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왔다.
어제 저녁 늦게 대전에 사는 지인이 의정부로 가는 길에
가져온 배추를 다듬는 아내 옆에서 심부름을 하느라 바빴다.
소금을 꺼내오고. 양은 그릇을 씻고 ...
온 여름 내내 기른 채소를 아까워 하지않고 한 다발을 주고간
그 사람의 마음이 감사하기가 이를데가 없다.
그 덕분에 오늘 종일 그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칼로 자르고 하는 일을 거들다보니 하루가
어느결에 지나갔는지
눈을 감고 돌아다녀도 익숙한 방안에 오래 전부터 놓여 있던
저울을 맨발로 그만 걷어차버렸다.
분주히 오락가락하다가 늘 다니던 방문 앞에 놓여있던 그 저울을
맨발로 걷어 차는 통에 이직도 발가락이 얼얼한데..
내일 경주시 건천읍 용명리 深伏谷에 있는
11 대조 할아버지이신 繼 字 明字 할아버지의 연시제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에 내려왔다.
대구에 살고 있는 동생집에 여장을 풀어놓고
10시가 지난 야심한 시각에 동생과 같이 들안 길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이경채 국밥집>으로 가서 놋식기에 쩔쩔끓는 국밥으로 한기를 달래면서
오랫만에 내려온 고향의 정취를 아이 환갑이 다된 동생과 만끽하고
다시 귀환하면서 운동 삼아 40여분동안대구를 동서로 관통한다는
그 큰 길을 가로질러서 대구 시내를 활보 했다.
어제부터 방콕으로 인한 운동 부족 량을 보충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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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연시제를 지낸 그 11대조 이신 繼 字明字 할아버지는
1589년 에 12대 조이신 奉자 天자 할아버지의 3째 아들로 태어나셨다 .
12대조이신 최봉천 할어버지께서는 1564년 생이시며 1588년(24세) 년 선조 무자년에 무과에 급제 하셨으며
임진난이 일어나던 1592년에는 29세이셨다. 제종자 최진립(震立-12대 만석,10대 진사를 했다고 하는
경주최씨명가의 시작을 한 할아버지임) 과 함께 언양, 울산 등지에서의 전공을 인정 받아서 경상 우후로 제수 되셨다고 한다.
임진난 원종 공신에 녹신이 되었는데 정유재란 때에는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영천지역에 왜군이 침입하자
의병을 일으키고 집안에 있는 가병들 수십명을 거느리고 영천 창암전투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셨는데
그 공으로 절충장군과 병조 참판으로 추증이 되시어 오늘날 경주 최씨의 참판공파 파조가 되시기도 하다.
최 봉천 ( 참판공 ) 할아버지는 임진난이 발발하던 당시에
왜군이 경주까지 침공을 하 였는데 일본 놈들이 쳐들어온 경주 일대에는 그 악랄한 놈들의 토색질이 극심하여
이나라 이강산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니 ...무능한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도 정치지도자들의 한심한 작태는 어찌 할꼬
계자 명자 할어버지의 묘소 옆에는
또 하나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묘가 하나 있다.
바로 < 웅천 할머니>의 묘이다.
임난당시 경주 일대에서 극심했던 왜놈들이 토색질을 피하여
어린 주인댁 아이(繼 明)를 등에 업고 현곡으로가서 굼산을 넘어
용명리 탑골동으로 피신을 하였다고한다. 그곳에서 어린 아이였던 할아버지를 키워 장가를 들게하여
오늘날의 우리 경주최씨의 탑골문중의 파조이신 <계자명자>의 후손이 있게 하신
그충성스러운 할머니 웅천 할매 묘소에 참배를 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현곡에서 구미산을 넘어 지금의 탑골에 정착하여
오늘날의 우리 <탑골 최가 >문중이 시작될 수 있게하신 그 웅천할매의 은공을 잊지않고
벌초를 할 때나 묘사를 지낼때나 우리 후손들이 할아버지와 꼭같이 섬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기에.. 이번에 처음온 젊은 이들에게 내가 어릴적에들었던 50년도 더되는 옛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들 역시 나처럼 50년쯤 세월이 흐른뒤에 누구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들려주겠지..
< 虞侯公 耘庵 敬慕詩>
1.2.대장부는 의를 중히 여기는데
삼십여세에 전장에서 죽었구나
지략은 손자,오기를 겸했고
명성은 장순 ㅓ원에 동참했네
약관에 대의를 알아서
임진년에 큰 공을 세웠다.
의 열의 기상은 산하에 남아있고
영특한 풍모는 우주에 전하는구나
천문은 바다처럼 깊으니
지사의 눈물은 샘처럼 솟는다
백세뒤의 후손들의 회한은
어진 조상의 문적이 모두 없어진 뒤일세
.
2.
대장부는 의를 중히 여기는데
삼십여세에 전장에서 죽었구나
지략은 손자 ,오기를 겸했고
명성은 장순, 허원에 동참했네
남은 후손들 고택을 보며 슬퍼하고
뜻있는 선비는 그 영혼을 위로하는구나
드높구나 창암의 들녘아래
수 많은 사람들 공의 정충 외는구나
* 12대조 운암공의 충절을 기린 후인들의 경모시
(많은 것 중에 두개만 골라보았음.)
첫댓글 금봉님께서는 복 받은 분이십니다 훌륭한 선조들이 계셨기에 자손대대로 자손들도 대단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저희 가문에도 외적을 물리쳤다는 진주3장사로 불리웠다는 충의공 최경회님이 제 6대 조부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연시제를 잘 모시고 와서 일상의 생활도 경건함이 느껴지시겠네요
한주 즐겁게 열어 가세요~~~~~~^^
미소가 아름다운 분의 관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 장순, 허원:장순은 중국 당나라 때의 사람이다. 현종 때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허원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수양성을 지켰다. 수양성이 포위된 후 수개월이 지나 양식이 떨어져 참새, 쥐등을 먹고 견디는 상황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먹을 음식이 없어 병사들이 인육을 먹는 극한의 사태까지 발생하였다고 한다. 안록산이 제호를 칭한지 2년에 그의 아들 경서가 휴양성을 포위하였다. 수양성은 함락되고 장순은 허원과 더불어 붙잡혔다. 위키백과
출생: 서기 709년
사망: 서기 757년 11월 24
* 손자,오기: 손자는 제나라 사람으로서 병법13편을 지었고 오왕 합려를 도와 천하에 병법을 알린 사람이고
오기는 위나라 사람증자에게서 배웠다. 대신이나 재상이되기전에는 돌아오지않겠다고 어머니와ㅏ 헤어지면서 맹서를 했다고 한다. 오기는 장수가되어서도 가장 낮은 병사들과 동고 동락을 했다는 사람으로 유명하지만 잔인하다고 하여 존경은 별로 받지 못했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