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시리즈
(1) 자식이 많은 왕들 (서양편)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35779
(2) 공주님 만들기 프로젝트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51690
(3) 유럽 왕실의 죽음과 질병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56583
(4) 헤세 가문의 비극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56614
(5) 16세기 미인의 조건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56729
(6) 맨얼굴로 결혼한 왕비님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67019
(7) 왕비님의 변신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67021
(8)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76826
(9) 왕비님의 황금실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80734
(10) 나일강의 왕비와 공주들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287083
(11) 용의 임금님, 용의 왕비님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353581
(12) 왕좌의 게임 뺨치는 콩가루 집안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549736
(13) 하퍼의 전생?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555754
(14) 한번 사는 인생 여한없이 산 여공작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560983
(15) 이름 없는 왕자의 이야기 http://cafe.daum.net/SoulDresser/4Zux/1595581
틀린거 있으면 지적해 주시고 소드에서만 봐주시긔!
루마니아의 마리 왕비(1875-1938)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두 군주, 영국 빅토리아 여왕과 러시아 짜르 알렉산드르 2세가 사돈을 맺게 되는 날!
비록 부모는 떨떠름하지만 여왕의 둘째아들인 에든버러 공작 앨프레드('애피')와 짜르의 고명딸 마리야는 행복하게 결혼식을 올리긔
애피와 마리야는 아들 앨프레드('영 애피')가 태어난 후에 딸을 네 명 낳습니다.
왼쪽부터 첫째 마리('미시'), 둘째 빅토리아 멜리타('더키'), 셋째 알렉산드라('산드라'), 가운데에 막내 베아트리스('베이비 비')
오늘의 주인공인 첫딸의 풀 네임은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입니다.
미시는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자기 이름에 불만을 가졌을 거라고 적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손주들 이름 욕심이 있어서.. 에든버러의 첫 손녀를 빅토리아라고 부르고 싶었을 거라고요.
그치만 별로 사이좋은 며느리가 아니었던 마리야 공작부인은 가차없이 친정어머니의 이름이고 본인의 이름이기도 한 마리, 친정아버지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라를 붙인 다음에 마지막에야 빅토리아를 살포시 추가해 줍니다 ㅎㅎ
가족들이 미시라고 부른 마리는 금발머리에 푸른 눈의 무척 예쁜 아이였습니다.
미시는 어린시절 머리를 빗을 때를 기억하기를, '내 머리는 정말 숱이 많았다. 동생들은 노란 머리라고 불렀는데, 나는 "황금빛" 머리라고 생각하는 게 더 좋았다. 내 풍성한 머리털이 언뜻언뜻 반짝이는 걸 보려고 어깨를 들썩이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시보다 한 살 어린 동생 더키는 키가 커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더키를 언니로 알았답니다.
그러면 미시도 더키도 화를 냈다고 하네요 ㅎㅎ
막내고모 베아트리스의 결혼식날 들러리를 선 더키와 미시, 산드라
더키가 위 사진에서도 그렇고 훨씬 키가 크긔
그 키차이는 다 커서도 평생..!
머리도 눈도 밝은 색이고 잘 웃는 미시와 완전히 반대인 더키는 브루넷(머리와 눈이 짙은 색)이고 내성적이었긔.
그렇지만 미시와 더키는 영원한 단짝, 아주 사이 좋은 자매였어요.
네 자매 중에 미시와 더키 둘이 가장 친했습니다. 막내 베이비 비하고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죠.
미시는 9살 어린 베이비 비를 살짝 질투하는 마음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애는 자기가 우리 가족의 '벤야민'인 걸 알고 있었고, 그 부러운 입장을 유리하게 이용할 줄도 알았다.'
(*벤야민: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막내. 야곱이 무척 애중하게 여기고 귀여워했던 자식)
왼쪽부터 더키-미시-산드라-베이비 비
여왕의 손녀이고 황제의 외손녀인 이 에든버러 소녀들은 활기찬 어린시절을 보냈어요.
어머니 마리야 공작부인이 엄격한 규율 아래 자녀들을 길렀지만 진흙탕에 굴러도 놀 때는 확실하게 놀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입니다.
음울하고 딱딱한 영국 친척들은 에든버러 자매가 자라는 방식에 대해 놀라곤 했습니다.
영국인들은 아이들에게 냉담했고 그들이 착한 '작은 어른'이 되길 바랐습니다. 실수하거나 말썽부리지 않으면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요.
심지어 아버지마저도 해군으로 일하면서 딸들 곁에 거의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영국인- 아버지 애피
'선원이라는 단어의 모든 의미를 집약시킨 사람, 선원, 영국인, 그리고 왕자' by미시
제 생각엔 <군함 피나포어>의 아리아 "그는 영국 사람이라네He is an Englishman" 가 딱 애피의 주제가 같긔ㅋㅋ
미시가 평생 기억하는 아버지의 한마디는, 사랑의 말이나 가훈이 아닌
"도끼는 네 손가락을 한방에 날리겠지만 손가락을 톱질하기 시작하면 당장 그칠 수가 있어"였습니다...ㅋㅋㅋ
숲에서 놀다가 방해되는 나뭇가지 하나를 자를 도구를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의 답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톱을 줬겠죠?ㅋㅋ
미시는 아버지를 하도 자주 못 만나서 그의 머리색이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아버지의 초상화를 보고 더 밝은 머리색으로 그려져 있어서 혼란스러워 하기도 하죠.
에든버러 공작 가족의 초상화
(자녀는 장남 영 애피와 장녀 미시만 그려져 있어요)
미시가 '여왕 할머니'라고 부른 빅토리아 여왕을 만나러 간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하듯 할머니와 손주들의 애정 넘치는 재회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을 세워 놓고 도덕을 잘 지켰는지에 대해 여왕에게 보고를 하는 형식이었죠. 그들이 말썽을 부린 걸 알게 되면 할머니는 무척 충격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고 미시는 썼습니다.
할머니의 방에서 미시가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은 방안에 오렌지 꽃이 없을 때도 항상 향긋한 오렌지 꽃 향기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왕이 아침식사를 할 때면 커피 향과 갈색 비스킷의 맛있는 냄새가 났는데, 미시와 자매들의 탐욕스러운 작은 코가 열심히 킁킁댔지만 할머니가 매번 과자맛을 보여 주는 건 아니었답니다.
<미시 어머니의 이름을 딴 마리 비스킷>
영국과는 정반대로, 거대하고 환상적인 러시아 친척들은 온갖 응석을 다 받아주어서 미시가 어린이의 천국이라고 쓸 정도였어요.
어머니 공작부인이 짜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었기도 하고 러시아 황실이 더 가족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황후 할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앓아누워 있는 가냘픈 푸른 환영이었지만, 전 러시아를 절대권력으로 다스리는 짜르는 외손녀가 모래로 만든 케이크를 가져오면 얌얌 먹는 척을 해줄 정도였죠.
그리고 가죽과 담배의 향이 나는 키큰 대공들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보석을 장식한 대공비들은 조카에게 키스하고 안아주고 장난치며 마음껏 귀여워해 주었습니다.
영원한 러시아인- 어머니 마리야
'어머니의 영혼은 러시아의 것이었다. 어머니는 러시아의 일부다' by미시
미시는 러시아에 가면 먹을 수 있었던 딸기 과자를 평생 기억합니다. 싱싱한 딸기로 만든 작고 동그란 설탕절임이 조그만 종이 바구니에 담겨 나왔고 맛만큼이나 색도 아름다웠습니다. 맛을 보기도 전에 입안 가득 침이 괴었죠.
미시가 자매들에게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줄 때, 주인공들은 항상 이 딸기 설탕과자를 먹었답니다.
미시가 묵는 방의 테이블에는 과자 바구니와 비스킷 바구니가 하나씩 있었는데 안에 든 것은 매일 다른 종류로 바뀌었어요.
길쭉한 과일 드롭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미로운 맛이 나는 납작한 크림 캐러멜, 커피 설탕과자.
그리고 각 지방의 단것이 가득 든 큼직한 상자들도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의 특산물은 설탕에 절인 쫄깃한 과일 조각들, 키예프의 특산물은 밀가루처럼 곱고 새하얀 설탕가루로 뒤덮인 말린 과일 열매들이었습니다.
꼬마 미시에게 영국과 러시아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겠죠ㅎㅎ
영국 켄트 주의 이스트웰 저택에서 태어난 미시는 1886년 몰타 섬의 샌 안토니오 궁전으로, 1889년에는 독일 코부르크의 에딘부르크 성으로 이사합니다.
몰타로 간 건 아버지가 지중해 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어서고, 코부르크로 간 건 아버지가 백부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2세의 후계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 나라를 거치면서 미시는 '실크처럼 부드러운 금발, 반짝이는 파란 눈'의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나죠.
이 사진에는 더키의 미래 남편과 미시의 구혼자가 함께 있어요.
앞줄 왼쪽부터 큰아버지인 영국 왕세자 버티, 막내 베이비 비, 어머니, 오빠 영 애피, 미시, 미시 뒤는 아버지
베이비 비 뒤에 산드라, 그 옆은 고종사촌인 헤세의 에르니, 영 애피와 미시 사이에 더키, 그 뒤에 버티의 아들인 사촌 조지
어린 윈스턴 처칠이 "크면 미시공주님이랑 결혼할거야!!"라고 외치게 했던 소녀 미시의 진지한 찬미자는 바로 버티의 둘째아들인 사촌오빠 조지였습니다.
조지는 해군으로 복무하면서 에든버러 자매들 중 "디어 미시"에게만 항상 편지를 썼고 미시를 특별하게 대했어요.
빅토리아 여왕도 버티도 애피도 둘의 만남을 적극 찬성했지만 문제는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조지의 어머니인 덴마크 공주 알릭스와 미시의 어머니인 러시아 황녀 마리야는 이중으로 사돈 -동서지간이면서 마리야의 오빠가 알릭스의 동생과 결혼했음- 이었지만 서로 좋아하지 않았죠.
1892년 형의 죽음으로 할머니, 아버지 뒤를 이어 영국 왕위를 계승하게 된 조지는 정식으로 청혼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명령으로 미시는 '좋은 친구로 남아주세요'라는 편지를 쓰게 되긔.
조지는 절망에 빠지고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결국 미시를 놓쳤구나.'라고 안타까워합니다.
미시와 조지
어머니의 사촌인 러시아의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도 미시에게 청혼하지만 마리야 공작부인은 바로 거절했습니다.
"미혼 공주들은 어떤 지위도 없다. 공주들은 결혼해야만 한다. 스무 살이 넘으면 쓸데없는 생각만 늘지.." 라는 지론을 가졌던;; 공작부인은(정작 본인은 결혼해서 그닥 행복하지 않았는데도) 맏딸을 위해 결혼 시장에 뛰어들고 특이한 사냥감을 낚아올리죠.
1892년 독일의 황제이며 미시의 사촌오빠인 카이저(빌헬름 2세)는 마리야 공작부인과 미시, 더키를 빌헬름쇠헤 성으로 초대하긔
빌헬름쇠헤 성 정원 전경
독일의 카셀 지방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궁전과 정원이 정말정말 아름다워요ㅠㅠ
여름에만 위 사진처럼 저 길다란 수로를 따라 물을 트는데 아주 장관이래요.
더키는 15살, 미시는 16살로 아직 정식 만찬이나 파티에 나가기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둘은 무척 흥분했습니다.
미시는 자기의 새옷이 참 자랑스러웠다고 씁니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었는데 궁전의 꽃병에 드레스와 같은 색조의 난초가 꽂혀 있는 걸 발견하고 그걸 빼다가 어깨에 달고 있었죠.
빌헬름쇠헤에서 입었던 드레스는 아니지만.. 파티드레스 차림의 미시
만찬 자리에서 미시 옆에 앉은 사람은 루마니아의 왕세자 페르디난드였습니다.
그는 미시보다 열 살이나 많은 수줍고 소심한 청년이었고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라서, 미시와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었죠.
마리야 공작부인은 초대받았을 때 나오는 음식은 무조건 기분좋게 먹어라, 입에 안 맞아도 집에 와서 토해라, 옆사람과 즐겁게 대화하라고 딸들을 가르쳤답니다.
루마니아의 페르디난드('난도' 1865-1927)
귀가 튀어나온 게 콤플렉스였습니다. 그래서 빨강머리 앤에 나오는 해결책처럼 귀에 밴드를 둘러 놓았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하네요.
난도는 독일 황실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분가 출신이에요.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 레오폴트와 포르투갈 공주 안토니아의 둘째아들입니다.
숙부 카를은 1866년 루마니아 왕(카롤 1세)이 되었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형이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1889년 난도는 왕세자가 됩니다.
왼쪽부터 카롤 1세, 레오폴트, 난도, 카롤 1세의 아내 엘리자베트
얼마 후 미시는 어머니와 함께 다시 뮌헨으로 초대됩니다.
'우리는 둘 다 어렸고, 공중에는 사랑이 떠다니고 있었고, 봄이었다. 엄마는 행복했고 뭔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방에 분홍색 장미 꽃다발이 놓여 있었던 게 기억난다. 열린 창문 근처에서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달이 마을 위로 천천히 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사랑이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어느새 미시와 난도는 약혼하게 되었죠. 1892년 6월 포츠담의 노이어 궁전에서 약혼이 발표됩니다.
다만 신부 아버지는 같이 오지도 않았고 이 일을 모르고 있었어요.
약혼기간 중의 사진
'그가 어떻게 청혼할 용기를 냈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어쨌든 그는 물어봤고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하면서 내 운명을 봉인했고, 앞으로의 삶을 열었다. 아주 긴 삶의 문을.'
미시는 내성적인 난도를 보고 모성애를 느껴서 청혼을 받아들였대요. (미시형 탄수화물을 챙겼어야죠..)
조지의 청혼을 받았을 때 어머니들이 문제였듯이 이번에도 어머니들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병약해서 항상 온 집안의 관심을 끌었던 시어머니 안토니아는 작은아들 난도를 무척 사랑했어요.
안토니아는 겉으로는 아주 친절했지만 사실 미시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종교였습니다.
지크마링겐 가문은 가톨릭을 믿고 있었고 안토니아 역시 가톨릭 공주입니다. 그런데 루마니아는 동방 정교회를 믿습니다.
난도는 개종하지 않는 대신 자녀들은 동방 정교회 신자로 키우기로 합의하고 왕세자가 되었고요.
그래서 미시에게도 개종이 요구되지 않았고, 나중에 루마니아 왕실은 카톨릭 아버지와 신교도 어머니, 정교회 자식들이라는 특이한 구성을 이루게 됩니다.
시어머니는 이 신교도 며느리를 겨우 참아주고 있는 거였죠. 미시도 시어머니와 친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시어머니 안토니아 공주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미시는 시어머니가 왕년에 미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엄청 기대했다가 무지 실망하죠.
시어머니에 대한 평은 '미인이라며! 코가 너무 길다!!' (얼평 무엇.. 이해해 주시긔ㅠㅠ)
그래도 시어머니랑 같이 살 일은 없었지만, 숙모이자 시어머니 역을 맡은 엘리자베트 왕비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베트 왕비는 독일의 작은 공국인 바이트 출신이고 '카르멘 실바'라는 필명으로 시집을 내기도 했어요.
당시 루마니아 헌법은 루마니아 왕실이 루마니아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엔 정말 이상하죠.
특히 왕위 계승자의 경우 동등한 지위의 공주와 결혼해야 한다고 정해놓았어요.
그런데 숙모는 난도가 자기의 시녀인 루마니아 귀족 엘레나 버커레스쿠와 연애를 하도록 장려했습니다.
이유가 뭐냐고요? 왕비는 네 살 때 죽은 딸 하나 말고는 자식을 더 갖지 못했는데, 엘레나가 죽은 공주의 환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랍니다.
엘레나 버커레스쿠(왼쪽 검은머리)와 엘리자베트 왕비(키큰 오른쪽)
헌법이 이상한 건 시대가 그렇다 쳐도 왕비는 너무 이상하잖아요..
왕비는 난도와 엘레나를 자주 만나게 했고 난도는 숙모의 꾐에 넘어가서 엘레나와 사랑에 빠집니다.
카롤 왕은 격노하고 난도에게 왕위냐 사랑이냐를 택하게 하죠. 그러자 난도는 이번에는 삼촌에게 넘어가요. (인간 갈대임)
카롤 왕은 아내를 친정으로 추방했고 엘레나는 파리로 보내버렸습니다.
그래서 왕은 빨리 조카며느리감을 찾아야 했고, 마리야 공작부인은 맘에 안 드는 사윗감이 더 나올까봐 둘이 뒷공작을 한 것이었고요.
영국 왕실도 이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기에 공작부인은 딸을 희생제물로 만들었다며 은근히 비난을 받았습니다.
왼쪽부터 난도, 엘리자베트 왕비, 엘레나
그리고 카롤 왕은 빅토리아 여왕의 허락을 받으려고 영국을 찾아옵니다.
여왕이라고 일이 이렇게 된 거 허락을 안 할 수도 없고 울며 겨자를 먹어야죠ㅜㅜ
영국과 다른 유럽 국가의 입장에서 루마니아는 야만적이고 신비하고 '마치 달에 있는 것처럼' 낯선 나라였습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영국인인 애피가 시집가는 딸을 안고 눈물을 흘릴 정도였답니다.
걱정할 만도 한 게 루마니아 사람도 아닌 독일 사람이 덜컥 왕이 된 지 30년도 지나지 않은 신생 왕조였고, 발칸 반도의 정세는 항상 불안정했어요.
카롤 왕이 가져와서 선물한 루마니아 전통의상을 입은 미시
'그 옷들은 금실과 실크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자수가 되어 있었고 그림처럼 생생했다'
역시 옷을 선물받은 자매들과 함께(왼쪽부터 더키, 산드라, 미시)
결혼식 날짜는 누구도 불만 없이 다음 해로 결정되었습니다. 모두 미시가 너무 어려서 17살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문제는 결혼식 장소였어요. 신랑 신부의 종교에 따라 식을 두 번 올려야 했는데 가톨릭 예식을 먼저 하느냐 신교 예식을 먼저 하느냐는 큰 문제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자기 친손주들이 영국 윈저성의 성 조지 예배당에서 결혼하길 바랐지만 가톨릭 예식을 먼저 하게 해 줄 마음도 없었죠.
독일 코부르크 궁전에서 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일가친척 모두가 성 주인인 빅토리아 여왕의 시숙 에른스트 공작을 싫어해서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에른스트 큰할아버지는 폭군이었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자비하고 무관심하다.
내가 판타지소설을 쓴다면 큰할아버지는 오거로 등장할 것이다. 프록코트 단추를 꽉 채운 오거 말이다' by미시
결국 결혼식 장소는 1893년 1월 10일 '미시를 제외한 모두를 만족시키는' 지크마링겐 성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지크마링겐은 아늑한 작은 마을이었고 바위를 왕좌 삼은 독수리가 아래를 굽어보는 듯한 멋진 중세 시대의 성이 있었다'
남편의 고향에 대한 미시의 첫인상입니다.
결혼 전날 카롤 왕은 난도에게 "너의 Honigtag를 위해 축배를 들게 해주렴" 하고 말하는데 난도는 풀이 죽어서 비참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시끌벅적하게 파티가 이어지는 동안 미시를 옆으로 불러내서 "들었어요? 삼촌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해 주지 않아요"하면서 눈물을 글썽이죠
Honigtag는 신혼여행(허니문)이 아닌 신혼 나들이(허니데이)라는 뜻입니다. 카롤 왕은 조카에게 아주 엄했는데 신혼을 즐기게 해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어요.
물론 그때의 미시는 난도의 설명을 듣고도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루마니아의 카롤 1세. 그냥 봐도 까다로운 영감..
한편 마리야 공작부인은 딸들에게 흰 옷을 입히는 것에 대해 이상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시와 자매들에게 하얀 드레스는 금기나 다름없었습니다.
웨딩드레스는 미시가 아마도 생애 세 번째로 입은 하얀 옷이었을 것입니다.
(처음은 세례복, 두번째는 어머니 허락을 받고 코부르크의 어느 겨울에 허리띠에 빨간 장미를 꽂고서)
그리고 '하얀색은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색일 거야'라고 생각했던 미시에게 웨딩 드레스는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미시의 웨딩드레스랑 부케 스케치
진주를 수놓은 하얀 웨딩드레스는 광택이 없고 무거운 실크로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가슴과 허리, 드레스 자락에 머틀과 오렌지꽃의 작은 다발을 달았습니다.
말아올린 머리에는 격자 모양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쓰고 오렌지꽃 화관으로 베일을 고정시켰는데 어머니가 선물한 가벼운 튈 베일이었죠.
왕실 결혼식에서 신부는 보통 가족 대대로 물려내려오는 오래된 레이스 베일을 씁니다. 그래도 미시가 레이스 베일을 싫어했기 때문에 공작부인이 허락해주었습니다.
물론 미시는 신부가 어떻게 보여야 할지에 대해 아주 여러가지 낭만적인 상상을 했지만, 공작부인은 "허황된 생각!"들을 딱 잘라 버렸답니다.
시아버지의 결혼선물인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어머니의 결혼선물인 다이아몬드 십자가를 달아서 목에 건 미시는 금발의 고수머리를 이마에 늘어뜨린 가냘프고 어린 처녀라고 자신을 묘사합니다.
결혼식날의 미시
나중에 결혼사진을 보면서 미시는 자기가 "얼마나 어려 보이는지" 놀라죠.
(17살이니까 당연히 어리쥬.. 그리고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내내 느끼시겠지만 미시는 허영심이 많습니다ㅎㅎ)
아버지가 준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만든 겨우살이 가지 모양 머리장식과 터키석과 다이아몬드 장신구 세트, 어머니가 준 다이아몬드 루프 티아라와 장엄한 러시아 보석들,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준 에메랄드 브로치, 백부 버티가 준 터키석 팔찌, 웨일스 사촌들(옛 구혼자 조지 포함)이 준 터키석 브로치, 고모 루이즈가 준 사파이어 브로치, 외삼촌인 러시아 짜르가 준 사파이어 브로치 등등등등..
찬란한 결혼선물들을 보면서 미시는 자기가 '진짜 이브의 딸'이라고 생각하고, 어린 시절 스페인의 여왕이라고 상상하면서 놀던 것을 떠올립니다.
(공주도 이런 상상을 하는군요ㅎㅎ 그래도 실제가 될 확률이 있는 상상이긴 하긔)
결혼식은 두 번도 아니고 총 세 번이었는데 첫번째는 시민혼(요즘의 혼인신고), 두번째는 가톨릭 예식, 세번째는 신교 예식이었습니다.
가장 성대하게 치러진 가톨릭 예식
난도는 루마니아 군복을 입고 프로이센 황제 카이저가 전날 수여한 검은 독수리 훈장의 오렌지색 새시를 둘렀어요.
신교 예식
해군 목사가 주례를 섰습니다.
신혼여행은 정말 하루는 아니었고 이틀이었습니다..
지크마링겐 성 가까이의 숲속에 있는 왕실의 사냥용 별장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셋째 날에는 다시 성으로 돌아와 축하 무도회에 참석해야 했죠.
어느 무도회에서 미시
친정 코부르크에서 다시 며칠 시간을 보내고 난도와 미시는 루마니아로 출발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잠깐 들렀다가 기차를 타고 계속 달렸고, 난도는 미시에게 "30분 후면 도착하니 옷을 갈아입어요"라고 말했어요.
미시는 어머니가 장만해 준 첫만남 드레스를 입습니다.
'하얀 여우털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금자수를 놓은 보라색 벨벳 망토의 모피깃은 아주 커서 내 얼굴을 다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버드나무처럼 유록색인 벨벳 드레스를 입었고, 자수정이 박힌 작은 황금관을 썼는데 너무 작아서 내 밝은 곱슬머리에 가려졌다. 그래서 시녀들이 머리를 특별하게 말아 주었다.'
마침내 루마니아 땅을 밟은 미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귀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때 드레스는 아니지만 커다란 망토를 걸친 미시
그리고 코부르크에서 루마니아로 마리를 데려다 준 몬슨 부인은 이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어요.
왕세자비에게 인사를 하러 온 몬슨 부인은 비참하게 주저앉아 있는 미시를 보고 깜짝 놀라죠.
미시는 몸이 좋지 않다고 호소하고, 몬슨 부인은 설명을 듣고 웃었답니다.
그리고 미시는 그때의 대화를 적어두었습니다.
' "어지럽고 뭘 먹어도 속이 좋지 않아요. 냄새를 맡거나 소리만 들어도, 아니 무슨 색이든 보기만 해도 다 구역질이 나요. 난 완전히 변해버렸어요. 대체 왜 이럴까?"
"비전하, 정말 좋은 신호입니다. 모두들 기뻐하겠어요!"
"기뻐한다구요? 왜요? 내가 아프고 비참해서요?"
나는 너무 놀라서 부인이 미친 줄 알았다.'
이번에는 몬슨 부인이 놀랄 차례였죠. 미시는 성에 대해 전혀 배우지 못하고 결혼했습니다.
미시는 남편과 아내가 어떤 것인지 몰랐고, 더 심각한 건 임신이 뭔지 아예 몰랐다는 것이었어요.
(1893년 1월에 결혼해서 10월에 첫아이를 낳았으니 신혼 직후에 임신했는데 정말 환장이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임신이라는 단어를 아예 입에 올리질 않았고 빙빙 돌려 "거북한 몸 상태"라고 불렀다는데 진짜 너무한 일이죠..
그리고 아기를 낳을 때 루마니아인 의사들은 "여성은 이브의 죄를 갚기 위해 출산의 고통을 오롯이 느껴야 합니다"하고 멍멍 짖으면서 미시의 고통을 줄여 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요.
결국 마리야 공작부인과 빅토리아 여왕이 보낸 영국 의사가 우겨서 클로로포름을 사용합니다.
마취제인 클로로포름을 적신 천을 산모의 입에 대고 흡입시켜서 원시적인 무통 분만이 가능하게 만드는 거죠.
장남 카롤을 들고 있는 난도
미시는 카롤 왕의 이름을 따서 카롤이라고 이름붙인 첫아들을 낳았고 모두 아주아주 기뻐했어요.
의사가 "왕세자비께서 아주 순조롭게 해산하셨습니다"라고 보고하자 미시는 놀랍니다.
왜냐면 본인은 출산에 대해 '세상에 이런 고통이 있다면 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다시 뒷목을 잡게 되는데!! 미시는 출산 3개월 만에 두번째로 임신합니다.
카롤을 낳고 딱 12개월 후인 1894년 10월 장녀 엘리사베타가 태어나요.
이때는 어머니의 도착이 늦어서 미시는 마취제 없이 진통을 그대로 겪고 끔찍한 출산을 합니다.
그리고 딸이 태어나기 직전에 숙모 엘리자베트 왕비가 추방 2년 만에 돌아왔어요. 딸의 이름은 숙모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카롤, 엘리사베타와 함께
카롤 왕은 왕족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지키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고, 난도는 결코 반항하지 않고 항상 복종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당연히 미시도 개인으로서의 삶을 희생하기를 바랍니다.
미시는 가족 말고는(왕비가 돌아오기 전에는 왕과 남편뿐) 누구와도 교제할 수 없었어요. 완전히 '죄수 같은' 상태였답니다.
엘리자베트 왕비와 카롤 왕
그럼 숙모라도 같이 지낼 만한 사람이었느냐? 전혀 아닙니다.
로맨틱한 시를 쓰고, 조카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하도록 조종했던 왕비는 아주 작위적이고 과장된 예술가였거든요.
다들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길 정도였는데 어땠냐면 라파엘 천사가 자기 귀에 조언을 속삭여 준다고 주장했죠.
(몇년전에 노르웨이 공주가 천사를 믿는다고 난리였는데 독창적인 게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공중부양을 믿고 신앙만으로 병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시대의 안아키였습니다.
시를 쓰는 카르멘 실바(왕비의 필명)
이렇게 자기를 우상화하는 그림을 많이 그리게 했다고 합니다.
왕비는 매일같이 새하얀 베일을 쓰고 길다란 옷자락을 끌면서 왕궁이 있는 시나이아의 전나무 숲으로 갔고, 나무에 기대 바이올린을 켜는 걸 좋아했습니다.
숙모는 젊을 때 미시의 아버지 애피와 혼담이 오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피는 엘리자베트의 고향 바이트 공국에 찾아갔었는데, 엘리자베트는 너도밤나무 숲으로 그를 초대해서 바이올린을 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네 세살버릇이 여든까지..
엄숙한 영국인이었던 애피는 아주 난감했고 바이트를 떠나 다시는 돌아보려 하지 않았죠.
그후에 마리야 공작부인과 결혼해서 미시가 태어났어요ㅎㅎ
항상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자기 시를 읊어대고 일상이 연극이었던 숙모 왕비
공평하게 말하자면 미시 역시 숙모처럼 몽상가였고 연극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졌고요.
위의 숙모 사진처럼 실꾸리 갖고 사진을 찍은 나중의 미시(갈수록 사진 찍을 때 컨셉질이 늘긔)
이정도면 남편이라도 도와줘야 할 거 아닙니까?
미시의 동생 더키는 언니에게 정말 정확한 말을 한 적이 있었죠.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려면, 두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게 같아야 해"
그렇지만 난도와 미시가 공유할 수 있는 건 정말 거의 없었어요.
낭만을 좋아하고 아직 철이 덜 든 어린애였던 미시는 무뚝뚝하고 소심한 남자에게 맡겨졌습니다. 말 그대로 아무도 없이 고립된 상태로요.
미시와 난도가 함께 열정을 나누는 것은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하나는 꽃이었어요.
오스본 하우스의 아름다운 테라스에는 큰 목련나무가 있었다. 레몬 같은 향기가 나고 얼굴을 묻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꽃송이가 피었다. 그 꽃은 너무 귀중하고 이국적으로 보여서 어린 마음에도 감히 딸 수가 없었다.
목련이 시들어 꽃잎이 낡은 가죽처럼 갈색으로 변해도 향긋함은 여전했다.
황홀한 야생 들장미는 내 영혼을 깊이 만족시켰다. 분홍빛이고, 연약하고, 향기는 너무 섬세해서 요정 여왕이 직접 증류한 듯했다.
그리고 앵초가 있다- 작년에 떨어진 녹슨 빛깔 잎사귀 사이로 둥글게 솟아오르는 창백한 노란색 꽃무리.
오스본 하우스는 전형적인 영국식 오두막집이었는데 보리수로 뒤덮여 있고 창문에는 인동덩굴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보리수 꽃이 피고 인동덩굴이 자랄 때 그 향기는 나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했다.
미시의 꽃사랑은 제가 더 표현하지 않아도 되겠어요ㅎㅎ
두번째는 사진입니다. 둘 다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답니다.
이 글 쓰면서 미시 사진 찾는데 아주 차고 넘쳐서 후보가 많았어요ㅋㅋ
난도가 찍은 미시의 사진
하지만 꽃과 사진만으로 결혼생활을 지탱할 수는 없었죠. 미시는 너무너무 외로웠습니다.
드라이브라도 가자고 하면 난도는 주변에 운전할 곳이 없다고 답했고, 친구를 만나면 좋겠다고 하면 이 나라에서 친구를 가질 수는 없다고 타일렀어요.
그리고 모든 대화는 "삼촌이 그러시는데" 한마디면 종료되었습니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 미시가 너무 심하게 절망했기에 놀란 카롤 왕은 티파티를 열어주었답니다. 미시가 갖고 있는 후계자가 잘못될까 봐 걱정돼서요.
그 티파티에 초대된 사람 중에 젊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성직자, 군인, 법조인, 교수와 그 부인들이 왔고 질서정연한 예절에 따라 진행되었죠.
후에 미시는 스스로를 묘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돌벽을 뚫고 자라나온 나무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1896년 5월 미시는 루마니아에서 도망칠 기회를 잡습니다. 외사촌인 니키가 러시아 짜르 니콜라이 2세로 즉위하는 대관식이 열렸거든요.
그리고 대하기 힘든 숙모가 이번에는 도움이 되었답니다. 숙모는 미시의 의상을 책임졌어요.
'그 시인 왕비는 내 싱그러운 젊음, 금발머리와 파란 눈에 영감을 받아서 나를 동화 속의 요정 공주님으로 꾸몄다.
왕비는 들장미 꽃가지를 수놓은 황금빛 드레스와 망토를 주문했다. 드레스 뒷자락에는 천 장의 장미 꽃잎이 수놓여 있었다.
다이아몬드 왕관 아래 쓴 베일에도 장미꽃잎을 수놓았다. 루마니아에서 만든 이 드레스는 나에게 아주 잘 어울렸고 나는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사진- 앉아 있는 미시와 마리야 공작부인
미시 뒤 왼쪽부터 난도, 더키의 남편인 사촌 에르니, 애피 공작, 더키, 영 애피
(양쪽 끝이랑 가운데에 있는 제복 3명은 공주들의 트레인을 드는 시종)
그리고 지금껏 어린애였던 미시는 러시아에서 온갖 찬사를 받으면서 마침내 자신의 힘을 찾아냅니다.
그건 바로 아름다움이었어요.
황금색 머리, 사파이어 빛깔의 눈, 진주같이 고운 안색. 미시는 마치 보석으로 만들어진 사람 같았을 것입니다.
'나는 다섯 살에도 이브의 진정한 딸이었다. 나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사랑했고 사실 모든 형태의 아름다움을 숭배했다'
러시아에 있는 동안 미시보다 두 살 어린 외사촌동생인 보리스 블라디미로비치 대공과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퍼집니다.
보리스는 대관식이 끝나고 가을에 미시의 오빠 영 애피와 함께 루마니아를 찾아왔어요.
그는 후에 미시를 '첫사랑, 사랑스러운 꿈'으로 언급합니다.
의자에 기대 있는 영 애피, 미시, 미시를 바라보는 보리스
자유를 맛본 후 돌아온 미시는 삼촌과 숙모에게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루마니아 귀족들과도 만나고, 1897년에는 더키가 찾아와서 같이 가장무도회를 열기도 해요.
카롤 왕이 조금 이해가 가는 건.. 루마니아 귀족층은 방종하고 무분별한 불륜이 성행했기 때문에 빅토리아 여왕이 미시의 시녀를 고를 때 아주 조심해 달라고 당부했고, '순결하고 존경받을 만한' 부인을 찾으려고 귀족들을 탈탈 털었는데 겨우 한 명을 찾았다고 하거든요.
무도회에서 자매는 서로 뭘로 꾸밀지 비밀로 했는데, 알고 보니 똑같은 인물로 가장했다고 합니다.
연극에 나오는 주인공 공주로 꾸몄어요. 미시는 붉은 장미로, 더키는 진줏빛 백합으로 장식했다는 것만 달랐답니다.
가장의상이 너무 길어서 춤출 때는 옷을 바꿨는데, 미시는 태양이고 더키는 달로 분장했습니다.
그래도 이 무도회에 삼촌과 숙모도 와 주었어요.
숙모는 새빨간 옷을 입고 시인 단테로 분장했고
삼촌은 감히 분장까지 바라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이후로 입지 않았던 기병대 제복을 입어주는 큰 양보를 했었답니다.
태양으로 분장한 미시
난도는 장티푸스에 걸려서 거의 죽을 뻔했는데, 난도가 완쾌한 다음에 미시는 첫 연애를 합니다.
게오르게 칸타쿠지노('지지')는 옛 루마니아 왕가의 서출 후손으로 군인이었습니다.
보리스와는 소문으로 그쳤을지 모르지만, 지지와 미시의 연애는 확실히 선을 넘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둘은 밤중에 촛불을 켜놓고 춤추고, 말을 타고 함께 숲을 산책하고, 공공연하게 손을 잡고 눈을 마주보았어요.
말을 타는 미시
미시는 승마를 사랑했지만 카롤 왕은 위험하다고 아주 싫어했고, 임신을 방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왕과 국가 입장에서 미시의 존재이유는 후계자를 낳는 것이었으니까요.
놀러다니고 경솔한 연애사건을 일으키면서 미시는 아이들을 기르기에는 어리석고 믿을 수도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이 틈을 타서 숙모는 카롤과 엘리사베타를 미시에게서 빼앗아 갔어요. 둘은 삼촌과 숙모의 슬하에서 자라게 됩니다.
항의하는 미시에게 카롤 왕은 미시도, 아이들도 모두 국가의 공공재산이라고 못 박습니다.
카롤의 가정교사는 미시를 무시하고 아들과 잘 만나지도 못하게 막았어요.
1899년 오빠 영 애피가 자살하면서 미시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루마니아로 돌아왔을 때 카롤 왕은 지지를 나라 밖으로 추방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죠.
난도, 카롤 왕, 아들 카롤
이때 세 번째로 임신한 미시는 친정 코부르크로 가서 아이를 낳고 싶다고 청합니다. 그 요구는 왕을 펄펄 뛰게 만들었어요.
왕실 자녀가 태어날 때는 증인이 있어야 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외국에서 낳는다는 건 들어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시는 굴하지 않고 나이든 삼촌에게 맞섰고 마리야 공작부인도 딸의 편을 들었습니다.
확실히 무리한 부탁이었지만 결국 미시는 승리를 쟁취했어요.
미시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친정에서 아이를 낳고 싶어했는지는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치열한 논란의 초점입니다.
바로 아이의 친부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죠. 남편 난도? 사촌 보리스 대공? 애인 지지?
코부르크로 왔지만 미시는 뱃속에 있는 아이가 '눈물의 아이'가 될 거라고 예상합니다. 매일매일 밤마다 눈물을 흘리며 잠들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1900년 1월 세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이 딸은 기쁨과 햇빛의 아이가 되었습니다.
둘째딸에게는 4대째 내려오는 마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태어난 첫날부터 평생 동안 마리는 미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미시는 카롤의 가정교사를 해고할 때까지 친정에서 버텼고 이번에도 승리했습니다.
미뇽과 미시 모녀
'갓난애일 때부터 다정하고 미소짓는 아이, 평화와 희망의 상징'
미시와 난도는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코트로체니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미시는 코트로체니 궁을 비잔틴, 아르누보, 라파엘 전파 스타일로 꾸며놓았어요.
전혀 절제하지 않은 화려함이 궁전을 뒤덮어서, 인테리어는 환상적인 연극의 배경 같았고 장식품은 모두 무대 소품같이 보였습니다.
오래전에 타 봤던 오리엔트 특급열차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앨리스처럼 눈을 비볐다.
그래도 광채가 눈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방안은 완전히 황금빛이었고 문자 그대로 모든 것에 금박이 입혀져 있었다.
주위의 벽, 아치형 천장과 식탁, 의자, 캐비닛에는 포도덩굴이 조각되어 있었다. 구석구석에 놓인 황금, 구리, 청동 그릇마다 꽃이 흘러넘쳤다.
사슬에 매달려 있는 금과 은으로 만든 램프들은 천장에 어떻게 걸려 있는 건지 신기했다. 진짜 보석으로 장식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살짝 열려 있어 햇빛이 새어 들어왔다.
by코트로체니 궁의 손님
그리고 미시는 백합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오스본 하우스의 현관은 언제나 분홍빛 반점이 나 있는 하얀 백합꽃으로 가득했다. 그 향수처럼 진한 향기를 맡으면 나는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꽃들은 계단 옆에 놓인 커다란 단지에도 꽂혀 있었는데, 우리가 오스본 하우스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는 건 얼굴이 꼬마 인디언들처럼 꽃가루로 얼룩질 때까지 코를 백합에 파묻는 것이었다.
와이트 섬의 스위스 코티지에서 나는 마돈나 릴리와 처음 마주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꽃은 본 적이 없었다.
고상하고, 위엄 있고, 성화에 자주 등장해서 그런지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꽃.
그리고 그 향기라니! 무분별할 정도로 달콤한 향기.
스위스 코티지의 정원에서 이 꽃을 발견한 후로 나는 정원을 만들 때마다 꼭 마돈나 릴리를 심었다. 내 무한한 기쁨 속에서 그들은 빛의 하얀 기적처럼 영광스럽게 자라났다.
미시가 그린 백합
루마니아의 여름 왕궁인 시나이아의 펠레슈 성 전경
카르파티아 산맥의 장엄하고 거대한 숲 속에 숨어 있는 보석입니다.
미시는 카롤 왕이 꾸민 펠레슈 성의 알트도이체(Altdeutsche: 중세 독일) 스타일 인테리어가 너무 장중하다고 생각했어요.
왼쪽은 음악실의 스테인드글라스, 오른쪽은 현관과 계단
시나이아의 숲에 미시를 위해 지은 나무집, '공주의 둥지'
여러 그루의 거대한 전나무 사이에 걸쳐져 있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곳인데 미시가 무척 좋아했던 곳이죠.
그런데 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 어느날 심한 폭풍이 치는 바람에 무너져 버렸다고 합니다.
연결다리에 미시의 하얀 실루엣이 보이긔
시나이아의 펠리쇼르('작은 펠레슈') 성
카롤 왕이 따로 살라고 지어준 샬레(스위스식 오두막) 스타일 궁전이에요. 마리는 아담한 거처를 왕궁보다 더 좋아했답니다.
펠리쇼르의 '골든 룸'
금박을 칠해놓았습니다. 저 문을 열면 돌로 만든 발코니가 나와요.
삼촌과는 서로 좀더 잘 이해하게 되었지만 미시는 1902년 백부 버티의 대관식에 참석하러 영국으로 가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미시는 그 여름을 영국에서 보냈고 두 명의 소중한 친구를 얻었죠. 월도프와 폴린 애스터 남매였는데, 애스터 가문은 미국 제일의 부자였고 영국으로 와서 귀족 작위를 받은 집안이었습니다.
월도프 애스터
미시는 돌아오자마자 가을에 애스터 남매를 초대했고 이후로 둘은 매년 미시를 찾아오게 됩니다.
월도프와 미뇽
미시는 애스터 남매와 함께 말을 타고 루마니아의 평원과 산맥을 누볐고 진정한 루마니아 사람들, 즉 농민들을 처음 만나보았죠.
그리고 루마니아의 전통의상인 선명한 색상의 자수 드레스를 즐겨 입기 시작했습니다.
마리 왕비는 루마니아 농민들이 입는 화려한 자수가 놓인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길고 하얀 부드러운 베일, 빨강과 파랑 비단실과 금실로 복잡하고 오래된 패턴의 자수를 놓은 하얀 튜닉 블라우스, 금빛 스팽글을 가득 단 소매, 무거운 금자수를 놓은 빨간 오버스커트.
1903년 8월 넷째 아이 니콜라에가 태어났습니다.
니콜라에는 러시아 짜르 니콜라이 2세의 이름을 땄고, 짜르와 똑같이 니키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됩니다.
월도프 애스터가 친부라고 소문이 자자했는데 미시는 폴린에게 편지를 써서 그 소문을 부정했어요.
(니키는 커갈수록 아버지를 찍어낸 듯이 닮아서 논란이 알아서 가라앉긔)
1904년 폴린이 결혼하고, 1906년에는 월도프가 낸시 랭혼과 결혼하면서 우정에도 금이 갑니다.
미시는 월도프에게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매일 편지를 썼는데, 신혼여행 중에 그걸 알게 된 낸시는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죠(당연히).
그후로 미시와 월도프는 드문드문 편지로만 연락했지만, 두 사람은 평생 좋은 추억의 벗으로 남았답니다.
미시 왼쪽은 미뇽, 오른쪽은 니키
니키는 미뇽의 밝은 금발머리에 혹해서, 아기일 때 항상 누나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곤 했답니다. 애착머리..ㅠ
어느날 미뇽이 문에 머리를 무딪치는 걸 보고 놀란 미시가 딸을 달래주자 미뇽은 괜찮아요! 니키가 잡아당기는 것보다는 덜 아파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미뇽
1907년 루마니아에서 농민 폭동이 일어납니다. 미시와 아이들, 귀족 여성들은 모두 시나이아로 도망쳤죠.
미시는 귀족들의 별장에 들렀다가 아내를 만나러 온 바르부 슈티르베이 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르부 슈티르베이(1872-1946)
루마니아의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인 바르부를 만나고 그와 사랑에 빠지면서 미시의 인생은 제2막을 시작합니다.
바르부 슈티르베이는 미시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미시는 아주 훌륭한 학생이 되었죠.
바르부와 미시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는 사람들이긔..난리도 아니긔
바르부 공의 아내 나데이다와 미시
난도는 결혼 초반부터 바람을 피웠으니 무시하더라도 나데이다는 미시와 남편의 사랑을 인정해줬죠. 생불이긔ㅠ
1909년 1월 미시는 다섯 번째 아이, 가장 사랑하게 된 아이를 낳았습니다.
딸이었고, 일레아나라고 이름지었어요.
위의 아이들은 모두 가족의 이름을 따서 지었기에 이번에는 자기가 이름을 붙이겠다고 미시가 우겼긔
그리고 일레아나도 바르부 공의 아이냐 난도의 아이냐 생부 논란에 휩싸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시는 딸에게 감탄할 뿐이었습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눈이 커다랬는데 별 같은 눈을 가졌다고 칭찬하고, 지금까지 낳은 애들 눈이 다 파란데 일레아나만이 미시의 '파란 눈의 아이'였죠.
'미뇽은 내 육신의 아이, 일레아나는 내 영혼의 아이다.'
1913년 1월에는 미시의 마지막 아이가 태어났어요. 아들이었고 루마니아의 중세 영웅을 따서 미르체아라고 이름붙였습니다.
미르체아는 생부 논란이 없습니다. 왜냐면 확실히 남편의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죠.
미시도 난도도 눈이 푸른색인데 미르체아는 '갈색 눈의 아이'라고 알려졌습니다. 바로 바르부 공처럼요.
일레아나도 친부 논란이 있지만 바르부가 미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르체아에게만 애정이 철철 흐르는 말투를 쓰고, 일레아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덤덤하게 언급한다고 합니다.
근데 일레아나가 미르체아랑 많이 닮았고 위의 언니 오빠들이랑은 안 닮아서.. 저는 둘 다 바르부 아이 아닐까 싶어요.
미르체아는 일레아나랑 엄청 친했답니다.
잠깐 여섯 아이들을 둘러보고 가볼까요ㅎㅎ
윗줄 왼쪽부터 카롤(&엘리사베타), 엘리사베타, 미뇽
아랫줄 왼쪽부터 니키, 일레아나, 미르체아
루마니아 전통의상을 입은 아이들
엘리사베타랑 카롤, 미뇽
니키, 엄마랑 함께 있는 일레아나
1. 카롤 2세(1893-1953)
금발머리, 푸른 눈. 엄마의 얼평으로는 '입술이 너무 두툼하지 않았다면 더 미남이었겠지'
어머니와 어렸을 때부터 떨어져 살면서 후계자로 교육받았는데 단단히 잘못 자랍니다.
미시를 동경하면서도 서먹서먹한 관계로, 잘난척이 심하고 어린 폭군이었죠.
2. 엘리사베타('리자베타', '리지' 1894-1956)
금발에 푸른 눈. 엄마의 얼평은 '고전적인 아름다움, 커룹 천사처럼 아주 동그란 얼굴에 눈이 빛나고 태어났을 때부터 예뻤다'
하지만 엘리사베타는 이상할 정도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고 괴팍하고 엄숙한 성격이었습니다.
3. 마리아('미뇽' 1900-1961)
역시 금발에 푸른 눈이고 온화하고 유순해서 항상 남을 돕는 마음 고운 아이였습니다.
엄마의 얼평은 난리도 아닙니다;;
'오빠와 언니보다 더 달콤하고, 더 행복하고, 더 예쁜 아이. 달콤한 향기가 나는 분홍빛 작약꽃 같은 내 딸.
아마빛 고수머리에 연분홍 조가비 같은 안색, 큐피드의 활처럼 매력적인 입꼬리, 길다란 속눈썹이 드리워진 졸린 듯한 푸른 눈시울.'
4. 니콜라에('니키' 1903-1978)
또 금발에 푸른 눈. 장난기가 많고 활발한 아이였고, 회상록에 얼평은 없지만 미시가 가장 귀여워하는 아들이랍니다.
5. 일레아나(1909-1991)
다갈색 머리에 검푸른 눈.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고 성경에 나오는 말 그대로 '그 생모가 아끼는 딸(아가 6:9)'이었습니다.
미시의 후반생에 소중한 동반자가 되어준 딸이죠.
카롤은 여동생 일레아나를 아주아주 귀여워했고 가장 특별하게 여겼답니다.
카롤은 1913년부터 프로이센 군대에 입대해 군사훈련을 받았습니다. 1914년 2월, 러시아는 루마니아 가족을 초대합니다.
(러시아 짜르 니콜라이 2세는 미시의 외사촌 오빠이고 황후 알렉산드라는 고종사촌 언니긔)
그리고 6월에는 러시아 가족이 요트를 타고 루마니아의 콘스탄차 항구에 찾아와서 이틀간 놀고 가고요.
짜르의 아이들인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샤, 알렉세이도 전부 데리고 왔습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알렉세이와 니콜라에
왼쪽부터 앉아 있는 마리야, 카롤왕, 아나스타샤, 알렉산드라, 타티야나, 미시, 니콜라이 2세, 미르체아를 안고 있는 올가
아나스타샤 뒤쪽부터 미뇽, 카롤, 일레아나, 난도, 엘리자베트 왕비
얼평이 없으면 미시가 아니겠죠.. 미시는 그때 한창 햇볕에 그을려 있던 러시아 황녀들을 보고 놀라면서 박한 평가를 합니다.
'올가는 얼굴이 너무 넓고, 타티야나는 너무 내성적이고, 마리야는 입이 너무 넓고, 아나스타샤는 얼굴에 인상적인 데가 하나도 없어'
그래도 알렉세이는 깔 데가 없었는가보긔ㅠㅋㅋ
알렉세이와 일레아나, 니콜라에
많은 망상을 양성한 사진 ㅎㅎ
루마니아와 러시아가 만난 건 1893년생인 미시의 장남 카롤과 1895년생인 니콜라이 2세의 장녀 올가의 혼담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들은 전적으로 아이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죠. 사실 미시는 혈우병에 대해 남몰래 걱정하지만 말입니다.
두 번 만나는 동안 둘 사이에서 어떤 호감도 없었기 때문에 약혼은 없었습니다.
루마니아로 항해해 오면서 올가는 결혼에 대해 묻는 가정교사에게 "아빠는 내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 강요하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나는 러시아 사람이고 러시아에서 평생 살 거예요"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만찬 때 카롤 옆에 앉게 된 올가는 얼굴이 빨개졌고, 올가의 여동생들은 언니를 온갖 방법으로 놀렸다고 하네요 ㅎㅎ
올가와 카롤
올가의 소망이 이루어지긴 했죠.. 저는 카롤이랑 결혼하느니 차라리 원래 결말이 나은 거 같아요ㅜㅜ
러시아 가족을 배웅하고 나니 7월이 되었고 이때부터는 한가하게 혼담에 신경쓸 때가 아니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과 연합국(영국, 프랑스, 러시아)으로 서방 세계가 갈라져 버렸습니다.
독일 출신인 카롤 왕과 엘리자베트 왕비는 독일 편을 들자고 주장하지만 루마니아 신하들은 거부합니다.
난도 역시 심정적으로 독일에 기울어졌고 영국과 러시아의 반반 혈통인 미시는 가족 사이에서 외딴 섬이 되었어요.
10월 나이든 카롤 왕이 사망하면서 난도와 미시는 루마니아의 군주가 됩니다.
1916년 3월 엘리자베트 왕비도 사망하면서 미시의 젊은 시절을 지배하던 '삼촌과 숙모'는 사라졌습니다.
난도는 고향 독일 편을 들고 싶은 마음과, 현재 조국인 루마니아의 국익을 지켜야 하는 마음 양쪽에 시달렸고 결국 루마니아를 택합니다.
루마니아가 헝가리와 놓고 다투던 트란실바니아의 땅, 러시아와 예전부터 다투던 베사라비아 등 영토를 받기로 약속하고 연합국 편에 서죠.
독일 황제 카이저의 반응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족보에서 난도의 이름을 싹싹 지우는 것이었습니다..
빌헬름 2세('카이저')
미시에게는 개인적인 불행이 닥쳐옵니다. 10월, 세 살이 된 막내 미르체아가 장티푸스에 걸린 것이에요.
미르체아는 '일라나'라고 옹알이 소리로 누나 일레아나를 찾으면서 비명을 지르고 또 질렀습니다.
의사들은 아이에게 더 해 줄 것이 없었고 며칠간 병마에 시달리던 미르체아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들이 죽어갈 때 미시 곁에는 이미 공공연한 사이인 바르부 슈티르베이가 함께하고 있었죠.
미시는 참혹한 슬픔에 몸을 맡길 시간도 없었습니다. 독일군이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로 향해 진군해 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프테아 별장의 예배당
미르체아가 지내던 곳, 앓아눕고 결국 세상을 떠난 곳은 왕궁이 아닌 바르부 공의 별장인 부프테아였습니다.
12월 부쿠레슈티가 점령되면서 왕실은 몰다비아 지방의 이아시로 도망쳤고, 임시정부를 세웁니다.
이아시는 물자가 모자라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합니다. 왕족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8살 난 일레아나는 필수 영양소 부족에 시달리죠.
언제나 소극적이었던 난도는 크게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미시는 그를 격려하고 국민의 사랑을 받게 도왔어요.
그리고 화려한 의상을 하얀 적십자 간호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1차대전을 겪는 루마니아에서 미시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미시는 언제나 어디서나 국민 곁에 있었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무나 지쳤다고 쓰지만 힘든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드러내지 않습니다.
전염병이 돌면 맨손으로 병자들을 달래주고, 보급품을 얻으려고 자신과 친척인 모든 군주들에게 편지를 보냈죠.
마음껏 인생을 즐기던 젊은 왕비는 이제 삼촌이 주장하던 조국에 대한 의무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루마니아인들은 미시를 '마마 레지나(어머니 왕비님)', '부상자들의 어머니', '날개 없는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1917년 3월 러시아 짜르 니콜라이 2세는 양위했고 11월에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요. 1918년 6월 위에서 봤던 러시아 가족은 모두 총살당했습니다.
미시는 이렇게 씁니다. '러시아 군주들은 국민들에게 마치 신 같은 숭배를 받는다. 그러면 사랑받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텐데 말이다'
1918년 1월 러시아가 연합국에서 빠지면서 루마니아는 발칸 반도에서 혼자가 됩니다.
이미 수도를 점령당한 상황에서 애타게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응답하는 국가는 없었고, 3월 루마니아는 결국 독일과 강화를 맺습니다.
미시는 홀로 끝까지 반대해서 '루마니아에서 유일한 남자', '전사 왕비'라는 평을 듣게 되죠. 남편과도 엄청나게 싸웠지만 소용없었습니다.
난도도 이해를 해줘야 하는 게.. 다같이 죽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ㅠㅠ
국왕 부부는 왕실 별장으로 물러났는데 개인적인 불행이 또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큰아들이자 왕세자인 카롤은 당연히 루마니아군에 입대해 있었죠. 그는 탈영해서 루마니아 평민인 지지 람브리노와 사랑의 도피를 합니다..
그리고 비밀결혼까지 해버려요. 전쟁중에 환장이죠ㅜㅜ
난도는 아들을 높은 산 위에 있는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가둬 버렸습니다. 총리는 왕세자를 반역죄로 고소하려 했고, 카롤의 결혼은 결국 무효화되었습니다.
카롤과 지지
1918년 11월 루마니아는 다시 군대를 동원하고 독일군에 맞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이저가 퇴위하고 마침내 4년에 걸친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이제 루마니아의 과제는 연합국에 독일과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유리한 결실을 얻는 것이었죠.
그렇지만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한 브러티아누 총리가 호감을 사지 못했기에 미시는 세 딸을 데리고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파리에서 환영받는 미시
미시의 매력은 파리를 사로잡았답니다.
파리에 체재하던 미시는 영국의 초청을 받아 마침내 옛 구혼자인 사촌오빠 조지 5세와 조지의 아내 메리 왕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조지는 한때 미시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서로에 대해 놀랐다고 합니다ㅎㅎ
미시는 영국인들의 눈에 너무 연극적이고 화려했고, 미시의 눈에는 조지와 메리는 근엄함이 지나쳐 스스로를 속박하는 것으로 보였고요.
왼쪽부터 미시, 조지, 난도, 메리
이 사진은 나중에 난도도 같이 영국에 갔을 때긔.
회의 결과는? 루마니아는 원하는 영토를 모두 얻었습니다.
국토가 두 배로 늘어나면서 루마니아인들이 염원하던 <위대한 루마니아>가 이루어진 것이에요.
루마니아에서 난도와 미시는 끝없이 사랑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미시는 아이들의 교육을 챙기기 위해 엘리사베타는 파리의 여학교, 미뇽은 영국의 여학교, 니키는 영국 이튼 학교에 보냈어요.
일레아나는 아직 어려서 데리고 있었는데 전후복구에 몰두하기도 바쁜 상황에서 망할 큰아들이 또 사고를 칩니다.
카롤이 다시 지지랑 동거를 시작했고, 왕세자 자리를 버리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하죠.
카롤은 의무는 모르고 권리만 주장하는 인간이라 난도가 공무를 맡기려고 하자 자해를 할 정도였답니다.
그리고 지지가 아들 미르체아를 낳는데 카롤은 편지 한 장을 보내서 지지를 버렸습니다.
지지와 아들 미르체아
물론 부모가 원하던 결과이긴 했지만 카롤 참.. 미시는 지지에게 계속 생활비를 보내주었어요.
루마니아 왕실은 전쟁 중에 금괴와 보석, 예술 수집품 등을 러시아에 맡겨놓았습니다. 혁명이 일어날 줄은 몰랐었죠.
승리 전에 연합국에서 발을 뺐던 러시아 혁명정부는 이 재산을 돌려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보석을 요구하지 않으면 베사라비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미시는 이때만은 루마니아 왕비가 아닌 개인으로서 거절했습니다.
'그건 내가 가진 모든 것이었단 말이다' 분노에 가득차서 미시는 씁니다.
-미시가 잃어버린 보석 일부 사진들-
아버지가 준 터키석과 다이아몬드 세트. 티아라, 귀걸이, 목걸이, 브로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혼녀로서 찍은 첫번째 공식 사진에서 미시는 이 세트를 장식했어요.
'반다이크 풍 오래된 레이스가 달린 무르익은 자두 빛깔 벨벳 드레스를 입었고 청록색이 도는 터키석 장신구와 색이 참 잘 어울렸다'고 미시는 회상합니다.
어머니가 준 다이아몬드 루프 티아라.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 때도 이걸 쓰고 갔었죠.
숙모에게 물려받은 진주와 다이아몬드 티아라
십자가 티아라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 밴도
난도는 안타깝게 여겨서 잃어버린 보석 대신 새 보석들을 채워주었습니다.
1919년 까르띠에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스리랑카산 사파이어를 펜던트로 만들었고, 스페인 전시회에 내놓았어요.
478.68캐럿! 지금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크기의 사파이어
미시의 고종사촌인 스페인 왕비 에나는 이 사파이어를 직접 걸어 보았고 갖고 싶어했지만 남편 알폰소 13세는 딱잘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좀더 너그러운 남편인 난도가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 1921년 미시에게 선물했죠.
손에 든 거 보니 정말 크긔.. '마리 왕비 사파이어'라고 불리는 보석입니다.
새 진주&다이아몬드 티아라와 함께 사파이어를 목에 건 미시
'왕비는 거대한 사각형 다이아몬드 체인에 달걀만한 사파이어를 달고 있었다' by구경꾼
1922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미르 대공비의 으리으리한 사파이어 티아라를 사들입니다.
블라디미르 대공비는 미시의 외숙모이고, 젊은 시절 미시의 불륜 상대로 소문났던 보리스 대공의 어머니긔
러시아 제정이 멸망한 후로 러시아 황족과 귀족들은 보석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어요.
사파이어 티아라와 펜던트를 장식한 미시의 초상화
이제 좀 숨을 돌리면서 좋은 소식이 쏟아집니다.
1921년 2월 장녀 엘리사베타가 그리스 왕세자 게오르기오스와 결혼했어요.
그리고 3월에는 카롤과 게오르기오스의 동생인 엘레니 공주('시타')가 결혼합니다.
미시는 환희에 차서 씁니다. '카롤은 구원받았다!'
아들이 정신을 차리고 왕실 공주와 결혼하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카롤과 시타
10월에는 시타가 아들 미하이를 낳았습니다.
얘가 일곱 달 만에 태어나서 약혼기간 중에 혼전임신한 게 들통나긴 했지만 카롤이 정신차렸는데 뭔들..
그런데 그리스 왕실은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계속 왕실이 쫓겨났다 돌아왔다 했고, 시타의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가 살아 있었지만 아들들이 번갈아 가며 즉위하는 형국이었어요.
1922년 1월 시타는 남편과 미하이를 데리고 그리스로 갔습니다. 2월에 카롤은 돌아왔지만 시타는 4월에야 동생 이리니 공주를 데리고 왔죠.
그리고 남편이 그새 여배우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걸 알게 됩니다.
6월에는 미뇽이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다르와 결혼하면서 미시는 '발칸 반도의 장모'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왼쪽부터 이리니-일레아나-미시-미뇽-시타
1922년 10월 난도와 미시는 트란실바니아에서 <위대한 루마니아>의 왕과 왕비로서 중세풍의 대관식을 올렸습니다.
미시는 루비, 에메랄드, 터키석, 월장석이 박힌 옛 왈라키아 왕관을 재현했고,
난도는 루마니아가 전리품으로 얻은 투르크 제국의 총들로 만든 왕관을 썼어요.
미시의 대관식 왕관 복제품
대관식날 사진- 왼쪽부터 엘리사베타, 미시, 미시의 막내동생 베이비 비, 둘 가운데 앉아 있는 미뇽
그리고 미뇽이 장남 페타르를 낳는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스 왕비 엘리사베타는 조카의 대모로 초대를 받았는데, 동생이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제부 알렉산다르 왕을 유혹해서 미뇽이 격분했다고 합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세례식 사진
왼쪽부터 알렉산다르, 엘리사베타, 난도, 영국의 요크 공작 부부(후의 조지 6세 부부, 현재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부모)
미시는 페타르를 안고 앉아 있어요.
세례식 3개월 만에 그리스 왕정이 또다시 폐지되면서 엘리사베타는 남편과 함께 루마니아에서 살게 됩니다.
나쁜 일은 절대 혼자 오지 않죠. 카롤은 빨간 머리, 녹색 눈의 루마니아 평민 여성인 엘레나 루페스쿠('마그다')와 사랑에 빠집니다.
난도는 마그다를 국외로 추방했고, 때마침 영국의 알렉산드라 왕비가 사망하자 카롤은 장례식에 참석하러 갔어요.
일레아나는 영국에서 여학교에 다니던 중이었는데 카롤은 일레아나를 데리고 루마니아로 귀국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출발하기로 한 날, 동생을 만나지 않고 파리행 열차를 타고 마그다와 재회해서 이탈리아로 도망쳐버렸습니다.
마그다와 카롤
어머니가 애타게 돌아오라고 빌었지만 카롤의 답은 '그냥 제가 죽었다고 하세요' 였으니..ㅠ
결국 1926년 1월 난도는 카롤의 요구대로 왕세자 자리를 박탈하고 어린 미하이를 다음 왕위 계승자로 확정했습니다.
이번엔 지지가 나서서 국가를 위해 혼인무효에 합의했는데 이제 카롤이 왕위를 포기했으니 혼인 무효를 무효로 하자며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요. 혼란하다 혼란해ㅜㅜ
카롤과 시타는 1928년 이혼했습니다.
시타와 카롤
마그다는 냉정하고 위엄있는 인상의 시타와 정반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큰아들 때문에 속이 까맣게 탄 미시는 1926년 10월 미국 친구인 사업가 새뮤얼 힐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힐이 왕비에게 바치는 메리힐 박물관을 설립했기 때문이에요. 미시는 일레아나와 니콜라에를 데리고 미국을 방문합니다.
미시는 메리힐 박물관에 코트로체니 궁전의 가구와 왕실 가족의 초상화, 대관식 왕관 복제품을 기증했답니다.
메리힐 박물관
코트로체니 궁에 있던 백합꽃 무늬 캐비닛
궁전에서 미시가 이 캐비닛에 기대고 있는 사진도 남아 있긔.
쿨리지 대통령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지만 수족의 추장은 미시에게 '우리가 기다려왔던 여인'이라는 인디언 이름을 주고 깃털 머리장식을 선물했어요.
그런데 미시는 서부를 여행하던 중 남편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루마니아로 귀국합니다.
장암을 앓던 난도는 1927년 7월 미시의 품에 안겨 사망합니다.
잘 맞는 부부는 아니었지만 함께 전쟁을 겪으면서 존경과 감사로 맺어진 부부였습니다.
나중에는 서로 불륜을 인정하고, 난도랑 애인 그리고 미시랑 바르부 이렇게 넷이서도 만나서 잘 지냈다고 하네요;;
개인적으로 난도는 자식 여섯 중에 넷이 친부논란이 있었던 데다 막내는 누가 봐도 친자가 아닌 애가 태어났는데도 인정해주고 대인배긔
그 전 시대였으면 미시는 진작 어디 시골 궁전에 평생 갇혀살았을 거예요. 실제로 초반에 나온 에른스트 큰할아버지의 어머니가 그랬죠.
이제 다섯 살이 된 미하이가 루마니아 국왕이 되었습니다.
미시의 아들 니키와 총리, 최고위 성직자 3명이 섭정단을 꾸렸고요.
시타는 시어머니 미시를 좋아하지 않았고 아들을 잘 보여주려 하지 않았죠.
미시, 미하이, 시타
그래서 미시는 이제 정치와 떨어져 사랑하는 딸 일레아나와 함께 별궁을 돌아다니며 살았어요.
미시는 트란실바니아의 브라쇼브 시로부터 성 하나를 선물받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브람 스토커의 소설 <드라큘라>의 배경이 된 브란 성이죠.
미시는 브란 성을 비잔틴 왕궁처럼 꾸몄습니다. 말 그대로 꽃으로 가득 채웠고 '네 가지의 바람이 만나는 곳'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벽이 두껍다'고 덧붙이면서요ㅎㅎ
'유럽에는 이렇게 낭만적인 성이 없다. 브란 성은 카르파티아 산맥의 산봉우리에 하늘을 바로 찌를 듯이 서 있다.
이곳은 개인적인 거처이고 궁전이 아니다. 왕비는 시녀도 데려오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만 이곳에 초대한다' by손님
브란 성 아래의 정원을 꾸미는 미시
그리고 흑해의 도브루자에 있는 바닷가 마을 발칙에 '텐야-유바(고요한 둥지)'라는 별장을 만들었어요.
폭포가 흘러내리고 포도밭, 백합 정원, 와인 만드는 설비, 예배당 등 여러 개의 건물을 갖춘 커다란 별장 단지였습니다.
바다와 바람이 만나는 텐야-유바의 '물의 신전'
앉아 있는 사람은 일레아나입니다.
텐야-유바의 벽에 걸터앉은 미시
브란 성과 발칙을 왔다갔다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살다 갔으면 좋았겠지만, 미시의 삶은 풍파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영국 해군으로 살고 싶었던 꿈을 접고 섭정으로 관심없는 정치에 매이게 된 니키는 자주 화를 냈고 불안정했습니다.
그런데 1930년 6월 카롤이 루마니아에 나타났어요.
니키는 형을 반겼고 미시도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버렸던 왕위를 다시 찾은 카롤은 돌아온 탕자가 아니었답니다.
총리는 카롤이 시타와 화해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를 받아들인 것이었지만 오히려 마그다가 돌아왔고요.
시타는 쫓겨나서 이탈리아로 갔고 아들 미하이를 일 년에 여름방학 때만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카롤 2세로 즉위한 카롤
카롤은 예전에 수도원에 갇혀 있을 때도 일레아나만은 꼭 만나고 싶어했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지만, 일레아나가 마그다를 싫어했기 때문에 둘은 사이가 나빠졌어요.
미시도 아들의 부탁을 거부하고 마그다를 절대로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카롤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어머니와 동생을 몰아낼 생각을 하죠. 우선은 일레아나를 독일 친척들에게 보내서 남편감을 찾게 합니다.
일레아나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대공 안톤과 결혼했는데, 문제는 오스트리아 제국 역시 무너져서 그가 무일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시는 일레아나 부부가 루마니아에서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카롤은 바로 거절합니다. 한술 더 떠서 일레아나가 자신의 허가 없이는 루마니아에 입국하지 못하게 해요.
그리고 미시가 외국으로 나가도록 계속 압박해서 미시는 외국을 떠돌며 살게 됩니다.
일레아나와 안톤 가족
역시 불행은 꼬리를 물고, 니키 역시 루마니아 평민인 요아나 돌레티라는 여성과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카롤은 동생에게 우선 결혼하면 법을 개정해서 받아주겠다고 꼬시죠.
니키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서 1931년 비밀결혼하고 돌아옵니다.
카롤의 반응은? 동생을 마구 꾸짖으면서 족보에서 니키의 이름을 지우고 외국으로 추방해 버립니다..
(몇 년 후에 다시 루마니아로 돌아오게 해주긴 했어요)
1934년에는 미뇽의 남편인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다르가 암살당했습니다.
니키와 요아나
엘리사베타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그리스 왕정이 무너진 후에 엘리사베타는 남편과 서로 바람을 피우다가 이혼하고, 이기적인 천성으로 오빠 카롤에게 붙어서 살았습니다.
탐욕스러워서 재산을 긁어모으는 게 재미였다고 하네요.
엘리사베타는 자조적으로 '나는 살인만 빼고 온갖 나쁜 일은 다 해 봤다.'고 말했답니다.
1937년 3월 미시는 병에 걸립니다. 의사들은 간경변으로 진단했지만, 미시 자신은 평생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으니 다른 병일 거라고 말하죠.
실제로 췌장암으로 진단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탈리아, 독일 드레스덴의 요양원을 옮겨다니던 미시는 루마니아로 돌아가고 싶어했습니다.
카롤이 비행기 요금을 내는 걸 거절했기에 기차로 이동했는데, 기차는 심하게 흔들려서 내출혈까지 일으켰어요.
미시가 더 악화된 상태로 돌아오고 나서 카롤은 이게 다 니키가 어머니를 속썩인 탓이라며 영구 추방령을 내립니다...진짜 양심없긔
미시 초상화와 모델을 서던 때의 사진
1938년 7월 18일, 펠리쇼르 성의 침대에 누운 미시는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카롤은 니키, 일레아나를 부르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그들을 다시 볼 때까지 숨이 붙어 있지 못할 것이 확실해졌을 때에야 전화했죠.
카롤은 전화를 끊고 8분 후, 의사는 미시가 사망했다고 선언합니다.
미시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검은 상복 대신 연보라색 옷을 입고, 자기 심장을 텐야-유바에 있는 '바다의 성모' 예배당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옹졸한 카롤은 어머니의 묘비에 십자가 하나 외에는 어떤 공적도 사랑의 말도 새기지 못하게 했고, 기념물도 세우지 않았어요.
그리고 외국으로 추방된 바르부가 미시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불허했습니다.
미시는 국민에 대한 사랑과 함께 자신의 책들을 유산으로 남겼죠.
딸 일레아나에게 읽히려고 루마니아의 옛이야기들을 동화로 썼고, 회상록과 루마니아에 대한 책들도 썼답니다.
왼쪽은 미시가 쓴 <백합의 인생>, 오른쪽은 <눈물의 진주> 삽화
2년 후, 1940년 카롤은 2차대전으로 퇴위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루마니아로 돌아오지 못하죠.
18살 난 미하이가 두 번째로 왕이 되었고 1944년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친나치 군사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1947년 퇴위한 미하이는 할머니의 의지와 용기를 물려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베타는 재산을 지키려고 공산당 편을 들고 조카를 외면해서 '붉은 고모'라고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루마니아에서 쫓겨났어요.
공산 정부는 왕실을 깎아내리느라 미시의 방종한 면을 부각시켰지만,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로는 미시의 업적이 더 잘 알려졌고 미하이 역시 루마니아 시민권을 돌려받았습니다.
미하이 1세
'사랑하는 루마니아, 나의 기쁨과 슬픔의 나라여. 내 마음속에 살아온 아름다운 나라, 그대를 축복합니다'
-미시가 쓴 <나의 조국>에서-
엄청 긴 글이 되었긔ㅠ 숨차게 달려온 미시의 일대기였습니다.
미시의 회상록에서 발췌한 내용이 대부분이에요ㅎㅎ
미시가 인간적으로 모자라는 점도 있지만 매력적인 사람인데 영국 왕비가 됐으면 이렇게 맘대로 못 살았겠다 싶긔.
그리고 카롤이랑 엘리사베타는 약간 소시오패스 같다고 생각해요. 특히 카롤은 제 자식이면 호적 팠고요?
삼촌 숙모가 데려가서 기른 애 둘이 어쩜 이렇게 딱 ㅜㅜ
저는 이만총총.. 공지 어긴 거 있으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당!
정성스런 글 재밌게 잘 읽었긔!
와 진짜 재밌게 읽었긔. 아들 카롤 팍씨긔 진짜... 정성스런 글 감사합니다!
와 진짜 정성스러운 글이긔~한글자도 빼지않고 정독했긔 중간에 러시아 왕실 아나스타샤 말곤 유럽 왕실 잘 모르는데도 엄청 흥미로웠긔~! 감사하긔
정성이 가득한 글이긔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와 진짜 정성돋는 게시글이긔 아침에 휘리릭 읽고 다시 정독했넴 넘 재밌게봤긔
너무 재밌게봤긔 ㅠ 감사하긔
너무너무 잘 봤긔
글 쓰시느라 고생하셨다긔ㅜㅜㅜ
와 뒤늦게 엄청 정독했긔 진짜 대하드라마 한 편 본 느낌이긔 너무 재미있고 감사드리긔❤️
정성이 듬뿍 담긴 글 감사하긔! 긴 내용인데도 너무 재밌어서 금세 읽었다긔~
이 좋은 글을 왜 지금에서야봤죠? 전혀 몰랐던 이야기인데 너무 재밌게 읽었긔 첨엔 그저 철없는 왕족이야기인줄알았는데 루마니아에서 사랑받는 왕비가 될 만 하네요 멋진여성이긔 아오 장남놈 진짜 더 폭망해야하는데 안타깝다긔
와 정말 흥미롭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니다
와 너무 정성이시긔 재미있게 잘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