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과 훈습(copy-recopy)
12연기에서 六入 이후 生 이전의 有까지는
욕계 세상에 태어나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고 일단 읽으시면 편할 겁니다.
이 말은 다른 구도로도 설명이 가능하지만 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六入을 生으로 읽으시면 이른바 12연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여튼 六入은 과거 누겁의 전생의 업보, 즉 舊業입니다.
이것 자체는 선, 불선도 아닌 無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지금까지 전생하듯이 윤회할 수도 있고 완전히 해탈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六入상태에서 생겨나는 사건들이
觸-受-愛-取-有라는 법수들입니다.<*12연기에서 나타나는 법수들>
또한 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합니다.
6內(六入)-6外-6識-6觸-6受-6想-6思-6愛-6尋-6伺 : 총60법
혹은 앞부분은 동일하고 나머지 2그룹에 -6界-5蘊 : 총59법
여기까지 정리해 보겠습니다.
六入 |
| (識) | 觸 | 受 |
| (行) | 愛 | 取--有 |
6內 | 6外 | 6識 | 6觸 | 6受 | 6想 | 6思 | 6愛 | 6尋 | 6伺 |
6內 | 6外 | 6識 | 6觸 | 6受 | 6想 | 6思 | 6愛 | 6界 | 5蘊 |
먼저 윗줄의 六入이란 욕계에 태어남(生)이라면
근이 성숙되지 않았거나 근을 모두 구족하지 않은 욕계 중생들이 아니라면
(이하 욕계 인간을 기준으로 설명)
六入에서 바로 [6內-6外]까지는 바로 이해는 됩니다.
그러면 12연기에서 3번째 지분의 (識)이 6識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마도 이른바 재생연결식(여기서는 욕계에 걸맞은)이 現行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재생연결식이란 전생들에서 생겨났던 '(6식)알음알이'의 총합 혹은 대푯값이지 싶습니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이른바 삼사화합이라는 觸인데 이것이
12연기의 첫 번째 지분인 無明에 의한 觸 즉 이른바 無明觸의 現行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후의 受想思는 (識) 혹은 6識이 생겨나면 따라 생겨나는 법수들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중에서 思는 (行) 즉 <신행-구행-심행(의행)>에 속하는, 혹은
앞서 언급되지 않은 법들이라고 읽어도 됩니다.
愛는 고집성제에서 무명과 함께 언급되며
[無明觸受]에서 생겨난 법이 愛인데 이 갈애는 3가지로 분류합니다.
그 중에 욕계 중생들에게 가까운 원인이 되는 갈애가 감각적 욕망의 갈애(慾愛)이고
그 내용이 위 도식의 6愛입니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방식에 따라 가까운 원인을 기준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어떤 특정 법을 중심으로 먼 것에서 가까운 순서로 혹은 그 반대로 설명하기도 하지 싶습니다.
때로는 이 둘을 섞어서 설명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신행-口行-심행(의행)>에서는 심을 중심으로 보면
심행(의행)이 먼저 나타나고 그리고 나머지 분류들이 나타날 것 같지만 역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身行-과-心行(의행) 이 둘을 의존하여 생겨나는 口行은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kimārammaṇā, samiddhi, purisassa saṅkappavitakkā uppajjantī”ti?
“nāmarūpārammaṇā, bhante”ti.
“사밋디여,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사람에게 사유가 일어나는가?”
“존자시여, 정신과 물질[名色]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납니다.”]
그래서 眼耳鼻舌身(口)意 순서로 나타나는 경문{法句經}도 있습니다.
위 도표의 마지막 줄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6尋-6伺>가 口行입니다.
즉 욕계 중생들에게 66의 순서상으로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법수들입니다.
마지막에 언급되는 연기지분의 [取--有]에 상응하는 법수들이 <6界-5蘊>이고
이 법수들의 공통점은 界입니다.
또한 상응하는 법수들이 <6尋-6伺>입니다.
(6)尋伺는 욕계 중생들의 口行이고 66법의 막장입니다.
이러한 <6界-5蘊>과 <6尋-6伺>는 진행상으로는 마지막에 언급되지만
이 법들은 慾이라는 界에 相(니밋따) 형태로 다시 貯藏(기억, 念) 됩니다.
여기서 기억(sati)이라 함은 '갈애'의 동의어로 읽으셔도 됩니다.
[ “yaṃ kho, bhikkhu, divā kammante ārabbha rattiṃ anuvitakketi anuvicāreti —
ayaṃ rattiṃ dhūmāyanā.
비구여, 낮에 행한 것에 대해 밤에 사유하고 고찰하는 것이 밤에 연기를 내뿜는 것이다.
yaṃ kho, bhikkhu, rattiṃ anuvitakketvā anuvicāretvā divā kammante payojeti
kāyena vācāya manasā — ayaṃ divā pajjalanā.
비구여, 밤에 사유하고 고찰한 것을
낮에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에 적용시키는 것이 낮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아주 넓게 12연기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그릴 수도 있습니다.
[무명-행-식-명색]을 <식-명색>을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거나
누겁의 전생에서 행한 신구의(3업)으로 생각할 수 있고
[육입-촉-수-애-취-유]을 <애-취-유>을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거나
금생에서 행한 신구의(3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업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생-노사]입니다.
혹은 [무명-행]을 <애-취-유>와 짝을 짓고
[육입-촉-수]를 [생-노사]로 상응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조합이 가능합니다.
경문에도 이와 같은 취지의 설명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순환을 보여주는 예는 더러 볼 수 있지만
(6)尋伺는 욕계 중생들의 口行이고 66법의 막장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훈습된 법수들이 현행되고 또한 이렇게 현행된 법수들이 훈습되기도 합니다.
즉 [觸-受-想-思-愛-尋-伺(혹은 5蘊)]으로 훈습된 법들이 현행되기도 하고
<觸-受-想-思-愛-尋-伺(혹은 5蘊)>으로 훈습되어 또 다시 현행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합니다.
[ “yaññadeva, bhikkhave, bhikkhu bahulamanuvitakketi anuvicāreti, tathā tathā nati hoti cetaso.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것에 대해 사유를 거듭해서 일으키고 고찰을 거듭하다보면
그대로 마음의 성향이 된다.]
예를 들어 [尋-伺]로 현행되는 것이 이른바 66법의 마지막 법수들이고
훈습되어 있어서 다시 현행될 준비가 된 상황이
[ dhātuṃ,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saññā, uppajjati diṭṭhi, uppajjati vitakko”ti.
비구들이여, 요소를 반연하여 인식이 생기고 견해가 생기고 생각이 생긴다.]
[ kāmadhātuṃ, bhikkhave, paṭicca uppajjati kāmasaññā,
kāmasaññ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saṅkappo, kāmasaṅkapp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cchando,
kāmacchand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pariḷāho, kāmapariḷāhaṃ paṭicca uppajjati kāmapariyesanā.
kāmapariyesanaṃ, bhikkhave, pariyesamāno assutavā puthujjano tīhi ṭhānehi micchā paṭipajjati —
kāyena, vācāya, manasā.
비구들이여, 감각적 욕망의 요소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이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인식을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사유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의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의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기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에 대한 열기를 반연하여 감각적 욕망에 대한 추구가 일어나고,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서 배우지 못한 범부는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로 그릇된 도를 닦는다.]
이와 같이 <현행되는 상황에서 훈습이> 이루어지는 것인지
<훈습된 상태에서 현행>에 대한 설명인지 어느 시점에 대한 경문인지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물론 [尋-伺]는 욕계와 연관되어 있는 감각적 욕망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욕계를 벗어나려는 생각, 혹은 욕계를 벗어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색계와 연결되어 있는 사유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단 이러한 [尋-伺], 口行은 색계 초선이 한계입니다.
[尋-伺]에 대해 정리하면
먼저 욕계와 관련된 [尋-伺]인지 색계(초선)와 관련된 [尋-伺]인지가 먼저 구분되어야 하고
그리고 copy와 관련된 [尋-伺]인지 recopy와 관련된 [尋-伺]인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흔히들 三科라고 하는 界, 處, 緣에 대해서
후자의 두 가지 숙제는 경문에 자주 나오며 많이 언급되지만
정작 무위계, 열반계, 불사계
혹은 3계(욕계, 색계, 무색계)라고도 언급되는 界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첫댓글
그림에서 마지막 법수인 [5蘊] -<取>가 [有]된 것이 명색으로 훈습되고
이렇게 훈습된 명색에 식이 주처로 삼는 것을
명색 연 식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6界를 取하여 (모태에 듦, 듦이 있을 때) 명색이 현현한다.>는 것은
훈습된 것이 현행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六入상태에서 생겨나는 사건들이
觸-受-愛-取-有라는 법수들입니다.<*12연기에서 나타나는 법수들>
또한 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합니다.
6內(六入)-6外-6識-6觸-6受-6想-6思-6愛-6尋-6伺 : 총60법
혹은 앞부분은 동일하고 나머지 2그룹에 -6界-5蘊 : 총59법 //
에서 /6內(六入)-6外-6識-6觸-6受-6想-6思-6愛-6尋-6伺/는 M148의 육육이 아니군요.
육육은 일체의 감역에서 청정함에 대한 필요성의 경문이지요.
근데, 위에 언급한 소위 법수들 즉, /6內(六入)-6外-6識-6觸-6受-6想-6思-6愛-6尋-6伺/의 근거는
대념처경 D22의 사성제에서,
갈애로 인해서 생기거나 그치는 집.멸성제에 대한 경문의 내용이 아닌가요?
님은 2개 경문을 섞어서(짜집기) [尋-伺]에 무리하게 이끌고 있다고 봅니다.
M148의 육육의 핵심요지는 초불(각묵스님)에서 말하길,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먼저 존재를 여섯–여섯으로 해체해서 설하시고(§§4~9) 다시 존재를 이처럼 여섯–여섯으로 해체해서 보면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님 즉 무아라고 극명하게 드러남을 밝히신 뒤(§§10~33), 이렇게 하면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역설하신다.(§§34~39) 이렇게 하여 근–경–식–촉–수–애에 염오하고(§40) 이욕–해탈–구경해탈지의 정형구로 깨달음을 실현한다(§41)는 가르침으로 본경은 구성되어 있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비구들은 취착 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했다고 본경은 강조하고 있는데(§41) 이처럼 해체해서 보기는 큰 위력을 가진 가르침이다."
(출처: https://cafe.daum.net/chobul/RCpX/145?q=M1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