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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철과 정치인 기업 때리기, 기업에게 필요한 건 자율적 시장경제, 최승노, 2012-07-20 >
선거철이다 보니 인기를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기업때리기가 도를 넘고 있다.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판명된 출자총액제한규제를 되살리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만 봐도 정치인들이 얼마나 무책임한 인기몰이를 하는지 알 수 있다.
더구나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의 내부지분도를 공개하고 나섰다. 총수의 지분율이 낮아지고 내부지분율은 높아졌다면서 대기업의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자료를 공개한 것이다. 또 내부지분도가 복잡해서 문제가 있다는 식이다. 시민단체처럼 반기업 정서를 조장하는 정치적 행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경제문제를 정치적으로 접근해서 얻을 것은 거의 없다. 정치인과 정부가 만든 반시장적 규제는 기업을 통제하고 시장을 관리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경제는 자율적인 선택에 의해 합리적 해법을 찾아가도록 했을 때 효율적인데, 정치적 접근은 이를 원천적으로 방해한다. 실험은 누군가의 손해나 피해를 유발하면서 자원배분을 왜곡한다. 이러한 정치적 해결방식을 기업의 세계에 도입하면 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 더욱 우려스러운 일은 실패를 반복하여 실험하는 정치실패이다.
정부는 기업 지배구조의 모범답안을 알고 있는 듯 기업경영을 통제하려 든다. 하지만 기업의 세계를 정부나 관변학자 그리고 시민단체가 제대로 알 수 는 없다. 정부는 소득분배에 관심을 갖고 공권력을 행사하며 통제와 관리에 익숙하다. 학자들은 윈윈의 협력관계를 만드는 기업의 세계를 사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시민단체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압박할 뿐이다. 정부·학자·시민단체가 직접 기업을 운영한다면 그 결과는 아마도 참담할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일을 하면서 자신의 실패를 소비자의 무지 탓으로 돌릴 것이 뻔하다.
누구나 훈수는 둘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오지 않을 때는 마음 편하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무책임한 간섭이 우리 경제의 동력을 해치고 일자리를 앗아간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현대사회에서 뛰어난 기업을 가진 나라가 잘 사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뛰어난 기업을 어떻게 만들지를 고민하고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한다. 그런 뛰어난 기업을 우리나라는 여럿 가지고 있다. 경제의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기업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는 일이다. 기업에 좀 부담을 늘렸다고 큰일이야 나겠냐며 기업을 통제하려는 정치실험이 반복되면 우리의 삶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기업은 경영환경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늘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소비자의 까다로운 요구에 부응하고 현실변화에 신속하게 적응한 기업의 성과가 높은 것은 당연하며, 그 기업의 지배구조가 그 시대에 가장 효율적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은 수출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매출의 80~90%가 해외 소비자가 선택한 결과이다. 시장규모에 비해 기업의 규모가 클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글로벌 기업을 너무 크다면서 비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경제력이 집중되었다면서 소비자가 선택한 결과를 부정하는 것은 오만 그 자체이다. 대기업 때문에 중소기업이 어렵다는 정치적 논리나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뺏고 빼앗기는 관계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접근방식으로는 복잡한 경제문제를 풀 수 없다.
기업의 지배구조는 기업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지주회사가 나쁘다고 만들지 못하도록 했던 과거의 규제가 나빴듯이 지주회사로 옮겨가라고 강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기업이 순환출자를 하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기업이 시장에서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좋은 기업, 나쁜 기업으로 평가받아야지 정부나 시민단체로부터 평가받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기업에 무리한 압박을 가하는 규제나 정치적 요구는 자제되어야 한다.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는 후진정치이다. 인기를 얻기 위해 기업을 희생양으로 삼아 경제를 황폐화시키면서까지 정권을 잡는 일은 정치적 타락이며 포퓰리즘이다. 국민의 삶을 개선해 나가고, 더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친(親)시장적 정책을 채택하는 일이야말로 정치가 선진화되는 길이다. (최승노 / 자유경제원 사무총장), 이 글은 영남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경제 민주화]란 없다! [경제 자유민주화]냐 [경제 인민민주화]냐가 있을뿐! 이러다 대한민국이 '민주화(?)' 당하겠다!
대한민국 뒤덮고 있는 밑도 끝도 없는 경제민주화! 참개인가치연대 주최, "본질 잘 알아야...경제 문제 정치적으로 해결해선 안돼", 2012.07.20, 김태민 기자
'대한민국이 민주화(?) 당하게 생겼다.'
'경제민주화'가 최근 정치권에서 뜨거운 감자가 됐다.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퍼주기에 정신이 없다. 그 돈이 다 국민들의 세금인데도 말이다. 밑도 끝도 없는 '경제민주화'란 말에 대한민국 전체가 '민주화(?)' 당할 지경이다.
하지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정치권 포퓰리즘적으로 질주하는 것에 제동을 걸겠다"며 등장한 참개인가치연대(TIVA, 대표 박경귀)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이들은 19일 서울 정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세미나실에서 '경제민주화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회를 열었다.
박경귀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경제민주화는 너무 잘 먹히게 만들어진 '말'이다. 합리적 대안을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왜 나왔을까? 우리 사회의 경제적 모순, 자본주의 모순이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나 빈부격차. 이런 문제들을 아주 정치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경제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경제정치화다. 이것이 사실은 굉장히 큰 문제다."
"경제적 모순에서 나오는 것은 경제적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경제민주화'란 단어로 접근하면서 많은 국민들이 정치적 해법만을 기대하고 포퓰리즘적으로 흘러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해졌다. 이 화두를 잘 풀어내는 정치세력에 의해 그 효과가 어떨지는 몰라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이날 토론회는 김이석 박사가 ‘경제민주화, 민주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반자유주의 정책’을 주제로 발표하고 이의춘 데일리안 편집국장,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김영훈 바른사회 시민회의 경제사회실장이 토론자로 나섰다. 사회는 박성현 뉴데일리 논설위원이 봤다.
◆ 김이석 시장경제연구소 부소장
'경제민주화, 민주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반자유주의 정책'
김 부소장은 "경제민주화는 대선 과정에서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한 전략의 일부"라고 일축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한테 취업이 잘되게 해주겠다고 한다. 자영업자들에게는 사업이 잘되게 해주겠다고 한다. '경제민주화'란 그런 환상을 심어놓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강조하는 점은 다음과 같이 간단하다.
"생산과 교환을 통해 자신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보편화되어 있을수록 그 안의 개인들도 번영을 누린다. 이에 비해 정치적 수단을 통해 부를 획득하는 소위 세금소비자들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번영을 누릴 수 없고 개인들의 자유는 억압된다."
그는 '경제민주화'가 '경쟁과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대형유통업체를 규제하면 소비자들은 자기 뜻대로 돈을 쓸 수 있는 기회를 봉쇄당하는 것이다. 대형유통업체에 손님이 많은 것은 손님들에게 강제를 행사한 결과가 아니다. 그런데 이를 '경제민주화'라는 명분으로 의무적으로 휴업하도록 하는 것은 강제의 일종이다. 상대적으로 소비자들에게 잘 봉사하지 못한 경쟁자들을 보호할 뿐이다."
그는 모든 업종에서 상대적으로 장사가 잘되는 업체들은 지금보다 더 적게 생산해야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음과 같은 폐해를 곱씹어봐야 한다는 얘기다.
"과거 구소련의 계획경제가 펼쳐질 때 높은 회생비율이라는 고상한 목표를 두고 각 국립병원들이 경쟁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자 병원들은 정작 치료가 필요하지만 죽을 가능성이 있는 노인과 중환자에 대해선 치료를 거부하면서까지 달성 목표만 채우려고 노력했다."
아울러 경제에 대해 "1인1표의 민주주의 원리로 통제하고자 하는 정책은 정치적 수단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1인1표가 신성한 원리로서 이를 관철시키기만 하면 시장경제도 더 잘되고 개인들의 평등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곤란하다.
1인1표의 세계에서는 논리적, 경험적 추론의 과정이 지배하는 이성의 세계가 아니라 선동에 의해 자극받은 질시와 분노와 같은 감정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기 쉬운 속성이 있다.
예를 들어, 기업의 경영에 노동자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정책은 그 기업에 투자하지 않은 노동자 대표로 하여금 주주들의 의사결정권(재산권)에 간섭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 된다. 이 엄청난 권력은 노조위원장에게 음으로 양으로 혜택을 줄 것이다.
고용에 노조의 승인이 있게 하면 노조가 사람을 뽑고 그 과정에서 뇌물을 받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기업들은 그 기업에 더 많은 이윤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되는 더 좋은 인력을 뽑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노조대표들로서는 그런 유인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기업경영에 노조대표를 참여시키도록 하는 법률이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입법화되면 노조대표도 정치적 수단에 의존해서 살아갈 길이 열리게 된다."
◆ 이의춘 데일리안 편집국장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의 또다른 포퓰리즘을 경계해야 한다."
이 국장은 "공동체가 어떤 위기를 맞게 됐는지 재벌들의 자기반성이 없다. 이게 빠진 상태에서 원론적으로 자유주의로 가야 한다고 해봤자 이념적 갈등해소가 되질 않는다"고 했다.
"현재 '경제민주화'의 의미가 재벌들을 척결 대상으로 삼는 국민재판식으로 가고 있다. 경제를 책임지는 재벌들도 나름대로 반성을 해야 한다."
특히 그는 "대기업의 상속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도저히 헤어날 길이 없다. 국민들의 속은 뒤집힌다"고 강조했다. 이 국장은 '경제민주화'의 논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 황제경영과 경제력집중
- 편법 및 불법 상속 증여- 세금없는 부의 대물림 논란
- 과도한 계열사 일감몰아주기
- 중소기업 기술 탈취 및 납품단가, 물량조절 횡포
- 빵집 두부 순대 골목상권 잠식
그러면서도 "현재 '경제민주화'는 재벌 때리기로 변질됐다"며 다음과 같은 '정치권의 시각들'을 소개했다.
'대기업 하면 착취가 생각난다'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
'경제민주화는 시장과 재벌에 넘어간 권력을 되찾자는 것' (문재인)
'강자에게 솜방망이 처벌은 안돼' (박근혜)
'30대 대기업집단을 3,000개로 쪼개 재벌 해체해야' (이정희)
이 국장은 "경제민주화는 성장이 배제된 경제포퓰리즘"이라고 했다.
"가난한 평등사회를 만들자는 것인가. 진영논리와 편가르기, 질투의 경제학에 함몰되면 동반성장은커녕 동반침몰로 갈 것이다."
◆ 김영훈 바른사회 시민회의 경제사회실장
"경제민주화는 시장의 원리를 무시한 모호한 슬로건"
김 실장은 "‘경제민주화’라는 단어의 개념이나 정의자체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의미와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슬로건’과 ‘정책’은 다르다. 귀에 와 닿는 한마디 단어가 슬로건이라면 명분과 더불어 구체적 효과를 낼 수 있어야 비로써 정책이라고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어 "민주당이 발표한 경제민주화 정책은 ‘재벌개혁’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일단 경제민주화를 민주당이 주장하는 재벌개혁으로 정의한다면 경제민주화는 이미 실패한, 그리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제도이다.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순환출자 금지, 지주회사 규제강화, 금산분리 강화, 기업범죄 처벌강화, 재벌세 부과 등 대부분 과거 시도되었던 재벌정책의 재판이다.
지난 1993년, 미국에서는 미성년 노동자를 고용한 국가에서 만든 상품에 대한 수입을 금지했다. 낮은 임금이나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이었지만, 그 결과 방글라데시 어린이들은 일자리를 잃어 생계를 위협받고, 매춘으로 내몰리기도 했다. 명분을 앞세운 정책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경제’와 ‘민주화’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했다. "시장에서의 자발적 거래를 민주화 하겠다는 것은 결국 이를 강제로 변경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장은 소비자의 선택을 통해 치열한 경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본의든 아니든 결국 소비자의 후생증가시키는 방향에 가장 적합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물론 경제민주화가 필요한 분야가 있다. 바로 정부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분야이다. 철도, 우체국 등 시장에서 경쟁력을 검증받지 못한 못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이 제한된 분야에 대해서는 “경제민주화”를 통해 공정한 경쟁의 기틀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press@newdaily.co.kr
安 “공정한 시장경제” 오히려 ‘박근혜=안철수’, 2012.07.19, 오창균 기자 >
안철수의 생각’은 새누리당과 비슷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경제민주화’는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야권과는 정반대였다.
안철수 원장은 19일 발간한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대기업 집단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경제민주화 논란’에 대해 “소수가 특권을 갖고 시장을 독점하고 좌우하는 게 아니라 국민들 누구나 경제 주체로서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발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체적인 경제 수준으로 따지면 옛날보다 모두가 행복해야 하는데, 양극화로 인해 상대적 빈곤감이 더 심해졌다.”
“재벌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면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노동자, 농민 등 상대적 약자들이 희망을 갖기 힘든 경제구조가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재벌 개혁을 통해 대기업의 특혜를 폐지하고 중소기업을 중점 육성하는 경제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안철수 원장은 ‘재벌 해체’ 주장에 대해 “과도하게 근본적인 접근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주장하는 ‘재벌해체론’을 정면 반박한 것이다. 오히려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내놓은 ‘재벌개혁안’과 맥이 닿아 있었다.
박근혜 전 위원장이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통합당을 향해 일침을 놨다.
“민주통합당의 주장은 ‘재벌해체’인데 저는 그런 식으로 막나가는 게 우리 경제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경제 주체들이 중기업, 대기업 할 것 없이 공정한 기회 속에서 조화롭게 같이 성장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경제민주화는 경제력 남용 이 부분을 확실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민주통합당은 경제력 남용보다 집중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안철수 원장은 이번 저서를 통해 “총선이 예상치 않게 야권의 패배로 귀결되면서 나에 대한 정치적 기대가 다시 커지는 것을 느꼈을 때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열망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 무겁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안철수 원장이 사실상 대권 출마를 선언했다는 분석이 나왔다.(press@newdaily.co.kr)
< 경제 민주화? 약자에게 약보다 독, 2012.07.11, 김정호 >
경제민주화, 약자에게 해(害) 될 수도
경제적 약자 보호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그로 인해 그들이 영원히 약자로 머무르는 일은 막아야 한다. - 김정호(자유경제원)
경제화능력 떨어지면 저소득층 타격
경제민주화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여당인 새누리당과 야당인 민주통합당이 모두 경제민주화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고는 있지만, 이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과제도 아니어서 연말 대선에서도 중요한 화두로 남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가진 자, 강한 자에 대한 견제와 약한 자에 대한 보호가 큰 그림이다. 소득재분배 정책과 복지정책, 재벌로 대표되는 대기업집단에 대한 규제 강화, 중소 및 영세기업에 대한 보호 같은 것들이 경제민주화의 구체적 형태다. 이와 관련해서 꼭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주체들의 현 상황이 어떠한지, 또 새로 도입하려는 수단은 과연 우리가 보호 또는 돕고자 하는 대상들인지. 한편 설정된 경제민주화 방향은 제대로 그들을 돕게 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펼치는 다양한 정책들은 오히려 경제적 약자들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 다시 곱씹어 봐야
먼저 소득재분배정책을 생각해보자. 이 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소득 격차의 해소, 즉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다. 이들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이를 위해 논의되고 있는 것이 바로 누진소득세와 복지정책이다.
한국의 복지지출은 선진국들에 비해 그 규모면에서 작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복지지출을 무조건 늘리는 것이 빈부격차의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잘 따져봐야 한다.
보편적 복지의 핵심은 저소득층뿐 아니라 중산층까지 대상으로 한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중산층의 복지란 결국 자기가 낸 세금을 다시 돌려받는 제도라는 것이다. 최저 소득계층에 대한 정부 지원을 늘리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자기가 낸 세금을 다시 돌려받는 식의 정책을 밀어 붙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더구나 이 정책의 핵심 사실은 감춘 채 되돌려 받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 정책공약 하에서의 복지정책이 과연 민주화라는 이름에 걸맞을까.
그렇게 해서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면 결국 타격을 받는 것은 저소득층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한다. 또 중산층에게 풀어줄 예산이 있다면 사각지대의 저소득층에 배려하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이상에 더 맞은 것 아닐까, 꼭 따져봐야 할 일이다.
출총제 부활하면 양질의 일자리 줄어
재벌개혁과 관련해서 반드시 따져봐야 할 것은 또 다른 측면이다. 현 재벌개혁 정책이 노동자들의 이익과 부합하는지, 또 중소기업의 이익으로 나타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재벌개혁의 핵심 중 하나는 출자총액제한 부활 등을 통한 계열사 확대 억제다. 하지만 이들 정책 추진자들이 간과하는 하나의 사실이 있다. 바로 재벌기업 계열사의 확대가 투자 증가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 노동자들이 원하는 대기업 일자리가 늘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기업들의 계열사 확장을 막으면 하청 혹은 협력 중소기업의 일거리가 줄거나 또는 아예 협력 중소기업들이 없어진다. 결국 노동자들은 더 좋은 일자리의 기회를 잃게 된다.
중소기업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대기업이 계열사를 만들면 경쟁관계의 중소기업들은 경쟁으로 사업이 어렵게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중소기업들에게는 대기업에 납품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남을 뜻한다.
따라서 재벌개혁과 관련해 우리는 두 가지를 따져봐야 한다. 계열사의 확장을 막는 정책이 노동자들이 원하는 좋은 일자리의 창출을 막지는 않는지, 그리고 경쟁관계의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중소기업들이 대기업 협력업체가 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아닌지를 말이다.
보호받는 중기업종, 발전 못해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같은 중소기업 보호 정책에서도 가치의 충돌 현상은 일어난다. 과거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를 통해서 경험했듯이 보호를 받는 산업은 발전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명 산업, 면도기 산업 등에서 수입품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중소기업 보호정책의 결과로 봐야 한다.
산업의 침체는 단순히 기업주의 손해를 넘어서 거기에 종사하거나, 종사했을 근로자들과 소비자들의 손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중소기업보호제도와 관련해서 기업주의 이익을 넘어 노동자와 소비자에게 어떤 이익이 있는지를 따져보는 일이 꼭 필요하다. 중소기업주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이익을 희생하는 정책에 민주화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장기적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 약자 보호의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그로 인해 그들이 영원히 약자로 머무르는 일은 막아야 한다. 그것은 오히려 당사자들에게 손해다.
여기서 우리가 제기해야 할 또 다른 질문이 있다. 저소득층 보호정책이 과연 보호받는 저소득층의 현 상황 탈출을 촉진하고 있는가 중소기업 보호정책은 과연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의 성장하게 하는가. 지금까지의 사례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가 정답이다. 새로 제안되는 경제민주화 조치들은 장기적인 결과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경제민주화 논의는 치밀한 경제논리보다는 막연한 국민정서에 바탕을 둘 때가 많다. 때문에 그 안에 포함된 정책 목표들은 서로 충돌하기 십상이다. 그 결과 경제민주화 정책이 보호하려는 경제적 약자의 이익을 오히려 해치는 경우들도 많다. 경제민주화가 진정으로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가, 그리고 약자를 영원히 약자로 묶어 두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경제민주화에 앞서 꼭 따져봐야 할 핵심적인 질문이다.
- 김정호 前 자유기업원 원장/ 정리 손정우 기자, 위 글의 출처는 자유경제원(前 자유기업원)입니다.
[류근일 칼럼] 경제민주화는 과학으로 해야, 민주화 좋아하다 경제 말아먹을라, 2012.07.11
‘경제민주화’가 科學을 떠나지 않길
‘경제 민주화’는 여, 야가 다 같이 공약한 것이라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어느 당이 집권하든 시대적인 추세가 되었다. ‘경제 민주화’란 말이 학문적으로 있는 말이냐 없는 말이냐 하는 것은 학자들이 따질 문제다. 그런 용어가 있든 없든 현실적으로는 엄연히 ‘닥칠 일’이다.
그렇다면 한국정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경제 민주화’란 대체 무엇인가. 두 가지다. 재벌개혁과 복지 확충. 왜 재벌개혁인가? 이른바 ‘양극화’란 것 때문이다.
중산층과 자영업자 등, 사회의 중간 허리가 몰락하는 전반적인 ‘빈곤화’ 현상이 이런 논의를 정치, 경제, 사회의 어젠다로 성립시켰다. “재벌을 때린다고 해서 ‘빈곤화’ 문제가 해결 되는가?” “재벌을 때리면 카타르시스는 될지 몰라도 외국자본이 그것을 먹는 건 괜찮은가?”라는 일각의 ‘나름대로의’ 경제 논리가 있다. 그러나 그건 작금의 한국 여, 야 제도정치권에선 원군(援軍)을 별로 얻지 못하고 있다. 그 만큼 “재벌은 개혁돼야 한다”는 정치논리가 지배적인 담론이 되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여, 야가 “재벌 개혁은 한다”는 컨센서스를 이룬 만큼 이것을 더 이상 ‘정치 싸움’ 거리로 써먹지 말고 ‘과학’으로 다뤄야 하겠다는 것이다. 왜? 경제는 정밀기계처럼 민감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치’와 ‘정서’의 문제로 다룰 경우엔 국민경제 전반은 물론, 재벌개혁이 기대하는 ‘빈곤화 대책’마저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재벌은 개혁돼야 한다“는 당위론에서 나아가 ”어떻게 하면 재벌의 ‘너무 심한‘ 탐욕, 과도한 권력화, 불공정 행위, 부당거래, 불법과 편법 행위는 막되, 국민경제의 또 다른 손실(예컨대 矯角殺牛, 소뿔 고치려다 소 죽이는)은 초래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공동의 어젠다로 삼았으면 한다. 한 번 망가지면 좀처럼 회복하기 힘든 것이 경제이기 때문이다.
복지 또한 여, 야 모두의 어젠다로 성립했다.
문제는 복지의 당위성이 아니라, 재정건전성의 문제로 귀착한다. 서유럽 형(型) 복지국가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으로 보편적 복지를 구현했다. 그러나 오늘날엔 일부 국가들에서 그 복지국가가 재정파탄 국가가로 전락하는 사례를 목도하고 있다. 이것은 서유럽 복지국가 모델이 더 이상 항구적인 ‘마술 지팡이’만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 야는 이 교훈을 간과하지 말고 복지, 재정건전성, 조세부담율이 비교적 서로 얼추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찾아 의견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것 역시 정치 싸움의 도구로 사용할 게 아니라, 과학적 접근으로 다뤄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인, 정치집단, 이익집단, 사회운동 세력, 그리고 대중이 과연 그런 냉철한 과학적 접근을 할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선거전은 과학이 아니라 무책임할 정도의 과대광고와 무한 판촉경쟁으로 갔다.
<재벌과 타협하기 전에 힘 있게 부딪쳐라, [한국 경제 성격 논쟁]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의 주장에 답한다<8>,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 2012-07-03 >
좋은 일자리, 좋은 경제, 좋은 삶
<정의란 무엇인가>로 한국사회에 정의 열풍을 일으켰던 마이클 샌델 교수가 다시 우리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는 소비자에게 최저가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유일한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면서 중소기업이 고용과 지역사회의 좋은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다운 충고가 아닐 수 없다. 강소한 중견 기업들이 활착(活着), 활생(活生)함으로써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하고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경제정의가 실현된다면, 그 바탕 위에 좋은 삶을 이뤄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참 '좋은 경제'가 아니겠는가.
때마침 야당의 한 대선 후보가 내건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도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다고 한다. 지독한 성장중독병, 경쟁중독병, 노동중독병, 학력중독병 등에서 해방되어 저마다 자율적 삶을 회복하며, 연인이랑 가족이랑 사랑하고, 친구와 우정을 나눌 충분한 자유시간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삶이겠나. 게다가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일자리까지 나눌 수 있다면 일자리와 행복한 삶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겠다. 물론 그 후보의 진짜 실력이 과연 '저녁이 있는 삶'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별개 문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그리고 '저녁이 있는 삶'의 이야기는 돈이면 뭐든지 다 된다고 생각하며 성장중독, 경쟁중독에 걸린 사회, 오래도록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온 우리들의 모습, 그리고 어느 때보다 노동이 가벼워지고 불안정해져 노동배제와 노동중독이 희한하게 겹쳐 있는 우리 시대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있어온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논의도 새 지점으로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만약 우리가 시선을 더 아래로 향하면서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새롭게 전환하는 길, 진정 정의롭고 좋은 경제의 프레임, 좋은 삶의 프레임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얼마든지 더 높은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바보 노무현이 숙제로 남겨준 '사람 사는 세상'은 결코 추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 하기 나름이다.
재벌개혁은 경제민주화와 공생의 숲으로 가는 기본 관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 지역사회 골목골목에도 평화가 찾아와 강소 중견기업들이 번창하고 기업·산업 생태계를 복원하며,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생활가치를 향유하는, 모든 이를 위한 경제민주화의 길로, '공생의 숲'의 경제로 갈 수 있을까? 중소기업 및 소상인의 가치, 노동의 가치, 그리고 생활가치라는 좋은 경제/좋은 삶으로 가는 트리오를 함께 살리는 길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얼마 전에 '경제 민주화 시민연대'(준)가 출범을 했다. 이 시민연대는 발족 기념 토론회에서 "1%를 위한 재벌경제에서 모두를 위한 경제 민주화로" 가자, 그리하여 '한국경제의 패러다임을 전환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시민연대는 결코 재벌 개혁이 경제 민주화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경제민주화의 길은 재벌개혁보다 훨씬 넓고 깊다. 재벌개혁은 물론이고, 노동개혁, 금융개혁, 중소기업 개혁, 교육 개혁, (사영화가 아니라) 공공성을 살리는 공기업 개혁, 조세개혁과 사회 서비스 확충을 위한 정부개혁, 에너지 고소비 산업의 저소비 산업으로 개혁과 소비개혁, 그리고 언론 개혁 등에까지 걸쳐 있다. 최종적으로는 나라경제를 앞서 말한 정의롭고도 좋은 경제로, 1% 독점-독식경제를 모든 이가 공유하는 100% 경제로 바꾸는 목표를 갖고 있는 게 경제 민주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재벌 특권 독식 체제를 개혁하지 않고서도 모든 이를 위한 경제 민주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재벌개혁이란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 과연 정의롭고도 좋은 경제가 가능할까? 글쎄,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본다.
시민연대 발족식에서는 현하 재벌체제 아래 고통받고 있는 각계각층이 호소하는 21세기판 '만민공동회' 시간을 가진 바 있다. 그 자리에는 하도급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중소기업인들의 호소, 대형마트의 진출로 눈물 흘리게 된 중소상인들의 호소, 사내하청 등 비정규직 처지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호소, 88만원 세대와 백수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학생들의 호소, 재벌에 혜택이 집중되어 있는 불공정 조세체계에 대한 납세자들의 호소, 광고를 통한 재벌대기업의 언론지배 실태를 짚은 언론감시단체의 호소 등이 있었다. 각계각층의 호소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발본적 재벌개혁 없이는 결코 양극화를 넘어 모든 이를 위한 경제민주화로 갈 수 없음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공개한 자료에서도 알 수 있는 바이지만, 한국의 재벌체제란 1% 남짓한, 쥐꼬리 같은 지분율을 가진 총수(상위 10대 재벌 총수 지분 0.94%, 계열사 지분 55.73%; 삼성재벌의 경우 이건희 회장 지분 0.52%, 계열사 지분 58.75%)가 계열사를 지배함은 물론, 지역경제와 나라경제를 독점-독식하고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 비용과 위험은 나라경제와 다수 국민 대중에게 떠넘기는 체제, 세계경제사상 별로 흔치 않은 대단한 무책임-불공정체제이다.
그리고 재벌닷컴에 따르면 5대재벌의 자산은 정부 총자산의 절반에 육박하며, 삼성의 자산은 100대 재벌 전체의 19.3%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이런 구도에서 재벌총수와 재벌그룹, 이건희와 삼성그룹은 '이별'을 말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이 서로 달라붙어 있다. 이런 비정상적 기득권 체제를 대수술하지 않고서는 경제민주화도, 경제정의도, 더불어 사는 대한민국의 길도 모두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건희와 삼성그룹을 생이별시키는 방법들'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서, 이미 그 둘이 이별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던 주장 자체에 대해서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
재벌가치와 주주가치는 어떻게 공생하나?
그런데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가 '낡은 화두'라고 말한 장하준 그룹은 국제금융자본 대 '재벌+노동+중소기업+자영업'을 한국경제의 기본적 모순 구도로 보는 것 같다. 다름이 아니라 "저들(국제금융자본)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 대기업 정도는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선택>, p.199). 한국경제의 구도에 대해 바로 이런 인식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재벌 개혁을 하면 "美·英금융자본이 재벌을 접수"한다는 식으로 과도한 주장까지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주장은 과연 얼마나 실증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까.
지금까지 나는 장하준 그룹의 견해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여러 지적들을 해 왔지만, 사실 그들의 주장과 인식틀은 실증의 측면에서 매우 중대한 부담을 안고 있다. 즉, 지금까지 그들의 연구는 정작 한국경제가 어느 정도로 주주가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지에 대해 실증적으로 잘 보여 주고 있지 않다. 이는 <선택>의 경우도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선택>에서는 당기순이익이 아니라 영업이익 대비 '배당+자사주 매입액'을 주주이익 환원율로 사용하고 있는데(<선택>, p.215). 그렇게 주장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논의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 추가적 설명이 없다면 현재로서는 그런 방식이 얼마나 적절한지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축적체제가 과연 어느 정도 주주가치 지향적으로 변모했는지에 대해서는 장하준 그룹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학계 전체를 보아도 실증연구가 많이 진전됐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는 이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민주 정부' 10년 시기(1997-2007)를 중심으로 미진하나마 실증 연구를 해 본 적이 있다. (졸고,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축적체제", <동향과 전망>, 2011 봄).
그 글에서 나는 장하준 그룹의 주장이 실증적 근거가 미약하다는 점을 이미 지적한 바 있으며, 현재 2007년 이후 시기로 연장해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 실증작업에서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기업의 매년 '자사주 취득/처분/순잔액' 값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료 소스마다 값이 상당히 다르게 나온다. 나는 주로 한국신용평가(주)에서 제공하는 Kiss line 자료를 사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최종적으로는 개별기업 사업보고서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여하튼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서 참신한 새 연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면서, 아래에서는 내가 현재 작업하고 있는 내용 중에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주주가치 추구 경향이 어떤지에 대해서만 그림으로 보인다. (그림 생략)
위의 그림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1997년 이후 한국제조업 동향을 대표하는 쌍두마차격의 기업이라 할 수 있는데, 주주가치 성향 면에서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삼성전자가 자사주 취득을 중심으로- 배당성향은 낮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주주가치 성향을 보여 왔음에 반해, 현대자동차는 주주가치 경영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당기순이익 대비 '배당+자사주 취득' 값이 매우 낮다.
2002~2007년의 6년 동안 삼성전자가 평균 32.1%로 높은 주주가치 성향을 보였음에 반해 현대자동차의 같은 값은 21.4%에 불과하다. 2005년의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훨씬 낮아진다.
삼성전자는 최대주주 지분율이 낮으면서 자사주 지분율이 아주 높은 대표기업으로서, 주가 부양 못지않게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 취득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삼성전자도 2008년 이후에는 자사주 취득에서 처분 쪽으로 돌아서면서 주주가치 성향이 매우 낮아졌다. 이는 위기관리 경영으로 전환한 탓으로 보인다.
현대자동차의 경우는 2008년 이후 영업 실적은 양호했지만 낮은 주주가치성향에는 별반 변함이 없다. 물론 상장기업 중에서 한국통신(KT)처럼 엄청나게 주주 퍼주기 경영을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사례를 제조 대기업의 표준형으로 보기는 어렵다.
둘째, 노동분배율(부가가치 대비 인건비)의 동향은 전문가들에 의해 잘 밝혀져 있고, 보통의 '경제시민'들도 대체로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에서 노동소득분배율은 1997년 이후 급격히 추락했다. 그리고 2008년 이후는 노동소득분배율과 주주가치 성향 모두 낮다. 그런데 삼성전자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현대자동차의 분배율이 더 높다.
셋째, 재벌 대기업은 큰 세금 부담을 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일반적 통념과는 달리 그들의 조세 부담은 상당히 낮다. 1997년 이후 지속적으로 낮아졌다. 제조업 전체 실효법인세율이 20.5%인데 삼성전자는 14.1%에 불과하다. 현대차는 그보다는 높아 19.0%다(2005~2009년 평균).
넷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모두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사내유보율이 매우 높을 뿐더러, 심지어 1997년 이전보다 줄곧 더 높아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90%대, 현대차는 80%대의 유보율을 보이고 있다.
한편 미국기업의 경우 사내유보율은 50~60% 수준으로 낮은데 이는 순이익의 중요 부분을 배당 및 자사주 취득으로 유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차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한국기업의 높은 사내유보율은 한국기업의 성과배분방식에서 노동에 돌아가는 몫이 낮음은 물론 주주에 돌아가는 몫도 미국에 비해서는 낮고, 많은 부분을 기업내부에 쌓아두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현금성 자산 비중이 높은 사실과도 부합된다. 물론 내부유보에 대한 잔여청구권과 통제권의 행사는 재벌총수가 쥐고 있다. 다시 말해 높은 사내유보율은 총수가치와 기업집단(또는 성장) 가치를 같이 추구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물론 재벌총수는 주주의 '눈치'를 봐야 하고 서로 타협을 해야만 한다.
경제민주화의 정도(正道): 어설픈 타협 이전에 힘 있게 부딪쳐라
장하준 그룹은 국제금융자본이 마음만 먹으면 한국 대기업 정도는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보기 때문에 재벌개혁은 국제금융자본이 한국재벌을 "접수"할 위험을 낳는다고 주장하고, 재벌 해체와 재벌 특권-독식의 해체도 구분하질 못한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제시하는 실증적 근거는 취약하다. 이는 장하준 그룹의 중대한 약점이 아닐 수 없다.
나의 관찰에 따르면, 한국의 재벌은 장하준 그룹의 주장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총수 주도 또는 독재 아래 막강한 자율적 파워를 갖고서 한편으로 금융시장 압력에 대응하고 다른 한편 재벌 가치를 추구한다.
따라서 예컨대 현대자동차의 경우, 사내하청이라는 이름으로 불법파견노동을 광범하게 활용하고 대법원 판결까지 모르쇠로 대처하고 있는 것은 국제금융자본의 압박보다는 현대차 재벌그룹의 독자적인 판단과 대응양식이 더 우세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노동문제, 중소기업/소상인 문제를 국제금융자본 탓으로 돌린다면 이는 심한 단순논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 그리고 정의롭고도 좋은 공생의 숲 경제로 가려면 먼저 착시, 착각부터 벗어야 할 것이다. 깊은 강은 국제금융자본/재벌 사이가 아니라, '재벌과 국제금융자본/ 비정규직 노동자+취약한 정규직+중소기업자+소상공인+자영업자+취약한 중산층' 사이에서 흐르고 있다. '재벌을 제거한 신자유주의'론에 의거한 어설픈 타협론을 버리는 것이 먼저다.
도전자는 값싼 타협을 말하기 전에 먼저 힘 있게, 당차게 부딪쳐야 한다. 재벌의 고삐를 잡고 국가다운 국가를 구성해 낼 수 있는 시민정치적, 제도정치적 대항력을, 경제민주화 동맹의 소통과 공감 능력 및 저변 기반을 크게 키우고 넓히는 것이 먼저다. 그렇게 해야만 1%를 위한 재벌독식 정글경제에서 배제되고 버림받은 99% '을'(乙)들의 삶의 가치, 중소기업인/소상공인의 가치와 골목 평화의 가치, 너무나 가볍게 내동댕이쳐진 노동하는 인간의 가치 그리고 생활하는 자유인의 가치를 굳게 세우고 키우는 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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