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날으는 새 두마리'
- 김환기 '산' (공중전화 카드)
2012 - '수화' 김환기 회고전 (1.6~1.26, 갤러리 현대) 낮엔 태양빛, 밤엔 전깃불 아까워 붓 놓을 수 없었다… 김환기 회고전 1월 6일부터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한국 현대회화의 독창성을 구축한 김환기(1913∼1974)는 작품성 면이나 상업성 면에서 가장 인정받는 작가라는 평가다. 생전 3000점에 이르는 왕성한 작품 활동으로 ‘한국의 피카소’라는 별명이 붙었고, 사후에는 국내외 각종 경매에 출품된 그의 작품들이 억대에 낙찰돼 ‘블루칩 작가’로 떠올랐다. 명실공히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그의 대규모 회고전이 6일부터 2월 26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과 신관에서 열린다. 갤러리현대가 2010년 박수근, 지난해 장욱진에 이어 기획한 ‘한국 현대미술 거장’ 전의 일환으로 내년에 탄생 100주년을 앞둔 김환기의 1930년대 작품부터 작고 직전까지 시대별 대표작 60여점을 소개한다.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일본대학 미술부를 나온 김환기는 30년대 추상화를 거쳐 50년대 우리 것을 그려야겠다는 의식으로 달 매화 학 항아리 등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1부 ‘서울시대Ⅰ’(1937∼56)에서는 ‘피난열차’ ‘항아리와 여인들’ ‘답교’가, 2부 ‘파리시대’(56∼59)에는 ‘항아리와 꽃가지’ ‘산’이, 3부 ‘서울시대Ⅱ’(59∼63)에는 ‘달과 매화와 새’가 각각 전시된다. 4부 ‘뉴욕시대’(63∼74)에는 동양적 정체성을 점으로 표현한 추상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0만개의 점’ 등을 선보인다. 이 시기 작품들은 기존의 푸른색에서 회청색으로 변했고 특히 74년 작 ‘무제’는 가장 우울한 느낌을 준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그해 7월 25일 뉴욕의 한 병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서울 창신동에서 살던 어린 시절, 여름이면 부채질을 하는 등 조수 노릇을 했다는 김 화백의 둘째딸 금자씨는 “아버지는 유머감각이 있었고 늘 웃으며 다정다감했다”며 “뉴욕에서 작업할 때 편지를 보내셨는데 ‘낮에는 태양빛이 아깝고 밤에는 전깃불이 아까워 잠시라도 붓을 놓을 수가 없다’고 적었다. 그래서 병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회상했다. 이번 전시 작품 가운데 50년대 작 ‘귀로’와 64년 작 ‘메아리’, 64∼65년 사이에 제작된 ‘무제’는 처음 공개된다. 출품작 전부 개인 소장자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이 소장자와 평소 쌓은 친분 덕분에 가능했다. 박 회장은 “미술 애호가인 소장자 대부분이 회장들이라 연락도 잘 안돼 작품을 모으기가 쉽지는 않았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평론가, 작가, 화랑, 언론 등 미술계 전문가 100명과 일반 관람객 1000명을 대상으로 ‘가장 선호하는 김환기의 대표작’을 조사한다. 또 10일 오후 2시 전시장에서 유홍준 명지대 교수의 특강이 열리고 2월 20일에는 김 화백의 흔적을 찾아가는 ‘신안 김환기 생가 투어’가 진행된다(02-2287-350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국민일보 2012.01.05 18:38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 1&gCode=kmi&arcid=0005712239&cp=du
2009 - 새옷 입은 분단철마 “다시 달리고 싶다” 휴전선 비무장지대 안에 녹슨 채 방치돼 있던 ‘분단 철마’가 50여년 만에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문화재청은 분단 상징물로 유명한 경기도 장단역 터 증기기관차에 대한 과학적 보존처리를 지난해 말 끝내고 6일 언론에 공개했다. 이 기관차는 2006년 임진각 관광지 안 보존처리 센터로 옮겨져 포스코의 기술·재정 지원 아래 구조보강, 녹 제거 등의 보수·복원 공정을 거쳤다. 기관차는 올해 안에 임진각 주변으로 옮겨져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이 기관차는 한국전쟁 발발 뒤인 1950년 12월31일 황해도 한포역에서 개성역을 거쳐 장단역에 들어왔다가 운행을 멈췄으며, 2004년 2월 근대문화재로 등록됐다. 파주/ 노형석 기자 /한겨레 2009-01-06 오후 08:50:30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1696.html
오늘의 역사 (1월 6일)[2003년] 부산 광안대로 개통 부산의 새로운 명물이 될 광안대로가 2003년 1월 6일 개통됐다. 지난 1994년 12월 착공 후 총사업비 7899억원을 들여 8년여의 대역사 끝에 완공된 것이다. 광안대로 개통에 따라 부산시 측은 수영로의 교통사정이 크게 좋아지고, 신선대.감만부두 등의 컨테이너 물량이 경부고속도로와 신속히 연결됨에 따라 물류비용도 절감 및 해운대에서 광안리까지 소요시간 대폭 단축을 예상하고 있다. 광안대로는 수영구 남천동과 해운대구 우동을 잇는 바다 위 2층 다리로 길이가 교량구간 6220m와 육상 램프구간 1200m 등 7420m에 이른다. 규모가 큰 만큼 이름도 교량구간은 광안대교로, 교량과 램프구간을 모두 합해서는 광안대로로 붙여졌다. 개통 이후 5월 31일까지 무료통행기간을 가진 후 6월 1일부터 2028년 5월 31일까지 25년간 요금을 징수한다. 교량구간 중 광안리해수욕장 앞을 지나는 현수교 구간만 길이가 900m로 현수교중 국내 최장이다. 현수교 및 트러스교 구간 1680m에 설치된 화려한 경관조명을 자랑한다. 국내에서 처음 채택된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등 1184개와 조명제어시스템으로 구성돼있어 10만가지 이상의 각종 색상을 연출할 수 있다. 갈매기가 날아가는 형상의 다리 모습이 하루중 시간대, 요일, 평일·주말, 계절 등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색깔로 광안리 해변의 야경을 멋지게 장식하게 된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30327_0012
1996 - 가수 김광석(金光石) 사망 김광석 [金光石, 1964.1.22~1996.1.6] 오늘의 역사 (1월 6일)[1996년] 인기가수 김광석씨 사망 인기가수 김광석씨(32)가 1996년 1월 6일 새벽 4시쯤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원음빌딩 4층 자기 집 거실에서 전깃줄로 목을 매 자살했다. '노래하는 음유시인' 김광석씨의 돌연한 죽음은 그의 음악을 사랑하던 팬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줬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거리에서' '나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 '사랑했지만' 등 수십곡의 히트곡을 발표했던 그는 서정적인 노래들로 20∼30대 젊은층들 사이에 인기를 누려온 국내의 간판 포크스타다. 김광석은 1980년대 운동권 출신으로 기성 가요계에 진출한 첫 가수이다. 명지대에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통기타를 치던 그는 1984년 대학 노래패에 가입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87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합류해 운동권 음악의 기수 역할을 했으며 1988년 1월 대학생들이 만든 7인조 포크록그룹 '동물원'의 리드보컬로 제도권 음악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음악적 지론은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삶의 얘기를 노래하고 싶다는 것. 김씨는 직접 작곡작사한 멜로디와 노랫말 속에 이런 생각을 녹여냈고, 많은 젊은이들은 그의 음악 속에서 삶을 관조하는 여유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1114_0003
오늘의 역사 (1월 6일)[1993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은 고려의 직지심경(=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1377년간)보다 30여년 앞선 고려의 금속활자본 '삼장문선'이 발견됐다. 1993년 1월 6일 상암문고가 "고려시대 서적원 간행의 '삼장문선'(원제 신간류편역거삼장대책)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며 이 책을 공개했다. 출간연대는 1341년에서 1370년 사이로 '직지심경' 보다 짧게는 7년, 길게는 36년 앞서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에 확인된 고려 금속활자본의 활자들은 대-중-소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자 본문에 소자 두줄로 주석을 달아 인쇄할 수 있는 완벽한 체제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활자와 체제외에도 내용이 구본은 고려본, 신본은 조선본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삼장문선'은 원나라에서 주관한 국제적인 과거시험(향시와 중서성 회시)의 대책문제를 뽑아 고시관의 비평을 곁들인 명답문집으로, 이 책에는 1314년에서 1335년까지의 출제가 들어있고 초간본은 1341년에 나왔다. 내용에 고려본인 구본은 경의를 표시하는 대두법을 사용, 원황제나 황실이 나오면 문장을 별행하고 있으나 조선본은 이를 무시, 출판국가가 다름을 확연하게 증거하고 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1127_0005
북한과는 1976년 4월 수교하였으나 1998년 공관을 폐쇄하였고, 한국과 1992년 1월 수교하였다. 1993년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에 가(假)서명하였다. 1994년 앙골라의 수산장관이 방한하였고, 1995년 한국이 평화유지군으로 공병대 198명을 파병하였다. 1998년 현재 대(對)한국 수출은 1억 631만 9000달러, 대(對)한국 수입은 1억 8184만 3000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광물 연료이며, 수입품은 자동차, 세제, 고무제품, 전기기기, 섬유류 등이다. 1999년 현재 23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2001년 2월에는 앙골라 대통령 호세 에두아르도 도스 산토스(Jose Eduardo dos Santos)가 방한하였다. /naver
오늘의 역사 (1월 6일)[1990년] 우리 국적기가 1990년 1월 6일 정기편으로는 최초로 소련 영공을 통과해 서울-파리간을 운항했다. 여객기는 이날 밤 10시30분 서울발 파리행 대한항공 901편이 니가타-하바로프스크-모스크바 항로를 거쳐 7일 오전 3시30분 파리에 도착했다. 여객기에는 승무원 20여명과 승객등 2백90여명이 탑승했다. 이 여객기의 정기항로는 서울을 떠나 앵커리지를 경유해 파리에 도착하는 것이지만 대한항공측은 앵커리지 남쪽 리다우트 화산의 폭발로 기존항로 운항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시베리아 항로를 택했다. 교통부 관계자는 앵커리지의 화산폭발 활동이 장기화되고 있는데다가 4월 한-소간 직항로 개설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시험비행 차원에서 관계기관과 협조, 소련측의 영공 통과 허가를 얻어냈다고 밝혔다. 우리 국적기의 소련 영공 통과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동구권 선수단 수송을 위해 시베리아 영공을 통해 헬싱키까지 여객기를 운항한 일은 있으나 이때는 모두 전세기였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30_0010
남북한 동시 수교를 맺고 있다. 북한은 1958년 10월 외교관계 수립에 합의하여 1960년 6월 14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였다. 남한은 1978년 1월 6일 정식 국교를 수립하고 세네갈에 대사관을 두어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협력하고 있다. 무역은 2002년 대한수입액 932만 달러, 대한수출액 1억 6267만 달러이다. 2003년 체류자 42명이다. /yahoo
1978 - 카터, 주한미군 철수 재고 [역사속 오늘] 카터, 주한미군철수 재고 주한미군 철수를 대통령 선거공약으로 내세웠던 지미 카터! /YTN 2011-01-06 목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1060019298409&s_mcd=0422
천이[陳毅(진의), 1901.8.26~1972.1.6] 중국 혁명 공신인 '10원수'의 한 사람이며 외교부장을 역임한 진의가 1972년 1월 6일 밤 11시 55분 숨을 거두었다. 71세였다. 1901년 사천성에서 태어나 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했던 진의는 그곳에서 데모하다 체포되어 1921년 강제로 송환되었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양국 수뇌가 직접 만나게 함으로써 중단된 회담을 재개시키고 한일 수교의 실마리를 찾으려 했다.출발은 1953년 1월 5일이었다. 클라크 장군이 보내온 C-54 수송기가 부산 수영비행장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 수행원은 나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이었다. 유엔군사령부 연락장교단장으로 도쿄에 주재하고 있던 김정렬 공군 소장이 현지에서 합세하게 돼 3군의 선임자가 대통령을 보좌하는 모양새가 됐다. <861>老兵이 걸어온 길-111-한일 정상회담 수행 /국방일보 http://kookbang.dema.mil.kr/kdd/ColumnTypeView.jsp?writeDate=20081120&menuCd= 2001&menuSeq=16&kindSeq=1&menuCnt=30917
1941년 1월 6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Roosevelt, Franklin D., 1882~1945)가 4가지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를 토대로 한 의회 연두교서를 발표했다. 그는 이 연두교서에서 전세계적인 사회·정치 분야의 목표로 언론 및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종교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를 내세웠다. 루스벨트는 공포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나라가 세계 어느 지역에 대해서도 물리력에 의한 침략행위를 할 수 없도록 모든 국가는 철저하게 군비축소를 이행하자"고 제의했다. 같은 해 8월 그는 윈스턴 처칠과 함께 발표한 대서양헌장에서 이 전세계적 목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후 이 목표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등 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배경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의 흥례문 구역을 몽땅 헐어낸 것이 1914년 7월이고, 다시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겠다고 지진제(地鎭祭)를 올린 것이 1916년 6월 25일이었다. 그로부터 건물을 완공하여 이른바 시용식(始用式)을 거행한 것이 1926년 1월 4일이었다. 그러니까 다 지어올리기까지 무려 1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C3%BB%BB%E7
[조선총독부 건축일지] 1916.06.25 - 기공식 1926.01.04 - 시용식 1926.01.06 - 청사 이전 1926.10.01 - 준공식
- 'Welcome to Korea' (공중전화 카드)
1924 - 제15대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출생 김대중 [金大中, 1924.1.6~2009.8.18] [오늘의 역사]김대중 전 대통령 출생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24년 오늘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충청투데이(http://www.cctoday.co.kr) 2010.01.05 18: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1186#
- 조선일보 창간 80주년 기념 (2000.3.4 발행)
-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 (1990.3.31 발행) 오늘의 역사 (1월 6일)[1920년] 3ㆍ1독립만세 운동은 일제의 무단정치를 포기토록 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며 식민지 조선 지도층에는 대오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같이 무단정치에 한계를 느낀 일제는 제3대 조선 총독으로 사이토 마코토를 임명, 1919년 9월 10일 이른바 4개항의 ‘문화정책’을 발표했다. 민간지 발행허가도 그중 하나였다. 민간신문 허용방침이 알려지자 1919년 10월 장도빈이 ‘서울일보’를 신청하는 등 수십건의 발행허가 신청이 총독부로 몰려들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112
루스벨트 [Roosevelt, Theodore, 1858.10.27~1919.1.6] 오늘의 역사 (1월 6일)[1919년] 미국의 제26대 대통령이었던 데오도르 루스벨트가 1919년 1월 6일 사망했다. 미국 뉴욕주 뉴욕시 출생으로 1900년 대통령 W. 매킨리 밑에서 부통령으로 있다가 매킨리의 암살로 1901년 9월 제2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1904년 재선됐다. 대통령 재임시 내정면에서는 혁신주의를 내걸고 트러스트 규제, 철도통제, 노동자 보호입법, 자원보존 등에 공헌하였으며, 외교면에서는 먼로주의의 확대해석에 의하여 베네수엘라 문제, 카리브해 문제, 파나마운하 건설 등 강력한 외교를 추진했다. 특히 러-일전쟁의 조정, 모로코 문제 중재 등에도 적극 힘써 1907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121
뉴멕시코주(New Mexico)는 미국 남서부에 있는 주로 주도(州都)는 샌타페이이다. 동쪽은 그레이트플레인스, 남쪽은 멕시코, 북쪽은 로키산맥, 북서쪽은 콜로라도고원에 각각 접하며, 사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로키산맥 남부가 주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이곳에서 발원하는 리오그란데강(江)과 페이커스강이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지형상으로는 휠러산(4,011m)을 최고봉으로 대부분이 해발고도 1,500m의 고원을 이루고 있다. 기후는 연강수량 150∼650mm로 건조하며 스텝과 사막이 널리 전개되고 있으나, 산지에는 삼림이 무성한 곳도 있다. 그러나 남부의 사막지대에서 애리조나주와 멕시코에 걸친 지역에는 선인장이 많아 특이한 경관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옛날에는 인디언의 거주지였으나, 1840년 에스파냐인(人)이 탐험한 이래 백인들이 금을 찾아 모여들기 시작한 후부터 발달한 곳으로, 16세기 후반부터 에스파냐 식민지를 형성했다. 그후 1821년 멕시코령(領), 1848년 멕시코전쟁으로 미국령이 되었고, 1912년 47번째 주로 미국에 편입되었다. /naver
1912 - 미국의 배우 대니 토머스(Thomas, Danny) 출생 토머스 [Thomas, Danny, 1912.1.6~1991.2.6] Danny Thomas (January 6, 1912 - February 6, 1991) was an Lebanese American nightclub comedian and television and film actor, best known for starring in the television sitcom Make Room for Daddy (also known as The Danny Thomas Show). He was also the founder of St. Jude Children's Research Hospital. He was the father of Marlo Thomas, Terre Thomas, and Tony Thomas. Early life http://en.wikipedia.org/wiki/Danny_Thomas
"성공한 인생의 증거는 업적이나 재물과는 전혀 상관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있다."
- 대니 토머스
[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伊몬테소리, 어린이집 개원 “교육은 더는 지식을 전수하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1884 -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멘델(Mendel, Gregor) 사망 멘델 [Mendel, Gregor Johann, 1822.7.22~1884.1.6] [오늘의 경제소사/1월6일] 멘델 아무도 몰랐다. 그의 논문은 35년간 도서관에서 잠잤다. 1884년 1월6일 사망한 지 16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멘델(Gregor Johann Mendel)의 위업을 깨달았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 sec&sid1=110&oid=011&aid=0000065576
- 'The Prophet', by Kahlil Gibran
1883 - 레바논 태생의 철학적 수필가, 시인, 화가 칼릴 지브란(Gibran, Kahlil) 출생 지브란 [Gibran, Kahlil, 1883.1.6~1931.4.10] [오늘<1309>(1월6일)] 지브란 미국으로의 이민과 역이민, 파리 체류와 유럽 각지로의 여행 등으로 성장기와 청년기를 보낸 지브란은 27세 때인 1910년 뉴욕에 영주 정착했다. 그는 그 뒤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독신으로 살며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지만, 오스만제국에 맞선 조국 레바논의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지원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지브란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것은 아랍어로 쓴 소설 ‘부러진 날개’(1912)다. 두 젊은이의 순정한 사랑이 파멸하는 과정을 아랍세계의 사회ㆍ종교적 모순의 맥락에 배치한 이 작품은 즉각 여러 언어로 번역돼 지브란의 열광적 팬덤(fandom)을 만들어냈고, 영화와 연극으로도 각색되었다. 그 뒤 얼마간 지브란이 쓴 작품들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923년에 출간된 산문시 ‘예언자’는 다시 한 번 지브란의 명성을 정점으로 밀어올렸다. ‘예언자’를 이루는 텍스트에 지브란이 처음 달려든 것은 스무 살이 막 넘어서였다. 그는 그 뒤 20여년 동안 아랍어 초고를 손수 영어로 옮겨가며 이 텍스트에 매달려 세기의 베스트셀러를 완성해냈다. 그 구성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에서 무스타파라는 인물은 사랑, 결혼, 노동, 우정, 믿음 등 삶의 근본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교한다. 죽기 다섯 해 전에 출간한 아포리즘 모음 ‘모래와 거품’도 널리 읽힌 책이다. 지브란은 이 책에서 너, 나, 취(取)하기, 신, 사랑, 아름다움, 대지라는 일곱 개 주제에 대해 생각을 펼쳐보이고 있다.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 life/200501/h2005010514410725340.htm&ver=v002
레이번 [Rayburn, Sam(uel) (Taliaferro), 1882.1.6~1961.11.16] 미국 민주당의 지도자. 17년간의 하원의장직을 포함하여 1913~61년의 48년 동안 하원의원을 지냈고 막후에서 폭넓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긴 공직생활 덕분에 '미스터 데모크래트'(Mr. Democrat)라 불렸다. 가족이 텍사스 주로 이주한 뒤 농장에서 자랐으며 교사생활을 하다가 바넘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곧 정치에 관심을 기울여 1907~13년 주 의회 의원을 지냈고 1911년에는 하원의장에 취임했다. 레이번은 1912년 최초로 연방하원에 진출하여 당선된 뒤 25차례 연속 재선되었다. 정력적이고 학구적이며 패기에 차 있고 사교적이었던 그는 정부와 당내 비공개회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31~37년에 의회내에서 막강한 권한을 지닌 주간(州間) 및 대외통상위원회의 위원장으로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 뉴딜 정책 입안에 기여했다. 그가 발의한 6개 주요법안은 철도회사법·투자신탁법·증권거래법·연방통신법·농촌전신화법·공공시설소유법인데, 공공시설소유법은 뉴딜 입법 가운데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37년 민주당 원내총무, 1940년 9월 하원의장에 취임한 레이번은 신랄한 논평, 정직성, 불굴의 애국심 등으로 유명했으며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 뒤를 이은 3명의 대통령에게 진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헌신적인 민주당원으로서 스스로를 '접두사도 접미사도 필요없는 문자 그대로의 민주당원'이라고 표현했다.1961년에 50년 동안 원내 최대의 쟁점이었던 하원운영위원회 확대문제를 성사시킨 뒤 건강이 악화되어 끝까지 회기를 지켜보지 못한 채 귀향했다. 1975년 앨프러드 스타인버그가 쓴 전기 〈샘 레이번 Sam Rayburn〉이 출간되었다. /브리태니커
샌드버그 [Sandburg, Carl, 1878.1.6~1967.7.22] 미국의 시인·역사학자·소설가·민속학자. 11세부터 이발소 급사, 우유배달차 운전수, 벽돌공, 캔자스 밀농장 일꾼 등 여러 가지 일을 했다. 1898년에 미국 -스페인 전쟁이 터지자 일리노이 제6보병대에 입대했다. 이러한 어린시절은 그의 자서전 〈언제나 어린 이방인 Always the Young Strangers〉(1953)에 기록되어 있다. 1910~12년에 사회민주당 조직원이자 밀워키 시장의 비서로 일했다. 1913년 시카고로 이사하여, 경제지 〈시스템 System〉의 편집인이 되었고 그뒤에는 〈시카고 데일리 뉴스 Chicago Daily News〉의 임원이 되었다. 1914년 〈포이트리 Poetry〉지에 일군의 〈시카고 시 Chicago Poems〉(1916)가 실렸다. 가장 유명한 시 〈시카고 Chicago〉에서 잘 웃고 건장하며 부주의한 '백정, 연장 제작자, 밀을 쌓는 사람, 철도주식 투기꾼, 짐꾼'을 통해 시카고의 도시 풍경을 잘 그렸다. 샌드버그의 시는 발표되자마자 좋은 반응을 얻었다. 휘트먼식의 자유시 형식인 시집 〈연기와 강철 Smoke and Steel〉(1920)에서 "피츠버그·영스타운·개리, 이들은 사람들과 함께 강철을 만든다"라고 노동자들을 찬미했다. 〈안녕 아메리카 Good Morning, America〉(1928)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일부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심각한 경제 대공황을 겪으면서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민중의 힘을 시적으로 처리하여 〈그렇다, 민중이여 The People, Yes〉(1936)를 썼다. 환호하는 청중 앞에서 그가 부른 민요를 모아 〈미국의 노래주머니 The American Songbag〉(1927)와 〈미국의 새 노래주머니 New American Songbag〉(1950)를 펴냈다. 유명한 전기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The Prairie Years〉(2권, 1926)과 〈에이브러햄 링컨 Abraham Lincoln:The War Years〉(4권, 1939, 1940년 역사부문 퓰리처상 수상)을 썼다. 샌드버그의 매부인 유명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전기 〈사진가 스타이켄 Steichen the Photographer〉이 1929년에 나왔다. 필그림 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밟은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의 미국의 경험을 요약한 장편소설 〈추억의 바위 Remembrance Rock〉를 출판했다. 〈시전집 Complete Poems〉은 1950년에 나왔다. 아동도서 〈루터배가 이야기 Rootabaga Stories〉(1922)·〈루터배가 비둘기 Rootabaga Pigeons〉(1923)·〈루터배가 컨트리 Rootabaga Country〉(1929)·〈감자 모양 얼굴 Potato Face〉(1930) 등을 썼다. /브리태니커
스크랴빈 [Skryabin, Aleksandr (Nikolayevich), 1872.1.6~1915.4.27] 러시아의 작곡가. 주로 피아노곡과 관현악곡을 작곡했으며 독특한 음색으로 음악의 상징성을 실험했다. 1882~89년 모스크바 카데트 학교에서 군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나, 음악도 함께 공부하여 N. 츠베레프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1888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V. I. 사포노프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S. 타네예프와 A. 아렌스키에게 작곡을 배웠다. 1892년경 음악원을 졸업하여 피아노 소품 작품 1·2·3·5·7을 작곡했다. 1897년 피아니스트 베라 이사코비치와 결혼했으며 1898~1903년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후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1904년 스위스에 정착했다. 1900년 이후 신비주의 철학에 빠졌으며, 같은 해 작곡된 교향곡 1번은 신앙의 한 형식으로서 예술을 찬미하는 내용의 스크랴빈 자신이 쓴 가사에 곡을 붙인 합창 피날레 악장을 지니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교향곡 3번 〈마법의 시 Le Divin Poème〉를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1905년 A. 니키슈에 의해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의 문학적 표제는 '우주(신성한 자아)와의 통일성을 위한 인간 영혼의 범신론에서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표제를 쓴 타티아나 슐뢰처는 한때 스크랴빈이 아내를 버리고 관계를 가졌던 여자였다. 신지학적 사상은 관현악 작품인 〈법열의 시 Poème de l'extase〉(1908, 뉴욕 시)·〈프로메테우스 prometheus〉의 기초를 제공해주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연주할 때 색채를 투사하는 배경 스크린이 필요하다. 1906~07년 미국을 여행하면서 사포노프와 M. 알트슐러와 연주회를 가졌으며, 1908년에는 브뤼셀에서 신지학 그룹과 자주 접촉했다. 1909년 그는 그의 작품을 지휘하고 출판도 해준 지휘자 S. 쿠세비츠키의 격려를 받고 러시아로 되돌아왔다. 이무렵 그는 더이상 음악만을 생각하고 있지 않고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신비'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 작업은 음악·시·춤·색채·향기가 하나가 되어 '최상의 궁극적 법열(法悅)'을 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의전극'을 만들어내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는 더 나아가 자신을 인류의 궁극적인 화음을 소리내며 이 화음을 영혼과 결합하는 메시아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비'의 '예비적 행위'를 위한 시를 썼으나 이에 대한 음악은 스케치만 남겼다. 스크랴빈의 명성은 감각적이고 정교하게 연마된 피아노 음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피아노 작품으로는 10곡의 소나타(1892~1913), 1곡의 협주곡, 다수의 전주곡, 그밖에 소품들이 있다. 그의 관현악 작품은 관현악에 의한 피아노 작품이라는 인상을 주며, 젊은시절 쇼팽의 예찬자였던 그는 일찍부터 독자적 양식을 확립했다. 사상이 점차 신비주의적이고 자아중심적이며 내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의 화성 양식(배음렬의 높은 부분음들로 만들어진 화음들에 기초함)은 난해해졌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많은 화성 개혁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새로운 어법이 음악 언어에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지지자들에게 충분히 납득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쇼팽, 프랑스 인상주의, R. 슈트라우스, 러시아 음악 양식의 전통을 한데 종합했으며, 그에 따라 현대 러시아 음악 발전에 일익을 담당한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다. 피아노 협주곡 F 단조 작품 20과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등 몇몇 작품들은 꾸준히 세계 무대에서 연주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 Horta Museum
- Horta Museum, Saint Gilles 오르타 [Horta, Victor, 1861.1.6~1947.9.8] 벨기에의 건축가. 아르 누보 양식을 구사한 뛰어난 건축가로서 벨기에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헨리 반 데 벨데와 파울 한카르에 비견할 만한 대가이다. 1876~81년 브뤼셀의 아카데미 데 보자르에서 공부한 뒤 신고전주의 건축가인 알퐁스 발라의 제자가 되었다. 단독으로 설계한 최초의 작품은 브뤼셀에 있는 4층짜리 타셀 저택(1892~93)으로 신고딕 양식이나 신로코코 양식의 요소가 뒤섞여 있긴 하나 유럽 대륙에 선보인 최초의 아르 누보 양식 건물로 꼽힌다. 이 건물에서는 여러 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는 팔각형 홀이 이채로우며 아르 누보 양식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곡선이 정면과 내부에 구사되었다. 브뤼셀에 있는 풍만하고 우아한 작품으로는 정면의 소조(塑造) 처리가 뛰어난 솔베 저택(1895~1900)과 윈싱게르 저택(1895~96), 아메리켄가(街)에 있는 자택(1898)이 있다. 주요작품은 브뤼셀에 있는 시민회관(Maison du Peuple:1896~99)으로, 벨기에 최초로 철과 유리를 대거 사용한 정면이 있다. 건물 안 강당 지붕의 철골 빔은 구조적 요소인 동시에 장식 효과를 낸다. 1900년부터는 장식사용을 절제하고 노출 철골을 제거하여 자신의 작품을 단순화했다. 1912년 아카데미 교장이 되었고 이후 단순하고 고전적인 양식으로 미술궁전(Palais des Beaux-Arts:1922~28)을 설계했다. 마지막 주요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공사를 시작한 브뤼셀에 있는 중앙 철도역사이다. /브리태니커
브라유(Braille, Louis, 1809.1.4~1852.1.6] [어제의 오늘]1852년 점자 창안자 루이 브라유 사망 ㆍ시각장애우에게 ‘문자 표현’ 희망 루이 브라유의 일생은 송곳으로 꺾이고 송곳으로 다시 핀 삶이었다. 프랑스 쿠브레에서 태어난 그는 마구와 안장 제작기술자인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3살 때 가죽과 송곳을 쥔 채 놀다가 손에서 미끄러진 송곳이 왼쪽 눈을 찌르면서 시력을 잃었다. 나머지 한쪽 눈도 감염되면서 5살에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그의 부모는 바로 위 형제와 13살 터울의 늦둥이 막내인 그의 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브라유는 읽고 쓰기를 익혔고 10살에는 파리의 왕립맹아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를 계속했다. 학교라곤 했지만 위생이나 시설이 형편없는 곳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브라유는 학구열에 넘치는 학생이었다. 학교 설립자인 발랑탱 아우이가 창안한 돋음문자로 만든 몇권되지 않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구리선에 종이를 눌러서 만든 책은 제작비용을 아끼려 합본으로 만들어져 무게가 권당 30㎏에 달해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고행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읽을 수만 있을 뿐,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방법은 없었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1-05 20:55:5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052055565
역사속 오늘- 모스전신기 공개 시연 1838년 1월 6일 미국 뉴저지주 모리스타운에서 발명가 새뮤얼 모스가 발명한 전신기 공개 시연이 벌어졌다. 이때 모스가 사용했던 것이 바로 모스부호. 모스는 1832년 프랑스 유학에서 귀국하던 중 전신기에 대한 착상과 고안을 했다. 모스가 고안해낸 전보문 전송 방식은 점(`)의 수와 그 간격을 달리 해 숫자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특정한 숫자를 전송한 후 그 숫자에 지정돼 있는 특정 의미를 읽어내게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모스는 일정한 숫자를 각 단어 및 간단한 문장에 맞추어 은어표(隱語表)를 생각해 냈다. 91페이지로 구성된 이 은어표의 각 페이지에는 단어와 상용문구를 91개씩 기입하고 페이지와 행을 지시함으로써 약 8천어 정도의 어구를 전송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오늘날과 같은 점(`)과 선(-) 방식을 만든 것은 모스 전신기의 제작동반자였던 A 베일이었다. 점의 수에 의한 숫자 전송방식이 불편하다고 느낀 베일이 이에 선을 더해 훨씬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 통신하고자 했던 것. 이를 위해 신문사 등에서 사용하는 문자의 빈도를 조사한 뒤 사용도가 빈번한 문자는 아주 간단한 부호로 충당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모스부호의 근원이다. 이 모스부호는 1844년 워싱턴~볼티모어 사이의 전신개통에 사용된 후 점진적으로 개량되어 국제간에서 널리 사용되는 모스부호가 됐다.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매일신문 2005년 01월 06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936&yy=2005
- 'Dante' - Illustration from 'Perrault's Folk Tale'
도레 [Doré, (Paul-)Gustave, 1832.1.6~1883.1.23] 프랑스의 판화제작자. 19세기말에 많은 작품을 남긴 삽화가 중 한 사람이다. 풍부하면서도 괴이한 상상력으로 환상적인 장면들을 많이 그려 낭만파 아카데미 화가들이 널리 모방했다. 1847년 파리로 가서 1848~51년 〈Journal Pour Rire〉에 매주 캐리커처 석판화들을 기고했으며, 석판화집(1847~54)도 여러 권 출판했다. 나중에는 목판으로 제작한 삽화들로 명성을 얻었다. 목판조각가들을 40명 이상 고용해 삽화가 들어 있는 책을 90권 이상 출판했다. 작품 중 빼어난 것으로는 〈라블레 전집 Oeuvres de Rabelais〉(1854), 발자크의 〈기이한 이야기들 Les Contes drolatiques〉(1855), 〈2절판 성경〉(1866), 단테의 〈지옥편 Inferno〉(1861) 등이 있다. 종교적 인물이나 역사적 인물들의 큰 초상 조각가로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러한 작품에서는 삽화의 자연스런 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브리태니커
슐리만 [Schliemann, Heinrich, 1822.1.6~1890.12.26] [역사속의 인물] 하인리히 슐리만 "아킬레스와 헥토르가 성(城)을 세바퀴 돌면서 싸울 만한 장소는 이곳 뿐이야." 오늘 트로이 유적의 발견자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이 독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살 소년은 호머의 '일리아드'를 읽으면서 꿈을 키웠고 중년이 돼 그 누구도 실존할 것이라고 믿지 않던 트로이를 발굴함으로써 꿈을 이뤘다. 당시만 해도 '일리아드'는 영웅·미녀가 등장하는 설화 수준의 얘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1873년 슐리만이 터키의 히살리크에서 3년간 악전고투 끝에 트로이를 발굴하면서 '대서사시'라는 영광스런 명칭을 얻게 됐다. 그의 위대함은 불 탄 트로이성을 발견하고 왕의 보물을 얻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가난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악조건을 딛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인간승리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거기다 무역업으로 떼돈을 벌었고 29살 연하의 미녀 아내와 함께 고대 유적을 찾아 나서는 등 마치 동화속 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도 고고학계의 공격을 받고 있다. 학자가 아니라는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사기꾼' '도굴범'에다 설익은 지식과 보물 욕심에 유적을 파괴했다는 오명까지 쓰고 있다. 범인(凡人)의 사고를 뛰어넘은 선각자에게 늘 따라다니는 굴레이기에 인간사가 더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는가.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1월 0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59&yy=2009
"내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조사 활동은 땅 속에 묻힌 고대 예술작품을 연구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런 발굴자들의 관습적인 연구 목표는 내가 지금 전념하고 있는 역사 연구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다. (중략) 나의 유일한 목표는 역사적 사실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고 그런 점에서 일부 저명한 역사학자 ·지리학자의 견해와 다르다."
- 하인리히 슐리만
1799 - 러시아의 광물학자, 기상업무 창안자 아돌프 쿠퍼(Kupffer, Adolf) 출생 쿠퍼 [Kupffer, Adolf Yakovlevich, 1799.1.6~1865.5.23] Adolph Kupffer Birth: Jan. 6, 1799 Death: May 23, 1865 Director of the Russian Academy of Science in St Petrsburg. Mineralogist, founder of the first meterological service in the world. German-born, he was known in Russia as Adolf Yakovlevich. http://www.findagrave.com/cgi-bin/fg.cgi?page=gr&GRid=29357996
프란시아 [Francia, José Gaspar (Rodriguez) de, 1766.1.6~1840.9.20] 파라과이의 독재자. 강력한 통치와 자급자족 정책으로 국가를 고립시켰으며 다른 정치제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신학을 공부했으나 법률로 방향을 바꾸어 변호사가 되었다. 1811년 스페인 통치를 타도한 혁명 위원회의 비서가 되었고 1813년에는 공동통치자가 되었다. 이듬해 독재자로 선출되었고 1816년에는 종신 독재자의 자리에 올랐다.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된 것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1813년 아르헨티나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파라과이가 외부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흘러드는 강의 수로밖에는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독립을 계속 유지하기로 마음먹은 프란시아는 아르헨티나로 이어지는 내륙 수운을 금지하는 한편 대외무역도 금했다. 이로써 파라과이는 외부세계와는 동떨어진 고립국가가 되었고 사람들의 출입국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엘 수프레모'(최고통수권자)라 불린 프란시아는 국가의 세수입을 통제하고 국내 산업을 육성해 파라과이를 자급자족 국가로 만드는 한편 근대적인 농업방식과 가축 사육법을 도입했다. 이와 함께 군대를 조직해 장비를 갖추었으며 종교재판을 폐지하고 신학대학을 억압했다. 또한 십일조를 폐지하고 귀족들의 특권도 박탈했다. 그는 검소하고 정직했으나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통치자였다. 파라과이 국민들은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으나 이는 초보적 수준이었으며 아울러 그들은 정치적 자유를 상실했다. /브리태니커
몽골피에 [Montgolfier, Jacques-Étienne, 1745.1.6~1799.8.2] 몽골피에 형제 [Joseph-Michel and Jacques-Étienne Montgolfier] 프랑스의 기구(氣球) 제작자. 열기구(熱氣球) 개발의 선구자이고, 처음으로 줄을 매지 않고 비행했다. 몽골피에의 기본설계에 의해 수정·개량되어 만들어진 더 큰 기구는 수년 뒤에 상층 대기를 탐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항공기). 몽골피에 형제는 프랑스 남부 아노네 근처 비달롱의 작은 마을에서 번창하는 제지공장을 경영하는 피에르 몽골피에의 16명의 아이들 가운데 태어났으며, 그들이 열기구실험을 할 때 아버지가 재정지원을 했다. 아버지의 제지공장을 경영하면서도 그들은 계속 과학실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1782년 가열공기를 크고 가벼운 종이나 직물자루에 모으면 자루가 공중으로 떠오르게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1783년 6월 4일 형제는 아노네의 시장에서 그들의 발견을 처음으로 공개실험했다. 그들은 밀짚과 양털을 태워 자루 바닥에 있는 구멍을 통해 가열공기를 기구에 채웠다. 기구는 공중으로 약 1,000m 정도 떠올라 10분 정도 머물렀으며 떠오른 곳에서 2.4㎞ 이상 떨어진 지표면에 내려앉았다. 형제는 파리와 베르사유를 여행하면서 1783년 9월 19일 양·수탉·오리를 실은 더 큰 기구를 공중으로 올리는 실험을 되풀이했다. 그 기구는 약 8분 동안 떠다니다가 떠오른 곳에서 약 3.2㎞ 떨어진 곳에 안전하게 착륙했다. 1783년 11월 21일 필라트르 드 로제에, 프랑수와 로랑 아를랑데 후작부인을 승객으로 태우고 처음으로 줄을 묶지 않은 유인비행을 했다. 이 기구로 파리 상공에서 약 25분 동안 9㎞를 비행했다. 형제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예우를 받았으며, 항공학에 관한 책을 발행하면서 과학경력을 계속 쌓았다. 형인 조제프는 열량계와 자동 양수기를 발명했고, 동생인 에티엔은 송아지나 어린 양 등의 가죽으로 만드는 벨럼지(紙) 제조공정을 개발했다. /브리태니커
베르누이 [Bernoulli, Jakob, 1655.1.6~1705.8.16] 스위스 베르누이가(家)의 첫번째 수학자. 변분법의 첫번째 원리를 도입했다. 그가 발견한 베르누이 수(數)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약제상 집안의 자손인 그는 신학을 공부하도록 강요받았으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여행을 통해 수학자들과 폭넓은 서신교환을 했으며, 교회로부터의 임명을 거절하고 1687년 바젤대학의 수학교수직을 받아들였다. 존 월리스(영국), 아이작 배로(영국), 르네 데카르트(프랑스), 그리고 처음으로 베르누이의 관심을 미적분학으로 이끌었던 G. W. 라이프니츠 등의 수학적 업적을 통달한 뒤 그는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690년대는 하강곡선을 분석하는 데 적분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두 끝을 매단 줄이 중력을 받아 이루는 곡선인 현수선에 대한 1691년의 연구는 현수교 건설에 곧바로 적용되었다. 1695년에는 미적분학을 다리 설계에 응용하기도 했다. 이 몇 년 동안 그는 동생 요한 베르누이와 수학적 쟁점에 관해 종종 토론을 했다. 베루누이의 선구적 저작인 〈추론의 예술 Ars Conjectandi〉(1713년에 출판된 유작)에는 그의 가장 훌륭한 개념들이 많이 실려 있다. 즉 순열과 조합의 이론, 베르누이 수(이를 이용해 지수급수를 유도했음), 수학적·도덕적 속성의 논술법, 근대 표본이론(標本理論)에 바탕이 되는 베르누이 대수(大數) 법칙(Law of large numbers)을 포함한 확률문제 등이 있다. 그의 업적은 〈야코프 베르누이 저작집 Opera Jacobi Bernoullii〉(2권, 1744)으로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 'The Crucifixion' Tapestry by - Alleged portrait of Bernard Jan van Roome and Bernard van Orley by Albrecht Dürer van Orley
- Belgium, 500 Francs (Banknote) 1541 - 플랑드르의 화가 베르나르트 반 오를레이(Orley, Bernard van) 사망 오를레이 [Orley, Bernard(Barend) van, 1487-1491~1541.1.6] Bernard는 Bernaert, Barend라고도 씀.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린 플랑드르의 화가, 태피스트리 도안가. 화가인 발렌틴 반 오를레이의 아들로 1515년 네덜란드 섭정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에게 고용되었고 3년 후에 궁정화가로 임명되었다.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1521년에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1512년경에 그린 최초의 대작은 성 토마와 마태오를 묘사한 제단화인데 가운데 부분은 빈 미술사박물관에, 그리고 양쪽의 날개 부분은 브뤼셀 왕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516~22년에는 플랑드르의 화가 얀 마뷔즈의 화풍을 따랐으나 그후에 라파엘로의 영향을 받았는데 당시 브뤼셀에는 라파엘로의 태피스트리 밑그림들이 수년 간 소장되어 있었다. 이 두 화가의 영향은 현재 브뤼셀 왕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제단화 〈Banquet of the Children of Job〉(1521)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를레이의 초상화 가운데 이 미술관에 있는 〈헤오르흐 젤레의 초상〉(1519)은 서명과 연대표기가 있는 유일한 현존 작품이다. 그가 도안한 태피스트리는 〈막시밀리안의 사냥 Hunts of Maximilian〉(루브르 박물관)과 〈파비아의 승리 Victory of Pavia〉(나폴리)가 있다. 미국에는 유명한 〈천사들과 함께 있는 동정녀와 아기 예수 Virgin and Child with Angels〉(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외에도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몇 점이 소장되어 있다. /브리태니커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6~1431.5.30] 오늘의 역사 (1월 6일)[1412년] 프랑스 성녀 잔 다르크 출생 성녀(聖女)’ 잔 다르크가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412년 1월6일 프랑스 동레미에서 태어났다. 백년전쟁은 영국이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고집해 1338년부터 1453년까지 115년동안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며 프랑스 땅을 황폐화시킨 전쟁이다. 잔 다르크는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지만 신앙심 하나 만은 누구 못지않은 농촌처녀였다. 그에게 ‘나라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가 내려진 것은 열세살이었지만 그가 전쟁에 뛰어든 것은 4년 후였다. 그는 열일곱살 때 곧 프랑스 국왕이 될 샤를 왕세자를 찾아, 흰 갑옷과 프랑스 왕가의 문장(紋章)이 수놓인 군기를 전달받았다. 전선을 종횡무진하는 그의 모습은 좌절과 실의에 빠졌던 프랑스군의 사기를 되살려, 프랑스 최후의 방어선 오를레앙을 해방시키고 기적같은 연전연승을 거둔다. 그러나 신(神)도 은총을 거두었는지 영국군에 사로잡혀 1431년 5월30일, 마녀로 낙인찍혀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열아홉이었다. 잔다르크의 활약상은 셰익스피어의 사극 ‘헨리 6세’, 쉴러의 희곡 ‘오를레앙의 처녀’ 등 문학 곳곳에서 재현돼 역사를 뛰어넘는다. 라이프지(誌) 선정 ‘1천년 밀레니엄’을 일구어 낸 100인에 오르기도 했던 그도 한때는 기피인물 1호가 된 적이 있었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이 그를 우상시하며 집회 때마다 동상을 앞세우고 행진했기 때문. 영국인은 지금까지도 잔 다르크(Jeanne d’Arcㆍ아르크 사람 잔)를 고유명사로 인정하지 않고 ‘조운 오브 아크(Joan of Arc)’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며 분을 삭힌다. 샤를 드골은 ‘찰스 오브 골’이라고 부르지 않으면서.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114
리처드 2세 [Richard Ⅱ, 1367.1.6~1400.2.14(?)] 잉글랜드의 왕(1377~99재위). 강력한 반대파 귀족계급과 싸워 패배·사망했으며, 이때문에 이후 85년간 잉글랜드의 왕권은 약해지고 불안정하게 되었다. 흑세자(黑世子) 에드워드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3세의 손자로 1377년 6월 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숙부였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비롯해 에드워드 3세 재위 말년에 권력을 잡은 귀족들이 계속 나라를 다스렸다. 곤트의 실정(失政)은 흑사병과 백년전쟁(1337~1453)으로 일어난 경제난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결과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리처드는 최초로 큰 위기를 맞았다. 이때 그는 고문관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는 한 듯하지만 대단히 침착하게 거짓 약속을 제시하여 반란세력을 무마시켰다(1381. 6. 14~15). 1382년 보헤미아의 앤 공주(1394 죽음)와 결혼했으며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1385년에 이르러 그는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비어 같은 대수롭지 않은 정신(廷臣)들로 개인적 추종세력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애런들 백작 리처드 피철런, 워릭 백작 토머스 드 비첨 등이 이끄는 반대세력들도 등장했다. 곤트는 줄곧 파벌들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다가 1386년 7월 카스티야에 자신의 왕조를 세우겠다는 개인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면서 리처드를 적들의 수중에 내버려두었다. 리처드의 적들에게 부추김을 받은 의회는 리처드의 비서인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을 탄핵하고(1386) 11인위원회를 만들어 1년간 국왕의 활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리처드가 이같은 조치에 대해 왕권을 침해하는 반역적인 위법행위라고 선언하자 그의 적들은 이에 맞서 1388년 의회를 열어 리처드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을 범법자로 몰았고, 일부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궁지에 몰린 국왕은 청원파(appellants)라고 불리는 5명의 반대파 주요 지도자들에게 굴복했지만 1389년 5월에 이르러 성년이 된 군주로서 독자적인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했다. 1389년말 곤트가 스페인에서 돌아와 상황을 진정시킴에 따라 리처드는 이후 8년간 곤트 및 청원파들과 외견상 화목한 관계로 지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국왕은 줄곧 이전의 적들에게 보복할 기회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다시 더욱 강력한 국왕 지지파를 결속해나갔으며 1397년 무렵에는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애런들을 반역죄로 기소해 처형시켰으며 워릭을 추방하고 글로스터를 투옥·살해했다. 청원파였던 곤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과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1398년 9월 분쟁을 일으키자 국왕은 이 기회를 틈타 두 사람을 모두 추방했다. 뒤이어 1399년 2월 곤트가 죽자 리처드는 볼링브룩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가문의 막대한 영지를 몰수했다. 그러고 나서 같은 해 5월 그는 아일랜드로 떠났는데 이것은 큰 실수였다. 그가 없는 동안 볼링브룩이 잉글랜드를 침공해 귀족들을 규합했고, 리처드는 8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싸워보지도 못하고 볼링브룩에게 항복했다. 그는 9월 30일 폐위되고 볼링브룩이 국왕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리처드는 10월에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4개월 뒤 그곳에서 죽었는데 아마도 스스로 굶어 죽은 듯하다. 셰익스피어가 〈리처드 2세 Richard Ⅱ〉에서 그가 살해당했다고 이야기한 것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리처드는 예민한 문학적 감식안을 지녀 제프리 초서, 존 가워, 장 프루아사르 같은 문인들을 후원했다. A. B. 스틸이 쓴 전기 〈리처드 2세 Richard Ⅱ〉가 1941년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