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림 제190회차 2월 정기산행 안내
산행일시 : 2024.2.18 산행지 : 경북 봉화 선달산(1,236m)
A코스 : 생달→상운사→늦은목이→선달산(1,236m)→박달령
→오전약수→주차장
B코스 : 소백산 자락길10구간→오전약수→생달→뒤뜰장터→부석사
경북 봉화 선달산 先達山 1,236m 산행지도
선달산은 강원도영월군과 경상북도 봉화군, 영주시에 걸쳐 있는 해발 1,236m 백두대간의 한 봉우리
이다.
<산 이름>선달산은 예로부터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고도하고 ‘먼저 올라야 큰 뜻을 이룬다’하는 뜻으
로 선달산(先達山)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達은 山과 동의어로, 삼국시대 까지는 달(達)이 山 또는 高의 뜻이 었으며 땅(地)은 아니었다
선달은 조선시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을 받지 못한 사람을 이르던 말로 조선 시대 '봉이 김선
달'은 본명을 김선달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의 본명은 김인홍으로 선달은 조선 후기 무과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받지 못한 채 다른 생업에나 백수
생활을 하던 과거 합격자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선달산>은 소백산맥에 속하며, 주변에 매봉산, 어래산, 봉황산 등이 있어 산세가 우아하고 풍경이 아름
답다. 남서쪽에는 소백산국립공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동남쪽 기슭에는 오전약수가 있다. 비탈면을 흐르는 수계는 옥동천으로 흘러들고, 남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하는 수계는 내성천으로 흘러든다. 선달산은 계절마다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봄에는 산수국, 참나리, 원추리 등의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물과 우거진 수풀이 청량함을
주고, 가을에는 단풍과 은행나무의 화려한 색이 산을 온통 물들인다. 겨울에는 설경과 얼음폭포가 비경을
보여준다.
선달산을 등산하기 위한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내리계곡을 따라 선달산 정상까지
오르고, 어래산과 시루봉을 거쳐 내리는 종주 코스이다.
이 코스는 약 17km 7시간의 시간이 소요되며, 중간에 단종의 유배지인 칠용동골과 단종비를 볼 수 있다.
선달산 정상에서는 백두대간의 마루금과 주변의 산들을 탁 트인 공간에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오늘의 산행은 생달→상운사→늦은목이→선달산(1,236m)→박달령 →
오전약수→주차장이다,
<생달마을>생달 마을은 선달산에서 발원한 큰터골, 왕바우골의 물을 받아 흐르는 하천을 끼고 형성되어
있는데, 봉화군지 지명유래 편에는
선달산에서 흘러내리는 이 하천이 마을을 가로러 흘러가면서 굽이쳐 흘러내리는 형세가 마치 둥그런 두
개의 달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쌍달이라 부르다 생달로 변했다 한다
생달주차장에서 큰터골로 상운사까지2.3Km 포장도로이며, 이후 늦은목이까지1.0Km구간은 경사가 완만
하여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오솔길이다.
늦은목이에서 선달산까지도 큰 어려움 없이 오를 수 있도록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늦은목이770M>영주 부석면과 봉화군 물야면의 경계에 위치한 고갯마루이지만 봉화군에서 단양군으로
가기 위한 길목이라고 한다.
늦은목이의 늦은은 느슨하다는 뜻. 목이는 노루목이나 허리목 같이 고개를 뜻하는 말로 느슨한 고개, 또는
낮은 고개로 볼 수 있다.
선달산 능선길은 정상에 오를 때까지 가파르긴 해도 부드러운 흙길이 너무도 걷기에 편하다. 숲이 우거진 선
달산 능선길은 이렇다 할 풍광을 선사하지 않는다.
그래도 대간 길을 걷는다는 것은 뿌듯하다. 이곳 지명을 보면 선달산과 마을의 이름이 특이하다. 산 아래 마을
이름은 생달이고, 산 이름은 선달이다.
<선달산 정상 先達山 해발1,236m>어느 정상 못지 않은 정상석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넓은 공간이지만
나뭇가지에 가려 조망은 없다.
대간에서 보면 강원도로 접어드는 지점이다.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남대천과 어래산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박달령이 보인다. 정상에서 박달령까지는 5km/1시간50분의 완만한 능선길이다.
<박달령 973m>박달나무 고개 박달령은 봉화군 물야면과 영월군 김삿갓면을 잇는 고개 마루이다. 임도로
연결되어 있어 차량 접근이 가능하다.
박달나무는 자작나뭇과에 속한 낙엽활엽교목. 높이 30m정도로, 잎은 다소 긴타원형이고 5~6월에 갈색의
꽃이 핀다. 우리나라, 일본, 만주등지에 분포한다.
<배달의 민족>해가 떠오르는 밝은 땅에 사는 민족 환웅천왕이 세운 한민족 최초의 나라 배달이다,
박달=박달나무(檀) 박=배(빛이 밝다) 달=해가 비치는 곳(양달,응달)
단군=밝달 임금
<오전약수>물야면 소재지에서 5㎞ 정도 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전댐을 지나 오전약수탕이 나온다.
심산계곡에 자리잡은 약수탕은 선달산(1234m), 옥석산(1076m) 아래 깊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전설에 의하면 오전 약수는 물야 오전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보부상 ‘곽개천’
이라는 장사꾼이 쑥밭에 누워 자다.
‘네 옆에 만병통치의 약수가 있다’는 꿈을 꾼 후 옆을 보니 약수가 솟고 있었고 이 샘이 오전약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오전 약수는 예로부터 탄산성분이 많아 혀끝을 톡 쏘는 청량감과 함께 위장병과 피부병에 큰 효험이 있다고
전해지며 조선 최고의 약수로 인정받아 왔다.
조선 성종(1469-1494) 때 전국 최고는 오전 약수이며, 청주의 초정약수는 그 다음이라고 했다고 한다.조선
중종(1506-1544) 때는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 선생이 오전약수를 찾아 약수를 마시고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 하다”라고 칭송하며, 약수터 바위에는 주세붕이 쓴 ‘人生不老
樂山樂水(인생불로 요산요수)’라는 친필 글씨가 새겨저 있다.
<오전梧田 지명 유래>
오전마을은 생달과 물집마을 계곡의 물이 합수되는 지역으로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를 이룬다 하여
수전(水田)이라고 하였으며 ‘수전’을 ‘쑤뱅이’로 불리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수밭’, ‘쑥밭’으로 되었다.
이곳의 약수가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고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
먹고 하여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면서 ‘쑥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 1904년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지역 명칭도 정비하면서 쑥 애(艾)자와 밭 전(田)자를 따서 애전(艾田)
으로 불리다가, ‘쑥밭’의 한자식 표현인 오늘 날의 ‘오전(梧田)’이 되었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
부석사는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는 절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 대사가 세웠다.
고려 시대에는 절의 이름을 선달사 또는 흥교사라고 하였는데,
정종 때 원융 국사가 이 절에 머무르면서 절을 크게 고쳐 지었다. 원응 국사가 이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낡은
건물을 고치고 그 밖에 여러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후, 조선 선조 때인 1580년에 사명당이 다시 한번 고쳐 지었고, 영조 때인 화재로 여러 건물이 불에 탔으나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석사의 크고 작은 건물 중에서 국보 제18호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제19호인 부석사 조사당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충청 남도 예산에 있는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 나라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절에는 그 밖에도 조선 시대 후기에 지은 범종루를 비롯하여 안양루 · 원각전 · 선묘각 · 응진전 · 자인당 · 취현암 · 좌우 요사 등이 있다.
범종루와 안양루는 누각이고, 원각전 · 응진전 · 자인당은 법당 건물이다.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 유래와 관련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모셔 둔 곳이다.
<부석사 문화재>국보로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부석사 조사당, 국보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소조여래 좌상, 국보 조사당 벽화, 부석사 삼층 석탑,
보물로 부석사 당간 지주, 보물 부석사 고려 각판,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부석사 원융 국사비 등이 있다. 이 절에는 석룡 · 선묘정 · 선비화 등이 있다.
<석룡>절의 창건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다. 머리는 무량수전 본존상 바로 밑에서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무량수전 앞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조사당 禪扉花>선비화의 학명學名은 골담초骨擔草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한다. 1300년 이상 조사당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주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보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擢玉森森倚寺門(탁옥삼삼의사문)
僧言卓錫化靈根(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曹溪水(장두자유조계수)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은)
빼어난 옥 같은 줄기 빽빽이 절문에 비꼈는데,
지팡이 신령스레 뿌리내렸다 스님이 일러주네.
석장의 끝에 혜능 선사 조계의 물 닿아있는가,
천지의 비와 이슬 그 은혜를 빌리지 아니했네.
<선묘>『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청혼에 의상은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선묘의 집을 찾아가 감사를 표하고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과 집기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떠나, 급히 상자를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지극한 정성으로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을 위협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