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07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1 - 개태사 금동대탑, 삼성 손에 남는다 대법, 반환소송 원고패소 확정 국보로 지정된 탑의 소유권을 두고 삼성문화재단 리움 미술관과 대한불교조계종 개태사가 벌인 소송에서 삼성문화재단이 최종 승소했다. 대법원 3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충남 논산의 개태사가 서울 한남동의 리움 미술관을 운영하는 삼성문화재단을 상대로 “미술관에 있는 국보 제213호 금동대탑(사진·고려시대 10~11세기 제작 추정)을 원래 있던 절에 돌려달라”며 낸 동산인도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7일 밝혔다. 앞서 서울고법은 “금동대탑이 개태사 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측하는 자료가 있음이 인정되나, 구체적인 제작연도·제작자·소유자·보관장소 등에 관한 자료가 없어 개태사가 금동대탑의 소유자임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밝힌 바 있다. 서기 940년 창건된 개태사는 임진왜란 등 전화에 불탔다가 재건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사찰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추정 자료’ 외에 탑의 출처를 명확하게 입증할 사료는 찾지 못했다. 재단 쪽은 ‘1987년 고 이병철 회장에게서 받았다’고만 할 뿐 그 이전 소유·입수 경위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런 소송에서 입증 책임은 원고에게 있고 재단 쪽이 출처를 밝히지 않아도 강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법을 통해 문화재를 미술관 밖 제자리로 옮기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불교계는 지적한다. 조계종 관계자는 “법적 소유권을 떠나 ‘해당 문화재가 어디에 있을 때 가장 가치가 있는가’ 하는 ‘제자리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 앞서 1470년 봉납된 현등사 석탑 사리구를 놓고도 사찰과 재단이 벌인 법정 다툼에서 사리구를 소유한 재단이 이겼다. 그러나 조계종이 ‘현등사 사리 제자리찾기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자 재단은 사리구를 돌려준 바 있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한겨레 2011-01-08 오전 10:09:20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57845.html
2010 - 브리티시록의 전설적인 앨범 커버들 우표로 재탄생 핑크 플로이드의 '디비전 벨'(위 왼쪽), 한 장 건너 블러의 '파크라이프', 또 한 장 건너 롤링스톤스의 '렛 잇 블리드', 클래쉬의 '런던 콜링'(아래 왼쪽)과 마이크 올드필드의 '튜블라 벨스'(왼쪽 두 번째), 레드 제플린 4집(왼쪽 세 번째) 등 록역사를 수놓은 명반들의 커버가 우표로 재탄생했다.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가 오랜만에 얼굴을 비쳤다. 4집 커버를 디자인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던 그는 이번에도 우표 발행에 적지 않은 도움을 제공했다. 페이지는 한 노인이 나뭇가지를 잔뜩 실은 짐을 지고 힘겨운 걸음을 옮기는 듯한 커버 디자인에 대해 "앨범이 세상에 나온 지 거의 40년이 흘렀는데도 사람들은 이 노인이 누군지, 누가 이 그림을 그렸는지 알지 못한다."며 "우리가 이 앨범 커버로 이루고자 했던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수수께끼 같은 느낌을 주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그렇기 때문에 그룹 이름조차 커버에 남기지 않았다. 레드 제플린 4집의 대표곡은 뭐니뭐니해도 '스테어웨이 투 헤븐'이다. 영화 '더 송 리메인스 더 세임'에 담겼던 1976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 동영상이다. http://arakis.blog.seoul.co.kr/entry/브리티시록의-전설적인-명반-커버들-우표로-재탄생
2008 - 이천 냉동창고 화재 참사 오늘의 역사 (1월 7일)[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참사 2008년 1월 7일 오전 10시 47분쯤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유산리 ‘코리아2000’ 냉동물류창고 지하 1층 기계실에서 폭발음과 함께 불이 났다. 화재 발생 당시 물류창고 지하 1층에는 인부 57명이 전기배선 설치와 냉동설비에 냉매로 쓰이는 프레온 가스를 주입하는 작업 등을 하고 있었다. 인부 57명 중 40명이 숨졌으며 나머지 17명은 탈출하거나 구조됐으나, 이 중 7명은 중태에 빠졌다. 인부들 중에는 '코리안 드림'을 좇아 온 조선족 동포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화재원인은 냉동배관을 설치하면서 전기 용접을 하기 위해 불을 붙였다가, 이것이 공기 중에 차 있던 유증기(기름 증기)와 만나면서 폭발이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고 당시 현장의 스프링클러 등 화재진압 안전설비는 전혀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건물 지하 1층에서 시작된 불은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순식간에 건물 전체로 번졌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이날 오후 11시 18분쯤 40명의 시신을 모두 수습했으나, 명단에 나온 57명 이외에 추가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에 대비해 수색 작업을 벌였다. 발견된 시신은 너무 심하게 불에 타 신원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화재가 발생할 당시 물류창고 안에는 프레온 가스통과 암모니아 가스통, LP가스통, 200ℓ들이 우레탄원료 15통 등 화학물질이 가득 차 있어, 폭발과 함께 유독가스도 많이 발생한 것으로 소방당국은 분석했다. 또한 화재발생시 인명구조와 직결되는 방화셔터와 스프링쿨러, 비상벨 등의 소방시설을 오작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수동 작동으로 변경하여 참사가 커지는 등 안전불감증으로 사과 확대되었다. /조선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100310_0002
2003 - 허블망원경, 130억 광년 떨어진 천체 촬영 허블 우주망원경이 은하단을 '자연중력렌즈'로 이용해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들을 관측하는데 성공했다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7일 발표했다. 워싱턴 AP.dpa=연합뉴스 /함께 만드는 별빛세상, 천문노트 - Astronote* 2003/01/09 01:07
1995 - 김수환 추기경 방북 의사 표명 [역사 속의 인물] 일제 학도병 끌려갔던 김수환 추기경 ‘너희와 모두를 위하여!’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걸으며 영원한 종교 지도자로 각인된 고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은 일제의 조선침략 피해자이기도 했다. 천주교를 믿던 부모님 영향으로 일찍부터 사제의 길을 준비하던 그는 일본에 유학하며 나라 잃은 백성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또 2차 대전을 일으킨 일제에 의해 학도병 신세가 되는 곤욕을 치른 경험도 있다. 그는 일제의 전쟁 패배와 패망, 조국의 광복으로 고국으로 돌아와 신학대학 공부를 마친 뒤 사제서품을 받아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마침내 1969년 47세의 나이로, 한국 최초이자 전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됐다. 1970년대 서슬 퍼렇던 독재 정권 아래에서 이 땅의 민주화운동에 큰 힘이 되는 울타리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서울 명동성당이 민주화 성지처럼 여겨지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북한의 6·25 남침전쟁이란 동족상잔의 아픔을 지켜봤던 그였기에 남북관계 개선에도 관심을 보였다. 1989년 서경원 당시 국회의원의 방북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러울 때 기자회견을 통해 남과 북의 관계가 나아지길 바라는 교회의 입장을 나타내기도 했다. 1989년 북한 김일성 주석은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방북 초청도 했다. 또한 1995년 오늘 방북 의사를 밝혔으나 성사는 되지 않았다. 정인열<서울지사장>/매일신문 2013년 01월 0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67&yy=2013
1993 - 한국의 독립운동가 조경한(趙擎韓) 사망 조경한 [趙擎韓, 1900.7.30~1993.1.7] 오늘의 역사 (1월 7일)[199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경한 옹 타계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백강 조경한 옹이 노환으로 1993년 1월 7일 밤11시 타계했다. 92세였다. 전남 승주 태생의 조 옹은 18살부터 만주에 근거를 둔 독립운동단체(포수단)의 전라도담당 연락원으로 지하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24살 이후로는 항일 무장투쟁을 지휘했다.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1127_0004
- 히로히토 일본 국왕 즉위 히로히토[裕仁, 1901.4.29~1989.1.7] [역사속의 인물] 히로히토 일본천왕 사망 히로히토 일본천왕이 1989년 오늘 사망했다. 1901년 4월 29일 출생한 그는 1926년 12월 왕위에 올라 1989년 1월까지 제124대 일왕을 지냈다. 태평양전쟁 책임자였지만 전범재판에서 면책됐다. 히로히토는 태평양 전쟁 당시 군부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배후 조종하고, 진주만 공격도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한다. 종전 후 친미적 일본을 만들고 싶어했던 미국의 요구에 따라 가정적인 아버지, 친숙한 왕, 수줍고 선량한 학자 이미지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히로히토는 왕실의 전통에 따라 태어난 지 70일 만에 부모의 곁을 떠나 후견인 손에서 자랐다.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15세부터 왕의 역할을 시작했다. 히로히토는 군사력을 증강하고, 경제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만주를 침공, 일본의 공업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군사대국 일본을 경계한 미국은 각국으로 하여금 일본에 석유를 수출하지 못하도록 했다. 일본이 석유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인도네시아였으며, 그 방법은 전쟁이었다. 아시아 전역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조두진 문화부 차장 earful@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1월 0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822&yy=2009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외전시 : 1976년 2월~7월에는 일본의 도쿄[東京]·교토[京都]·나라[奈良]에서 '한국미술 5천년전'을 개최하였고, 1979년 5월부터 1981년 10월까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시카고, 보스턴, 클리블랜드, 뉴욕, 캔자스시티, 워싱턴에서 '한국미술 5천년전'을 순회전시했다. /Google
e-영상역사관 - 그때 그시절 [01월 07일] 뉴욕에 전시된 우리미술 -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뉴욕에서 한국미술 5,000년 전시회가 열림. - 뉴욕 시가지의 모습 - 한국미술 5,000년전 미국순회(그림 설명) - 뉴욕 메트로폴리탄 전시장에서 전시됨, 대형 현수막 - 리셉션을 찾아온 외국인들, 국악 공연 -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의 개막식 연설, 테이프 커팅 - 유물을 관람하는 외국인들 - 국보를 포함한 354점의 문화재가 전시 - 신라금관, 고려청자, 이조백자, 불상, 이조회화 등 - 우리나라 유물을 유심히 살펴보는 관람객들 - 고려청자의 수려한 빛깔을 보며 감탄하는 외국인들의 모습 - 고려청자를 보며 현대인들이 도저히 다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기라고 칭찬함. - 방미중인 이순자 영부인 참관, 미국 초중고학생 관람 - 현지 신문, 잡지의 보도 출처:미술 5천년전 (뉴욕전) (국정홍보처) /e-영상역사관 http://ehistory.korea.kr/history/remember_sub.jsp?mmdd=0107
- Vietnamese People's Army, 25th Anniv.
1979 - 베트남군, 캄보디아 공략해 폴 포트정권 태국 국경지대로 도주 베트남군이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을 공략, 민주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 1979년 1월 7일 태국 국경지대로 도주했다. 1975년 5월에 시작된 베트남-캄보디아 국경분쟁은 1976년 양국 정상회담으로 일단 소강상태로 들어섰지만 1977년 다시 재연돼 1978년 봄에는 중국의 지원을 받은 폴 포트정권의 공세로 전면전으로 돌입했다. 중국과 베트남 국경에서는 중국의 군사압력이 강화되었다. 베트남에 망명중인 反폴 포트派 캄보디아인이 결성한 구국민족통일전선과 함께 베트남은 1978년 12월 25일부터 캄보디아 영내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1월 10일 구국민족통일전선을 모체로 하는 캄보디아인민공화국정부가 수립됐다. /조선
- Vaclav Havel [책갈피 속의 오늘]1977년 체코슬로바키아 지식인 77헌장 발표 1976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록그룹 ‘플라스틱 피플(The Plastic People of the Universe)’이 경찰에 체포됐다. 죄목은 ‘평화 파괴죄’. 1970년대 들어서면서 국제적으로 인권운동 바람이 불었다. 마침내 1975년 유럽안보협력회의에서 지역안보와 자유 수호를 골자로 한 헬싱키 최종의정서가 조인돼 유럽 내 긴장이 완화됐다. 1976년 국제인권규약이 발효돼 국제적 인권 규범이 자리 잡았다.
e-영상역사관 - 그때 그시절 [01월 07일] 유엔가입 요청 국민 총궐기대회 유엔가입 전국추진위원회 주최로 열린 유엔가입 요청 국민 총권기대회. -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유엔가입 요청 궐기대회가 거행. - 정부 각료와 각 관공서 직원들, 학생, 시민들 응집. - 한국의 유엔가입은 정의의 요청이라고 부르짖는 국민대회. - "정의는 부른다. 한국의 유엔가입을" 등 각종 플랜카드 모습. - 이기붕 의장의 개회사와 결의문 낭독. -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 유엔총회 의장에게 보내는 메시지, 각국 유엔대표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 - 유엔 한국정부 대표와 민간 대표단에게 보내는 격려문 낭독. - 만세삼창. 출처:대한뉴스 제 99호 (국정홍보처) /e-영상역사관 http://ehistory.korea.kr/history/remember_sub.jsp?mmdd=0107
1949년 1월7일, 이승만 대통령이 내외신 기자들과 가진 회견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고 전격 선언했다. 2차대전 패전으로 구(舊)소련에 북방도서 4도를 빼앗겨 의기소침해 있던 일본인들에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1948년 1월 7일 미국 켄터키 주의 루이즈빌 지역에 이상한 비행 물체가 출현, 근처의 고드맨 공군 기지 소속의 만텔 대위가 이 괴비행 물체를 추적하다가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공군 당국은 만텔 대위가 금성을 괴비행 물체로 착각하여 추격하다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고 추락사했다고 발표했으나 당시 여러가지 상황으로 봐서 강한 의문을 가진 사람이 많았으며 최근에는 만텔 대위의 부인이 사건 직후 고위층으로부터 들은 사실이라면서 자기 남편은 당시UFO의 공격으로 추락사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 사건 이후 미 공군에서만 약 50건 이상의 미확인 공중 분해 폭발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http://rose0.kyungpook.ac.kr/~z9926026/ufo5.html /Google
역사속 오늘[1946년1월7일] 이승만, 반탁 성명서 발표 신탁통치 찬반을 놓고 좌익과 우익이 치열하게 대립하던 1946년 오늘! /YTN 2009-01-07 수
- Yugoslavia, 500 Dinara (Banknote) Nikola Tesla
- Yugoslavia, 5000000 Dinara (Banknote) Nikola Tesla
1943 - 세르비아 출신의 미국 발명가, 전기공학자 테슬라(Tesla, Nikola) 사망 니콜라 테슬라 [Tesla, Nikola, 1856.7.9/10~1943.1.7] [오늘의 경제소사1월7일] 니콜라 테슬라 100년 전으로 돌아가 발명가 한 사람만 태우고 돌아올 수 있는 타임머신이 있다고 치자. 누굴 데려와야 할까. 발명왕 에디슨? 아니다. 이 사람이 훨씬 나을지 모른다. 니콜라 테슬라(Nicola Tesla). 왜 테슬라인가. 무엇보다 그는 에디슨과 전류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다. 미국이 1893년 최초로 발전설비를 발주했을 때 직류 방식을 내세운 에디슨-제너럴일렉트릭을 꺾고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교류전력을 공급한 주인공이다. 자기력선밀도의 단위인 ‘테슬라’에 이름을 남겼다. 에디슨과의 악연은 훨씬 전으로 올라간다. 1856년 세르비아 스미즈란 지역(오늘날 크로아티아) 출신인 그는 대학 졸업 후 파리로 이주, 에디슨의 유럽 자회사에서 근무하며 이름을 날렸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던 그의 실력은 본사까지 알려져 미국 에디슨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뽑혔다. 얼마 안 지나 둘의 관계는 틀어졌다. 테슬라의 연구를 도용하고 연구개발 성공시 약속했던 보너스마저 지급하지 않았던 탓이다. 에디슨과의 결별로 전류전쟁에서 승리해 21만달러로 챙겼지만 영광의 순간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800여건에 달하는 특허출원 중에는 시대를 너무 앞서나갔거나 극비로 분류될 만한 발명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세계에 공짜로 제공되는 무제한의 에너지와 인공번개 개발, 원거리 통신, 원격제어 어뢰, 살인광선, 연료전지 자동차, 기후조종 등을 제시했으나 인식과 자금부족, 에디슨의 끈질긴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테슬라는 인류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연구성과를 모조리 없앤 직후인 1943년 1월7일 쓸쓸하게 죽었다. 아쉬움과 신비감 때문인지 그의 명성은 갈수록 빛난다. 구축함을 400㎞나 순간 이동시켰다는 ‘필라델피아 실험’을 주도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8/01/06 17:57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801/e2008010617573063820.htm
1933 - 호주 비행사 힝클러, 영국-호주 단독비행 도중 알프스산에 추락 사망 힝클러 [Hinkler, Bert(Herbert), 1892.12.8~1933.1.7] Hon. Squadron Leader Herbert John Louis Hinkler AFC DSM (8 December 1892 – 7 January 1933) - better known as Bert Hinkler, was a pioneer Australian aviator (dubbed "Australian Lone Eagle"), inventor, first person to fly solo from England to Australia, and the first person to fly solo across the Southern Atlantic Ocean. ----------------------------- Hinkler married in 1932. On 7 January 1933, Hinkler left Feltham aerodrome, England, in the Puss Moth in an attempt to break the flying record to Australia of 8 days 10 hours. Nothing more was heard of him until his body was discovered in the Tuscan Mountains in Italy. His plane had crashed into the mountains on 7 January 1933. He was buried, with full military honours on Mussolini's orders, in the Protestant cemetery at Florence. A monument in his memory was erected at Passo Della Vacche in the Pratomagno Alps by the Aretino Aero Club. He was survived by his wife. /wikipedia
1927년 5월 20일-21일 뉴욕과 파리간 단독 무착륙횡단 비행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보다 1주일 후에 더 빠른 속도로 더 적은 연료를 가지고 횡단에 성공한 버트 힝클러라는 사람이 있다. 버트 힝클리는 찰스 린다버그보다 더 훌륭한 비행사였지만 버트 힝클러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http://toku.egloos.com/1587466
1932 - 프랑스의 정치가 마지노(Maginot, Andre) 사망 마지노 [Maginot, Andre, 1877.2.17~1932.1.7] 마지노선(Maginot Line)은 '최후의 방어선' '넘지 못할 선'이란 뜻으로 쓰이지만 '쓸모없는 요새'라는 비아냥도 숨어 있다. 마지노선의 제안자는 프랑스 정치가 앙드레 마지노(1877~1932)였다. 1910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병으로 참전했다. 용감하게 싸우다 베르덩 전투에서 다리를 다쳐 제대했다. 육군성 장관(1922~24년, 1929~32년)을 하면서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 국경선을 따라 거대한 방어 요새를 짓자고 제안했다. 참전 당시 강력한 진지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았던 경험에다 어릴 때 살던 알자스로렌 지방의 집이 전쟁으로 부서진 데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열정적으로 의원들을 설득하고 로비를 벌인 끝에 1926년 시범적인 요새를 짓는데 성공했다. 1930년부터 본격 공사에 들어갔지만 완공을 보지 못한 채 1932년 오늘, 장티푸스로 죽었다. 천문학적인 예산과 10년간 공사 끝에 1936년 총연장 750㎞, 난공불락의 요새가 완성됐지만 1940년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한 우회 공격으로 프랑스를 유린했다. 쓸모없는 요새만 믿고 있다가 나라마저 빼앗긴 우스꽝스런 사례다. 박병선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0년 01월 0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922&yy=2010
- Estonia, 5 Krooni (Banknote) 1916 - 에스토니아의 체스 대가 폴 케레스(Keres, Paul) 출생 케레스 [Keres, Paul, 1916.1.7~1975.6.5] 에스토니아의 체스 대가. 소련 체스 선수권대회와 유럽 체스 선수권대회에서 각각 3번씩 우승을 차지했고, 세계 체스 올림픽 대회에서는 4번이나 우승했다. 케레스는 아버지가 두는 체스를 구경하면서 4세 때 처음으로 체스를 배우기 시작하여 13세 때 공식적인 대회에 출전했다. 10대 시절에 각종 대회에서 입상을 했고, 1934년에는 에스토니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수학을 전공한 후 언론인이 되기 위해 정진했지만 결국은 직업적인 체스 선수로 전향했다. 1947, 1950, 1951년에 소련 체스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0~15회까지 세계 체스 올림픽 대회(1952~62)에 출전한 것을 비롯해 중요한 여러 국제 경기대회에 참가했다. 비록 세계 체스 선수권대회에서는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20개가 넘는 각종 국제 경기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는데 특히 세계 선수권을 보유했던 미하일 보트비니크, 티그란 페트로시얀, 보리스 스파스키 등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케레스는 〈체스 포석 이론 The Theory of Chess Openings〉이라는 제목하에 1·2부를 〈체스 포석법 Open Openings〉(1949~52)으로, 3부를 〈프랑스식 방어 French Defense〉(1958)로 부제를 달아 출간했다. 마지막 저서는 〈실용적인 체스의 끝내기 Practical Chess Endings〉(1974)이다. /브리태니커
- 순종황제 어차
1909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남방 순행 시작 [징검다리 역사]겨울열차로 간 황제의 남방 순행 ㆍ국왕 중 처음으로 직접 백성과 만나 신년 메시지 설파 신년이 시작되었다. 신년의 시작은 천시(天時)의 시작인 동시에 인사(人事)의 시작이다. 신년 초에 국민들에게 전해지는 대통령의 신년사는 국가 지도자와 일반 국민 사이에 소통하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신년 메시지를 들으며 우리나라가 어떤 방향을 걸어나갈지 예측하고 그 안에 서 있는 자신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황제의 남방 순행은 전례가 없었으며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가까운 과거인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국왕이 도성 밖을 나와 행차하는 경우 그것은 왕릉에 가는 능행이나 온천에 가는 온행 정도였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기호 지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순행이 아닌 피난의 경우에도 경상도 남해안까지 행차했던 국왕은 일찍이 없었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가고 이괄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까지 피난을 갔지만 거기까지였다. 황제가 부산에서 일본 기함에 승선하여 건배하는 동안 한국의 목선 50척이 일본 기함을 둘러싸는 돌발 사태가 발생하였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황제의 남방 순행을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이토가 황제를 일본으로 납치하기 위해 함께 부산으로 떠났으며 부산항에 일본 함대가 정박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보고 있었다. 부산 시민들은 황제가 부산에 도착한 그날 밤 결사대를 조직해 부두를 지켰고, 이튿날 황제가 기함에 승선하자 목선으로 기함을 포위한 것이었다. 황제는 예정대로 기함에서 내려 그 다음 일정으로 상품진열소에 들렀다. 하지만, 부산 시민들로서는 황제를 구출하고 나라를 지켜낸 쾌거로 기억될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부산 시민들의 영웅적인 애국을 신문 지면에 크게 드러냈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101061502301
SOS - 선박이나 항공기가 긴박한 중대 위기에 처했을 때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이 신호 “… ― ― ―…”를 발신한다. 각 무선국은 이 신호를 수신하면 모든 무선통신에 우선해서 구조를 위한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또한 이와 같은 신호를 청취한 부근의 선박은 긴급히 구조를 위하여 그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선원법상의 의무가 있다. 이전에는 CQD(come quick danger)가 조난신호로서 사용되었으나, 공중상태가 나빠 잡음이나 혼신이 있을 경우 청취 판별이 어려우므로 190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국제무선전신회의 때 SOS로 바뀌었다. 'save our souls, save our ship, suspend other service' 등의 머리글자라는 것은 속설이다.
CQD, transmitted in Morse code as - · - · - - · - - · · is believed to be the first distress signal adopted for radio use. It was announced on January 7, 1904 by "Circular 57" of the Marconi International Marine Communication Company, and became effective, for Marconi installations, beginning February 1, 1904. Land telegraphs had traditionally used "CQ" to identify messages of interest to all stations along a telegraph line, and CQ had also been adopted as a "general call" for maritime radio use. However, in landline usage there was no general emergency signal, so the Marconi company added a "D" to CQ in order to create its distress call. Contrary to popular belief, CQD does not stand for either "Come Quick, Danger", "Come Quick - Drowning!" or "Come Quick, Dammit!"; these are backronyms. Although used worldwide by Marconi operators, CQD was never adopted as an international standard. At the second International Radiotelegraphic Convention, held in Berlin in 1906, Germany's Notzeichen distress signal of three-dits/three-dahs/three-dits (· · · - - - · · · ) was adopted as the international Morse code distress signal. (This distress signal soon became known as "SOS". Germany had first adopted this distress signal in regulations effective April 1, 1905.) In the early morning of January 23, 1909 whilst sailing into New York from Liverpool, the RMS Republic collided with the Italian liner SS Florida in fog off the island of Nantucket, Massachusetts, United States. This was the first occasion on which the CQD distress call had been sent by wireless transmission. During the sinking of the RMS Titanic in 1912, its radio operator Jack Phillips initially sent "CQD", still commonly used by British ships. Harold Bride, the junior radio operator, then suggested the new code "SOS" be used, and Phillips began to alternate. http://en.wikipedia.org/wiki/CQD
허스턴 [Hurston, Zora Neale, 1903.1.7~1960.1.28] 미국의 흑인 민속학자, 작가. 남부 시골 흑인거주지역의 목소리로 흑인 문화를 찬양한 ' 할렘 문예부흥'에 기여했다. 그녀는 16세 때 순회극단에 가입하여, 할렘 문예부흥 기간중의 뉴욕 시 공연을 끝으로 이 극단을 나왔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프란츠 보아스에게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인종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했다. 그녀는 인류학자로서 아이티를 여행하면서 부두교를 연구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혈통에 관심이 기울어진 그녀는 궁극적으로 학계의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1931년 랭스턴 휴스와 함께 〈뮬 본:니그로의 삶에 대한 3막 희극 Mule Bone:A Comedy of Negro Life in Three Acts〉을 완성했다. 그녀는 2번째로 〈그들의 눈이 신을 보고 있었다 Their Eyes Were Watching God〉(1937)를 발표해 폭넓은 찬사와 논란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는 흑인의 열등성에 관한 신화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또한 흑인을 이 신화의 희생자로 그리지도 않았는데, 이때문에 그녀는 흑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은 자신의 교향인 이턴빌을 연상케 하는 남부 시골 흑인 거주지역에 뿌리박고 있었고, 등장인물들을 풍부한 유산과 편협하고 제한된 사회활동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그녀는 랠프 엘리슨과 토니 모리슨 같은 동시대 흑인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자서전 〈Dust Tracks on a Road〉(1942)을 출판했으며, 후에 작품선집 〈I Love Myself When I Am Laughing and Then Again When I Am Looking Mean and Impressive〉(1979) 가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풀랑크 [Poulenc, Francis, 1899.1.7~1963.1.30] 파리 출생. 일찍부터 R.비녜스에게 피아노를, C.케클랭에게 작곡을 사사하였다. 1916년 이래 A.E.사티를 중심으로 한 그룹 ‘새 젊은이’의 멤버가 되었는데 이것이 1920년부터 ‘6인조’로 불린 그룹으로 발전, 바그너적 독일 낭만주의 및 드뷔시의 인상주의에 반기를 들고 형식과 선율에의 명확성과 단순성, 대위법의 부활 등 프랑스 고전에의 복귀를 주장하여 신고전적 스타일을 취하였다. 1935년 이후는 가수 P.베르나크와의 콤비로 해마다 베르나크-풀랑크연주회를 열어 피아노 반주자 겸 독주자로서도 각계에서 활약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대독지하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신고전적인 것이지만 거기에 프랑스적인 세련 ·우아 ·섬세함이 일체가 되어 있다. 주요작품으로는 발레곡 《암사슴》(1924) 《나젤의 밤》(1936) 《미사곡 E단조》(1937), 가곡 《평화의 기도》(1938), 기악곡 《오르간협주곡》(1939), 오페라 《틸레지아스의 유방(乳房)》(1947) 《카르멜수녀의 대화》(1957), 모놀로그 《인간의 소리》(1958) 등이 있다. /naver
- 고종황제 어극 40년 기념
[역사속의 오늘] 홍범14조 선포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홍범14조’가 1895년 선포되었다. 홍범14조는 공식적으로는 한국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며 자주독립국임을 내외에 공포하고 근대적 개혁을 총괄하여 성문화한 의미가 있으나 일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작성되어 완전한 자주적 개혁으로 볼 수는 없다.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유발시키고 조선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일본을 배경으로 하여 친청보수세력인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개화당인 김홍집을 수반으로 친일 내각을 조직하여 내정개혁을 단행하였다. 내각은 정치, 사회, 경제 등의 개혁을 담은 홍범14조를 제정했다. 주한일본공사는 박영효를 설득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종실·백관을 거느리고 선포하도록 권고해 고종은 정치제도의 근대화와 자주독립국가의 정신을 담은 홍범14조를 선포했다. 홍범14조를 통해 정부는 청나라에 대한 의존적 태도를 버리고 자주독립의 국가체제를 갖추었으며, 왕권의 전제를 제한하여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는 등 국가관리에 관한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한국침략 수단으로 사용되어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화되었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8년 01월 0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11&yy=2008
홍범십사조 [洪範十四條] 동학운동이 일어난 1894년, 일본은 청일전쟁을 유발시켰고, 국내에서는 전쟁의 승리를 자신하고 조선에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추진하였다. 갑오개혁은 다방면에서의 개혁으로 이는 전근대적인 사회제도를 유지해온 조선을 근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류재택> /네이버
페기 [Péguy, Charles, 1873.1.7~1914.9.5] 페기는 여러 이념을 개인의 독특한 신앙으로 발전시킨 프랑스의 시인이자 철학자이다. 그는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사회주의가 현대 사회의 빈곤과 결핍을 해결해 줄 것으로 확신했다. 이후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애국주의가 결합된 자신만의 신앙을 갖게 되었고, 죽을 때까지 이러한 신앙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프랑스의 지성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자 드레퓌스의 무죄석방을 위한 운동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 또한 잡지 <카예 드 라 캥젠 Chahiers de la Quinzaine>을 발간해 프랑스 지성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아나톨 프랑스, 앙리 베르그송, 장 조레스, 로맹 롤랑 등이 이 잡지에 기고했다. 대표적인 시로는 <잔 다르크의 희생의 전설 Le Mystere de la charite de Jeanne d'Arc>(1910)·<성스러운 순결의 신비 Mystere des Saints Innocents>(1912)·<이브 Eve>(1913) 등이 있다. /브리테니커
"마흔 살은 잔인한 나이이다. 바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되어가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
- 샤를 페기
- 독립신문 창간 100주년 기념 1996.4.6
1864 - 독립운동가 서재필(徐載弼) 출생 서재필 [徐載弼, 1864.1.7 - 1951.1.5] 한말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제이슨(Philip.Jaisohn)이다. 전라남도 보성(寶城)에서 출생했다.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79년(고종 16) 전강(殿講)에 장원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 1883년 일본의 도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뒤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操鍊局)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洪英植)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명성왕후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naver
1858 - 리투아니아 태생의 현대 히브리어 창시자 벤 예후다(Ben‑Yehuda, Eliezer) 출생 벤 예후다 [Ben‑Yehuda, Eliezer, 1858.1.7~1922.12.16] 1858 - 히브리어 되살린 엘리제르 벤 예후다 출생 [역사 속의 인물] 히브리어 되살린 엘리제르 벤 예후다 1880년대를 전후해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의 깃발 아래 팔레스타인으로 모여든 후 언어 공용화 문제가 불거졌다. 독일 등 서유럽 출신의 유대인들은 이디시어를 쓰고 있었으나 벨라루스 출신의 엘리제르 벤 예후다는 히브리어를 공용어로 쓰자고 주장했다. 당시만 해도 히브리어는 사멸한 고대 언어에 지나지 않았지만, 예후다는 어릴 적부터 히브리어를 공부하면서 일반 언어로 쓸 수 있는 실용성도 갖췄다고 믿었다. 예후다는 1857년 오늘 태어나 세 살 때부터 종교의식 등에 국한되었던 히브리어와 토라(유대교 경전)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모가 랍비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유대인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계속 배웠고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도 익혔다. 고교 졸업 후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중동 역사 등을 전공하면서도 고급 히브리어 과정을 파고들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후 27세 때 히브리어 신문을 발간했으며 전부 16권으로 된 히브리어 사전도 편찬했다. 또 어린 아들의 유년기 동안 다른 언어와의 접촉을 철저히 금지한 채 오직 히브리어로만 말을 가르쳤다. 부인이 아들에게 무심코 러시아어 자장가를 불렀다고 호되게 질책했을 정도이다. 결국, 반대가 만만찮았지만, 그의 노력과 뜻이 받아들여져 히브리어는 1922년 11월에 유대 국가의 국어로 공식 선포됐다. 평생 결핵을 앓은 그가 죽기 한 달 전이었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4.01.07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51&yy=2014 (1858년 출생으로 정정해야 하겠습니다. *_@)
베르나데트 [Bernadette of Lourdes, Saint, 1844.1.7~1879.4.16] 성녀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 성녀 마리아 베르나데트 수비루(Maria-Bernardette Soubirous)는 1844년 1월 7일 루르드에서 여섯 아이 중 맏딸로 태어났다. 14세 때의 그녀는 번민하는 듯한 인상에다가 보통보다 작은 소녀로서 민감하나 쾌활한 기질이 있었다. /마리아사랑넷 가톨릭 성인(세례명) http://www.mariasarang.net/saint/bbs_view.asp?index= bbs_saint&no=989&curRef=989&curStep=0&curLevel=0
- Niepce and Daguerre, Centenary of photography - Photography, 150th Anniv.
1839 - 프랑스 과학학사원의 아라고 박사, 다게레오타이프 발명에 대한 강연 다게르가 현상에서 정착까지의 프로세스를 완성하여 아름다운 영상을 영구적으로 고정하는데 성공한 것은 1837년이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스튜디오의 일각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예술가의 스튜디오’라고 제목이 붙어지고 다게레오 타입의 싸인과 1837년의 년호가 기입되어 있으며 현재 피리의 프랑스사진협회에 소장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