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 수똥언니
연재 : 인기짱소설, 인터넷소설닷컴 공동연재
1
사락
한순에 흐르는 물결처럼 부드럽게 잡혀드는 고운 비단치마를 꽉 쥔 하얀 손이 손 마디의 뼈가 툭 튀어나올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사뿐 사뿐 한 계단을
걸어올라갈때마다 비단치맛자락들이 서로 맞부딪히며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아하게 걷는 모양새가 퍽이나 고왔지만, 그 누가 알리오. 그 비단 치맛
속에 우아하게 걸음을 내딛고있는 다리가 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후들후들 떨리고 있음을. 그것을 들키지 않기위해 치맛자락을 쥔 손에 든 힘을 도저히 풀 수
가 없다는 것을. 그녀의 옆에서 보기에도 웅장함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궁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펼쳐놓고서 조잘 거리던 궁녀아이가 수다를 멈추고서
잔뜩 굳은 얼굴로 자신을 뒤따르는 은녹을 돌아보고서 조심스레 물었다.
“ 저…어디가 불편하시옵니까? ”
“ 아, 아니요. 그냥 궁궐이 낯설어서 …적응이 안돼서 그러네요. ”
궁녀의 물음에 서둘러 고개를 내젖고서는 우아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은녹. 그런 은녹의 같은 여인이 보아도 눈이 시릴만큼 고운 미소에 정신이 알딸해진 궁녀
는 그렇느냐며 대충 얼버무리고선 앞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은녹의 표정은 아까의 그 여유롭던 미소는 온데 간데 없었고, 오로지 낯선 것에 대
한 경계심 가득한 긴장감과 두려움만이 자리잡고 있었다. 머릿속이 핑 하고 도는것만같은 이질적인 느낌에 입술을 자꾸만 깨물게 되었다. 집에서 부터 향이가
곱게 칠해주었던 붉은 연지가 벌써 다 지워진듯, 입 속 가득히 연지의 텁텁한 맛이 느껴졌다. 몇 백개의 어마한 계단을 올라선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며 지금
까지 자신이 거쳐온 화려하고도 웅장함이 비할데가 그지없는, 궁궐을 뒤돌아 보았다. 유일하게 금으로 집을 지을수 있는 곳. 황제가 사는 거대한 황궁. 그 속
에서 죽어나는 이가 수백이요, 그 대신 입궁하는 이가 수천이라. 이제 겨우 100년의 역사를 세워올린 홍 나라의 궁궐의 가히, 대륙 최고의 미美를 뽐내는 아
름다운 미궐美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 십, 수 백개의 계단. 그리고 세밀한 부분까지 입이 쩍 하고 벌어질 정도로 세심하게 새겨져있는 화려한 무늬. 그 값
만도 엄청나 보이는 궁궐의 금으로 만들어진 대들보들. 황궁만이 사용할수있는 홍와(紅瓦:붉은 기와)가 눈이 시릴만큼 화려했다. 대궐문 하나를 통과 할 적 마
다 고개를 숙여오는 수백명의 궁녀들과 내관들.
새삼 말로만 듣던 황궁이라는 곳에 들어와 보니, 궁 밖에서 상상하던 허황된 상상들이 거짓이 아니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은녹은 걸음이 빨라 어느덧 저 만치
가있는 궁녀의 뒤를 따라 최대한 우아함을 유지하며 걸음을 빨리 하였다.
서근전(曙瑾殿:태후가 기거하는 곳)
“ 이제 서근전에 당도하였사옵니다. 태후마마를 뵙기위해서는 몇 가지의 간단한 예의를 갖추어야 하옵니다. ”
“ 아, 네. 들었어요. ”
지금까지의 수다를 떨며 호들갑스럽던 장난끼많아 보이는 궁녀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 지자, 덩달아 진지해진 은녹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경청했다.
고작 궁녀아이 하나의 말에 날아가는 새조차도 떨어뜨린다던 세도가의 여식이 집중하고 있다고 하면 지나가던 행인이 다 비웃을 일이었지만, 밖에서는 그녀가
훨씬 우월하다 하더라도, 궁 안에서 십 몇년을 살아온 궁녀가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녀의 궁에서의 인생의 선배나 다름이 없었다.
“ 태후마마를 뵈오면, 맨 먼저 ‘태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만나뵙게 되서 황공하고, 감읍하기 따름이옵니다.’라고 말을 하셔야 되요. 그리고, 절대로 태후
마마께 왼쪽 손의 새끼손가락에 결함이 있음을 지적하시거나, 흠칫이라도 거리시면 안되요. 절대로. ”
“ 네! 그건 궁궐에 입궁하기 전에 들었었어요. ”
“ 아, 들으셨다면 다행이구요. 그리고, 차를 마실때는 어떤 손동작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꼭 가지런히 손을 다 모아 붙여서 찻잔을 집어야 해요. 새끼 손가락을
따로 살짝 든다거나, 엄지손가락을 살짝 든다거나 하는 버릇은 절대로 보여서는 안되요. 태후마마께서는 그렇게 찻잔을 잡아서 마시는 사람을 제일 눈 밖에 나
하시거든요. ”
“ 명심할게요. ”
그 외에도 이것저것 조심해야 할 것들 투성이였다. 태후의 앞에서는 기침소리도 내면 안되며,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습관또한 내보이면 되지 아니하고, 입술을 깨
무는 것또한 용납되질 않는다고 한다. 다행히 입술을 깨무는것과 머리칼을 쓸어올리는 버릇외에 조심해야할것들이 없어, 내심 안심하면서도 그렇게나 조심할 사항
이 많은 태후의 성정이 어떠할지 긴장되었다. 부디 마음씨 좋으신 태후이셨으면 했지만, 이리 많은 요구사항을 바라는것을 보아하니 그닥 좋지만은 않은듯 했다.
드디어, 궁녀가 조심스레 서근전의 대궐대문만큼 커다란 문앞에 서서 문전 궁녀에게 그녀가 왔음을 알렸다. 그러자 문전 궁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 대서림(大書臨: 홍나라 종1품의 관직)대감의 여식, 서 은녹 아가씨드시옵니다!”
잠깐 뜸이 들여지더니, 이내 약간 높은듯한 목소리가 ‘들라하라.’라고 말하는것이 들려졌다. 그러자 궁녀가 먼저 문을 열어 주었고, 졸지에 금방 서근전 안으로
들어서게된 은녹은 극도의 긴장감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녀의 단아한 이마엔 모로 흐르는 이슬방울같은 땀이 있었다.
열리지 않고 마냥 굳게 닫혀있을것만같은 커다란 장지문이 옆으로 사르륵 열리며 코를 찌르는 사향내가 그녀의 고운 아미를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곧 곱게 펴지며
언제 그랬냐는듯 긴장어린 미소를 지은 은녹이 치맛자락을 바닥에 끌지않도록 발등까지만 살짝 걷어올려 서근전안으로 들어섰다.
“ 태후마마 천세천세 천천세, 만나뵙게 되어서 황공하고 감읍하기 따름이옵니다.”
“ 이리 와서 않지. ”
입이 떡 벌어질정도로 호화로운 장식품으로 꾸며진 서근전 내부의 모습에 놀라워하며 커다란 두눈을 더욱 크게 키우는 그녀를 향해 낭랑하지만 서릿발처럼 차가운
여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른 고개를 조아리고서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너무나도 크게만 느껴지는 의자는 잔뜩 위축되어진 은녹의 작은 몸을
묻어버리기라도 할 듯, 웅장한 크기를 자랑했다. 마냥 고개만 숙이고 있던 은녹에게 태후의 것으로 추정되는 차가운 목소리가 한번 더 들려왔다.
“ 고개를 들라. ”
그 말에 당장 고개를 올리는 은녹.
“ 흐음. 얼굴은 꽤나 반반하군. ”
반반하다는 수준을 뛰어넘어 가히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소문난 은녹의 얼굴을 별 다른 감흥없는 표정으로 훑어내리는 태후는 역시나, 깐깐하고 무서워 보였다. 게다
가 이제 춘추가 스물 두살이나 되신 황제폐하의 모후라고 한다면 족히 마흔은 되셨을 터인데, 외관상 보기로는 이제 겨우 서른 남짓해 보이셨다. 무서우리 만큼 젊어
보이는 그녀의 피부는 자신의 것보다도 더 탱탱해 보였다. 치맛자락을 꽉 쥔 손에 땀이 찼다.
“ 올해로 나이가 몇이라고? ”
“ 아….열아홉이옵니다. ”
“ 한창 물이 올랐을때지… ”
앞에 놓여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한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 그녀가 처음 꺼낸말이었다. 그녀에 대한 무성한 소문은 궁 밖에서도 귀가 닳도록 들어 왔던 것
이었다. 무서울 만큼 대단한 동안인 데다가, 그 성정또한 불같으신 분이시라고. 여인이라고 모르고 사셨던 성황폐하께서 유일하게 두신 정실 부인인시데다가, 딱 한명
뿐인 자식인 황제를 둔, 그리고 그 황제의 모후이신 대단하다고 밖엔 말 할 수 없는 여인. 그에 당연하게도 그녀는 오만하고 당당했으며,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을
지니신 분위기를 압도하는 위엄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과연, 그 소문들은 허투루 난것들이 아니였나 보았다. 들었던 그대로 였으니 말이다.
“ 젊음이란 좋은것이야….”
우아하게 한모금 마신뒤 찻잔을 놓으며 꺼낸 말이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 궁녀아이가 일러준 주의사항을 이것저것 다 생각해내며 그녀의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란
참으로 힘들고도 어려운 것이었다.
“ 황궁에 와보니 어떤가? ”
“ 네? 아…름답습니다. 그 위엄또한 굉장하기 그지 없사옵고….”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혹스러움에 횡설수설하자, 태후의 입가엔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그것을 본 순간 은녹은 아차 싶었다.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명색의 종1품의 관직인
대서림의 여식이라는 자신이 이렇게나 보잘것없는 어휘력을 쓰다니. 태후의 앞에두고 이것이 무슨 망신스러운 꼴이란 말인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은 자신을 욕되게 하는것
보다도자신의 아비를 욕되게 하는것이었다. 수치심에 은녹이 볼을 붉히자, 태후가 느긋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 꽤나 떨렸나 보구나. 이리도 횡설수설을 하는것을 보니. ”
“ 황공하옵니다. 태후마마. ”
“ 이해해주지. 흐음 ”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그 뱀같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어보는 태후의 눈길에 은녹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듯 했다. 하지만 감히 태후의 앞에서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수는 없는법. 은녹은 눈을 꼭 감고서 그 시선을 견뎌내었다.
“ 훗. 배짱하나는 두둑해 보이는구나. ”
그러자 한참뒤에 그녀의 웃음소리와 함께 호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놀란 은녹이 감았던 눈을 뜨고서 그녀를 바라 보자, 태후의 입가엔 조소가 아닌 미소가 걸려있었
다. 당혹스러움에 은녹이 경망스레 눈을 돌렸지만, 이윽고 제대로 태후를 바라보던 은녹이 조심스레 물었다.
“ 어이하셔서 그렇다고 느끼시옵니까? ”
자신이 물어 놓고서도 제가 더 놀라 은녹은 그만 자신의 경망스럽게 내두른 입술을 두손으로 꼭 막았다. 미쳤군, 도대체 자신이 무슨짓을 한 것인가. 당돌한 그녀의 말에
태후는 기가막힌듯 실소를 터뜨렸다. 은녹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할수 없었다. 자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태후께 어이하려 그랬냐는 버
릇없는 물음을 하다니. 웃음을 그친 태후의 표정은 냉담했다.
“ 당돌하기 그지 없구나. ”
그녀의 압도적인 위엄이 담긴 한마디에 다시 한번 자신의 무례함을 느낀 은녹은 차마 고개 조차 들 수없을만큼 무안하고, 부끄러운 감정에 고개를 푹 숙인채 그녀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한 번 노려본 태후가 이어 말했다.
“ 더불어 아주 막돼먹었어. ”
“ 송구하옵니다, 태후마마. ”
“ 앞으로 네가 살아야 할 황궁은 지금 처럼 송구하다는 한마디에 해결되지 못할 일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지금 니가 한 잘못은 내가 기분이 불쾌하다고 강하게 그 감정을
드러냈다면, 당장 궁 밖으로 내쳐질 정도였어. ”
궁 밖으로 내쳐진다. 그렇다면, 그 뒤에 이어질 수많은 사람들의 질시와 비난의 눈초리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은녹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태후 앞에서 지켜야할 금기
사항중의 하나가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다행히도 태후의 시선은 그녀의 눈에 꽂혀있어 앙다문 그녀의 입술은 채 눈치채지 못한듯 했다.
“ 역시 가미려의 딸 답구나. ”
한참의 침묵뒤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가 미려. 그 이름 석자를 어찌 잊을수가 있을까. 자신의 하나뿐인 어머니.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안된지는 이미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
다. 자신과 다른이들은 변한것이 없는데, 세월은 물이 흐르듯 그렇게 쉽게 흘러가 버린듯 했다. 하지만 자신의 버릇없는 행동과 어머니와 무슨 연관이 있다는것인가.
은녹은 이해할수없다는 눈빛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의 붉은 입가엔 흥미어린 미소가 걸려있었다. 도저히 그 심중을 헤아릴수없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그 누군가가 말했던가. 그 말이 꼭 들어 맞는듯 했다. 서글한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미소를 지을때는 덧없이 곱고, 따스해 보이다가도 일 순간
웃음을 그치고 날카롭게 눈썹을 치켜올리면, 그 어떤 이보다도 그리 무서울수가 없었다.
“ 그게…무슨 말씀이오신지… ”
은녹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최대한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듯 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찻잔을 조심스럽게 들어오린 태후의 잘빠진 일자 눈썹이 씰룩거렸다.
“ 가히 천상의 외모로, 그 성격또한 당돌하단 말이다. ”
“ 아…. ”
“ 그 고운 얼굴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내들을 홀렸을까? ”
태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조소가 아니었다. 어떠한 조롱도 섞이지 않은, 순수하게 궁금하단듯한 표정이었다. 도대체가 그 심중을 알 수없으니, 대체 어떤 대답을
해야 만족스러워 할지.
“ 저의 어머니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일편단심 저의 아버지만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
꽤나 건방져 보일수도 있는 대답이었지만, 당연하다는 생각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결코 다른 사내들을 호리거나 하는, 그런 천박한 여인이 아니셨으니.
그것만큼은 당당하게 말할수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에 태후의 얼굴을 재밌다는듯이 묘하게 변했다.
“ 호오, 그러한가? ”
“ 네. 장담하옵니다. ”
“ 꽤나 장담하나 보군,그래…. ”
은녹을 한번 힐끗 쳐다본 태후는 집어든 찻잔을 붉은 열매를 한껏 베어문 듯히 은은한 붉은빛이 베인 입술에 갖다대었다. 다시 없을 우아한 모습으로 한 모금 차를 먀신
태후는 고개를 들어 은녹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 한동안 궁이 재미가 있겠군. ”
이해할수없는 말이었지만, 다시 되물을수도 없는 말이었다. 이윽고 태후는 이만 나가보라는 손짓과 함께 피곤한듯 관자놀이에 손을 짚은채 침실로 향했다. 그 덕에, 자
신의 의사완 관계없이 거의 쫓겨나다시피 서근전에서 나와버린 은녹. 장지문이 스륵 닫히고, 어디선가 축축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 가버렸다.
“ 하아. ”
그에 굳게 다문 붉은 입술이 스륵 열리며 뜨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들거리던 다리가 아슬하게 견디고 있다가, 장지문이 완벽히 닫힘과 동시에 힘이 풀려 제 자리에
꼴사납게 주저앉아버리고야 말았다. 무릎을 세우고 그사이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고운 턱선을 댄체 은녹이 작은 얼굴을 하얀 두손으로 감싸 쥐었다. 흑단같은 긴 머
리칼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결에 결좋게 흐트러졌다 . 곧, 그녀의 자그만 얼굴이 스르륵 들어졌다. 한겨울에 깊은 산골에 내리는 때묻지 않은 흰 눈송이 보다도 더
하얘보이는 백옥같은 흰 피부에, 흑요석같이 반짝이는 검은 두 눈동자. 그런 눈동자를 보고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 속으로 빠져 들어가 버릴것만
같은 위험한 느낌까지 가미되어 있었다. 깨물어 주고싶을정도로 앙증맞고 곧게 뻗은 오똑한 코에, 요새 한창 제철인 앵두처럼 붉은 도톰한 입술. 사내라면 누구나 한번
쯤 입술을 맞대고 싶어할정도로 왠지모르게 머금직스러운 묘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가려도 남을듯이 작은 얼굴 가득히 오목조목 들어찬 이목구비는 누가
보아도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웠다. 부러질듯 가늘고 긴 고운 목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우아한 턱선. 단아한 이마에, 살짝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이 왠지모르
게 색스러운 분위기마저 자아내었다. 흐트러진 모습마처 미칠듯이 아름다운 그녀. 그런 그녀의 이름은 서 은녹. 홍 나라의 제일간다는 귀족의 무남독녀 귀한 여식이었다.
“ 나 이제 어쩌죠. ”
아름다운 미희의 얼굴 가득히 걱정어린 근심과 두려움이 담아져 있었다.
2
“ 뭐라고? ”
탁.
딱 보아도 값이 꽤나 나갈듯이 고급스러운 하얀 자기찻잔이 깨질듯 위험할만큼 세게 탁자에 내리 꽂혔다. 다소 흥분한듯한 사내의 거친 목소리에 옆에 공수자세로
고개를 조아리고 서있던 여인의 듬직한 어깨가 움찔 거렸다.
“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
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흔들렸다. 거부할수없는 그 위엄에 잔뜩 어깨를 움추린 여인이 거의 울듯이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 이번에 대서림대감께서 여식을 황궁에 후궁으로 입궁시켰다고 하옵니다. ”
“ 하아! ”
여인의 말에 사내의 앙다문 잇새로 거친한숨이 새어나왔다. 젠장. 욕지거리가 입안을 맴돌았다. 준수한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중후한 멋스러움이 풍겨
져나오는 그는 이제 겨우 서른 너댓살이 들어보였지만, 실상 그는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였다. 지금도 충분히 뭇 여성들의 애간장을 녹일듯 날카롭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와 오뚝한 코 . 여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맞대어 보고싶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약간은 색이 바랜 붉은 입술. 흰 머리가 몇가닥 내려앉은 검은 머
리칼은 딱 보아도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고있었지만, 그 속에는 그 누구도 거역할수없는 연륜의 노련함이 담겨져 있었다. 화를 억누르는듯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주먹을 내려다 보는 여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금지옥엽 키워온 하나뿐인 딸을 황제의 후궁으로 입궁시킨단 말인가! ”
“ 고정하시옵소서, 유휘왕저하! ”
노성어린 그의 격노한 외침에 누가 들을새라 놀란 여인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애원하는 목소리로 고정해달라 호소하였다. 그렇다, 이
사내는 바로 한량중의 한량으로 홍 나라 사람이라면, 특히 여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있을법한 제5대유휘왕이었다. 그는 무슨 이유때문인지 정치에는 신경도 쓰
지않았고, 오로지 먹고 쓰는것에만 신경을 써온 터였기에, 황실에서도 그에게 그닥 큰 기대또한 걸지 안고 있는 터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딸도 아닌, 다른 이
의 딸을 후궁으로 입궁시킨 사실에 이토록이나 격분하다니? 세간의 눈들이 그의 뒤를 쫓을 것이다.
“ 아무래도… ”
그의 눈치만 살피고있던 여인이 조심스레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그녀의 모기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에도 금방 반응하며 그가 날카로운 눈동자를 돌렸다.
“ 한 달전에 유휘왕저하께서 하연아가씨를 후궁으로 입궁시키신 일때문에 그러하신것 같사옵니다. ”
“ 하연이를 입궁시킨것과 대서림이 여식을 입궁시키는것이 무슨 연계성이 있다는 말인가? ”
태릉은 의아한 낯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침을 꼴깍 삼킨 여인이 말을 이었다.
“ 정치에 입문하시지 않으셨던 유휘왕저하께서 이번에 양녀로 들이신 하연아가씨를 후궁으로 입궁을 시켰으니, 그것은 정치에 끼어들겠다는 무언의 암시와도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하니,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까 두려웠던 대서림대감께서는 급히 은녹아가씨를 뒤따라 입궁시킨것이 아닐까요? ”
“ 말도 안된다. 그렇다고하여 자신의 친 딸을 입궁시켜? 그것도 나는새도 떨어뜨린다는 잘나가는 세도가가 고작 나하나때문에! ”
“ 허나, 유휘왕저하…”
“ 게다가 꼭 그래야만 했다면, 친 딸이 아닌 양녀를 들여서 입궁시켜도 될것이 아니였더냐! ”
태릉은 입술을 꼭 깨물며 허공을 향해 노려다보았다. 여인의 잇새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와 유휘왕부인만이 알고있는 비밀스러운 사실때문이라서 그런지,
그녀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수있을것만 같았다. 아무렴, 자신같아도 저토록 분노하였을것이였다. 오히려 잘 참고있는듯한 그가 무척이나 대견스러울 따름이었다. 이
번에 새로이 황궁에 후궁으로서 입궁한 그의 양녀였다. 그의 아내인 설 흰의 권유로 처리한 일이었다. 꽃같이 고운 열여덟의 나이로 그 험한 궁에 입궁시킨다는 것
이 비록 피가 섞인 친 딸은 아니였지만,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터였다. 하지만, 설 흰의 청산유수같은 말솜씨로 그래도 될까, 싶어 혹하여 행여나 그것을 거부할수도
있는 하연에게 그 의사를 묻자, 그녀는 흔쾌히 입궁하겠노라고, 그러겠노라고 하였다. 어쩌면 하연은 그 날 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정치에 입문하지 않아, 그닥
내세울 권력도 없고, 함부로 행동하여 여색을 즐기고, 애주가로 유명한 한량인 양아버지인 유휘왕의 휘하에서 고작해봐야 괜찮은 귀족자제와 혼인할것이 뻔했기 때
문에 야심이 있는 여인이라면 유휘왕의 종친이라는 명분으로 궁궐에 입궁하는것또한 탁월한 선택 중의 하나일수도 있으니. 태릉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노기를 가라
앉히지 못한채 씩씩거리며 주먹을 꽉 쥔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염려스럽게 바라보던 여인이 다시금 입을 떼었다.
“ 하지만, 유휘왕 저하…이미 아는이들은 모두 아는일 아닙니까. ”
그녀의 나지막하지만 무언의 경고가 담겨진 말에 그가 눈동자에 빗금을 친 채 그녀를 노려 보았다.
“ 대서림 대감께서 여식인 은녹아가씨를 그리 아끼시지 않는다는 것. ”
“ 젠장! ”
정숙한 인상의 그가 거칠게 욕지거리를 내뱉았다. 그에 누가 들을새라 노심초사한듯 여인은 자꾸만 입술을 깨물며, 그를 다독였다.
“ 일단 진정하시고, 나중에 마님께서 오시면…. ”
“ 되었다. 이만 나가보거라. ”
“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
“ 이만 나가보아라 일렀다. ”
“ 휴우…그럼 이만 나가보겠사옵니다. ”
무언가가 미심쩍었지만, 그녀는 이윽고 별말 하지 않은채 입을 꼭 다물고서 처소를 나갔다. 혼자 남게된 태릉이 괴로운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커다란 두손
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리곤 괴로운 그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
태화성 황궁
스륵
종이넘기는 소리가 리듬감있게 들려왔다. 일분 일초가 흘러가는데도 한마디도 없자, 그런 자신의 주군이 못내 답답했던 봉륜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다시
한번 더 입술을 열었다.
“ 한 달전 에는 유휘왕저하의 양녀이신 홍 하연아가씨께서 입궁하셨는데, 이번 에는 또 대서림대감의 여식인 서 은녹아가씨께서도 입궁하셨다고 하옵니다. ”
하지만 여전히 묵묵부답. 어찌 이리도 답답할까. 봉륜은 세월의 연륜이 느껴지는 깊은 눈매로 그를 원망스러운듯이 바라보았다. 홍 나라, 아니 전 대륙의 뭇
남성 들이라면 모두가 내놓으라 할정도로 대단한 미모를 가진 두 여인을 후궁으로 맞이하게 된 것이 과연, 그냥 쉬이 넘어갈 일을 아니라 하여도 여자를 돌
같이 본다는 자신의 완벽한 주군은 신경을 쓰지 않는것이 당연하겠다만은 그렇다고 해서, 이리 서고에서 박혀 주구장창 서궤에 쌓인 종이뭉치만 넘기며 입궁
하였다는 후궁들과 대면또한 하지 않고 있다니.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여인이라 하여도, 황제는 자신의 후궁과 입궁한
지 두 달내에 대면을 해보아야하는 의무가 있었다. 더구나, 아직 황후조차 없는 그의 경우에는 더하였다.
“ 폐하, 제발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시옵소서. 노비, 애가 타 죽겠습니다. ”
“ 어허. 죽겠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것이 아니라고 했네만? ”
그때까지 대답하나 없던 그는, 죽겠다는 봉륜의 말을 듣자 그제서야 종이뭉치에만 내리꽂혀져있던 시선을 들어올려 짐짓 엄한 눈초리로 그를 질책하듯 바라보았
다. 그의 날카롭게 패여진 봉안을 보노라면 언제나 그 짜릿한 전율로 온 몸을 떨어야 했지만, 지금은 그럴때가 아니었다.
“ 하루라도 빨리 두 분의 아가씨들과 만나보셔야 하는것이 옳은것인줄 아뢰옵니다. ”
“ 봉륜. ”
“ 네? ”
봉륜을 자신을 낮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그를 무례하게도 똑바로 쳐다보았다.
“ 여색에 빠진 선황들 중에서 옳은 정치를 펼치신 분들이 계셨는가? ”
그의 잔잔한 물음에는 어떠한 억양도 들어있지 않았고, 오히려 부드러웠으나 듣는이로 하여금 오금을 저리게 만들정도의 위력을 담고 있었다. 봉륜의 항시 일그러질 줄
모르는 얼굴이 살짝 찌푸려진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 하오나, 폐하. 후궁을 들여서 후사를 보는것은 황제로서의 당연한 의무중 하나이옵니다. 후사를 이으셔야지요. 여색에 빠지는것과, 후사를 잇기위해 후궁을 맞아들이
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옵니다. ”
“ 나는 왠지 달갑지가 않구나. ”
“ 네? ”
달갑지 않다니? 봉륜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 말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듯 바라보았지만, 그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창 밖 만을 내다 보았다. 살짝 열려진 창문 틈새
로 들어온 실 바람이 서궤에 가득쌓아올려진 종이뭉치를 한번 쓸고 지나갔다. 창 밖을 향한 그의 눈동자는 마치 누군가를 찾듯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봉륜은 항상 오묘하
고 알 수 없는 난해한 말들만 내뱉으시는 자신의 주군을 울상이 된 얼굴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3
“ 아, 벌써…서 은녹이 입궁을 했다고? ”
“ 네, 아가씨. ”
“ 한동안 재미가 있겠구나. 혼자 궁궐에 있어서 얼마나 심심했는지 몰라. ”
“ 에구머니, 아가씨. 항시 말조심 하십시오. 그리고, 누가 있으나 없으나 깍듯이 황궁어를 쓰셔야지요. ”
“ 아아, 정말 황궁이라는 곳은 고달프기가 그지 없어. ”
하연은 반짝이는 눈동자 가득히 따분함을 담은채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려 앙증맞은 하품을 했다. 그 경망스러운 모습에 놀란 유모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엄히 꾸짖었다. 하연은 어쩌면 궁궐인이라기 보다는 여염집 아낙이 더욱 어울리는 성품을 지녔다. 물론, 그 외모는 평범한 범인이 가질 만한 것은
아니였으나. 털털하고, 재미있는것을 그 누구보다도 좋아하며 항상 아이같은 밝은 미소를 가진 여인. 흑단처럼 검은 머리칼이 가는 목위로 흐트러지게 흘
러 내려왔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가닥으로 내려와 가는 목을 간질거리자 하연이 꺄르륵 거리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고이 빗어 한쪽 어깨위로 쓸
어 내렸다. 그 모습은 보며 유모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이지, 하는 모양은 어린아이같이 해맑지만 이럴때 보면 사내들이라면 누구나 자진해서 침대
로 기어들어오게 만들정도로 색기가 흘러넘쳤다. 거기에 아름다운 외모와 완벽한 몸매까지 더해주니, 그 어느 사내가 그녀를 마다 하리요. 하지만 황제폐하
는 사내가 아닌듯 싶다. 이런 아가씨를 두고서 입궁한지 한달이 넘도록 대면하지도 않고, 더불어 첩지또한 내려주지 아니 하다니!
게다가 이번엔 뜻하지 않은 복병까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연의 아름다운 외모를 훨씬 능가하여, 대륙의 최고의 미인이라고 불리우는 대서림 대감의 금지
옥엽 하나뿐인 여식 서 은녹. 은녹까지 궁궐에 입궁하다니. 도대체 대서림의 머릿속은 들여다 볼수도 없으며, 감히 짐작조차 못하는것이었다. 같은 여인이
보아도 침이 줄줄 흘러넘칠정도로 고운 외모를 가지고있는 그녀라던데, 어찌 그 적수를 물리칠까. 유모는 험난한 궁 생활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기를
바랬지만, 하연은 그런것따위는 자신의 안중에도 없다는듯 연신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손바닥을 짝 하고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하연.
그런 하연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던 유모가 일어선 그녀를 따라 일어서며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물었다.
“ 또 무슨 일이시옵니까? ”
유모의 원망어린 목소리에 하연이 개구지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처소를 나오며 말했다.
“ 우리, 은녹이 아가씨를 보러가자. ”
서쪽 별궁
아직 첩지또한 받지 않은 몸이므로, 그녀는 궁궐에 손님이 오셨을때 임시로 내어주는 별궁에 와있게 되었다. 작은 얼굴은 깊게 숙이며 터질듯 부풀어 오른 붉은
입술로 작은 한숨을 내쉬우는 은녹. 별을 박아 놓은듯 총총히 빛나는 검은 눈동자 가득히 고독과 슬픔이 담겨져 있었다. 이쯤되면, 양녀도 아닌 친딸인 그녀를
황후도 아닌 후궁으로 입궁시킨 자신의 아비인 지륙이 원망스럽고 미울만도 하였다.
“ 나를 보기 괴로우셨던 것이지요? ”
은녹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검은 눈동자 가득히 눈물방울이 맺혔다. 태후의 앞에서는 당당히 자신의 어미인 가 미려가 오직 그녀의 지아비인 설 지륙, 자신의
아비만을 연모하고, 가슴에 담았노라 장담하였다. 하지만…그것은 괜한 호기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신의 어머니인 미려는 한 평생 다른이를 가슴에 담은채 지독
히도 괴롭고 짧았던 생을 마감하였다. 그것도 그녀가 보는 눈앞에서 다른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때를 아직도 그녀는 잊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작은 얼굴을 뒤
덮어 버렸다. 서럽도록 끅끅 거리며 울어제끼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상관없는 이가 보았더라도 당장이라도 내달려가 안아주며, 괜찮다, 무엇이 그리 서러우냐,
하고 물을만큼 슬퍼보였다. 마치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녀마냥.
“ 무섭습니다, 어머니. 흑…끄윽,끅. 이제…흑, 이제 속이 편하시옵니까, 아버지? ”
흐느끼는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 무렵, 대략 짐작해도 두 세명은 훨씬 넘을듯한 인원수의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은녹이 재빨리 비단 소매끝으로 눈물
자국을 찍어내며 붉어진 코를 민망스러운듯 만지작 거리다가 흐트러진 모습이 있으려나 싶어, 깨끗하게 닦여진 동경을 붙잡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
이상이 없다고 느껴지자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서는 당혹스러운 표정은 여전히 지우지 못한채 급한 발걸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아…! ”
이윽고 별궁에 딸려진 후원까지 걸음을 옮긴 뒤에야 발걸음의 주인공을 알아챈 은녹의 두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그녀의 도톰한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작은 틈새
로 짧게 헛숨이 들이켜졌다. 덜덜 떨리는 그녀의 하얀 손가락마디가 애처로워보여 당장이라도 감싸주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몸은 떨고 있었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를 긴
장하게 만든 것일까? 은녹의 커다란 눈동자가 한 곳을 향하여 시선을 두다못해, 아예 박아 버린 그곳엔 황궁에서도 오직 단 한사람만이 입을 수 있다는 금색 융포를 입은
한 사내가 서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심상치 않은 이 곳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 시키는듯 했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매의 눈처럼 날카로우면서도 현명하
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별궁을 샅샅이 훑어보다가 이내 별궁 입구에 못 박힌듯 서있는 그녀를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자, 은녹은 온 몸에 털이란 털은 모두 곤두서는듯
한 짜릿한 감각을 느껴버리고야 말았다. 가녀린 하얀 팔뚝에는 가엽게도 닭의 것마냥 소름이 돋는듯 했다.
“ 이번에 새로 입궁한 대서림 대감의 여식 서 은녹…아가씨 이옵니다. ”
두 사람 모두가 말 없이 뻔히 서로를 바라보고 서있기만 하자, 중간에서 되려 무안해진 봉륜이 다급히 헛기침을 하고서 이미 그녀의 신상을 알고있는 그에게 다시 한번 더
언급해 주었다. 그러자, 휼이 낮게 목을 울리며 웃었다. 하늘의 농간인가? 그때 마침 구름속에서 얼굴을 묻고 있던 해가 살짝 빛을 비추어 후광이 비춰졌다. 그 미소에 은
녹의 얼굴이 멍하여져 버렸다. 자신이 생각하던 황제가 아니었다. 은녹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에 한동안 입을 벌린채 다물지를 못하였다. 무안한듯 헛기침을 하는 봉륜이 눈
치를 주어서야 부끄러운줄 알고 재빨리 두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이고서 고개를 푹 숙여 미쳐 하지 못했던 인사를 올렸다.
“ 아…저, 그러니까…대,대서림 대감의 여식인 서…은녹이라 하옵니다. ”
“ 그건 이미 여기있는 봉륜이 일러주어 내 알고있는 바이다.”
“ 헛, 아…죄,죄송…아니, 아니. 송구하옵니다,폐하. ”
듣기좋은 웃음소리가 낮게 귓가에 들리자 은녹은 자신의 굳어버린 혀를 꽉 깨물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찌하면 좋은가! 폐하의 앞에서 말 실수를 하다니! 말을 더듬
다니! 그의 눈에는 그녀가 얼마나 경망스럽고, 조심스러워 보이지 않았을까! 첫 대면을 꼭 이런식으로 밖에 못해야 하는지 자신의 능력에 은녹은 울고만 싶어졌다. 이왕 아버
지의 명으로 입궁을 한 이상,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도록 그녀는 최대한 황제의 눈에 들어, 애첩까지는 아니더라도 총애정도는 받는 후궁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첫 만남이 이
렇게도 우스꽝스럽다니.
“ 꽤나 활기차 보이는군. ”
웃음을 멈춘 휼이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그제서야 은녹은 다행이라는듯 한 시름을 놓은듯한 한숨을 내뱉았다. 그리곤 이윽고 ‘고개를 들라.’라는 황제의 명에 따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잇새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까도 느낀 바였지만, 정말이지 황제의 얼굴은 잘나고도, 잘났다. 햇빛이라고는 받아 본 적도 없는
듯 피부는 우윳빛 처럼 뽀얗였으며, 당장이라도 그녀를 한 입에 삼켜버릴듯 타오르는 검은 눈동자는 묘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매력적인 색이였다. 어찌나 매서운지, 흡사 사냥감
을 고르는 매의 눈같아 보이기도 했다. 짙은 일자형의 눈썹은 어찌나 강인하여 보이는지 몰랐다. 그 아래 자리잡은 오똑한 코는 그의 자존심이라도 되는마냥 꼿꼿히 곧고 높게
세워져 있었다. 그 밑의 여인의 것보다도 더 붉어보이는 입술이 어찌나 머금직 스러운지, 은녹은 저도모르게 한번이라도 좋으니 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대어보고 싶다는 망측
한 생각까지 해버리고야 말았다. 다급히 붉어지는 은녹의 하얀 뺨에 휼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지었지만 이내 피식웃으며 눈에 주고있던 힘을 풀었다. 굳이 힘을 주고 보지 않아도
저 여인은 이미 자신에게 겁을 먹고 있었으니.
휼은 힘을 풀어도 여전히 매섭기만한 눈초리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였다. 일단 그의 눈을 끈 것은 바로 그녀의 천녀보다도 더 고운 외모였다.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가려도
자신의 손이 한참 남을만큼 작고 조막만한 얼굴에 오목조목하게 들어찬 앙증맞은 이목구비는 보는이로 하여금, 저 것들이 어찌 저 작은 얼굴에 조화롭게 맞춰 들어갔나 신기해
하게 만들정도였다. 물기를 머금은듯 촉촉히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는 길다란 속눈썹에 살짝 그 모습을 감추고 있었지만, 정면으로 바라본다면 얼마나 숨막히도록 아름다울지 짐
작이 가기는 했다. 그아래 깨물어 주고싶을만큼 오똑하게 솟은 자그만 코와 피를 베어문듯 붉기만한 입술. 밋밋하게 붉은것만이 아니라, 양감이 드러나도록 도톰한 구석도 있어
더욱 감질나게 보였다. 우아하게 휘어진 곡선을 그리듯 짙은 눈썹은 가지런히 정돈 되어 있어 단아한 인상을 주었다. 과연, 대륙 최고의 미라고 불리우는 그 이유를 알 것 만
같았다.
“ 역시 내가 말한 그대로지? ”
휼은 자신만 알아들을수 있을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의 말을 들은이는 아무도 없어고, 고로 그는 그 자신에게 말한 것이었다. 휼은 만족스럽지만 어딘가
모르게 걱정스러움이 담겨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작은 얼굴을 한번 쓸어넘기고선 뜨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피곤하군. 일단 대면은 하였으니, 궁궐의 법도는 지킨것이지? ”
“ 네? 아…그,그건 그렇사옵니다만…? ”
그가 작게 내뱉은 말에, 봉륜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하자, 휼이 뒤돌아 섰다.
“ 이만 가자. ”
그의 말에 봉륜의 얼굴에 난처함이 띄워졌다. 그도 그럴것이, 고작 얼굴 한번 보고서는 다시 돌아가겠다니? 물론 한 번 보는것만으로도 충분히 오금이 저릴정도로 고운 외모로
후회는 없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저리 고운 아가씨를 이리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닌듯 싶었다. 하지만 어쩌리요. 원래라면 대면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을 그였는데. 봉륜은 안타
까운 눈빛으로 은녹을 한 번 쳐다보고서는 앞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랐다. 어느덧 그가 최소한의 인원만 데려왔던 이들이 모두 사라지자, 혼자 남은 은녹이 꾹 눌러 참았던
숨을 몰아쉬듯 헉헉거리며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는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 아…정말이지…숨막혀서 죽는줄 알았어….”
상기되어 살짝 붉어진 뺨으로 은녹이 멍하니 방금전까지만 했어도 그가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홀연히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불어오는 바람에 묻혀버렸다.
“ 세상에, 이런 법도가! ”
유모는 호들갑스러운 표정으로 펄쩍 뛰며 소리쳤다. 그에 하연이 작은 두손으로 시끄럽다는듯 미간을 좁힌채 귀를 막으며 말했다.
“ 뭐가? 그냥 보고싶었겠지, 유모. 너무 호들갑 떨지 좀 마. ”
“ 어머! 어머! 호들갑이라니요, 아가씨? 지금 제가 이렇게 화를 내는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구요! ”
제 일이 아닌듯 무덤덤한 그녀의 말에 더욱 흥분한 유모는 거무죽죽한 얼굴을 새빨갛게 익힌채 열변을 토해내었다. 그도 그럴것이, 방금 전 하연을 이끌고 탐탁치 않은 마음으로
은녹이 거처하는 별궁으로 걸음을 옮겼었다. 그리곤 그곳에서 정말이지, 열이 뻗쳐서 화병으로 죽을것 같은 장면을 보고야 만것 이었다. 아직 첩지도 받지 않아, 서열은 없다만
솔직히, 궁궐에 먼저 들어와 입궁을 한것이 하연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 한달이 넘도록 하연을 찾지않던 황제는 이제 막 입궁한지 몇 시간도 채 되지않은 은녹부터 먼저 대면
하다니!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유모는 서운하고도 억울한 기색을 여전히 지우지 못한채 툴툴거렸다. 그에 하연이 낮은 한숨을 쉬고서는 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 솔직히, 유모. 나같았어도 은녹아가씨한테 먼저 갔을거야. ”
“ 어머어머! 왜요, 도대체 왜! ”
유모는 하연이 자신의 상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듯 침까지 튀겨가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연이 인상을 찡그리자 금방 죄송하다고 말은 하긴 했지만.
“ 보니까, 은녹아가씨 정말 곱긴 곱더라. 같은 여인인 내가 봐도 심장이 다 떨리더라구, 으긍. 주책맞게 시리. ”
하연은 기분좋은 목소리로 ‘후후’하고 웃으며 모락모락 따끈한 김이 오르는 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녀의 주책맞은 소리가 유모가 되려 그녀를 노려보며 혀를 찼다.
언제쯤이면 자신의 아가씨께서 완연한 여인이 되실까나.
“ 이젠 아가씨께서도 열여덟이옵니다. 그나이였으면…”
“ 아우, 알어, 알어! 내 나이였으면, 벌써 아이가 둘은 있었을 것이라구? 이미 귀가 닳게 들었어, 유모. ”
반복되는 유모의 잔소리가 귀찮았는지 하연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붉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알면서 그러냐는듯 매서운 유모의 눈초리가 살짝 기가 죽기는 했지만.
어쩌면, 이리도 아이같은지. 유모의 한숨소리가 날로 갈수록 커져, 별궁의 담장을 넘을듯 했다.
“ 제발 이젠 철 좀 드세요, 아가씨. 마님 속 좀 그만 썩이시고… ”
유모의 중얼거림에 하연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 과연 양어머니께서는 내가 이리 행동한다 하여서, 그 차가운 속을 썩이시긴 하실까? ”
쓸쓸한 그 목소리에 유모의 표정은 더욱 굳어지고, 안쓰러움을 담아내었다.
4
“ 도대체 어인 일로 대면을 하신 것이옵니까? ”
별궁을 나오면서 봉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서 걷던 휼에게 물었다. 그러자 금색 융포자락을 휘날리며 우아하게 걷던 휼이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그덕에 중얼거리며
뒤따라 걷던 봉륜이 하마터면 갑자기 멈춰선 그의 쩍 벌어진 듬직한 등에 코를 박을뻔한 불경죄를 저지를뻔 하였던것을 가까스로 면하고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당혹스러운 표
정으로 물었다.
“ 갑자기 멈추시오면…”
봉륜은 뒷말을 잇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휼이 뒤를 돌아 자신들이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카롭기만 하던 휼의 눈동자가 아련하게 흔들렸던 터
일 것이다.
“ 내 말…하나도 틀린것이 없더군. ”
“ 네? 폐하, 도대체 무슨 말씀이시온지…? ”
“ 늦었다. 얼른 가서 서궤에 쌓인것들은 한시라도 빨리 헤치워버려야지. ”
알듯 말듯 오묘한 그의 말에 봉륜이 생각에 잠겨 미간을 절로 좁히기도 채 전에, 휼은 길 다란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 버렸다. 잠시나마 멍하게 그의 말을 되새
기며 무슨 의미일까 고민스러워 하던 봉륜은 이윽고, 자신의 곁에 그가 없다는것을 알아채고서는 ‘폐하!같이가셔야지요!’라고 외치며 급하게 총총 걸음으로 걸어갔다.
.
은녹은 흘러내리는 머리칼들을 번거롭게 일일이 뒤로 쓸어넘기며 고개를 푹숙이고서 폭신한 솜이 깔려진 의자에 몸을 앉히고 있었다. 어느덧 잠이 들어버려, 잠결에
까딱까딱 거리는 조그만얼굴이 어찌나 귀여워보이던지, 어느 누구라도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쉽사리 지나치지 못할 것이랴. 머금직스러운 붉은 입술이 살짝 벌
어져 그 실낱같은 틈새로 가는 숨소리가 새액새액거리며 흘러나왔다. 반쯤 열려진 창가에는 이미 보기좋게 반쯤 채워진 달이 보였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처럼 까만
칠흙같은 어둠이 몰려와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의자옆 탁자에 올려진 백자로 된 꽃병과 그녀의 조그만 머리가 닿을락 말락 거릴 무렵, 끼익 거리며 굳게 닫혀져 있던
처소의 장지문이 열렸다. 깊게 잠이 든 그녀가 미처 알아채질 못할정도의 미세한 소리만을 내면서 점점 다가오는 한 검은 인영.
“ 헤에, 자고 있을준 몰랐는데. ”
가여울 정도로 불편한 자세로 곤하게 잠들어 있는 은녹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린 그 인영의 정체는 바로 하연이었다. 하연의 뒤로는 안절부절 못하는 유모가 보였다. 당
연한것이, 아무리 아직은 별궁을 배정받은 손님격이라고는 하나 이미 황제와 대면을 한 상태이였다. 그러니 곧 첩지또한 받을 것이며, 그런 그녀의 처소에 기별도 없이
그것도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는것은 죄가 될 수도 있는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아가씨, 어서 나가요. 어차피 잠이 들어 계시잖아요! ”
유모가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 거리며 재촉하듯 다급히 소리치자, 하연이 미끈한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짐짓 엄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 시끄러워. 유모때문에 은녹이 아가씨가 깨겠어, 정말. ”
“ 아이고,예! 쇤네가 잘못했습니다, 주둥아리 콱 다물고 있을터이니 제발 좀 나가요,아가씨! 이러다가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한다면…! ”
“ 누구한테 들킨다는 말이야? ”
타들어가는 유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연은 천진난만하게 반짝이는 커다란 눈망울로 잠이든 은녹의 얼굴을 세세하게 살펴 보았다. 과연, 천상에서 하강한 천녀의
외모가 이렇듯 아름다울까? 고운 하얀 백자같은 피부는 같은 여인이 자신이 보더라도 충동적으로 절로 손이 나가서 한번쯤 만져볼 법한 것이었다. 게다가 눈이 감겨 그늘
을 드리우는 긴 속눈썹은 정말이지 감탄이 나올정도로 길었다. 마치 인조적으로 더 심은것 마냥 숱도 엄청 많았다. 그아래 작게 벌어진 붉은 입술은 또 어떻고? 자신이 보
아도 덮치고 싶을정도로 매혹적인 입술은 뭇 사내라면 누구나 다 가슴이 철렁거릴듯 싶었다. 여인으로서, 같은 후궁이 될 사람으로서 너무나도 부러운것은 어쩔수 없는 사
실 이었다. 그때, 하연이 무언가를 발견한듯 두눈을 크게 키우고선 자그만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저 앙증맞은 입에서 또 무슨말이 나올까, 유모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고
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 세상에! 유모, 은녹이 아가씨는 정말 몸매도 끝내준다! ”
“ 에그머니, 아가씨! ”
도저히 당해낼수없는 하연의 순진함에 유모는 그만 소리를 꽥 하고 질러버렸다. 그러자 은녹이 미세하게 나마 움찔 거렸고, 그때 유모와 하연은 그때만큼은 손발이 척척
맞는지 얼음상태가 되어버렸다. 걱정했으나, 은녹은 아주 깊게 잠이들었는지 왠만한 소음으로는 깨어날 생각이 없는듯 보였다. 그에 하연이 안심한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
자 유모가 울상이된 얼굴로 말했다.
“ 아가씨…제발 좀 속 좀 그만 썩이세요! ”
“ 내가 뭘! 하지만, 진짜 이것 좀 봐. 아우, 나 혼자 보기 너무 아깝네! ”
“ 아가씨도 몸매 좋으세요. ”
“ 흥,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나는 가슴이 좀 더 커야 한다구. ”
“ 에구구, 아가씨도 참! 망측스럽게시리… ”
순진무구하게 엄청나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는 하연을 되려 제 얼굴이 더 빨개진채 바라보는 유모. 하연의 반짝이는 눈동자는 망측스럽게도, 은녹의 살짝 드러나는 쇄골
과 가슴께로 향해있었다. 깊은 계곡을 이루는 그 깊이에 하연은 내심 감탄한듯 연신 ‘우아!’를 외쳤다.
“ 이제 구경 다하셨지요? 얼른 나가요, 아가씨! ”
“ 에이, 정말! 알겠어, 알겠다구.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정말. ”
울상을 지으며 매달리는 유모에게 결국 항복을 해버린 하연이 투덜투덜 거리며 조심스레 처소를 나왔다. 마지막에, ‘잘자요, 이쁜이 아가씨’라는 능글맞은 말도 잊지 않
은채. 유모는 못 말린다는듯 연신 한숨만 내뱉으며 그녀의 소매자락을 잡고서 질질 끌어당겼다. 그에 못이기는척 은근히 유모가 이끄는대로 따르던 하연. 하지만 둘 다 이
내 얼마 못 가, 제자리에 설 수 밖에 없었다. 간이 콩알만하여, 사내라고는 죽은 지아비밖에 모를것이라며 하연의 닦달을 받던 유모는 입을 쩍 벌리고서 연신 ‘어머머머’
만을 연발 했고, 장난꾸러기 같던 하연이 되려 담담한 표정으로 흐트러진 옷 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서 고개를 살짝 숙여 눈 앞에 서 있는 이에게 인사를 올렸다.
“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소첩, 유휘왕저하의 양녀인 홍 하연이라고 하옵니다. ”
분명 저 작은 입술로 오물거리듯 내뱉은 말은 ‘황제 폐하’였다. 그녀의 숙여진 고개를 무심히 내려다 보던 그가 나지막히 말했다.
“ 고개를 들라. ”
“ 황공하옵니다, 폐하. ”
그에 고개를 살짝 든 하연은 저 또한 무심한 눈빛으로 황제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대담한 눈빛에 휼의 입가에는 작은 포물선이 그려져 있었다.
“ 이리 늦은 밤에 어이하여, 그대는 대서림의 여식이 거처하는 별궁에서 나오는거지? ”
그의 허를 찌르는 물음에 하연의 고운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으나, 이윽고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 어차피 같은 후궁이 될 사람아니옵니까? 그리하여, 같은 동지로서 잘 지내보자 싶어 갔다가 잠이 들어있기에 나오는 길이었사옵니다. ”
“ 같은 후궁이라? ”
당돌한 하연의 말에 휼이 오랜만에 목울대를 울리며 크게 웃어보였다. 그의 모습에 당황한건 비단 하연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를 미처 알리지 못한채 망설이며
서있던 봉륜이 가장 놀라워 하였다. 누가 보았다면, 휼이 진심으로 웃음이 우러나와 웃은 것이라고 보겠지만, 이윽고 웃음이 그쳐지고 그의 얼굴에 띈것은 매서움이었
다.
“ 말투가 꽤나 건방지군. 그것은 어디서 배운 버릇이지? ”
날카로운 그의 서릿발같이 차가운 목소리에 하연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아오름을 느꼈다. 그의 봉안이 매섭게 반짝였다. 하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이 사람
이 그냥 평범한 범인汎人이 아니라, 홍나라의 주인이자 하늘의 아들인 황제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이제야 뒤늦게 반응이 오는 그녀의 작은 몸. 그녀의 작은 몸은 애처
로워 보일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유모는 이미 존재감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 황송하옵니다, 폐하. 소,소첩이 무례를 범하였… ”
“ 난 분명히 그대에게 첩지를 내린 기억이 없는데? ”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그가 매섭게 끊으며 말했다. 그에 하연은 겁먹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아, 그의 잘난 얼굴에 자비라고는 찾아볼수가 없었다. 황제에게
서만 풍겨지는 특유의 위엄에 그녀는 몸을 사릴수밖에 없었다. 그런 하연을 조롱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휼에게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반문했다.
“ 무슨 말씀 이오신지… ”
“ 종숙께선 양녀라 하여, 쉬이 가르켰나 보군? ”
“ 폐…하. ”
종숙(아버지의 사촌형제를 칭하는 호칭)이라 함은, 그녀의 양아버지인 유휘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을 쉬이 가르켰다? 굴욕스러움이 몰려왔다. 하연의
하얀 얼굴이 수치심에 붉어졌다. 하지만 그녀에게 두어진 휼의 조롱어린 시선은 거두어 질 줄을 몰랐다. 왜? 라는 의문점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히 채웠다. 왜, 자신은
황제와 이런 대면을 해야만 하는가? 그것도, 깊은밤 은녹의 처소를 지나치는 그를! 어찌 따지자면, 대서림대감의 여식인 은녹보다 왕족인 유휘왕의 여식인 자신이 더 높
은 신분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피가 안섞인 양녀에 불과하지만….
“ 첩지도 주지않았는데 벌써부터 자신을 ‘소첩’이라고 칭한다면…그것은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당연히 자신이 첩지를 받을 수 있을것이라는 교만함에서
나온 것인가? ”
“ 황송하옵니다, 폐하. 소…녀가 무례를 범하였사옵니다. ”
“ 황궁이 언제부터 위계질서가 이리도 어지럽혀 졌지, 봉륜? ”
휼은 시선은 여전히 하연을 향해 둔채, 제 삼자에 불과한 봉륜에게 물었다. 이것은 일부러 그에게 물어, 바로 앞에있는 하연에게 면박을 주려함 이었다. 하연이 낮게 이
를 갈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도 은녹과 똑같은 입장인데 어찌하여, 이토록이나 비교를 당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은녹에게는 활기
차다고까지 말도 해주었다. 아주 소소한 것에 비롯된 사소한 말이었지만, 지금 하연은 그 한마디 조차도 이가 갈릴정도로 분노가 일었다. 서럽고도, 서러웠다.
“ 폐하, 밤이 깊었으니 이만 처소로 돌아가심이… ”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읽었는지 봉륜이 깊게 패인 주름에 맺힌 땀을 닦아 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휼이 낮게 웃더니 이윽고 뒤돌아 섰다.
“ 이로써, 종숙의 여식하고도 대면한것이 되겠지? ”
“ 예? 아…뭐, 그런 셈이지옵죠. ”
“ 이만 돌아가자. 오늘 밤은 나도 모르게, 저 밝은 달에 이끌려 이리로 왔나 보이. ”
그가 목울대를 울리며 천천히 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그에 봉륜이 식은땀을 흘리며 하연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하고선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의 그
림자가 보이지 않게 될 무렵, 유모가 털썩 하고서 볼썽사납게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안쓰럽게도 그녀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아이구, 나 죽는줄 알았네…아,아가씨? 괜찮으시어요? ”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유모가 중얼거리다가, 이윽고 멀뚱히 서서 방금전까지만 했어도 황제가 서있던 자리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하연을 보고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괜찮은지 이리저리 살피는 유모의 낯이 꽤나 우스꽝 스러웠지만, 하연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오직, 사람을 가지
고서 조롱하기에 도가 트어버린듯한 잘난 얼굴의 황제만이 아른 거릴 뿐이었다. 잘생겨서, 가슴떨리게 멋져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하연은 미치도록 방금 처음 본
황제가 진심으로 싫었다. 어머니의 명이 없었다면은 황궁에 입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정말이지, 황궁이란곳…벌써부터 지긋지긋 하구나 .”
5
“ 그래? ”
다소 높은듯한 여인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넓은 처소안을 울렸다. 딱 보아도 값이 비싸보이는 고급스러운 것들로만 이루어진 호화스러운 처소안은 경치는 태후의 것과
흡사해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태후만이 가질수있는 금봉金鳳자수가 놓여진 아름다운 비단이불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아름답게 꾸며진 처소는 그 누구에
게도 뒤지지 않을만큼 화려했다. 붉은 연지가 발려진 입술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 유휘왕의 양녀와 대서림대감의 여식까지 입궁을 했어?…후후훗, 꽤나 보기힘든 광경인걸? 누가 대단한 황후의 자리를 꿰어 찰까나… ”
몹시 궁금한듯한 눈빛을 반짝이던 여인의 얼굴에서 금방 웃음끼가 사라졌다. 남은것은 싸늘함과, 서릿발처럼 차가운 조소뿐이었다.
“ 당연히 우리 채령이지. ”
여인의 눈빛이 위험스럽게 번들거렸다.
.
“ 대서림 대감의 여식, 서 은녹은 오늘 부터 하늘의 기운을 이어받아 이땅에 강림하신 존귀하고도 보배로운 황제폐하의 후궁이 되어, 성을 따라 서비絮妃의 칭호를
내려, 남쪽 궁궐에 있는 은비전隱斐殿을 하사하노라. ”
“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소첩, 황제폐하의 명을 받드옵니다. ”
황제를 대신하여 그녀에게 첩지를 내리려온 용대관龍代官의 앞에 무릎을 꿇고서 공손히 두손으로 금빛테두리에 고급스러운 붉은 물을 먹인 첩지를 받아 들었다. 자신이,
이제 자신이 정식 후궁이 된것이었다. 그것도, 후궁중에서 가장 높은 품계에 속하는 정1품 비妃가 되었다. 왠지모를 감격스러움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눈물을 글썽이는
부끄러운 모습을 들킬세라, 은녹은 공손함을 덮어쓰고 일부러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깊게 숙였다. 몇마디 더 주의사항을 일러준 용대관은 한시진이 지나서야 돌
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새로 대령된 꽃가마에 올라타고서 남쪽 궁궐에 위치한 배정받은 은비전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나가는 길 마다 지나가던 궁녀들고 내관
들은 물론이고, 황궁 수위대들이 모두 공수 자세로 무릎을 꿇고서 그녀의 가마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서비마마 천세천세 천천세’라고 궁궐 담장이라도 넘
을듯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솔직히, 그 부분에 대해선 은녹도 왠지모를 우쭐함에 겨워 고개를 빳빳이 들기도 했다만, 기쁨 뒤에는 걱정, 근심들이 줄을 이었다. 이제
다시는 돌이킬수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첩지까지 받은 이상, 그녀가 죽지 않는한 이 궁궐을 나갈수가 없게 되었다. 더불어, 사가의 사람들은 일체 만나지도 못하겠지.
그래도 매주 아침마다 조회에 참석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뵐 수 있을듯 했다. 그것이 다 어디겠누.
은녹은 이제 남정네의 떡 벌어진 어깨만 보아도 발그레하게 얼굴을 물들이며, 부끄러워하던 처녀가 아니었다. 이젠 한 나라의 주인인 황제폐하의 여자였다. 비록, 외롭게
별다른 의식도 치루지 못하고 이름만 혼인인 것을 치루어, 황제가 자신을 찾지 않는이상 독수공방할수밖에 없는 외로운 후궁이었지만. 앞으로의 나날들이 새삼 두려워졌
다. 이럴때, 사가에서 자신을 돌봐주던 유모, 화수라도 곁에 있었으면 참 좋을련만. 나중에, 언제가 될지 모르는, 아니 어쩌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훗날에 그녀가 황제
의 총애를 받게되어 재수가 좋아 귀비에 오르게되면, 그때 간청을 드려 화수를 궁궐에 입궁시켜야 겠다. 이런 저런 소소한 걱정들을 떠올리며 작은 한숨을 내뱉으려는 찰
나, 드디어 가마가 덜컹 거리며 땅에 닿았다. 이제 도착하였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곧 장 가마 창문 너머로 굵직한 가마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은비전에 당도하였사옵니다, 마마. ”
마마라는 칭호는 정말이지 적응하기 쉽지않을듯 싶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은녹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가마에서 내렸다. 사뿐히 땅을 딛고서 가마에 내린 은녹은 흐트
러진 머릿칼들을 정리하며 은비전을 바라보았다. 은비전隱斐殿. 과연 이름만큼 대단한 아름다움이 절제되어 표현된 궁궐형식이 묘하게 기이하도록 멋져보였다. 황궁안에 있는
여느 처소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절대로 굽혀지지 않을듯이 고고한 멋을 풍기며 하늘높이 솟아있는 붉은 칠을 한 대들보와 그위에 얹혀진 홍와가 아닌
녹와綠瓦는 붉은빛과 녹색빛의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들보에는 보일듯말듯 가느다란 실선들로 봉황새가 그려져 있었고, 기와에도 하나 하나에 저마다 독특하고도 아
름다운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경관이 넋이 나가 은녹이 잠시 체면불구하고 멍하니 은비전 문전에 서서 바라만 보고있자, 은비전 앞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던 궁녀 열 댓
명이 그녀의 앞으로 걸어나와 공수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그제서야 은녹은 무릎을 꿇은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궁녀들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자, 맨 첫번째로 앉
아 있던 궁녀아이가 입을 열었다 .
“ 서비마마, 만나뵙게 되어서 노비, 광영 또 광영이옵니다. 노비는 앞으로 서비마마를 모시게될 궁녀, 아유라고 하옵니다. ”
흰 목덜미가 드러나며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숙인채로 또 인사를 한 모양이었다. 그다음에는 순서대로 궁녀들이 저마다 자신을 소개하였다.
“ 필윤이라고 하옵니다. ”
“ 기연이라고 하옵니다. ”
“ 성희이옵니다. ”
“ 아연이옵니다. ”
이름도 다 기억하기도 전에 소개가 끝났다. 열댓명의 소개가 끝나자 궁녀들이 둘로 갈라져서 섰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은녹이 조그만 얼굴을 갸웃거리자, 그 사이로 머리를 틀
어올려 고풍스러운 가채를 하나 올린 여느 궁녀들과는 조금 색다른 비단옷을 차려입은 서른살이 조금 넘어보이는 여인이 나타났다. 아마도, 은비전의 상궁이며, 자신을 보좌할 이
일것이다. 여인은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과연, 그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도 오랫동안 황궁에서 지내온 연륜이 느껴지는듯 새삼 존경스러워 보일 정도였다. 끝까지 허리를 곧게
숙이고 곧게 펴고서 눈가를 부드럽게 휘며 웃으며 말했다.
“ 이제부터 서비마마를 모시게 된 은비전에 배정받은 상궁, 신상궁이라 하옵니다. 저를 신상궁이라고 불러주시옵소서. ”
“ 아, 신상궁… ”
“ 앞으로 성심성의를 다하여 마마를 제 목숨처럼 보필하겠사옵니다. ”
“ 고, 고마워요. 신…상궁. ”
딱보아도 자신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였고, 게다가 황궁에서 지낸 세월도 자신과는 비교가 될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녀에게 신상궁이라고 부르려고 하니 꺼려지긴 했다. 은녹은 내
심 이리 곱고 우아한 여인이 앞으로 자신을 모시게될 상궁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인상이 무척 고운 사람이었다.
“ 과연, 대륙 제일미라고 하던 소문들이 과장된 것들이 아니였습니다. ”
그녀의 도움으로 은비전 안으로 들어서던 중에 신상궁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얼굴이 붉어진 은녹이 재빨리 답했다.
“ 과찬이에요. 전혀요. ”
‘유휘왕저하의 양녀이신 하연아가씨도 무척 곱다던데요,뭘’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다소 질투같아 보이기도 하여 은녹은 재빨리 삼켜버렸다. 움찔거리던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보기는 하였으나, 별 의심없이 신상궁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은비전의 내부 이곳저곳을 소개해주었다. 무엇보다도 내부에 마련된 작은 화단이 그녀의 여린 마음에
무척 들었다. 이미 화단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로만 가꿔져 있었다. 은녹이 작게 탄성을 내뱉으며 화단에 다가가서 꽃들을 보며 싱글거리자, 곁에 다가온 신상궁이 온화한
눈빛으로 물었다.
“ 이곳에 있는 꽃들을 무척 좋아하시나 보옵니다, 마마. ”
“ 네, 전부 제가 좋아하는꽃들이에요. 거의 사가에서도 가꾸던 것들이었는데… ”
아이처럼 무척이나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는 은녹을 바라보던 신상궁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사가에서도…’라는 말에서 그녀는 은녹이 사가에서 보아왔던 것을
이런 낯선 궁에서 보아 더 반가운것이라는것을 짐작하고서는 조금은 측은한 눈빛으로 은녹을 바라보았다. 저 한창 고운 나이에 이런 험난한 궁에 들어오게 되다니…궁에서 더
오래 지내온 선배로서는 가히 앞으로의 그녀의 날들이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부디, 이 작고 아름다운 여인이 차가운 황제폐하의 얼어버린 감정을 녹여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폐하께서 직접 정해주신 것들인데, 마마의 마음에 꼭 든다는 정말 다행이옵니다. ”
“ 아…폐하께서 직접이요? ”
“ 그럼요. 사실 폐하께서 직접 화단을 마련하여, 취향에 따라 꽃을 심어주신것은 이례적인 일이옵니다. 아마도, 그런 대우는 서비마마께서 처음 받으시는 것일 것이옵니다. ”
황제가, 그것도 직접 정해준 꽃들로만 심어진 것들이라니. 황제가 자신의 취향을 알고서 해준것일리는 만무했고…그렇다면, 그의 취향과 그녀의 취향이 같다는 말인가? 은녹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기도 했다. 자신이 처음이라니. 항상그렇지만, 언제나 ‘처음’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설레이게 만든다. 살짝 붉어
진 그녀의 뺨을 알아차린 신상궁의 얼굴에 함지박만한 미소가 베여져 있었다.
“ 앞으로의 날들이 그리 평탄치많은 않을 것이옵니다. 그대로, 제발…포기하지는 말아주십오소서. ”
“ 네? 포기…라니요? ”
“ 저는 그렇게 믿고있습니다. ”
의아하게 물어오는 은녹의 말을 살짝 삼켜준 신상궁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고선 이윽고 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시옵소서.’라는 말과 함께였기에, 은녹은 조금 더
화단에 있고 싶었지만 이건 나중에 보아도 되는것이였기에 일단은 은비전의 내부모습과 친숙해지기 위해서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화단 다음에도, 접대실과 침실, 그리고
작은 다과실도 마련되 있는 아주 만족스러운 구조였다. 은비전 내부를 둘러보는대만 두 시진이나 걸렸다. 오래 걸어본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잠깐 이었지만 다리가 살짝 저려오
는 것이 아픈듯 했다. 고운 그녀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자, 눈치빠른 신상궁이 옆을 따르던 궁녀, 아유에게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오라고 일러놓고선 재빨리 그녀를 의자
에 앉혔다.
“ 아직 궁에 익숙해지실려면 멀으셨는데…벌써 부터 고단하시니 어쩌시옵니까? ”
여느때처럼 신상궁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감겨져 있었지만, 그 말속에서는 서운하면서도 걱정스러워하는 신상궁의 마음이 담겨져 있어, 아픔에도 불구하고 은녹의 고운 얼굴
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다는것은 아주 좋은 것이었다. 신상궁을 보노라면 꼭, 자신의 돌아가신 어머니, 미려를 보는듯 했다. 물론, 신상궁에게는 미안하지
만 어머니 미려는 보는것으로도 아픔이 가실정도로 굉장한 미인이였기에 신상궁과 외모적으로는 차이가 많이 났었지만. 그래도, 신상궁또한 여느 여인들보단 훨씬 빼어난 미인임
에 틀림이없는것은 분명했다.
“ 미안해요. 할 줄 아는건 어리광부리고, 투정부리는것밖에 모르는 아가씨라서, 신상궁이 앞으로 많이 고단할 거에요. ”
은녹이 장난스레 개구지게 웃으며 말하자, 신상궁이 낮게 ‘후후’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 염려마시옵소서, 노비는 언제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으니까요. ”
“ 이제부터 신세만 질거에요. ”
“ 그 신세를 받는것또한 저의 몫이옵니다. ”
“ 심하게 투정부려서, 신상궁이 화가 날수도 있을거에요. ”
“ 그렇다고하여, 어느 충성스러운 개가 자신의 주인을 물 수 있겠사옵니까? ”
그녀의 말에 지지않을듯 바른 대답만 해오는 신상궁을 보며 은녹의 목구멍이 순간 턱, 하고 막혀버렸다. 명치께에서 부터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하고 솟아오르는것 같은 느
낌이었다. 이런 느낌은 어머니가 돌아가실때 빼고는 처음 느껴보는 느낌이었다.
“ 어이하여 눈물을 보이시옵니까? 나약해 지시면 아니되옵니다. 앞으로, 더 많은 험난한 일들이 벌어질 텐데…. ”
신상궁은 속상한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부드럽게 자신의 아픈발을 어루만져 주며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에 은녹이 흠칫거리며 뜨거운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흐르는 느낌을
그제서야 받은듯 놀란 눈으로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뺨을 쓸어보았다. 촉촉한 물기가 젖여 나왔다. 자신이…자신도 모르는새 눈물을 보여버렸구나. 은녹은 너무나도 나약한
자신의 모습이 한심스러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 과연, 잘 할수 있을까? 태후와는 또 어떻게 지내지? 그날 처음 본 것만으로도 태후만 떠올리면 가슴이 두려움에 벌벌 떠
는데…어찌, 매일 아침마다 문안을 여쭙기 위해 뵐수있을까? 엄두가 나질 않지만 이젠 더 이상 무를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 태후마마 너무 무서우시던데… ”
태후라는 말에 순간 어깨를 경직시키던 신상궁은 이윽고 굳은 입매를 억지로 피며 말했다.
“ 뵙…셨습니까? ”
“ 네, 궁에 입궁한 첫 날에요. 어찌나 무섭던지. ”
그때가 떠오르는듯 은녹의 고운 아미가 찡그러지며 두팔에 난 소름을 털자, 신상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너무 무서워 하지는 마시옵소서, 태후마마께서도…원래 성정이 그러신 분은 아니시니까요. ”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왜그리 물기젖은듯 아련하게 들려오던지, 그때 은녹은 알지 못했었다.
6
하연은 뭔가가 불안한듯 자꾸만 일어서서 처소 안을 서성였다. 은녹이 비의 첩지를 받은뒤, 자신에게도 용대관이 찾아 왔었다. 그리고, 물론 그녀에게도 응당 첩지를 내렸
는데 중요한것은…초야도 아직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은녹은 벌써부터 비가 되었고 자신은 그보다 좀 더 낮은 빈에 올랐다. 그와 더불어, 은녹의 거처인 은비전과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설야전雪夜殿을 하사 받았다. 가장 슬픈건, 사가에서 데려온 유모와 어쩔 수없이 떨어질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황궁의 법도가 그러한것이, 자신의 힘
으로는 어찌할 수 가 없었지만 그래도 슬프고, 억울한건 어쩔수없었다. 유모가 그녀의 곁을 떠난 대신, 설야전에서 자신을 보필하게될 정상궁을 만나게 되었다. 정상궁은
마치 강아지눈마냥 동그랗게 눈꼬리가 아래로 쳐진 인상이라서, 딱보아도 순하다는것을 확연하게 느낄수가 있었다. 하지만, 말을 할때마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모양이 그
리 만만한 성정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낮게 한숨을 내쉬는 하연의 곁으로 정상궁이 살며시 다가와 물었다.
“ 어디가 편찮으시옵니까? ”
“ 아니다. 그냥…그저,그래. ”
“ 노비가 홍빈마마이였어도, 그럴것이옵니다. ”
그녀의 말에 정상궁이 서운한 목소리로 답하자, 하연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이윽고 쏘아붙이는 말투로 되물었다 .
“ 무얼말이냐? 무얼 그래? ”
그 기세에 주춤한 정상궁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올려 보다가, 곧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 아니, 아무리 대서림 대감의 여식이라고는 하나, 황족이신 유휘왕저하의 양녀이신 마마께서 더 신분이 높으신데 어찌하여, 서비께서는 비의 품계를 하사받으시고, 마마께
서는 고작 빈… ”
“ 그 입 다물어. ”
“ 마,마마. 노비는 그저… ”
당혹스러운 표정의 정상궁이 어쩔줄 몰라하자, 하연이 낮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어름장을 놓았다.
“ 한번 만 더 내앞에서 품계어쩌고, 하면서 왈가왈부하면…그땐, 알아서 하게. ”
“ 소,송구하옵니다, 마마. 노비가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경망스레 입을 놀린 죄, 달게 받겠사옵니다. ”
정상궁이 울상을 지은채 곧장 바닥에 엎드리고서 머리를 조아려 대자, 골치아픈듯 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침소로 들어갔다.
은비전
아침부터 은녹은 어미잃은 아이마냥 울상을 지은채 궁녀들이 입혀주는 고운 복장을 갖춰입었다. 속이 비칠듯 하늘거리는 얇은 능라속옷위에 속이 비치진 않지만 다소
얇은 소재의 흰 소복을 덧 입고, 그위엔 소매가 넓은 연분홍빛 비단옷을 걸쳤다. 거기까지만 해도 거의 세 가지의 옷을 껴입은 터라 약간 몸이 무거운듯 했는데, 거기
서 끝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비단옷위에 짙은 붉은빛을 띄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겉옷을 덧 입어야 했다. 몸은 조금 무거웠지만, 거울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하늘
에서 하강한 월궁항아만큼이나 어여뻤다. 아니, 오히려 그들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 꼭 이계의 사람같아 보였다. 그녀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주던 아유가 입에 발린 말
을 했다.
“ 마마, 정말로 곱습니다. 노비, 태어나 이리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보옵니다. ”
“ 너두 참. 주책이다,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하렴. ”
“ 정말이옵니다, 마마 .”
더불어 필윤이까지 부추기고 나서자, 은녹은 마냥 싫지많은 않은듯 밉지않게 흘기고선 낮게 웃어보였다. 그런 그녀의 곁에 어느덧 신상궁이 와있었다.
“ 아, 서근전에 가서 제대로 태후마마께 문안인사를 올릴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요. ”
신상궁에게 은녹이 울상을 지으며 말하자,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하얀손으로 가녀린 어깨를 두어번 쳐주는것으로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곤 단아한 목소리로 몇 가지
더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 너무 어렵다고만 생각하시면 아니되옵니다. 그러면 더욱 어렵게 느껴지실 것이옵니다. 분명, 어떤 실수를 하든지 간에 태후마마께서는 그리 노여워 하시지 않으실 것
이에요. 물론, 겉으로는 노여우신척 하시겠지만, 그것이 진심은 아니시랍니다. 그러니 너무 상처받으시지 마시고, 평소의 모습을 보여주시면 되옵니다. 마마께서는 그냥
웃고 계신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이 즐거우실것이에요. ”
끝에 농담을 섞자, 굳어있던 은녹의 얼굴이 그제서야 부드럽게 살짝씩 풀려졌고, 마지막에는 결국 꺄르륵 하고 웃어버렸다. 긴장이 조금은 풀리는듯 했다. 더구나, 가장
신뢰가는 신상궁이 괜찮을것이라고 말해주자 거짓말처럼 그것을 맹목적으로 믿게 되었다. 은녹은 무언가를 결심이라도 한 듯 굳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번 끄덕여 보
고서는 옷 매무새가 흐트러진곳이 없는지 확인하고서, 입술에 발린 연지가 조금 번지것 같다며 필윤에게 다시 한번 더 발라 달라고 했다. 그렇게, 화장도 다 고치고 나
서 머리를 어색하게 다듬고서 서근전으로 향하기 위해 문앞에 선 은녹의 모습은 아주 아름다웠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보고 있는 이의 눈마저 멀게 해버릴듯
자칫하면 위험스럽고도, 또 위험을 감수할만큼 매혹적인 것이었다. 신상궁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이만 가시지요.’라고 말했고, 이윽고 은녹의 작은 얼굴
이 주억거려지며 문이 활짝 열렸다. 은녹은 순간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서 눈앞에 펼쳐친 광활한 황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은비전은 다른 황궁들 보다도 약간 높은
곳에 있어서 다른 황궁들이 약간씩 보였다. 그 웅장함에 위축되는듯 했지만, 이제는 이 곳이 자신이 살아가야할 집이었다.
“ 가요. ”
이윽고 단아한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그것의 신호로 수십명의 발걸음이 서근전으로 향했다.
서근전
운명의 장난 이였을까. 서근전의 앞에서는 지금 기이한 모습이 연출되어지고 있었다. 서근전의 문앞에 서있던 궁녀들이 수근거리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그들의 눈에 보여지는 상황은 가히 그야말로 볼만한 광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은비전의 서비와, 설야전의 홍빈. 그리고…
“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
“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
황제. 은녹과 하연은 거의 동시에 그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신상궁과 정상궁도 함께였다. 휼의 입가엔 조소끼는 없지만, 그다지 기분좋지만은 않은 미소가
걸려져 있었다. 여전히 두근 거리는 심장. 은녹은 발그레해진 뺨으로 휼을 차마 바라보지는 못한채 고개를 숙이고서 다소곳하게 서있었다. 그에 반해, 하연은 불쾌
한듯한 표정을 거의 드러낸채로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모든이들이 그녀를 좋지 않게 보고있음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내보인듯 했
다. 은녹은 얌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 태후마마께 문안인사를 올리기 위해 들었사온데…먼저 들어가시옵소서. ”
그녀의 말에 휼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전보다 훨씬 고와진 모습이었다.
“ 아니다. 함께 들지. ”
“ 네? ”
놀라 반문하는 은녹을 향해 장난스레 웃어보인 휼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서근전의 문 앞에 섰다. 그러자, 덜덜 떨며 문전 궁녀가 소리쳤다.
“ 태,태후마마! 황제폐하 드시옵니다! ”
거의 궁녀의 목소리가 끝남과 동시에‘어서들라하시라!’는 태후의 반가운 목소리가 문밖을 넘었다. 태후의 의외의 반응에 은녹이 놀란듯 고개를 들자, 휼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 들지않을것인가? ”
“ 아,아니옵니다! ”
더듬거리며 은녹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그를 뒤따라 서근전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뒤엔 항상 신상궁이 따랐다. 불만스러운듯 뾰루퉁해져있던 하연또한 별수 없다는듯
한숨을 내쉬고서 그녀의 뒤를 따라 정상궁과 함께 서근전의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보아도 적응안되도록 사치스러우며 화려한 서근전 내부의 모습에 은녹은 주눅이 들
어 눈치를 살피다가 이윽고 접대실로 들어서는 휼의 뒤를 따라갔다. 접대실안으로 들어서자, 눈이부신 황금빛 자수로 작싱된 긴 탁자가 보였고, 그 끝에 우아하게 찻잔
을 들고서 그들을 맞는 태후가 보였다. 은녹은 주춤거리며 인사를 올렸다.
“ 태후마마 천세 천세 천천세. 소첩, 태후마마를 뵈옵니다. ”
“ 어마마마, 문안인사 올리옵니다. ”
거의 동시에 내뱉어진 말에 태후가 고개를 들어 둘을 바라보았다.
“ 오, 황상! 귀한 발걸음을 하셨소. 어서 앉으시지요. ”
“ 예, 어마마마. ”
휼은 담담하게 그녀가 내어진 자리에 앉았다. 그를 보며 입귀를 늘어뜨리고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있던 태후는 뻘쭘하게 서있는 은녹을 잠시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며 앉으
라고 권유했다. 첫날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녀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그녀였지만, 곧 그 이유가 바로 함께 자리한 황제의 덕분이라는 생각을 하는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
니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신상궁이 그녀의 의자뒤로 와서 섰다. 무슨 죄라도 진 마냥 고개를 푹 숙인채로.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후와 신상궁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녀
의 뒤를 이어 접대실로 들어선 하연이 인사를 올리자 태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 오, 그대가 유휘왕의 양녀, 홍빈이군. ”
“ 예, 태후마마. ”
“ 곱기는 하구나…. ”
살짝 비교를 해보듯 힐끗 은녹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놓으며 말하자, 하연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렸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듯 부드럽게 웃으며 ‘황공하옵니다, 마마’라고
말하며 그녀역시 은녹의 마주편에 앉았고, 그녀의 뒤엔 정상궁이 자리잡고 섰다.
“ 이리 아침부터 황상과, 두 비빈들을 보오니 늙은이의 마음마저 젊어지려하는것 같소. ”
“ 어마마마, 늙은이라니요. 아직 늙다고 하기엔 젊으시옵니다. ”
“ 후후, 어쩜 황상께서는 말씀도 그리 야무지게 하시는지. 이 어미의 마음이 다 흐뭇하구려. ”
역시라는 단어가 확연히 떠올랐다. 하나뿐인 아들이라더니…그런 황제를 향한 태후의 모정은 은녹과 하연에게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얼음같고, 무섭기 그지없다던
내명부 최고의 어른이라는 태후가 이리도 온화해 보이다니. 마치 눈에 헛것이 보이는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며, 진실이었다. 한동안 보기엔 한없이 즐겁기만한
담소를 나눈뒤 휼이 힐끗 밖을 내다보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슬쩍 일어섰다. 그러자, 태후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이런, 벌써 아침 조회가 시작될 모양이구려. ”
“ 예, 어마마마. 반시진도 못되어 자리를 뜨게되어 송구하옵니다. ”
“ 아니요, 아닙니다. 송구하다니요! 괜찮습니다. 어서 가보세요 . ”
“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사옵니다. ”
간단히 목례를 하고서 휼이 접대실을 나가자, 태후의 얼굴 가득히 만개해있던 꽃같던 미소를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처음 보았을때의 그 차가운 조소만이 남겨졌다. 그 확연
한 변화에 저들만 남게된 은녹과 하연은 자신들도 모르게 바짝 긴장을 하게 되었다. 요사스럽게 발라진 붉은 입술이 삐뚜룸하게 한쪽만 올라가졌다.
“ 이제 겨우 하루된 후궁들 치고는 꽤나 운들이 좋은 모양이구나. ”
“ …? ”
“ 첫 날부터 황제폐하의 용모를 뵙게 되다니. ”
태후는 차의 향을 음미하듯 코에 찻잔을 대고 한번 원을 그려주고서 한모금 마셨다. 우아하게 마셨지만, 찻잔에는 붉은 연지자국이 확실하게 나있었다. 오늘 처음 태후를
뵙는 하연은 그런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에 적잖은 충격이라도 받은듯 무게감있는 무언가로 뒤통수라도 한대 맞은마냥 멍한 표정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물론, 당당하게
마주볼 자신감은 없어 그녀의 주름하나없는 미끈한 입술부근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은녹은 불편한 표정으로 자꾸만 치맛자락을 쥐었다, 폈다 거리면서 태후의 옆
모습을 훔쳐보았다. 세 사람 사이에는 원인모를 정적이 꽤나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그렇게, 무안하리만큼 찻잔만 만지작거리면서 무려 반시진이나 보내자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 하연과 은녹은 헛기침을 하며 제발 무슨 말이라도 꺼내달라는듯 애원스러운 눈빛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우아하게 차만 마시면 태후가 찻잔을 탁자에 탁
소리나게 놓으며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막상 그녀의 시선을 받게되자, 긴장한듯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 경직되어 버린 둘.
“ 유휘왕께서는 평안하신가? ”
“ 모두 태후마마의 하해와 같으신 배려덕분이옵니다, 평안히 잘 계시옵니다. ”
“ 유난히도 입술에 바른 연지에 기름이 더 들어가 섞였나 보구나. ”
그리말하며 태후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겉으로 보기엔 농이 짙은 말과 부드러운 미소로 보였겠지만, ‘입술에 바른 연지에 기름이 더 들어가 섞였나 보구나’라
는 그녀의 말은 입에 발린 유들한 말솜씨를 빗대어 표현한 것임은 둘은 알 수 있었다. 경직되어버린 하연은 어찌할바를 모르고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애꿎은 찻잔만 곱
씹어 대었다. 이번엔 은녹에게 멈춰진 그녀의 시선. 벌써부터 긴장을 한 은녹이 식은땀이 흐르는듯한 묘한 느낌을 받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 서비께선 참으로 운이좋군요. ”
태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왜 그리도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아드는지, 은녹은 꾸중이라도 들은마냥 울상이된 얼굴로 ’네?’라고 반문했다. 곧이어 이어질 대답은 뻔하였다.
7
“ 아직 황상과 초야조차 치루지 못한 상태에서 ‘비’의 품계를 받다니…이례없는 일이었소. ”
“ 황송하옵니다, 마마. ”
“ 후후후. 그것이 어디 서비의 잘못이겠소. 황상의 뜻이었으니, 나도 더이상 참견하고 싶지는 않구려. ”
그래도 후궁들의 품계중에서는 가장 높은 ‘비’의 품계를 받은 그녀인지라, 하연에게처럼 완전한 하대는 하지 못하고, 최소한의 예를 갖춰 말하는 태후의 말투에서
그제서야 이제 조금은 높은 후궁이 되었다는것을 적나라하게 실감이 나는듯 했다. 은녹은 굳어서 도저히 펴질 생각을 못하는 입가의 근육을 억지로 피며 미소를 띄
웠다.
“ 마마께서 그리 말씀하시오니, 소첩의 맘또한 편치않사옵니다. 태후마마께서 소첩에게 마음에 안드시는 일이 있으시거나, 불편한 기색이 있으시오면 여지없이 말씀
해 주시옵소서. 달게 듣고, 교훈처럼 새기겠사옵니다. ”
은녹은 떨지 않으려 애쓰며, 입가에 미소까지 띄운채 최대한 담담한척 하려 했다. 그런 그녀의 의도가 반쯤은 먹혀들었는지, 차가운 태후의 용안에서 조금이나마 부
드럽게 풀리는듯한 낌새가 보이는듯 했다.
“ 앞으로 더 겸손해지세요, 서비.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라지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더욱 겸손해지셔야만이, 뭇 아랫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을 터
이니. ”
“ 마마의 말씀, 깊이 새기겠나이다. ”
“ 흡족한 대답이구려. 오늘은 오래 자리를 지키셨소, 모두. 나와의 시간이 그리 쉽지많은 않았을 터인데. 후후 ”
태후는 사뭇 그 어색함과 정적을 즐기는듯한 묘한 웃음을 지으며 호쾌하게 찻잔을 비웠다. 이윽고 차랑거리는 주렁주렁 매달린 여러가지 장식품들을 찰랑거리며 금색 봉
황이 화려하게 수놓여진 눈이 어질해질정도로 화려한 태후복을 휘날리며 접대실에서 나가버렸다. 그제서야 숨통이 트이는듯 태후를 배웅하기위해 자리에서 일어서 있던
하연과 은녹은 동시에 ’하’라는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각자 옆으로 정상궁과 신상궁이 다급히 달려와 자신들의 주인을 모셨다.
“ 마마, 힘드셨지요? 아이구. 노비도 태후마마와는 처음 보옵니다! ”
“ 조금…힘들구나. 까다로운 분이시구나. ”
“ 앞으로 매일 같이 이리, 다과를 드시면서 문안인사를 올려야 하실 터인데…아이구, 우리 홍빈마마 어쩌시누. ”
“ 그리 호들갑떨필요는 없다. 나는 괜찮으니. 이만 처소로 돌아가자꾸나. ”
과장된 정상궁의 호들갑스러움에 하연이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복사꽃처럼 우아하게 흐트러진 모습조차 단아한 모습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다시 걸음을 멈추고서는 의아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상궁의 눈길을 무시하고서 뒤돌아, 고개를 숙이고서 한숨을 내쉬는 은녹을 바라보았다. 붉은 그녀의 입귀가 부
드럽게 늘려졌다.
“ 처음 뵙지요? 서비마마. ”
“ 아, 홍빈마마. ”
하연의 말에 놀란 은녹이 서둘러 제자리에 일어서서 공수자세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그 순수한 모습에 하연은 절로 입가에 웃음꽃이 피는것 같았다.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보는이를 편안하고,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묘한 재주를 가지고있는 아름답고 진귀한 여인임이 틀림 없었다.
“ 저는 서비마마보다 낮은 품계이옵니다. 어찌 그런 저에게 존대를 쓰시옵니까? 받는 제가 부담스러우니, 하대하시옵소서. ”
“ 아,아니옵니다! 어찌 제가…”
은녹이 어쩔줄몰라하며 얼굴을 붉히면서 까지 절대 그러면 안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머리에 곱게 꽂아두었던 장식품이 흘러내릴 지경까지 되었다. 그 모습이 왜
그리고 귀여워보이던지, 하연은 깔깔거리면서 웃으면 입가를 손으로 억지로 가렸다. 그녀의 웃음에 놀란것은 정상궁은 물론이고, 은녹의 머리장식을 급히 수습하여 꽂아주
던 신상궁도 놀란눈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원래 성정이 호탕하고 쾌활하기 그지없는 하연은 시원스레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왠
지모르게 부러운 은녹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
“ 하하하, 송구하옵니다, 서비마마. 무례하게도…”
“ 아,아니옵니다! 무례라니요…, 오히려 그리 밝게 소리내어 웃을줄 아시는 홍빈마마께서 더 부럽사옵니다. ”
“ 서비마마두 참…왜그리 소녀스럽습니까? ”
은녹의 진심이 우러나온듯한 그말에 하연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소녀스럽다는말에 은녹의 하얀 두뺨에 깊은 우물이 생기며 발그레한 붉은 꽃이 피었다.
“ 부끄럽습니다. 이제 어엿한 지아비를 모시게될 여인이 된 몸. 아직 소녀스럽다니요. 조금 더 여인다워져야 지요. 그리고, 홍빈마마. ”
부드럽게 자신을 부르는 끝말에, 하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그러사옵니까?’라고 묻자 은녹이 싱긋웃으며 말했다 .
“ 저는 황후마마가 아니옵니다. 황후가 아닌이상 홍빈마마와 저, 우리는 둘은 그저 같은 후궁일 뿐이옵니다. 어찌, 같은 후궁사이에서 더 높은 벽과 담을 만들기 위해서
자잘한 품계를 따지며 하대를 하느냐, 존대를 하느냐를 정하겠사옵니까. 평범한 여염집의 아낙들이 아닌 높디 높은 황궁으로, 하늘의 아들이신 폐하의 여인들이옵니다. 이
험한 궁에서 살아남기가, 또 그분의 사랑을 받기가, 밤하늘의 별을 따는것마냥 어렵다는것은 그 누가 모르겠사옵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들의 앞으로 펼쳐질 나날
들은 분명히 힘들고 고단할것임이 틀림없사옵니다. 그런 험한 고난을 함께 겪어가야할 어찌보면 같은 벗이 될 수도 있는사이가 아닙니까? 그러니 서로에게 존대보다는, 편
한 친구처럼 대하는것이 훨씬 좋을듯 하옵니다. ”
“ 마마… ”
마냥 순진하던 그녀가 그리 진지하게 맞는 말만, 그것도 안그래도 마음 기댈곳이 없어 슬프고 외롭기만 하던 하연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는 말만 골라 하니, 어느덧 하연의
그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방울이 맺히는듯 했다. 보일세라, 급히 소매끝으로 눈물을 눌러찍어 흔적을 없앤 하연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화답
했다.
“ 그 말…들으니 참으로 위안이 되옵니다. 감사하옵니다, 서비마마 .”
“ 고맙다니요, 응당해야할 말이었고, 이치에 맞은 말이었습니다. 마음쓰지 마시고, 힘들어 보이시니 얼른 처소로 발걸음하시지요. ”
“ 그럼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
부드럽게 대답하는 은녹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어준 하연이 정상궁을 이끌고 접대실을 나섰다. 이윽고 그 뒤를 따라 온화한 빛을 머금은 은녹이 신상궁과 함께 접대실을
빠져나갔다.
.
“ 들었니? ”
“ 무얼? ”
황궁의 가장 정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건물인 대전회의장 문전에 모인 궁녀들이 하나같이 머리맡을 맞대고서 조그맣게 수근거렸다. 대전회의는 이미 끝난 후였고, 회의장
안에있던 귀족들은 모두 물러간 뒤였으며, 안에는 마저 남은 할 일을 정리하는 부지런한 폐하만이 남아 계셨다. 계집의 발그레한 뺨마냥 은은한 분홍빛이 감도는 치맛자락
을 휘날리며 모여든 궁녀들은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지극히 수다스러웠기에 이러한 광경들은 결코 생소한것들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들의 수다의 주제가 다만 생소하였
을 뿐이었다. 맨처음 말을 꺼낸 궁녀는 이들과는 약간 다른 장식이 가미된 옷을 입고있었다. 왼쪽가슴께에 새겨진 우아한 봉황의 깃털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서근전에서
태후를 모시는 궁녀들만이 새길수있는 것이었기에, 그것만 보아도 그녀가 서근전의 궁녀임을 알 수 있었다. 눈이 강아지의 것마냥 눈꼬리가 길게 쳐져있는 여인은 다소 귀
염성있는 인상이었는데, 조심스레 입을 여는 모습이 어찌나 신중해보이던지, 동안스러운 얼굴에 늙은이의 신중함이 돋보이는것같아 웃겨보이기도 했다.
“ 서근전에서 있었던 일! ”
“ 들었지! 오늘 폐하께서 문안인사를 올리러 가셨는데, 운이 좋게도 두분 비빈마마들을 뵈셨다지? ”
“ 그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 어머, 그럼 그것외에도 더 있단말이니? ”
길게 뒷 말을 빼는 서근전 궁녀의 행동에 속이 답답한듯 궁녀한명이 다시 ‘얼른말해봐!’라며 그 궁녀를 채근했다.
“ 태후마마께서 폐하께서 나가신 뒤에도, 두분 마마들과 함께 다과를 드셨는데 그게 한…반시진을 조금 넘겼을거야. ”
“ 세상에! 그 얼음같다던 무서우신 태후마마와 반시진이 넘도록 함께 다과를 드셨다구? 정말 상상도 못할일이다. 대단하신 분들이시야. ”
새삼 하연과 은녹의 담력에 감탄한듯 궁녀아이한명이 말의 흐름을 끊자, 나머지 열댓명의 궁녀들의 따가운 시선들이 꽂혔다. 그에 무안해 하며 조용히 ‘마저말해봐’라며
말하자, 그제서야 다시금 서근전 궁녀의 말에 집중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남말하기좋아하는 자그만한 새들같아 보였다 .
“ 태후께서 나가신 뒤에, 두분마마께서 어찌나 긴장을 하셨던지 제자리에 그만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으시더라구! ”
“ 어쩜, 그럴만도 하지! ”
“ 그래서, 홍빈마마께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처소로 돌아가실려고 했는데 그래도 내명부의 규율이 있잖니? 예의를 갖춰서 서비마마께 가겠다고, 처음 뵈었는데, 어
쩌구하는 명분으로 인사를 올리서더라구. 서비마마께서도 그 인사를 받으시는데 존대를 쓰시는거야. ”
“ 어머! 원래 서비마마께서 더 높은 품계이시니까 하대를 하셔야 하잖아? ”
“ 그러니까! 아…근데 서비마마 정말 예쁘시긴 , 진짜 예쁘시더라. 나는 무안하게 서비마마앞에서 침까지 흘릴뻔했다니까! ”
“ 정말? 한번 뵙고싶다! ”
다시금 대화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들을 조잘거리던 그녀들은 이윽고 ‘아참, 이게아니잖아!’라며 자꾸만 말을 딴곳으로 새게만드는 궁녀아이를 따가운 눈초리로 쏘
아보고서 다시금 서근전궁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홍빈마마께서 하대를 하시라고 막 그러시니까, 어찌 하대를 하냐면서. 똑같은 후궁사이에서 높고 낮은 어딨냐고 정말 옮은말만 어찌나 그리 또박또박하시는지. ”
“ 어머, 마음결도 얼굴처럼 고우시구나. ”
“ 진짜 세상참 불공평하다, 하고 느껴지더라. 얼굴도 고우신분이 마음까지 고우시니까 말이야. 하여튼, 그러니까 홍빈마마도 살짝 감동받으신듯 쳐다보시다가, 그래도 어찌
자기가 품계가 더 낮은데 하대를 하냐고, 자신에게 하대를 하라면서 그러니까 귀여우신 서비마마께서 자신이 어찌 그러냐고 당황하시는거야! 그 대목에서 홍빈마마께서 진짜
사람답게 깔깔 웃으시던데. 보는 내가슴이 뻥하고 뚫릴정도로 시원스럽게 웃으시더라. ”
“ 맞아, 홍빈마마께서 사람은 좋으시다더라. ”
“ 이번엔 좋은 후궁분들만 모이셨나봐. ”
“ 하여튼, 그래서 어찌 그리 소녀스럽냐면서 그러니까, 서비마마께서 또 부끄러워하시다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는 험난한 궁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안다고
그런 힘든 나날들은 경쟁상대가 아닌 같은 벗으로서 서로를의지하며 지내자면서 정말 감동적이신 말만 하시는거야! ”
“ 세상에! ”
궁녀들은 하나같이 놀란 표정들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 후궁이 자신보다 낮은 품계의 후궁에게 존대를 쓰며, 또 벗처럼 지내자고 할까? 그녀의 따뜻하고 온화한 마음이
그녀들에게 전해지는듯 마음 한켠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모두들 그런 서비, 은녹을 칭찬하는 말들을 하다가 이윽고 대전회의장의 문이 끼익 하고 열리며 황제, 휼이 나옴에
화들짝 놀라 모두들 고개를 조아리고서 그에게 예를 갖췄다. 그런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휼은 곧 뻘쭘하게 서있는 서근전의 궁녀를 향했다.
“ 서근전의 궁녀가 어찌 대전회의장에 온것이지? ”
“ 예, 예 ? 노,노비는… ”
궁녀가 할말을 못찾아 얼버무리자, 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대전회의장 주위는 놀러 오는 그런 가벼운 곳이 아니다. 그런 잡스러운 수다를 떨려거든, 화원이나 장내원(張內院:속에있는말을풀어베푼다는뜻의이름으로 주로 궁녀들이 모
여 이야기를나누는곳이다)에 가거라. ”
“ 노비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벌을 주시옵소서. ”
어찌할바를 몰라 일단, 엎드리고 보자는 심정으로 궁녀는 급히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이마를 박고 엎드렸다. 그런 그녀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 보던 휼은 그 어느이의 것보다
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서, 그가 거처하는 처소, 룡암전(龍唵殿)으로 향했다.
“ 홍나라의 황제가 고작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대화를 나누는것으로 벌을 줄 만한 옹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느냐? 얼른 일어나서 서근전으로 돌아가, 어마마마를 모셔라.”
룡암전
가장 휼륭한 장인의 솜씨로 기교를 부려 세상 여인네들의 뛰는 심장을 모조리 앗아가버릴 만큼 잘난 사내의 옆모습에, 같은 사내조차도 음심淫心을 품을 만큼 위험스러울
만큼 매력적인 그는 홍나라의 주인, 황제 휼이었다. 휼은 서궤에 잔뜩 쌓인,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지경인 종이뭉치들을 사락 사락 소리가 나도록 넘겨대며 옥새獄璽로
찍어대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기계처럼 움직이던 손동작을 일시에 멈추고서 한숨을 쉬듯 숨을 고르게 내쉬며 머리를 짓누르는 용관龍冠에서 삐져나와 흐트러진 앞 머리칼
을 쓸어넘기며 좀 전에 들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서비마마께서 또 부끄러워하시다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자기는 험난한 궁에서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안다고
그런 힘든 나날들은 경쟁상대가 아닌 같은 벗으로서 서로를의지하며 지내자면서 정말 감동적이신 말만 하시는거야!’
서근전의 궁녀가 조잘거리던 말중의 한 대목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내내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윙윙 맴돌았다. 참으로 이상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더 이
상했다. 제 정신인 이상 경쟁의 대상인 다른 후궁에게 존대를 쓰고, 벗으로 지내자고 했다니? 자신이 들어도 어이없는 말인데, 홍빈이 들었을땐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하
지만 그에 상응한 반응을 보여준 홍빈을 보자면, 버릇은 꽤 없어 보이나 원래 성정은 꽤나 괜찮은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것인가, 아니면 때조차 묻지 못한 순
수함일까. 이해할수없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해할수없는 자신이었다. 왜 지금 미치도록 그 여인이 보고싶은것일까? 그녀또한 뭇 후궁들 처럼 자신이 그녀의 초야를 치뤄
주기를 고대하며 고운 섬섬옥수로 침상을 정리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까? 휼은 심장 한켠이 뜨거워지는것을 느꼈다. 처음 봤을때 부터, 무언가 남달랐던 여인이었다. 물
론 이 세상사람의 것 답지않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는 그녀의 성정 보다는 뒷전이었다. 어쩜 그리도, 순수하고 소녀같은 마음을 가질수가있을까? 어릴적부터 황위다툼에
휘말려 산전수전을 다 겪은 휼에게는 없는것이, 아름다운 그녀에게는 있었다.
“ 봉륜. ”
“ 예, 폐하. 하명하시옵소서. ”
어둠속에서 몸이 가려져있던 봉륜이 문전너머로 자신이 문앞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봉륜의 말에, 휼은 잠시 망설이는 기미를 보이다가 이윽고 종이뭉치를 도로 서궤에 놓
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무덤덤한듯 싶으나, 그 속에는 수많은 고민이 담겨졌을 말과 함께 룡암전을 나섰다.
“ 은비전으로 가지. ”
8
“ 어서 서둘러라! 홍등紅燈을 밝히거라! ”
한밤 중의 어여쁜 주인을 모시는 은비전은 떠들썩했다. 고상하고, 우아하기 그지없는 신상궁이 오늘밤따라 유난히 두뺨에 홍조를 뛰우며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유난을
떨고 있었다. 조용한 그녀의 그런 모습은 생소한 것이였으나, 정식으로 비의 품계를 받은지 고작 하루 만에 황제와 초야를 치루는 후궁은 전례없는 일이었기에, 더 생
소한것이었다. 신상궁이 항상 언제 폐하께서 마마를 찾으실지 모르는 일이오니, 항상 밤마다 정갈하고 몸단장을 하시고 새벽녘까지 폐하를 기다리다 잠이 드셔야 한다
는 말에, 오늘 아침때 태후께 문안을 드리러 갔을때처럼 꽃같이 곱게 단장을 하고서 필윤이와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은녹은 밖에서 들려오는 기연의 황제폐하께서 이쪽으
로 납신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 이제 곧 당도하실듯 하다 하옵니다. ”
옆에서 그녀의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던 필윤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은녹의 고운 두뺨에 발그레한 홍조가 어렸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왔다. 아침에 힐끗 본
폐하의 용안은 이루 말로 표현할수없을만큼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런 황제를 지아비로 모시는 자신이 조금은 대단해 보이기도 했다.
“ 노비, 기뻐서 주체할수가없사옵니다. ”
“ 필윤이 왜? ”
은녹이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농을 던졌다. 그러자, 필윤이 살짝 줏대없어보일만큼 히죽 웃더니 당연하단듯이 크게 대답했다.
“ 당연하지요! 마마께서 이제 초야만 치루시면 명실상부한 비께서 되시는것이 아니시옵니까! 아무도 마마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
신이나서 조잘거리는 필윤을 바라보며 피식웃던 은녹은, 이윽고 ‘황제폐하납시오!’라는 봉륜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허둥지둥 은비전을 나섰다. 급히 달려나온 은녹
이 신상궁외의 다른 궁녀들과 함께 찬 밤바람을 맞으며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소첩, 폐하를 뵈옵나이다. ”
“ 일단은 바람이 차구려. 안으로 들어가지. ”
“ 예, 폐하. ”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고운 무릎을 대고서 인사를 올리는 그녀를 무심한듯 신경쓰이는듯한 눈빛으로 내려다 보던 휼이 먼곳을 바라보며 말하고서 먼저 성큼성큼 은비전 안
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서둘러 은녹이 다급히 일어서서 그의 뒤를 따르자 그녀의 뒤를 곧장 따르는 봉륜과 신상궁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자칫, 보면 서운할
정도로 무심한듯 보이는 그의 행동이었지만, 원래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그라는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두사람에게는 그 작은 행동의 변화가 한 눈에 들어왔던 터였다.
아직은 사람을 대하는것이 서툰 그지만, 앞으로는 그녀로 인해서 많이 변화될것이라는것을 두사람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은비전안은 따뜻했다. 침실로 들어선 휼의 뒤를 은녹이 따랐고, 또 그런 둘의 뒤를 더이상 나머지 사람들은 따르지 않았다. 신상궁이 ‘그럼 노비들은 이만 불러가 보겠나
이다. ’라는 말만 내뱉고서, 조용히 침실의 커다란 장지문을 닫아주는것으로써, 다른이의 방해따위는 없을것이라는 눈치가 주어졌다. 그것을 알아들은 은녹의 얼굴은 어느
새 수줍은 새색시의 붉디 붉은 혼인복같이 발그레해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휼은 이미 그들이 준비해놓은 따끈한 차를 들며 말했다.
“ 그러고 보니, 비는 제데로된 혼인식조차 하지 못했군. ”
“ 아니옵니다, 폐하. 소첩은 그런것에 섭섭한 마음을 두지 않사옵니다. 그러니, 더이상 그것에 마음을 두시지는마시옵소서. ”
그의 말에 급히 은녹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자, 휼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띄워졌다. 왜 이럴까? 그녀는 그저 머쓱하게 두뺨을 붉힌채 웃고만 있을뿐인데, 왜이렇게 얼은
듯이 차갑기만하던 가슴이 봄날에 눈이 녹듯 사르르 녹아내리는것만 같을까? 비로소 그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대는듯 했다.
“ 독대를 하는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였지? ”
“ 예, 그러하옵니다. ”
“ 짐이 갑작스레 찾아와 혹시 당혹스러웠는가? ”
“ 아니옵니다! 절대…그렇지않사옵니다. ”
휼의 말에 은녹이 당혹스러워하며 얼른 대답하자, 휼이 크게 소리를 내어 웃어버렸다. 호탕하게 웃는 사내다운 그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가슴떨리도록 멋있던지. 자꾸만
눈에 무언가가 씌여지는것같은 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은녹은 부끄럽고, 수줍어 하는 자신의 마음을 들킬세라 애써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얌전히 찻잔을 들어
붉은 입술로 하얀 자기잔에 담겨진 따끈한 차를 마셨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휼.
“ 곱군. ”
“ 예? ”
창졸간에 들려온 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은녹이 체면불구하고 잔을 허겁지겁 탁자에 놓고서 황급히 되물었다. 그에 그가 또한번 웃어보였다. 그리곤, 멍하니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은녹을 향해 친절히도 한번 더 반복해 주었다.
“ 이리 밝은곳에 두고 보니, 더욱 고와보이는군. ”
그의 칭찬 한마디에 은녹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붉은 물이 들어버렸다. 부끄러워서 어쩔줄 몰라하는 은녹의 모습이 그의 눈에는 왜그리 고와 보이는지. 그의 눈에도
무언가 단단히 씌인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푹 숙인채 목까지 붉은 꽃물이 들어버린 은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휼이 조심스레 탁자를 그닥 힘을 들이지 않고서 옆으로 살
짝 밀쳐두었다. 의자를 당겨 더욱 가까이에 앉은 휼을 바라보며 은녹은 드디어, 라는 듯한 눈망울로 그를 올려다 보다가 이윽고 부끄러운지 다시금 고개를 숙여버렸다.그
러자 휼이 숙여진 그녀의 매끄러운 턱을 손으로 다시 들어올렸다. 졸지에 눈이 마주친 둘은 동시에 가슴이 한켠이 찌릿해져옴을 느꼈다. 생소한 감정과, 생소한 느낌이었다.
“ 어디서 본적은 없는것 같은데. ”
“ … ? ”
“ 왜 이렇게, 익숙한거지? ”
휼은 제자신도 모르겠다는듯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작은 얼굴을 더욱 당겨 바로 코앞까지 가져다 놓았다. 휼은 정말로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의 작은 얼굴
가득히 들어찬 이목구비를 찬찬히 훑어보고있었지만, 그런 그의 강렬한 눈빛을 받는동안 은녹은 다리가 덜덜 떨리는느낌과 함께 이대로 정신을 놓을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
다. 치맛자락이 구원의 손길이라도 되는마냥 꽉 쥔 은녹의 손을 힐끗 내려다본 휼은 잔잔하게 웃어보였다. 이작은 여인이 왜 이토록 좋을까? 그냥 단순한 호기심인가? 아니
면 자신도 알수없는 이끌림인가? 그가 알수없는 질문들을 퍼부어대는새에 어느덧 두사람은 단정하게 정돈 되어있던 부드러운 비단 침상위에 놓여져 있었다. 등에 폭신하게
와닿는 비단솜이불의 감촉에 부르르 떨며, 은녹은 굳은 결심이라도 한듯 경건한 표정으로 두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 보는 휼의 입가엔 어느덧 부
드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귀엽군. ”
그의 말에 그녀가 무어라 대답하려 입을 열려는 찰나, 부드럽고 말캉한것이 그녀의 붉디 붉은 앵두같은 입술을 삼켜버렸다. 곧, ‘폐하’라는 그녀의 작은 소리는 그의 잇
속으로 묻혀버리고야 말았다. 그 간단한 입맞춤에 그녀는 벼락이라도 맞은 마냥 온 몸을 경직시킨채 두눈을 말똥말똥 뜨고서 그의 단단한 두 어깨에 두 손을 짚어버렸다.그
러다 그와 눈이 마주쳐버린 휼의 눈동자에 어설프게 웃으려는 찰나, 재빠르게 입속을 헤집어놓는 물컹하고 뜨거운 그의 것에 놀라 두눈을 동그랗게 뜬채, 어깨를 짚은 손에
그만 힘을 힘껏 주어 버렸다. 그가 약간 아픈듯 신음을 흘렀으나, 유린하는 그의 것은 도통 멈출생각을 하질 않았다. 처음에는 놀라고 생소한 입맞춤의 느낌에 경직되어있
어 잘 몰랐는데, 점점 농도가 짙어질수록 명치께부터 무언가가 울렁거리는것이 묘하게 흥분되어 왔다. 입술이 묘하게 부어오르는듯한 느낌과 동시에 가슴께에 올라온 그의
손에 은녹의 머릿속이 공황상태가 되어버렸다. 거부를 해야하는데, 타고난 그녀의 이성적본능이 이분은 황제폐하이시라고, 절대로 상처를 입히면 안된다는, 절대로 거부할
수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거부하려는 그녀의 손길을 도로 거두어 버렸다.
두눈을 꼭 감고서 눈커풀을 파르를 떠는 그녀의 모습은 자칫보면 애처로워보이기까지 했으나, 휼의 눈에 더이상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따윈 담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기
어린 그녀의 모습이 거부할수없을만큼 치명적으로 다가와 그를 더 미치게 하는듯 했다. 그의 길다란 손가락이 눈이시리도록 고운 그녀의 분홍빛 꽃물이 든 여밈매듭을 만지
작 거렸다. 이윽고, 그것을 간단히 풀어버린 그가 부드럽게 옷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보름달처럼 둥글고 눈이 아플만큼 곱고 하얀 그녀의 어깨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부터 만져야 할지, 어디서 부터 시작해야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눈에 담지못할만큼 아름다운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것이 주저대
어 천하의 황제, 휼이 난감하고 당혹스러워하고 있는것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순수한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머뭇거리는 그를 향했다. 갈피못잡고 흔들리
는 그의 동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녹은 수줍게 두뺨을 붉히며 그의 어깨에 다시금 손을 올렸다. 그리곤 팔로 목을 감으며 그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는 왠일로 반항없
이 그녀가 이끄는대로 온전히 따라와주었다.
“ 저는 괜찮사옵니다, 폐하. 부디, 소첩을 원하시는만큼 안아주시옵소서. ”
“ 비… ”
꽤나 용기있는 발언에, 휼이 흠칫거리며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이윽곤 사랑스러운 눈동자와 자신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히자, 은은한 미소가 입가에 걸쳐지며 곱고 단아한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 이만 물러가보지요, 저희는… ”
“ 허허, 그래야지요. ”
침실 문전에 관례상 서있던 신상궁과 봉륜은 서로 머쓱해하며 은비전의 침실을 벗어났다. 나서는 내내 둘의 주름진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따사로운 햇살이 연약한 눈커풀을 자극해오자, 긴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오며 은녹이 아름다운 검은 눈망울을 드러내었다. 가볍게 손으로 침상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려던
은녹은 맨살에 와닿는 비단솜이불의 감촉에 한번, 그리고 복부를 관통해오는 아릿한 고통에 두번 놀래야 했다. 고운 아미를 좁힌채,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가 낮게 한숨
을 내쉬자, 따뜻한 물에 수건을 촉촉히 적셔온 신상궁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 아직, 복통이 가시지않으셨을 것이옵니다. 원래 처음이란 다 힘든법이지요. 따뜻한 목욕물을 받아놓았습니다. 우선 이 것을 걸치시고 욕실로 가시지요. ”
그녀의 섬섬옥수 고운손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신상궁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얇은 흰비단으로 된 속옷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은녹의 고운 두 뺨에는 홍조
가 어렸다. 부끄러운것이 당연했다. 수줍게 볼을 붉히며 속옷을 걸쳐입는 동안, 신상궁은 잠시 바닥으로 눈을 내리깐뒤 흡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 첩지를 받은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승은을 입으신 후궁마마께서는, 마마께서 처음이시옵니다. ”
“ 아… ”
“ 지금 은비전에선, 폐하와 초야를 치뤘다는 증거로 홍동을 달아놓았습니다. 모든 궁인들이 그것을 보고, 이제 마마께서 이름뿐인 ‘비’가 아닌, 명실상부한 서비마마
이시라는것을 똑똑히 기억할것이옵니다. ”
“ 과연…이것이 좋은징조일까요? ”
빙긋미소만 짓고있던 은녹이 어두워진 안색으로 조용히 말했다. 잘못하면 놓쳐버릴수도있던 조그만 목소리였지만,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아주 작고 흔한 것이더라도 집중하
고 경청하는 신상궁이 그것을 놓쳐버릴리없었다. 신상궁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 어이하여 그러시는것이옵니까? ”
“ 그냥…너무 좋은데, 한편으로는…너무 두려워요. 한낱 관심으로 끝날것인지, 아니면 총애받는 후궁이 될것인지…. 관심같은거…줘놓고 거두어가는것만큼 나쁜게 없는데. ”
안쓰럽게 웃어보이며 비틀비틀,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한채 욕실로 힘겹게 들어서는 가녀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신상궁의 눈가에 걱정하는 끼가 어렸다. 아직은 이 험
한 궁에 익숙해지려면 한참이나 멀은듯한, 자신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주인은 언제쯤이면 강한 마음을 얻게 될까. 앞으로 펼쳐질 더욱 힘든 고난을 겪어가야할 저 작고 연약한
주인이 그녀로서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마냥 애타고,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 너무 여리시면 더 상처받게 될것이온데…,우리 작은 마마께서 어찌 그것을 감당하실런지. ”
그녀를 통하여 꼭 다른이를 보는것처럼, 신상궁은 그런 마음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어느덧 그녀의 주름진 눈가엔 영롱한 이슬방울이 맺혀 또르르 뺨의 곡선을 타로 흘러내
렸다. 침상주위로 흐트러져있는 은녹의 옷가지를 품에 주워담으며 그렇게 신상궁은 하염없이 소리없는 눈물방울만을 흘러내렸다. 자조적인 실소를 머금고서.
“ 강해지십시오, 마마. 강해지는것만이 이 험한 궁에서 살아남을 길이옵니다. 절대로…절대로 연약하여, 사랑하는 이의 앞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여인이 되지 마시옵소서. 사
랑이 전부라는 마음따위…제발 가지지 마시옵소서. 가장 소중하던 사랑이, 때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숨은 독약이라는것을 절대로 잊으시면 아니되옵니다. ”
거기까지 중얼거리며 신상궁은 순간적으로 힘이 풀려버린 다리에 그만, 침상위로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 제발 사랑에 눈이 먼 어리석은 여인따윈…되지마시옵소서. ”
간곡한 애원조의 부탁이었다.
9
“ 벌써 홍등? ”
“ 예, 그러하다 하옵니다. ”
“ 하아 . 잘지내고 있는것인가. ”
유휘왕, 태릉은 자조적인 한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손으로 쓸어넘겼다. 중후한 매력이 넘쳐흐르는 그의 얼굴은 이미 중년이 되었어도 그 빛을 바래지 않아,
나이가 들고,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깊어지는것만 같은 묘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좋은 징조인가? 아니면 나쁜 징조인가. 첩지는 벌써, ‘비’의 품계를 받았고, 후
궁이 된지 고작 하루만에 초야를 치뤄, 성은을 입었다 한다. 역시, 미려의 빼어난 미모를 능가하는 매력을 이어받은 그녀인지라 과연, 꽃을 가린다 하여 나비들이 모여
들지 않을리가 없는 일이었다. 어찌 그 자연스러운 일을 막으랴. 다만, 너무나도 급진적으로 진전되는 상황에 우려와 염려가 섞여질 뿐이었다.
“ 신상궁이 그 아이를 모시고있다하니, 그래도 마음은 한결 가볍구나. ”
“ 신상궁이라면, 충분히 그 분을 잘 보필하실것이옵니다. ”
“ 그렇지. 그것은 내, 믿어 의심치 않어. ”
태릉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멀리서 시녀아이를 이끌고서 이쪽으로 발걸음하는 설흰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삼십줄을 훨씬 넘은 그녀였지만, 여전히
새색시마냥 고운 홍조가 볼수록 매력있는 아름다운 중년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밝은 미소를 볼때마다, 그는 죄를 짓는듯 심장이 자꾸만 무거워 지는것 같았
다. 어쩌면 좋을까? 여러사람에게 지은 이 죄를, 어찌 다 갚을까. 태릉은 한숨섞인 웃음을 내뱉으며 흘러내리는 긴머리칼을 단정하게 귓바퀴 뒤로 넘겼다.
“ 그나저나…하연이는 잘 지내고 있다더냐. ”
설흰을 보자, 하연이 덩달아 떠올려졌다. 그의 무심한 물음에 여인은 화들짝 놀란듯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다시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 빈의 첩지를 받으시고, 설야전을 하사받으셨다 하옵니다. 아직까지는…잘계신듯하옵니다. ”
“ 그래…안사람이 좋아하겠군. ”
설흰을 향하여 있던 시선을 거두며 태릉이 낮게 중얼거렸다. 여인은 심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 걱정되시오면…한번 궁에, 태후마마를 뵈신다는 구실로 입궁하셔서 한번 만나뵈셔도 될텐데… ”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꺼내는 여인을 태릉이 살짝 쳐다보았다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곤, ‘그래,그것도 좋은 방법이겠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새들어 부쩍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되신듯한 자신의 주인이 왜 저리도 안쓰러워 보이는건지. 여인은 자꾸만 쳐져 가는 주인의 늠름하던 어깨가 걱정스러워 졌다. 저
많은 짐들, 어찌 혼자 감당하실려고 저러시는건지.
“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
“ …? ”
“ 저하, 이번에 영휘왕저하께서… ”
왜이렇게 중요한것은 이제 생각났냔듯이, 여인은 다급하고 진중한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영휘왕이라는 말에 벌써부터 태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영휘왕
이라고 함은, 자신의 하나뿐인 친아우이자, 야망으로 가득차 두눈이 번들거리는 유희라는 부인을 둔 녀석이었다. 그 부인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였는데. 또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는것이 틀림없었다. 저번에는 휼의 황위를 노려, 자신의 아들인 재륜을 왕의 재목으로 키워 반역을 꾀하려던것을 알아채어 더이상 큰 일이 나지않
도록 그의 선에서 일단락시켜버린 일이 있었다. 그 일로 크게 호되게 혼쭐이 난 적이있었거늘, 또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것인가? 태릉의 눈에서 읽은 걱정과 심란함에
여인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 채령이 아가씨를 궁에 입궁시킨다 하옵니다. ”
도대체가 정신을 차릴줄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
“ 빼어나서, 관심은 받을것이라고 예상은 했다만 이정도일줄은 몰랐다. ”
“ 그러게 말입니다, 뜻하지 않는 복병은 만난것같습니다. ”
시녀아이, 위안의 말에 여인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여전히 태후의 처소와 견주어도 뒤지지않을만큼 호화롭게 장식된 방안은 여전하였다. 양쪽 손가락에 쌍가락
지를 낀 손으로 찻잔을 들어올린 여인이 결단을 내린듯 짙은 연지를 바른 붉은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 이제 슬슬 ‘그 아이’를 입궁시켜야 겠구나. ”
“ 벌써요? 조금…이른듯 싶사온데. ”
“ 아니다, 지금 이 시기가 딱 좋아. ”
뒤틀린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번지자, 위안은 섬칫한 느낌과 동시에 차마 저 날카롭고 섬뜩한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환하
게 웃으며 아무것도 모른다는듯 순수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그녀를, 그 험한 궁에 입궁시키는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자꾸만 저어되고, 주저되는것은 어쩔수없었
다. 하지만 한다면 하고, 꼭 밀어붙이는 성격인 자신의 주인의 성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녀였기에, 이미 그것은 돌이킬수없는 결정이 되어버렸다는사실에 절망스럽기까
지 했지만 별다른 도리는 없었다. 부디, 여린 그녀가 험난한 궁에서 별 탈없이 잘 견뎌주기많을 빌고, 빌 뿐이었다. 위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아가씨를 모셔오라는 그녀
의 명에 따를뿐, 더이상의 반항은 용납할수없었다 .
.
“ 부르셨어요? ”
한눈에 보아도 퍽이나 고와보이는, 꽤 값비싼 비단옷을 곱게 차려입은 아리따운 소녀라기엔 너무나도 성숙한듯 싶었고, 여인이라기엔 그 풋풋함이 남아있어 묘한 경계선을
타고있는 여자가 들어섰다. 뒤틀린입가를 바로잡은 유희는 치맛자락을 쥐고있던 손에 힘을풀고서, 입가를 부드럽게 풀었다.
“ 그래, 얼른 앉아보거라. ”
그녀가 왜 저리도 해사하게 웃고있는지, 채령은 알수있었다. 아마도 ‘그 일’때문이겠지. 담담하지만,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의 채령이 고운 아미를 억지로 펴며 어머
니라는 유희와 마주보고 앉았다. 조심스레 앉는모습조차도, 단아함이 물씬 베어나오는 그 자태에 유희의 입귀가 늘여졌다. 무엇이 그리도 그녀를 흡족스럽게 만드는지, 미
소가 귀한 그녀의 얼굴 가득히 함지박만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 어인일로 부르셨어요? ”
“ 호호호, 얘도 참. 어미가 딸을 부르는것에, 굳이 그 연유를 붙여야 하는것이겠니? ”
채령의 물음에 능청스레 대답하며, 유희는 자꾸만 딴짓거리를 하였다. 제대로된 대답을 듣기위해 유도질문을 하는 채령의 마음을 알면서도, 유희는 간사하게 웃으며 요리조리
잘도 피해다녔다. 그러다, 결국 반시진이 훨씬 지난뒤에야 어렵사리 귀한 말을 꺼내오는 그녀.
“ 너도 알고 있을것이다. ”
“ 무엇을… ”
“ 대서림대감의 여식인 은녹이, 벌써 비의 자리를 꿰차고 폐하의 총애를 받고있다지. ”
드디어 올것이 왔구나. 채령은 마른침으로 입술을 축이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어머니라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녕 저분은 자신의 친모가 맞으신것일까? 야속하고, 원망
스러웠다. 지금 이순간, 너무나도 생각나는 그 사람은 어쩌하라고. 눈물이 흐를것만 같았다. 그리도 단단한 못박아두어서, 어려서부터 궁에 입궁하여 황후가 되어야 한
다는 어머니의 전언같던 말들이 그저 허투루 내뱉던것들이 아니였다 보다. 한다면 한다는 어찌보면 고집스럽기 그지없는 골치아픈 성정을 지니신 분이라,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일이라면 어떤 이유와, 어떠한 과정을 걸쳐서라도 꼭 성사시키고 만다. 그렇다면, 자신이 여기서 아무리 궁에 들어가기 싫다고 애걸복걸해도, 그 애원이 들어먹
힐 확률은 지극히 극소수라는 것이겠지. 채령의 고운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쳐졌다.
“ 내 딸아. ”
“ 예, 어머니. ”
“ 난 너를 믿는다. ”
“ … ”
너를 믿는다는 그 한마디가, 어찌나 그리도 무서운것인가. 채령은 깊숙이 빠져드는 절망감에 그만 두눈을 꼭 감아버렸다.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원망스러워도 그녀는 유
희의 뜻을 거역할수없었다. 그것은 어릴적부터 키워온 그녀와의 두껍고, 높다란 벽때문인것또한 있었고, 가족들 모두가 아직은 잘 모르고 있는 둘 만이 알고있는 비밀 또
한 있어, 그녀는 더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오로지, 유희의 꼭두각시가 되어야만 한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령이 힘들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 만족스
러운듯 유희는 붉은 입술로 포물선을 그렸다.
“ 채령아. ”
“ 예,어머니… ”
이젠 저 붉은 입술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어떠한 말이 나와 자신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것인지. 채령은 도저히 듣고싶지 않았지만 들을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뜻
을 따라야하는것이 현실이였다. 손아귀에 넣고 연신 주물럭거리던 호두두개를 딱딱소리를 내며 맞부딪히며 굴러대던 유희가 순간적으로 손아귀에 힘을주자, 그 단단하기 그
지없는 호두 두개가, 가녀리고 하얀 여인의 손안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 나에게 세상을 줘. ”
.
쨍그랑─
“ 에구머니나! 어디 다친곳은 없으시옵니까? ”
갑자스레 날카로운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놀란 신 상궁이 수를 놓던 손질을 멈추고서 급히 은녹이 있을, 침실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하얗게 질린얼굴을 애써 웃음을
지으며 파편조각을 줍기위해 무릎을 굽히는 은녹이 보였다.
“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도모르게…잠깐 어지러워서 휘청거렸는데 그만, 자기꽃병을 짚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파편을 주으려는 은녹을 재빨리 저지시킨 신상궁이 급히 아유와 필윤을 불러 파편들을 치우도록 했다. 그러자, 급히 나타난 둘 또한 사색이 되어 은녹이
어디 다친곳은 없나 몇번이나 확인한뒤, 소란스레 파편조각들을 서둘러 치우고서 대충 정리한뒤 침실을 나갔다. 신상궁은 고운 아미를 좁히며 은녹에게 다가가 행여나 상
처라도 생겼을라, 이리저리 그녀의 몸을 두리번 거렸다.
“ 아이, 괜찮대두… ”
별것도 아닌일에 신경을 쓰며, 속상해하는 신상궁의 모습에 은녹이 식은땀까지 흘리며 애써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무렇지도 않은척 웃어보였다. 그런 그녀가 제대로
혼조차 내지 못할것같아, 신상궁은 결국 웃음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는 그러지 마십시오, 노비 가슴이 놀라 철렁 내려앉는줄 알았사옵니다.’라고 말하고선 그녀에
게 시킬일이 생기거나, 어디 아픈곳이 있으면 꼭 침대에 누워 자신을 부르거나, 궁녀들을 불러 시키라며 신신당부를 하고서 침실을 나갔다. 알겠다고, 알겠다고 몇 번이
나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대답을 한 뒤에야 겨우 신상궁에게서 벗어난 은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꽃병이 있던 탁자위를 흔들리는 눈동자로 쳐다보았다. 고
작 꽃병하나 깼을뿐인데, 왜이렇게도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못내 마음이 쓰여 은녹은 자꾸만 꽃병이 있던 탁자를 바라보며 ‘끙끙’거렸다.
10
“ 태류성(홍나라의 수도)의 저잣거리에 무허가 상인들이 난무하다고 하옵니다, 폐하. ”
“ 그것은 이미 결정이 된 바가 아니더냐? 무허가 상인들을 완벽히 처단하기엔, 허가된 상인들만으로는 활발한 상업활동을 할 수 가 없으니, 눈감아 주는 대신
그들을 지방쪽으로 밀어 모아 놓는것으로. ”
각 지방 관청에서 보내온 상소들을 펼쳐보던 휼은 대서림, 지륙의 말에 미끈한 미간을 좁히며 펼쳐보고있던 두루마기를 탁자위에 ‘탁’소리가 나도록 세게 놓
았다. 이미 결정된 일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심기를 건드릴만한것이었다. 지륙은 난감한 표정으로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 그것이…아무래도, 지방쪽에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뛰어난 부호들이 없어 상업활동을 하는데엔 큰 불편이 있다고 하옵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태류성으로 모
여들고있다하니… ”
“ 왜 부호들이 없어! ”
휼의 노성에 지륙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깊게 숙여, 자신을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듯 몸을 뒤로 뺐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대신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꺼내어, 지금의 현황을 알려주었다.
“ 부호들이 지방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는것이 힘들자, 모두들 하나같이 태류성으로 모여들고있사옵니다. ”
“ 권력이 중앙으로 모여들고있어, 불평등해졌으니, 수도가 아닌 지방들은 지금 상황이 어려운 정도이라 하옵니다. ”
“ 무엇보다도, 허가된 상인들이 팔수있는 물품에 한정된것들을 무허가상인들이 판매하고있으니, 백성들은 그것이 불법이라는것을 알면서도 거래를 하고있습니다. ”
들으면 들을수록 골치가 아픈것들이었다. 잘생긴 휼의 얼굴을 찡그려지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길다란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었다. 주군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것을 알아챈 이들또한 난감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로 멀뚱히 서있기만 할 뿐이었다. 호쾌한 정답을 찾아내지 못한 대전회의장안은 정적으로 휩
싸였다. 한동안 골똘히 두루마기뭉치들을 바라보던 휼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한결같이 고개를 조아리고 서있는 대신들을 향하여 나지막히 말했다.
“ 이것은 어떻겠느냐? ”
그의 말에 모두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그의 말을 경청했다. 꽤나 수긍적인 대신들의 반응에 흡족해 하며, 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관직을 하나 만들어, 각 지방마다 서너개씩 두어놓고 그 관직으로 부호들에게 하사하는것이다. 그리하여 각 지방으로 이주시켜서, 그곳에서 무허가 상인들을 일정한
범위내에서 활동하도록 규정시키도록 만드는 것이지. 그리고 무허가상인과의 불법거래를 하여 적발되었을시에, 그에 엄중한 처벌을 내리도록 되어있는 벌의 무게를 가중
시키거라. 허가된 상인들에게 내궁창(內宮廠:황실소유의 창고)을 열어, 허가된상인들이 팔지 못하는 물품들을 팔수있도록 내어주거라. ”
“ 현명하신판단이시옵니다, 폐하! ”
대신들이 저다마다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조아리며, 그의 말에 적극 찬성을 했다. 반대도 있을만했건만, 그동안 속을썩여왔던 일이었던 터라 그의말에 반半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급한 불부터 껐으니, 이제 얼추 대전회의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그 밖에 다른나라와의 무역거래에 대한 일들과, 지방에서 성행하는 부녀자들의 지나치게 사
치스러운 소비생활에 대한 문제점들이 토론되었고, 그것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아 회의는 대강 마무리 되었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 만만세’라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대신들이 한 둘씩 회의장을 나가자, 전 궁궐을 통틀어 가장 넓은 궁궐인 회의장이 유난히도 텅 비어 보였다. 마지막 두루마기를 챙겨 보며 툭툭 쳐서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를 해놓은 휼이 황좌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가려다,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뒷모습에 고민따위 할 겨를도 없이 불러세웠다.
“ 대서림. ”
그의 나지막한 부름에 맨 마지막으로 회의장을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던 지륙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 그를 보았다.
“ 하명하소서, 폐하. 어인일로 소신을… ”
지륙이 황제와의 독대에 불편함과 긴장감을 느끼며 눈치를 살피면서 대답하자, 긴장하지 말라는듯 그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준 휼이 말했다.
“ 사석社席에서는 대서림과 짐은 장인과 사위의 신분이 아니오? ”
“ 어찌그런…폐하께 장인의 대접을 받다니요, 당치도 않사옵니다. ”
“ 하하. 긴장하지 말래두. 괜찮소. ”
장인과 사위라니! 어부성설, 말도 안돼는 소리라며 지륙이 거세게 부정하자 휼은 나지막히 웃으며 황금빛 융포자락을 휘날리며 일단 회의장을 나와, 회의장과 바로 직결되어
있는 화원으로 나갔다. 천천히 그가 앞에서 걸어가면, 그 뒤를 지륙이 곧장 따라 붙었다.
“ 잘 지내고 있소. ”
“ 네?아…다행…이옵니다. ”
“ 여식을 험난한 궁으로 그것도, 후궁의 자리로 들인 장인의 심기가 편치많은 않을것이란것을 잘 알고있소. ”
어느덧 지륙을 대하는 그의 호칭은 대서림에서, 장인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 소리를 듣는다는게 영, 황감하여 지륙은 불편한 기색으로 대답을 하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윽고, 은녹에 대한 말에 지륙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음을 앞서 걷던 휼이 보지도 못하였으니, 그가 어떠한 감정을 가지고있는지 휼이 알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당연한것일지도 몰랐다. 세인들이 보기엔 대서림의 지위에서 주위의 존경과 우러럼을 받으며 부인이였던 가 미려에게 어떤 남편보다도 잘했고, 어린 나이에 어미를 여의어
정신적으로 힘들게 성장하였을것이 분명한 여식, 은녹에게는 덧없이 자상하고 다정한 아버지였으니. 하지만 실상또한 그러하다는것은 그 누구도 장담할수없었다.
“ 많이 힘들어하지만, 그녀역시 잘 견뎌낼것이라고 믿소. 이 험난한 궁에 때묻기엔 너무나도 아까운 미소를 가지고 있는 여인이더군. ”
“ 폐하께서…그아이, 아니 서비마마를 꽤나 마음에 두셨나 보옵니다. ”
“ 그래보였소? ”
지륙의 그냥 흘러가던 말에, 휼이 멈칫거리며 뒷짐지었던 손을 풀고서 약간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보며 되물었다. 그에 지륙이 황급히 수습하며 대답했다.
“ 아,아니 그저 소신의 눈에는 서비마마의 이야기를 하시는 내내 너무나도 편안해 보여… ”
“ 그것이 티가 나오? ”
“ 예? 예,예. ”
티가 난다는 말에 휼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턱선을 매끄럽게 만지작거리면서 심오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흘러가는 말로 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이토록이나 민감하게 반응한것에 되려 놀란 지륙은 혹시나 말실수라도 했나싶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지륙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휼은 저대로
심각한 중이었다. 어느덧 룡암전에 다다르자, 벌써 도착했냐는듯 휼이 의아한 표정으로 지금껏 뒤따라와준 지륙에게 수고스럽게 하여 미안하다며, 이만 돌아가보라고 하자
물만난 물고기마냥 지륙은 옳다구나, 하고 넙죽 ‘그럼 소신, 이만 물러가보겠사옵니다.’라고 인사를 올린뒤 다시 붙잡을세라 재빠르게 룡암전을 벗어났다. 그까지 가버리
자 냉기마저 서린 룡암전에 들어서던 휼은 갑자기 이곳이 싫증이 나버렸다. 사람이 사는것같지않은것만 같은 이런 시린 냉기. 정말이지, 두번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았던 것
이였는데. 씁쓸한 표정으로 휼은 머리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용관을 벗어 탁자옆에 두려다가, 이내 멈칫거리고서 멀뚱하게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몇 분을 흘러보냈다. 굳은
석상마냥 제자리에서 도통 움직일줄을 모르던 휼은 빨리 벗었던 용관을 다시 쓰고서, 얼른 발걸음을 다른곳으로 옮겼다.
은비전
”폐하! ”
점심상을 준비하려던 은녹은 흐트러진 옷매무새로 급히 걸어온듯 약간 상기된 얼굴의 휼을 바라보며, 놀란목소리로 새되게 그를 불렀다. 정처없이 무작정 걷다보니 어느덧
은비전으로 왔나보다. 자신은 그냥 발이 가는대로 왔더니, 발이 가고싶던곳이 이곳이였나 보다. 휼은 그녀를 눈앞에 두고서 두 손에 들어오는 가녀린 어깨와 푸근한 감촉을
느끼고 나서야 안심을 하며 무너지듯 그녀의 머리위로 무거운 용관을 쓴 이마를 눌렀다. 그에 그녀가 ‘끙’거리며 무겁게 늘어진 그의 몸을 부축하며 침실로 모셨다. 물론,
점심상준비로 바쁘던 궁녀들과 신상궁은 그런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못하여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운이 좋았던 경우였던 것이었다. 힘들게 그를 이끌고서 여전히 정
갈하게 정리되어있는 그녀의 침대에 눕힌 은녹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그를 안쓰럽게 내려다 보았다.
“ 폐하…어찌된 일이세요? ”
그녀의 작은 물음에 그제서야 휼이 제대로 잡힌 동공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얀 두뺨이 살짝 홍조끼가 어려있었다. 언제봐도 귀엽고, 소중했다. 그녀를 한번 알
고나니 그는 무섭도록 그녀에게 빠져들어 버렸다. 그녀는 마치 늪같았다. 한번 빠지고 나면 절대로 빠져나올수없는, 빠져나오려고 발 버둥칠때마다 자꾸만 더 깊숙이 빠져들
게 되어버리는. 그래서 두려웠지만, 그래서 더 그녀를 깊이 알수있었다. 그날은 아마 그의 기분탓으로 얼결에 그녀를 안은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자꾸만 그녀를
찾았다. 한번 맛본 당과는 다시는 뺄수없을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다. 맛보면 맛볼수록 더 달콤하고 달디단 맛이 그를 이끌었다. 묘한 여자였다.
“ 룡암전에 홀로 들기가 싫었다. ”
여인의 방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봐지도록 그녀의 침실 천장을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문양으로 꾸며져 있었다. 멍하니 그것만 올려다보던 그의 붉은 잇새로 흘러나온 나지막한
대답에, 은녹은 흠칫거리며 그를 내려다 보았다. 어느덧 의자를 하나 침대맡 으로 가져와 거기에 앉은 은녹은 마치 아픈 아들을 보살피는 어미처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상
에 누운 그의 흐트러진 황금빛 융포를 만지작 거렸다. 그녀의 손길에 휼이 힐끗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작게 말했다.
“ 용관을 벗겨다오. ”
“ 아…많이 흐트러지셨네요. ”
그의 말에 그제서야 흐트러진 머리에 엉망으로 씌여진 용관을 확인한 은녹이 작게 웃으며 나른한 손동작으로 그의 검은머리칼위에 무겁게 얹혀진 용관을 벗겨 탁자위에 놓았다.
그것을 그저 말없이 바라만 보고있던 휼이 손을 뻗어 그녀의 가느다란 하얀 손목을 잡았다. 그에 깜짝 놀란듯 표정을 지어보이던 은녹은 이윽고 붉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왜그러하오십니까?’라고 물었고, 마냥 바라만 보다 못한 휼이 그녀를 자신의 코앞까지 가져다 놓았다.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가까이에서 감히 바라보기조차 황감한 그의
잘난 용안을 뵈어야한다는것은 그녀로서는 크나큰 곤혹이었다. 살짝 찌푸려진 아미에 흐르는 식은땀이 그녀가 지금 얼만큼이나 긴장을 하고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듯
했다. 은녹은 불편한 자세에서 살짝 목을 비틀며 말했다.
“ 저…폐하, 잠시만 손목을… ”
“ 어이해서? 짐이 짐의 여인의 손목을 잡은것 뿐인데? ”
그의 입속에서 나온 ‘나의 여인’이라는 그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어찌나 곤두박질치게 만들던지, 은녹의 새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버렸다. 부끄러움과 수줍음에
차마고개를 들지못하고 숙여버린 은녹이 모기소리만한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 해가 중천에 떠 있사옵고, 또…지금 상궁들과 궁녀들이 점심상을 마련하고 있는터인데… ”
그녀의 염려스러운 말에 휼이 낮게 목울대를 울리며 웃었다. 그의 듣기좋은 웃음소리에 잠시 멍해있던 은녹이 재빨리 정신을 차린때는, 이미 그녀의 몸또한 폭신한 침상
에 뉘여져 있을 때였다. 어느덧 옷여밈부분을 긴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는 휼의 모습은 너무나도 색정적이었다. 그 남자다운 모습에 은녹이
곤란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은 수줍의 처녀의 두뺨에 물든 홍조마냥 붉으스름하면서도 환한 해가 떠 있었다. 곤란한듯한 그녀의 표정과 속마음을 읽은 휼
은 말도 안돼는 걱정을 하고있는 그녀를 귀엽다는듯이 내려다 보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자극적인 자세로 속삭였다.
“ 이 궁의 주인인 짐이, 해가 떠있는지, 달이 떠있는지 그것들을 일일이 가려가며 행동해야하나? ”
“ 폐하, 그래도… ”
“ 귀비는 짐이 싫나보군. 흠, 그럼 빈의 처소로 가볼까. ”
그래도 어지간히 버텨대는 은녹의 모습에 휼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무언의 감정에 의하여 은녹이 급하게 그의 거두어지는 손을 붙잡았다.
작은 손에 잡힌 그의 큰손을 내려다 보다 휼이 이윽고 크게 웃어버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창피함을 느낀 은녹은 이불속에 얼굴이라고 쳐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안그러면 자신의 곁을 떠나겠다는 그의 말에 큰 맘먹고 벌게진 얼굴로 대답했다.
“ 그,그럼…신상궁에게 점심상을 물어달라고 해주십시오. ”
제 필명은 들어보신분들도있으시겠고, 못들어보신분들도 있으시겠네요 ^^
인기짱소설에서만 독점연재해오던 소설을 이번에는 인소닷에서도 함께 연재를 하기루 했습니다.
조금더 많은 분들께서 함께 제 소설을 공유하셨으면 하는 저의 작은 바램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
아무쪼록 미숙한 소설, 재밌게 읽어주세요 ^^
첫댓글 ㅎㅎ 잘보고가여! ^^ 은녹이 진짜 귀여움 ㅋㅋ
^^귀엽게봐주시니 감사해요~작가의 의도적인 성정이 그대로 전해져서 다행이네요 ><
재밌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다음편도기대해주세요 ^^
완전재밌어요 ㅋㅋㅋ
그런 황송한말씀을ㅎㅎ재밌게읽으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