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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23
6월11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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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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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sgpXBPxm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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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위대한 바오로 사도 뒤에는 탁월한 조력자 바르나바 사도가 있었습니다!>
큰 족적을 남긴 걸출한 인물은 홀로 탄생하는 것이 절대 아니더군요. 무대의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조력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 뒤에는 지혜로 충만했던 요셉 카파소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고 존경받는 여성으로 유명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뒤에는 회개한 아버지 버논 윈프리가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 뒤에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초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선교사 바오로 사도 뒤에도 위대한 조력자가 한명 계셨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바르나바 사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면서도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바오로 사도를 도와 초세기 교회 건설에 엄청난 기여를 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축으로 건설되는 것처럼 보이던 초세기 교회가 탄력을 받고 예루살렘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르나바 사도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를 적임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바르나바 사도가 행한 일 가운데,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 탁월한 일 한 가지가 있었는데, 흙속의 진주를 찾아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오로 사도를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비범하고도 탁월한 능력을 눈여겨 본것입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원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르나바는 애칭이자 별명입니다. 바르나바란 이름이 지닌 의미는 ‘위로’ ‘격려’ ‘용기를 복돋는 전문가’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계 사제였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서울 강남격인 예루살렘 시내에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금수저 출신에 수려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를 크게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교로 개종은 했었지만, 아직도 낯설기만한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과의 관계 안에서 무척이나 위축되어 있고 의기소침해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갑니다.
따뜻하게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북돋아주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던데 앞장서던 바오로 사도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찾아왔을 때,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쉽게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러다가 또 언제 마음이 바뀌어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입장에서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 앞에서 꽤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 속에서 성령과 지혜로 가득했던 바르나바 사도가 두팔을 걷어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바르나바 사도는 그를 따뜻히 환대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해줍니다.
바르나바 사도의 배려와 협력에 힘입어 바오로 사도는 용기백배해서 그 위대한 선교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선교 여행 초기에 ‘바르나바와 바오로’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행에서 돌아올 때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로 표현합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때로 바오로 사도의 스승처럼 그를 지도했습니다. 때로 친구처럼 그를 동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자처럼 처신하며 그를 섬겼습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그리스도 교회를 이방인들에게 개방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바오로 사도의 편에 섰습니다. 적극적으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 회의는 이방인들에게 교회 문호를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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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나쁜 것이 돌아온다고 느낄 때는?>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joHW4XpDTQE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란 뜻을 지닙니다. 아마도 이름대로 이웃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박해와 순교였습니다. ‘주는 것을 받는다.’라는 것은 하나의 흔들림 없는 세상의 법칙입니다. 내가 주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내가 위로하면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좋은 것을 주라고 파견받지만 박해와 모욕과 죽음을 받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좋은 것만을 주는데 내가 주지 않은 안 좋은 것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잘해 줘봐야 보람도 없다며 잘해주기를 멈춰야 할까요? 그러나 주는 것은 반드시 다시 받게 된다는 법칙을 믿어야만 합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는 많은 기적도 행했지만, 또한 위대한 설교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바닷가 마을은 안토니오 성인의 말을 좀처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성인의 설교를 들으려 모여들지 않았지만, 오히려 바다의 물고기들이 몰려와 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물들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듣게 하심으로써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위로하기 위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위로로 다시 갚아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만약 100명이 들을법한 설교인데 1명만 듣는다면 99는 주님께서 갚아주십니다.
성 프란츠시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행복론은 더 특이합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느니보다는 주님께 받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 내가 수많은 사람을 회개시키면 그것이 참 행복일까? 아니다. 더 큰 행복이 있다. 내가 어느 집에 문을 두드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먹을 것을 청할 때 심한 모욕을 당할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그러면 나는 지치지 않고 다시 문을 두드려 주님의 이름으로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 사람은 욕을 하며 오물을 뿌리고 나를 두들겨 팰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성인들은 주는 대로 받는다는 이 법칙을 아셨습니다. 당신들이 이 세상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주님께서 그 대신 더 큰 열매로 갚아주신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남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는 데 지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합당하게 채워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숨을 바쳐 복음을 전했는데 사람들을 나의 목에 칼을 댔다면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이웃이 어떠한 반응을 하던 내가 주는 것은 반드시 돌려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을 받으면 받아서 좋고, 거부당해도 나는 사랑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사랑이 거부되는 데서 오는 고통이 크다면 그만큼 더 큰 위안으로 주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독일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1부터 100까지 차례대로 합한 값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1+2+3+4+…+99+100’ 이렇게 하나하나 더해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손을 들더니 다 더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놀라며 값을 물었습니다.
“5050입니다.”
10살 때 이 문제를 푼 소년의 이름은 19세기 최고의 수학자가 될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였습니다. 가우스는 무조건 1부터 100까지 더하려 하지 않고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러한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100=101, 2+99=101, … , 99+2=101, 100+1=101”
1부터 100까지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을 더하면 항상 101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101이 50개가 생기니 101×50=5050이 나옵니다.
우리가 내어주는 것에도 이러한 법칙이 숨어있습니다. 결코, 내가 하는 수고는 합당한 보상을 받지 않고 끝나지 않습니다. 1밖에 받지 못했다면 사람들이 주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황금으로 도금된 100을 보상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 만들어놓으신 법칙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러면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결코, 내가 하는 사랑보다 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랑이 거부당한다면 더욱 기뻐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그에 합당한 사랑을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결과만 보고 결코 지쳐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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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 바르나바는 비록 12사도의 명단에는 들지 않았지만,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훌륭한 사람”(10,24)으로 사도로 인정하였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는 자기 재산을 모두 사도들에게 봉헌함으로써 바르나바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개종한 후 초대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바오로를 소개하였고, 그 공동체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바오로의 선교여행에도 함께 하였고, 안티오키아 교회를 사목하기도 하였고, 바오로와 함께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 공동체에 전달하기도 하였고, 예루살렘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많은 활약상을 보였다. 바르나바 사도는 키프로스 교회의 창설자로 알려져 있으며, 61년경에 키프로스 섬의 살라미스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이다.
복음: 마태 10,7-13: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세상의 파멸이 곧 복음선포이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로 세상은 이제 다른 나라가 오고 있고 그 나라가 자기의 뒤를 이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이 말씀에 순명하여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꺼려하지 않고, 장차 자신들이 겪을 위험과 싸움을 알고 있었지만 주님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은 하늘 나라의 선포자가 되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주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사도들은 스승의 명령에 따라 살게 되니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상과 닮은 자들이 되었다. 세속적이었던 그들이 하늘 중심적인 이들이 되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진리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과 닮음을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한다. 그들이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명령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하고, 악마를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그러나 보상을 바라고 영적인 선물을 베푼다면 그 선물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탐욕을 단죄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9절) 보수를 받지 않는 사도들이기 때문에 돈을 지닐 필요가 없었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치면서, 이처럼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그래서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과 신발과 지팡이를 지니는 것도 금지 되었다.
여행 보따리는 세속 물건에 대한 관심을, 여벌 옷은 이단이나 율법 같은 옷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씀이며, 신발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탈출 3,5 참조) 가시나무와 덤불로 덮인 거룩한 땅 위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지니지 말아야 한다. 지파이는 권위의 상징이다. 하느님의 힘이 아닌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팡이는 아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절)고 하셨다. 그러므로 마땅한 사람을 찾아 그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런 다음 더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 이 집 저 집 옮겨 다녀서는 안 된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라고 하시며 평화를 비는 말과 몸짓으로 표현하라고 하신다.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12절)
초대 교회의 ‘열두 사도의 가르침’에 보면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대해서 복음의 원칙을 따라 이렇게 하시오. 어느 사도든 여러분에게 오면 주님처럼 영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 머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다음 날도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을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음 장소에서) 숙박할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아무 것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에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11,3-6)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전할 수 있어야 하며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생명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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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바르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를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정녕 위로의 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둘 생각으로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바오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사흘 동안 눈이 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에서 하나니아스를 만나 눈을 뜨고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불신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을 찾아가 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정식으로 선교사가 되지 못한 채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바오로는 비로소 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를 마련해 준 이가 바로 바르나바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모든 신자가 바오로를 두려워할 때 바르나바만이 그를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인도해 줍니다.
또한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파견되었을 때 그곳과 가까운 타르수스에 가서 바오로를 만납니다. 그리하여 철저한 외로움 속에 있던 바오로를 이끌고 안티오키아뿐 아니라 소아시아 일대를 함께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합니다. 이렇듯 바르나바는 바오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를 건넨 은인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바르나바는 어떻게 ‘위로의 아들’로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성경에는 이에 관하여 명시적으로 밝힌 본문이 없습니다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아마도 바르나바는 자신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된 것을 두고두고 감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무런 대가 없이 바오로에게 다가가 그를 믿어 주고 인도하였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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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생활>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7-13)
이 말씀은,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는 사도들에게 말씀하신 ‘활동 지침’인데, 관점을 바꾸어서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지침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기쁜 소식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예수님의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 후에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과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는 소식으로 바뀌었지만(루카 24,46-47; 사도 2,38), 본질적으로 같은 복음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구원을 받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이지 세속의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세속에서 잘 살게 되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한 적이 없습니다. (이쪽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것만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중간 경유지에서 멈추어 서는 어리석은 나그네와 같습니다. 신앙인의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도들이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고 마귀들을 쫓아낸 일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전해 준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해 준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수단으로 병자들을 고쳐 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말’로 할 수도 있고, ‘치유의 은총’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병이 치유되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하고 멈추면 안 됩니다. 바라는 대로 병이 낫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그때 실망해서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은총은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 자기가 무상으로 받은 은총을 다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활동입니다. ‘나의 것’을 나누어 주는 활동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것’을 전달해 주는 활동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은총을 받아 누리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는 것은 은총의 대가를 지불하는 일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일입니다. 봉헌 예물은 언제나 감사 예물입니다. 또 이 말씀에는, 헌금을 많이 바치면 그것에 비례해서 복을 많이 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바치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려 주셨고, 계속 내려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마치 하느님과 거래하듯이 하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빈손으로 가라.”는 지시는,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는 복음만 가지고 가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세속의 물질에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만 믿고 의지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활동비 한 푼 없이 어떻게 선교활동을 하나?”라고 걱정하면서 간다면,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는커녕 ‘걱정스러운 소식’만 전해 주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걱정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에 연결됩니다.(마태 6,25-34)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에게 당연히 먹을 것을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빈손으로 가는 일꾼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라고 물으셨는데, 그때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실제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만일에 믿음도 없이 기도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라는 말씀은, 숙식을 제공할 사람을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가 너희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먹이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직접 도와주실 때도 있고, 천사를 보내실 때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을 통해서 도와주실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오는 도움이 곧 하느님의 은총일 때가 많습니다.)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으려고 옮겨 다니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성실하게 일했는가를 보실 뿐이고, 성실하게 일했다면 실패의 책임은 묻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선교활동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반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업적을 쌓았는가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루하루 거룩하고 충실하게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한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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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교 때입니다. 이름이 기억나는 친구가 많지 않지만 유독 기억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이름이 ‘박정희’였습니다. 당시 대통령과 같은 이름이었습니다. 선생님들도, 친구들도 박정희라는 친구의 이름을 부를 때는 웃곤 했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친구의 얼굴과 이름이 기억납니다. 매사가 반듯했던 그 친구는 주어진 자리에서 잘 지내고 있을 겁니다. 저는 세례명이 ‘가브리엘’입니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천사입니다. 부르기도 좋고, 의미도 좋습니다. 제게 세례명을 정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미국에서 신문을 만들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세례명이 지니는 뜻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해 말 중국에서 처음 코로나19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언론은 ‘우한폐렴’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병 앞에 지역 이름을 붙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지역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WHO는 공식 명칭을 ‘코로나19’로 정했습니다. 바이러스의 형태가 코로나(왕관)처럼 생겼고, 19번째 변이였기 때문에 코로나19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코로나라는 이름 때문에 피해를 본 기업이 있습니다. 멕시코의 대표 주류인 ‘코로나 맥주’입니다. 저는 멕시코에 갔을 때 마셨고, 라임을 곁들여 마시면 상큼한 맥주입니다. 코로나19가 팬데믹(대유행)이 되면서 멕시코는 더 이상 코로나 맥주를 생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코로나 맥주를 판매하는 기업에게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축일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초대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분들의 땀과 노력이 열매를 맺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났고, 유대인의 회당이 아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란 무엇일까요? 교회는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운전하다가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기도 합니다. 간식을 먹기도 하고, 차에 기름을 넣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고속도로 휴게소는 시설이 무척 좋아졌습니다. 우선 깨끗하고, 음식도 맛이 있고,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아무리 고속도로의 휴게소가 좋아도 그곳에서 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시금 목적지를 향해서 떠나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고속도로에 많은 휴게소가 있습니다. 사찰, 회당, 사원, 교회들이 있습니다. 각 종교는 저마다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고, 영원한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직을 수행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신 말씀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신앙인들은 교회를 통해서 삶의 위로를 받고, 새로운 길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의 뜻은 무엇인지, 세례명의 성인은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하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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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로 네가>
마태오 10,7-13 (열 두 사도를 파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바로 네가>
바로 너를 믿기에
바로 너를 바라기에
바로 너를 사랑하기에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너를 내가 뽑았으니
네가 가거라
세상 속 깊이 사람들에게
네가 선포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네가 고쳐주어라
아픔으로 울부짖는 이들을
네가 일으켜 주어라
짓눌리고 쓰러진 이들을
네가 깨끗하게 해주어라
몸과 마음 찢겨진 이들을
네가 쫓아내어라
불의를 일삼는 악의 무리들을
네가 거저 주어라
네가 내게 받은 모든 것을
네가 지니지 마라
나 이외의 그 모든 것을
네가 빌어주어라
평화를 누릴만한 이에게 평화를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네가 그리 하여라
다른 누구를 찾지 말고
바로 너부터 그리 하여라
다른 누가 없더라도
네가 홀로라도 그리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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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종종 시간이 될 때 일부러 서점을 찾아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워낙 발달해 얼마든지 온라인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지만 서점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들을 보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를 직접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베스트셀러 가판대를 보면 사람들이 어떠한 욕구를 충족하고 싶어 하는지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린 시절에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같은 사람을 대하는 기술을 다루는 도서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7막 7장> 혹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와 같은 성공에 관련된 책들이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IMF 이후, 커다란 변화가 있었는데, 어떻게 몇 억을 모을 수 있는지, 부동산 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재테크 책들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서점에 갔는데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책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책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이대로 좋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 <참 애썼다 그것으로 되었다>, <당신의 마음을 안아줄게요>
이 제목들을 보면 요즘의 시대가 위로를 필요로 하는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은 천천히 살아도 된다는 것, 존재만으로도 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책들이 인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로”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위로의 사전적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듯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의 괴로움과 슬픔을 달래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상기 책들의 제목처럼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정말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은 위로와 울림을 선사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입니다.
물론 적당한 위로의 말들이 지쳐있는 일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마치 인스턴트와 같아서 순간적인 즐거움만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그 답을 찾아야 할텐데 우리는 이 모범을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바르나바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래의 이름이 요셉이었던 바르나바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합류한 뒤 자신 소유의 밭을 팔아 교회에 헌납했고 신앙생활에 전념했습니다. 그에겐 고유한 업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오로가 초대교회 공동체에 합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사도 바오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오로는 바리사이파 출신으로써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박해하는 데 선봉에 섰던 인물입니다.
그는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당시 유대인 측의 증인으로 섰으며 그의 열정적인 박해 탓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오로는 흩어진 모든 사람들을 추격해 전부 잡아들여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당시의 박해란 당연히 죽음을 전제하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인 셈입니다.
그러한 바오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기적 이후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신앙이 검증이 되지 않은, 교인들을 직접적으로 박해하고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를 사람들은 당연히 의심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은 실제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고 두려워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바르나바가 바오로의 후견인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에게 그의 회심과 관련된 기적을 적극적으로 알립니다. 만약 이러한 바르나바의 역할이 없었다면 바오로는 결코 사도단에 들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가 읽고 있는 바오로의 서간들과 이방인 선교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후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의 독서 말씀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어 그곳의 교회를 예루살렘 교회를 능가하는 공동체로 발전시킵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 교인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이후 바르나바는 키프로스 섬에 가서 선교를 하다가 61년 경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생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왜 그의 이름이 요셉에서 바르나바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가 진정으로 위로를 베푼 것은 바오로 사도 뿐만 아니라 당시 박해를 받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다시 “위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이 위로가 행동이 없는 단순한 동감에 그친다면 그것은 인스턴트와 같은 일시적인 기쁨만 선사 할 뿐입니다.
결국 진정한 위로란 보잘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존재에게 진정으로 손을 내밀어 주는 것, 그리고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확신과 증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위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실천, 타인에게 베풀어야 하는 위로는 바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고는 우리가 베푼 것이 결국 모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찬 확신과 함께 그 힘을 발휘합니다.
누군가에게 가진 것을 거저 베푸는 것.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사랑을 행하는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지혜로운 하느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그분께서 더욱 더 큰 위로와 축복을 안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오늘의 영성체송은 따뜻한 예수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리라.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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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주현 알베르토 신부님]
찬미 예수님!
평화방송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청취자 여러분에게 작으나마 도움과 위로가 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오늘 6월 11일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강론의 문을 열까 합니다.
사실 바르나바 사도의 세례명을 가지신 분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바르나바 세례명을 가진 분이 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항상 남을 배려하고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며 자신이 힘들면서도 남을 잘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다름 아닌 입학 동기 신부님이십니다.
사람은 이름값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 신앙인들도 자신이 모시는 주보성인의 성격과 모습을 많이 닮는다고들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바르나바 사도는 제1독서에 의하면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바르나바’는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전교 여행 때 동행한 사도로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는 키프로스(Cyprus) 출신의 레위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이고 바르나바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붙여 준 별명이라고 합니다.
바르나바는 아랍어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그가 어려움에 처한 교우들을 잘 위로하였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또한 바르나바는 자신이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에게 내놓았던 큰 신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또한 1세기경의 사도들 중에서 교우들에게 신세지지 않고 스스로 노동해서 생계비와 전교비용을 벌었던 사도는 바르나바와 바오로뿐이라고 전합니다.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남을 배려하려고 스스로의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바르나바 사도는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위로를 주는 참된 삶의 모범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일종의 선교 지침을 알려 주셨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사실 우리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그 일을 위한 준비와 실효성, 경제성 등을 따져서 어느 정도 준비가 갖추어지고 나서야 그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간적으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될 모든 준비들을 갖추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행을 하는데 있어서 돈이 없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행 가방도 자신을 맹수로부터 보호해야할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엄청난 위험과 어려움에 봉착하는 여행일 것이 분명한 여행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여행은 개인적인 관광차원의 여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여행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의 여행길에는 인간적인 준비보다는 신앙의 준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준비가 철저하고 그 신앙을 전하는 열정에 불타오른다면 인간적으로 필요한 물질과 재물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역경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십니다.
평화방송 청취자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오늘 복음 말씀을 누구보다도 더 잘 실천하려고 노력하셨던 분이십니다.
온갖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온 생애를 바치셨던 분이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작은 여행길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준비보다는 신앙의 준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되새겨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평화방송 청취자 여러분, 오늘 하루도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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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배상복 이냐시오 신부님]
어느 초등학교에서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하나 더하기 하나는 몇이지?” 모든 아이들이 손을 드는데 유독 사오정만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사오정에게 “너는 왜 손을 안 드는 거야. 그것도 모르는 거야?” 선생님은 화가 나서 “이 밥통아, 너하고 나하고 합하면 얼마냐니까?”
잠시 후 사오정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밥통 두 개입니다.”
오늘은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입니다. 먼저 바르나바 세례명을 가진 분들에게 축일 축하드립니다. 우리 신부님들중에 삼계성당 주임 김종엽신부님의 축일또한 이 자리를 빌어 축하드립니다.
바르나바사도에 대해서는 사도 4,32-37장에 나오는데 그 대목을 읽어보면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인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바르나바라는 별명을 얻은 요셉도 자기가 소유한 밭을 팔아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는 성바오로와는 친밀한 사이였는데 바오로를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과거의 박해자와 아직도 의심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일종의 중개자로서 활동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가르치신 후 예수운동을 하도록 파견하시면서 훈시하신 내용입니다. 이 파견사화를 차례대로 살펴보면 첫 번째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그저 받았으니 그저 주어라‘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하늘나라가 멀리 나중에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참 행복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하느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지금 행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른 복음에서는 지팡이는 맹수와 강도들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것이기에 가지고 가라하는데 여기에서는 지팡이와 신발조차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속옷을 두벌 껴입는 것은 그 당시 부자들이 하는 것이므로 금하십니다. 필수불가결한 것,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일체 가지고 가지 말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니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로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그리고 그 집에 평화를 빌어주라는 말씀은 초기 교회가 가정 교회였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자들 중 넓은 가옥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집을 공동체 집회 장소로 제공하였습니다. 이런 집을 중심으로 지역 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집 하나가 집회 장소로 정해졌으면, 그 집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서도 집을 떠날때가 더러 있는데 피정은 물론 등산이나 여행을 갈때도 얼마나 가져가는 것이 많은지, 가져가서 후회하기도 하지요. 사실 평소에도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심리는 그것에 의지하기 위해서랍니다. 길을 떠날때만이 아니라 이 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살펴보면 옛날 어려웠을때보다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쌓아놓은 물건들 때문에 기운이 막힐 지경입니다. 뭔가 일이 풀리지 않으면 집안 정리정돈을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몇 년동안 사용하지 않았으면 그것은 내 물건이 이미 아니기에 좀 아깝더라도 다른 데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버릴것은 버리고 줄것은 주면서 정리를 하다보면 기운이 맑아지고 잘 통하게 되어 일이 잘 풀리게 될것입니다. ‘기가 막히면 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성령의 기운이 잘 통할수 있도록 홀가분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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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은 손꼽히는 클래식 연주가로 그의 콘서트는 언제나 매진이고, 거의 시간당 6만 달러 이상을 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은 1713년에 만들어진 50억 원이 넘는 스트라디바리우스입니다. 2007년, 그에게 워싱턴포스트지가 한 가지 실험 제안을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바이올린을 들고 야구모자를 쓴 채 지하철역에서 공연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45분 동안 연주했는데 7명의 사람만 하던 일을 멈추고 딱 1분 동안만 연주를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앞을 지나쳤던 1,070명에게 벨의 연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조슈아 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떠했을까요? 1분이 아닌 45분을 꽉 채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고, 앵콜도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슈아 벨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그 모두는 무관심했습니다.
소중한 것을 자주 놓치는 우리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또 부정적인 마음으로 중요한 것을 별것 아닌 것으로, 심지어 내게 해로운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바로 주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지금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분의 말을 들으려 할 것이고, 어떻게든 그분의 뜻을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들은 바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 말씀을 따라서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만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지키기 힘든 말도 따를 수 있었고, 주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주면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의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거룩한 하늘 나라에 들어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을 구두쇠 소리 들으면서 모은 돈을 하늘 나라에 갈 때 모두 가져갈 수 있을까요? 그곳에서 모은 돈을 펑펑 쓰면서 살게 될까요? 아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지상의 모든 보물은 오히려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 오히려 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을 하나의 짐 덩어리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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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생각하십시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다음 두 가지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첫째, 이 일을 왜 하는가? 자신에게 늘 내놓는 뻔한 답 말고,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 계속 이대로 산다면 어디로 갈 것 같은가? 단순히 미래에 대한 엉성한 개념 말고, 땅에 발을 딛고 서서 지금 사는 대로 살면 당신은 어디에 이를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파고들어야만 자기 방해의 덫에서 풀려날 수가 있습니다. 사실 내 삶을 방해하는 것은 늘 소소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소한 것들이 결혼생활을 파탄 내고, 가족을 찢어놓고, 각종 중독에 빠지게 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말하면서 정반대의 행동 패턴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계속 생각하면서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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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의 선교사>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일까요? 사람이,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살라고 선물로 주어진 각자 고유의 인생입니다. 과연 얼마나 참 자기를, 몇%나 참 자기를 살고 인생을 마칠까요? 평생 살아도 자기를 모르고 거짓 나를 자기로 착각하여 헛된 삶을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가장 힘들고 가장 중요한 필생의 일이 참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하여 우리 수도승들은 무엇을 하기 위해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 수도원에 왔다고 합니다. 하여 하느님의 사람, 참사람이 되기 위해 수도승의 평생 과제가 하느님을 찾는 일인 것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없이 사람이, 참 사람이 되기는 참으로 요원합니다.
‘참 사람이 되는 것인가’, 혹은 ‘참 자기를 발견해 나가는 것인가’ 하는 물음도 가능하겠습니다만 결국은 한 진리에 대한 두 측면의 표현입니다. 이를 하나로 종합하면 참 자기가 되어 가는 과정은 하느님 창조하신 본래의 참 자기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제 한겨레 신문 21면(조현의 휴심정) 기사가 이채로웠습니다. “성경이란, 삶에 적용해야 비로소 ‘읽었다’할 수 있는 것”이란 ‘읽는다는 것’책의 집필자(강영안)와의 인터뷰 기사가 전면을 차지하다 시피했고, ‘불안감 치유에도 훈련이 필요해’라는 기사와 ‘조울의 강, 우리가 함께 건너야 할 때’라는 기사의 구성이 상징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2016-2018년 3년간 20대 가운데 우울증, 불안장애, 스트레스 증상으로 진료를 받은 사람이 무려 50만명이었다 합니다.
아, 바로 불안감과 조울증에 대한 근원적 해결이 바로 성경에,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습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특히 정신질환은 그러합니다. 발병에 앞서 참으로 성경 말씀을 통해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함으로 마음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늘 말씀 드리다 시피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방향, 삶의 목표를 견고히 함이 정신 건강의 첩경입니다. 이래서 성경 말씀의 생활화입니다.
어제 뜻밖에 전화를 받고 반가웠습니다. “삶이 재미로 사나요. 살아야 하는 의무니까 사는 것이지요.” 이 말을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늘 재미있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미건조하고 힘든 날들도 대부분이요 이를 견디며 버티며 한결같이 살 수 있음은 바로 삶의 중심과 삶의 의미가 확고하기에 가능합니다.
하여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일반 알현시 말씀의 주제도 기도였습니다. 창세기의 야곱을 기도의 모델로 하여 ‘하느님과의 레슬링(싸움)은 바로 기도의 메타포(은유)’라는 내용의 강론이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공동전례기도가 바로 하느님과의 레슬링시간이요 이보다 정신건강에 좋은 수행도 없습니다.
더불어 아주 예전 재미있게 인용한 팬티와 팬티천 일화가 생각납니다. 사제생활 초창기때 강론에 인용했던 예인데 수십년만에 만나 자매가 이 일화를 잊지 못한다며 전해 줬습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이다. 팬티끈만 튼튼하다면 패티천은 아무리 낡고 떨어져도 입을 수 있듯이 영혼과 육신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러니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를 통해 팬티끈같은 영혼을, 정신을 튼튼히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요지의 말이었습니다.
어제 저녁기도와 묵상중 각별한 체험 또한 잊지 못합니다. 시편 말씀의 묵상이 새로웠습니다.
“내 영혼아 고이 쉬라 오직 하느님 안에서, 님께로부터 내 구원이 오나니. 님만이 나의 바위, 내 구원, 내 성채시기에,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내 구원 내 영광이 하느님께 있나니, 하느님은 굳센 바위, 내 피난처시다. 백성들아, 너희 항상 주께 바라라, 당신 앞에 너희 마음 열어 놓아라. 우리의 피난처는 하느님이시다.”
바로 이것이 인간입니다. 기도하는 인간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님이 빠질 때 무엇으로 이것을 대체할 수 있겠는지요? 이래서 하느님 중심 자리에 헛된 우상들이 등장하는 것이며 무수한 정신질환들입니다. 하여 사람은 중심을 잃어 야수가 되고 괴물이 되고 악마가 되고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아닌 어디서 우리 영혼이 편히 쉴 수 있겠으며 하느님 아닌 어디서 궁극의 피난처를 찾을 수 있겠는지요?
또 하나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로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시편말씀이든 예수님 이름이든 건성으로 바칠 것이 아니라 깨어 사랑과 정성을 가득 담아 맛보며 바쳐야 겠다는 참 각별한 체험의 시간이었습니다.
참 건강한 하느님의 사람, 참 사람의 모범이 바로 오늘 축일을 지내는 복음 선포의 빛나는 선교사 바르나바입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이름 뜻도 참 기분이 좋습니다. 바르나바의 빛나는 전인적 인품이 다음 묘사에 잘 드러납니다.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착한 사람 바르나바 사도, 정말 참 사람의 모범입니다. 바르나바 사도뿐 아니라 오늘 예수님께 파견받는 하늘 나라 복음 선포의 선교사, 사도들 또한 참 사람의 모범들입니다. 텅 빈 존재에 말씀 선포와 더불어 치유이적, 구마이적의 능력을 가득 안고 떠나는 사도들, 가난하나 참으로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강물도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요 고이면 썩듯이, 거저 받은 것을 끊임없이 줌으로 나눠야 맑은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참 건강한 영적 삶의 비결이요,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선교사로 살아가야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은총의 선물들입니다. 저절로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나누는 삶일 것입니다. 몰라서 독점이지 알면 알수록 나눕니다. 나눌 때 참 기쁨이요 참 나의 실현입니다.
주님으로 가득차 있기에 무소유의 홀가분한 차림으로 선교여정에 오르는 가난하나 참으로 자유롭고 부유한 사도들입니다. 신자들의 환대의 사랑에 의지하여 치유와 구마, 위로와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 하늘 나라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무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켜 줌으로 참 자유인의 참 사람이 되게 합니다.
문명의 야만시대입니다. 길을 잃은 문명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지는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하나뿐인 우리의 어머니인 지구도 위태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역시 지구가 건강치 못하다는, 병들었다는 반증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쓰레기와 전쟁중이라 합니다.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수도원에서 나가는 쓰레기만해도 얼마나 많은 지요. 문제는 무지의 사람들, 탐욕의 사람들인 우리로부터 기인합니다. 참으로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의 사람, 참 사람으로 거듭 매일, 평생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좀더 ‘웃으며smile’, ‘느리고slow’ ‘단순한simple’ 3S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 복음 선포의 선교사, 바로 우리 모두의 신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범한 일상에서 하늘 나라 복음을 삶으로 선포하며, 치유와 위로, 평화의 선교사가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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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1)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고해성사를 준비합니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 ‘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 “능가하지 않으면!”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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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2)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숲속의 땅’이라 불리는 중앙아메리카의 과테말라는 인구 1천3백만의 소도시입니다. 그냥 보기에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고산지대로 살기가 좋은 곳인데 중남미 국가 중 가장 치안이 불안한 국가입니다. 일일 평균 약 20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출산에도 불구하고 인구증가는 없다고 합니다. 문맹율이 80%가 넘는 가난의 고통이 너무도 큰 나라입니다.
이곳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어 있는 홍 가브리엘 신부는 사제생활비 1천불이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되어 버림받은 어린이 10명을 데리고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커졌습니다. 150명이 숙식할 수 있는 고아원 ‘천사의 집’과 250명의 배움을 감당할 수 있는 ‘미리내 초등학교’를 건립하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중학교의 개설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신부는 미국 뉴저지에 피정을 겸한 후원회원을 모집하러 나섰는데 공항에서 병원으로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검진결과 “영양실조”였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려면 그들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먼저 쓰러지면 그들은 어쩌란 말인지요? 오래 전 그와 피정을 함께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또 하나의 꿈을 지니고 있었고 지금의 시설에 올 수 없는 그야말로 오지에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항공요금이 비싸서 고국인 한국에 3년 만에 나온 사람이 돈도 없이 또 다른 계획을 세우는 것을 보고 저는 놀랐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한 번도 굶어 본 적이 없고, 돈 걱정을 해본 적도 없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을 주님께서 채워 주셨고 앞으로도 채워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그 믿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살 것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성실한 일꾼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은 주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십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않았고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않은 채 주님을 차지한 홍 신부는 ‘한 눈 팔지 않고’ 가야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열성으로 그는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는 말씀에 따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내어놓고 있습니다. 사실 많이 움켜쥐고 많이 지니고 있을수록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기대게 됩니다. 그러나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확을 얻게 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는 잠시 관리자로서 관리하는 것일 뿐인데왜 욕심을 부리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를 몸으로 받아들이며 희생의 삶을 사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사도의 열성으로 선교에 나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하면서...... 하느님을 차지하는 기쁨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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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지니지 마라."(마태 10,9)
자기가 받은 것이 제 능력으로 쌓은 것이 아님을 잘 아는 제자들은 앞으로 필요한 것들도 주님께서 그렇게 채워주시리라는 신뢰를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증거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에게 만약을 대비해 무언가 여분의 것을 적당히 챙겨두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사도들에게는 그마저도 주님 손에 다 맡기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마태 10,11)
"마땅한 사람"의 조건은 저마다 차이가 있을 겁니다. 함께 머무르며 일하기에 누구에게는 이런 사람이, 또 누구에게는 저런 사람이 알맞겠지요. 각자의 성향과 소명에 걸맞는 인연을 만나는 일은 하느님께서 안배해 주셔야 가능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르나바와 사울처럼 말이지요.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바르나바"(사도 11,24 참조)는 친히 사울을 찾아내어 새로운 길에 합류시키고 기꺼이 동료가 되어 줍니다. 사울에 대해 두려움과 의혹이 가시지 않은 이들도 바르나바를 보아서 사울을 받아들였을 것 같습니다.
"떠날 때까지"(마태 10,11)
예수님은 떠남을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사도는 길을 떠난 사람입니다. 또 머물게 된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떠날 사람이기도 하지요. 사도의 삶은 순례길을 걷는 우리 모두의 축약판입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3,2).
바르나바와 사울이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한창 활발히 선교 활동에 전념할 때 성령께서 이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 둘이 그곳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떠나보냈다."(사도 13,3)
그들은 순종합니다. 지상 삶에서, 더우기 제자의 삶에서 영원한 안주란 없습니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의 뜻이 원하시는 곳 어디로나 떠나는 것이 제자된 삶의 일부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한때 서로에게 "마땅한 사람"이 되어 주었던 바르나바와 사울도 서로를 떠나야 할 때가 올 겁니다(사도 15,37-40 참조). 괜찮습니다. 당장은 갈등과 분열처럼 보일지라도 사심없이 주님의 뜻을 찾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모두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니까요.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바르나바 성인은 바오로 사도가 교회에 자리를 잡도록 도와준 일등공신입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방인 선교는 물론 초대교회의 신학적 기틀을 마련한 바오로 사도를 기릴 때 그의 진정한 파트너, 바르나바 성인도 함께 떠올리게 되지요. 바르나바 성인은 당장 자신이 빛나지 않더라도, 두각을 드러내는 존재가 꼭 자신이 아니어도 묵묵하고 충실히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 진짜 사도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바르나바 성인께 우리 모두 착하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도록 전구를 청합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에게 기꺼이 손 내밀 수 있고, 그의 곁에서 충직한 협조자로 머무를 수 있는 겸손도 얻어주십사고 청합시다. 주님께 받은 것으로 만족하며 기꺼이 나눌 줄 알고, 또 머무를 때와 떠날 때를 아는 지혜도 청합시다.
성 바르나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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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기쁨을 인정하고 감사하면 기쁨은 기도로 변합니다.
기쁨과 슬픔에는 항상 어떤 까닭이 있습니다. 우리가 왜 슬픈지 그 이유를 헤아린다면 이미 기쁨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기쁨이 사그라들거나 없어질 때 왜 그런지 진지하게 자문해 봅시다. 기쁨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하고 있는 일과 생활에 막대한 해를 미칩니다. 늘 불만을 품고 살면 성격 또한 괴팍하게 변해 버립니다. 기쁨이 기도가 되도록 합시다. 기쁨을 인정하고 감사하면 그 기쁨은 어느덧 기도로 변하여 흔들림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소박한 마음으로 즐기는 사람은 흔히 가난한 이들입니다.
-「지금 행복하세요?」에서
♣운동선수들은 한결같이 운동을 즐기면서 하는 선수를 이길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잘하려고 너무 힘을 쓰면 근육이 긴장하고 스트레스가 쌓여 뻣뻣해져서 실수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자연스럽고 평온한 마음으로 짊어질 줄 아는 아픈 이들의 모범을 본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쁨이 사라질 때 비로소 그 기쁨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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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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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분부하십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놀라운 일입니다. 제자들은 유례없는 위대한 직무를 받았습니다. 전혀 새롭고 놀라운 직무와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감히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직무입니다. 그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지상에서의 일시적 약속에 대한 것들을 선포했을 뿐이었지만, 제자들에게는 바로 “하늘나라”를 선포하라는 직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그 어떤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던 이들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사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약속에 대한 직무를 받았을 때마저 망설이고 꺼려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나 박해가 없었던 것도 아닌 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오히려 지극한 열정으로 그 직무를 다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고 있는 바르나바 사도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해서 그들은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그러할 권능이 함께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곧 하늘나라가 주어졌고, 하늘나라를 선포할 힘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받아서 가진 것을 주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꼭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 그것은 그들이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받아서 가지게 된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애로, 거저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아무 거나 주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결코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만약 실제로 받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 한다면, 그것은 거짓 선포요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할 나라는 우리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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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언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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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VtkcwIURc5s&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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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 8)
누구를 믿고
살아가는지를
진심으로
묻게됩니다.
지닌만큼 더
자유롭지 못한
이 부르심의
여정입니다.
하느님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는
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시간을 놓치지
않는 지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모든 시간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또한
하느님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과
같은 방향을
걸어가는 것은
거저 나누는
삶입니다.
삶의 이유가
나누는 사랑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실상은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알고 떠나는
순례의 여정임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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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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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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