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하지요.
"석가 부처님은 12연기를 발견하시고 12연기법을 통해 부처님을 이루시고,
제자들에게는 4성제를 가르치셨고, 4성제를 통해 제자들은 아라한에 이른다"라고..
우리는 부처님 제자라고 합니다. 제자인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4성제입니다.
4성제는 불교를 간략하면서 분명히 보여주며 8정도를 바르게 익히면 아라한에 이를 수 있으므로.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처님이 지금 여기서 될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아니라면 부처님이 되는 12연기법 보다 아라한에 이르는 4성제가 더욱 중요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12연기법을 가르치십니다.
4성제를 통해 불법을 분명히 알았으면 12연기법을 새기며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기에..
그리고 수행은 5온과 12처 관찰이 기본으로 5온 관찰한 바로 4성제를 그리고 12연기법을 돌아봐야 합니다.
12연기법은 불법의 기본이요 핵심입니다.
4성제 설법을 들은 꼰단냐가 "멸제가 곧 집제군요!" 하는 깨달음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깨달음을 얻어도 5온을 통찰하는 사마타 수행이 부족하면 이해를 했을 뿐, 몸이 따르는 통찰인 깨침에 이르지 못합니다.
요새처럼 컴에 세상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시대가 아니라면..
수행이 적은 일반인이 12연기법을 바르게 깊이 이해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일 겁니다.
그러나 손바닥 컴 시대인 지금은 수행을 깊이 하지 않아도 4성제와 12연기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이해력은 석가세존의 시대와는 천양지차입니다.
무명에서 시작해 생, 노사로 끝나며 모든 번뇌와 괴로움이 생긴다는 12연기법은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무명으로 들어가는 문이요, 다른 하나는 무명을 멸한 무무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무명으로 들어가는 것을 유전문, 생사문이라 하여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이고,
부처님 당시 주류였던 바라문교의 우파니샤드와 신흥 사상가들 나아가 지금에 이르기 까지 모두 유전문 세계에서 존재할 뿐입니다.
바라문교에서 주장하는 천신의 세계나 기독교의 천국은 모두 유전문 세계 소식이라는 겁니다.
무무명으로 들어가 생노사를 멸해 일체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가르침인 환멸문은
일반인에게는 뜬 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는..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세상에 보여준 세계가 됩니다.
12연기의 환멸문이 바로 4성제의 멸제입니다.
12연기법을 세상에 소개할 때 그들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유전문을 주로 전하게 되고..
그 가운데 하나가 윤회와 관련하여 설명한 것이 3세양중인과설[줄여 3세설]이지요.
부처님이 나오기 전까지 윤회설은 인도인의 주류 사상이지만 전생에서 현생, 현생에서 내생으로
인과법에 따라 윤회한다고 주장할 뿐, 어떻게 윤회가 되는지는 잡다한 설만 있고 그 과정 설명이 미진했는데..
3세양중인과설은 어떻습니까?. 반론을 펼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합니다.
전생에 있던 식이 부모로 인해 생긴 명색에 들어가 현생에 나라는 자[6입]가 생겨 사물을 접하며 살다 가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 미래의 생 노사가 또 일어난다는 삼세양중인과설.
이건 개인적인 추론이지만 불교 3세설이 인도 전역에 전해지면서 막연히 믿던 윤회에 대한 분명한 이해로 그들의 믿음은 공고히 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곧바로 불교에 대한 신뢰로 이어져.. 인도에서 주류 종교는 불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남 아시아 와는 다른 동 아시아의 환경은 불교가 국교가 되어도 윤회에 대한 믿음은 남 아시아인 처럼 굳건하지 않았습니다.
고려 시대에 국민들이 얼마나 진하게 윤회를 믿었는지 잘 모르지만.. 불교를 박해한 조선조 내내 윤회는 유리 곁을 거의 떠나..
우리가 느끼는 윤회는 안델센의 인어공주처럼 처럼 느낄 뿐이죠.
12연기로 돌아와..
3세설로 윤회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자 불자들 역시 3세설에 대한 믿음과 자부가 커져..
마치 당시 주류 불교인 상좌부에서는 3세설이 12연기법 핵심이요, 전부인 것처럼 전하려 합니다.
유전문과 함께 환멸문이 성립하려면 일체는 마음에서 생겼다는 게 이해가 되어야만 하는데..
유전문인 3세설은 마음이 아닌 존재 법임을 간과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그런 현상은 세존이 가르치려는 윤회를 벗어나는 마음 법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게 됩니다.
<초전법륜경> 마지막 부분에 4성제 법문을 듣고 다섯 사문 가운데 꼰단냐가 깨치니..
20.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어를 읊으셨다.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구나.”라고,
이렇게 해서 꼰단냐 존자는 안냐꼰단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안냐꼰단냐 aññākoṇḍaññ.. 깨달은꼰단냐
라고 합니다.
이때 4성제 법문을 들은 꼰단냐의 반응이..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集法卽滅法].' 라고 하였고
한문 번역인 集法卽滅法 의 뜻은.. 무명[집법]은 곧 무무명[멸법]이다가 됩니다.
그것의 한글 번역을 보면..
일어난 일체 괴로움은 무엇이건 멸하기 마련이다 하였으니..
'태어난 것으로 모두 죽는다' 또는 '봄이 가면 여름 가을, 겨울이 온다'는 자연 법칙처럼 보이니..
꼰단냐 사문은 부처님 설법을 듣고 자연의 대법을 깨달은 것처럼 이해가 되지요.
다시 말하지만 자연의 모든 법은 유전문 세계에서 법칙일 뿐으로 환멸문이 아닙니다.
그런데 꼰단나가 그런 자연 대법칙을 깨달았기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기뻐하며 지혜를 성취한 꼰단냐[안냐꼰단냐]라고 불렀을까요?.
아니죠!
꼰단냐의 깨달음은
유전문과 환멸문은 다른 게 아닌 것으로 유전문과 환멸문은 결국 둘이 아니군요! 하는
불이법 깨달음인
삶이 곧 죽음이요, 중생이 곧 부처님이라는 겁니다.
집법즉멸법(集法卽滅法)..생김이 곧 사람짐이다 라는 건 존재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부처님은 기뻐서 꼰단냐가 나와 같은 깨달음을 얻었구나 안냐콘단냐다^^ 하시는 겁니다.().
왜 그리 기뻐하실까요?.
당신 말을 듣고 이해하고 깨닫는 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신 가르침을 듣고 깨닫는 자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이 한층 높아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꼰단냐가 깨달은 법 내용이..
‘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라고 하여 '일체는 생멸 인과법' 정도였다면..
안냐[깨달음]라고 부를 만큼의 감흥이 생겼을까요?.
그렇다면 꼰단냐 사문은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며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요?.
멸제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잡. 214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14. 이법경(二法經)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2.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식(識)이 생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이니라.
.……(이 사이의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인가?
3.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나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心緣生].
4. 만일 색과 안과 식이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心緣生]이라면,
이 세 가지 법이 화합하는 접촉[觸], 접촉 뒤의 느낌[受], 느낌 뒤의 의도[思], 의도 뒤의 생각[想], 이러한 모든 법도 다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른바 접촉[觸]·생각[想]·의도[思]이다.
5.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6.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차분히 깊이 음미하시고
다음 시간에 12처에 대해 생각한 바를 말하도록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