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일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매당태태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갔다. 자천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
"훗! 할멈, 내일 먹을 대추씨라도 생각하시나? 어서 가지."
"그, 그렇게 합지요!"
매당태태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면서도 어벙벙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흠! 점점 더 복잡해진다. 왜 이렇게 뭐가 어렵지? 분명 아까 초혼무와 심령료술(心靈療術)을 볼 때는 일대 종사와도 같은 거인의 기품이 풍겼다. 헌데 이번에는 또 피를 머금은 한 마리 이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 할멈이 너무 늙어서인가?'
검은 짐승처럼 밤비를 맞으며 음산하게 웅크린 무랑루주 앞에 매당태태와 자천릉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매당태태가 조심스럽게 보고를 올렸다.
"당주께 아룁니다. 곤륜산에서 한 공자님이 당주를 뵙고자 찾아 오셨습니다."
허나 촛불마저 꺼져버린 실내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군."
매당태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난색을 띈 채 자천릉을 돌아보았다.
"공자님, 다음에 오셔야겠수. 당주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 같은데 선금은 열 배로 돌려 드려야겠구랴. 쯧쯔!"
"후후, 돌려 줄 필요야 없지. 나는 그 당주라는 작자를 죽여 진급해야 할 몸이니까."
자천릉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흘흘, 하지만 당주께서는 출타 중이신 것 같은데 보시다시피."
삐이끽!
매당태태의 주름진 손에 의해 산문이 밀리며 실내의 시커먼 어둠이 와락 물결처럼 밀려나왔다. 자천릉이 그 짙은 어둠 속을 싸늘한 눈빛으로 쓸어보았다.
"안심하게. 출타 중인 당주를 찾아내는 방법은 너무 많아 어떤 방법을 택해야 좋을 지 모를 정도니까."
자천릉은 어둠 속으로 발을 들여 놓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흠흠, 촛불의 냄새가 남아 있는 정도로 보아 숨은 지 꼭 일 각이 지났군"
어둠에 잠긴 실내에는 일천 개의 촛불로 만든 천야제등촉이 꺼지며 남긴 묘한 향내가 은은히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흠, 숨바꼭질을 좋아하시는 모양이지?. 이상하군. 오천년무림문헌통고에는 취미가 굿을 드리러 온 유부녀를 강간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던데."
자천릉이 문득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순순히 나오지 않으려 하는군. 어린아이들도 이 정도 시간이 흐르면 술래가 불쌍해서 나와 주던데. 하는 수 없지. 내가 찾는 수밖에."
자천릉의 손가락 끝에서 반짝 화광이 일어나며 일천 개의 촛불이 다시 밝혀졌다. 자천릉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무섭도록 짙은 녹색 빛줄기가 섬칫하게 폭사되었다.
"나... 영원한 영혼의 율법이요, 산 자들의 영 위에 우뚝 선 만유(萬有)의 신(神)... 만황(卍皇)의 뜻으로 네게 명하노니... 나오라, 나의 어린 종이여!"
그의 입에서 악령의 호곡과도 같이 주문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바로 아흔 아홉 개의 황금만루 중 아흔 아홉 번째의 고루 위에 떠오르던 마지막 비기, 산 자의 혼을 부르는 만매심령혼통귀기(卍魅心靈魂通鬼氣) 상의 주술이었다.
이때 그 귀기스런 주문의 여운이 일천 개의 촛불을 흔들며 스산하게 퍼져 흐르는 순간이었다.
찌이익!
돌연 천정이 찢어지며 전신이 피범벅이 된 계축의 동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혼이라도 빼앗겨 버린 것일까?
두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시뻘겋게 핏발만 곤두 서 있었고 임종 직전의 노인처럼 가냘프게 경련하는 손으로 여전히 전신을 북북 긁으며 와들와들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처참을 지나쳐 참혹에 가까웠다.
"후후후, 인간의 혼을 다스리는 제석께서 아수라마황과 싸움이라도 벌이고 오셨나? 아니면 가시밭에 숨어 있으셨나... 왜 그렇게 피가 낭자하지?"
자천릉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계축의 전신을 뱀의 붉은 혓바닥처럼 핥으며 싸늘한 전율을 일으켰다.
계축이 가슴살을 뼈가 허옇게 보이도록 긁어대며 핏발 뿐인 동공에서 파름한 독기를 뿜어냈다.
"으으, 이 찢어 죽일! 너, 너는 왜 나를... 아직 십왕께서는 전쟁을 시작하지 않으셨거늘... 동맹을 맺으셨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호, 너는 어릴 때부터 아주 지독한 거짓말쟁이였나 보구나. 너도 며칠 전 저 해당화와 청잠이라는 작자들과 어울려 십왕 서열 오위(五位)인 천장원주 용등택의 휘하에 있는 서하권련(西河拳聯)을 습격하지 않았던가?"
"으, 그, 그걸 네가 어찌...."
계측은 계속 전신을 긁으며 죽어가는 벌레처럼 파르르 사지를 경련했다.
"아는 수가 있지."
"이,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분명 백마도 아니고 십왕은 더욱 아니...."
자천릉의 입가에 섬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너까지 꼭 아홉 번째 듣게 되는 말이니 지겹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알려주마. 나는."
"으으."
"백마도 아니고 십왕도 아닌 단지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만황일 뿐이다. 내가 너를 찾은 것은 네가 백마 중 끝에서 아홉 번째 인물인 까닭도 있지만 또한 내 신체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였기도 하지."
만황. 그렇다. 이제 자천릉은 스스로를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체내에 자신도 모르게 깃들어 있던 초자연적인 잠재능력의 정체 곧, 만통법왕의 황금만루에서 처음 들었던 그 만황이라는 칭호의 의미를 자천릉은 이곳 매당파에서 스스로의 시험을 거치며 이제야 명백히 깨닫고 있는 것이었다.
헌데 자천릉의 입에서 막 만황이라는 한 마디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온몸을 긁던 계축의 손이 자른 듯 뚝 멈춰지며 초점이 없던 그의 눈에서 격렬한 충격의 눈빛이 새파랗게 솟구치고 있었다.
"만황! 그렇다. 그 전설적인 만신의 제왕... 만황이었어... 오오... 어찌 그 불가능의 전설이 현실로 화할 수 있단...말인가!"
계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나의 염력도 통하지 않았군. 그래서... 내 몸이 그토록 엄청난 감응을 나타낸 것이었어..."
넋이 나간 듯 정신없이 터져 나오는 계축의 뇌까림을 자천릉은 차가운 얼굴로 흘러듣고 있었다.
헌데 이때 계축이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하지만 나는 행복하군. 곧 내 뒤를 따라올 위대한 전설의 만황과 함께 저승으로 가게 될 테니...."
자천릉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이자는 지금 무얼 중얼거리는가? 흡사 내가 곧 죽어 자신의 뒤를 따라 가기라도 할 듯이 말하고 있군. 훗! 죽기가 저리도 심심했던가?'
자천릉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신체에 깃들린 비밀이 지금 얼마나 중대한 위기를 향해 치달려 가고 있는가를 말이다.
회광반조이기라도 한 것일까? 계축은 기분이 유쾌해 온몸을 긁어야 하는 고통도 잊은 듯 음침한 괴소를 흘려내고 있었다.
"흐흐흐, 너의 표정을 보니 너는 너 자신의 신체에 대한 비밀을 모르고 있는 듯 하군. 네가 나에게 한 가지를 알려줬듯이 나 또한 한 가지만 알려주마. 너는 만황의 위대한 신체를 타고났으나 금기를 범하고 말았다."
"금기?"
"그렇다. 너는 만황의 신체만으로도 천하무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거늘, 미련하게도 측량할 수 없는 내공을 함께 익혔다. 이제 그 내공이 점점 상승경지에 오르면서 염력 또한 최고조의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흠!"
"흐흐흐, 나는 안다. 정확히 육십 육 일이다. 육십 육 일이 지나면 가공할 내공과 최고조에 이른 염력이 너의 체내에서 부딪히며 산산이 폭발해 부서질 것이다. 물론 너의 육체도 모래알처럼 흩뿌려지게 되고 말겠지."
대천법왕을 비롯한 이방십칠인의 인물들이 예측한 자천릉의 수명은 십 팔 세였다. 허나 자천릉은 만장석굴 내에서 사 년 육 개월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황금만루를 통해 가공할 염력의 기를 또다시 흡수함으로써 염력과 내공이 더이상 오를 곳이 없을 만큼 엄청나게 팽창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육십 육 일이라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정확히 계산해 낸 자천릉의 살아 숨쉴 수 있는 날짜였다.
"흐흐흐, 정확히 육십 육 일 후... 축하한다."
계축이 말할 수 없이 즐거운 듯 괴소를 흘려내자 자천릉이 묘한 미소를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십 육 일 후라... 길지는 않은 시간인 듯 하군. 아무튼 고맙다. 나에게 최초로 나의 신체에 관한 비밀을 알려줬으니."
"흐흐흐, 그날... 우리... 다시... 만나자."
괴소를 발하던 계축의 고개가 갑자기 힘없이 꺾어졌다. 마지막으로 촛불의 끝처럼 되돌아왔던 생명의 기가 끝내 거두어지고 만 것이다. 헌데 이때였다.
"스, 습격이다!"
"막아라!"
"크헉!"
병장기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와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어지러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등 뒤에 있는 창 밖을 쳐다보던 자천릉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호, 제법 많이 몰려오는군. 흡사 피를 본 거머리떼들처럼."
창문 너머로 내다보이는 영매의 언덕 아래에 주절거리듯 스산히 내리는 초가을 밤비를 헤치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숫자의 흑포무사들이 민첩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흡사 수천만 마리의 밤 고양이떼들처럼 발소리도 없이 밀려든 흑포 사내들의 대열이었다.
그들을 향해 저지선을 형성하던 매당파의 무인들은 미처 항거해 볼 사이도 없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거꾸러지고 순식간에 흑포 사내들은 거의 언덕의 정상까지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백마를 때려죽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백마착섬불극도를 시험해 볼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자천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등에서 백마착섬불극도를 끌러들었다.
"하나, 둘, 셋, 열... 흠, 고작 일천 마리도 못되는 숫자로군. 분명 누군가 나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는 십왕 중의 일 인이 보내 온 자들이겠지. 매당파를 쓸어버리려는 것이라면 저 정도의 마리수도 필요 없었을 테니까."
도신에 초승달 형상의 칼날이 덧붙은 이 기이한 형상의 마병이 비스듬히 옆으로 뉘어졌다.
"후후, 넘어질라. 천천히 순서대로 오너라. 내 생명이 육십 육 일이나 남았다는데 그 동안 너희들쯤 죽여주지 못하겠느냐?"
백마착섬불극도, 간단히 백마도극이라고 부르는 이 마병의 날에서 소름끼치도록 예리한 살기가 차갑게 폭사되기 시작했다.
"크아악!"
"허어억!"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려오며 물밀 듯 다가드는 흑포사내들과 무랑루주와의 거리가 불과 이십여 장 가량으로 좁혀졌다.
찰라 자천릉의 신형이 화살처럼 창 밖으로 쏘아져 나가면서 싸늘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백마불참십극도술, 제일술! 굶주린 수탉이 부리를 세우고 먹이를 쪼니 백마도극의 날은 비비로 화하여 바람을 가르도다. 아계탁란 비비단풍!"
쌔애애액!
백마도극이 흡사 바람을 가르는 한 줄기 비수인 양 극한의 예기를 뿜으며 닥쳐오는 흑포사내들의 허리를 휩쓸어 갔다.
"크아악!"
"헉! 이, 이것은!"
촤아앗!
순식간에 수십 명의 흑포사내들이 짚단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제이술, 눈 속의 흰코끼리가 길을 잃고 헤매어 달리니 백마도극의 날이 한 자루 검으로 바뀌어 빙벽을 꿰뚫도다. 설상란주(雪象亂走) 검환쇄빙(劍幻碎氷)!"
콰아아앙!
"캐액!"
"으악!"
"제삼술, 금빛 낙타가 물을 찾아 사막을 헤치니 백마도극의 예봉이 창날로 바뀌어 용권풍을 잠재우도다. 금타도막(金駝到漠) 예창파선(銳槍破旋)!"
"크흑!"
자천릉의 신형이 그대로 돌진하며 짚단처럼 쓰러지는 흑포사내들의 시신을 짓밟고 백마도극을 풍차처럼 어지럽게 휘두르고 있었다.
"제사술, 흑추번야!"
백마도극이 가볍게 원을 그릴 때마다 수십 명씩의 흑포사내들이 모래성벽이 무너지듯 쓰러져 내리기를 벌써 다섯 차례, 헌데 바로 그 때였다.
"크아악!"
돌연 자천릉의 전면 멀리서 또다른 비명성이 들려오지 않는가? 그리고 들려왔다고 느낀 순간 그 소리의 행진은 어느새 수백 장 앞으로 급속히 가까와지고 있었다.
"응? 누가 또 이자들을 죽이고 있는 거지?"
"으아악!"
자천릉은 백마도극을 무지개처럼 둥글게 휘둘러 다시 열 두셋의 사내들을 쓰러뜨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서 있는 불과 백여 장 앞의 언덕 아래.
주절거리는 밤비를 뚫고 한 자포인영이 연신 비수를 날려 흑포사내들을 허수아비처럼 차근차근 쓰러뜨리며 자천릉이 있는 능선을 향하여 빛살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자천릉의 눈빛이 이채롭게 반짝였다.
"호, 수천 개의 비수를 저토록 정확하게 날리는 모습은 결코 하루 이틀 비비(飛匕)를 잡은 자가 아니다. 적어도 이갑자 이상을 혼신을 다해 고련 한 후에야 나올 수 있는 경지이다. 허면!"
그 순간에도 자포인영은 흡사 우산을 돌려 우산에 묻은 빗방울을 떨쳐 버리듯 양손에서 비수를 끝없이 발출하며 평지를 달리듯 언덕을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자포인영이 입고 있는 자색장포를 알아본 자천릉의 눈빛이 곤혹스럽게 얽혀들었다.
"십왕 중의 일 인이다! 누굴까? 저렇듯 자신을 드러내 놓고 행동하는 자가?"
그 때였다.
"ㅋㅋ, 멍청한 놈! 자신이 쏘아내는 병장기의 끝에서 시선을 떼다니, 죽어라!"
파파팟!
백마도극을 피해 주춤주춤 물러나 있던 흑포사내들 중 하나가 장창으로 허공에 직선을 그리며 그대로 자천릉의 등을 내리쳤다.
"후후, 나의 백마도극에는 피를 알아보는 눈이 달려 있지."
자천릉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백마도극을 가볍게 휘둘렀다.
번쩍!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흑포사내는 내장을 쏟아내며 그 자리에 거꾸러졌다. 그와 같은 순간 자천릉의 전면에 있던 십 수 명의 흑포사내들의 미간에 정확히 한 개씩의 비수가 꽂히며 쓰러지는 그들 사이로 어느새 자포인영이 우뚝 내려서고 있었다.
백마도극과 비비의 섬광을 끝으로 남아있던 흑포사내들은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자천릉은 은은히 미간을 찌푸리며 눈 앞에 부슬비를 맞으며 내려서 있는 자포인영의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덩이 얼음으로 깎은 칼날이 그 자리에 꽂혀 있는가.
차갑고도 무표정한 얼굴, 예리한 콧날, 면도날 같은 입술과 전신에 꼭 맞게 걸친 짙은 보라색 장포가 지독히도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오순의 사내였다.
자포자락 사이로는 아직도 일천 개는 넘을 듯한 얇디얇은 비수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자포의 가슴에는 한 마리 적룡을 생생하게 수놓고 있는 모습.
헌데 자포사내의 칼날같은 눈매는 지금 부드럽게 곡선을 이룬 채 기이한 미소를 만들고 있었다. 마치 얼음으로 조각된 인형이 미소를 보내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불과 촌각의 사이를 그렇게 마주보고 있었을까? 문득 자천릉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미소를 머금었다.
"알고 보니 그대는 십왕 서열 칠 위에 있던 비왕 율리새였군."
"그렇네, 자공자."
자포사내가 더욱 미소를 짙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포도의 마을 만포현의 근교에 있는 냇가에서 쌍둥이소녀 비청청과 비취홍을 만난 후 자천릉이 매당파를 향해 사라질 때 떡갈나무를 깨뜨리고 나타나 다시 자천릉의 뒤를 쫓아가던 바로 그 사내.
십왕 중 일곱 번째의 인물로 대곤륜백팔십일방 중 단일세력으로는 가장 강하다는 흑룡강의 주인이며 비수를 날려 한 가마니의 콩을 모두 꿰뚫었다는 믿지 못할 신화로 비왕(匕王)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율리새가 나타난 것이다.
자천릉의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렸다.
"어떻게 이곳에 왔지? 더욱이 지금 그대가 참새처럼 꿰뚫어 버린 자들은 그대와 같은 십왕 중의 인물이 보냈을 것임에 분명한데."
"허허허, 그러니 이들을 보낸 인물이 이제는 본좌를 먼저 죽이려 들 것이라는 말인가?"
율리새가 호탕하게 웃었다.
'얼음귀신도 웃을 줄은 아나 보군.'
자천릉은 내심 기묘한 느낌에 잠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뜻이지."
"허허허, 나 율리새는 이제껏 단 두 사람을 빼놓고는 한 번도 두려워해 본적이 없네. 더욱이 뒤가 구리다면 저기 달아나는 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면 그 뿐일 테고."
'흠, 역시 십왕 중의 하나라 좀 다른 데가 있긴 있군.'
자천릉은 내심 찬탄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 율리새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런데 몹시 궁금하군. 그대처럼 천하에 두려워하는 자가 없는 사람이 또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니."
반말에 가까운 말투였으나 율리새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계속 미소를 지었다.
"허허, 바로 자네 자공자와 현 태대각일세."
"태대각은 이해가 가지만 그대가 나까지 두려워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나는 겨우 천요만방의 주방을 감독하는 부방주일 뿐이니."
"옥이 아무리 흙 속에 섞여 있다 해도 알아보는 사람은 있네. 전문가라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서 가장 비정한 사내로 알려져 있는 그가 시종 미소를 잃지 않는 것에 진기함을 느끼며 자천릉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그대가 무예의 전문가인지라 나를 초절정의 고수로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지?"
"그렇네. 본좌는 한 번도 외도를 한 적이 없이 비수에만 팔십 평생을 바친 무인, 무예의 전문가라는 자네의 말은 과히 틀리지 않네."
"호, 솔직히 그대는 내가 만나 본 중 가장 사내다운 사람이군. 술 한 잔 쯤은 함께 해 볼 가치가 있겠어."
자천릉이 고개를 끄덕이자 돌연 율리새가 털썩 시신 위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하세. 여기 자네가 들렀던 포도농원에서 몇 병 실례해 온 사계포도주가 있으니."
자천릉이 묘한 미소를 띄며 율리새 앞에 천천히 마주 앉았다.
"후후, 나도 재미있는 사람이지만 그대도 무척 재미있군.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십왕 중의 한 사람인 그대가 은자가 없어 포도주 몇 병을 훔쳐왔다? 허면 내 뒤를 계속 미행해 왔다는 말도 되겠고."
"허허, 본좌는 무학과 명예에만 관심이 있지 은자에는 마음이 없다네."
자천릉은 새삼 율리새를 바라보았다.
율리새가 힐끗 하더니 입을 열었다.
"본좌가 자네를 미행한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마치 사내가 한 여인을 연모하게 되면 지겹게 쫓아다니듯. 사내인 내가 사내인 자네를 마음에 들어 했으니 천하는 참 좁은 것이네."
자천릉은 일시 묘한 눈빛이 되어 다시 한 번 율리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가 진심으로 감탄해도 좋을 만한 가치를 가진 사내로군.'
이어 그는 서슴없이 술잔을 들어 율리새 앞에 내밀었다.
"한 잔 주시오. 내 평생 존대어를 쓴 적이 없어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대라면 나보다 훨씬 어른이니 존댓말을 써 드리겠소."
율리새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천릉의 술잔에 사계포도주를 따랐다.
"헛허, 영광이네 그려. 기실 본좌 또한 누구와도 술을 대작해 본 적이 없다네. 본좌는 술을 잘 안하지. 술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수를 유발하게 하는 힘이 들어 있기에."
"나는 실수가 없으니 괜찮을 것이오. 무려 세 살 때부터 술을 마셔왔으니까."
자천릉이 사계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헌데 그때 가슴에 맹호가 수놓아진 혈포를 입은 십 일 인의 사내가 돌연 자천릉과 율리새를 둥글게 포위하는 것이 아닌가?
"응?"
자천릉이 반사적으로 백마도극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율리새가 손으로 제지하였다.
"이해하게. 자네도 알겠지만 본루에서 본좌가 데리고 있는 백마들 중 십 일 인일세."
"흠."
자천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입에서 떼어 율리새에게 건넸다.
"그래, 나를 곤륜산에서부터 쫓아온 이유는 무엇이오?"
"자네의 솜씨를 나에게 주게."
자천릉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솜씨만을?"
"자네는 필요없네. 본좌에게 필요한 것은 자네의 그 솜씨일세."
"후후후, 그대는 내가 무학이 초절하지 않았다면 나를 찾지 않았겠군."
"당연하지. 아니 필요는 했을 걸세. 우리 흑룡강의 주방에도 한 명쯤은 요리의 명인이 필요하니까."
자천릉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율리세의 눈을 직시했다.
"솜씨는 팔지 않겠소. 이유는 그대가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인물이기 때문이오."
율리새는 아주 잠깐 동안 허공에 시선을 멈추었다.
"알 수 있네. 자네는 태대각에 의해 죽어 간 자륭극대인의 아들이니까. 허나 자신의 정체조차 감추고 있는 만화무대의 그 어린아이에게 솜씨를 파는 것만은 알 수 없군."
"그는 선친의 지기의 아들이오."
"그랬었군."
율리새가 빗물에 섞여 술인지 포도주인지 모르게 된 술을 입 속에 쏟아 넣었다.
"자네의 그 훌륭하신 아버님이 부럽네. 그릇이 작고 이용만 하려는 자인 줄을 알면서도 단지 부친 친구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도와주는 아들을 두었으니 말일세."
"아버님은 영원한 아버님이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오."
자천릉이 무표정하게 말하자 율리새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 운명인가? 아버지를 잘둔 덕분에 한낱 계집아이같은 아이에게 본좌 평생의 꿈이었던 태대각의 의자를 넘겨준다는 것이."
질척거리는 밤비 때문인가? 비왕 율리새, 이 무서운 강자의 어깨에 내려앉은 어둠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돌아서던 율리새의 시선이 자천릉의 얼굴을 향했다.
"욕해도 좋네. 본좌가 이번 태대각이 되었을 때 다음 대 태대각으로 자네를 봉한다고 해도 안되겠나?"
자천릉이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곤오풍우의 목일 뿐 태대각의 자리는 아니오."
"두 말은 않겠네. 생각이 달라지면 언제라도 본좌를 찾게. 의자는 항상 비워져 있을 것이네."
"고맙소. 그대가 오늘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 듯이 그대에게는 절대로 나의 손길이 가지 않을 것이오. 물론 그대의 수하들 또한 마찬가지요."
율리새의 얼음결 같은 얼굴에 다시 희미한 미소가 스쳐갔다.
"허허, 그것만으로도 힘이 되겠군. 다음에 다시 만나세. 오늘은 결례가 많았네. 이 비오는 밤에 불쑥 찾아와서."
"괜찮소. 오늘은 이리의 소굴에도 맹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니까."
"잘 있게."
파팟!
율리새의 신형이 지면을 박차며 밤비 속을 뚫고 나타날 때와 같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메아리였을까? 멀리서 빗소리에 섞여 율리새의 고함소리가 아득하게 울리며 들려왔다.
"자부방주! 자네는 하루 빨리 부나비도로 가 보게. 그곳에는 육십 육 일 남은 자네의 생일을 육백 육 십 년쯤으로 늘려 줄 의원이 있을 테니까."
자천릉의 눈빛이 다시 한 번 기이하게 반짝였다.
'부나비도, 그렇군. 중할아버지는 내 신체의 비밀을 알고 그곳으로 가라고 당부했던 것이었어. 내게 이유를 말하지 않은 것은 어린 내가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해서였겠고.'
마침내 만황 자천릉을 탄생시키기 위한 위대한 운명의 격류는 예정된 그 완성의 통로를 향해 거세게 소용돌이치며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 어서 가자. 부나비도로, 곤오풍우를 죽이고 그에 앞서 백마와 십왕을 제거하려면 나의 신체는 완전해야 하니까."
휘익!
자천릉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가 싶자 어느새 한 줄기 빛살이 되어 비 내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ㅈㄷ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줄감합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