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2장 14-18절 인정받는 일꾼
딤후 2:14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딤후 2: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딤후 2: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제1장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교인 수 1만 명의 미국 대형교회 목사가 노숙인이 된 이야기가 페이스 북 등 인터넷 사이트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스타펙 목사는 어느 주일 오전 자신이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는 한 교회 근처에서 노숙자로 변신해 주변을 어슬렁거렸습니다.
하지만 교인 중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걸어온 사람은 불과 세 명에 불과했습니다. 스타펙 목사는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에게 ‘음식을 사려고 하니 잔돈 좀 달라’고 했지만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에 들어간 스타펙 목사는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예배 위원들의 저지를 받고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맨 뒷자리에 겨우 착석하게 되었습니다.
부목사의 인도로 예배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담임목사의 부재를 눈치 채지 못한 부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새로운 담임목사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때 맨 뒷자리에 스타펙 목사는 노숙인 차림 그대로 강단에 올라갔고 교인들은 경악스러워했습니다.
그는 곧장 마태복음 25장31절부터 40절까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마 25: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마 25: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과 염소’의 비유로 누가 양과 염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스타펙 목사가 말씀을 마치자 회중은 무엇인가 심하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인들 중에 흐느껴 울면서 회개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떨구는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스타펙 목사는 이날 오전 자신이 겪었던 것을 말하면서 “오늘 아침 교인들이 모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진짜 그리스도인은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까?”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이 믿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이웃과 함께 그리고 옆에서 사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페이스북과 각종 블로그를 달구며 빠른 속도로 공유되었습니다. 수많은 댓글도 남겼습니다. “정말 실화인가?”, “눈물샘을 자극한다.”, “화가 나고 부끄럽다.”, “그리스도인을 각성하게 한다.” 등 반응이 쇄도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몇 개의 스토리가 짜깁기된 즉 만들어진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서 이와 똑같은 상황이 우리교회에 벌어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미국의 교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사랑한다고 항상 고백합니다. 그러나 목숨 걸고 사랑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망설이게 됩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이 누구입니까?
자기 행위를 드러내고자 일하는 일군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참된 일꾼입니다. 지나간 자리에 칭찬이 머무른다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일꾼인 것입니다. 바른 신앙의 모습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됨에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제2장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은 진리를 옳게 분별해야 합니다.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옳게 분변하며’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오르도토문타’입니다. 그 뜻은 ‘곧은’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와 ‘절단하다.’라는 동사가 합쳐진 말입니다. 석공이 대리석을 바르게 자르듯, 농부가 쟁기로 밭을 곧게 갈 듯, 경주자가 운동장을 규칙대로 달리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빗나가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삶에 적용하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제 논에 물대기’란 뜻입니다. 옛날 논농사를 질 때 자기 논에 이롭도록 물을 댄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자기에게 이롭게 되도록 멋대로 언행을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뜻대로 맞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도록 나의 뜻을 고쳐야 합니다. 내 입맛에 맞는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나를 책망하는 말씀도 “아멘”하고 달게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작곡가 헨델이 가발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시에 가발은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난처해진 헨델에게 한 아가씨가 가발을 찾아다 주었습니다. 근처 이발소에서 일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헨델은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헨델은 그녀에게 자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친필 악보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내심 그녀와 결혼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이 그 이발소에 들렸습니다.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동료 이발사에게 “머리맡에 있는 악보 몇 장만 주세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소를 빠져 나와 다시는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헨델이 준 ‘메시야’의 악보가 얼마나 가치 있는 물건인지 몰랐습니다. 악보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지만 모두가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은 성령께서 조명해야만 그 의미를 바로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한 권의 책으로 보일 뿐 살아있는 말씀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그 진리에 말씀에 언제나 자신을 비추어 보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3장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기에 힘써야 합니다.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일꾼의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이라는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힘쓰지 않는 사람이 일꾼이 된다면 바리새인처럼 되고 맙니다. 말은 많이 하고 손끝하나 까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은 버리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신행일치(信行一致)가 안 되는 일꾼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자의 삶은 실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헨리 벤 다이크라는 사람이 『네 번째 동방박사』란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동방박사는 세 사람입니다. 하지만 헨리 벤 다이크에 의하면, 알타반이라는 한 명의 동방박사가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다른 동방박사들과 마찬가지로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세 가지 보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준비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급한 알타반은 망설이다가 그를 돕기로 하고 박사일행을 먼저 보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낙타에 싣고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 세 가지 예물 중 루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곳에 갔지만 세 박사들은 떠났고 아기 예수도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가신 후였습니다. 허탈해 하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롯 왕이 사내아기를 죽이기 위해서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알타반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 병사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이제 알타반은 예물이 진주만 남았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찾아 애굽으로 갔으나 찾지 못하고 33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마침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놀라며 골고다로 뛰어갔습니다.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 진주를 주고서라도 구해야지”라며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노예로 팔려가는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은 그는 예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 진주마저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무런 예물도 없게 되었습니다.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졌고 무너져 내린 기왓장이 알타반을 덮쳤습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하나님, 죄송합니다. 메시아를 만나 경배하려고 찾아 다녔지만 그분을 만나지 못한 채 죽게 되었습니다. 경배하려 준비한 보석마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알타반! 너는 훌륭한 나의 일꾼이다.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네가 만난 불쌍한 사람들이 바로 나였었느니라.” 알타반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알타반은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은 곧 내 형제와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딤후4:6) 관제는 포도주를 붓는 제사를 뜻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 풍조나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최고의 삶을 드리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4장 성도는 경건에 힘써야 합니다.
딤후 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대단히 소중합니다.
딤전 4: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삶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기도로, 말씀으로, 연습으로 경건에 이르러야 합니다. 경건에 나아가기를 힘쓸 때 비로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될 것입니다.
윌리엄 텔에 대한 일화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총독 게슬러가 스위스를 통치할 때 시내 한 가운데 장대를 세우고 모자를 그 위에 걸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윌리엄 텔이 아들과 함께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게슬러의 부하들은 윌리엄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은 모자에 절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게슬러의 부하들은 그를 체포했습니다. 게슬러는 윌리엄에게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로 쏘라고 명령합니다. 윌리엄 텔은 화살 통에서 두 개의 화살을 뽑아 하나는 품에 넣고, 하나는 활시위에 얹고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향하여 당겼습니다. 화살은 정확하게 사과에 꽂혔습니다. 게슬러는 윌리엄에게 “왜 그대는 두 개의 화살을 뽑았는가?”라고 묻자, 윌리엄 텔은 “만약 내가 실수로 사과를 맞추지 못하여 아들이 다치게 되면 나머지 화살로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놀란 게슬러가 “당신은 내가 무섭지 않은가?” 물었습니다. 그때 윌리엄은 말합니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후 지금까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경건이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경외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이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고국 선교 단체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당신을 도울 선교사를 보낼 예정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는 쉬운 길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이 회신을 보냈습니다. “쉬운 길로 오려는 선교사를 파송하려면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은 길이 없어도 기꺼이 오려는 사람입니다.” 쉬운 길을 찾아 알려 주면 쉽게 올뿐만 아니라, 조금 힘들고 어려우면 그 길로 쉽게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그런 일꾼은 필요 없다는 강한 의미입니다. 혹 우리들 역시 신앙생활을 쉽게 하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쉬운 방법으로 직분을 감당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5장 그리스도의 인정받는 일꾼은 제자로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딤후 2: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카일 아이들먼은 『펜인가, 제자인가』란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하는 사람은 널려있지만 예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돌아보고 나서도 자신 있게 제자라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제자가 아니라면 펜(fan)이라고 말합니다.
펜은 맨몸에 페인트칠을 하고서 축구장에 가는 사람입니다. 펜은 관람석에 앉아 팀을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입니다. 펜은 선수가 사인한 운동 셔츠를 벽에 걸어 두고 자동차 뒤에 갖가지 스티커를 붙입니다. 하지만 정작 경기에 나서지 않습니다. 경기장에서 땀을 흘리지 않습니다. 선수들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고 최근 기록을 줄줄이 꿰고 있지만 선수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합니다. 고함을 지르며 응원은 하지만 경기를 위해 희생을 하지는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그런 우리의 신앙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제자가 아닌 펜의 신앙은 값 지불을 하지 않으려는 반쪽짜리 믿음,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 아는 사람, 예수님을 그저 여러 애인 중에 하나로 여기는 사람, 예수님을 가슴과 마음이 아닌 교양과 형식으로 만난 사람, 그러면서도 예수님 말이 나오면 눈물 펑펑 흘리며 최고의 신앙인인양 포장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정받는 일꾼들이 되셔서 진리를 분별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며, 경건에 이르러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