되지 않았지만 탈혼검은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검이다.
"말해봐라. 무슨 말을 하시고 가신 게냐?"
화화부인도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왔다.
모두 마찬가지다. 장문인이 한가의 모든 재산을 놓고 간 것
에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청천수마저도 이번 일에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잠시 보관해 달라고 맡긴 것이에요. 우리 물건이 아니니
잘 보관했다가 돌려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서신에는……"
"유매, 비가는 말로 일어서야 돼. 그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이야. 그저 편안히 먹고살려면 황담색마를 살 필요도 없었
어. 황함사귀가 가진 재산으로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지. 말
이 없는 비가는…… 모두가 바라지 않을 거야."
"그 말이 아니잖아. 이 서신에 적힌……"
"생각하지 말아 줘. 우리 것이 아니니 잠시 보관한다 생각
하고."
적엽명은 서둘러 일어섰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화화부인, 취영누이, 청천수
형, 형수, 그리고 유소청. 이들이 계속 걱정한다면 한광을 죽
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말 것 같았다.
사실 적엽명도 놀라는 중이었다.
한광을 죽여달라는 말도 놀랍지만, 한가의 전 재산을 양도
하다니.
'뭔가 있다.'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황유귀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비가보에서 십 리까지는 쫓아갔지만 그 후로는 뿔뿔이 흩어
져 누구를 쫓아가야 할 지 막막했다는 것이다.
무리 지어서 뚜렷한 족적(足迹)을 남기며 물러갔다면 모를
까 흩어진 한두 개씩 남아있는 발자국으로는 추적하기가 힘들
다. 더군다나 황유귀가 쫓아간 날은 비가 심하게 퍼부어 댔
다.
황유귀는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발자국이 흩어진 방향을 대충 짐작하고 여기저기 수소문하
고 다녔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가 얻어들은 정보는 아무 것도 없었다.
여족 제일의 귀를 가졌다는 말이 무색하리 만치.
황유귀는 마지막으로 노인들을 만나보았지만 정체모를 사람
들에 대해서는 노인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
서는 관심도 갖지 않았다. 노인들은 우화의 죽음을 계기로 어
떤 이윤을 얻어낼 것이가에만 골몰해 있는 듯 했다.
그렇다고 전혀 빈손은 아니었다.
귀영검 유화의 죽음과 적림무인 열 다섯 명의 죽음을 가져
왔다.
유소청은 서 있을 힘도 없는 지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주르
륵 흘려냈다.
위로도 할 수 없었다.
유가라는 울타리에 모여사는 사람들은 -다른 가문들도 마찬
가지지만- 촌수가 아무리 멀어도 친형제, 친부모처럼 우애를
돈독히 하고 살아간다.
유소청에게는 친 오라비들의 죽음과 같으리라.
"이상하단 말야. 적림 무인과 비파가 서로 죽이다니."
황유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남파에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적엽명은 그제야 장문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제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 말과 장문인이 전 재산을 양도한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술, 노방을 강화할 수 있나?"
"얼마나?"
"혼자서 무인을 상대한다고 생각하고 말야."
"흠……! 그럼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야겠는데. 초원까지 넓
혀야 하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해줘."
적엽명은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고 싶었다.
유소청이 돌아와서 그녀를 잃을 염려는 없다지만 해남도가
돌아가는 상황은 몹시 복잡하면서도 급했다.
적엽명은 한백을 찾았다.
그가 거처하는 방에 가까워지자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깔
깔거리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백은 석두의 두 아들을 옆에 끼고 살다시피 했다.
두 아이들도 한백을 잘 따랐다. 어린아이들은 친절하게 대
해주는 사람을 따르는 법이 아닌가. 아이들은 한백이 특별히
좋다기보다도 한백이 주는 과자나 과일들이 탐나서 자주 찾는
것이리라.
적엽명은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래도 아이들은 여전히 방안을 휘젓고 다닌다.
"이제는 잘 노는군."
적엽명이 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하! 아이들답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밝게 자라야죠."
"독초(毒草)가 가만있지 않을 텐데?"
"여기 있는지 모를 겁니다."
한백은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서 희미하게 웃었다.
독초는 송지를 일컫는 말이다. 죽은 황함사귀가 억척스럽게
일하는 송지를 보고 '독을 품고 있는 풀'이라고 일컬은 다음
부터 송지의 별명은 독초가 되었다.
송지는 아직도 마사에서 일한다.
황함사귀가 죽고 외팔이 중년인이 찬을 따라 산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사실 그녀밖에 남지 않았다. 황함사귀가 뇌주반도에
서 사온 목부들은 야밤에 벌어진 대혈겁을 보고 난 다음부터
도망칠 궁리만 하는 모양이다.
송지는 도망갈 염려가 없다.
석두의 복수를 하고자 찾아왔으니 뜻을 이루기 전에는 물러
설 여인이 아니다. 황담색마를 몰살시킬 수도 있고, 가족들이
먹는 식수에 독을 탈수도 있다. 머릿속에 복수란 글자만 되새
기는 여인이니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점만은 안심해도 좋다.
암수를 사용하려고 생각했다면 지금까지 기다리지도 않았
다. 송지는 당당하게 싸워 이길 생각이다. 석두가 죽은 모습
그대로 적엽명을 죽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누가 적엽
명을 죽일 것인가. 자식이다. 자식들이 석두처럼 강한 무인으
로 성장하는 것이 바로 송지가 살아가는 보람이다.
두 자식은 무공의 기초가 닦여 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
았으니 틀림없이 무골일 것이다. 거름을 부어주고 잘 돌봐주
기만 한다면 적엽명을 죽일 수 있는 무인으로 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식들이 한백에게 자주 가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다.
한백이 자식들의 무골을 가다듬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
으리라.
한백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적엽명에게 노골적으로 말
할 수는 없었다.
"가능성 있나?"
적엽명도 웃으며 물었다.
"무골이 아닙니다. 석두의 피보다는 독초의 피를 많이 물려
받은 것 같아요. 무(武)보다는 문(文)으로 키워야 할 아이들
입니다."
"중원으로 데려갈 텐가?"
"독초 생각이 어떨지……"
여족과 한인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티 없이 성장하기에는
해남도보다 대륙이 좋으리라. 그 점에서 두 사람은 생각이 일
치했다. 대륙으로 들어가는 목적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적엽명은 한백이 쉴 때라고 생각했고, 한백은 계속 군대에 남
아있기를 원했다. 장군들 중에는 무공을 전혀 모르는 장군도
상당수에 이르지 않는가 말이다. 부하를 통솔하는데 무공이
뛰어나면 좋지만 꼭 갖춰야 할 요소는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한 결말은 해남도 일이 끝난 다음까지 미뤄놓
았다.
"독초도 한 장군 마음을 아나?"
"……"
"풋! 한 장군이나 화 장군이나…… 군에 돌아가면 좋은 술
안줏감이 생겼어."
"장군!"
한백이 기겁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채
반도 일으키기 전에 인상을 찡그렸다.
"하하하! 아픈 사람을 놀리는 맛도 괜찮은데?"
"장군, 이 복수는 꼭 할 겁니다."
"하하하!"
"끄응……!"
한참을 웃던 적엽명은 한백의 손을 잡았다.
"한 장군, 몸조심해요."
"……!"
한백은 안색을 굳혔다.
적엽명은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 건방지다 싶을 정도로 직
위를 따졌다. 직위가 낮으면 과거의 공훈(功勳)이 어떻던간에
말을 놓았다. 처음에는 나이도 어린놈이 어른들에게 반말지거
리를 해댄다고 욕을 해지만……
그런데 지금 반말을 거둬버렸다.
이것은 뭔가……
"장군!"
"내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해남도를 벗어나
요. 호귀가 도와줄 겁니다. 관충 장군님께 돌아가서…… 화
장군과 한 장군께서 보고 겪은 일만 전해드려도 될 겁니다.
그들의 정체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군인이 해남도에 들어와 있
다는 것만으로도 출병(出兵) 할 수 있을 거예요."
"장군!"
적엽명은 굳게 잡힌 손을 빼낸 다음 몸을 일으켰다.
"별 일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저 확인만 해보면 되는 거니
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송지는 아이들 입을 통해 적엽명과 한백이 나눈 대화를 들
었다.
아이들이 한백과 어울리는 것을 모른 척 하는 또 하나의 이
유다.
아이들은 한백에게 놀러가도 아무런 꾸지람을 하지 않자 그
날 있었던 이야기를 자랑삼아 늘어놓았다.
그 다음부터 적엽명이 무슨 일을 하는 지 손에 쥔 듯이 알
게 되었다. 낯선 괴인들이 비가보를 습격한다는 것도 알게 되
었고, 우화가 탄의 아버지라는 사실, 탄이 우화의 뒤를 이었
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독초도 한 장군 마음을 아나?'
처음 듣는 말이다. 한백이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재미있는 말이다.
송지는 하얗게 웃었다.
한백은 자신에게 어떠한 의사표시도 하지 않았다. 만나는
일이야 자주 있지만 같은 울타리 안에 살고 있으니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는데…… 그리고 보니 한백은 이유 없이 마사를
기웃거렸다.
그 다음 말도 충격이다.
장군.
한백이 장군? 적엽명도 장군?
송지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일개 무인인 줄 알았더니 나
라의 녹을 먹는 장군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복수는 어찌 되는
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인 냥 아껴주던 석두의
복수는……
"무골이 아니래. 아버지의 피보다는 엄마의 피를 많이 물려
받았데. 무보다는 문으로 키워야 한다고 말했는데 무슨 말인
지 모르겠어."
송지는 처연하게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자식들이 무공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아무리……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들이 적엽명
을 벤다는 것은 너무 요원해 보였다.
"그리고 그냥 갔어. 한백 아저씨는 말이 없고. 심심해서 그
냥 나왔지 뭐. 아저씨는 우리가 가는 것도 모르던 걸."
적엽명은 떠났다.
말을 들어보면 생사를 건 출행(出行)인 것 같은데……
복수는…… 복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송지는 석두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하다. 그토록 사랑했
던 님인데 얼굴이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전체적인 윤곽
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데 세세한 윤곽은 잡히지 않는다. 이
미…… 잊어가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처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