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1 신 정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3 - 지리산에 야생 반달가슴곰 산다 ㆍ방사 곰 새끼 중 한마리서 야생 수컷 유전자 첫 확인 지리산에서 반달가슴곰 복원 작업을 하고 있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사육사들은 최근 깜짝 놀랐다. 지난해 이곳에서 태어난 4마리 새끼곰의 유전자 구조를 검사하던 중 한 마리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한 것이다. 이 새끼곰은 지리산에 방사한 다른 46마리의 반달곰과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방사한 어미 반달곰이 지리산의 토종 곰과 인연을 맺은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유전자 혈통은 관리공단이 지난해 7~11월 다섯 달 동안 반달가슴곰 총 47마리로부터 혈액, 모근, 배설물을 추출해 유전자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확인됐다. 관리공단은 토종 반달곰과의 교미와 출산은 2004년부터 시작된 지리산 반달가슴곰 복원 사업 성공의 청신호로 여겨진다고 보고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012142225&code=940701
- 등대 설치 100주년 기념
2009 - 106년 만에 열린 팔미도 '감격 해맞이' 국내 1호 등대섬… ‘은둔의 땅’ 찾은 1000명 벅찬 함성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1020119
한국 출신의 반기문 신임 유엔 사무총장이 1일 공식임기를 시작했습니다. 반 총장은 31일 자정을 기해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올랐습니다. 반 총장은 대대적인 유엔 개혁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반 총장은 올해 들어 각종 추문과 부패로 퇴색한 유엔에 대한 신뢰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올해 62세의 반 총장은 북한과의 평화 구축도 재임 기간 중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반 장관은 지난 12월 취임선서식을 가진 후,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차세대를 위해 보다 평화롭고 번영하며 공정한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VOA 미국의 소리 2007.01.01 http://www.voakorea.com/content/a-35-2007-01-01-voa17-91301069/1311813.html
한.일간 영토분쟁 대상인 독도에 우리나라 우편번호가 부여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1045408271&code=30110000
2002 - 유럽, 유로화(EURO) 공식 사용 오늘의 역사 (1월 1일)[2002년] 유럽, 유로화 공식 사용 유럽 12개국의 인구 3억여명이 2002년 1월 1일 0시를 기해 단일 통화인 유로화를 공식 사용하면서 역사적인 유럽 단일 화폐 시대를 열었다. 새해 첫날 금융기관이 휴무일이었지만, 유로화 가입국(유로랜드) 주민들은 현금 인출기를 통해 유로화를 찾았고, 상점에서도 유로화는 통용됐다. 유럽 중앙은행(ECB)은 화폐교환을 대비해 150억장 이상의 유로화 지폐와 510억개 이상의 동전을 배포했고 유로화 동전 세트 1억5천만개도 시중에 깔아놓았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그리스,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포르투갈, 핀란드 등 12개국의 유로랜드는 국가별 차이가 있지만, 최종적으로 2002년 2월 28일까지 기존 화폐와의 통용기간을 거쳤다가 3월 1일부터 유로화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각국 은행들은 구(舊)화폐와 유로화의 환전을 2003년 6월 말에 끝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국민들을 향한 신년 인사를 통해 "우리 모두는 역사 쓰기에 참여할 것"이라며 "우리는 유럽인들이 수세기 동안 꿈꿨던, 국경 없는 여행의 자유와 공동화폐 지불 시대의 여명을 경험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는 31일 밤 7시 파리의 퐁뇌프 다리에서 유로화 시대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조명 행사의 개막식을 가졌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20313_0009
2001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거스 히딩크 선임 거스(휘스) 히딩크 [Hiddink, Guus, 1946.11.8~] 2000년 12월 18일 대한축구협회와 정식계약을 하고 2001년 1월부터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이 2002년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에서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최초로 4강신화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담담하였다. 월드컵이 끝난 뒤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 감독을 맡아 팀을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시키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2005년 7월 월드컵 오스트레일리아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딱딱한 외모와는 달리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영어·독일어·에스파냐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며 축구교본과 외국어 회화책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학구파이다. 체력과 스피드를 바탕으로 한 공격축구를 지향한다. 주로 4-4-2 전술을 사용하지만 포메이션에 얽매이기보다 선수 개개인의 능력과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진형의 변화를 꾀한다. 또한, 몇몇 스타 플레이어에게 의존하기보다 탄탄한 팀워크를 선호하는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2002년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에서 한국팀에게 보여준 우수한 지도력이 인정되어, 한국정부로부터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체육분야에서 최고의 훈장인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네이버
2000 - 만국우편연합(UPU)가입 100주년 기념 만국우편연합(UPU)가입 100주년 기념 2000년은 우리나라의 만국우편연합(UPU)가입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만국우편연합은 UN전문기구로 우편물의 세계 단일우편영역 형성, 우편물 중계의 자유 보장, 우편분야의 표준화 등을 목적으로 1874년 10월 9일 발족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는 1884년 근대 우정사업이 시작되면서부터 국제우편업무의 실시를 위한 만국우편연 합 가입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1897년 워싱턴에서 개최된 UPU 총회에서 가입 절차를 마 침에 따라 1900년 1월 1일 정식가입하였다. 우리나라는 1989년 제20차 워싱턴총회에서 집행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되었으며 1994 년 8월 22일부터 9월 14일까지 24일간 COEX에서 제21차 만국우편연합 서울총회를 개최 하고 총회후 5년간 관리이사회 의장국으로 활동한 바있다. 또한 1999년 중국 북경에 서 개최된 제22차 만국우편연합 총회에서 관리이사회(CA)와 우편운영이사회(POC) 이사 국으로 각각 선출되어 향후 UPU활동을 조정·감독하고 각종 국제우편정책 결정에 영향 력을 행사하는 등 한국우정의 위상을 제고시키게 되었다. 새로운 천년과 함께 맞이하는 역사적인 UPU가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UPU마크 와 한국의 우정사를 소재로 기념우표 1종을 발행한다. (우표발행안내) /한국조폐공사
오늘의 역사 (1월 1일)[2000년] 세기의 전환을 앞두고 전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Y2K(컴퓨터 2000년 인식오류)대란이 현실화되지 않았다. 세계각국은 미사일 오발에 의한 전쟁발발, 원전 방사능 유출 등 '밀레니엄 버그'로 예상됐던 재앙의 시나리오가 기우였음이 확인되자 안도했다. Y2K에 대비하기 위한 세계 각국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미국의 Y2K 대비를 총지휘한 정보협력센터(ICC)는 24시간 가동체제에 들어가, 시시각각 세계 180개국의 Y2K 담당자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재난에 대비했다. 미국의 유나이티드항공은 2000년 12월 31일과 1월 1일 양일간 총 4000편의 항공기 운항을 중지했으며 이스라엘은 30년이 넘은 원자력발전소를 일시 폐쇄하기도 했다. 한국도 12월31일부터 1월3일까지 4일간 은행업무를 중단해 Y2K에 대비했다. Y2K 재난을 방지하기 위해 전세계가 들인 돈은 3000억-6000억 달러, 많게는 1조 달러로 추산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112_0002 1999 - 유로(EURO) 체제 출범 오늘의 역사 (1월 1일)[1999년] 유로(EURO) 체제 출범 유럽연합(EU)의 역사적인 통화 통합이 1999년 1월 1일 실시 돼 유로(EURO) 체제가 출범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핀란드, 벨기에 등 11개국이 단일통화 유로를 출범시켰고, 1월 1일부터 프랑과 마르크 등 구(舊) 통화가 사라지고 공식화폐가 유로화로 사용됐다. 그 나라 역사만큼이나 국민들의 영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화폐들이 서서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다. 유로 출범으로 2억9천만명의 인구에 미국과 거의 대등한 경제력을 갖춘 강력한 경제블록이 탄생하게 됐다. 당초 1.17달러로 출발했던 유로는 한때 유로당 1달러를 밑도는 약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유럽경제의 회복세를 뛰어넘는 정도로 미국의 경제가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EU 집행위는 유럽 경제가 밝기 때문에 강세로 반전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916_0001
- 제주 성산일출 (공중전화 카드)
1994 - 제주도 성산일출제 시작 성산일출제 [城山日出祭, Sungsan Ilchul Festival] 매년 1월 1일 제주도 성산 일출봉에서 해돋이를 바라보며 벌이는 새해맞이 행사.
오늘의 역사 (1월 1일)[1993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1993년 1월 1일 해체돼 고유 언어와 정부를 갖고 독자적인 경제-사회적 문제를 담당할 체코공화국과 슬로바키아공화국의 2개 독립국가로 탄생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와해로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를 지금까지 통치해온 것은 체코인이었다. 동부 전원지대에 주로 살고 있는 슬로바키아인은 이 통치를 묵묵히 따랐다. 그러나 동구권의 자유화운동으로 공산화가 무너진 체코슬로바키아 내부에서도 슬로바키아인의 자치확대 요구가 새롭게 시작됐다. 1992년경에는 연방의회내에 슬로바키아 의원이 늘어나 이들이 7월17일 주권선언을 하자 하벨은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후임 대통령은 1992년 8월에 연방분리를 결정,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가 74년만에 해체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913_0029
2차 대전 이후 주변국이 속속 독립을 쟁취하고, 브루나이인민당(Parti Rakyat Brunei)의 급진적 민족주의를 두려워 한 영국은 1959년 외무, 안보, 국방 분야를 제외하고 브루나이 국왕에게 모든 권한을 이양하고 가까운 장래에 총선을 치를 것을 약속했다. 1962년 제한된 의석수에 한해서 총선이 실시되었고 브루나이인민당이 승리하였으나, 브루나이를 말레이시아연방으로 합병하려는 국왕과 영국의 의도를 간파하고 브루나이인민당 소속 군인들이 12월 반란을 일으켰다. 국외적으로도 브루나이는 말레이시아에 편입된 사바와 사라와크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한국전력공사 http://www.kepco.co.kr/kepco_plaza/history/c/html/c_02.html
[한국전력공사 연혁] 1982.01.04 - 한국전력공사 창립기념식 1982.01.01 - 한국전력공사로 개칭(발족) 1961.07.01 - 한국전력주식회사 발족
1977 - 체코슬로바키아 '77헌장' [오늘의 경제소사/1월1일] <1283> 77헌장 정치적 억압과 경제난이 겹친 프라하의 겨울. 체코슬로바키아 지식인들이 남몰래 연판장을 돌렸다. 전 공산당원까지 포함한 243명이 지하선언문에 서명을 완료한 시점이 1977년 1월1일. A4 용지 4장 분량의 선언문에는 이런 제목이 달렸다. ‘77헌장(Charter 77).’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8/12/31 17:37:35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812/e2008123117373397490.htm
1975 - 워터게이트사건 4명 유죄판결 오늘의 역사 (1월 1일)[1975년] 워터게이트사건 4명 유죄판결 워터게이트사건은 닉슨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하려 했던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정치스캔들로 이 사건 관련자 제임스 머코드 등 7명이 체포되고 이들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던 중 미첼 재선위원장, 홀드먼 보좌관 등 닉슨의 측근도 관련되었다는 사실과 백악관의 은폐조작 이전부터 행해진 정적에 대한 불법적 정보활동 등이 밝혀졌다. 닉슨대통령은 1973년 4월 홀드먼, 에릭먼드 두 보좌관, 딘 법률고문, 크라인딘스트 사법장관을 사임하게 하고 자신을 사건을 전혀 몰랐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딘은 그 해 6월 25일 상원조사위원회의 공청회에서 닉슨 대통령도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닉슨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녹음테이프와 속기록을 공표했으나 손을 댄 흔적이 발견됨으로써 의혹만 더하게 했다. 게다가 이 사건을 밝히기 위해 임명된 특별검사의 해임, 불성실한 납세신고 등으로 국민의 불신감이 깊어지자 하원 사법위원회는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했다. 궁지에 몰린 닉슨은 1974년 8월 자발적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으며 1975년 1월 1일 이 사건의 관련자 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050 1975 - 일본의 만화가 오다 에이이치로[ 오다 에이이치로 [ 오다 에이이치로(일본어: 개요 도카이 대학교 부속 고등학교 재학중에 단편 《WANTED!》가 주간 소년 점프 신인상인 데즈카상에 준입선 한다. (이때의 팬네임은 쓰키히미즈키콘도). 1997년부터 주간 소년 점프에 원피스의 연재를 시작. 점프를 대표하는 인기만화가 되었고, 2007년에 연재 10주년을 맞이하였다. 인물 * 어렸을 때부터 소년 점프를 애독하였으며 드래곤볼과 근육맨의 영향을 받고, 모험 만화를 그리게 되었다. * 오다 에이이치로는 펜네임이 아니고 본명이다. 작품 /위키백과
1972 - 프랑스의 샹송가수, 영화배우 슈발리에(Cheval!lier, Maurice) 사망 슈발리에 [Cheval!lier, Maurice, 1888.9.12~1972.1.1] 프랑스의 정감있는 뮤지컬 코미디 스타. 1930년대초 뮤지컬이 영화의 한 장르로 자리잡는 데 큰 몫을 한 재치있고 세련된 영화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지팡이를 들고 밀짚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과장된 프랑스어 억양으로 말하는 것이 특징이었던 신사풍의 배우로, 연극인으로서 국제적인 명성도 얻었다. 1901년 파리에서 카페의 가수로 연예활동을 시작했으며, 1920년대 프랑스 뮤지컬 레뷰의 유명한 연예인이었고 프랑스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가 처음 출연한 할리우드 영화 〈파리의 순진한 사람 The Innocents of Paris〉(1929)은 명랑하고 매력있는 인기 뮤지컬의 표본이 되었고, 그뒤 가끔 자네트 맥도널드와 함께 공연하면서 같은 유형의 뮤지컬 〈사랑의 퍼레이드 The Love Parade〉(1930)·〈당신과의 한 시간 One Hour with You〉(1932)·〈오늘밤 사랑해주세요 Love Me Tonight〉(1932)·〈즐거운 과부 The Merry Widow〉(1934) 등에 출연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를 순회하며 연예인 생활을 계속했다는 이유로 인기가 떨어지기도 했으나, 전쟁이 끝난 뒤 적국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벗었다. 후기 영화로는 〈오후의 사랑 Love in the Afternoon〉(1957)·〈지지 Gigi〉(1958)·〈캉캉 Can-Can〉(1960)·〈화니 Fanny〉(1961) 등이 있다. 50년 이상을 연예계에 헌신한 공로로 이유로 1958년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966 - 프랑스의 정치가 오리올(Auriol, Vincent) 사망 오리올 [Auriol, Vincent, 1884.8.25~1966.1.1] 프랑스의 정치가, 제4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프랑스 남서부 루베르에서 출생하였다. 사회당 기관지의 편집원을 거쳐, 1914년에 사회당 소속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 1924년 하원 재정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재정통으로 L.블륌의 브레인이었다. 1936년 블륌의 인민전선 내각에 재무장관으로 입각, 1937년 법무장관이 되었고, 제2차 블륌내각의 조정(調整)장관을 역임하였다. 1940년 독일에 대한 항복에 반대하여 비시정부에 의하여 체포되어 자택에 연금당하였으나, 탈출하여 저항운동에 들어갔다. 1943년 런던으로 망명, 장군 드골의 자유프랑스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45년 드골과 함께 아프리카를 경유, 귀국하여 드골임시정부의 무임소장관을 거쳐, 드골내각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제1차 국제연합총회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하고, 1946년 제2헌법의회 의장 역임 후 1947년 1월~1954년 1월 제4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재직하였다. 1957년 사회당을 탈탕하였으며, 1959년 제5공화국 헌법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네이버
역사속 오늘[1963년 1월 1일] 부산, 직할시로 승격 한국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무역항인 부산이 1963년 오늘 직할시로 승격됐다. /YTN 2013-01-01
1963 -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이 후지 TV에서 첫 방송 오늘의 역사 (1월 1일)[1963년] 만화영화 아톰 탄생 1963년 1월 1일 일본 후지TV에서 만화영화 아톰이 전파를 탔다. 당시에는 90분 분량의 극장용 만화영화가 주류였고, 매주 30분씩 TV에서 만화영화를 상영하는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아톰의 등장으로 일본에 TV애니메이션 산업이 시작됐으며, 아톰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1966년까지 193편이 방영됐다. 데츠카 오사무가 1952년 만화잡지 만화소년에 연재했던 철왕 아톰은 만화영화로 제작되어 동양 최초의 만화영화이자 대표작으로 자리잡았고 동양적 캐릭터로 일본 만화계의 전설이 되었다. 데츠카 오사무는 이후 밀림을 뛰어다니는 흰 사자 정글 대제(밀림의 왕자 레오), 모자를 쓴 남장 소녀 사파이어 등의 캐릭터로 300여 편의 만화를 남겼다. 아톰은 일본 어린이들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열정을 심어줬으며, 전자산업 강국 일본을 만드는 것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만화영화 아톰은 미국에서 1963년 말부터 NBC TV에서 아스트로 보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에 우주소년 아톰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90930_0004
군주국가에서 군주가 자신의 통치 연차(年次)를 표시하는 연호는 중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사용된 ‘건원(建元)’이 최초의 기록이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도입됐는데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돼 있는 ‘영락(永樂)’이 첫 사례다. 마지막 연호는 대한제국 때 순종이 사용한 ‘융희(隆熙)’.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연호 ‘다이쇼(大正)’과 ‘쇼와(昭和)’를 사용하다가 1945년 美군정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서기가 처음 도입됐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연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단기가 공용연호로 채택됐으나 국제조류에 맞춰 다시 서기로 돌아와 현재에 이른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의 54.5%가 단기ㆍ서기 병용을 희망한 반면, 서기만의 사용을 원하는 사람은 23.4%에 그쳤다. /조선
- First Anniv. of Independence, 1963, Oct.1
1962 - 서사모아, 뉴질랜드로부터 독립 사모아의 역사 사모아제도는 폴리네시아인(人)이 태평양지역으로 이동할 때 가장 먼저 정주한 곳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오랫동안 독자적인 전통사회를 유지하였으나, 1722년 네덜란드의 항해가 야코프 로게렌(Jacob Roggereen)의 탐방을 계기로 서구인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1830년에는 영국인 선교사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와 찰스 바프(Charles Barff)가 이곳에 상륙해서 전도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의 열성적인 전도에 따라 사모아인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각지에 교회를 세웠다. 당시 사모아에는 폴리네시아계의 말리에토아왕조(王朝)가 군림하고 있었으나 19세기 후반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동시에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꾀하는 영국·독일·미국 3국의 사모아의 점령이 시도되었다. 1889년 태풍이 일어나 아피아항구(Apia Harbour)에 집결한 3국의 함대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 해에 3국협정이 성립되어 서사모아는 독일령 사모아, 동사모아는 미국령 사모아로 분할되었다.
1959 - 쿠바 혁명 성공 오늘의 역사 (1월 1일)[1959년] 카스트로 쿠바혁명 성공 쿠바 대통령 바티스타 독재정권이 1959년 1월 1일 마침내 무너졌다. 1958년 12월 29일 카스트로가 이끄는 반정부군에 의해 산타클라라시가 함락되어 바티스타의 패배가 결정적으로 되어 이날 오전 5시 바티스타는 수상과 함께 수도 하바나를 탈출, 도미니카로 망명했다. 혁명전의 쿠바 국민은 외국자본에 의한 산업지배와 대지주제에 의해 빈곤에 허덕였다. 26세의 젊은 변호사 카스트로가 독재자 바티스타에 대항하는 무력혁명투쟁에 나선 것은 1953년 7월 26일, 135명의 동지와 함께 쿠바 제2의 병영 몬카타를 폭격하면서부터이다. 그후 5년여 동안 싸워온 카스트로는 이날 쿠바의 영웅이 됐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034
- Jean Monnet, Robert Schuman
1958 - 유럽 경제공동체(EEC) 발족 오늘의 역사 (1월 1일)[1958년] 유럽공동체시장(EEC) 발족 1957년 3월 25일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 대표들이 로마에 모여 유럽경제공동체 창설을 위한 협정에 조인했다. 1958년 1월 1일부터 실행에 들어간 이 조약은 회원국 사이에 자본, 상품, 노동력,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표로 한 것으로 20세기 들어 두차례 초대형 전쟁을 겪었던 유럽 국가들이 그같은 재앙의 재현을 막기 위해 시작한 장정이 또 한걸음 거보를 내디딘 순간이었다. 1950년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이었던 슈만은 서독에 대해 석탄과 철강의 공동이용을 위한 기구 창설을 제안했다. 1870년 보불전쟁 이후 75년간 세차례나 독일과 대규모 전쟁을 경험한 프랑스로서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슈만은 양국의 경제적 이익을 하나로 묶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슈만의 제의에 호응함으로써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출범했다. 이어 원자력의 공동 이용을 위한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발족됨으로써 이들 6개국의 경제적 이해가 한층 긴밀해졌다. 유럽경제공동체는 이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경제통합을 지향한 것이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033
백범이 마지막 맞던 새해,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유일한 최고의 염원은 조국의 자주적 민주적 통일뿐이다. 소련식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공산 독재정권을 세우는 것은 싫다. 미국식 민주주의가 아무리 좋다해도 독점 자본주의로 무산자를 괴롭힐 뿐 아니라 낙후한 국가를 자기 상품 시장화하는데는 찬성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는 민족의 영원한 교훈으로 기억될 것이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1t05
1939 - 박계주의 장편소설 '순애보(殉愛譜)' 매일신보에 연재 시작 1938년 《매일신보(每日申報)》 현상모집에 1등으로 당선된 그의 데뷔작이며 대표작이다. 그리스도교적인 휴머니즘이 읽는 이의 감동을 자아내는 순애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1939년 1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는 동안 장안의 인기를 독점했고 그해 10월에 출판되자 초판이 보름 만에 매진되는 성황을 이루었다. 이 소설이 이처럼 인기를 끈 것은 이 소설의 전편에 흐르는 박애주의와 낭만주의적 분위기, 그리고 저변에 깔린 민족적 감정도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여겨진다. /네이버
1935 - 한국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李輝昭, Ben Lee) 출생 이휘소 [李輝昭, Benjamin W. Lee, 1935.1.1~1977.6.16] 팬티가 썩은 과학자, 이휘소 비운의 천재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아는가? 1977년 교통사고로 42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이때까지 업적만으로 그는 물리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다. 또 대한민국에서 그를 모르는 젊은이는 드물다. 그야 말로 스타과학자인 셈이다. 이휘소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물리학에만 매달린 사람’, ‘가정에 충실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이휘소 박사의 동료들은 그를 ‘팬티가 썩은 사람’으로 불렀다고 한다. 한번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를 떼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는 생활습관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한번은 이휘소 박사가 동료와 점심을 먹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연구실로 들어가더니, 이틀 만에 앉은 자리에서 한편의 논문을 완성했다고 한다. 실로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칼럼니스트 서금영 /KISTI의 과학향기 제 524 호/2006-11-15 - View from Apollo 11 - Greenwich Obserbatory 1925 - 그리니치 세계시 사용 [오늘의 역사 1월 1일] 그리니치 세계시 사용 자정을 0시로 하는 그리니치 세계시가 1925년 1월 1일부터 사용되기 시작됐다.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상의 평균 태양시를 그리니치 천문시라고 하는데 1925년 이전까지 그리니치시는 정오를 0시로 했다. 이를 그리니치 평균 천문시라고 부르며, 세계시와 구별해 사용한다. 1925년 이후 천문학계에서는 그리니치 평균시를 사용하지 않고 세계시만 사용하고 있다. /소년한국일보 2008/12/31 16:52:57 http://kids.hankooki.com/lpage/edu/200812/kd20081231165255103370.htm
- 'Homage to the Cinema' - 'The Thumb'
세자르 [César : Cesar Baldaccini, 1921.1.1~1998.12.6] 본명은 César Baldaccini. 프랑스의 조각가. 1960년대에 자동차를 압축시켜 만든 '압축 조각'으로 유명하다. 마르세유의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간 세자르는 로댕의 제자였던 코르뉘라는 선생의 지도로 데생과 모형제작을 배웠으며, 1943~50년에는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다. 일상생활에서 발견한 잡동사니를 이용한 초기의 실험은 미학적인 동기보다는 경제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곧 거리의 폐품을 이용하여 섬뜩하고 위압적인 효과를 자아내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녹슨 나사와 깡통, 금속 조각 등을 이용하여 양식화된 곤충·동물·물고기 등을 구성했다. 또한 〈토르소 Torso〉(1954)에서처럼 대개 신체의 일부가 뒤틀리거나 생략된 인체의 모형을 만들기도 했다. 압축 조각 외에 후기 작품으로 '팽창 조각'이 있는데, 그는 이 작품들에서 빠르게 굳는 물질인 폴리우레탄을 사용하여 극적인 동작의 조각들을 만들었다. /브리태니커
스파르타쿠스단(Spartacus League)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사회민주당 극좌파(極左派)가 탈퇴하여 조직한 혁명단체로, 조직의 중심 인물은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프란츠 메링(Franz Mehring) 등으로 대부분 독일사회민주당원이었다가 1916년에 탈퇴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활동은 1914년부터 암암리에 시작되었으나, 1916년 1월부터 비합법 잡지 《스파르타쿠스브리펜(Spartakusbriefen)》을 발행하면서 스파르타쿠스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12 - 중화민국 수립을 선포,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 오늘의 역사 (1월 1일)[1912년] 쑨원이 1912년 1월 1일 오후5시 상해에서 남경으로 들어간 즉시 임시대총통 취임식을 거행한 후 중화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328_0009
필비 [Philby, Kim, 1912.1.1~1988.5.11] 본명은 Harold Adrian Russell Philby. 영국의 정보장교(~1951). 냉전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소련의 이중첩자였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재학중 공산당에 입당하고 1933년 소련의 첩자가 되었다. 저널리스트로 일하던 중 1940년 소련의 이중첩자이기도 한 영국의 비밀첩보원 가이 버제스가 필비를 영국 정보기관의 MI-6국에 스카우트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필비는 MI-6국의 방첩 작전부장으로 승진하여 서유럽에서 소련의 파괴공작을 분쇄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1949년 필비는 워싱턴으로 파견되어 MI-6국의 워싱턴 주재 수석장교 겸 영국 정보부와 미국 정보부 사이의 수석 연락장교로 근무했다. 이런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을 동안 그는 1950년 연합국이 무장 반공 집단을 알바니아에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소련에 누설하여 그 집단이 패배를 겪게 했으며, 영국 외무부 안에 있던 2명의 소련 이중간첩 버제스와 도널드 매클린에게 그들이 의심받고 있음을 통고했고(그결과 두 사람은 1951년 소련으로 도피했음), MI-6국과 미국중앙정보국(CIA)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소련에 넘겼다(→ 버제스와 매클린). 버제스와 매클린의 변절 후 의혹의 눈길이 필비에게 쏠려, 그는 1951년 첩보직에서 해임되고 1955년에는 MI-6국에서 해고되었다. 그후 베이루트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다가 1963년 소련으로 달아났다. 그는 모스크바에 정착한 후 소련 첩보기관인 KGB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대령까지 올라갔다. 필비는 자신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밝힌 〈나의 조용한 전쟁 My Silent War〉(1968)을 출판했다. 필비는 자기의 조국보다 소련에 주로 헌신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필비는 1940년대와 1950년대초에 많은 서방측 첩보원들의 활동을 소련에 밀고했는데, 그들의 죽음도 분명 그에게 책임이 있음이 분명하다. /브리태니커
1905 - 경부선(서울-부산) 개통 오늘의 역사 (1월 1일)[1905년] 경부선(서울-부산) 개통 우리나라 두번째 철도선인 경부선이 1905년 1월1일 운행을 개시했다. 1898년 9월 8일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해 조선 정부로부터 경부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일본은 1900년 8월부터 공사에 들어갔으며, 1901년 서울 영등포(8월20일)와 부산 초량(9월11일)에서 기공식을 가진 지 3년4개월 만이었다. 공사는 관민의 저항과 반대, 용지매수 분쟁, 결빙과 홍수 등으로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조선 정부의 협조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저렴한 비용으로 건설됐다. 개통식은 5월 25일 남대문 정거장(서울역)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경부선에 이어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최초의 부관(釜關)연락선 `일기환(壹岐丸)`이 취항(1905년9월11일)하고, 경의선(서울~신의주)이 개통(1906년4월3일)됨으로써 섬나라 일본은 사실상 대륙과 연결되는 효과를 보았다. 1913년에는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 각국과 화물운송을 시작해 오랫동안 숙원해 온 대륙진출로의 확실한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첫 열차는 시속 26.5㎞ 속도로 17시간이나 걸려 서울과 부산 간을 운행했지만 5개월 후에는 14시간으로 단축됐고, 1906년에는 다시 11시간으로 단축돼 속도, 기술면에서도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917_0001 1901 -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성립 오스트레일리아는 1893년 이래 각 주 총리회의(總理會議)가 개최되면서 각 주를 통일하는 연방을 설립하려는 기운이 성숙, 1900년에 연방헌법이 제정되었고, 1901년 l월 l일에는 오스트레일리아연방이 발족되었다.
만국우편연합(萬國郵便聯合, Universal Postal Union)은 국경을 초월하여 우편물의 교환을 원활히 하여 세계의 경제 ·문화 교류를 도모하고자 하는 국제기구이다. 국제연합의 전문기구이다. 1874년 스위스 베른에서 22개국의 대표가 모인 국제회의 때에 발족하였다. 1897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된 만국우편연합(UPU) 제5차 총회에서 연합의 개정조약에 서명하였고, 1900년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였다. 1991년 현재 회원국은 167개국이며, 사무국은 베른에 있다. 회원국은 5년에 1회 우편대회를 개최하여 우편에 관한 조약을 심의 ·개정한다. 우편연합의 주요기관으로는 연합의 활동을 계속적으로 행하기 위한 집행이사회, 각국의 국내우편사업을 개선하기 위하여 가맹국의 공동연구를 위한 우편연구 자문위원회가 있다. 기관지 《유니언 포스털:Union Postal》(월간)이 발행되고 있다. 1994년 제21차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네이버
1896 - 조선에서 태양력(그레고리력)을 도입 율리우스력 대체한 그레고리력, 조선은 1896년 1월1일 도입 역사로 보는 한주 조선이 태양력(그레고리오력)을 도입한 것은 1896년 1월1일이었고, 일본은 메이지유신 5년 뒤인 1873년, 그리고 중국은 쑨원이 중화민국을 세운 1912년 1월1일부터 태양력을 썼다. 지금 세계 대다수 국가들은 그레고리오 역법을 쓰고 있으나, 그 전에는 율리우스 역법을 썼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1502-1585)는 1582년 2월24일 기존 율리우스력을 대신할 새 역법을 공포해 그해 10월4일(목요일) 다음날을 10일 건너뛴 10월15일(금요일)로 하기로 결정했다. 역법상의 절기와 실제 절기 간의 오차를 수정하려 한 것이다. 이것이 그레고리오력의 시작이다. 율리우스력은 로마 장군 율리우스 케사르(시저)가 제정한 것으로 기원전(BC) 45년 1월1일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7월달(July) 명칭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로마 황제들은 달력에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려 갖은 시도를 했으나 케사르 외에는 8월달(August)로 남은 아우구스투스만이 성공했다. 율리우스력은 평균역년을 365.25일로 잡아 1000년마다 실제 태양년과 약 8일간의 차이가 났다. 1년을 365.2425일로 잡은 그레고리오력은 그 오차가 3300년에 하루 꼴이다. 365.2425라는 수치를 계산해낸 사람은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다. 통상 1년을 365일로 하고 여기에 윤년으로 오차를 조정하면 평균년이 365.2425일이 된다. 끝수 0.2425를 분수로 표시하면 400분의 97이 되므로 400년에 97일간의 윤일을 끼워넣으면 된다. 그런데 율리우스력은 4년에 한번씩 윤년을 두었기 때문에 400년간 윤일이 100일이다. 이 100일을 97일로 줄이기 위해, 4로 나눠지는 해를 윤년으로 하되 그 중 100으로 나뉘는 해는 평년으로 하고 또 400으로 나뉘는 해는 다시 윤년으로 한다는 원칙이 생겼다. 그레고리오력은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이름을 땄지만, 율리우스력을 고치기로 결정한 것은 교황 파울루스 3세(1468-1549)가 소집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가톨릭 쇄신, 내부개혁 문제를 논의했고 새 역법 제정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율리우스력의 오차는 이미 13세기에 로저 베이컨(1214-1294)이 지적했음에도 이처럼 3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다. 가톨릭 내부개혁은 1517년 독일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95개조’ 요구사항을 내걸기 전부터 시작됐으나 그때부터 본격화된 일종의 대항개혁, 즉 전통적인 가톨릭 교의나 교회조직을 보호하고 프로테스탄트 쪽의 비판을 견뎌내고 살아남기 위한 개혁이었다. 프로테스탄트 지역들이 그레고리오력을 받아들이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유대교는 지금도 율리우스력과 비슷한 유대역법으로 부활절 등 축일을 정하고 있고 러시아 정교회도 그 전통을 따르고 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겨레 2005-12-29 오후 05:17:32
보스 [Bose, Satyendra Nath, 1894.1.1~1974.2.4] 인도의 수학자·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함께 전자기복사를 기체처럼 취급한 이론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캘커타대학교를 졸업한 후 1916년까지 그 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1921~45년 다카대학교에서 강의했다. 다시 캘커타로 돌아와 1945~56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보스는 많은 과학논문들(1918~56)로 통계역학, 전리층의 전자기적 특성, X선 결정학과 열발광(熱發光), 통일장이론(統一場理論)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보스가 〈플랑크 법칙과 광양자 가설 Planck's Law and the Hypothesis of Light Quanta〉(1924)을 발표하자 아인슈타인이 그와 함께 일하기 위해 그를 찾아오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1894 - 독일의 물리학자 헤르츠(Hertz, Heinrich) 사망 헤르츠 [Hertz, Heinrich (Rudolf), 1857.2.22~1894.1.1] 독일의 물리학자. 최초로 전파를 송·수신했다. 1880년 베를린대학교에서 우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곳에서 H. 폰 헬름홀츠 밑에서 공부했다. 1883년 J. C.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1885~89년 카를스루에공과대학의 물리학교수였던 그는 실험실에서 전자기파를 만들어내고 그 길이와 속도를 측정했다. 그는 반사 및 굴절에 대한 전자기파의 진동과 감수율(感受率)의 특성이 광파나 열파의 특성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결과 빛과 열이 전자기 복사임을 명확하게 확증했다. 1889년 헤르츠는 본대학교의 물리학교수로 임명되어 희박기체에서의 전기방전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과학 논문들은 영어로 번역되어 총 3권으로 출판되었는데, 〈전기적 파동 Electric Waves〉(1893)·〈여러 주제의 논문들 Miscellaneous Papers〉(1896)·〈역학의 원리들 Principles of Mechanics〉(1899) 등이 그것이다. /브리태니커
- Philippines 100 Piso (Banknote)
1892 -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 로하스(Roxas, Manuel) 출생 로하스 [Roxas (y Acuna), Manuel, 1892.1.1~1948.4.15] 필리핀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46~48). 마닐라 근교의 필리핀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했고 1917년 카피스(카피스 시는 1949년 로하스 시로 개칭됨) 시의회에 진출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했다. 카피스 주 지사(1919~21)를 지내다가 하원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곧이어 하원의장과 국가평의회 의원으로 활약했다. 1923년 미국 총독 레너드 우드가 의회를 통과한 법안들을 거부하기 시작하자 상원의장인 마누엘 케손과 함께 항의의 표시로 국가평의회에서 사퇴했다. 1932년에는 국민당 당수 세르히오 오스메냐와 독립사절단을 이끌고 워싱턴으로 건너가 헤어-호스-커팅 법안이 통과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중에 케손은 헤어-호스-커팅 법으로 말미암아 독립이 위태로워졌다고 주장함으로써 로하스와 갈라섰고 이에 따라 국민당도 양분되었다. 1934년 필리핀 독립법이 개정되자( 타이딩스-맥더피 법안) 헌법제정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38~40년 연방정부의 재무장관으로 일했다. 로하스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호세 라우렐의 친일정권에 몸담아 일본군에 군량미를 조달했다. 전쟁이 끝난 뒤 부역자 심판을 위한 법원이 설치되었으나 친구가 된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의 보호를 받았다. 국민당의 자유주의 진영(뒤에 자유당이 되었음)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로하스는 1946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7월 4일 독립이 선포되면서 신생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로하스는 미국으로부터 전후 복구자금을 얻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군사기지(그 가운데 23개 기지의 조차기간은 99년이었음)와 무역의 규제, 미국 재산 소유자나 투자가들에 대한 특혜 등을 허용해야만 했다.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더구나 지방헌병대(루랄레스)의 직권남용으로 농촌지역에서 좌익 후크발라하프(Hukbalahap:후크 단이라고도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항일 게릴라 조직으로 전후에는 1950년대초까지 반공정권에 저항했음)의 반란이 일어났다. 후크발라하프를 분쇄하려는 억압적인 조치들은 농민들의 불만을 확대시킬 뿐이었다. 1948년 재임중에 사망했고 부통령인 엘피디오 키리노가 뒤를 이었다(→ 후크발라하프 반란). /브리태니커
인천항(仁川港)은 수도 서울의 관문인 동시에 중부지방을 세력권으로 하는 서해안 최대의 상항(商港)이다. 인천항으로 하여금 근대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하기 위하여 항만 건설에 착수한 것은 1906년이었다.
바지라부드 [Vajiravudh, 1881.1.1~1925.11.26] Phramongkutklao, Rama Ⅵ라고도 함. 진보적 개혁을 추진하고 많은 저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역사와 법학을 공부했다. 또한 산더스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영국군에서 잠시 복무하기도 했다. 1895년 왕세자로 지명되었고, 1903년 시암으로 돌아가 1910년 아버지 출랄롱코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행정과 정치의 개혁자로서는 아버지에 비견될 수 없지만, 그는 일부일처제를 유일한 합법적 결혼형태로 규정하기 위한 국법의 개정, 그레고리력의 채택, 광범위한 천연두 예방접종 실시, 타이 적십자사 설립, 모든 국민이 성(姓)을 갖도록 하는 법률의 제정 등을 포함한 수많은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1917년 시암 최초의 대학인 출랄롱코른대학교를 세웠고, 1921년 초등교육을 무료 의무교육제로 만들었다. 도박장과 아편굴 폐쇄를 시도했으나 대중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는 1917년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했다. 또한 시암을 자신들과 완전히 동등한 국가로 대접하려는 서구 열강의 호의적 감정을 이용하여 과거의 불평등조약을 재협상하고 시암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도록 했다. 바지라부드는 많은 글을 쓰고 번역했다. 대화식 드라마 등의 서양양식을 타이 문학에 도입했다. 수많은 필명으로 50여 편의 희곡을 창작했고, 영국 및 프랑스 극작가들의 작품을 100편 이상 번안했으며,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여러 편 번역했다. /브리태니커
1877 -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인도 여제에 즉위 빅토리아(Victoria, 1819년5월 24일 – 1901년1월 22일)는 영국의 여왕(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이자 인도의 여제(1877년1월 1일 - 1901년1월 22일)다. 본명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하노버(Alexandrina Victoria Hanover), 정식 칭호는 ‘HRH Alexandrina Victoria Hanover von Witten and Saxe-Coburg and Goetha, Dei Gratia Queen of All Britons, Defender Of The Faith, and Empress of India’다. 그녀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로 통칭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와 일치한다. /위키백과
아수엘라 [Azuela, Mariano, 1873.1.1~1952.3.1] 멕시코의 작가. 멕시코 혁명의 거의 모든 장면을 자세히 서술한 20편의 소설을 썼다. 1899년에 과달라하라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뒤, 처음에는 고향에서, 1916년부터는 멕시코 시에서 의사로 일했다. 가장 유명한 〈천민들 Los de abajo〉(1916)은 혁명의 공포를 묘사한 것인데, 1915년 판초 비야의 혁명군에 군의관으로 끌려나가 강제로 행군하는 동안 야영지의 모닥불 옆에서 쓴 소설이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국 텍사스 주 엘파소로 탈출한 그는 1915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24년에야 '발견'되었다. 이 작품은 사회 저항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멕시코의 다른 소설가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고,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1916년에 텍사스에서 멕시코 시로 돌아온 아수엘라는 혁명 투쟁에 환멸을 느끼고, 새로운 정권을 비판하는 〈파리들 Las moscas〉(1918)·〈두목들 Los caciques〉(1917)·〈훌륭한 가족의 재판 Las tribulaciones de una familia decente〉(1918) 등을 썼다. 〈사악한 시간 La malhora〉(1923)·〈보상 El desquite〉(1925)·〈개똥벌레 La luciérnaga〉(1932) 같은 후기 작품에서는 후에 '신소설'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새로운 문체를 실험했다. 그의 전집이 1959~60년에 전3권으로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1867 - 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랑뱅(Lanvin, Jeanne) 출생 잔 랑뱅 [Lanvin, Jeanne(-Marie), 1867.1.1~1946.7.6] 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어린시절부터 의상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양장점에서 아동복과 모자 등을 디자인하면서 기술을 익혔다. 1890년 생오로네에서 자신이 경영하는 양장점을 연 후 섬세한 감각으로 여성복을 디자인해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히 야회복과 무대의상의 디자인에서 뛰어난 감각을 발휘, 랑뱅이라는 브랜드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26년경부터는 남성복의 디자인도 시작했다. 1926년 의상 디자인 부문의 공헌이 인정되어 프랑스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46년 죽었으며, 그후 랑뱅의 사업은 니나리치의 주임 디자이너였던 프랑수아 크라에가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 'Hands and Thimble' 스티글리츠 [Stieglitz, Alfred, 1864.1.1~1946.7.13] 미국의 사진작가. 뉴저지주(州) 호보켄 출생.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로 불린다. 1881년 자녀 교육에 열렬한 부모를 따라 독일로 이주하여 1883년 전기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를린 과학기술전문학교에 들어갔다. 몇 개월 후 구입한 소형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면서 전기공학을 포기하고 사진연구로 전향하였으며, 정색 감광재료색소(整色感光材料色素)의 합성에 성공한 H.W.포겔 교수와 알게 되면서부터 사진 기술연마에 열중, 삼색판(三色版)을 연구하였다(1890∼92). 19세기의 지배적인 사진양식이었던 회화적인 사진을 반대하고, 카메라 기능에 충실한 핀트에 의한 리얼리즘 묘사를 목적으로 하는 스트레이트 포토그라피를 주장하는 한편, 사진조형에 있어서도 근대조형의 이론을 도입하였다. 1902년 ‘사진분리파(Photo-Secession Group)’를 설립한 그는 미국 아마추어 사진계의 지도적 위치에 있으면서, E.스타이켄을 비롯한 당시의 신예사진가들에게도 대단한 영향을 주었고, 미국의 근대사진은 그에 의해 개막되었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공적을 인정받았다. 많은 걸작 중에서 핸드 카메라를 사용하여 스냅 사진적인 묘사 효과를 나타낸 《종착역》(1893)과 《3등 선실(船室)》(1907)은 특히 유명하다. 또한 ‘아마추어 사진협회’의 기관지 《America Amateur Photographer》와 카메라 잡지 《Camera Notes》 《Camera Work》를 편집하였다. 1919년에는 뉴욕에 ‘Photo Secession Gallery’를 개설하여, 유럽 근대미술의 소개와 신흥사진운동의 발전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및 근대 미술 수집품은 유언에 따라 미국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그의 부인은 화가 G.오키프이다. /네이버
오늘의 역사 (1월 1일)[1863년]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선언 링컨 미국 대통령이 남북전쟁이 한창인 1863년 1월 1일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는 자치주에 대해 흑인 노예의 해방을 선언했다. 링컨은 이 선언을 통해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한다고 밝힌 뒤, 해방된 흑인들에게도 옛 주인들에 대한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했다. 노예해방 선언은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는 자치주 즉 남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는 남부의 내분을 노리는 동시에 흑인을 북군의 병력에 흡수하는 효과가 있었다. 노예해방 선언 이후 흑인들이 북군에 입대해 남군과 싸웠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었다. 링컨은 이 선언으로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후세의 역사도 링컨의 바람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노예해방의 인도적인 명분이 링컨으로 하여금 남북전쟁을 수행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미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했을 뿐이다. 노예해방은 단지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911_0001
쿠베르탱 [Coubertin, Pierre de, 1863.1.1~1937.9.2] [오늘의 역사]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 탄생 1863년 오늘,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탱이 태어났다. /충청투데이 2010.06.01 00:08 (6월 1일에서 옮김)
- Hungary 10 Forint (Banknote)
1823 - 헝가리의 시인, 혁명가 페퇴피(Petőfi, Sándor) 출생 페퇴피 [Petőfi, Sándor, 1823.1.1~1849.7.31] 헝가리의 시인, 혁명가. 키슈쾨뢰시 출생. 가난 속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고, 중학 졸업 후에는 군인 ·여행안내원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면서 전국을 방랑하여 민중의 생활과 접촉하였다. 1844년 처녀시집 《시집 Versek》을 발표하고, 이어 같은 해 사랑의 정열과 자연의 아름다움, 조국애를 노래한 많은 서정시 ·민화(民話)에 바탕을 두고 국민적 전설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서사시 《용자(勇者) 야노시 Janos vitez》 등을 발표하였다. 1848∼1849년의 혁명 때에는 시 《일어서라, 마자르인(人)》을 내놓았으며,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독립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격렬한 생명의 환희와 깊은 애수가 교차하는 연애시와 자연시, 예리한 사회풍자와 불타는 정열에 넘치는 그의 시는 P.B.셸리, G.G.바이런, H.하이네 등 낭만파의 서정시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 /naver
- J. J. Dessalines and Paul E. Magloire, 150th Anniv. of Haitian Independence
1804 - 아이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오늘의 역사 (1월 1일)[1804년] 아이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1804년 1월 1일, 카리브해의 조그만 섬 아이티에서 세계최초의 흑인공화국이 탄생했다. 오랫동안 노예제의 사슬에서 신음하던 아이티 민중들은 이날을 기뻐하면서도 이날이 오기까지의 고통스런 세월에 몸을 떨어야 했다. 1791년 8월 22일, 스페인과 프랑스가 분할 점령하고 있던 아이티에서 봉기의 불길이 처음 타올랐다. 흑인들은 그들의 지도자 프랑수아 도미니크 투생을 따라 그들을 지배하던 프랑스인 관리와 농장주의 저택으로 처들어갔다. 투생은 그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인들에게 잡혀, 아이티 노예로 팔려온 탓에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지만, 독학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서적들을 탐독했으며 특히 볼테르가 쓴 글에 감동했다. 투생은 4천여명이나 되는 병사를 지휘하며 프랑스인을 먼저 몰아냈고 1801년에는 섬의 동부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 산토 도밍고를 점령했다. 아이티는 1801년 7월 1일 "노예제를 영원히 폐지하며 피부색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윈칙을 천명한 최초의 흑인 헌법을 선포했지만,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폴레옹은 군사 2만명을 보내 아이티를 재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투생은 프랑스군의 기만술책에 속아 체포돼 옥사했다. 그의 죽음에 격분한 아이티 민중들은 프랑스군에 격렬히 저항, 10월에는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포르토 프랭스를 해방시켰고 마침내 11월 25일에는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날 아이티인은 최초의 흑인 국가수립을 세계에 알렸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126_0059
우타가와 구니요시 [歌川國芳, 1798.1.1~1861.4.14]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화파 화가·판화가. 본명은 이구사 마고사부로[井草孫三郞]. 경쟁자인 우타가와 구니사다[歌川國貞]와 마찬가지로 우타가와 도요쿠니[歌川豊國]의 제자였다. 그는 1827년경에 발표한 〈통속 수호전 호걸 108인 通俗水滸傳豪傑百八人〉이라는 제목의 연작판화를 통해 '무샤에'[武者繪] 화가로 명성을 확립했다. 또한 서양식 원근법을 자주 사용하여 풍경화도 그렸다. 가장 유명한 풍경화로는 10점의 연작판화인 〈도토메이쇼 東都名所〉와 5점의 연작판화인 〈도토후지미36경 東都富士見三十六景〉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로스 [Ross, Betsy, 1752.1.1~1836.1.30] 필라델피아에 살던 소녀시절, 엘리자베스 그리스컴은 바느질솜씨가 뛰어났다. 1773년 존 로스와 결혼하여 그의 실내 장식용품 가게를 함께 경영하다 1776년 남편이 민병대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후에도 그 일을 계속했다. 그녀의 손자 윌리엄 캔비가 1870년 신문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1776년 6월 조지 워싱턴, 로버트 모리스, 그리고 죽은 남편의 삼촌인 조지 로스가 그녀를 찾아와 다음 달에 독립을 선언할 새 국가의 국기를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처음에 그녀에게 주었던 대략적인 바탕그림은 그녀의 의견을 참고해서 워싱턴이 다시 그렸고, 로스는 자기 집 거실에서 국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로스가 국기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있고 캔비의 주장에 대해 반박이 나오지 않게 되자 국기제작 경위에 대해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내려오던 이러한 이야기는 신빙성을 갖게 되었다. 1777년 6월 14일 대륙회의는 성조기(星條旗)를 미국의 국기로 채택했다. 베트시 로스는 이후 2번 더 결혼했으나 남편을 모두 잃고 말년을 7명의 딸들 가운데 1명의 집에서 보냈다. /브리태니커
웨인 [Wayne, Anthony, 1745.1.1~1796.12.15] 별칭은 Mad Anthony Wayne.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유명한 장군. 후에 오하이오 주의 폴런팀버스 전투(1794. 8. 20)에서 북서부 인디언 연합을 격파했다. 펜실베이니아의 제혁공장을 비롯하여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웨인은 1776년 1월 대륙군의 대령으로 부임했다. 그해 봄에 그의 연대는, 캐나다 원정에서 참패하고 후퇴하는 미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후 뉴욕 주에 있는 타이콘더로가 요새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777년초 준장으로 진급한 후 가을에 펜실베이니아의 브랜디와인·패올리·저먼타운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밸리포지 주둔지에서 겨울을 보낸 후 다음해 6월 뉴저지의 몬머스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웨인의 가장 빛나는 전과는 1779년 7월 16일 뉴욕주 스토니포인트에 있던 영국군 요새를 습격해 함락시킨 것이었다. 1781년 1,0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버지니아 주 요크타운 포위작전에 가담해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후 남부의 대륙군에 파견되었다. 주로 조지아에서 복무하면서 실지(失地)를 회복하고 영국군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들을 퇴치했다. 1790년 조지아 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거의 2년 동안 활동했으나 선거부정이 드러나 그의 의석은 공석으로 선포되었다. 1792년 조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미국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미국육군은 그때까지 백인들의 미국 중서부지방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인디언부족 연합에 의해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폴런팀버스 전투에서 웨인은 1,000명의 정예부대로 하여금 모미 강가의 마이애미 요새 근처에서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모인 2,000명의 인디언 전사들을 궤멸시킴으로써 인디언의 저항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이 승리 직후 체결한 그린빌 조약(1795. 8)으로 인디언들은 오하이오 거의 전지역과 인디애나·일리노이·미시간 주의 많은 지역을 양보해야 했다. /브리태이커
1735 - 미국 독립혁명기의 국민적 영웅 리비어(Revere, Paul) 출생 리비어 [Revere, Paul, 1735.1.1~1818.5.10] 미국 독립혁명기의 민중영웅. 보스턴의 은세공사우두머리인 리비어는 1770년대에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장인층과 지식층을 결합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773년 보스턴차사건 때, 인디언으로 분장하여 참가하였고, 1775년 4월 16일에는 영국군의 습격을 각지에 알려 민병에게 요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4월 19일 렉싱턴싸움으로 독립전쟁이 개시되자, 1776년 육군중령으로서 보스턴 항만방위를 지휘하였다. 전쟁 후 압연공장을 설립하여 군함 컨스티튜선호의 건조에 기여하였다. /야후 백과
- 'The Good Shepherd' - 'Self-portrait'
- 'Madonna and Child' - 'Adoration of the Shepherds'
- 'Girl with Fruit' - 'Boy with Dog'
무리요 [Murillo, Bartolome Esteban, 1618.1.1~1682.4.3] 에스파냐 화가. 안달루시아 세비야 출생. 17세기 에스파냐 회화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고아가 되어 불운한 소년기를 보냈지만, 1639년까지 J.카스틸료 밑에서 그림공부를 하여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이어 세비야화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주로 이탈리아의 S.라파엘로(1483∼1520), I.코레조(1494∼1534) 등과 북유럽회화의 거장 P.P.루벤스(1577∼1640), A.반다이크(1599∼1641) 등의 명작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그 때까지 색조에 약간 차가운 느낌을 주던 세비야파적(派的) 그림에서 점차 안정감과 미감(美感)을 띤 훈훈한 느낌을 주는 화풍으로 바뀌었다. 그가 즐겨 그린 성모화는 미묘한 명암과 우아한 형태, 따사로운 색조 속에 자애와 경건함이 가득한 감미로운 작풍그림으로 그를 ‘에스파냐의 라파엘로’라고까지 불렀다. 거리의 거지를 소재로 한 작품도 많으며, 그들 작품에서는 어떤 감미로움이 감돌면서도 날카로운 사실력에 의해 독특한 매력이 풍긴다. 한편 1660년에 신설한 세비야 아카데미의 회장이 되어서는 많은 조수와 제자를 길러냈다. 벨라스케스(1599∼1660)와 함께 에스파냐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로, 풍속화가 ·초상화가로서도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다작의 화가였다. 작품으로 1645∼1646년 세비야프란시스코수도원의 복도에 그린 11장의 그림은 풍속화와 종교화, 사실과 종교적 정감의 결합이고,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원죄 없는 마리아의 발현》(1678)은 그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며, 《로마 지방관의 꿈》(1664)에는 깊은 종교적 정열이 담겨져 빛과 색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네이버
- 'Francois I', by Jean Clouet
1515 -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왕위에 오르다 프랑수아 1세(프랑스어:François Ier, 1494년9월 12일 - 1547년3월 31일)는 프랑스의 국왕으로 1515년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른 뒤, 1547년까지 통치하였다. 발루아 왕가 출신으로는 아홉 번째 군주이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의 첫 번째 르네상스형 군주로 취급받는다. 그의 치세에 프랑스는 거대한 문화적 진보를 이룩하였다. 그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그의 강력한 맞수인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그리고 쉴레이만 대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앙리 4세와 더불어 프랑스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왕이다. /위키백과
츠빙글리 [Zwingli, Ulrich, 1484.1.1~1531.10.11] [역사 속의 인물] 세속적 욕구 옹호한 종교개혁가, 츠빙글리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울리히 츠빙글리는 1484년 오늘 태어났다. 바젤 대학 등에서 인문주의적 교양을 쌓고 나서 23살에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고 절친했던 에라스무스와 서신을 교환하면서 인문학적 바탕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그는 성서 연구로 나아가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는 복음주의로 사상을 넓히며 종교 개혁에 눈을 뜨게 됐다. 그는 면죄부의 해악상을 사람들에게 설교하며 유명해졌다. 츠빙글리의 종교 개혁은 세속적 욕구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39살 때 단식계율을 어기고 친구들과의 만찬에 참석했다가 취리히 교구로부터 경고를 받자 단식계율이 성서에 근거가 없는 것이라며 자신과 친구들을 변호했다. 또 이해에 그는 세 자녀를 둔 과부와 동거하고 있었는데 부인이 있는 10명의 사제와 함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혼서를 주교에게 제출하기도 했다. 그의 종교 개혁론에 많은 사람이 호응했으나 주장이 직설적이어서 적도 많았다. 전쟁의 참상을 경험하고 나서 스위스의 유명한 용병제도를 공격했으나 용병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그는 개신교 자치지역을 장악하고 나서 종교 개혁에 동참하지 않은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 생필품 공급을 중단했다. 그는 결국 47세이던 1531년에 두 세력 간 전투 도중 숨졌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2년 12월 31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8545&yy=2012
이탈리아의 정치가, 시인. 문예부흥기의 시인·문예옹호가로서 피렌체 공화국의 수반(1469∼1492)을 지냈다. 명문 메디치가(家)에서 태어나 아버지 피에로의 뒤를 이어 메디치가 및 피렌체의 황금시대를 가져왔으며, ‘로렌초 일 마그니피코(Lorenzo il Magnifico:위대한 로렌초)’로 불렸다. 반대파를 눌러 메디치가의 전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한편으로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로마교황 및 나폴리왕을 설득하여 전쟁을 피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였다. 소년시절부터 피치노, 란디노의 교육을 받았고 문예옹호자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같은 예술가와 피코, 폴리치아노, 피치노 같은 인문학자를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주위의 철학자·시인들에게 자극을 받아 시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골계시(滑稽詩)·금욕주의적 작품·페트라르카적(的) 연애시로 3대별할 수 있으며, 초기의 《구론(口論)》(1473∼1474), 덧없이 지나가 버리는 청춘을 한탄한 《바커스의 노래》가 뛰어난 작품이다. /naver
1432 - 몰다비아의 대공 알렉산드루 셀 분(Alexandru cel Bun) 사망 알렉산드루 셀 분 [Alexandru cel Bun, ~1432.1.1] Alexander the Good Alexander cel Bun (Romanian: Alexandru cel Bun pronounced [alekˈsandru t͡ʃel bun] or Alexandru I Mușat) was a Voivode (Prince) of Moldavia, reigning between 1400 and 1432, son of Roman I Mușat. He succeeded Iuga to the throne, and, as a ruler, initiated a series of reforms while consolidating the status of the Moldavian Principality. Internal politics Foreign affairs Personal life Alexandru cel Bun had four legitimate wives – Margareta Loszonc, Ana Neacşa, Rymgajla (daughter of Kęstutis and sister of Vytautas the Great of Lithuania; divorced in 1421), and Mariana – and at least three concubines. He had twenty-four sons (including illegitimate) – six of them later reigning in Moldavia – and seventeen daughters. He was father-in-law to Vlad II Dracul and grandfather to Vlad III the Impaler through his eldest daughter, Cneajna (or Vasilisa, or Maria Muşat) He died on January 1, 1432, and was buried in the Bistriţa Monastery. http://en.wikipedia.org/wiki/Alexander_the_Good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