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포트 [Pol Pot, 1925.5.19~1998.4.15]
캄보디아의 정치가. 콤퐁 톰 출생.
프놈펜기술학교를 졸업하고 1949∼1953년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후 지방에서 반정부투쟁에 가담하였다. 1960년 공산당창당대회에서 중앙상임위원에 선출되고 1963년 제2차 당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었다.
1970년 5월 민족해방군 최고사령부 부의장 겸 작전부장이 되었으며 1975년 6월 중국을 방문한 뒤 1976년 1월 제4차 당대회에서 서기로 재선되었다. 그해 4월 중국의 지원을 받아 민주캄보디아의 총리가 되었으나, 1979년 친(親)베트남군에 의한 프놈펜 함락 후 해임되고 게릴라군 최고위원회 의장 겸 총사령관을 지내다가 1985년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유명한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하다.
※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사건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15㎞ 쯤 달리면 지난 75년 캄보디아가 공산화되면서 자행되었던 참혹한 학살의 현장 중아이 처형장과 만나게 됩니다. 캄보디아 당국은 이 곳에 당시의 희생자 유골을 안치한 위령탑을 세워 킬링필드의 현장으로 소개하고 있더군요. 하지만 살륙의 현장은 그 곳만이 아닙니다. 캄보디아 전역이 킬링필드로 2백만여 명이 처형되었지만 한 장소에서 가장 많은 인명이 잔혹하게 살륙당한 이곳에 상징성을 부여한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그건 외국인 관광객을 겨냥해 학살의 현장을 상품화한 것이 아닌가 하여 씁쓸했습니다. 살륙의 현장이 관광상품으로 이 빈곤한 나라에 달러수입원 노릇을 해주고 있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려드리기 위해 시계바늘을 1975년 4월17일로 되돌려 봅니다. 이날 아침, 프놈펜 시민들은 평화가 왔다!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5년 동안의 내란 끝에 론놀 정부가 무너지고, 크메르 루즈군이 수도 프놈펜에 진격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시민들은 꼭 크메르 루즈군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능하고 부패한 론놀 정권이 무너졌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 내전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환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환호는 순간으로 끝나버렸습니다. 크메르 루즈군 입성과 함께 이내 학살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론놀 정부군 병사 출신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불구자가 된 사람으로 짐작되는 사람이 크메르 루즈 병사들에게 발견된 현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관공서에서 공무원과 군인 10여명이 걸어나오자 밖에서 대기하던 공산군 병사들은 한마디 경고나 말도 없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순식간에 이들을 몰살시켰습니다. 크메르 루즈군 병사들의 비위를 상하게 한 사람이 칼에 난자당해 숨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환호하던 시민들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시민들은 개개 병사들의 이성을 잃은 행위로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님이 밝혀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요. 병사들은 모든 시민들, 심지어 두 다리를 절단당한 채 진료소에 누워있는 환자들에게까지 모두 나가라고 소리쳤습니다. 이유는 간단명료했습니다. 돈과 장사가 있는 도시는 악의 소굴이며, 먹으려면 들에 나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은 무조건 '반동'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어서 남녀노소 없이 줄줄이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계속 걸어야 했습니다. 군인들이 뒤에서 따라왔습니다. 가다가 방향을 잘못 잡은 사람들에게는 기관총탄 세례가 퍼부어졌습니다. 군인들은 아기를 낳는 여인에게게도 총질을 했습니다. 가족을 찾으려 다른 방향으로 가던 사람이 가족을 찾으로 가는 길이요 하며 소리쳤지만 돌아온 것은 총알 세레였습니다. 해방됐다며 환호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렇게 죽어갔지요. 프놈펜은 시체로 뒤덮인 죽음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크메르 루즈는 모든 책이란 책은 다 불살랐습니다. 대학과 도서관도 불태워졌습니다. '지식분자'는 물론 그렇게 보이는 사람까지 무조건 처형대상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른바 '먹물' 맛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신분을 속이려 했겠지요.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안경 쓴 사람, 피부가 고운 사람들이 색출되었습니다.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면 크메르 루즈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크메르 루즈는 프놈펜에 이어 다른 중소 도시도 소개시켰습니다. 그들은 도시문명 자체를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캄보디아 전체가 갑자기 원시상태로 되돌아갔지요.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폴 포트는 중국을 방문, 모택동을 만났을 때 공산화된 중국이 왜 아직 지상낙원이 되지 않았느냐며 자신은 캄보디아(당시는 크메르)를 해방시켜 지상낙원으로 만들겠다고 장담했다고 하더군요. 그가 말한 지상낙원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명 자체를 파괴하려 했던 것으로 보아 원시상태로 되돌아가는 게 아니었나 짐작되기도 합니다. 대학 교수는 물론 중고등학교 교사, 의사, 엔지니어 등 사회의 유지 발전에 꼭 필요한 지식인들을 모조리 처형시키려 했던 것은 문명 자체를 사악시했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요?
여기서 잠깐 폴 포트에 관해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폴 포트 정권의 '폴 포트'가 사람의 이름인 걸로 알고 계실 겁니다. 저도 이제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번 캄보디아 방문에서 알았습니다.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는 살로트 사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살로트 사르는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美 정보기관들은 그에 관해 보고서를 쓸 때 이름을 알지 못해 '폴리티컬 포텐셜(political potential)'을 줄여 폴 포트(pol pot)라 썼는데 그것이 그대로 그의 이름으로 굳혀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크메르 루즈 정권' 또는 '살로트 정권'이라 하지 않고 '폴 포트 정권'이라 했던 것이지요.
다시 학살의 현장으로 갑니다. 현장에서 일행 중 한 분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이런 엄청난 화를 불렀다고요.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자체가 문제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건 따지고 보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수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지요.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도그마化'한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목적'이어야 할 인간이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킬링필드의 악몽도 목적과 수단이 전치된 데서 빚어진 참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