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자전거 여행기
부산에서부터 휴전선 앞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약 700 km의 자전거 여행기입니다.
내용이 길어 무려 20쪽 분량입니다. 라이딩에 관심 있는 분에게 참고가 될까하여 개인적인 기록이지만 모두 공개합니다. 자전거 여행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참고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부산 송정해수욕장에서. 라이딩 출발 시작 직후
재작년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한강에서 낙동강까지 달려본 경험은 ‘퇴직하면 전국을 달려보자’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했다. 그 꿈을 실행하기 위해, 첫 번째로 제주도에서 시작했다.
4월, 우리나라 가장 남쪽 지방인 제주도가 따뜻하기 때문에 제주도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제주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아름다운 해안이 많고 관광지로 많은 개발이 이루어져 명승지가 많다. 육지보다 따뜻하고 화산으로 이루어진 섬이라서 이국적 풍광이다. 역시 제주도의 자전거해안도로를 일주하는 동안 아름다운 풍경을 충분히 보았고, 여행 중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도 매우 즐거웠다.
그 다음 두 번째 라이딩은 남해안으로 갔다. 역시 광주 영산강에서 출발, 나주, 목포를 경유하여 부산까지 가는 남해안에서도 아름다운 경치와 사람들과의 즐거운 만남으로 유쾌한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번 세 번째 도전은 우리나라의 동해안을 종주해 보고자 부산으로 가서 북쪽 끝 고성통일전망대를 목표로 6월 17일 출발하여 6월 26일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했다. 그 여정과 여행 내용을 다음과 같이 날짜별로 정리했다.
. 일정 : 2018. 6. 17(일) ~ 6. 26(화).
라이딩은 18일 ~ 26일(24일 하루는 강릉 관광) .
. 일정 : 9박 10일의 라이딩
17일 : 수원 → 부산 해운대 → 장산역 → 찜질방
18일 : 부산 장산, 송정 → 기장, 서생, 울산, 정자, 관성 솔밭
19일 : 관성 → 봉길터널, 문무왕릉, 감포, 신창, 포항 구룡포 그린오토캠핑장 옆
20일 : 구룡포 → 홍환, 포항, 영일대, 환호, 칠포, 월포해수욕장
21일 : 월포 → 장사, 벽화마을, 구계항, 영덕해맞이공원, 월송정, 구산해수욕장
22일 : 구산 → 망양, 울진, 원덕, 임원, 근덕, 맹방해수욕장
23일 : 맹방 → 삼척, 망상, 옥계, 정동진, 강릉시 박00 댁
24일 : 강릉관광: 경포대, 명륜향교, 대관령자연휴양림, 안반데기, 진부령, 박00 댁
25일 : 강릉 → 주문진, 낙산, 속초, 간성, 주00 댁
26일 : 간성 → 거진, 대진,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 거진버스터미널
→ 속초버스터미널 → 수원터미널 → 귀가
17일. 수원에서 부산으로
수원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11시 20분 출발, 해운대 시외버스 터미널에 4시 20분 도착, 장산역 7번 홈에 5시 도착, 교대 동창 3명 만나서 저녁 식사.
밤 11시쯤 친구들과 헤어졌다. 자기 집으로 가자는 친구가 있었지만 불편을 주고 싶지 않았고, 마음 편히 씻고 싶어 찜질방으로 갔다. 고층에 찜질방이 있어 엘리베이터로 올라가 찜질방 카운터 앞에 자전거를 놓고 들어가 씻고 잠을 청했다.
2. 18일. 부산 장산에서 경주 관성솔밭까지
아침 5시에 일어나 찜질방에서 7시에 나와 상가에 있는 김밥집에서 충무김밥과 비슷한 크기의 김밥 3개를 오뎅 국물과 함께 먹고 계산하니 2400원, 충무김밥처럼 덩이가 작아서 개당 600원이었다. 놀라울 만큼 저렴한 아침식사를 하고 8시에 출발했다,
송정 방향으로 네비게이션을 보고 가니 터널이 나왔다. 지방선거 출마 후보자가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기에 길을 물으니 안전을 위해 터널을 돌아가라 했다. 그러나, 터널이 짧기에 자전거 뒤에 깜박이 등을 달고 위험을 무릅쓰고 터널로 통과했다. 약 500여 미터 달려가니 송정항, 그 우측으로 돌아가니 송정해수욕장이었다. 입구 왼쪽에 죽도가 있다. 죽도에 오르니 해수욕장과 동남해의 전경이 시원하다. 일찍 온 관광객과 산책 나온 사람들이 여유로웠다.
울산을 경유하여 태화강을 건너 동해안자전거길로 돌지 않고 지름길로 가려고 반대로 돌아가다가 태화강을 따라 울산공항을 지나 경주쪽으로 올라갔다. 두 여성 라이더가 정자에서 쉬고 있어 길을 물으니 다시 돌아가 울산 북구청 쪽으로 가서 정자해수욕장으로 가야 동해안 자전거길을 만난다고 따라오라하였다. 달려온 길을 20분 정도 뒤따라 가는데 짐을 실은 나는 거의 1 km는 뒤처져 따라가다가 갈림길에서 기다리는 그 여성들을 만났다. 울산 북구청으로 진입하는 길을 알려주고 작별 인사를 하기에 올해 퇴직하고 나선 라이딩이라 했더니 자신들도 교사라 했다. 반갑고 고마웠다.
북구청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어 굽이굽이 오르는데 이제 끝인가 하면 오르막이 이어지길 반복해 두 차례나 쉬어야 했다. 점점 어두워져 자전거 앞뒤에 라이트를 부착하고 진땀을 빼는데 몇 명의 라이더들이 앞질러 갔다. 짐을 실은 나는 힘도 들지만 속도가 나지 않아 더 고통스러웠다. 창자 같이 휘어져 돌아간 오르막을 오르느라 1시간은 달렸나 보다.
드디어 오르막, 그 정상에서 페달을 멈추고 내려가니 편하고 추울 만큼 시원하여 매우 상쾌했다. 어둠 속에서 30마일 이상의 속도로 내려가니 약간 무섭기도 하였다. 정자항을 지나 관성 솔밭에 도착하니. 밤이 깊어 9시 30분경. 텐트 칠 곳을 찾느라 왔던 길을 잠시 돌아보고 어느 민가 옆, 공중세면대가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시간은 늦었지만 텐트 치고 저녁밥을 해 먹었다. 장애자 화장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자려고 시계를 보니 자정 무렵이다. 라이딩 첫날부터 너무 무리했나 싶었다.
3. 19일. 관성에서 포항 구룡포 호미곶으로
아침밥을 짓는데 옆집 사는 주인이 나왔다. 텐트를 쳐도 괜찮은지 몰라 무조건 인사를 했다. 잠시 나를 신기하게 보더니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다. 부산에서 고성 통일 전망대까지 가려한다니 놀라는 표정이다.
6시에 일어났는데 아침을 지어먹고 텐트를 걷고 출발하려니 9시였다. 혼자서 숙식을 해결하려니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절차가 복잡하다. 조금 달려가니 소나무밭이 있는 해수욕장이 나왔다. 관성해변보다 텐트치기 나은 곳이 있구나 싶었다. 관성솔밭에 야영장이 있다는 것만 알고 갔으나 관성솔밭에는 노송 몇 그루만 남아있어 경관은 기대 이하였다.
조금 더 달리니 오류오토캠핑장이 나왔다. 소나무 사이에 산뜻한 캐라반이 수십 대가 있고 조경도 잘 해놓은 해변이었다. 해변에 자전거를 기대놓고 가방을 풀어 라면을 끓이고 밥을 말아 두어 가지 반찬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어디선가 고양이가 왔다. 그릇을 닦기 위해 자리를 비우니 고양이가 꺼내 놓은 물품을 뒤졌다. 돌멩이를 던져 쫓았다. 취사하는 곳곳에서 고양이들을 보게 되는데 도둑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다.
점심을 해결하고 달려가는데 자전거길 표지가 안 보여 그대로 지방도로를 달렸다. 오르막을 서서히 오르니 길고긴 봉길터널이 나왔다. 2 km가 넘는 긴 터널이고 차량들이 계속 과속으로 달려 위험하기도 했지만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자전거 앞뒤에 라이트를 켜고 터널로 진입했다.
터널 안에는 1 m 정도의 갓길이 있지만 차도와 가장자리사이에 표지 못이 박혀 있어 자전거가 그 표지 못을 넘게 되면 터덜거리고 흔들려 넘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편도 1차선 도로라서 뒤에서 오는 차들이 밀리고 있는데 길을 계속 막고 갈 수는 없어서 할 수 없이 가차 선을 이용하기도 했다. 다행이 터널 중간에 길을 비켜줄 수 있는 공간이 두어군데 있었다. 그 공간을 이용하여 길을 비켜주기도 하고 뒤의 자동차들이 밀려 있을 때는 가차 선으로 다른 차들의 진로를 터 주었다. 내가 속력이 느리지만 뒤에 오는 운전자들이 크락션을 울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터널도 길어서 무척 긴장한 채 주의를 하며 통과했다. 그 이후부터는 되도록 터널을 피했다. 동해안자전거 도로 역시 자동차와 함께 달리는 터널은 피할 수 있도록 우회 시킨 것 같았다.
터널을 통과하니 좌회전 길이 나왔고 그 길로 내려가니 문무왕릉 표지판이 나왔다. 매우 반가웠다. 십 수 년 전에 이 부근을 지나가며 들러보고 싶었는데 찾지 못하고 지나치고 말아 늘 아쉬웠던 곳이다. 왕릉으로 보이는 바위 쪽을 향해 손을 합장한 여인이 연신 허리와 고개를 숙이며 절을 반복하며 뭐라고 두런거렸다. 소원을 비는지 문무왕에 대한 찬사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표정이 너무나 엄숙하여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왕이면 사후에 우람한 왕릉에 안장될 수도 있었으련만 ‘죽어서도 바다와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실천한 그 거룩한 정신이 놀랍다. 아니 존경스럽다. 그 정신이 특별하여 꼭 와 보고 싶었던 곳이다. 문무왕릉의 작은 바위 사이에 다듬어진 사각 바위가 있는데 학자들은 그것을 제단으로 추정하였다.
문무대왕릉이 있는 바위
문무대왕릉과 바닷물이 가까운 해변. 고만고만한 딸 세 쌍둥이. 아이들의 부모인 듯한 부부가 자갈 위에 앉아 각기 시선을 달리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왠지 인상적이었다.
세 쌍동이의 돌줍는 모습
감포와 양포를 지나 포항시 장기면 신창리의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버섯 모양의 기둥에 ‘사랑이야기’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는 버섯 모양의 집 세 채가 나란히 붙어 있다. 카페 겸 음식점인데 정원이 매우 아름다웠다. 길 바로 옆에 노랑백합과 여러 가지 서양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다.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이어서 이름은 거의 모르겠는데 상당히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작은 연못도 있고 그 연못을 넘어 집으로 들어가는 조그만 다리가 있어 운치가 있었다. 연못 안에는 여러 종류의 수생 식물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카페 '사랑이야기' 입간판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꽃을 손질하고 있어,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가꾸셨다고 칭찬을 한 후, 어떻게 이렇게 가꾸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대답이 없었다. 대답하는 게 귀찮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꽃을 조화롭게 가꾸어 놓은 정원은 별로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뭔가 취재 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 주인 여자의 표정이 너무나 굳어 있어 더 이상 질문할 수가 없었다. “참 잘 가꾸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카운터에 있는 가게의 명함을 한 장 가져왔다.
포항시 '사랑이야기' 카페의 정원
여행을 마치고 전화로 문의하니 아주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다. 야생화 공부를 한 적이 있어 그렇게 정원을 꾸밀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하여 일일이 설명할 수가 없어 매스컴의 인터뷰도 사양한다 했다.
해변 모롱이를 돌아 산기슭 전망대에 오르니 구룡포 해수욕장이 자세히 보였다. 전망대의 뒤쪽에는 주상절리 벽이 조금 있었고, 해설 표지판도 있었다. 전엔 그런 바위가 있었는지조차 몰랐는데 지금은 개발을 하여 명소로 만들어 놓았다.
오후 6시경 구룡포 호미곶, 해맞이광장에 도착했다. 아침 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일출의 명소다. ‘상생의 손’이라는 손목 모양의 청동 조형물이 바다에 힘차게 놓여 있다. 광장에서 바다 쪽으로 나아갈 수 있는 데크 길이 만들어져 있어 바다 쪽으로 가까이 가 보았다.
호미곶 바다에 솟아있는 손목 조형물, '상생의 손'
그곳에서 내륙 쪽 2 km 지점, 대보2교차로 옆에 고(故) 박양균 시인의 시비가 있다. 이 시비는 몇 년 전 나도 참여하는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만들어 놓은 문학비다. 그 시비가 잘 있는지 보고 싶어 해맞이광장을 지나 시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광장을 벗어나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니 왼쪽으로 메밀꽃이 하얗게 피어있다. 날씨가 흐리고 어두워지는 시각이라 그런지 메밀꽃이 예뻐 보이지 않았지만 넓게 심어진 메밀밭이라 푸근해 보였다. 어스름한 저녁, 성근 안개꽃 밭 같은 시골 풍경이 아늑했다.
박양균 시비가 있는 동산에 갔다. 필자가 참여하는 '우리문학기림회'에서 만들어 놓은 문학비다. 그 옆 정자에서 시비 제막식을 하고 마을 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시던 생각이 났다. 마을 아주머니들 10여 명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푸짐하게 국수와 돌문어 회를 만들어 주었었다. 오늘은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대로 정지해 버린 시간 같았다.
고 박양균 시비, 왼쪽 까만 비석
호미곶 광장으로 가서 달려왔던 길을 되짚어 약 4~5 km를 달려 ‘그린야영장’으로 들어갔다.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어 유료 야영장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관리인은 없고 전화번호만 적혀 있어 전화를 하니 텐트 자리 하나가 무려 35,000원이란다. 민박도 4~5만원이면 되는데 요금이 좀 지나치다 싶어 산기슭에 텐트를 치려고 자리를 골라 보았다. 자전거길 바로 옆, 평평한 산자락, 화장실 옆에 가랑비를 맞으며 텐트를 쳤다.
아뿔싸, 화장실은 있는데 여느 화장실과 달랐다. 전기도, 물도 없는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다만 상태는 깨끗했고 화장실 입구에는 자전거를 보관할 만한 공간도 있어 다행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런 재래식 화장실은 겨울에도 해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단다. 물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얼지 않아 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단다. 그리 깊은 뜻이 있었나 보다.
오른쪽 돌담같은 벽 안이 재래식 화장실(우측 도로가 동해안자전거길)
텐트 친 옆은 유료 야영장인데 40세 전후의 젊은 남자 둘이 자동차에 이은 텐트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물 있는 곳을 물어 조그만 가게에 가서 수도물을 담아와 저녁밥을 지어 먹었다. 휴대폰 충전을 위해 젊은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니 한 잔 하자 했다. 내 텐트로 돌아와 소주 한 병, 사과와 참외를 가지고 갔다. 담소하며 소주 한 병을 비우자 그들도 마지막 남은 소주라며 한 병을 꺼냈다. 12 병을 가지고 왔는데 어제 둘이서 6병을 먹고 오늘 5병을 먹어 딱 한 병 남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취기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대단한 주량이다. 1시간쯤 담소하고 텐트로 돌아와 일기를 쓰다 잠이 들었다.
20일 아침. 호미곶에서 포항 월포해변으로
비가 멎고 아침 햇빛이 찬란하다. 텐트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서 밖을 내다보니 해녀들 열댓 명이 와서 물질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반을 지어 먹고 텐트를 치우는데 옆에 있던 젊은이들이 텐트를 걷더니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
해녀들을 싣고 온 남자에게 돌 공예를 하는 사람에 대해 물었더니 장본인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어머니가 해녀인데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는 것이다. 50대 초반의 그 공예가에게 인사하고 돌 공예에 대해 여쭙고 싶다니 찾아오라 하고 먼저 갔다.
텐트를 걷고 짐을 챙겨 찾아가니 반갑게 맞이하며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한 병 꺼내 주었다. 대문 양쪽에 돌을 붙여 대형 꽃병을 만들어 담장 위에 얹어 놓았다. 우측 담장 위에는 나무로 만든 솟대와 돌로 만든 화분을 여러 개 올려놓았다.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도 여러 작품을 전시했다 하여 가보니, 길가에 큰 화분을 만들어 놓고 꽃을 길러 놓았다. 그 화분들은 전문적인 예술품이라기보다는 취미로 만든 공예품이었다.
51세 미혼의 총각이 여가를 이용해 만든 소품들. 마트 주인이 볼 때는 특별한 조각가로 여겨져 나에게 추천했나 보다. 30분 걸려 찾아가, 1시간 정도를 담소하고 길을 나서니 11시다. 순수해 보이는 청년인데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어 고마웠다.
다시 호미곶 광장을 지나 지도상에서 본 호랑이 반도를 벗어나려니 가파른 오르막이 나왔다. 따가운 햇볕이 힘겹게 했다. 오르막을 거의 올라오니 조그만 터널이 나왔다. 산을 넘지 않은 것만이라도 다행으로 여겼다. 터널을 지나니 왼쪽에 모감주나무가 노랗게 꽃을 피웠다. 모감주 자생 군락지였다.
산길을 내려와 홍환 마을을 지나는데 식당과 마트가 나왔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가 내장탕을 주문하고 휴대폰 충전을 의뢰했다. 젊은 여자가 혼자서 여러 손님들에게 식사를 재빠르게 준비해 주었다. 칭찬 몇 마디를 했더니 콩국수를 반 그룻이나 가져왔다. 내장탕 한 그릇 먹어 배가 불렀지만 시원한 콩국수 국물이 고소하여 다 먹었다. 한 그릇 값으로 두 가지를 먹어 기분이 좋았지만 과식으로 배가 불러 부담스러웠다.
호미곶 반도[호랑이꼬리]를 벗어나는데 두어 시간이 걸렸다. 오르막길이 길고 날씨가 무더워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폭이 넓은 강 같은 영일만. 그 바다 건너 포항제철 단지를 보면서 계속 달렸다.
오르막을 오르니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이 나왔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를 바탕으로 조성해 놓은 스토리 텔링 공원이다. 영일만이 보이는 전망 좋은 산기슭 8만여 평에 330억 원으로 전망대와 전시관, 정자를 만들고 조경을 잘 해 놓은 공원이다. 전시관은 아직 열지 않았는지 문이 닫혀 있고 세오녀가 살았을 상상의 초가집과 마을도 만들어 놓았다. 스토리가 중요한 시대요 풍광이 좋으면 명소가 만들어지는 시대다.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바다 앞이 영일만)
포항 시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전거길 표시가 있지만 해파랑길과 자전거길 표시가 중복되고 포항시내 자전거 도로 등의 표시가 복잡하여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 주변을 돌며 헤매기도 했다. 휴대폰의 어플에서 자전거 네비게이션으로 방향을 찾았다. 오르막을 올라 구 형산강교를 넘어 포항제철을 보며 해협의 길을 달렸다. 물이 맑고 깊어 빠지면 나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약간 무서웠다. 되도록 바다와 거리를 유지하며 긴장한 채 주의를 하며 달렸다.
영일대해수욕장으로 들어가기 전, 모래톱에서 모래를 산처럼 쌓아놓고 모래 조각을 만들고 있는 걸 보았다. 두 곳에 대형으로 조각을 만드는데 왼쪽에는 두 사람의 표정을 눈동자까지 만들었다. 오른쪽에는 부조로 건축물을 만들었는데 실감이 날 정도였다. 정말 기술도 좋다. 어떻게 모래 만으로 저런 조각품을 만들 수 있을까.
해기 기울어 야영지를 찾아야 하는데 얼마나 가야 적당한 곳이 나올지 몰라 길가의 펜션에 가서 정수기의 물을 얻었다. 자바라 물통에 가득 받아 와 자전거에 실었다. 5분쯤 달려가니 월포해수욕장이었다. 해변에 텐트 친 사람이 있어 나도 그 옆에 텐트를 쳤다. 옆 사람은 통영시의 소방공무원인데 휴가를 내어 부부가 여행을 왔단다. 저녁을 먹고 몸이 가려워 해변 마트의 샤워장에서 2천원을 주고 샤워를 했다. 모처럼 따뜻한 물로 개운한 샤워를 했다.
텐트에 돌아오니 소방관 내외가 고기를 구워 먹다가 어서 오라고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들이 구워 주는 고기 몇 점으로 소주 한 병을 비우며 담소하다가 내 텐트에 돌아와 자리에 들었다.
21일. 월포에서 월송정으로
아침 일찍 텐트 자리를 정리하고 8시쯤 출발했다.
강구에서 장사 해변에 도착하기 직전, 커다란 군함 모양의 배가 바닷가에 정박해 있었다. 장사 해변에 도착해서 설명 표지판을 보니 6.25 때 장사 상륙 작전에 타고 온 군함의 모형이었다.
장사 해변에는 소나무가 잘 우거져 있었다. 자전거를 세워 두고 조형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보니 군인들의 상륙작전 모형의 동상이 있고, 그 앞에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공원이었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6.25 때 많은 학도병들이 희생된 비극적인 유적지였다.
장사 상륙 작전(長沙上陸作戰)은 1950년 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 15일 6시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주로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문산호를 타고 장사에 상륙하여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작전은 원래 미8군에 떨어진 명령이었으나 인민군 복장을 입고 특수 작전을 해야 하는 사정상 북한군과 외모가 비슷한 남한 학도병에게 맡겨진 작전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후에 고립된 학도병들을 구하려고 배를 보냈지만, 이미 학도병들은 북한군 2개 사단 정예부대에 의해 대부분 전사하고 말았다. 구조하러 배가 갔지만 위험한 상황이라 상륙하지 못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학도병들이 타고 갔던 문산호는 나중에 난파선으로 발견되었다.
이 전투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여 낙동강 전선을 지키고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게 되었다. 그때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형물과 동상, 그리고 그때 특공대를 싣고 온 문산호의 모형을 실제와 같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니 애처로워 비장감이 들었다. 숙연해진 마음으로 기념탑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장사 해수욕장 옆(700여 명의 학도병이 작전에 타고 왔던 문산호의 모형)
장사해변을 지나 영덕군 남정면 부흥1길로 오르니 마을의 담장마다 산뜻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니 아름다운 정원의 주택 한 채가 눈에 띄었다. 울타리도 대문도 없었다. 특이하여 돌계단으로 오르니 50여 평의 정원에 나무를 널찍하게 심고 꽃과 정원수를 잘 가꾸어 놓았다. 정원 한 쪽에는 피크닉 파라솔과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 정원에서 뒤돌아 바다를 내려다보니 장사해수욕장이 잘 보였다.
주인을 찾으니 70대 할머니가 나왔다. 집이 아름다워서 들어왔다고 인사한 후 집을 살펴 보았다. 저택은 아니지만 전망이 좋고, 정원을 잘 조성해 놓아 이상적인 전원주택이었다. 담장과 대문을 만들어 놓지 않은 점이 특별했다. 아니 누구라도 들어가 볼 수 있게 만든 점이 고마웠다.
그 집을 나와 마을길로 들어가니 담장의 벽화가 매우 산뜻하고 선명했다. 각기 다른 장면의 그림으로서 내용도 다양했다. 여행 중에 본 길가의 벽화 중 가장 다양하고 보기 좋았다. 마을 주민에게 누가 그렸느냐고 물었더니 영덕군에서 조성해 준 것이라고 대답했다.
바다를 끼고 모롱이를 돌아가니 영덕 해돋이휴게소가 나왔다. 주차장이 넓고 낮으막한 언덕에 영덕게의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는데 모양도 산뜻했지만 스테인레스의 반짝이는 빛이 보석처럼 빛났다. 이 지방 특산물인 영덕게를 홍보하기 위한 조형물일 텐데 매우 효과적인 광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기슭의 오르막을 힘겹게 오르니 창포말등대가 나왔다. 하늘과 동해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우뚝 솟아 있어 전망이 좋았다. 그 옆에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벤치가 있고 음료수와 간식을 구입할 수 있는 간이매점도 있었다. 음료수를 하나 사서 가져간 빵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가 출발했다. 1 km 쯤 산을 돌아가니 또 전망대가 나왔는데 해맞이공원이란 비석이 보였다. 이곳 역시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점심을 지어 먹어야겠는데 물이 없어 물을 구할 곳까지 가느라 달리다보니 산기슭에 안동병원 복지연수원 건물이 나왔다. 물을 구하겠다 싶어 갔더니 문이 잠겨 있다. 연수가 있을 때만 운영한다는 것이다. 인근 식당에 들어가 정수기 물을 얻어 정자가 있는 휴게소로 와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파랗게 펼쳐진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휴게소. 지붕이 있어 그늘이 있고 바다 바람이 몰려오는 시원한 정자에 여러 개의 벤치도 있었다. 혼자 쓰기 아깝다 싶어 ‘사람도 없는 이곳에 세금을 많이 썼구나.’ 생각했다.
라면을 끓여 먹고 차 한 잔 마시려고 물을 끓이는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30여 명의 관광객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점심을 해결하느라 가방에서 꺼낸 물품을 치우고 자리를 비워 주었다. 이 일행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짐을 정리하느라 서둘러 손수건을 잃어버렸다.
영덕군 해안도로가 맑고 빛깔이 아름다워 ‘블루로드’길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또 유명해져 관광객들이 버스를 대절해서 단체로 왔던가 보다. 바닷가 길을 달리다 보니 에머랄드빛 바다가 참으로 아름다워 자전거에서 내려 나도 천천히 걷고 싶었다. 그런 아름다운 광경이 한 시간 가량이나 이어졌다. 블루로드길은 영덕군 남정면 부흥길에서부터 영덕해맞이공원을 지나 병곡면 고래불해수욕장까지 무려 64 km 나 되었다.
소나무 밭에 넓게 자리잡은 고래불 해변에는 커다란 봉송정(奉松停)이 있었다. 크기가 교실 서너 칸은 될 만큼 넓었다. 정자가 넓어 한쪽에서는 중년 여자들 대여섯 명이 둘러 앉아 노래를 불렀고, 좀 떨어져 앉은 어느 가족들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쉬고 있었지만 서로 방해가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정자에서 동해를 조망하는 사이 방문객 몇 명이 다녀갔다. 여유로웠다. 이곳에서는 자전거도 유료로 대여해주었다.
지나가던 라이더 한 사람이 잠시 정지하여 말을 걸었다. 강릉에서 출발하여 통일 전망대에 갔다가 오는 길이라 했다. 영덕 해맞이 공원에 가서 라이딩을 끝낼 것이라고 했다. 불과 2박 3일에 통일전망대까지 갔다 온다니 그 주력이 대단했다. 갔다 오는 동안 임원해수욕장 부근이 가장 힘들었다며, 그곳만 지나면 수월하게 통일전망대까지 갈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후포항을 지나는데 산에서 바다로 이어져 내려온 데크 길이 아름다워 자동차길 맨 가장자리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4~5층은 됨직한 계단을 올라갔다. 올라가며 보니 등기산 스카이 워크였다. 근래 새로 만들었는지 도색이 새롭고 모양도 아름다웠다.
유리 바닥에 흠집이 생기지 않도록 신발 위에 덧버선을 신도록 안내원이 지키고 있었다. 유리 바닥을 100 미터 정도 걸어가는데 수십 길 아래의 바닷물의 파도까지 보였다. 자세히 보면 공포감이 생길까봐 자세히 보지 않고 걸었다.
그 끝에 스테인레스로 만든 조형물 바로 앞에서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거기서 촬영하면 조형물이 다 나오지 않으니 조금 앞으로 나와서 촬영하라고 알려주고 몇 사람을 촬영해 주었다. 연기처럼 휘감아 피어 오른 스테인레스 옆에 황금색 인어공주가 엎드려서 비상하는 모양인데 곡선과 빛깔이 아름다웠다. 바다로 나아가 해맞이를 할 수 있는 데크 길이 동해안 곳곳에 있었다. 그런 시설을 만들어 놓는 것도 시대의 한 유행인가 싶었다.
후포 스카이워크 위 기념조형물 앞
후포를 지나 해변을 달리다 보니 월송정이 나왔다. 월송정은 정철의 관동별곡에 관동 8경이 나오는데 그 중의 하나다. 예로부터 아름다운 정자로 손꼽히는 명승지이다. 이 정자에는 전에도 두어 번 온 일이 있다. 지금은 월송정 못지않게 풍광이 멋진 곳이 많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월송정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승지였다.
소나무 밭에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유서 깊은 정자다. 지대가 그리 높지 않아 정자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그리 좋지 않지만 송림 사이에 있어 운치 있는 정자다.
바다를 보고 야영할만한 곳을 찾으러 바닷가로 나갔다. 야영지로서 마땅한 곳이 없어 다시 정자에 오르니 조선시대의 시인과 관료들이 남긴 글들이 정자 천정에 현판으로 많이 걸려있었다.
월송정을 나오면서 입구 옆에 있는 카페에서 야영지를 알아보려고 했는데 모두 퇴근했는지 불도 꺼지고 사람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6시가 20분이다. 바다로 나가는 길의 표시가 있어 그 길을 따라 북동쪽으로 갔다. 송림과 논을 지나 조그만 다리를 건너 숲으로 들어가니 구산해수욕장이 나왔다.
솔밭이 잘 조성되어 있고, 텐트가 소나무 사이에 대여섯 개가 쳐져 있다. 주차장 한쪽에는 캠핑카가 세 대가 있었다. 여기가 야영하기 좋겠다 싶어 음식물을 구하려고 큰길로 나가니 편의점이 있었다. 음식 몇 가지를 구하여 다시 구산해수욕장으로 돌아왔다. 카페 옆을 지나가는데 몇몇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술과 음료수를 먹으며 담소하고 있었다.
텐트를 쳐 놓고 주변을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있는지 돌아보았다. 승합차를 캠핑카로 개조한 전직 공무원이 부인과 함께 차 안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술 한 잔 하겠느냐고 물으니 건강이 좋지 않아 술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캠핑카로 온 예닐곱 명은 캠핑카의 모니터 앞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 70~80세쯤의 노인들이었다.
텐드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옆 텐트에서 70대 중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다가와 나의 여행에 관해 이것저것 질문했다. 여행객은 서로 정보가 필요하지만 이곳에서 장기간 거주하는 사람들은 주의해야 할 것 같았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저녁을 먹었기에 잠시 산책을 하며 아내와 통화를 길게 했다. 캠핑카에서 영화를 보던 노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텐트로 돌아와 잠이 설풋 들었는데 카페 부근에서 싸우는 소리에 짐이 껬다. 맥주병이 깨지는 소리가 났고, 싸움을 말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술이 취해 싸우는가 보다. 아마 어제 카페 야외 데크에서 술을 마시던 그 사람들일 것이다.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술이 취하니 다투게 되었나 보다. 술은 기분을 좋게 하는 약이 되기도 하지만 기분을 망치는 독약이 되기도 한다. 아쉬운 일이다.
22일. 구산해변에서 맹방해변으로
밖이 훤해지는 것 같아 시간을 보니 4시 20분. 아직 일출 시각은 아닌데 왜 그럴까 궁금하여 텐트의 문을 여니 수평선 위의 하늘에 노랗고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맑은 하늘에 한 가닥 구름 무늬가 매우 아름다웠다. 해가 곧 돋으려는지 하늘을 훤하게 색칠해 놓았다. 아름다움을 담아놓고자 사진을 촬영하고 지켜보니 잠시 후에는 그 아름다운 색조가 없어졌다.
텐트 문을 닫고 잠시 누웠다가 5시에 문을 열고 나와 보니 손톱만한 빨간 꽃잎이 수평선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빛이 아주 선명하고 강렬하여 놀랐다. 해돋이를 그렇게 가슴조리며 지켜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 전의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러 새벽 4시에 속초 바닷가로 가서 한 시간 가량을 떨었지만 구름 때문에 일출을 보지 못한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일출은 다시는 보러가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놀라운 일이었다. 해가 돋는 2~3분은 숨쉬기조차 아까운 절경이었다. 사진을 몇 장 촬영하다보니 해가 수평선 위로 솟아올랐다. 과거에는 일출을 볼 기회가 있었지만 일출에서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해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월송정 옆 구산해수욕장에서 본 일출. 일출을 보고 처음으로 놀라다. 아침 5시 20분 상황
한 시간 뒤에 옆에서 상주하는 노인에게 오늘 놀라운 일출을 보았다니, “제가 이곳에 오랫동안 지냈지만 오늘처럼 아름다운 일출은 처음 봄니다.” 라고 했다. 정말 이번 여행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일출을 본 것이다. 내 생애에 가장 감동적인 일출이었다.
아침을 지어먹고 구산 해변을 나왔다. 망양을 지나는데 어느 리조트 정자에 앉아 혼자 책을 보던 여인이 나의 라이딩을 눈여겨 보았다. 자전거에 커다란 가방을 양쪽에 달고 가는 내가 특별한 모습이었겠지만, 혼자 앉아 조용히 책을 보는 그 여인의 모습이 보기 좋아 나도 눈여겨 보며 달렸다. 지나오다 생각하니 뭐라고 말을 한번 건네었다면 의미있는 얘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겠다 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쳐 온 게 아쉬웠다.
그러나, 세상 살면서 특별한 순간마다 다 말하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 아쉬움이 있더라도 지나가야만 목적지까지 가는데 지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 달랬다. ‘그러니 어서 통일전망대로 달려가자.’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꿈을 이루는 데에는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이려니 여기며 아쉬운 마음을 떨치고 달렸다. 가다보니 산 위에 정자가 하나 있다. 망양정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아니었다. 망양정은 나중에 다시 나왔지만 망양정으로 올라가기에는 시간과 힘이 많이 들것 같아 지나치고 말았다.
이번 여행 중에 참 많은 정자를 보았다. 20여 년 전 북경 여행 중 용경협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가며 높은 산 위에 있는 정자를 보았다. 매우 극적이어서 동경이 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정자가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전망이 괜찮겠다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정자가 있었다. 너무 흔할 정도였다. 30년 전 유렵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유럽에는 벤치가 많다고 부러워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에 벤치는 물론 정자도 매우 흔하다. 국민소득이 높아지나 벤치나 정자가 곳곳에 놓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국가경제나 국민소득과 관계가 깊음을 깨달았다.
울진군에 들어가며 개천을 건너는데, 다리 위의 양쪽에 큰 물고기 조형물이 있었다. 그 조형물 안으로 들어가 물고기 뱃속을 지나며 건너는 재미있는 다리다.
울진 시내에 들어가는데 냉면 간판이 있어 들어가 냉면을 주문했다. 냉면 집은 우리가 아니고 옆집인데 거기도 지금은 냉면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좀 더 시내 쪽으로 들어가 보라했다.
조금 더 가다 공원 앞을 지나는데 동해안자전거길 청색 표시가 없어졌다. 노점상에 가서 물으니 자전거 길을 전혀 몰랐다. 7번 국도를 타고 가는 게 편할 거라며 시내로 들어가 그 길로 가라고 권장했다.
편의점에 들어가서 종업원에게 물었으나 전혀 몰랐다. 편의점 맞은편 한전 사무실에 가서 물으니 젊은 직원이 컴퓨터로 길을 찾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시장으로 과일을 사러가다가 콩국수 파는 식당이 있어 들어가 주문했다. 15분 가량을 기다리는데 피곤해서 졸음이 몰려왔다. 국수를 먹고 편의점에 가서 맡겨놓은 충전기를 가지고 공원길로 들어갔다. 여기서 길을 잘못 들어 또 20분을 헤매며 제 자리로 돌아왔다. 자전거 네비게이션을 켜고 네비를 따라 달렸으나 네비게이션이 전파를 잡지 못했다. 길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해 당황했다. 간신히 길을 찾았다.
죽변항을 지날 때도 자전거 길 표시가 없어져 간 길을 다시 돌아오며 몇 사람에게 질문하여 길을 찾았다. 뒤에서 오던 라이더가 앞질러 가기에 어떻게 길을 찾아 가느나고 물었다. 네비를 보고 간다하여 어떤 네비냐 했더니 네이버 지도라 했다. 휴대폰의 밧데리가 쉬이 소모될 텐데 어떻게 켜고 가느냐고 물으니 충전용량 2만의 충전기를 가져와 그걸 이용한다 했다. 내가 구입한 건 충전용량이 1만으로서 50 % 밖에 되지 않은 충전기였다. 충전기를 구입할 때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 구입한 것이었다.
오르막에서 나는 한 명의 라이더에게 또 추월을 당했다. 그들은 나처럼 짐을 많이 가지고 가는 게 아니었다. 간단한 배낭을 메고 자전거에는 짐이 없었다. 잠은 숙박업소를 이용하고, 식사는 식당에서 해결했다. 그리고 동해안 종주가 아니었고 일부 구간만 주파하는 짧은 여정이었기에 나와는 상황이 달랐다. 나는 양쪽에 가방과 앞쪽 바구니에 짐을 많이 실었기 때문에 달리기도 힘들었지만 오른쪽 어깨와 팔이 아프고 저려 많이 힘들었다.
나의 이번 여행은 정말 무식한 출발이었을까? 10일 정도의 여행이지만 자전거 애호가로서 라이딩으로 주파해보겠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경치가 좋으면 어디서든지 머물고자 했다. 또, 특별한 사람을 만나면 일정에 구애받지 않고 취재하려는 의도 때문에 숙박과 취사가 언제든 가능하도록 짐을 꾸린 것이다. 이것이 이번 여행에 어려움을 준 가장 큰 장애였다. 나는 여행을 편하게 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몸으로 체험하는 여행을 실현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몸에 무리가 많이 갔다. 다음 라이딩에는 이렇게 힘든 과정을 실행해야 하는지 검토를 해봐야겠다.
죽변항에서 시작된 고난은 갈수록 심했다. 고래불에서 만나 정보를 준 어느 라이더의 말이 맞았다. 임원 부근이 가장 힘들었다더니 오르막이 예상보다 힘들었다. 원덕과 임원항을 지나 장호리로 가는 10 km 이상의 길에 오르막이 많았다. 그 중 몇 곳은 오르막이 길었고 경사가 심하여 자전거를 끌고 가야했다. 한 굽이를 지나고 두 굽이, 세 굽이를 지나면서 네 번이면 끝나겠지 했으나 무려 7번을 이어서 오르내려야 했다.
근덕 입구에서 해변으로 다가가니 맹방해수욕장이 나왔다. 캠핑카도 있고 텐트 친 야영객도 있어 이곳에서 야영을 해야겠구나 싶었다. 고기를 굽는 사람에게 마트를 물으니 여기서 3 km 내륙으로 들어가면 근덕에 하나로 마트가 있다 했다. “6시가 넘었는데 문을 닫지 않았을까요?” 하고 다시 물었더니 10시까지는 영업할 거라고 했다.
날도 저물었고 몸도 상당히 지쳐 시장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가 어려웠지만 저녁과 내일 아침 식사 음식이 없어 근덕의 하나로 마트를 찾아갔다.
아뿔싸! 문을 닫았다. 일반 편의점에 가서 식품을 구하여 다시 맹ᅢ방해수욕장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고기를 굽고 있는 그분에게 하나로 마트가 문을 닫아 편의점에서 음식을 구입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분은 어서 여기 앉으라고 했다. 옆에는 그의 부인과 다른 부부, 또 한 명의 여행객 다섯 명이 있었는데, 여기서 고기도 먹고 술도 한 잔 하라고 권했다.
텐트를 치고 내 가방에서 술 한 병, 과일을 꺼내 가지고 와서 합석했다. 함께 있던 여자 분이 밥을 떠 주고 비단조개 무침 회를 주었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고기 굽던 분 역시 교직에 있다가 3년 전에 퇴직한 전직 교감이었다. 또 한 가족은 군포에서 캠핑카를 몰고 왔단다. 군포는 내가 살던 곳이었고, 지금은 수원의 이웃 동네 사람이다. 군포에서 온 젊은 분이 조개잡이 도구를 구입하여 세 양동이나 잡았단다. 또 오늘 밤에 어항으로 물고기를 잡아 올 테니 여기서 하루 더 놀다 가라고 했다. 그분은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계속 먹을 것을 내놓았다.
엉겁결에 앉았다가 저녁식사와 술까지 해결했다. 그러나 혼자 온 60쯤의 남자가 너무나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대화가 잘 되지 않았다. 아니 다른 사람이 말 한 마디 할 기회를 주지 않고 떠들었다. 낮에는 한 마디도 않더니 술 몇 잔 드시니 저리 왕성하게 말씀을 한다는 것이다. 두 시간쯤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샤워를 하고 텐트에 돌아오니 11시였다.
23일. 맹방에서 강릉 박00 선생님 댁으로
아침 일찍 밥을 지어먹고 짐을 쌌다. 박 선생님 댁에 오늘 도착할 거라고 약속을 했고, 어제 대화를 나누어 보니 흥미가 없어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26일과 27일은 전국에 비가 올 거로 예보되어 오늘 출발하지 않으면 빗길에 달려야 해서 라이딩이 더 어려워지겠기에 짐을 꾸렸다. 출발 준비를 마치고 어제의 자리로 가니 전직 교감님이 비단조개를 까고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명함을 드렸다. 군포에서 온 사람에게도 명함을 주고 작별 인사를 했다.
삼척 증산도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데크 길이 나왔다. 일부는 목재 계단이었다. 가벼운 자전거야 부담 없이 자전거를 들고 가지만 40 kg 이상인 내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오를 때는 무척 힘이 들었다. 계단이 있을 때는 자전거 바퀴를 굴려 갈 수 있도록 물받이 홈통 같은 걸 계단 가장자리에 설치해야 하는데 여기엔 그것마저 없었다.
데크 길을 빠져 나오니 바다낚시를 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이번 여행에서는 많은 낚시꾼들을 보았다. 낚시 인구가 많이 늘은 모양이다
삼척 추암 해변을 지나는데 조경을 잘 조성해 놓은 야영장이 있었다. 텐트 하나 치는데 요금이 25,000원이란다. 도심에서 가까워 그런지 많은 이들이 야영을 하고 있었다. 삼척을 벗어나는 오르막 길 정상에 식당이 있어 더위를 잠시 피하고자 냉면을 먹고 출발했다.
산으로 접어드는 좁은 데크 길에서 담장에 부딪혀 넘어졌다. 지나가던 승용차가 정차하더니 운전자가 괜찮으냐고 물었다. 다행이 다치거나 부서진 것도 없다. 자전거의 기아 변속이 잘 안 돼 하루 평균 서너 번은 넘어졌다. 조금 더 가니 자전거로는 오르지 못할 가파른 커브길이 나왔다. 승용차가 뒤로 밀려 다른 차에 부딪혀 사고가 나서 여러 사람이 웅성거렸다. 그곳을 지나가는데 경사가 심하여 허리를 구부리고 새끼발로 걸으며 자전거를 끌어야 했다. 이번 여행 중 가장 심한 경사였고 길고 긴 오르막이었다. 자전거가 무거우니 조금만 잘못하면 넘어졌다. 정동진으로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그와 같은 가파른 오르막을 넘어야 했다.
정동진에 두세 번 온 것 같은데 올 때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있다. 관광객이 많이 오니 그만큼 투자를 하는가 보다. 옛 역사(驛舍)는 없어지고 철길은 레일바이크로 바뀌어 관광객들이 레일바이크를 타고 수시로 지나갔다.
여기서 쉬면서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사진 촬영 봉사를 해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신을 촬영하려 하여 사진이 쓸 만한 게 별로 없다. 전신을 촬영하면 사람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고 기립해 있는 모습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강릉의 박 선생님께 오늘 저녁에 댁으로 도착이 가능하다고 전화로 알리고 여유롭게 달렸다. 5시 30분쯤 도착하니 내외분이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한 달 전 한라산 영실에서 잠시 인사를 나누고 다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 환대해 주시니 무척 고마웠다. 얼려 둔 홍시를 주셨다. 이가 시리도록 시원하고 꿀처럼 달콤했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박 선생님을 따라 식당으로 갔다. 한옥의 근사한 한정식집이었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깨끗했다. 4명이 앉아도 넉넉한 큰 상에 무려 50 가지가 넘는 반찬이 골고루 나왔다. 정말 산해진미였다. 맥주 한 병, 소주 2병을 비우고 일어났다. 오늘 박 선생님 댁에서 잘 거라서 내가 계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박 선생님 모르게 화장실 다녀오다가 계산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과일과 시원한 음료수를 주셨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사랑방에 들어갔다. 손님 맞이방이라 했다. 평소에도 손님들이 자주 오기 때문에 방을 따로 쓰도록 꾸며 놓으셨단다. 그 방은 화장실과 샤워실이 따로 있어 쓰기가 편했다. 저녁 식사하러 가기 전에 세탁기에 넣었던 내 빨래를 모두 탈수하여 가져와 건조대까지 주셨다. 며칠 만에 세탁을 했다. 고맙다. 편안한 잠을 이루었다.
24일(일) 강릉 시내 관광
(경포호, 솔바람다리, 명륜향교, 대관령자연휴양림, 안반데기, 진고개, 중앙시장)
사모님이 요통으로 거동이 어려워 조반은 나가서 했다. 두부 정식 집에서 조반을 먹었다. 그리고 박 선생님의 승용차로 강릉 시내 관광을 했다. 먼저 경포대로 가서 경포호와 자신의 모교인 명륜고, 그 옆의 명륜향교를 돌아보았다. 박 선생님은 자세한 해설까지 친절하게 곁들여 주셨다.
점심으로 냉면을 먹고 대관령 휴양림에 들어가 1시간쯤 산책을 했다. 키가 늘씬하게 뻗은 소나무 밭이라 시원하고 송림도 보기 좋았다. 솔향이 그윽했다. 언덕에 잠시 앉아 간식을 먹으며 땀을 식히니 신선이 따로 없다.
내려와 안반데기로 올라갔다. 해발 1100 m 고지에 있는 고냉지 밭. 커다란 풍력발전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힘차게 돌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프로펠러가 한가롭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니 속도가 매우 빨랐다. 프로펠러 하나의 길이가 무려 50여 미터. 그러니 프로펠러의 도는 원의 지름은 100미터 정도일 것이다. 프로펠러가 안 바퀴 도는데 5~6초 걸리니 무려 6초에 314 m를 달리는 속도다.
거기서 내려와 맞은편 언덕에 있는 정자로 올라가는 길목에 카페가 있다. 이 험한 산골 밭도 관광명소가 되나 보다. 경이로운 곳은 어디든 신선한 감동이 있다. 대부분의 밭에 작물이 없어 알몸으로 드러나 있다. 일부 밭에 양배추가 심어져 있어 물을 주는데 다섯 사람이 매달려 있다. 두 사람은 분무기를 붙잡고 세 사람은 분무기의 호스를 붙들어 주어 물을 주었다. 이어진 산등성이로 줄지어 선 풍력발전기가 이국적 풍경이었다.
언덕의 정자에서 내려와 진고개로 달렸다. 산마다 소나무가 울창하여 우리나라도 아름다운 숲을 많이 가지게 되었음을 실감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곳곳에 휴양림이나 삼림욕장이 있다. 길고긴 산 고개를 넘어 선교장에 갔으나 오후 6시가 지나 박물관 관람은 하지 못하고 정원을 돌아보고 나왔다.
박 선생님 댁에 들러 사모님과 함께 강릉 중앙시장의 활어 시장에서 오징어를 5 마리 샀다. 세 마리는 회감으로, 두 마리는 찜용으로 손질하여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회감은 소주 안주로, 찜용은 데쳐서 먹물까지 먹었다. 산 오징어를 요리해선지 맛이 좋았다. 내 아내가 이틀이나 신세지면 미안한 일이라고 하루 밤만 신세지라 당부했는데 두 분이 한사코 만류하여 하루 더 신세지게 되었다.
벽돌로 지은 주택이었는데 마당에 텃밭과 꽃밭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과일 나무 몇 그루가 잘 자라 있어 박 선생님의 치밀한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소대장 시절, 난동을 부리는 병사를 앞서서 제지하려다가 총을 맞아 복부 관통상을 입어 간신히 살아났다는데 그 보상금의 일부를 모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하였고, 자신의 정원에서 가장 좋은 나무조차 모교에 기증한 분이었다. 이태규 컬럼집을 대부분 수집하였고, 그의 글이 좋아 그의 글에 대해 집필하고자 글을 정리하고 있었다.
박 선생님께서 강릉의 명소 관광 안내를 해주고 식사도 잘해주시어 황송했다. 저녁 식사 후에도 차와 과일을 먹으며 담소하다가 10시쯤 자리에서 일어나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참 고맙다.
25일(월). 박 선생님댁에서 간성으로
아침 식사를 순두부찌개와 계란찜, 고소한 감자전, 그 외에도 여러 음식을 차려주시어 화려한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출발 직전 셀카로 부부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나왔다. 박 선생님은 마을 어귀 1 km 까지 나오시어 자전거로 가기 쉬운 길을 알려주셨다. 작별 인사를 하고 자전거 네비를 이용하여 경포대로 향했다.
약 20분 달리니 경포대가 나왔다. 경포대에서 경포해수욕장으로 가서 주변을 살펴보고 출발했다. 자전거길의 표시가 잘 되어 있고, 주로 평지라서 달리기가 좋았다. 여러 차례 솔밭이 있는 해수욕장을 지났다. 솔밭이 있는 곳은 그늘이 있어 쉬거나 야영하기가 좋다. 다만 화장실이 있어야 세면이나 취사가 가능한데 아직 해수욕장이 개장을 안 하여 그런 시설을 이용하기가 어려웠다.
연곡해수욕장 앞에서 우유를 사고 간식용 빵을 구입했다. 주문진항을 지나다 건어물 가게에서 국을 끓여먹을 황태포와 조개젓을 샀다. 하조대를 지나 낙산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소나무 그늘과 벤치가 있는 곳에서 짐을 풀고 라면을 끓였다. 나중에 보니 취사 금지 해수욕장이었다. 얼른 끓여 먹고 다시 짐을 챙겼다. 옆에 앉은 70세쯤 된 분이 나의 여행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낙산해수욕장에서 모터보트를 운행하여 관광객들을 태워주는 분이었다.
속초를 지나 청간정에 다다랐다. 청간정 옆으로 자전거길 표지를 따라가니 계단이 나왔다. 자전거가 무거워 들고 가기가 힘들어 자동차가 다니는 지방도로로 우회하여 달리다 보니 잠시 후에 동해안 자전거 길을 만났다.
지방도로가 빠르기는 하지만 자동차와 같이 달리기 때문에 위험하다. 자전거 도로는 대체로 해안을 끼고 돌도록 되어 있어 바다 풍경을 보며 달리기에 좋았다.
아야진 해수욕장과 죽왕 오토캠핑장을 지나 송지호 해수욕장에 다다랐다. 해변에 소나무밭도 있고 텐트도 몇 개 보였다. 오후 6시가 넘어 야영할 자리를 잡아볼까 했지만 되도록 고성 통일전망대 가까이 가야 내일 오전 중에 통일 전망대에 도착, 귀가 길이 순조롭겠다 싶어 다시 북쪽으로 달렸다.
30분쯤 달리니 남천 둑길이 나왔고, 둑 아래에 넓은 꽃밭이 있는 집이 있었다. 꽃만 있는 게 아니고 기와, 나무판, 항아리 등에 그림을 그려놓고 문구를 써 놓아 게시한 집이 있었다. 예사롭지 않아 자전거를 모종[정자] 옆에 기대 놓고 주인을 찾으니 60대 후반의 남자가 제초 작업을 하고 있었다.
꽃밭을 어떻게 넓은 정원으로 가꾸어 놓았는지 여쭈어 보았다. 저 사람에게 물어보라했다. 옆에는 부인이 서 있었다. 부인에게 내 명함을 드리고, 자전거 여행 중인데 특별한 정원을 가꾸어 놓아 어떻게 가꾸었는지 여쭙겠다고 말씀 드렸다. 부인은 석식을 마치고 산책을 나가려는 중이었는데 나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잠시 들어오라고 했다. 따라 들어가니 거실에 안내하고 음료수를 한 잔 주셨다.
자신은 이곳에 8년 전에 와서 꽃을 심고 가꾸며 그림을 그리어 집 주위에 게시해 놓고 있다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8년 전에 이 집 주인과 재혼하여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져 정자[남천마루정]에 텐트를 친 후 저녁을 지어먹고 이따가 말씀을 더 여쭙기로 하고 집을 나왔다.
주인이 잠시 후에 정자로 오더니, 나에게 잠시 멈추고 자신과 대화를 하자 했다. 나에게 몇 가지를 묻더니 자신이 이 집에 살게 된 과정을 말해 주었다. 그러다가 방 하나를 비워 줄 터이니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했다.
그래서 따라 들어가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부인이 저녁 밥상을 잘 차려놓으셨다. 너무나 고마워서 주문진에서 구입한 조개젓과 쵸코렛을 몇 개드렸다. 식사를 하며 주인과 소주를 한 잔 나누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분은 23년 전에 경찰공무원으로 양양공항에 재직 중 과로로 인하여 뇌졸증으로 쓰러져 퇴직하게 되었다. 그분은 뇌졸중 직후에는 사지(四肢)를 거의 쓰지 못했다. 그래서 입원치료를 받으며 다른 사람이 대소변을 받아낼 정도였다. 그러나 치료를 받고 재활운동을 하여 지금은 80 % 이상의 신체기능을 회복했다. 그리고 2년여 소송을 하여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아직도 한 손은 장애가 남아있지만 꽃을 기르고 가꾸며 사회활동과 봉사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거실과 방의 벽에는 부부의 사진과 신문에 보도된 기사 등이 가득 붙어 있었다. 집 주변의 꽃, 그림, 여러 문구들이 매우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모습이었다.
길가의 남천 둑길 아래, 자전거길 옆, 아름다운 꽃밭의 집
자신이 퇴직 후, 어느 정도 활동이 가능해져 이곳에 혼자 사시던 어머니께서 병이 깊어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며 물려주신 집이다. 첫 번째 결혼해서 살던 아내가 살림을 잘못하여 빚 속에 파묻혀 집을 나갔고 결국 이혼하게 되어 혼자 살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재혼하여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했다. 퇴직 후 공무원 연금으로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기 때문에 지금의 집 앞 텃밭을 꽃밭으로 만들게 되었다. 지금의 아내가 꽃, 시 쓰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여 매일 꽃을 가꾸며 틈틈이 봉사활동을 나가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산다.
부인은 오래 전 남편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 혼자 살았다. 간이 좋지 않아 투병 중 동생이 간을 기증해 주어 간 이식을 받아 지금은 정상인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가끔 부작용 증세가 나타날 때가 있어 주의하며 산다. 간 이식 후 요양차 백담사 부근의 친구 집에 가서 일을 거들다가 지금의 주인을 소개 받았다. 처음엔 재혼할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지금의 남편이 요양하도록 살펴주겠다고 하여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다.
한 사람은 한 팔의 장애, 한 사람은 간의 이식, 두 사람 모두 건강이 좋지 못하지만 서로를 위해 주며 의지하고 사는 게 아름다워 보였다. 남천 길가에 꽃을 심고 가꾸어 본인들도 기분이 좋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기분 좋게 하고 있다. 나 역시 300여 평의 넓은 꽃밭에 가득한 꽃을 보게 되었고, 그 꽃밭에 담긴 아름다운 사연도 알게 되었다.
지나가는 길손이 한데서 자는 게 걱정이 된다고 자기 방을 비워준 내외는 아침밥도 정성껏 지어 주셨다. 정말 감동적으로 고마웠다.
26일(화). 간성 남천에서 최종 목적지인 고성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짐을 챙기고 자전거를 손보았다. 자전거에 부착한 가방걸이가 느슨하여 철사로 조이고 핸들 앞에 단 물품 가방도 고쳐 달았다. 일기예보 대로 아침 6시부터 비가 내렸다.
부인인 노 시인이 지어준 조반을 먹은 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출발하려고 시계를 보니 8시다. 통일전망대를 향해 출발하는 나를 배웅하기 위해 노 시인이 집 밖까지 나와서 전송해 주었다. 우비를 입고 자전거에 올라타며 작별인사를 드렸다. 뒤를 돌아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달렸다.
자전거를 타고 1 km쯤 달리다 남천마루교를 건넌 후 잠시 자전거에서 내렸다. 그 집을 돌아보았다. 감회가 새로워 그 집과 마을, 다리를 넣어 사진을 촬영했다.
건강이 좋지 못하지만 서로를 위해 주며 의지하고 살아가는 가여운 부부. 그 아름다운 꽃밭과 함께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내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시골의 논길과 산길을 달려 거진항, 대진항을 지나 통일전망대가 가까워지는데 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대진항을 지나다 돌아갈 직행버스 시간을 알아보려 직행버스 정류장을 찾아갔다. 건물 안에 들어가 버스를 알아보니 지금은 여기서 직행버스를 운행하지 않는다 했다. 거진까지 내려가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바닷가로 나와 자전거 길을 따라 40분 정도 달려가니 통일전망대의 출입신고소가 나왔다. 드디어 목표 지점이다. 우리나라 남쪽 끝 해운대를 출발하여 휴전선이 보이는 최북단 고성의 통일전망대에 도착한 것이다.
여정 11일, 자전거 라이딩 9일 만에 동해안 국토 종단을 마쳤다. 그런데 목표를 이룬 성취감을 맛볼 겨를이 없었다. 통일전망대에는 자전거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출입신고를 하고 자동차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비는 계속 내리는데, 수원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이곳까지 먼 길을 달려왔는데 통일 전망대를 보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반드시 자동차로 가야한다 하여 혼자 차를 몰고 온 방문객들에게 태워줄 것을 사정했다. 다행이 어느 대학의 팀장님께서 태워주셨고, 입장료 3,000원까지 대신 내주셨다. 그분 덕택에 통일전망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함께 전시관도 돌아보고 통일전망대까지 올라가 사진도 촬영해 주셨다. 해설을 듣고 다시 차를 타고 나왔다. 고마운 마음에 여행 종료 후, 내가 쓴 수필집을 한 권 보내드렸다.
9일 간의 라이딩 끝에 목표 지점인 고성 통일전망대 앞에 서다. 성취감의 기쁨을 우의로 감쌀 수밖에......
통일전망대에서 나와 출입신고소가 있는 상가에서 점심으로 떡만두국을 한 그릇 사먹고 대진항으로 달렸다. 올라가던 자전거 전용도로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대진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게 아니어서 일반 자동차 도로를 이용했다.
비는 계속 내리고 한적한 시골길이어서 대진 직행버스 정류장도 혹시 스쳐지나갈 것 같아 사람을 만날 때마다 문의하여 버스 터미널을 어렵게 찾아갔다. 속초행 직행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20분 전에 버스가 출발했다. 앞으로 6시간을 기다려야 한단다.
오늘 수원에서 합창단 연습에 참여하려면 7시 이전에 수원에 도착해야 한다. 그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35,000원을 주고 택시를 탔다. 속초에 가서, 2시 20분발 수원행 직행버스를 탔다. 점심을 먹지 않고 대진버스정류장에 왔더라면 버스를 놓치지 않았으련만 굳이 점심을 먹고 오느라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사전에 버스 시간을 알아보지 않은 탓이다.
버스를 타고 가며 낮잠을 이루어 피로를 풀고 싶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지도를 보며 여행 일정의 기억을 반추하며 수원에 도착했다, 11일 간의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계획대로 동해안자전거길을 종주했다. 나의 새로운 기록 하나가 만들어졌다. 힘들었고, 위험했다. 고개를 젖히고 장시간 달리느라 팔이 저리고 무릎이 아파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상당 기간 즐거운 회상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리고, 또 할 일이 남았다. 다음 도전의 구상이다.
첫댓글 잘하셨습니다
멋지셔요
수원 문협 회장님으로서 무척 분망하실 텐데 관심 기울여 보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장님께서 참 많은 일을 해내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자전거 여행의 묘미를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쉽지만은 않은 길이지만 도전하는 그 자체가 멋있습니다.
읽어주시어 고맙습니다. 언제나밝은 얼굴로 수원문협에 많은 도움주시어 감사합니다.
훌륭하신 여행길이고 지금도 2030이신 체력이라고 자부해도
되지요..자전거도 튼튼해야고요.
100미터마다 건강 기부 점프가 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언제나 시간의 여유가 될지요.
기록 체험기 잘 읽었습니다.
건안을 빕니다..
재미도 없는 긴 글을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누군가 자전거 여행 경험이 많은 분에게 코치를 받았더라면 좀더 수월한 여행을 할 수 있었겠다 싶습니다. 여행에는 가이드가, 선수에게는 코치가,, 인생길에는 스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멋진 여행기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안 교장 선생님, 여행기를 보며 좋은 내용, 많이 참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