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하나님 (룻 1:15-18)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혈연관계를 엄밀히 따지는 사회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친척을 부르는 명칭은 기껏해야 '아저씨, 아주머니, 사촌형제, 조카'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다 그저 '사돈(in-law)'이란 말만 뒤에 같다 붙이면 간단하게 다 통하게 되어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에 이르기까지 각각 그 명칭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친척관계를 엄밀히 세분한다면 그 관계란 것이 미국 사회보다 훨씬 더 가깝고 친밀한 것이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처럼 복잡한 명칭들은 그 관계에서 피차 '위아래'를 엄격하게 따지기 위한 목적으로 붙여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만 들 정도인 것입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관계는 아예 나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낙인이 찍혀 있다시피 한 경우도 있는데, 바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입니다.
이 관계가 우리나라의 전통 사회에서 얼마나 악명이 높았는지는 그에 관한 속담들만 보아서도 단박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축이 달걀 같다고 나무란다.'라는 정도는 약과에 불과하고, '며느리가 미우면 손자까지 밉다.'라는 말까지 있는 것을 보면 며느리를 보는 시어머니의 눈이 어떠했는지를 알만 합니다.
그러니 그런 시어머니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시집살이하는 며느리 쪽에서는 '시어미 미워서 개 옆구리 찬다.'라든지 '시어머니가 죽으면 안방이 내 차지.'라는 따위의 한 맺힌 속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 그랬을 리야 없겠고, 더욱이 요즘 시대에 들어와서는 친어머니와 친딸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하여튼 과거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그처럼 시어머니와 며느리란 아예 숙명적으로 나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고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나라의 옛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들었더라면 정말 기절초풍할만한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룻기 4장 15절 하반절에 기록된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베들레헴의 여인들이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을 가리켜 했던 말이었습니다.
아들 하나만 해도 자부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될 것인데, 룻은 '아들 일곱보다도 더 귀한 며느리'라는, 정말 말도 안 될 것 같은 말로써 칭찬을 듣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룻은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를 어떻게 모셨기에 그처럼 '아들보다 더 귀한 며느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또 나오미는 그녀의 며느리 룻을 어떻게 대했기에 그처럼 '아들이 해 주는 것보다 더 정성스러운 효도'를 받게 되었습니까?
오늘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이 시모 나오미와 자부 룻의 모습을 통하여 부모와 자녀 사이에 피차 어떻게 해야 진정 서로 '사랑하며 귀히 여기는' 혈연관계를 나눌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모는 자녀에게 '바른 신앙'을 유업으로 물려줌으로써 진정 공경 받는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바로 그런 부모였습니다.
본문 15절과 16절에 "15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16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룻은 원래 하나님을 모르던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엘리멜렉이라는 한 유다인이 그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함께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엘리멜렉은 죽고 그의 두 아들들은 모압 여인들을 각각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그들이 바로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압에 거한 지 10년 되던 즈음에 나오미는 그 두 아들들마저 객지에서 잃게 되었고 당장 생계를 꾸려 나가기가 막막해졌습니다.
그때 유다 지방의 흉년이 그치고 다시 양식이 풍족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 나오미는 이제 자기에게 유일한 혈연으로 남게 된 두 자부들과 함께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장 6절 이하 8절의 말씀에 보면, 나오미는 자기를 따라오는 두 자부들에게 각각 그들의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합니다.
그 주된 이유는, 이들이 유다 지방에서 살게 되면 현실적으로 재혼할 가능성이 거의 전무했으므로 그야말로 청상과부로 평생 지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의 남자들이 과부인데다가 이방 출신인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고 선뜻 나설 리가 만무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늙은 나오미 자신이 재혼해서 아들들을 낳아 소위 수혼법에 따라 그 자부들에게 새 남편으로 준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오미가 이 점을 자부들에게 상기시켜 주었을 때, 첫 자부 오르바는 바로 그런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했기 때문에 "그 시모에게 입 맞추어"(룻 1:14) 작별인사를 한 후에 돌아섰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사실은, 나오미로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부들의 신앙심을 확인해 보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6, 8, 9, 13, 21절 등에서 말마다 사건마다 '여호와'의 성호가 인용되고 있는 것은 나오미의 독실한 신앙을 잘 반영해 줍니다.
그런 나오미였으니 그녀는 원래 불신앙적인 출신배경을 가지고 있는 두 자부들이 만약 여호와 유일신앙을 똑바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함께 유다로 돌아가더라도 결국에는 더 큰 문제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먼저 돌아서서 떠나는 오르바를 보면서 나오미가 룻에게 말할 때에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라고 한 것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룻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자기 동서는 자기 백성들이 믿는 그 신에게로 돌아갈지라도 자신만은 "어머니의 백성을 나의 백성으로, 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삼겠다"고 오히려 더욱 굳게 각오하면서 서원했습니다.
이것은 말은 쉽게 들릴지 몰라도 실제로는 무척 어려운 결심이었습니다.
자신의 남은 평생을 통해 새 남편보다는 하나님만을 철저히 의지하고 살겠다는 생각은 유다 여인이라 해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하물며 모압 출신의 여인이 그런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거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룻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처럼 엄청난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전에 룻이 모압에 살고 있을 때에 그녀의 시모 나오미가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을 통해 많은 감동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국땅에서 남편을 잃고 두 아들까지 잃으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꿋꿋하게 사는 나오미의 모습을 보면서 룻은 '이런 시어머니께서 섬기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나도 그 하나님을 믿고 평생을 살겠다.'라는 생각을 벌써부터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룻은 그녀의 인생의 결정적인 갈림길에서 바로 그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 바로 그 때문에 나오미는 유다로 돌아온 이후에도 룻으로부터 계속 공경과 효도를 받는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자식에게 이것저것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만 잘 해 주면 나중에 그 자녀도 자기에게 잘 효도해서 갚아 줄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다가는 정말이지 큰코다치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부모가 아들딸인 자기에게만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원하는 대로, 좋아하는 대로 다 해 주면서 반면에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소홀히 하는 것을 보고 자란 자녀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바로 자기 부모가 자기에게 보여 준 것과 똑같이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키워 놓은 자녀들이 자라면 그들 역시 자기의 부모는 등 뒤로 제쳐놓고 그저 제 자식에게만 온갖 정성 다 기울이는 부전자전을 고스란히 반복할 뿐인 것입니다.
평생토록 아들딸들로부터 진정 공경 받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그 자녀들을 '여호와를 경외할 줄 아는 신전인격자'로 키워야만 합니다.
자녀로부터 특히 노후에 제대로 된 효도를 받고 싶다면 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유업'을 똑바로 전수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자기 자식을 일단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앙인'으로만 만들어 놓으면 그들은 틀림없이 그 하나님께서 명하신 제5계명을 반드시 지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은퇴한 후에 내 아들이 날 어떻게 모셔 줄까?'를 염려하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란 부모로서는 정말 부끄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딸이 내가 죽기 전에 이 소원은 꼭 한 번 누리게 해 주어야 할 텐데.'라고 은근히 눈치를 보내는 부모가 자녀로부터 어떻게 진정한 공경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천당소망을 굳게 붙잡음으로써 늘 기쁨과 감사만 넘치는 '백발의 면류관'을 쓰고 살아가는 부모는 그 자녀로 하여금 절로 '그 센 머리 앞에 일어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남겨 줄 최고의 유업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밖에 없다.'라는 말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랑스럽게 남길 수 있는 부모가 됨으로써 실로 자녀로부터 진실한 공경, 정성의 효도를 평생토록 받아 누리는 어버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녀는 부모에게 '육신적 봉양'을 정성껏 해 드림으로써 본인 역시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룻이 바로 그런 자부였습니다.
17절과 18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고 했습니다.
앞의 16절 중간을 다시 보시면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라고 했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어머니와 평생토록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즉 룻의 효성은 '어머니의 하나님'을 함께 믿고 섬기는 영적 효성에서만 끝나지 않고, 늙은 나오미를 직접 곁에 모시면서 봉양하는 육신적 효성에까지 이르렀던 것이었습니다.
이 결심 또한 희생의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룻으로서는 자신에게 육신적으로 유리한 것들은 다 포기하고 반면에 불리한 것들만 모두 다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평생 모시고 살자면 우선 자신의 남은 인생을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이라는 차별대우를 받으며 살 각오부터 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말은 잘 통하고 아르바이트 일자리라도 구할 가능성이 있고 비록 과부이지만 친정집도 가까이 있고 친구들도 만날 수 있는 고향 모압을 완전히 포기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시모를 모시고 살면, 그러지 않아도 재혼하기 어려운 이국땅에서 자기와 결혼해 주겠다는 남자를 찾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가 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시모를 봉양한다는 것은 당장 현실적으로 두 배의 경제적 짐을 지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유다 베들레헴으로 간다고 해서 나오미에게 무슨 숨겨 둔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물론 룻에게 약속된 어떤 취직자리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미 늙어서 전혀 일을 할 수 없는 시모를 모시고 살 때 그 생활고가 어떠할지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계산을 결코 못했을 리 없는 룻이었건만, 그녀는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그 어머니를 끝까지 모시며 봉양하겠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까지 부르면서 굳게 다짐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보면, 룻의 이런 결심이 정말 진실했으며 당장 실행에 옮겨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나오미에게 말하기를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룻 2:2)라고 했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남의 밭에서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율법에 정해진 권리였지만, 룻은 그것을 도리어 남에게 은혜를 입는 고마운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기특한 일을 하러 가면서도 시모에게 "제가 밭에 나가도 좋겠습니까?
" 하고 공손히 허락까지 구했습니다.
그후 그녀는 하루 종일 이삭을 주워서 "한 에바"(룻 2:17)나 모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약 11kg 정도 되는 분량인데, 이삭을 하나하나 주워서 그만한 양이 되었다는 것은 그녀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룻은 그 어렵게 얻은 것을 그날 저녁에 나오미 앞에 그대로 보여 드림으로써 자기 시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3장 11절에 보면 룻은 곧 베들레헴에서 "현숙한 여자"로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하지 않았겠습니까?
시모 앞에서 말 한마디부터 그처럼 공손하고 겸손하며, 어찌하든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종일 힘겨운 노동을 하고서도 그 얻은 모든 것을 다 갖다 드리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일들을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그 모습을 베들레헴 사람들이 보게 되었을 때, 비록 이방 여인이기는 했지만 실로 '현숙한 여인'이라고, 당시로서는 한 여인에게 붙일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 주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소문이 이미 보아스에게까지 전해졌으며, 룻은 끝내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재혼의 가망성이라고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던 이방 출신 여인인 룻이 오히려 베들레헴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 그 성읍에서 신랑감 후보 영순위에 해당되었던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기적적인 축복이 이루어지게 된 원인은 단 한 가지, 바로 룻의 효성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직전의 자리에서까지도 당신의 육신적 어머니인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지금 온 세상 사람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시는 그 엄청난 대속 사역을 하시는 중에도 어머니 마리아를 생각하며 그녀의 여생을 자기 대신 돌보아 줄 사람을 찾아 당부하셨던 것은 정말 그 얼마나 효성스러운 아들의 자세이겠습니까?
이처럼 부모에 대한 효도는 결코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봉양이 따라야만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식이 효자'라는 말은 참말입니다.
부모를 자기 집에 함께 모시고 살 수 있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효도 기회인 줄로 알고 정말 감사히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병이 있으시거나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부모님을 요양원이나 양로원에 모시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얼마 전에 어떤 아들이 연로하셔서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끝까지 집에서 모시려 하다가 본인마저 우울증에 걸려서 끝내 자살해 버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부모는 반드시 집에서 모셔야 한다.'라고만 생각하는 전통적 사고방식이 그런 안타까운 비극을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당연히 자식보다 현실적으로 훨씬 더 잘 캐어(care)를 해 줄 수 있는 전문기관에 부모님을 모시고 그 대신에 자주 찾아뵙는 것이 최선의 효도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자식은 부모를 물질적으로도 힘껏 봉양해야 합니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의 마음이 가는 곳에는 물질도 함께 가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룻이 '보리 한 되'를 가지고도 어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꼭 부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며 또한 반드시 해야 마땅한 효도입니다.
다른 형제가 모시고 있으니 자기는 편하게 되었다고 모른 척하고 지낸다든지, '우리 부모님은 매달 나오는 연금이 있으니 그것만 가지고도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겠지.'라고만 계산하고 앉아 있는 자녀는 변명이 필요 없는 불효자식일 뿐입니다.
생전에 부모님에게 틈틈이 용돈을 드려 기쁘시게 해 드리지는 않고 있다가 장례식 때에 가서야 그 관 위에다 '저승 갈 여비'라고 올려놓고, 살아 계실 때에 한 번이라도 더 찾아가 뵙지 않고 있다가 부모 사후에 가서야 온갖 기일을 지킨다고 하면서 제사상을 요란하게 차려 놓는 것은 실로 '무지한 미신'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악하기 짝이 없는 불효막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런 정성어린 효도는 그 자녀 본인에게도 결국 축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제5계명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것은 '효도를 받게 된 부모'가 누리는 복이 아니라 바로 '효도를 한 자녀'에게 약속된 축복인 것입니다.
실로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고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거기에 나도 장사되겠습니다.
'라고 한 룻처럼 항상 '이것이 마지막 효도의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자세로써 어찌하든지 부모님께서 살아 계시는 오늘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양을 해 드리는 '현숙한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문자 그대로 빈털터리였던 시모와 자부였습니다.
남아 있는 아무 재산도, 도와줄 어떤 사람도 전혀 없이 그저 몸만 남은 두 여인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아무 희망이 없던, 그래서 '나오미' 즉 '즐거움'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조차 오히려 괴로울 수밖에 없었던 시어머니와 그녀의 며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오미가 정말 큰 즐거움, 자기 "생명의 회복자이며 노년의 봉양자"가 될 오벳이라는 손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나오미는 결국 다윗 왕의 선조까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자녀에게 하나님 경외의 신앙을 유업으로 물려주는 것, 오직 이것 하나만 가지고 나오미는 자신의 노년에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방 출신이며 과부였던 룻이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되었습니다.
재혼은 꿈도 못 꾸고 있던 그녀가 베들레헴의 최고 신랑감을 남편으로 얻게 되었고 끝내 메시아의 족보에까지 자기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부모에 대한 효성, 오직 이것 하나만 가지고 인생의 전부를 얻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약속 있는 계명'은 이처럼 엄청난 축복을 나오미와 룻, 이 고부에게 동시에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면서도 그들에게 바른 신앙의 유업을 남겨 주지 못하는 못난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땅에서 잘 되기'를 바라면서도 그 축복이 보장되어 있는 제5계명을 지키려 하지는 않고 그저 부모가 남길 유산에만 눈독을 들이는 최악의 불효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자녀에게 최고의 유산으로 물려주는 부모, 그렇게 영적으로 받은 것에 감사하며 육신적으로 부모를 봉양할 줄 아는 자녀 ? 바로 이런 부모의 사랑을 받는 자녀, 이런 자녀의 축복을 누리는 부모가 됨으로써 세상에서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저 천당에서도 영원히 함께 사는 영생 권속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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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