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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문주의(人文主義 / Humanism)
(1) 유럽의 공통언어 라틴어(Latin languages)
제목을다른 나라의 르네상스라고 붙였지만, 이것은 북부이탈리아, 더 좁히면 피렌체 이외의 르네상스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더 합당하리라고 봅니다. 유럽이라는 곳은지금도 국가간의 국경선 도로에는 초소가 있기는 하나, 외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히제재(制裁) 당하는 일도 없고, 까다로운 입국절차나 검색이 통상적으로 없기 때문에자동차의 번호판 색깔만 다른 각국의 자동차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광경을 어디서나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그들의 오랜 전통으로 중세말기라고 해서다를 것은 없었고, 오히려 국경초소마저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국가간 통행이 지금보다훨씬 자유로웠겠지요. 유럽전체가 신앙공동체로서의 기독교와 공용어로서의 라틴어가있어서 누가 어디를 가나 종교와 풍속, 언어적인 장애를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어서유럽이 하나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도 모든 교회와 수도원의 설교와 찬송가를 비롯한공용문서와 용어, 외교문서, 법률문서, 상업문서 등에는 라틴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고,대학에서의 강의와 선생과 학생들간의 대화도 모두 라틴어로 행해졌습니다. 그러나이것은 교육을 받은 일부 사람들의 이야기고, 라틴어를 모른다는 것은 문맹(文盲)으로보았기 때문에, 당시 유럽은 많은 문맹자가 있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마치 과거우리사회에서 한자(漢字)의 해독(解讀) 여부를 가지고 양반과 상민(常民), 지식과문맹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 것의 차이쯤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라틴어(Latin language)가 라티움(Latium) 지방의한 방언(方言/지방언어)으로 출발, 많은 종족(種族)이 사용하던 언어와 공존하다가도시국가 로마가 팽창하면서 다른 언어까지를 포섭해서 생겨난 하나의 혼합언어라고합니다 이것이 인도·유럽어족의 이탈리아 어파(語派)에 속하는 로마인의 언어로자리잡았고,, BC 1세기 이후 고대 지중해 세계의 공용어·공통어로서 광범하게 통용되면서로마제국의 영토확장에 따라 프랑스·이탈리아·에스파냐·포르투갈·루마니아 등으로전파되어, 그 지역의 언어와 결합되고 변질되면서 여러 방언을 만들어 냈는데, 그바탕은 라틴어에 둔 많은 국어(방언). 곧 로망스어(Romance languages)의 근원이되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라틴어라고 하면 BC 3∼BC 1세기에 로마의상류사회에서 사용하던 언어가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아 발전한 고전라틴어를 말하고,이 고전라틴어는 그 후에도 큰 변화 없이 이어졌으나, 이와 병행하여 일상회화체로서의라틴어가 통용되면서 시대와 함께 끊임없이 변하여 이미 2세기에 이르러서는 두 언어의차이가 더욱더 커졌고, 로마제국의 멸망 후 1천년을 경과하면서 여러 국어(속어)에서새로운 단어들이 첨가되고, 제멋대로 동사에서 명사를 만들고, 반대로 명사에서 동사를만들어 내는 등 많이 변질되기 시작하였는데,
중세말기에 와서는 고전라틴어의 특징이었던 자유로운어순(語順)전환은 거의 갖지 않는 등 근대화 현상을 나타내서 근대 유럽어의어순이나 문장구조를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라틴어는결국 둘로 분열되었는데, 그 하나는 문학·학술 언어로서의 고전라틴어와, 민중의일상언어로서의 속(俗)라틴어 즉 속어(俗語)가 그것입니다.
르네상스기의 인문주의자들은 기존의 질서에 반발,라틴어 대신에 속어를 구사한 경우와, 고전라틴어를 수집 발굴하여 새로운 문화운동으로승화시키고자 하는 두 유파가 등장합니다. 단테의 신곡과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이고전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의 속어로 쓰여졌고, 페트라르카의 "아프리카"와"나의 비밀"은 라틴어로, 그의 만년에 단테의 신곡을 모방했다는 "승리"는이탈리아어로 각각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라틴어를 설명하는 것은르네상스의 본질이 고전(古典)의 부흥, 곧 라틴문학으로 회귀(回歸)를 담고 있고,라틴문학의 바탕을 이루는 자유스런 인간성의 발견을 휴머니즘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2) 휴머니즘(humanism)
휴머니즘이란 인문주의(人文主義)를 지칭하고 있으나,그 의미가 대단히 넓은 범위의 사상적·정신적 태도·세계관을 뜻하기 때문에 우리말에서굳이 공통된 의미를 찾아낸다면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이것은 스콜라학이 주류였던 신학중심의 학문체계에 반기를 들고 고대의학예를 부활시킴으로써 교회 권위 아래 질식되어 가는 자연스런 인간성을 회복하려고하였던 것이지요.
그리스·로마의 고전을 연구함으로써 인간다움을 높이고새 시대의 이상적 인간상을 실현하려는 새로운 이념이 등장한 것입니다. 휴머니즘의어원(語源)이 라틴어의 후마니오르(humanior)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적이라는 뜻인후마루스(humanus)의 비교급으로서 "보다 인간적인"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휴머니즘이라는 말이 생겼고,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라는 말도 같은 말이라고 하네요.
최초의 인문주의자라고 할 때, 페트라르카를 들고있습니다. 그는 매몰되어 있던 고대문학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고전부흥에 몰두하였는데,그가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의 아레초(Arezzo), 성장한 곳은 당시의 교황청이 옮겨간남부프랑스 아비뇽(Avignon), 대학은 역시 남부프랑스의 몽펠리에(Montpellier)와북부이탈리아의 볼로냐(Vologna), 대학에서는 법률을 공부했고, 아비뇽에서 교황청에서일을 했는데, 페트라르카(Petrarca, Francesco / 1304.7.20~1374.7.19)가 여기서시인으로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1327년 성키아라 교회에서 라우라(Laura:?∼1348)라는여성을 만나 연애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교황청의 방대한 장서를 탐독함으로써 교양을쌓았고, 30세를 넘길 무렵 그에게 예술적 성숙기가 찾아와 1337년 라틴어 서사시아프리카(Africa)의 집필을 시작했으나, 같은 해 로마의 여행에서 자극 받은 고대에대한 애착이 성숙해졌는데, 이는 현실 사회에 대한 혐오에서 이상으로 하는 고대의연구가 그것이었습니다. 1341년 로마교황청에서 계관시인(桂冠詩人)이 되었고, 1342년프로방스에서 그의 사생아가 태어나 주교(主敎)였던 그의 동생 게랄도의 개입으로그에게 정신적 위기를 맞아 고민을 고백한 라틴어 작품 "나의 비밀"(De
secreto conflictu curarum mearum)을 집필하였고, 1348년 파르마 체재 중 라우라의사망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속어였던 이탈리아어 작품을 경시했던 그를 불멸의시인으로 만든 것은, 1342년경부터 집필한 이탈리아어로 된 서정시 칸초니에레(Canzoniere)라고하는데, 지상의 것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생전과 사후의 라우라로 가득 채워진이 서정시집은 인간적인 것, 성스러운 것의 투쟁의 증거로서 남게 되어, 미녀 찬양과쪼아 다듬은 시풍은 소네트(14행 시)의 한 극치로서, 후년 페트라르카 시풍(petrarchismo)이란이름으로 서유럽 각국의 시인의 규범으로 숭앙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독일황제 칼 4세와는 18년간 관계를돈독히 했고, 프랑스 국왕과도 교류했으나, 그의 휴머니즘과 라틴어가 얼마만큼 작용했는가에대해서는 미지수로서 독일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고, 프랑스에는 고전의 어귀(語句)를서간이나 시(詩)에 삽입해서 즐긴 정도였다고 하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고합니다.
비인간성(야만)에 도전은 15세기 중엽, 자유로운 도시생활이 발달된 남부독일과 네덜란드에서 시작되는데, 남부독일은 이탈리아와 근접한거리에 있어서 일찍부터 그 인문주의자들의 내왕이 잦았고, 콘스탄즈나 바젤에서는공의회가 열리는 기회가 많았던 것도 이유중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독일 인문주의에문을 연 것은 후일 교황 피우스 2세가 된 에네아 실비오 픽콜로미나라는 긴 이름을가진 사람이었고, 그 뒤를 이어 페트루스 루데르는 하이델베르크 등의 여러 대학에처음으로 인문주의를 전파, 3위 1체 설을 비판하다가 위태로운 죄목으로 고발되기도했고,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늘 돈이 모자라 쩔쩔 맨 사람이기도 하였습니다.
오히려 알프스 이북에서는 라틴어 고전보다는 종교를비롯한 현실 개혁에 더욱 관심을 보였는데, 휴머니즘의 본산은 대학으로서, 대학에서는자유 7교과 중 3과에 해당하는 문법, 수사, 논리 중에서 수사와 문법은 당연히 라틴어고전 연구가 중심이 되었고, 대학 당국에서도 이를 묵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또 하나의 진풍경이 있었는데, 그것은 기사들의 토너먼트에 해당하는 토론(討論)으로서,승복(僧服)같은 검은 가운을 입고 모양이 이상한 모자를 쓴, 독토르(doctor)나 마기스테르(magister/master)들이 학생과 교수들 앞에서 이론으로 싸웠는데, 주제에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대립되어있던 명목론(nominalism)과 실제론,...참으로 실재하는 것은 개개의 물체일 뿐, 보편개념은 개개의 물체 뒤에 생긴 기호나 이름에 지나지 않다,...
이러한 것을 신(최대의 보편자)의 실제와 신앙의 문제를감싸고 박식한 독토르나 마기스테르들이 별별 인용이나 방증을 제시해 가며 토론했으나,말이 토론이지 전쟁과도 같아서 이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졌다는 것은 만사가끝이기 때문에, 때로는 얼굴을 벌겋게 달구어 가면서 논제에서 벗어나 말꼬리를 잡거나엉뚱한 것을 트집잡기도 해서 인문주의자들이 이들을 궤변학자라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15-16 세기가 되면 이베리아반도를 중심으로 절대왕정이시작되고, 나침반과 콤파스, 지구구체설과 원양항해, 화약과 총포, 금속활자와 인쇄업자등등의 등장으로 서유럽에서부터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었습니다. 인도항로의개척과 신대륙 발견, 그리고 세계일주라는 상상을 초월한 사실들이 현실로 나타났고,카톨릭에 대한 도전은 같은 카톨릭내부에서 일어나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서새로운 교파가 등장했으며, 지동설은 우주관을 근본부터 바꾸어야 했고, 이렇게 힘을축적한 유럽이 다시 예수의 복음과 대포를 앞세우고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이런 것과 얼마만큼의 연관이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이탈리아와멀리 떨어진 서유럽에서 시작되었다는 점과, 르네상스를 정점으로 이탈리아는 유럽의중심에서 사라지고, 마키아벨리즘은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19세기후반까지 분열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앞으로 따로 장을 만들어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인문주의에 대한 것만으로 하겠습니다.
(3) 휴머니즘의 한계
르네상스가 중세적 암흑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회복운동이라는이야기를 너무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양념처럼 따라 다니는 것이 교회를비롯한 현실에 대한 비판인데, 복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도 첫날 첫 번째 이야기부터간음(姦淫), 폭음(暴飮)과 포식(飽食), 탐욕(貪慾), 진에(瞋喪:화풀이), 살인, 비방,사기, 불경, 도둑, 도박 등 세상에서 못된 짓만 골라하는 사내가 등장하고,...운명의장난에 울고 웃는 사람들,... 4년 동안 9명의 사내에게 시달린 바빌로니아의 왕녀,...용감하고관대하며 덕망 높은 사람, 등을 등장시켜 개인의 욕망이나 이익을 위해서라면 신(神)이나국가를 이용하기도 하여, 속박이나 인습을 깨뜨리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작중 인물들을리얼하게 묘사하여 사람들을 감동시켰지만 막상 복카치오 자신은 데카메론을 펴내고얼마안가 심한 회의(懷疑)에 사로잡혀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20 여 년을 고전연구로보냈습니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시인이자 소설가인사케티(Sacchetti, Franco/1332?~1400)는 연애 시를 많이 썼고 300 이야기(Trecentonovelle)라고하는 콩트가 있는데, 그 중 223편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마리아와 요셉의 성화(聖畵)장면을 농담으로 주고받는 화가 조토의 이야기로부터프랑스의 어느 수도원 원장의 이중적인 생활, 피렌체 상인이 세금을 포탈하기 위해서벌이는 엄살 등 인간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각가지 모순을 재미있게 꾸미고 있지만그 자신은 독실한 카톨릭신자였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좀더 따라가 보면, 비용(Villion, Franco/1431~1463?)과첼리니(Cellini, Benvenuto/1500.11.1~1571.2.13)라는 두 사람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있습니다. 비용은 백년전쟁 말기 잔 다르크가 처형되던 해에 파리에서 출생하여 생브누아교회의 신부 기욤 드 비용에게 양육되어 그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파리대학학생으로 있던 1455년 타락한 신부 필리프 세르무아즈와 언쟁 끝에 그를 살해하고파리에서 도주, 그때부터 방랑생활을 하면서 살인과 도둑질로 여러 차례 감옥을 드나들면서계속 시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33세 이후에는 아주 행방이 묘연해지고,따라서 그후의 일은 알 수가 없지만 1563년 어느 싸움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상고(上告)하여 10년간 파리추방으로 감형되어 파리를 떠났는데, 이 무렵 썼다는그의 대작 유언시집(Le Testament)을 비롯한 작품 여럿이 전해져 프랑스 최대의 서정시인으로평가받고 있습니다..
첼리니(Cellini, Benvenuto/1500.11.1~1571.2.13)는미켈란젤로의 제자로서 피렌체에서 출생, 원래 버릇없이 자라난 금세공사이면서 조각가였습니다.그러나 그의 조각품이라는 것은 대개가 자질구레한 것들로 남녀의 해괴한 동작을다룬 것이 대부분이고, 이런 그의 예술품이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는 못했는데, 그가유명하게 된 것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과장해서 써놓은 그의 자서전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문제의 자서전은 첼리니가 죽은 후 150년이 지나괴테가 이를 보고 너무도 놀란 나머지 번역, 독일에 소개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막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첼리니 자신의 방약무인한 태도와 당시 사회의 무질서라고할 수 있습니다. 살인, 폭행, 간통 등으로 얼룩진 이른바 무법자(無法者)들의 세상,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그의 행동 중에는 싸움으로 고소 당해서피고인이 된 법정에서도 무장한 부하를 동원, 고소한 사람들을 법정에서 구타해서초 죽음을 만들고, 변호인을 칼로 찌르는가 하면 재판관을 칼로 위협해서 쫓아내기도하였으며, 살아 있는 인간을 그린다 하여 모델의 머리채를 잡아 끌기도 하고 죽이기도하였으며, 미끈한 육체에 매료되면 범(犯)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무법자에게 프랑수아 1세를 위시한권좌(權座)의 보호가 있었기에 더욱 악랄한 행동을 거침없이 했다고 하는데, 그가71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죽으면서, 지난날의 그의 행동을 반성하기는커녕 모든 것을정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죽어서는 천국에 간다고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이 시대의 "보다 인간적"인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앞에서 말한 비용이나이 첼리니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이것은 행위자체를 자신의 입장에서 정당화시키고, 신을 버려서가 아니라 신은 항상내 편에서 나를 옹호해 주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지요.
비용과 첼리니가 무법자들이기는 했어도 행동으로삶을 이어 갔다면 상대방의 약점을 잡아서 이를 폭로하거나 위협하여 거부가 된 아레티노(Aretino,Pietro/1492.4.20~1556.10.21)의 경우는 파렴치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6세기이탈리아에서는 상인, 군주, 귀족, 예술가, 휴머니스트 할 것 없이 그의 표적이되었다 하면 일단 정보를 수집하고, 약점될 만한 사실이 포착되면 자기의 이름이서명된 경고장(警告狀)을 정중히 보내면서 돈이건, 물건이건, 예술작품이건 그가원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비행과 욕지거리가섞인 문장을 만들어 시중에 배포(配布)시켰는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군대보다도더 무서운 것이 유언(流言)과 악담(惡談)이었고,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의 요구를들어주는 것이 최상의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많은 돈을 모은 그는 1527년이래베네치아에 정주하면서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많은 여자와 호위병에게 에워싸여 왕후못지 않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당하는 쪽의 치욕은 눈의 가시보다도 더 미운 것은사실이고, 그를 암살코자 여러 명의 자객을 보내기도 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무사하고 오히려 보내는 쪽에서 독살 당하거나 폐위되었는데, 그가 64세 때, 그의책략이 적중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좋아서 웃다가 의자에서 넘어져 뇌진탕으로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시인, 극작가, 풍자문학가 등으로 문명(文名)을 얻은것은 교황 레오 10세의 보호가 있었으며, 대표작으로 시대의 풍습을 특유의 감각으로대담하게 묘사한 서간집(Lettere familiari), 뛰어난 비극 작품 오라치아(Orazia)등을 남겨 놓았는데 오랫동안 음서(淫書)로 지목되어 금서(禁書)가 되었다가 최근에각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문예에 관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지만여기서 정치에 관련된 이야기로 이 시대를 풀어 보면 사보나롤라(Savonarola, Girolamo/ 1452.9.21 ~ 1498.5.23)라는 수도승 출신의 "무기 없는 예언자"가 나타나이 시대를 한 때 풍미(風靡)하였습니다. 그는 북 이탈리아의 페라라(Ferrara) 출생으로1475년 도미니크회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있다가 1491년 피렌체의 성 마르코 수도원장이되어, 교회혁신을 위한 설교와 예언자적 언사로써 신도들을 지도하여, 시민의 정신적지도자와 같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 때가 르네상스의 최고조의 시기로서 자의식 과잉으로신앙은 상대적으로 소흘 했고, 풍기는 극도로 문란해 있었습니다. 그가 이런 피렌체에대해서 경고하기 시작했는데 "회개하라 때가 가까웠다 큰 재난이 닥칠 것이다,..""하느님의 노여움은 땅속에서 불길이 솟아 피렌체가 활활 타버리는 심판의날을 목격했다"는 등의 극언(極言)을 서슴없이 열변을 토하자 그의 연설에 매료된많은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메디치가에서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고불초(不肖) 피에로 디 로렌초가 뒤를 잇자 이를 기회라고 생각한 프랑스 왕 샤를8세의 군대가 1494년 이탈리아에 원정, 삽시간에 나폴리까지 점령하자, 피에로는많은 배상금을 약속하고 굴욕적인 화의를 성립시켜 일단 위기를 모면했으나,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사보나롤라가 말한 신벌(神罰)로 받아들여졌으므로, 피에로가프랑스와 맺은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깨어지고, 반대파에 의해서 피에로는 추방되고,이에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중심으로 공화정을 부활시켰습니다.
이래서 피렌체에서는 사보나롤라에 의한 신정정치가4년간의 그 짧은 막을 올렸는데, 모든 것은 "신의 의사"에 의해서 행한다하여, 시민들에게는 금욕적, 도덕적 갱생을 부르짖고, 부패한 로마교회에 비난을퍼부어 개혁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 내부개혁에는 많은 사람이 동조하였으나,1497년의 사육제(謝肉祭)에서는 시민의 사치품과 이교도적 미술품 및 서적을 불태운이른바 "허영의 소각" (burning of the vanities)으로 절정에 도달하였는데,화장도구, 장식품, 옷, 서적, 예술품 등 가릴 것 없이 사치품이라고 인정되는 것은무조건 악마로 취급되어 광장의 불길이 되었는데, 그 중에는 비너스의 탄생, 봄 등의이교도적인 작품을 많이 그렸던 보티첼리 조차도 그의 작품을 악마의 화신이라 하여불 속에 던져버렸습니다. 이런 일을 맡은 것은 사보나롤라가 순수무구(純粹無垢)하다고본 10대의 소년단이었습니다.
이런 난국에서 사람들은 흥분도 잘하고 잊기도 잘하여,아무리 뛰어난 설교 술을 가졌다 해도 이런 것이 오래갈 수는 없었고, 사치와 향락에탐익(耽溺)된 시민들은 곧 싫증을 느꼈고, 이를 기회로 본 대 상인들은 세력만회를위해 이런 시민들과 제휴(提携), 사보나롤라의 공화정을 무너뜨리기 위한 책략을 동원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사보나롤라가 그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교황 알렉산드르 6세와의 불화, 교황의 지원을 받은종교적인 적수 프란체스코 수도승들과의 대립 등으로 지지 기반을 잃고 체포되어고문을 당하면서 유죄판결을 받아, 1498년 5월 22일 다른 2명의 도미니크회 성직자와함께 광장에 끌려 나와서 사지가 못에 박힌 체 불 속에 던지는 화형(火刑)에 처해졌습니다.이런 광경을 목도한 한 청년이 "정치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중얼거렸는데그가 군주론으로 유명한 마키아벨리 였습니다.
마키아벨리(Machiavelli, Niccolo/1469.5.3~1527.6.21)는피렌체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성장, 샤를 8세의프랑스군이 침입했을 때, 25세의 청년으로 북방의 새로운 세력을 두려움으로 목격했고,사보나롤라가 죽은 1498년 29세의 나이로 피렌체공화정의 서기로 일한 것이 14년간,공화정부에서 군사, 외교 문제까지 맡아보면서 제2서기관장직(書記官長職)에 까지올라 내정과 군사를 담당하였으며, 대사로도 활약하였습니다.
1512년 메디치가(家)가 피렌체로 복귀하게 되자, 한때음모의 죄명으로 체포된 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실의 속에서 독서와 저술활동에전념하여, 전술론(戰術論:Libro dell'arte della guerra) 군주론(君主論 : Il principe),로마사론(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렌체사(Istorie Florentine)가있으며, 또한 이탈리아 연극사상 획기적인 작품이라는 만드라골라(Mandragola)를쓰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군주론은 그의 대표작으로 마키아벨리즘이란용어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 책은 군주의 자세를 논하는 형태로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구별된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 프랑스 및 에스파냐 등 강대국과대항하여 강력한 군주 밑에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마키아벨리가 조국 이탈리아의 통일을 염원해서 쓴 이 책이 엉뚱하게도 독재자들의전범(典範)이 되었다는 사실은 마키아벨리의 생각이 어디에 있었던 간에 독재를 싫어한다수의 현대인들에게는 일고의 가치 없는 글 장난에 불과할 것입니다.
인간은 과연 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울 수 있는가?인간의 최대 장점(강점)인 사유(思惟)와 언어구사 능력은 반대로 최대의 단점(약점)이될 수도 있겠지요. 더구나 경험이 불가한 예측 불허의 미래와 죽음에 대해서 인간만이느낄 수 있는 공포는 인간을 더욱 초라하고 약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옥에떨어진다, 횡액(橫厄)을 당한다, 큰 벌(罰)을 받는다 는 등의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들었을 때 여기에서 초연(超然)해 질 수 있는 사람이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서 많지는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릇된 행동을 정당화하고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이 시대의 특이한 사조였던 것 같습니다.
휴머니즘을 이야기할 때마다, 리얼리즘과 개인주의자유분방, 영주와 교회의 속박에서 해방 등을 부르짖고 있으나, 이 시대의 작품이라는것이 건축과 조각, 회화는 교회 건물과 군주의 궁전 그리고 거기에 배치할 조각,장식용, 벽화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는 것은 이들 장인(匠人)들의 주 고객이 그들이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창작의 세계라는 것과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에 있었던 당시의 예술가들은하나의 직인(職人:기술자)으로 대접받는데 만족해야 했고, 이들 고객의 비위를 전적으로무시하고 간섭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위시해서 미켈란젤로,라파엘로 등의 작품세계의 소재가 대부분 종교적이라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고,이교적인 그림을 그렸던 보티첼리조차도 악마의 환상에 사로잡혀 스스로 허영의 소각에참여하여 자신의 작품을 불태웠다는 것도 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다만 회화를 비롯한 예술에서 인간의 육체를 리얼하게 표현했다던가, 그림에서 원근법의새로운 구사, 빛의 조절 등 신 기법의 개발 등은 큰 수확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휴머니스트 중에는 수도승이나 사제 출신이 많았다는것도 간과(看過)해서는 안될 것이며, 이런 휴머니즘이 오늘날에 와서도 인간이 스스로편리하게 만든 기계에 종속 당한다거나, 제도에 속박된다는 이론이 등장하기도 합니다.이래저래 말 많은 것이 인간사이고 보면, 유토피아는 영원히 유토피아일 때 진정한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4) 또 다른 휴머니스트
휴머니즘을 마무리하는 뜻에서 에라스무스(Erasmus,Desiderius / 1469.10.27 ~ 1536.7.12)와 로이힐린(Reuchlin, Johann / 1455.2.22~ 1522.6.6)을 뺄 수가 없어서 이들의 행적을 간단히 더듬어 보겠습니다. 에라스무스는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어머니는 의사의 딸, 아버지가 승려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사생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그의 어머니에 의해서 어려서는 상당히 유복하게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어머니가 페스트로 사망하고,부친이라는 사람 역시 원인 불명의 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그를 후견인이 수도원에 보냈고,20 살이 되어서 수도사로서의 서원(誓願)을 하고 1492년에는 시타인의 아우구스틴파의수도승이 되었습니다. 1493년 캄브레의 주교 가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에라스무스를라틴어 비서로 채용, 로마로 향했으나 도중에 주교의 여행이 취소되어 로마 행은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그는 주교를 요령 있게 설득하여 신학을 연구한다는 핑계로1495년부터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리대학이 스콜라학의 전당으로 에라스무스가들어간 몬테귀(Montaigu) 기숙사는 엄격한 종교적 훈육과 금욕적인 규칙으로 유명했고,음식조차 형편없었으므로 여러 가지 불만과 함께 가톨릭 교회 제도에 대하여 서서히비판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범생이 되기 위해서 라틴어 이야기는입밖에도 내지 않고, 가겡의 저서 여백에 자기 글을 올리는 기지를 발휘, 이른바문단에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건강문제로 주교에게 돌아갔다가 건강을 회복하고다시 파리로 나와, 주로 고전 라틴문예연구에 몰두하고, 생활을 위하여 영국 귀족의아들에게 라틴어의 개인교수를 하며, 1499년에는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T.모어, J.콜렛등의 인문학자와 알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파리로 돌아오자 그리스어 공부를 다시시작하면서 성서연구에 몰두하였고, 1506년에는 이탈리아의 각 도시를 역방(歷訪)하였으며,1509년에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여행하던 중에 착상하였고, 런던의 모어의 집에서단숨에 써낸 것이 유명한 우신예찬(愚神禮讚:Encomium Moriae(Laus Stultitae) 입니다(1511).
이어서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최초의 인쇄 교정본(校訂本)을간행하고, 히에로니무스 저작집을 간행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여 인문주의자로크게 추앙 받게 되고,...만년에 고국에 돌아가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는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서의 복음 정신으로의 복귀를 역설하였으므로제자들 중에서 많은 종교개혁자가 나왔는데, 1517년부터 M.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격화되자,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은 할지언정 이것에 반역하는 것은좋지 않다 하여, 여러 차례 루터로부터 유혹이 있었지만, 그와 행동을 같이하기를거부하였습니다.
로이힐린(Reuchlin, Johann)은 독일의 인문학자로서성서의 원전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라틴어는 물론 그리스어와 헤브라이어에 이르고,독일의 인문학을 헤브라이어 세계까지 넓히는데 공헌하였습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유학, 인문학의 새 정신을 터득하고 하이델베르크·슈투트가르트에서 교편을 잡고있었는데, 광란의 해라라고 일컫는 1509년 그의 나이 60세에 가까웠을 때 소위 로이힐린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유대인으로서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요한 프펩페르코른(JohannPfefferkorn)이라는 자가 광신적이었는지 쾰론의 도미니크파 수도원의 부추긴 때문인지는알 수 없었으나, 적극적으로 반(反) 유다 운동을 전개, 교회와 세속의 실력자들에게지지를 얻자, 마침내 황제 멕시밀리안 1세를 움직여 성서를 제외한 다른 모든 헤브라이어문헌을 몰수해서 없애버리라는 훈령을 받아내서 이를 실행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마인쯔 대사교가 이론을 제기했고, 이것을 대학을비롯한 학자들의 의견을 묻기로 했을 때 로이힐린은 여기에 강력히 반대, 특히 카발라와탈무드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이교에 대한 투쟁은 학문적 설득으로 행해야 하고,이 학문적 설득은 헤브라이어 문헌에 대한 철저한 연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에 쾰론의 도미니크파와 프펩페르코른이 격노한것은 당연합니다. 이에 프펩페르코른은 1511년 로이힐린을 반박하는 글을 써내고,로이힐린을 배교(背敎)자로 몰았습니다. 로이힐린도 반박하는 글을 써서 드디어는일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싸움이 독일인 학자를 격분시켜 어리석은 자의 편지라는풍자서(諷刺書)가 나오게 되었고, 결국은 로이힐린의 주장은 로마의 지지를 얻어승리하였습니다.
나. 고려 후기의 불교
르네상스라는 서구적인 이야기를 쓰다가 보니까 이시기의우리 나라 역사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가 됩니다. 머리를 식히는 의미에서 잠시고려 후기 사회를 조명해 보고, 서구에서 기독교가 세를 확장하고 여러 가지 공과를남겼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들어와 역시 공과를 남겼습니다.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라고 불리는4세기 후반, 고구려가 전진으로부터(372) 백제가 동진으로부터(384) 신라는 이 보다늦은 5세기경 고구려로부터 전래되었으나 국가적인 공인을 받지 못하다가 6세기 법흥왕때 공인(527)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불교는왕실불교 혹은 귀족불교의 성향이 강해서 일반에게 널리 분포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석가모니 입멸 후, 그 제자들에 의해서 경전의 수집과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이 초기의 경전은 석가모니의 직계제자들이 전승한 내용을 아함경이라고하며, 이 후 많은 부파가 발생하였고, 이를 집대성 해서 정리한 것이 삼장(대장경)으로서즉,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을 말합니다. 경장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율장은 교단의 계율 및 계율에 대한 해설, 논장은 經을 해석한 주석문헌(연구논문)으로,그 양이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후대로 내려 오면서 중심 교리를 어디에 두느냐에따라서 종파가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삼국시대의 한국불교는 고구려에서는 삼론종이라 하여,인도의 여러 부파 중 용수와 그 제자 제바에 의해서 성립된 諸法空無相과 八部中道의교리를 내 세운 것인데, 이것이 4세기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국가 쿠처(龜滋)에서구마라습 이라는 승려가 중국에 전했고, 이것이 다시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보고 있습니다.백제는 율종으로 율장을 종지(宗旨)로 세운 것인데 이는 석가모니 설법 중 제자가부정을 하였을 때 그 뿌리를 찾아 다스렸다는 데서 연유합니다.
불교가 민중의 신앙으로 자리잡은 것은 통일신라에이르러서 실현되었는데, 불교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것은 원효대사였다고 합니다.여기에서 여러 종파가 다시 나누어지고, 불국사와 석굴암이 조영되는 등 불교의 찬란한문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존의 불교에 대해서 새로운 불교가 도입되었는데이를 선종(禪宗)이라 하여 고행과 수양을 통해서 해탈의 경지를 터득하고자 했습니다.
교종이니 선종이니 하는 것은, 득도 해탈의 수양방법을경전에 두면 교종이라 할 수 있고, 여기에 비해서 선종은 석가모니가 영산 설법에서 꽃을들자 제자 가섭이 뜻을 알고 따랐다 하여, 말이나 글이 필요 없는 以心傳心 不立文子를근본으로 수양을 통한 구도의 길을 찾았는데, 수양의 방법으로 참선을 중요시하였습니다.선종은 중국의 6조시대 양 나라에 들어온 서역 승 달마가 숭산에 소림사를 짓고 9년간面壁坐禪한데서부터 시작되었고, 교종인 화엄종은 하나는 전부, 전부는 하나라는圓融 사상의 화엄경을 근간으로 하는 종파로서 당나라 때 성립되었고, 의상이 이를들여와 부석사를 중심으로 교세를 넓혔습니다. 정토종은 서방정토(극락)의 아미타불과미륵불,...
이래서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이라는 양대 세력으로갈라지고, 한국적인 토착신앙과 밀착되면서 이른바 호국과 기복을 근간으로 하는한국불교의 원형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신라 사직이 무너지고 고려가 성립했을때, 불교는 더욱 국가적인 보호와 장려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과거(科擧)에 승과를두어 교종과 선종의 승려를 뽑아 국사나 왕사 등의 직계를 주었고, 많은 토지와 노비를사원에 소속시켜 경제적인 자립도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위로는 왕자로부터 아래로는천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불문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 전기의 불교는 중국 수나라 때 법화경을전수하여 이룩된 천태종이 도입되어 고려 불교계를 풍미하였으며, 의천(대각국사)등의 고승을 배출하였고, 몽고의 침입 때는 불력(佛力)으로 이를 막고자 8만 대장경을조판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태종은 무신 난을 고비로 약화되고. 대신 조계종(曹溪宗)이등장하여 새로운 사상세계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조계종은 신라 때 도입된 선종 구산선문(九山禪門)의하나이며 도의국사(道義國師)가 개산(開山)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서 기원하여,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인 지눌(知訥)의 중천(重闡)을 거쳐, 보우국사(普愚國師)태고(太古)가 구산(九山)을 통합하여 조계종이라 공개적으로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창종(創宗)의 정신은 보조국사에 연유하는 선·교 일치(禪敎一致)에 두고 있습니다.그러나 교종보다는 선종에 무게가 더 실린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이 조선 세종 때불교 통합에 따라 조계종도 천태종, 총남종과 함께 선종으로 통합되고,...일제시대원종, 임제종으로 불리다가 1941년 조계종으로 고쳐 부르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불교의 융성은 그 폐단 또한 만만 치를않아, 과대한 사원과 사탑의 건립, 사원전의 확대는 국가재정을 압박할 정도였고,군거집단의 소굴화 역할까지 담당하여 본래의 기능에서 멀어져 가는 현상을 보였습니다.이에 신진사대부를 중심한 유학자들로부터 호된 비판과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이렇게해서 고려왕조의 멸망과 함께 옛 영화는 사라졌으나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불씨잡변을 지어 불교의 폐단을 조목조목 비판한 공신들의 억불 주장에도 불구하고,왕사 역을 담당한 무학(無學)대사를 크게 우대하였고, 내불당을 설치하고 월인천강지곡을편찬케 한 세종,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를 저술 간행하고 간경도감의 설치와 많은 불경의 간행, 원각사를 세우는등 불교에 열심히 귀의했던 세조 등 군왕 개인과 왕실 비빈(妃嬪)들의 숭불에 힘입어지금까지 융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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