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하인리히 막스 (프리트리히 엥엘스 편집) - 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제2권 : 자본의 순환 과정 (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Zweiter Band : Der Zirkulationsprozeß des Kapitals)
G-W는 일정액의 화폐가 일정액의 상품으로 전화되는 것을 표시한다.
구매자에게는 그의 화폐가 상품으로 전화되는 것이고, 판매자에게는 상품이 화폐로 전화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품유통의 이 과정이 개별 자본의 독자적 순환에서의 기능적인 한 부분과 구분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과정의 형태가 아니라 그 질료적 내용, 즉 화폐와 자리바꿈하는 상품의 특수한 사용성질이다.
이들 상품은 하나는 생산수단, 다른 하나는 노동력으로, 상품생산에서 물적 요소와 인적 요소를 이루고, 그들의 특수한 성질은 물론 생산되는 물품의 종류에 의존하게 된다. 노동력을 A, 생산수단을 Pm이라고 하면, 구매되는 총 상품액은 W=A+Pm이다. 즉 G-W는 G-A와 G-Pm으로 이루어진다.
화폐액 G는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한 부분은 노동력을 구매하고, 다른 부분은 생산수단을 구매한다. 이렇게 둘로 나누어진 구매는 완전히 서로 다른 시장에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상품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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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산업부문마다 추가로 사용되는 노동 때문에 추가로 필요한 생산수단의 가치가 얼마인지는 여기에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생산수단에 지출되는 화폐 부분이 어떤 조건하에서도 부족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즉 처음부터 필요한 추가분을 잘 계산하여 제대로 된 비율로 조달해야 한다는 점) 뿐이다.
바꿔 말해, 생산수단의 양은 노동량을 흡수하기에 (즉 이 노동량에 의해 생산물로 전화되기에) 충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수중의 생산수단이 불충분하다면, 구매자가 움직일 수 있는 여분의 노동은 사용될 수 없으며, 그의 노동에 대한 처분권은 무효가 될 것이다.
만약 사용할 수 있는 노동보다 더 많은 생산수단이 있다면 그것들은 노동을 흡수할 없게 되어 생산물로 전화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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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G-W(즉 모든 상품구매의 합이자 일반적 상품유통의 한 과정)는 자본의 독립적인 순환과정 내에서의 한 단계로서, 자본가치가 화폐형태에서 생산적 형태로 전화되는 과정이며, 더 간단히 말하자면 화폐자본에서 생산자본으로의 전화이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고찰되는 순환도식에서는, 화폐가 자본가치의 최초 담지자로 나타나고, 따라서 화폐자본은 자본이 선대되는 형태로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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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는 자본가의 입장에서 노동력의 구매이다.
그러나 노동자 (즉 노동력의 소유자) 입장에서 그것은 노동력 (여기에서는 임금이라는 형태가 전제되어 있기에 노동이라 해도 좋다)의 판매이다.
여기에서 구매자에게 G-W ( = G-A)인 것은, 모든 다른 구매에서도 그렇듯이, 판매자(노동자)에게는 A-G(=W-G), 즉 자신의 노동력의 판매이다.
이것이 제1의 유통단계 (또는 상품의 제1의 형태변화)이다.
그것은 노동의 판매자에게는 그의 상품이 화폐형태로 전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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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성은 가치형성요소 그 자체로서의 노동이 어떠한 가치도 가질 수 없다는 사실, 따라서 일정량의 노동도 가격으로 표현되는 가치 (즉 일정량의 화폐와 등가로 표현되는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임금은 단지 하나의 위장된 형태에 불과하다.
이 형태에서는 예를 들어 노동력의 1일 가격이 이 노동력에 의해 하루 동안 유동화되는 노동의 가격으로 나타난다.
즉 이 노동력에 의해 6시간의 노동으로 생산되는 가치는 이 노동력의 12시간 기능 (또는 노동)의 가치로 표현된다.
G-A가 이른바 화폐경제의 특징 또는 신호로 간주되는 것은 화폐경제에서는 노동이 그 소유자의 상품으로 나타나고, 따라서 화폐가 구매자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화폐관계(즉 인간 활동의 매매)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화페는 G가 화폐자본으로 전화하지 않고서도, 그리고 경제의 일반적 성격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이른바 용역의 구매자로서 이미 오래전에 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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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노동력이 일단 그 소유자의 상품으로 시장에 출현하여, 그 판매가 노동에 대한 지불이라는 형태 (즉 임금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면 노동력의 매매는 다른 어떤 상품의 매매와 비교해도 전혀 특이한 것이 아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구매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적인 것이 아니라, 노동력이 상품으로 출현한다는 것 자체가 특징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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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가 처음으로 생산자본으로 전화한다면 (또는 화폐가 그 소유자를 위해 처음으로 화폐자본으로 기능한다면)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하기 전에 먼저 건물, 기계 등과 같은 생산수단을 구매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노동력이 그의 지배하에 들어오면 곧바로 그것을 노동력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생산수단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본 사태의 전말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노동력이 생산적 활동을 수행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판매되어 생산수단과 결합하면서부터이다.
그러므로 노동력은 판매되기 전까지는 생산수단 (즉 노동력의 활동을 위한 물적 조건)과 분리되어 존재한다.
이렇게 분리된 상태에서는 노동력은 그 소유자를 위한 사용가치의 생산에 직접 사용될 수도 없고, 그 소유자가 생존을 위해 판매해야 하는 상품의 생산에도 직접 사용될 수 없다. 그러나 노동력이 판매를 통해서 생산수단과 결합하게 되면, 노동력은 생산수단과 마찬가지로 구매자의 생산자본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G-A라는 행위에서, 화폐소유자와 노동력소유자는 서로 구매자와 판매자로만 (즉 화폐소유자와 상품소유자로만) 관계한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서로 단순한 화폐관계 속에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구매자는 또한 처음부터 노동력을 그 소유자가 생산적으로 지출하는 데 필요한 물적 조건인 생산수단의 소유자로 나타난다.
바꿔 말하면, 이 생산수단은 노동력의 소유자에 대해 타인의 소유물로서 대립한다.
반면에 노동자의 판매자는 그 구매자에 대해 타인의 노동력으로 대립하게 되고, 이 노동력은 구매자의 자본이 사실상 생산자본으로 기능하도록 구매자의 지배하에 들어와서 그의 자본에 통합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본가와 임노동자 사이의 계급관계는 양자가 G-A (노동자 쪽에서는 A-G)라는 행위 속에서 서로 대립되는 순간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행위의 전제조건을 이룬다. 그것은 매매이고 화폐관계이지만, 그러나 구매자는 자본가이고, 판매자는 임노동자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매매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노동력의 실현을 위한 조건, 즉 생활수단과 생산수단이 타인의 소유물로서 노동력의 소유자에게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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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가 화폐자본의 기능으로 나타나더라도 (즉 화폐가 여기에서 자본의 존재형태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단지 여기에서 화폐가 어떤 유용한 인간 활동이나 용역에 대한 지불수단으로 나타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즉 지불수단으로서 화폐의 기능 때문은 결코 아닌 것이다.
화폐가 이런 형태로 지출될 수 있는 것은 단지 노동력이 그 생산수단 (노동력의 생산수단인 생활수단도 포함한다)과 분리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분리가 노동력이 생산수단의 소유자에게 판매됨으로써만 (따라서 결코 노동력 자신의 가격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의 수준을 넘어서는 노동력의 유동화까지도 구매자가 지배함으로써만) 해소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관계가 생산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은 이 관계가 유통행위를 통해서만 (즉 판매자와 구매자가 서로 대립하는 상이한 경제적 기본조건 속에서만, 다시 말해 그들의 계급관계 속에서만)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가 주어지는 것은 화폐의 본성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단순한 화폐기능이 자본기능으로 전화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관계의 존재 때문이다.
화폐자본의 이해에는, 통상 두 가지 오류가 서로 병행하거나 교차한다.
첫째로 자본가치가 화폐자본으로 수행하는 기능 (또한 그것이 바로 화폐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이 자본가치의 자본으로서의 성격에서 파생된다는 오류인데, 그 기능들은 단지 자본가치가 화폐상태이기 (즉 자본가치가 화폐로서의 현상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일 뿐이다.
둘째로, 이와는 반대로 화폐기능의 특수한 내용 (화폐 기능을 동시에 하나의 자본기능으로 만드는)을 화폐의 본성으로부터 추론하는 오류인데 (따라서 화폐는 자본과 혼동된다), 이 기능은 여기에서 G-A가 행해지는 경우처럼 단순한 상품유통과 그에 상응하는 화폐유통만으로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 사회적 조건들을 전제로 한다.
노예의 매매도 그 형태로 보면 역시 상품의 매매이다. 그러나 노예제가 존재하지 않으면 화폐는 이런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노예제도가 존재해야만, 화폐는 노예의 구매에 사용될 수 있다. 반대로 단지 화폐가 구매자의 수중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노예제가 결코 성립할 수 없다.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이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상품생산의 결정적인 사회적 전제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즉 화폐자본이, 여기에서 고찰되는 기능 G-W을 사회적 규모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본원적인 결합이 해체되는 역사적 과정 - 이 과정의 결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대중과 생산수단을 소유한 비노동자가 서로 대립하게 된다 - 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국 여기서 G-W라는 행위의 근저에 있는 것은 분배이다. 그것은 소비수단의 분배라는 통상적 의미에서의 분배가 아니라, 생산요소 그 자체의 분배이며, 이들 생산요소 가운데 물적 요소는 한쪽에 집적되고, 노동력은 물적 요소에서 분리되어 다른 쪽에 놓인다.
그러므로 생산자본 가운데 물적 부분인 생산수단은 G-A라는 행위가 일반적인 사회적 행위가 될 수 있기 전에 이미 스스로 자본으로서 노동자와 대립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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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보았듯이, 일단 확립된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발전과정에서 이러한 분리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반적으로 지배적인 사회적 상태가 될 때까지 그 규모를 점점 확대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문제의 일면에 불과하다.
자본이 형성되어 생산을 지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상업의 발전단계가 전제되어야 하며, 따라서 상품유통과 그에 따른 상품생산도 어느 정도 발전되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물품은, 판매를 위해 (즉 상품으로) 생산되지 않는 한, 상품으로 유통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적이고 지배적인 생산의 성격을 띤 상품생산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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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지주들은 이른바 농민해방의 결과로 이제 농노 상태의 강제 노동자 대신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그들의 농업을 경영하고 있는데 이들은 다음 두 가지를 불평한다. 첫째, 화폐자본의 부족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수확물을 판매하기 전에 상당히 많은 금액을 임노동자에게 지불해야 되는데, 그 첫째 조건인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생산을 자본주의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화폐형태로 존재하는 자본이 임금 지불을 위해 항상 수중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주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때가 되면 꽃이 피고 산업자본가는 자신의 돈뿐만 아니라 타인의 돈까지도 마음대로 다루기 때문이다.
둘째는 더욱 특정적이다. 즉 설령 돈이 있어도 구매가능한 노동력을 충분히 그리고 언제든지 구입하여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농업노동자는 촌락공동체의 토지공유 때문에 아직 완전히 자신의 생산수단과 분리되지 않았고, 따라서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임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로운 임노동자가 사회적 규모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G-W가 화폐자본의 생산자본으로의 전화로 나타날 수 있는 필수불가결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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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자본의 생산자본으로의 전화에 의해 자본가치는 하나의 현물형태를 갖게 되었지만, 이 형태에서는 유통을 더는 계속할 수 없으며 소비, 즉 생산적 소비에 들어가야 한다. 노동력의 사용 (즉 노동)은 노동과정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다시 상품으로 되팔 수 없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그의 노예가 아니며, 또한 자본가는 단지 일정 기간 동안만 그의
노동력을 이용하기로 구매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자본가는 노동력을 통해 생산수단을 상품형성요소로 이용하는 한에서만 이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1단계의 결과는 제2단계 (즉 자본의 생산단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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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노동에 의한 생산이 일반화되면 상품생산은 생산의 일반적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상품생산이 일반적 형태가 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시 사회적 분업을 끊임없이 확대시킨다. 즉 특정 자본가들에 의해 상품으로 생산되는 생산물을 점점 전문화해가고, 상호보완적인 생산과정들을 점차 독립적인 생산과정들로 분리한다.
그러므로 G-A가 발전하는 수준에 맞추어 G-Pm도 함께 발전해나간다.
즉 전자의 발전 수준에 맞추어 생산수단의 생산도 그것을 생산수단으로 하는 상품의 생산에서 분리되어간다.
그리하여 이들 생산수단은 모든 상품생산자에 대해, 그가 직접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과정을 위해 구매하는 상품으로서 대면한다.
그것들은 완전히 분리된 자립된 생산부문들에서 흘러나와 상품으로서 각 생산부문들로 흘러들어가게 되므로 이제 구매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상이 된다.
상품생산의 물적 조건은 각 상품생산자들에게 점점 더 광범위하게 다른 상품생산자의 생산물 (즉 상품)로 마주 서게 된다.
거기에 맞추어 자본가도 함께 화폐자본가로 등장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그의 자본이 화폐자본으로 기능하는 범위가 확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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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단 자본주의적 생산이 뿌리를 내린 곳에서, 그것은 생산자들의 자기노동에 기초하거나 단지 잉여생산물만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데 기초한 모든 상품생산 형태를 파괴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먼저 상품생산을 일반화하고, 그런 다음 모든 상품생산을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전화시켜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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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과 노동력은 그것들이 선대된 자본가치의 존재형태인 한, 생산과정에서 가치형성 (따라서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그들이 담당하는 상이한 역할에 의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별된다. 생산자본의 상이한 구성부분으로서 이들은 또한, 자본가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이 생산과정 외부에서도 그의 자본인 반면 노동력은 생산과정 내부에서만 개별자본의 존재형태가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구별된다.
노동력은 그 판매자인 임노동자의 수중에서만 상품이 되는 반면, 그 구매자가
자본가 - 노동력의 일시적 사용권을 갖는 - 의 수중에서만 자본이 된다.
생산수단은 노동력이 생산자본의 인적 존재형태로 생산수단과 합체될 경우에만 비로소 생산자본의 대상적 형상 (또는 생산자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력이 원래부터 자본인 것이 아니며, 생산수단 역시 그러하다.
그들은 단지 역사적으로 발전된 특정 조건하에서만 특수한 사회적 성격을 갖게 되며, 이것은 마치 그런 조건하에서만 귀금속에 화폐의 사회적 성격이 각인되고 또한 화폐에 화폐자본이라는 사회적 성격이 각인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생산자본은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구성 부분들을 소비하여 그것들을 더 큰 가치를 갖는 생산물로 전환한다. 노동력은 다만 생산자본의 한 기관으로만 작용하기 때문에 잉여노동에 의한 창출되는 생산물가의 초과분 (그 형성요소의 가치를 넘어서는) 또한 자본의 과실이 된다.
노동력의 잉여노동은 자본의 무상노동이며, 따라서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 (즉 거기에 아무런 등가도 지불되지 않는 가치)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단순히 상품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잉여가치를 낳은 상품이기도 하다. 그 가치는 P+M, 즉 그 상품의 생산에 소비된 생산자본의 가치 P에 생산자본에 의해 창출된 잉여가치 M을 더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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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이미 증식된 자본가치의 기능적 존재형태 (생산과정 그 자체로부터 직접적으로 유래하는)로 상품자본이 된다.
만약 상품생산이 사회 전체에 걸쳐 자본주의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모든 상품은 그것이 선철이든 브뤼셀의 레이스이든, 황산이든 담배든 상관없이 처음부터 상품자본의 요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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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품유통의 이러한 단순한 과정을 하나의 자본 기능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과정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다.
즉 그것은 우선 상품의 사용가치적 성격에서 일어난 변화가 아닌데 이는 이 상품이 사용대상으로서 구매자의 손에 양도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가치에서 일어난 변화도 아닌데 왜냐하면 그 상품의 가치는 양적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상품가치는 처음에는 면사 속에 존재하였지만, 이제는 화폐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첫 번째 단계 G-W와 마지막 단계 W-G 사이에는 하나의 본질적 차이가 존재한다. G-W에서 선대된 화폐가 화폐자본으로 기능하는 것은 화폐가 유통을 통해 특정 사용가치를 갖는 상품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W-G에서 상품이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유통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생산과정에서 완성된 자본의 성격을 띠고 나올 경우에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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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적과정에서 방적공은 128파운드스털링의 면사 가치를 창출하였다.
그중에서 가령 50파운드스털링만이 자본가가 노동력에 지출한 것과 등가라면 78파운드스털링은 (노동력 착취도가 156%일 경우) 잉여가치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10,000파운드 면사의 가치는 첫째로, 소비된 생산자본 P의 가치를 포함하여, 그중 불변 부분은 372파운드스털링이고, 가변부분은 50파운드스털링으로 그 합계는 422파운드스털링으로, 이는 8440파운드의 면사와 동일한 가치이다.
생산자본 P의 가치는 W(즉 G-W 단계에서는 판매자의 수중에 있는 상품으로 자본가와 대면하던 생산자본 구성요소의 가치)와 같다.
그러나 둘째로, 이 면사의 가치는 1,560파운드의 면사에 상당하는 78파운드스털링의 잉여가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10,000파운드 면사의 가치표현인 W는 W+ W의 증가분(=78파운드스털링)과 같은데, 이 증가분은 원래의 가치 W와 똑같은 상품형태로 존재하므로 이를 w라 부르기로 하자.
따라서 10,000파운드 면사의 가치인 500파운드스털링은 W+w=W’이다.
W(즉 10,000파운드 면사의 가치표현)를 W’로 만드는 것은 그것의 절대적 가치크기(500파운드스털링)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가치크기는 다른 모든 W(다른 어떤 상품의 가치표현)와 마찬가지로 그 상품에 대상화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W를 W’로 변화시키는 것은 그것의 상대적 가치크기, 즉 그것을 생산하는 데 소비된 자본 P의 가치와 비교되는 그것의 가치이다.
W’의 가치에는 이 자본가치와 생산자본에 의해 제공되는 잉여가치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것의 가치는 자본가치보다 이 잉여가치 w만큼 더 크다.
10,000파운드의 면사는 증식되어 잉여가치만큼 늘어난 자본가치의 담지자이며,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산물이다.
W’는 하나의 가치관계, 즉 상품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에 지출된 자본의 가치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상품생산물의 가치가 자본가치와 잉여가치로 구성된다는 것을 표현한다.
10,000파운드의 면사가 상품가치 W’가 되는 것은 그것이 단지 생산자본 P의 전화된 형태일때만 (즉 이 개별 자본의 순환 내에만 존재하는 연관을 통해서만, 다시 말해서 자신의 자본으로 면사를 생산한 자본가에게만)이다.
가치의 담지자인 10,000파운드의 면사를 상품자본으로 만드는 것은 말하자면 내적 관계일 뿐이지 결코 외적 관계가 아니다.
면사는 그들 가치의 절대적 크기가 아니라 상대적 크기 (즉 면사에 포함된 생산자본
이 상품으로 전화되기 전에 갖고 있던 가치크기와 비교된 그들의 가치 크기)에 의해 자본주의적 특징을 드러낸다.
따라서 만약 이 10,000파운드의 면사가 그 가치대로 500파운드스털링에 팔린다면, 이런 유통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본다면) W-G이며, 어떤 불변의 가치가 단지 상품형태에서 화폐형태로 전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개별 자본의 순환 가운데 한 특수한 단계일 경우에는, 바로 그 행위가 ‘상품 속에 포함된 자본가치 422파운드스털링 + 상품 속에 포함된 잉여가치 78파운드스털링’의 실현이 된다. 즉 그것은 상품자본이 상W품형태에서 화폐형태로 전화되는 W’-G’을 나타낸다.
이제 W’의 기능은 모든 상품생산물의 기능 (화폐로 전화(판매)되어 유통국면 W-G를 통과하는 기능)이다.
증식된 자본이 상품자본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시장에 체류하는 한 생산과정은 정지된다. 상품자본은 생산물의 창조자로도 가치의 창출자로도 작용하지 않는다. 자본이 상품형태를 벗어던지고 화폐형태를 취하는 속도(즉 판매의 속도)에 따라서 똑같은 자본가치가 생산물 및 가치의 창조자로서 기능하는 정도는 매우 달라질 것이며 재상산의 규모가 확대 또는 축소되는 정도도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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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 W+w (=422파운드스털링 + 78파운드스털링)이다.
W는 생산자본 P의 가치와 같고, 이것은 G-W(즉 생산요소의 구입)에 선대된 G의 가치와 같다. 우리의 예에서 422파운드스털링이다.
만일 상품량이 가치대로 팔린다면, W=422파운드스털링, w=78파운드스털링(잉여생산물 1,560파운드 면사의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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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가치는 생산과정 속에서 처음 세상에 나온다. 그러므로 그것은 상품시장에도 (즉 상품형태로도) 처음 출현한다. 이 상품형태가 그것에는 최초의 유통형태이며 따라서 w-g라는 행위도 그것에는 최초의 유통행위 (또는 최초의 형태변화)이므로 정반대의 유통행위 (또는 정반대의 형태변화) g-w에 의해 보완되어야 한다.
자본가치 W가 동일한 유통행위 W’-G’에서 수행하는 유통은 이것과는 다르며, 자본가치의 입장에서 이 유통행위는 W-G가 되고, 여기에 서는 W=P(처음에 선대된 G)이다. 이 자본가치는 그 최초의 유통행위를 화폐자본 G의 형태로 시작하여 W-G라는 행위를 통해 똑같은 형태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그것은 G-W와 W-G라는 두 개의 정반대 되는 유통국면을 통과하여 다시 똑같은 순환과정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잉여가치에는 상품형태에서 화폐형태로의 최초의 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자본가치에는 그것의 본래 화폐형태로의 복귀(또는 재전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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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로 선대된 자본가치로 보면 제2의 최종적인 형태변화 (화폐형태로의 복귀)인 바로 그 유통행위 W’-G’이, 잉여가치 (상품자본에 의해 함께 이전되어 그 상품자본이 화폐형태로 전화될 때 함께 실현되는)로 보면 제1의 형태변화 (상품형태에서 화폐형태로의 전화), 즉 W-G(제1의 유통국면)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 자본가치가 원래의 화폐형태로 최종적으로 재전화하는 것은 상품자본의 한 기능이다. 둘째, 이 기능은 잉여가치가 원래의 상품형태에서 화폐형태로 처음 형태 변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화폐형태는 여기에서 이중의 역할을 수행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원래 화폐로 선대된 가치가 회수되는 형태(과정을 시작할 때의 가치형태로 복귀)를 이룬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원래 상품형태로 유통에 들어갔던 가치가 최초로 전화된 형태를 이룬다. 만일 상품자본을 구성하는 상품이 우리가 여기에서 전제한 바와 같이 그 가치대로 팔린다면, W+w는 그것과 등가인 G+g로 전화한다.
실현된 상품가치는 이제 G+g(422파운드스털링+78파운드스털링)의 형태로 자본가의 수중에 존재한다.
자본가치와 잉여가치는 이제 화폐로, 즉 일반적 등가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과정의 끝부분에 이르면 자본가치는 그것이 과정에 들어갈 때와 동일한 형태를 다시 회복하며, 화폐자본으로서 이제 새로운 과정을 시작하고 통과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의 출발형태와 최종형태가 모두 화폐자본 G의 형태라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 순환과정의 형태를 화폐자본의 순환이라고 부른다.
과정의 끝부분에서 변화한 것은 선대된 가치의 형태가 아니라 그 크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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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자본 G는 처음의 형태 (422파운드스털링)로 다시 나타나지만 그것은 이제 실현된 자본으로 존재한다. 그것을 스스로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자본으로 실현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것은 g(78파운드스털링) - 이것과 선대자본 G의 관계는 이것이 선대본의 증식분(과실)이며 동시에 그것이 스스로 창출한 증가분이라는 점이다 - 와 그 자체로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G가 자본으로 실현되는 것은 그것이 가치를 창출한 가치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G’은 자본관계로 존재한다.
G는 이제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자기증식된 가치 (즉 자신이 가진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낳는 속성을 가진 가치)로 표현되는 화폐자본의 역할을 한다.
G는 G’가운데 다른 한 부분 (잉여가치)에 대한 관계 때문에 자본이 되는데, 그 부분은 G자신이 성취한 것이며 G자신을 원인으로 한 결과물이다.
이처럼 G’은 그 자신의 내부에서 분화되고 기능적으로 (개념적으로) 구별되며 또한 자본관계를 표현하는 가치총액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결과물로만 (즉 이 결과물을 낳는 과정의 매개없이 표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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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된 자본이 그 과정의 최종단계에서 화폐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본관계의 무개념적 표현이다.
이것은 물론 W’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즉 W’는 (이것을 구성하는 W와 w는 다만 동질의 상품량을 각기 다른 비율로 나타낸 가치 부분일 뿐이다.) 자신의 기원인 P(이것의 직접적 생산물이 바로 W’이다)를 곧바로 가리키는 데 반해 유통에서 직접 도출되는 형태인 G’에서는 P와 직접적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G’이 G…G’이라는 운동의 결과를 포함하는 한, G’에 포함된, 원금과 증가액 간의 무개념적 차이는 그것이 다시 화폐자본으로 적극 기능하게 되면 (즉 증식된 산업자본의 화폐표현으로 고정되고 나면)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화폐자본의 순환은 (비록 G’이 이제는 G의 기능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결코 G’으로 시작할 수 없다. 그것은 오직 G로만 시작할 수 있다.
즉 그것은 결코 자본관계의 한 표현으로는 시작할 수 없으며 자본가치의 선대형태로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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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이 이 결과물을 화폐형태 (실현된 화폐자본)로 표현한다는 사실은 G’이 자본의 화폐형태 (즉 화폐자본)라는 점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화폐자본 (즉 화폐형태의 자본)이라는 점, 다시 말해서 자본이 이 형태로 과정을 시작하고 따라서 화폐형태로 선대된다는 점에서 파생된 것이다.
우리가 봤듯이 화폐형태로의 재전화는 상품자본 W’의 기능이지 화폐자본의 기능이 아니다. G’와 G의 차액인 g는 W의 증가분이 w의 화폐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G’=G+g인 까닭은 W’=W+w이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므로 W’에는, 이 차액은 물론 자본가치와 그것에 의해 생겨난 잉여가치와의 관계도 모두, 그것들이 G’ (두 가치 부분이 각자 독립적으로 대면하고, 따라서 각기 독립된 상이한 기능으로 사용되는 화폐액)으로 전화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고 또 표현
되어 있다.
G’은 단지 W’의 실현 결과물일 뿐이다. W’과 G’은 모두 증식된 자본 가치의 상이한 형태, 즉 그 상품형태와 화폐형태일 뿐이다.
둘은 모두 증식된 자본가치라는 공통점이 있다. 둘은 모두 실현된 자본인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자본가치 그 자체가 그것과 구분되는 잉여가치 (자본가치에 의해 획득된 과실)와 함께 - 비록 이 관계가 단지 하나의 화폐액 (또는 상품가치)의 두 부분 사이의 관계를 무개념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긴 하지만 -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잉여가치 (자본에 의해 증식된)와 관련된 (그리고 구분되는) 자본가치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즉 증식된 가치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G’과 W’은 같은 것이며 동시에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데, 단지 그 형태만 다를 뿐이다.
그들은 화폐자본과 상품자본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화폐와 상품으로 구별된다.
그들이 증식된 가치(즉 자본으로 활동하는 자본)를 표현하는 한, 그들은 다만 생산자본 기능(즉 자본가치가 가치를 낳는 유일한 기능)의 결과물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둘 모두 (화폐자본과 상품자본)가 자본의 존재양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는 화폐형태의 자본이고, 다른 하나는 상품형태의 자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구별하는 특별한 기능은 화폐기능과 상품기능 간의 차이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의 직접적 산물인 상품자본은 자신의 이런 기원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따라서 그 형태에서 화폐자본보다 더 합리적이며 덜 무개념적이다.
왜먀하면 일반적으로 모든 상품의 특수한 사용형태가 화폐 속에서는 사라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폐자본 속에도 이 과정의 모든 흔적이 소멸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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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의 변동은 형태변화 P(즉 생산과정)에서만 발생하고, 따라서 생산과정은 단지 형식적 형태변화에 불과한 유통과는 달리 자본의 실질적 형태 변화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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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치가 그 유통단계에서 취하는 두 가지 형태는 화폐자본과 상품자본이라는 형태이다. 생산단계에 속하는 형태는 생산자본이라는 형태이다.
총순환과정에서 이들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벗어던지기도 하면서, 각각의 형태에 상응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자본은 산업자본이다.
여기에서 산업이란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운영되는 모든 생산부문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화폐자본, 상품자본, 생산자본은 상호 독립적인 종류의 자본(즉 각자의 기능이 서로 독립적이고 분리된 사업부문의 내용을 이루는 자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단지 산업자본의 특수한 기능형태들을 나타낼 뿐이며, 산업자본은 이들 세 가지 기능형태 모두를 차례로 취한다.
자본의 순환은 그 여러 단계가 중단 없이 다음 단계로 이행할 경우에만 정상적으로 진행된다. 만약 자본이 제1단계 G-W에서 정지된다면, 화폐자본은 응고되어 축장화폐가 된다. 만일 그것이 생산국면에서 정지되면,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이 그 기능을 중지하고 쉬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남아돌게 된다.
또 만일 자본이 그 마지막 국면 W’-G’에서 정지되면, 팔리지 않고 적체된 상품이 유통의 흐름을 방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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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은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의 획득뿐만 아니라 잉여가치의 창출도 자본의 기능으로 만드는 유일한 자본의 존재양식이다. 그러므로 산업자본은 생산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조건으로 한다.
즉 산업자본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본가와 임노동자 간의 계급대립이 존재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산업자본이 사회적 생산을 지배해감에 따라서 노동과정의 기술과 사회적 조직이 변혁되고, 이와 함께 사회의 경제적, 역사적 유형이 변혁된다.
이미 과거지사가 되어버렸거나, 또는 현재 쇠퇴하고 있는 사회적 생산 상태에서 산업자본 이전에 출현했던 다른 종류의 자본은, 산업자본에 종속되어 그들 기능의 매커니즘을 산업자본에 적응하도록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산업자본을 기초로 해서만 움직이고, 따라서 이 기초와 더불어 흥망성쇠를 나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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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개별 자본은 한편으로는 그 유통의 전반과 후반인 G-W, W’-G’에서 일반적 상품유통의 한 주체가 되어 화폐로 또는 상품으로 기능하고 연결됨으로써 상품세계의 일반적 형태변화의 연쇄 속에서 한 매개고리를 이룬다.
다른 한편, 각 개별 자본은 일반적 유통 속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순환을 그리는데, 이 순환에서는 생산영역이 하나의 통과 단계를 이루고 각 자본은 출발할 때와 동일한 형태로 그 출발점으로 복귀한다.
동시에 각 개별 자본은 생산과정에서의 실질적 형태변화를 포함하는 자신의 순환 속에서, 그 가치의 크기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화폐가치로 복귀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증식되어 증가된 화폐가치로 복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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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의 화폐형상이 독립적인 가치의 현상형태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시발점과 종점이 화폐인 유통형태 G…G’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추진 동기 (즉 돈벌이)를
가장 생생하게 표현한다.
생산과정은 돈벌이를 위해서 불가피한 필요악 (단지 하나의 중간고리)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하에 있는 모든 나라는 주기적으로 생산과정의 매개 없이 부를 늘리고자 하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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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G의 순환은 다른 두 순환 (P와 W’의 순환)과 두 가지 측면에서 구별된다.첫째는 양극이 화폐형태라는 점에 의해서 구별된다. 화폐는 독립된 실체를 가진 가치의 존재형태 - 즉 상품들의 사용가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독립적 가치형태인 생산물의 가치 - 이다.
둘째, P…P형태는 반드시 P…P’(P+p)로는 되지 않으며, W…W’형태에서는 양극 사이에 어떤 가치의 차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식 G…G’의 특징은 첫째, 자본가치가 출발점을 이루고, 증식된 자본가치가 그 복귀점을 이루고 있어서, 자본가치의 선대는 전체 운동의 수단으로 나타나고, 증식된 자본가치는 그 목적으로 나타난다.
둘째, 이 관계는 화폐형태 (즉 독립된 가치형태)로 표현되어 있으며, 화폐자본이 화폐를 낳는 화폐로서 표현되어 있다.
가치에 의한 잉여가치의 창출은 그 과정의 알파와 오메가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번쩍번쩍 빛나는 화폐형태로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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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개별자본의 순환에 의해 시작되고 또 그것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자본가의 착취 대상으로 항상 시장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뭣보다도 먼저 생존해야 하며, 개인적 소비를 통해 자신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소비 그 자체는 여기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생산적 소비를 위한 하나의 조건으로만 (즉 노동자가 자신의 개인적 소비를 통해 자신을 노동력으로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한에서만) 전제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순환에 들어가는 본래의 상품 Pm은 단지 생산적 소비를 위한 재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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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중상주의의 대변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취지의 장황한 설교를 듣게 된다. 즉 개별 자본가는 노동자만큼 소비해야 하며, 자본가다운 영민함을 갖춘 국가는 자국 상품의 소비와 소비과정 전체를 어리석은 다른 국가들에 맡기고, 생산적 소비를 자신의 필생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설교는 종종 형식과 내용에서 교부들의 금욕적 훈계를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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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자본의 순환은 산업자본 순환의 가장 일면적인 (따라서 가장 적절하며 가장 특징적이기도 한) 현상형태이며, 가치의 증식 (즉 돈벌이와 축적)이 산업자본의 목적이자 추동력이라는 점 (말하자면 보다 비싸게 팔기 위해 구매한다는 사실)을 가장 일목 요연하게 보여주는 형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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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 순환의 일반적 형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전제되어 있는 한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 상태에서는), 화폐자본의 순환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 신규로 투하되는 산업자본의 최초의 화폐자본 순환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외부에서는 이미 - 하나의 선행조건으로 전제된다.
이 생산과정이 항상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P…P라는 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제1단계인 G-W내부에 이미 이런 전제는 스스로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이 단계는 임노동자 계급의 존재를 전제하며 다른 한편으로 생산수단의 구매자에게 제1단계 G-W인 것이, 그 판매자에게는 W’-G’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W’가 상품자본임을 전제하며, 따라서 그 상품이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결과물이며, 또한 생산자본의 기능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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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본의 순환은 P…W’-G’-W…P라는 일반적 정식을 갖는다.
이것은 생산자본의 주기적 반복 기능 (즉 재생산)을 의미하고 바꿔 말하면 가치증식과 관련된 재생산과정으로서 생산자본의 생산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잉여가치의 생산일 뿐만 아니라 잉여가치의 주기적 재생산이기도 하며 동시에 생산적 형태로 존재하는 산업자본의 기능이며, 이 기능은 한 번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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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순환은 G’로 끝나지만, G’도 원래의 G와 마찬가지로 화폐자본ㄴ으로 제2순환을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땜누에, G’에 포함된 G와 g(잉여가치)가 계속 같은 길을 함께 가느냐 아니면 각자 다른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은 더 검토할 필요가 없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제1순환의 반복과정을 계속해서 추적할 경우에만 비로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산자본의 순환에서는 이 문제가 결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산자본의 최초의 순환이 이것에 의해 결정되며, 이 순환에서는 W’-G’이 제 1의 유통단계로 나타나고, 그것은 G-W에 의해 보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식 (생산자본의 유통정식)이 단순재생산을 나타내는가 확대재생산을 나타내는가는 이 결정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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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W’-G’=W’-(G+g)에 의해 상품자본이 실현됨으로써, W’-G’에서는 동일한 상품량에 의해 여전히 통합되어 진행되는 자본가치와 잉여가치의 운동이, 이제 양자가 각기 분리된 화폐약으로 독자적 형태를 갖게 됨에 따라, 분리될 수 있게 된ㄷ,
둘째, 이런 분리가 실제로 진행되어 g는 자본가의 수입으로 지출되고, 자본가치의 기능적 형태인 G는 그 순환에 의해 정해진 자신의 궤도를 계속 달린다면, 제 1의 행위인 W’-G’은 두 개의 상이한 유통, 즉 W-G-W와 w-g-w로 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모두 그들의 일반적 형태로 보면 보통의 상품유통에 속하는 순서이다.
셋째, 여전히 W와 G속에서 통합적으로 진행되는 자본가치와 잉여가치의 운동이 부분적으로만 분리되든가 (잉여가치의 일부가 수입으로 지출되지 않는 경우), 또는 전혀 분리되지 않는다면, 자본가치의 순환이 끝나기 전에 그 순환 내부에서 자본가치 그 자체에 변화가 발생한다. 우리의 예에서 생산자본의 가치는 422파운드스털링이었다. 만약 이 자본이 가령 480파운드스털링 또는 500파운드스털링으로 G-W를 계속한다면, 자본은 그 최초의 가치보다 58파운드스털링, 또는 78파운드스털링만큼 증가된 가치로서 그 이후의 순환단계들을 통과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자본의 가치구성 변화와 결부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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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미래노동이나 다른 노동자의 노동이 전화된 형태를 화폐형태의 임금으로 지불받는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과거노동 일부를 가지고 노동자에게 그의 미래노동에 대한 어음을 지불하는 셈이다.
이처럼 노동자의 현재노동과 미래노동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재고를 형성하기도 하고 그의 과거노동을 직접 지불하기도 한다.
이 경우 재고형성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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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자본은 운동이 중단되지 않는 한, 그것이 구매수단으로 사용될 때에는 유통수단으로만 나타나고, 자본가들이 상호 구매를 통해 차액만 결제할 경우에는 본래의 지불수단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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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자본의 기능은 단지 상품자본이 생산자본으로 재전화하는 것을 매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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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요소의 상품생산물로의 전화는 생산영역에서 발생하는 반면, W’에서 P로의 재전화는 유통영역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단순한 상품의 형태변화에 의해 매개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체적으로 볼 때 재생산과정의 한 계기이다.
자본의 유통형태인 W-G-W는 기능적으로 규정된 소재변환을 포함한다.
또한 W-G-W라는 전화는 W가 상품량 W’의 생산요소와 같아야 하며, 또한 이 요소들은 서로 원래의 가치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므로 상품이 그 가치대로 구매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상품이 순환 중에 어떤 가치변화도 겪지 않는다는 것도 여기에서는 전제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과정은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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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W’ 형태에서 화폐형태를 취하고자 하는 열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G’에서 자본은 다시 생산자본의 형태로 전화하기 위해 화폐형태의 외피를 입자마자 곧바로 다시 그것을 벗고자 열망한다.
자본은 화폐형상에 머물러 있는 한, 자본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가치는 증식되지 않는다. 자본은 휴면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G는 유통수단으로 기능하지만, 그것은 자본의 유통수단이다.
자본가치의 화폐형태가 그 제1순환형태(화폐 자본의 형태)에서 갖는 자립적 외양은 여기 제2형태에서는 사라져버리며, 따라서 제2형태는 제1형태의 비판이며, 제1형태를 단지 하나의 특수형태로 환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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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자본의 생산자본으로의 전화는 상품생산을 위한 상품구매이다.
소비는 오직 그것이 생산적 소비인 한에서만 자본 그 자체의 순환에 들어간다.
생산적 소비의 조건은 이렇게 소비되는 상품을 매개로 잉여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생산자의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생산 (때로는 상품생산)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이 잉여가치 생산을 조건으로 하는, 상품에 의한 상품의 교체는 단지 화폐에 의해 매개될 뿐인 생산물 교환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이 사실을 어떠한 과잉생산도 불가능하다는 증거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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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G’이라는 행위는, 자본가치가 그 순환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잉여가치가 자본가에 의해 소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W’이 화폐로 전화(즉 판매)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물론 W’은 그 물품이 하나의 사용가치이고, 따라서 소비(생산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에 적합하기 때문에 구매된다.
그러나 W’이 면사를 구매한 상인의 수중에서 계속 유통된다 하더라도, 이는 그 면사를 생산하여 상인에게 판매한 개별 자본의 계속적인 순환과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다. 전 과정은 계속되고, 그와 함께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도 계속된다. 이 점은 공황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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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에 의해 생산되는 상품량의 크기는 생산의 규모와 지속적인 생산의 확대 욕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미리 예정된 수요와 공급의 범위, 혹은 충족되어야 하는 욕구의 범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대량 생산의 경우 그 직접적인 구매자는, 다른 산업자본가들을 제외한다면, 도매상인뿐이다. 일정 한계 내에서 재생산 과정은 거기에서 빠져나온 상품들이 실제로 개인적, 생산적 소비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같은 규모 또는 확대된 규모로 이루어질 수 있다. 상품의 소비는 그 상품이 나온 자본 순환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면사가 팔리면 그 판매된 면사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면사로 나타나는 자본가치의 순환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생산물이 판매되는 한, 자본가적 생산자의 입장에서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대표하는 자본가치의 순환은 중단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이 과정이 확대된다면 - 이는 생산수단의 생산적 소비의 확대를 포함한다 - 이러한 자본의 재생산은 노동자 쪽에서 개인적 소비 (따라서 수요)의 확대를 수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과정은 생산적 소비에 의해 준비되고 매개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잉여가치의 생산은 물론 그에 따른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도 함께 증가하고, 재생산과정 전체가 번창한 상태이면서도, 상품의 상당 부분이 단지 외관상으로만 소비에 들어간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여전히 상인들 수준에서 판매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 사실상 여전히 시장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한 상품 흐름이 다른 상품 흐름을 따라잡아버리면, 결국 이전의 흐름이
단지 외관상으로만 소비에 흡수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상품자본들은 시장에서 서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뒤에 나오는 자는 전량을 팔기 위해 보다 낮은 가격으로 판매한다. 이전의 상품은 아직 다 팔리지도 않았는데, 그에 대한 지불기일은 다가온다. 그 소유자는 지불불능을 선언하거나 지불하기 위해서는 어떤 가격으로든 팔아야 한다. 이러한 판매는 현실적 수요상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단지 지불에 대한 수요, 즉 상품을 화폐로 전환시켜야 하는 절대적 필요성과 관계될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공황이 발발한다.
공황은 소비적 수요 (즉 개인적 소비를 위한 수요)의 직접적 감소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과 자본 간 교환의 감소 (즉 자본의 재생산과정의 축소)에 의해서 가시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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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유통에서 빠져나온 화폐는 모두 축장화폐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축장화폐 형태가 화폐자본의 기능이 되는데, 이는 G-W에서 구매수단 또는 지불수단으로서 화폐의 기능이 화폐자본의 기능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자본가치가 여기에서 화폐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며, 화폐상태가 산업자본의 순환과 관련되 여러 단계들 가운데 하나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화폐자본은 산업자본의 순환 내부에서 단지 화폐의 기능만 수행하며, 이 화폐기능은 순환의 다른 단계들과의 관련에 의해서만 자본기능으로서 의의가 있다는 것도 여기서 다시 한 번 입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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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화폐자본이 화폐상태로 정체되는 것은 운동이 중단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 중단이 합목적인지 아닌지, 혹은 자발적인 것인지 비자발적인 것인지, 그 기능에 일치되는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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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정의 확대가 이루어지는 비율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실현된 잉여가치는 그것을 자본화할 경우에도, 실제로 추정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즉 과정 중인 자본가치의 순환에 들어갈 수 있는) 크기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의 순환을 반복해야 할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그만한 크기가 될 때까지 축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잉여가치는 축장화폐로 응결되고, 이런 형태를 통해 잠재적 화폐자본이 된다. 그것이 잠재적인 까닭은 화폐형태로 머물러 있는 한 자본으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화폐축장은 자본주의적 축적과정에 포섭되어 그것에 수반되긴 하나, 동시에 이 과정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하나의 계기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재생산과정 그 자체는 잠재적 화폐자본의 형성에 의해 확대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여기에서는 자본가적 생산자가 자신의 생산규모를 곧바로 확대할 수 없기 때문에 잠재적 화폐자본이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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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의 모든 특징은 선대된 자본가치의 증식에 의해 규정되며, 따라서 첫째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의 생산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그것의 두 번째 특징은 자본의 생산 (즉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에 의해 규정된다. 축적 (또는 확대된 규모의 생산)은 잉여가치 생산의 부단한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따라서 자본가의 치부를 위한 수단으로, 즉 자본가의 개인적 목적으로) 나타나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경향 속에 내재된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의해 모든 개별 자본가에게 하나의 필연이 된다.
그의 자본의 부단한 증대는 그가 자본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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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P’에서 P’은 잉여가치가 생산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 잉여가치가 자본화되었다는 사실 (즉 자본이 축적되었다는 사실, 따라서 P’는 P와는 달리 최초의 자본가치에 자본가치의 운동에 의해 축적된 자본의 가치를 더한 것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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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생산자본 형태의 산업자본도 생산물을 창출하는 다른 노동과정과 똑같은 요소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즉 한편으로는 물적 노동조건 (생산수단)과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적으로 (합목적적으로)활동하는 노동력이 바로 그 요소들이다.
산업자본은, 생산영역에서는 생산과정 일반에 적합한 (따라서 비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도 적합한) 구성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이라는 구성)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통영역에서는 유통에 적합한 두 가지 형태 (즉 상품과 화폐)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력이 타인의 노동력이고 자본가는 자신의 생산수단을 다른 상품소유자에게서 구매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노동력도 그 소유자에게서 구매한다는 사실을 통해, 생산요소의 총체는 처음부터 스스로가 생산자본이라는 것을 명시한다.
따라서 생산과정 그 자체도 산업자본의 생산적 기능으로 등장하고, 화폐와 상품도 동일한 산업자본의 유통형태로 등장하며, 따라서 그들의 기능도 산업자본의 유통기능 (즉 생산자본의 기능을 끌어들이든가 아니면 그것에서 벗어나는)으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화폐기능과 상품기능이 동시에 화폐자본의 기능과 상품자본의 기능이 되는 것은 오직 산업자본이 순환과정의 여러 단계들에서 수행해야 하는 여러 기능 형태와 그것들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폐가 화폐로서, 상품이 상품으로서 갖는 독특한 성격과 기능을, 이들이 지닌 자본으로서의 성격에서 도출하고자 하는 것은 오류이며, 반대로 생산자본의 특성을 생산수단의 존재양식에서 도출하는 것도 역시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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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증대는 자본의 가치구성과 관련되고, 이 변화가 진전됨에 따라 생산수단의 가치는 증가하며, 노동력의 가치는 항상 상대적으로 (때로는 절대적으로도) 감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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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장화폐가 축장화폐의 상태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자본으로 기능하지 않고, 가치증식과정에도 참여하지 않으며 단지 하나의 화폐액 - 이 화폐액은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화폐들이 동일한 금고 속에 계속 들어오는 방식으로만 증가한다 - 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축장화폐라는 형태는 단지 유통하지 않는 화폐의 형태, 즉 유통이 중단되어 화폐형태로 보존된 화폐의 형태에 불과하다.
화폐축장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 보면, 모든 상품생산에 공통된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자기목적이 되는 것은 상품생산이 아직 발전하지 못한 전 자본주의적 형태에서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축장화폐는 화폐자본의 형태로 나타나며, 화폐축장은 자본축적에 일시적으로 수반되는 과정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화폐가 여기에서 잠재적인 화폐자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한에서만 그러하다), 또한 화폐축장 (즉 화폐형태로 존재하는 잉여가치의 축장화폐 상태)은 잉여가치가 실제로 가능하는 자본으로 전화하기 위해 자본순환 외부에서 진행되는 (기능적으로 규정된) 준비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축장화폐는 이런 규정에 의해 잠재적 화폐자본이 되며, 따라서 그것이 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획득해야 하는 크기도 그때그때마다 생산자본의 가치구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그것이 축장화폐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아직 화폐자본으로 기능하지 않고 여전히 쉬고 있는 화폐자본이다.
그것은 이전처럼 기능을 중단한 것이 아니고, 아직 그 기능을 수행할 능력이 없는 화폐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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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W’-G’과정이 정상적인 한도를 초과하여 길어진다면, 즉 상품 자본의 화폐형태로의 전화가 비정상적으로 지연된다면, 또는 이 전화가 완료되더라도 가령 화폐자본이 전화되어야 하는 생산수단의 가격이 순환이 시작할 때보다 높아진다면, 축적기금으로 기능하는 축장화폐는 화폐자본(또는 화폐자본의 일부)을 대신하여 사용될 수 있다. 이 경우 화폐축적기금은 순환의 교란을 조정하기 위한 준비금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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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준비금은 이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자본 (즉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폐자본)의 구성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축적의 전 단계에 있는 자본, 즉 아직 활동 상태의 자본으로 전화하지 않은 잉여가치의 구성 부분이다.
물론 자본가가 곤경에 처했을 경우에는 그의 수중에 있는 화폐가 어떤 기능을 가졌든 상관없이 자본순환을 계속 진행시키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무엇이든 사용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가령 우리의 예에서 G=422파운드스털링이고, G’=500파운드스털링이다.
만약 422파운드스털링의 자본 가운데 일부가 지불 및 구매 수단의 자금(즉 준비화폐)으로 존재한다면 다른 조건이 불변인 한 그것은 전부 순환에 들어가기로 예정된 것이며, 또한 충분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준비금은 78파운드스털링의 잉여가치 가운데 일부이다.
이것이 422파운드스털링 가치의 자본순환 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이 순환의 조건이 달라질 경우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축적기금의 일부이며, 여기에서 그것은 재생산 규모의 확대없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화폐축적기금은 잠재적 화폐자본의 존재이며, 따라서 화폐자본으로의 전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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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자본의 순환을 나타내는 일반적 정식은 다음과 같다.
W’-G’-W…P…W’
(중략)
제3형태와 앞의 두 형태 사이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제3형태에서는 두 개의 정반대되는 국면을 갖는 총유통이 순환을 시작하는 반면, 제1형태에서는 유통이 생산과정에 의해 중단되고 제2형태에서는 두 개의 상호보완적인 국면을 갖는 총유통이 다만 재생산과정의 매개로만 나타나고, 따라서 P…P사이를 매개하는 운동을 이룬다.
G…G’의 유통형태는 G-W…W’-G’=G-W-G이다.
P…P의 유통형태는 역의 형태 W’-G’.G-W=W-G-W이다.
W’-W’에서도 유통형태는 이 후자의 형태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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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1에서 G’이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면, 그것은 화폐자본 G(즉 증식되어야 할 자본가치의 화폐형태의 선대)로 기능한다.
선대된 화폐자본의 크기는 제1순환 동안 이루어진 축적덕분에 증대되었다.
그러나 선대된 화폐자본의 크기가 422파운드스털링이든 500파운드스털링이든 그것이 단지 자본가치로 나타난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G’은 이제 더는 증식된 자본 (즉 잉여가치를 내포한 자본, 다시 말해 자본관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생산과정을 통해서만 증식될 것이다.
P’은 언제나 P(즉 잉여가치를 생산해야 할 자본가치)로 계속 기능해야 하며, 그 순환을 반복해야만 한다. 반면 상품자본의 순환은 자본가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형태로 증식된 자본가치로 시작한다.
따라서 그것은 처음부터 단순히 상품형태로 존재하는 자본가치의 순환뿐만 아니라 잉여가치의 순환도 함께 포함한다.
따라서 만일 이 형태로 단순재생산이 이루어지면, 종점의 W’은 출발점의 W’과 그 크기가 같을 것이다.
만일 잉여가치의 일부가 자본순환에 들어간다면, 좀점에서는 W’이 아니라 W’’이 나타나겠지만, 그 다음의 순환은 반드시 다시 W’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 W’은 축적을 통해 더욱 커진 자본가치를 가진 것으로서 다만 이전의 순환에서보다 더 커진 W’(따라서 새로 창출된 잉여가치에서도 그만큼 더 커진 것을 포함한다)으로 새로운 순환을 시작한다. 어느 경우든 모두 W’은 항상 ‘자본가치+잉여가치’인 상품자본으로 순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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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가 직물공장의 소유자라면, 구매량은 이 공장에서 기능하는 그의 자본의 구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그에게 판매하는 방적업자 자본의 구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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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상품자본의 경우에도 때때로 이윤을 망각하고 생산순환 전체를 다루면서 상품자본을 단지 상품으로만 간주한다. 그러나 가치의 구성 부분이 문제가 되면, 그것은 곧바로 상품자본으로 나타난다. 물론 축적도 생산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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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경우 판매자의 수중에 있는 상품은 모두 상품자본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상인의 수준에서도 계속 상품자본이다. (설사 그 전까지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일단 상인의 수중에 들어오면 상품자본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것은 원래의 상품자본을 대체하는 상품 (따라서 상품자본에 단지 다른 존재형태를 부여할 뿐인 상품) - 예를 들어 수입품 - 이어야 한다.
생산자본 P를 구성하는 상품요소 A와 Pm는 P의 존재형태로서 그들이 판매되는 여러 상품시장에 있을 때와는 모습이 다르다. 그들은 이제 통합되어 결합된 상태로 생산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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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순환 W’…W’은, 그 영역 내에 W(=A+Pm)의 형태로 존재하는 다른 산업자본을 전제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리고 Pm은 다양한 다른 자본, 예를 들어 우리의 경우 기계, 석탄, 석유 등을 포괄하기 때문에) 스스로 다음과 같은 점을 요구한다. 즉 이 순환을 단지 순환의 일반적 형태로 (다시 말해 하나의 사회적 형태로) 고찰하도록 요구한다.
바꿔 말하면 그것을 통해 각각의 개별 산업자본을 (최초로 투하된 경우는 제외) 고찰하고, 따라서 그것을 모든 개별 산업자본에 공통된 운동형태로 고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별 자본의 합 (즉 자본가계급의 총자본)의 운동형태로도 고찰하도록 요구한다. 이런 운동에서는 각 개별 산업자본의 운동이 단지 하나의 부분운동으로만 나타나고, 이 부분운동은 또한 다른 부분운동과 서로 연루되어 상호 제약하는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한 나라의 연간 총상품생산물을 고찰하고 그 운동 - 총생산물 가운데 일부가 모든 개별적 사업부문의 생산자본을 보전하고, 다른 일부가 여러 계급의 개인적 소비에 들어가는 - 을 분석한다면, 우리는 W’…W’을 사회적 자본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해 생산된 잉여가치(또는 잉여생산물)의 운동형태로 고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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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은 단지 가치의 측면 (즉 과정 전체의 목적이 선대된 자본가치의 증식이라는 점)만을 보여준다. P…P(P’)는 자본의 생산과정을 생산자본의 크기가 동일한 또는 증대된 재생산과정(축적)으로 보여준다.
W’…W’은 이미 그 최초의 극에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처음부터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를 포괄한다.
생산적 소비와 거기에 포함된 가치증식은 다만 이 순환운동의 한 부분으로만 나타난
다. 마지막으로, W’은 더 이상 어떠한 생산과정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사용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에, 생산물 가운데 일부로 표현되는 W’의 여러 가치구성 부분은 W’…W’이 사회적 총자본의 운동형태로 간주되느냐 아니면 하나의 개별 산업자본의 독립적인 운동으로 간주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지위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표시되어 있다.
이런 모든 특성에 의해 이 순환은 하나의 개별 자본의 개별적 순환으로서의 자신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것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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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에서는 상품자본 (즉 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된 총샌산물)의 운동이 개별 자본의 독립적 순환의 전제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순환에 의해 제약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므로 만약 이 형태의 특성을 올바로 파악하고자 한다면, 형태변화 W’-G’과 G-W가 한편으로는 자본의 형태변화에서 기능적으로 정해진 부분들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 상품유통의 고리들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는 거기에 대해 한 개별 자본의 형태변화와 다른 개별 자본들의 형태변화, 그리고 총생산물 가운데 개인적 소비를 위한 부분 간의 상호관련을 명백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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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에서는 총생산물 (총가치)이 출발점이기 때문에, 해외 무역을 제외한다면 이 형태는, 생산성이 불변일 때도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단지 잉여생산물 가운데 자본화되는 부분이 이미 추가 생산 자본의 소재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경우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것은 어떤 해의 생산이 다음 해의 생산의 전제로 상요될 경우 (또는 그것이 1년 내에 단순재생산 과정과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경우)란 잉여생산물이 곧바로 추가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형태로 생산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생산물 증가는 자본소재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소재의 양을 증가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함으로써 가치증식을 위한 추가적 소재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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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유통과정을 Ck라고 한다면 세 가지 형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1. G-W…P…W’…G’
2. P…Ck…P
3. Ck…P(W’)
이들 세 가지 형태를 총괄해 보면 과정의 모든 전제가 과정의 결과 (즉 과정 스스로가 만들어낸 전제)로 나타난다.
모든 계기는 제각기 출발점, 통과점, 귀착점으로 나타난다. 총과정은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통일로 나타난다. 생산과정은 유통과정의 매개자가 되며 역으로 유통과정은 생산과정은 매개자가 된다.
이들 세 순환의 공통점은 자본의 증식이 정해진 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형태 1에서는 그것이 형태로 나타난다. 형태 2에서는 P, 즉 가치증식과정 그 자체에서 시작된다. 형태 3에서 순환은 - 비록 운동은 같은 규모로 반복되지만 - 증식된 가치에서 시작하여 새롭게 증식된 가치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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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순환과정은 끊임없는 중단이며 한 단계를 지나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한 형태를 버리고 다른 형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각각의 단계는 다음 단계의 조건이 될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그것을 배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속성은 - 늘 무조건 달성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 자본주의적 생산의 특징이며 그 기술적 토대 때문에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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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산업자본의 실제 순환은 유통과정과 생산과정의 통일일 뿐만 아니라 이들 세 순환 모두의 통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그런 통일이 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본의 여러 부분이 순환의 순차적인 국면들을 연속적으로 통과할 수 있고, 하나의 국면과 하나의 기능형태에서 다음 국면과 다음 기능형태로 이행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들 부분의 전체인 산업자본이 동시에 다양한 국면과 기능 속에 존재하여 세순환 모두를 동시에 나타내는 한에서 그러하다.
여기에서 각 부분이 순차적으로 된다는 것은 그것들이 병존한다는 것(즉 자본의 분할)을 조건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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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한 부분이 한 형태로 귀환하는 것은 자본의 다른 부분이 다른 형태로 귀환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모든 부분은 끊임없이 자신을 통과하면서 순환하지만 자신
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항상 자본의 다른 부분이고 이들 각각의 순환은 단지 총과정의 동시적이고 순차적인 계기를 이룰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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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본은 멈춰 있는 물적 존재가 아니라 단지 운동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가치의 자립화를 단순한 추상으로 간주하는 자들은 산업자본의 운동이 현실에서 주로 이 추상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여기에서 가치는 여러 형태와 여러 운동을 통과하면서, 이런 운동을 통해 자신을 유지하는 동시에 증식, 확대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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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란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상쇄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려면 산업자본가는 점점 더 큰 화폐자본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진행됨에 따라 개별 생산과정의 규모가 확대되고 그에 따라 선대되어야 하는 자본의 최소 크기도 증대되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조건에는 다른 여러 요인들이 부가되어 점차 산업자본가의 기능은 개별적인 (또는 결합된) 거대 화폐자본가의 독점으로 전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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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혹은 가격)이 하락한다면 세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재생산과정이 동일한 규모로 계속될 경우이다.
이때는 기존의 화폐자본 가운데 일부가 유리되어 화폐자본의 증가가 이루어지지만, 실질적인 축적(확대재생산)이나 그런 축적을 시작하고 동반하는 g(잉여가치)의 축적기금으로의 전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기술적 조건이 허락할 경우인데 이때 재생산과정의 규모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확대된다. 마지막으로 원료 들의 재고 형성이 증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상품자본을 대체하는 요소들의 가치가 상승하면 이와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이 경우에는 재생산이 더 이상 정상적인 규모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작ㄷ업시간이 단축된다) 그렇지 않으면 재생산을 이전 규모로 계속하기 위해 화폐자본이 추가로 들어와야만 한다(화폐자본의 결박)
혹은 축적기금이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것의 전부 혹은 일부가 재생산과정의 확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재생산과정을 이전 규모로 영위하기 위해 투하된다.
이 경우에도 추가 화폐자본이 외부(즉 화폐시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산업자본가 자신의 재력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화폐자본의 결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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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이 화폐 폭은 상품으로 기능하는 유통과정 내부에서 산업자본의 순환은 화폐자본으로든 상품자본으로든 매우 다양한 사회적 생산양식 - 그것들이 상품을 생산하고 있을 경우 - 의 상품유통과 교차한다.
상품이 노예제에 기초한 생산의 생산물이든 혹은 농민의 생산물이든 혹은 공동체의 생산물이든 혹은 국영생산의 생산물이든 혹은 반야만족인 수렵민족의 생산물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들 상품은 산업자본을 나타내는 화폐와 상품에 대하여 역시 상품과 화폐로 대면하고, 산업자본의 순환은 물론 상품자본에 포함된 잉여가치의 순환에도 - 이 잉여가치가 수입으로 지출된 경우 - 들어간다.
즉 그것들은 상품자본의 두 유통영역 모두에 들어간다.
상품이 만들어진 생산과정의 성격은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은 시장에서 상품으로 기능하고, 또한 상품으로서 산업자본의 순환은 물론 산업자본에 포함된 잉여가치의 유통에도 들어간다.
따라서 산업자본의 유통과정을 특징짓는 것은 상품이 모든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 즉 시장이 세계시장으로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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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G-Pm행위가 끝나고 나면 상품(Pm)은 이제 상품이 아니라 산업자본의 존재양식 가운데 하나인 생산자본 P의 기능형태를 갖는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순간 상품의 출처는 사라져버린다. 상품은 단지 산업자본의 존재형태로만 존재하고 산업자본에 합체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재생산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는 그 발전단계의 외부에 있는 여러 생산양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생산을 가능한 한 상품생산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경향이다. 이를 위한 주요 수단은 바로 모든 생산을 이와 같이 자본주의적 유통과정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발전된 상품생산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이다.
산업자본의 침입은 모든 곳에서 이런 전화를 촉진하고 그와 함께 모든 직접적 생산자의 임노동자로의 전화도 촉진한다.
둘째, 산업자본의 유통과정에 들어가는 상품 (가변자본이 노동자에게 지불된 후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전화되는 필요생활수단도 포함하여)은 그 출처 (즉 그것이 나온 생산과정의 사회적 형태)가 어디든 산업자본 그 자체에 대해 이미 상품자본 (상품거래자본 혹은 상인자본)의 형태로 대립한다.
그리고 이 상품자본은 그 본질에 따라 모든 생산양식의 상품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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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자본의 기능인 상품거래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제이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과 함께 발전해나간다. 따라서 우리는 때때로 자본주의적 유통과정의 한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 상품거래의 존재를 주어진 것으로 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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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의 개별 순환과정 가운데 단지 일부를 이룰 뿐인 유통과정은, 그것이 일반적 상품유통 내에서 일련의 과정만을 나타낼 경우, 앞서 논의한 일반법칙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500파운드스털링이라는 동일한 화폐량에서도 화폐의 유통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즉 각각의 개별 자본이 상품형태변화나 화폐형태변화의 각 단계를 보다 빨리 통과하면 할수록) 순차적으로 통과하는 산업자본 (또는 상품자본의 형태로 존재하는 개별 자본)의 양은 더 많아진다.
따라서 화폐가 지불수단으로 기능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예를 들어 상품자본을 그 생산수단으로 대체할 때 단지 차액만을 지불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한 예를 들어 임금의 지불에서 지불일고 지불일 사이의 간격이 짧으면 짧을수록, 같은 양의 자본가치가 유통을 위해 요구하는 화폐량은 더 적어진다.
다른 한편 유통속도와 다른 모든 조건이 불변이라고 가정하면 화폐자본으로 유통하는 데 필요한 화폐량은 상품의 가격총액 (상품량 X 가격)에 의해 결정되고 상품량과 가치가 주어질 경우에는 화폐 그 자체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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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 순환과정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두드러진 특성 가운데 하나는, 한편으로 생산자본의 형성요소가 상품시장에서 빠져나와 끊임없이 갱신되고 상품으로 구매되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의 생산물이 노동과정에서 상품으로 빠져나와 끊임없이 상품으로 판매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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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물경제, 화폐경제, 신용경제는 지금까지 사회적 생산의 대표적인 세 가지 경제적 운동형태로 대비되어왔다.
그러나 첫째, 이들 세 가지 형태는 대등한 발전국면을 나타내는 것이아니다. 이른바 신용경제는 화폐경제의 한 형태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들 두 용어는 생산자들 사이의 교환기능 혹은 교환양식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발전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화폐경제는 신용경제의 기초로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화폐경제와 신용경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서로 다른 발전단계에 대응하는 것일 뿐, 결코 현물경제와 대비되는 별도의 교환형태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동일한 논리로 현물경제의 매우 다양한 형태들도 다른 두 개와
대등한 것으로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화폐경제와 신용경제라는 범주에서 강조되고 구별의 지표로 제기되는 것은 경제 (즉 생산과정 그 자체)가 아니라 경제에 상응하는 교환 양식 (다양한 생산담당자 혹은 생산자들 간의)이기 때문에 첫 번째 범주에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현물경제가 아니라 교환경제가 되어야 한다.)
페루의 잉카제국과 같은 완전히 폐쇄된 현물경제는 이들 범주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화폐경제는 모든 상품생산에 공통된 것이고 또한 생산물은 매우 다양한 사회적 생산조직체 내에서 상품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을 특징짓는 것은 단지 생산물이 거래물품 (상품)으로 생산되는 수준, 따라서 생산물의 형성요소가 생산물이 만들어진 경제에 다시 거래물품 (상품)으로 들어가야 하는 수준뿐일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생산의 일반적 형태가 상품생산인 생산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은 (그리고 발점함에 따라 차츰 더 그렇게 되는 것은) 단지 노동 자체가 여기에서는 상품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즉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자신의 노동력 기능)을 팔기 (우리가 가정한 바와 같이 재생산비에 의해 정해진 가치로) 때문이다.
노동이 임노동이 되는 수준에 따라 생산자는 산업자본가가 된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 (따라서 또한 상품생산)은 농촌의 직접생산자가 임노동자로 될 때에야 비로소 그 완전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
자본가와 임노동자의 관계에서 화폐 관계 (즉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관계)는 생산 그 자체에 내재하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기초한 것이지 교환양식의 사회적 성격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거꾸로 후자가 전자로부터 나온다.
생산양식의 성격을 통해서 거기에 상응하는 교환양식의 토대를 보지 않고 그것을 반대 방향으로 보는 것은 장삿속으로 가득 찬 부르주아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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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는 유통에서 끌어내는 것보다 더 작은 가치를 화폐형태로 유통에 투입한다.
그것은 그가 유통에서 끌어낸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상품형태로 유통에 투입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자본의 인격체 (산업자본가)로만 기능하기 때문에 그의 상품가치 공급은 항상 상품가치에 대한 그의 수요보다 크다. 이런 점에서 만약 그의 공급과 수요가 일치했다면 그것은 그의 자본이 증식하지 못했다는 것, 즉 그것이 생산자본으
로 기능하지 못했으며 생산자본이 잉여가치를 갖지 못한 상품자본으로 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그것은 이 자본이 생산과정에서 노동력으로부터 상품 형태의 잉여가치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것, 따라서 자본으로 전혀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실제로 자본가는 ‘그가 산 것보다 더 비싸게 팔아야만’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통해 그가 사들인 더 저렴한 (가치가 더 작기 때문이다) 상품을 가치가 더 큰 (즉 더 비싼) 상품으로 전화시켜야만 한다.
그가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상품을 가치 이상으로 팔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상품의 생산요소의 가치 총액보다 더 큰 가치의 상품을 팔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그의 자본을 증식하는 비율은 그의 수요와 공급 간 격차가 크면 클수록 더 커진다. 그의 목적은 자신의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들 사이의 격차를 늘리는 것 (즉 그의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개별 자본가뿐만 아니라 자본가계급 전체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자본가가 단지 산업자본의 인격체일 뿐이라는 점에서 자본가 자신의 수요는 생산수단과 노동력에만 국한된다. 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Pm에 대한 그의 수요는 선대자본보다 작다. 그가 구매하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그의 자본가치보다 작으며 따라서 그것은 그가 공급하는 상품자본의 가치보다는 훨씬 작다.
노동력에 대한 그의 수요는 가치의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총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 즉 v:C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그 비율에서 생산수단에 대한 수요보다 계속 작아진다. 자본가의 Pm에 대한 구매는 A에 대한 구매보다 계속해서 더 증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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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이 계속 발전함에 따라 노동력 (따라서 간접적으로는 생활필수품)에 대한 자본가의 수요는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의 수요에 비해 점차 감소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일 계산해보면 Pm에 대한 그의 수요가 그의 자본보다 항상 작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생산수단에 대한 그의 수요는 동일한 액수의 자본을 가지고 동일한 조건으로 노동하면서 그에게 생산수단을 공급하는 자본가의 상품생산물보다 언제나 그 가치가 작아야만 한다.
이러한 자본가가 한명이 아니라 많다고 해서 이런 사실이 변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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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축적을 위해 그는 우선 화폐형태의 잉여가치 일부분 (유통에서 획득한)을 유통에서 끌어낸 다음, 그것이 그의 기존 사업을 확장하거나 부속사업의 개시를 위해 필요한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축장화폐로 증대시켜야 한다.
화폐축장이 계속되는 동안, 그것은 자본가와 수요를 증대시키지 않는다.
화폐는 유동화되지 않는다. 이 화폐는 공급된 상품만큼 상품시장에서 끌어낸 화폐액이긴 하지만 그만큼의 상품을 상품시장에서 다시 끌어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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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생산영역에 머무는 기간이 자본의 생산기간이고 유통영역에 머무는 기간이 자본의 유통기간이다. 따라서 자본순환의 전체 기간은 생산기간과 유통기간의 합과 같다.
생산기간은 물론 노동과정 기간을 포함하지만 노동과정 기간은 생산과정을 모두 포함하지 않는다. 뭣보다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불변자본 가운데 일부분이 기계, 건물 등과 같은 노동수단 - 이것들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 반복되는 노동과정에 사용된다 - 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야간에는 노동과정이 주기적으로 중단되고 따라서 이들 노동수단의 기능도 중단되지만 그 시간에도 이들 노동수단은 여전히 생산장소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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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의 생산기간은 다음 기간들을 포함한다.
생산수단이 생산수단으로 기능하는 기간, 즉 생산과정에 사용되는 기간
생산과정이 중단된 기간, 즉 생산과정에 합체된 생산수단의 기능이 중단되어 있는 기간. 생산수단이 과정의 조건으로 준비되는 기간, 즉 이미 생산자본을 나타내긴 하지만 아직 생산과정에 들어가지 않는 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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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기간과 노동기간이 일치하면 할수록 주어진 기간 동안 일정 생산자본의 생산성과 가치증식이 더 커진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노동기간을 초과하는 생산기간을 가능한 한 줄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본의 생산기간은 자본의 노동기간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항상 노동기간을 포함하고 있고 그둘 간의 차이는 그 자체가 생산과정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생산기간은, 비록 거기에 자본의 잠재적인 기간 (혹은 가치증식 없이 생산하는 기간)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늘 자본이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식시키는 (즉 생산자본으로 기능하는) 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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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영역 내에서 자본은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으로 머문다.
자본의 두 유통과정은 상품형태에서 화폐형태로, 화폐형태에서 상품형태로 전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품의 화폐로의 전화가 여기에서는 동시에 상품에 합체된 잉여가치의 실현이기도 하다는 사실, 또한 화폐의 상품으로의 전화가 동시에 자본가치 자신의 생산요소 형태로의 전화 (또는 재전화)이기도 하다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이들 과정은 모두 유통과정으로서 상품의 단순한 형태변화과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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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간과 생산기간은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있다. 유통기간 동안 자본은 생산자본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고 따라서 상품이나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총자본가치가 언제나 한 번에 하나의 국면에서 다음 국면으로 이행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순환을 고찰해보면, 유통기간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생산과정이 중단되고 따라서 자본가치의 증식도 중단된다는 것, 그리고 생산과정의 갱신 속도가 유통기간의 길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반면 자본의 여러 부분이 순차적으로 순환을 통과할 경우, 즉 총자본가치의 순환이 자본의 여러 부분의 순환 내에서 연속적으로 이루어질 경우에는, 자본의 각 부분이 유통부문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자본 가운데 끊임없이 생산영역에서 기능하는 부분의 크기가 더 작아질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통기간의 확대와 축소는 생산기간 (혹은 주어진 크기의 자본이 생산자본으로 기능하는 범위)의 축소와 확대에 반대 요인으로 작용한다.
자본 유통의 형태변화가 관념적이면 관념적일수록, 즉 유통기간이 0혹은 0에 가까울수록 가능하는 자본의 크기와그 생산성 및 잉여가치도 함께 커진다.
예를 들면 한 자본가가 생산물의 인도와 동시에 대금을 지불받기로 하고 주문에 따라 작업을 하고, 그 대금의 지불을 자본가 자신의 생산수단으로 받는다면 유통기간은 0에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자본의 유통기간은 자본의 생산기간을 제한하고 따라서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을 제한한다. 그것도 유통기간의 길이에 비례하여 제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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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이 이런 표피적인 외관에 더 집착하는 까닭은 그런 표피적인 외관이야말로 자본이 그 생산과정 (따라서 노동의 착취)과는 무관하게 가치증식의 신비한 원천을 가지고 있으며, 그 원천이 유통영역에서 비롯된 것임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후에 다시 다루게 되겠지만 심지어 과학적인 경제학조차 이런 표피적
인 외관에 현혹당했다. 곧바로 다루게 되겠지만 이런 표피적인 외관은 다음과 같은 여러 현상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자본가적 이윤 계산 방법.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원인이 긍정적인 원인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단지 유통기간만 다른 다양한 투하영역들에 있는 자본들은 유통기간이 길어지면 그것이 가격인상의 원인 (즉 이윤의 균등화 원인 가운데 하나)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유통기간은 회전기간의 한 계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회전기간은 생산기간 (또는 재생산기간)을 포함한다. 실제로는 생산기간에 기인하는 것이 마치 외관상으로는 유통기간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품이 가변자본 (임금)으로 전화하는 것은 그에 앞서 그것들이 화폐로 전화하는 것을 필요조건으로 한다. 그러므로 자본의 축적에서 추가 가변자본으로의 전환은 유통영역 (또는 유통기간 동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렇게 이루어진 축적은 유통영역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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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은 본래 소실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것들이 각자의 용도에 따라 일정 기간 내에 생산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소비되지 않는다면 (달리 말해서 만약 그것들이 일정 기간 내에 판매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소비됨으로써 사용가치와 함께 교환가치를 갖는 성격까지 모두 잃게 될 것이다. 그와 함께 상품에 포함된 자본가치와 이 자본가치에 합체된 잉여가치도 모두 소멸될 것이다.
사용가치는 끊임없이 갱신되고 재생산되고 또한 새로운 사용가치 (같은 종류든 다른 종류든)에 의해 대체되지 않고서는 계속적으로 증식하는 자본가치의 담지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사용가치가 완성된 상품형태로 판매된다는 것, 따라서 그것들이 이 판매를 통해 생산적 소비 혹은 개인적 소비로 돌아간다는 것은 재생산이 끊임없이 갱신되기 위한 조건을 이룬다.
그것들은 새로운 형태를 계속 존속하기 위해 일정 기간 내에 자신들의 낡은 사용형태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교환가치는 그 실체를 이렇게 끊임없이 갱신하는 것을 통해서만 자신을 유지한다. 상품의 사용가치는 상품의 종류에 따라 각기 소멸되는 기간이 다르다. 그러므로 사용가치의 생산과 소비 사이의 간격은 상품마다 다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용가치가 W-G의 유통국면 안에서 상품자본으로 머무는 기간 (즉 상품으로서의 유통기간)은 제각기 다를 수 있다.
상품체의 소멸에 의한 상품자본 유통기간의 한계는 유통기간 가운데 이 부분 (즉 상품자본이 상품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유통기간)의 절대적 한계이다.
따라서 상품은 빨리 소멸하는 것일수록, 따라서 생산된 후 곧바로 소비되고 판매되
어야 하는 것일수록 생산지에서 더 멀리 떨어질 수 없게 되고, 그 공간적 유통영역이 더 좁아지고 판매시장의 범위도 더 국지적으로 제한된다.
결국 빨리 소멸하는 상품일수록 상품으로서의 유통기간이 그런 물리적 속성에 의해 더 큰 제한을 받게 되고 그것은 그만큼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상으로 부적절하게 된다. 이런 상품은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만, 혹은 운송기관의 발달에 의해 지역적 거리가 단축되는 정도에 따라서만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특정 상품의 생산이 소수의 수중에, 그리고 인구가 많은 지역에 집중되면 대규모 맥주 양조업, 낙농업 등의 생산물들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큰 시장이 창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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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상품이 가치대로 팔린다면 가치의 크기는 구매자의 수중에서나 판매자의 수중에서나 똑같다. 변하는 것은 단지 가치의 존재형태뿐이다.
상품이 가치대로 팔리지 않는다고 해도 거래된 가치의 총액은 변하지 않는다. 즉 한쪽에서 발생한 이익은 다른 한쪽의 손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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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만약 상품소유자가 자본가가 아니라 독립적인 직접생산자라면 매매에 걸리는 시간은 그들의 노동기간의 감소를 뜻하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고대와 중세에도) 이 거래를 휴일에 하려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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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해 타인을 노동시키는 자본가에게 판매와 구매는 하나의 중요한 기능이 된다. 그는 많은 이의 생산물을 거대한 사회적 규모로 전유하기 때문에 판매도 역시 대규모 수행해야 하고 나중에 다시 이것을 화폐에서 생산요소로 재전화해야만 한다. 구매기간과 판매기간은 여전히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상인자본의 기능 때문에 하나의 환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것을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음 사실은 처음부터 명백하다. 그 자체로는 비생산적이지만 재생산에는 반드시 필요한 계기를 이루는 어떤 기능이, 분업을 통해 다수의 부업에서 소수의 전업 (즉 소수의 특정 사업)으로 전화된다 하더라도 이 기능 자체의 속성은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 사람의 상인 (여기에서는 그냥 상품의 형태전화를 담당하는 자, 즉 단순한 구매자와 판매자로 간주된다)은 자신의 영업을 통해 많은 생산자의
매매기간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그는 쓸데없는 에너지의 지출을 줄이고 생산기간을 풀어주도록 돕는 하나의 기계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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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도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는 재생산과정 그 자체가 비생산적인 기능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노동하지만 그의 노동의 내용은 가치도 생산물도 창출하지 못한다.
그는 생산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다.
그의 유용성은 비생산적인 기능을 생산적인 기능으로 바꾸거나 혹은 비생산적인 노동을 생산적인 노동으로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러한 전화가 그런 기능의 이전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이다. 그의 유용성은 오히려 사회의 노동력과 노동시간 가운데 이런 비생산적인 기능에 묶여 있는 부분을 줄여준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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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상품생산자가 유통담당자로 등장할 경우 그가 직접적 상품생산자와 구별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즉 그는 직접적 상품생산자보다 더 큰 규모로 매매하고 따라서 더 넓은 범위에서 유통담당자로 기능할 뿐이다.
그리고 그가 사업규모 때문에 유통담당자를 임노동자로 구매(고용)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혹은 구매할 수 있을 경우에도) 사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노동력과 노동시간은 여전히 일정한 정도로 유통과정 (이것이 단순한 형태전화인 한)에 지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추가 자본투하로 나타난다.
가변자본 가운데 일부는 유통에서만 기능하는 이들 노동력의 구입에 투하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자본선대는 생산물은 물론 가치도 전혀 창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생산물의 일부가 생산물의 나머지 부분을 매매하는 기계로 전화된 것과 같다.
이런 기계는 생산물 가운데 하나의 공제부분을 이룬다. 이것은 비록 유통에 지출되는 노동력을 감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산과정에는 함께 참가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유통비의 일부를 이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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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든 그렇지 않든 생산물은 항상 부의 소재적 형태, 즉 개인적 소비나 생산적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사용가치이다.
상품일 경우 생산물의 가치는 관념적인 가격으로 존재하며 이 가격은 생산물의 현실적인 사용형태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금은과 같은 특정 상품이 화폐로 가능하고, 화폐는 단지 유통과정에만 머물러 있다는 사실 (화폐는 축장화폐, 준비금 등의 형태로도 - 비록 잠재적이기는 하지만 - 유통영역에 머문다)은 생산과정의 특정한 사회적 형태 (즉 상품의 생산과정)가
만들어낸 순수한 하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상품이 생산물의 일반적 모습이 되고 생산물의 대부분이 상품으로 생산되어 결국 화폐형태를 띠어야만 하기 때문에 (즉 상품량 - 사회적 부 가운데 상품으로 기능하는 부분 - 이 끊임없이 늘어나기 때문에) 유통수단, 지불수단, 준비금 등으로 기능하는 금은의 양도 함께 증가한다.
화폐로 기능하는 이들 상품은 개인적 소비는 물론 생산적 소비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화폐는 사회적 노동이 단순한 유통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 고정된 형태이다.
사회적 부 가운데 일부가 이런 비생산적 형태로 묶여 있다는 이유 외에도 또 화폐의 마모 때문에 화폐는 끊임없이 보전 (즉 보다 많은 사회적 노동 (생산물의 형태를 취하는)이 보다 많은 금은으로 전화) 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국가에서는 일반적으로 부 가운데 화폐형태로 묶여 있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 이런 보전비용이 상당하다.
화폐상품으로서의 금은은 사회에서 단지 생산의 사회적 형태 때문에 발생하는 유통비를 의미한다. 그것은 상품생산 일반에 따른 부대비용이며 이 부대비용은 상품생산의 발달,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달과 함께 증대된다.
그것은 사회적 부 가운데 유통과정을 위해 지불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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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본이 상품자본으로 (즉 상품재고로)존재함으로써 여러 가지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들 비용은 생산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유통비로 분류된다.
이들 유통비는 일정 정도 상품의 가치에 포함되기 (즉 상품 가격을 올리기) 때문에 제1절에서 언급한 유통비와는 구별된다.
어쨌든 상품재고를 유지하고 보관하는 데 사용되는 자본과 노동력은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분리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서 사용된 자본과 노동력 - 자본의 한 구성요소로 간주된다 - 은 사회적 생산물을 통해서 보전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이런 자본투하는 노동생산력을 떨어뜨리는 작용을 하게 된다.
즉 일정한 유용효과를 얻는 데 더 많은 자본과 노동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부대비용인 것이다.
상품재고의 형성과 관련된 유통비는, 단지 기존의 가치가 상품형태에서 화폐형태로 전화하는 데 필요한 기간 때문에 (즉 생산과정의 특정한 사회적 형태 때문에, 다시 말해서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고 따라서 화폐로의 전화를 거쳐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이들 비용은 제1절에서 상술한 유통비와 그 성격이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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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재고는 세 가지 형태, 즉 생산자본의 형태, 개인적 소비기금의 형태, 상품재고 또는 상품자본의 형태로 존재한다. 재고는 절대량에서는 세 형태 모두에서 동시에 증가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한 형태에서 증가하면 다른 형태에서는 감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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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의 속도와 규칙성 및 안정성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생산자의 수중에서 가공되기를 기다리는 생산자본의 잠재적인 부분 (즉 원료 등의 재고)은 그만큼 더 많아야 한다. 이들 조건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 정도 (따라서 사회적 노동생산력의 발전 정도)에 반비례한다. 따라서 이런 형태의 재고도 역시 그에 반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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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상품이 생산물의 일반적 형태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그 경향은 가속화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곳에서는 (생산규모가 같을 경우에도) 생산물 가운데 상품으로 존재하는 부분의 비율이 자본주의 이전의 생산양식이나 아직 덜 발달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비해 훨씬 더 높다. 그러나 모든 상품은 (따라서 모든 상품자본 (그냥 상품에 불고하지만 그 상품이 자본가치의 존재형태인)도) 생산영역에서 직접 생산적 소비나 개인적 소비로 들어가지 않고 생산과 소비의 중간인 시장에 있는 한 상품재고의 한 요소를 이룬다.
따라서 (생산규모가 불변일 경우) 상품재고 그 자체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진행됨에 따라 증가한다. 이것은 단지 재고의 형태변화에 불과하다.
즉 한쪽에서 상품형태의 재고가 증가하는 것은 다른 한쪽에서 직접적인 생산용 혹은 소비용 형태의 재고가 감소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고의 사회적 형태가 변화된 것에 불과하다.
만약 사회적 총생산물에 비해 상품재고의 상대적 크기가 증가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절대적인 크기도 증가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함에 따라 총생산물의 크기가 증대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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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재고가 상품유통의 조건이고 상품유통 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형태인 한, 다시 말해서 화폐준비의 형성이 화폐유통의 조건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런 외관상의 정체가 흐름 그 자체의 형태인 한 - 단지 이런 한에서만 이 정체는 정상적인 것이다. 반면 유통의 저수지에 머물러 있는 상품이 그 뒤에 계속되는 생산의 흐름에 곧바로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아 저수지가 넘쳐버리게 되면, 마치 화폐유통이 정체되면 축장화폐가 늘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통의 정체로 인해 상품재고가 늘어나게
된다. 이런 정체가 산업자본가의 창고에서 일어나든 상인의 창고에서 일어나든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경우 상품재고는 판매가 중단 없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상품이 판매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결과이다.
비용은 동일하지만 이제 이 비용은 순전히 형태로부터 (즉 상품을 화폐로 전화시킬 필요와 이런 형태변화의 어려움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상품가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공제 부분을 이루며 가치실현에서의 가치손실이다.
재고의 정상적인 형태와 비정상적인 형태를 형태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고 양쪽 모두 유통의 정체이기 때문에 이 두 현상은 혼동하기 쉬운 것이다.
게다가 생산자의 입장에서는 이미 상인의 손에 넘겨진 자기 상품의 유통과정이 정체되어 있어도 자신의 자본 유통과정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기만당하기 쉽다. 다른 조건이 불변인 한 생산과 소비가 팽창하면 상품재고도 마찬가지로 팽창한다. 상품재고는 똑같은 속도로 갱신되고 흡수되지만 그 규모는 이전보다 더 커지게 된다. 따라서 유통의 정체에 의한 상품재고의 팽창이 재생산과정의 확대 징조로 오인될 수 있는데 이는 특히 신용제도의 발달에 따라 현실의 운동이 신비화하면 더욱 그렇게 오인 될 수 있다.
재고형성비용의 구성요소는 다음 세 가지이다.
생산물의 양적인 감소, 품질의 손상, 재고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대상화된 노동과 산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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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법칙에 따르면 상품의 형태전화에서 발생하는 유통비는 어떤 것도 상품에 가치를 부가하지 않는다.
유통비는 가치실현을 위한, 또는 가치를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전하기 위한 비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비용에 지출된 자본 (이 자본의 통제하에 이루어진 노동도 포함하여)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부대비용에 속한다. 그것은 잉여생산물로부터 보전되어야 하는데, 전체 자본가계급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에서 공제되는 부분을 이룬다. 그것은 마치 노동자에게 그가 자신의 생활수단을 구입하는 데 사용한 시간이 손실시간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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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 위에서는 운수업이 유통비의 원인으로 나타나지만 이런 특수한 현상형태가 문제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산물의 양은 운송에 의해 늘어나지 않는다. 또한 운송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생산물의 자연적 성질 변화도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의도된 유용효과가 아니라 불가피한 해악일 뿐이다. 그러나 물건의 사용가치는 단지 그것을 소비함으로써만 실현되고
그 소비는 이들 물건의 장소 변경 (즉 운송업의 추가 생산과정)이 필요할 수 있다.
따라서 운수업에 투하된 생산자본은 일부는 운송수단에 의한 가치의 이전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일부는 운송노동을 통한 가치의 부가를 통해서 운송되는 생산물에 가치를 부가한다. 모든 자본주의적 생산에서와 마찬가지로 운송노동에 의한 이런 가치부가는 임금의 보전과 잉여가치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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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상품생산 법칙에 따르면 노동생산성은 노동에 의해 창출된 가치에 반비례한다. 이 법칙은 다른 모든 산업에서와 같이 운송업에도 해당된다.
상품을 일정 거리만큼 운송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 (죽은 노동과 산 노동 모두)이 적으면 적을수록 노동생산성은 더 높아지고 이는 반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른 조건이 불변이라면 운송이 상품에 부가하는 가치의 절대적인 크기는 운수업의 생산력에 반비례하고 운송되는 거리에 정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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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운수교통기관의 발달에 따라, 그리고 또한 운송의 집중 (규모의 확대)에 따라 개별 상품의 운송비를 감소시킨다.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은 첫째 모든 생산물의 대부분을 상품으로 전화시킴으로써, 그리고 둘째 근거리 시장을 원격지 시장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적 노동 (산 노동과 대상화된 노동 모두) 가운데 상품운송에 지출되는 부분을 증가시킨다.
유통, 즉 상품이 공간적으로 실제 이동하는 것은 상품의 운송으로 귀착된다.
운수업은 한편으로는 독자적인 생산부분을 형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유통과정 내부의 (그리고 유통과정을 위한) 생산과정에 연속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 의해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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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본의 총유통기간이 그 자본의 순 유통기간과 생산기간의 합과 같다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자본가치가 일정한 형태로 선대된 순간부터 같은 형태의 기능하는 자본가치로 되돌아올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은 항상 선대된 가치의 증식으로 정해져 있다.
이때 선대되는 가치가 독립적인 형태 (즉 화폐형태)를 취하든가 아니면 상품 - 이 경우 상품의 가치형태는 선대된 상품의 가격을 통해서 단지 관념적으로만 독립성을 지닌다 - 의 형태를 취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두 경우 모두, 자본가치는 그 순환과정 동안 다양한 존재형태를 거치며, 그것의 정체성은 자본가의 장부 (혹은 계산화폐의 형태)를 통해서 확인된다.
G…G’의 형태를 취하든 P…P의 형태를 취하든 양자는 모두, 선대된 가치가 자본가치로 기능하여 자신을 증식한다는 점과, 이 가치는 그 과정이 완료된 후 원래 출발했던 형태로 되돌아간다는 점을 함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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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순환이, 각기 분리된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주기적인 과정으로 규정될 때 그것을 자본의 회전이라고 부른다. 이 회전의 기간은 자본의 생산기간과 유통기간의 합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합계가 자본의 회전기간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총자본가치의 한 순환주기와 다음 순환주기 사이의 간격을 나타낸다. 그것은 자본의 생활과정이 갖는 주기적 성격을 나타내며 또한 동일한 자본가치의 증식과정 (혹은 생산과정)이 갱신, 반복되는 시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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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에게 자본의 회전기간은 자신의 자본을 증식시켜 원래 형태로 회수하기 위해서 그가 자신의 자본을 선대해야 하는 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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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수단의 수명이 길면 길수록, 그리고 마모가 느리면 느릴수록 이 사용형태 속에는 불변자본의 가치가 더 오랫동안 고정되어 머물게 된다.
그러나 노동수단의 내구성이 어느 정도이든 그것이 가치를 양도하는 비율은 항상 그것이 기능하는 전체 기간에 반비례한다.
만약 똑같은 가치를 가진 두 기계 중 하나는 5년 만에 마모되고 다른 하나는 10년 만에 마모된다면 같은 기간 동안 전자가 양도하는 가치의 크기는 후자에 비해 두 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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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하는 전 기간에 걸쳐 노동수단의 가치 가운데 일부는 늘 그것의 도움을 받아 생산되는 상품과는 별개로 노동수단에 고정되어 있다.
불변자본 가운데 이런 특성을 지닌 부분이 취하는 형태가 고정자본이다.
반면 생산자본에 선대된 자본 가운데 소재적으로 다른 부분이 취하는 형태는 유동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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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 가운데 소재로 생산물에 들어가는 부분 (즉 원료 등과 같은 부분)은 그것을 통해 부분적으로 나중에 향락수단으로 개인적 소비에 쓰일 수 있는 형태를 취한다.
순수한 의미의 노동수단 (즉 고정자본의 소재적 담당자)은 생산적으로만 소비되며 개인적 소비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물 (즉 그것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사용가치)에는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완전히 마모될 때까지는 생산물과는 별개로 자신의 독자적인 형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외적인 것은 운송기관이다.
운송기관이 생산적 기능을 수행하는 동안 (즉 생산영역 내부에 머무는 동안) 만들어내는 유용 효과 (즉 장소의 변경)는 개인적 소비 (예를 들어 여행자의 소비)로도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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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조건이 같을 경우 노동수단이 고정자본으로 기능하는 정도는 노동수단의 내구기간에 따라 증대한다. 즉 노동수단에 고정된 자본가치와 이 가치량 중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노동과정에서 노동수단에서 생산물로 이전되는 부분 간의 차이는 이 내구기간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가치의 이전이 천천히 이루어질수록 - 가치는 동일한 노동과정이 매번 반복될 때마다 노동수단에서 생산물로 이전되기 때문에 - 고정된 자본은 더욱 커지고 생산과정에서 이용되는 자본과 거기에서 소비되는 자본 사이의 차이는 더욱 커진다.
이 사이가 사라져버리면 노동수단은 그 일생을 끝마치고 사용가치와 함께 그 가치도 사라져버린다.
즉 그것은 더 이상 가치의 담지자가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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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 그것이 어떤 사회적 조건에서 이루어지든 -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 이들 둘은 모두 자본 (전편에서 규정된 바로 그 생산자본)이 된다.
그런 과정에서 노동과정의 성질에서 비롯된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의 차이는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차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반영된다.
이리하여 노동수단으로 기능하는 어떤 물적 존재는 이제 고정자본이 된다.
만약 그 물적 존재가 자신의 소재적 속성에 따라 노동수단 이외의 기능에도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기능이 달라짐에 따라 고정자본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역축으로 이용되는 가축은 고정자본이다. 반면 비육가축은 나중에 생산물로서 유통영역으로 들어가는 원료이며 따라서 고정자본이 아니라 유동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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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수단이 그 기능을 수행함에 따라 노동수단의 가치 가운데 현물형태로 존재하는 부분은 끊임없이 감소하는 반면 화폐형태로 전화되는 부분은 계속 증가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이 노동수단이 생애를 마치게 되면 그것은 가치는 그 시체에서 분리되어 화폐로 전화한다.
여기에서 생산자본 가운데 이 고정자본만이 갖는 회전의 특성이 나타난다.
이 요소의 가치가 화폐로 전화하는 것은 그 가치의 담지자인 상품이 화폐로 전화하는 것과 같은 보조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이 화폐형태에서 사용형태로 재전화하는 것은 상품이 다른 생산요소로 재전화하는 것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그 자신의 재생산주기 (즉 노동수단이 완전히 소모되어 같은 종류의 다른 노동수단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기간)에 의해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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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생산자본 가운데 노동력에 선대된 가치 부분은 생산물에 완전히 이전되어 (여기에서도 계속해서 잉여가치는 무시한다) 이 생산물을 통해 유통영역에 속하는 두 번의 형태변화과정을 거치고, 언제나 이 끊임없는 갱신을 통해 생산과정에 합체된다. 그러므로 노동력은 가치 창출과 관련해서는 불변자본 가운데 고정자본을 이루지 않는 부분 (유동자본)과 서로 구분되지만 가치의 이런 회전방식에서는 고정자본과는 달리 이 유동자본 부분과 공통된 성격을 지닌다.
생산자본 가운데 이들 구성 부분 - 생산자본의 가치 가운데 노동력에 투하된 부분과 고정자본을 이루지 않는 생산부분에 투하된 부분 - 은 회전에서 그들의 공통된 성격에 의해 유통자본 (혹은 유동자본)으로 고정자본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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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고정자본과 구분하여 유동자본으로 규정되는 것은 노동자의 생활수단이나 노동자의 노동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생산자본의 가치 가운데 노동력에 투하된 부분이 그 회전 형태에 의해 불변자본 가운데 일부 (고정자본과 구분되는 부분)와 함께 이 유동자본의 성격을 부여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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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형태를 구분하는 것은 단지 생산과정에서 기능하는 자본가치 (즉 생산자본) 회전의 차이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이 회전의 차이는 또한 생산자본의 여러 구성 부분이 자신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
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이들 구성 부분이 생산물 가치의 생산에 관여하는 방식의 차이 (혹은 가치증식과정에서 그것들의 독특한 활동방식)에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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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자본의 회전 (그리고 이에 필요한 회전기간)은 유동자본의 여러번의 회전을 포괄한다. 고정자본이 한 번 회전하는 동안에 유동자본은 여러 번 회전한다.
생산자본의 가치구성 부분 가운데 한 부분은, 단지 이 부분을 지니는 생산수단이, 생산물이 완성되어 상품으로 생산과정에서 빠져나올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완전히 사용되지 않을 경우에만 고정자본의 형태로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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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본의 가치 가운데 고정자본에 투하되는 부분은 생산수단 가운데 고정자본을 구성하는 부분이 기능하는 전체 기간에 대해 한 번에 모두 선대된다.
즉 이 가치는 자본가에 의해 한꺼번에 유통에 투하된다.
그러나 이 가치는 고정자본이 상품에 조금씩 부가하는 가치의 실현을 통해서 단지 조금씩 부분적으로만 유통에서 다시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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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자본요소도 고정자본요소와 마찬가지로 생산과정 - 이것이 중단되지 않기 위해서는 - 내에 항상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정된 유동자본요소들은 끊임없이 현물로 (생산수단은 같은 종류의 생산물에 의해, 노동력은 계속 반복적인 구매를 통해서) 갱신되는 반면, 고정자본요소들은 계속 사용되는 동안에는 그 자신이 갱신되거나 그 구매가 갱신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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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산업부문에 투하된 고정자본의 평균수명 기간 동안 발생한 이런 사고나 유지보수 작업의 평균적인 횟수는 경험을 통해서 드러난다.
여기에 들어간 평균지출은 평균수명 기간 전체에 걸쳐 배분되고 그것에 상응하는 각 부분별로 할당되어 생산물 가격에 부가되고 따라서 생산물의 판매를 통해서 보전된다. 이렇게 보전되는 추가자본은 비록 그 투하방식이 불규칙적이라 하더라도 유동자본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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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에 현존하는 화폐 가운데 일부는 항상 축장화폐로 유휴상태에 있고, 나머지 부분이 유통수단 (혹은 직접 유통하는 화폐의 직접적인 준비금)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화폐의 총량에서 축장화폐와 유통수단이 나누어지는 비율은 끊임없이 변동한다. 이제 우리의 경우에는 특정 대자본가의 수중에 축장화폐로 대량 축적되었던 화폐가 고정자본의 구입을 위해 한꺼번에 모두 유통에 투입된다.
그것은 스스로 다시 사회 내에서 유통수단과 축장화폐로 나누어진다.
고정자본의 마모 정도에 따라 그것의 가치는 상각기금이라는 형태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지만 이 상각기금은 다시 유통화폐 가운데 일부를 바로 그 자본가 - 고정자본을 구입하면서 자신의 축장화폐를 유통수단으로 전화시켜 자신에게서 분리했던 - 의 축장화폐로 (시간이야 다소 걸리겠지만) 되돌려준다.
그것은 사회에 존재하는 축장화폐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분할로서 이 축장화폐는 번갈아서 유통수단으로 가능하다가 다시 축장화폐로서 유통화폐량에서 분리되곤 한다. 대공업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신용제도의 발전과 함께 이 화폐는 축장화폐가 아니라 자본으로 기능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화폐소유자의 수중이 아니라 그것을 처분할 수 있는 다른 자본가의 수중에서 자본으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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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자본의 총회전은 그것의 각 구성 부분들의 회전의 평균이다. 단지 기간의 차이만 문제로 삼는다면 물론 그 평균의 산출은 너무나 간단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지 양적인 차이뿐만 아니라 질적인 차이도 존재한다.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유동자본은 생산물에 자신의 가치를 모두 이전한다. 따라서 생산과정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 진행되려면 끊임없이 생산물의 판매를 통해 유동자본이 현물로 보전되어야 한다.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고정자본은 자신의 가치 가운데 일부 (마모분)만 생산물에 이전하며 마모되더라도 생산과정에서 계속해서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그것은 상당기간을 거치고 나서야 현물로 보전되고 유동자본만큼 그리 자주 보전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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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된 생산자본 가운데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정자본이 재생산기간 (따라서 회전기간도)이 수년에 걸친 순환을 포괄한다 할지라도 1년 동안 회전한 자본가치는, 같은 기간 동안 유동자본이 몇 차례 반복적으로 회전하는 덕분에 선대자본의 총가치보다 오히려 더 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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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에 따라 고정자본의 수명고 가치량이 증대되는 것과 같은 비율로 산업과 각 산업에 투자된 산업자본의 수명도 여러 해씩 늘어난다. 고정자본의 발전은 한편으로는 고정자본의 수명을 연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수단 -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증가한다 - 의 끊임없는 변혁을 통해 그 수명을 단축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함께 생산수단의 교체는 물론 도덕적 마모로 인한 그것의 보전 필요성도 그것이 물리적으로 수명을 끝마치기 훨씬 전에 발생한다. 대공업의 핵심 분야에서 이런 수명의 평균주기는 오늘날 10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수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 번의 회전 - 자본은 고정자본 부분에 의해 여기에 묶여 있다 - 으로 이루어진 이런 장기 (수년의 기간) 순환을 통해서 주기적인 공황 - 경기는 불황, 회복, 경기과열, 공황이라는 연속적인 시기를 통과한다 - 의 물적 기초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이 투하되는 시기는 제각기 달라서 이들 주기도 통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공황은 언제나 새로운 대규모 투자의 출발점을 이루고 바로 그런 점에서 또한 - 사회 전체의 시각에서 볼 때 - 다음 순환을 위한 새로운 물적 토대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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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는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을 최초의 선대와 매년 이루어지는 선대로 구별한다.
그는 이 구별을 생산자본 (즉 직접적 생산과정에 합체된 자본)내에서의 구별로 정확하게 묘사한다.
그는 농업에서 사용되는 자본 (다시 말해 차지농업가의 자본)을 현실적으로 유일하게 생산적인 자본으로 간주하기에 단지 차지농업가의 자본에 대해서만 이렇게 구별한다. 또는 여기에서 그는 자본 가운데 일부는 회전기간이 1년이지만 일부는 회전기간이 1년보다 길다는 것도 설명하였다.
중농학파는 점차 논의를 발전시켜 종종 이 구별을 다른 종류의 자본 즉 산업자본 일반에 적용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1년마다 이루어지는 선대와 몇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선대를 구별하는 것이 계속 중요한 문제이기에 애덤 스미스 이후에도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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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의 재화는 그가 그것을 화폐로 받고 판매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아무런 수익 (혹은 이윤)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리고 이 화폐도 또한 다시 재화와 교환될 때까지는 그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의 자본이 끊임없이 한 가지 형태로 그를 빠져나와 다른 형태로 그에게 회귀하고 단지 이런 유통 (혹은 연속적인 교환)을 통해서
만 그의 자본은 그에게 얼마간의 이윤을 가져다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자본은 유동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여기에서 유동자본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유통자본이라고 부르려는 것, 즉 유통과정 (말하자면 교환을 통한 형태변화(소재의 변환과 소유주의 변환))에 속하는 자본형태로서 생산과정에 속하는 자본 형태(즉 생산자본)에 대립하는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이다.
이들 자본형태는 산업자본가가 자신의 자본을 분할한 특수한 종류가 아니라 선대된 똑같은 자본가치가 그 생애과정 동안에 차례로 반복하여 취했다가 내버리는 각기 다른 형태이다.
스미스는 이것을 - 이점은 중농학파에 비해 커다란 퇴보이다 - 자본가치가 생산자본의 형태로 존재하는 동안 자본가치의 유통 (즉 그것이 차례로 여러 형태를 취하면서 진행하는 순환)내부에서 비롯되는 형태상의 구별과 혼동하고 있는데, 이 형태상의 구별은 생산자본의 여러 요소가 가치형성과정에 참여하여 자신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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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계와 마찬가지로 노동력도 어디서건 동일한 노동력이 같은 자본가에 의해 상당 기간 동안 사용된다. 이때 노동력과 기계의 차이는 기계가 한 번에 전부 구입되는 (물론 할부로 구매되는 경우는 그렇지 않지만) 반면 노동자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 아니라, 노동자가 지출하는 노동은 전부 생산물의 가치에 들어가는 반면 기계의 가치는 단지 조금씩 들어갈 뿐이라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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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고정자본으로 되는 까닭은 그것이 노동수단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수단에 투하된 가치의 일부가 - 다른 일부는 생산물의 가치구성 부분으로 유통되는 반면 - 노동수단에 고정된 상태로 머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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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은 노동과정 (즉 가치증식과정, 혹은 생산자본 자신의 기능)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 가운데 어떤 부분은 이렇게 사용되고 어떤 부분은 저렇게 사용된다고 생각하는 개별 자본가들의 주관적인 생각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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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고정자본에 의해 이윤이 획득되는 까닭은 고정자본이 생산과정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고 유동자본에 의해 이윤이 획득되는 까닭은 유동자본이 생산과정을 떠나 유통되기 때문이라는 완전히 잘못된 설명을 함으로써, 스미스는 불변자본 가운데 유동적인 부분과 가변자본이 회전과정에서는 동일한 형태를 취하지만 잉여가치의 형성과 가치증식과정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모든 비밀)을 은폐하고 불분명하게 만들어버린다.
둘 모두를 유동자본이라고 부름으로써 더욱 진전되어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대립이 아니라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대립만이 본질적으로 유일한 구별로서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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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품생산자 (자본주의적 생산자도 포함하여)는 자신의 생산물 (즉 자신의 생산과정의 결과물)을 판매하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이 생산물은 그의 생산자본에서 고정적 부분도 유동적 부분도 이루지 못한다.
오히려 이 생산물은 이제 생산과정에서 빠져나와 상품자본으로 기능해야하는 형태로 존재한다. 비육 가축은 생산과정에서 역축처럼 작업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원료로 사용된다. 따라서 비육 가축은 실물로서 생산물에 들어가며 보조재료(사료)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 가치 전체가 생산물에 들어간다.
이것이 생산자본의 유동적 부분인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지 생산물 - 비육 가축 - 이 원료 (아직 비육되지 않은 가축)와 같은 현물형태를 취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이 같은 형태를 취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연일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스미스는 이 사례를 통해서 생산요소에 포함된 가치를 고정적인 것이거나 유동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생산요소의 물적 형태가 아니라 그것이 생산과정에서 수행하는 기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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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의 전체 가치 또한 고정자본이다. 종자는 토지와 곡물 창고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결코 주인을 바꾸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정확한 의미에서 유통되지 않는다. 농업경영자는 종자의 판매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증식을 통해서 이윤을 얻는다.”
이 점에서 스미스의 구별이 전혀 분별력이 없다는 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스미스의 말대로 주인의 교체가 없다면, 즉 종자가 연간 생산물에서 직접 공제되고 보전된다면 그 종자는 고정자본일 것이다.
반면 만일에 모든 생산물을 판매하여 그 가치의 일부분으로 다른 사람의 종자를
구입했다면 그 종자는 유동자본일 것이다.
전자는 소유주의 교체가 일어나고 후자는 일어나지 않는다.
스미스는 여기에서 또다시 유동자본과 상품자본을 혼동한다.
생산물은 상품자본의 소재적 담지자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생산물 가운데 실제로 유통에 들어가고 생산과정 - 자신이 생산물로 만들어져 나온 - 에 직접 다시 들어가지 않는 부분에만 해당된다.
종자가 생산물에서 직접 공제되든, 혹은 모든 생산물이 판매되고 그 가치의 일부분이 다른 사람의 종자를 구입하는 데 쓰이든, 두 경우 모두에서는 단지 보전이 이루어질 뿐이며 이런 보전을 통해서는 어떤 이윤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자는 종자가 생산물의 나머지 부분과 함께 상품으로 유통에 들어가고 후자는 종자가 단지 장부상으로 선대자본의 한 가치구성부분으로 기록될 뿐이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그것이 생산자본 가운데 유동적인 부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종자는 생산물을 완성하기 위해서 완전히 소비되어야 하고 재생산을 이루기 위해서 생산물로부터 보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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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물품이 노동과정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에 따라서 유동자본이 되기도 하고, 고정자본이 되기도 한다.
(중략)
예를 들어 작업장으로 사용되는 가옥은 생산자본의 고정적 구성 부분이지만 주거용으로 사용되는 가옥은 결코 자본의 한 형태 (주택이라는)가 아니다.
많은 경우 똑같은 노동수단이 생산수단으로 기능할 수도 있고 소비수단으로 기능할 수도 있다.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성격을 물품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간주하는 것은 애덤 스미스의 견해에서 비롯된 오류 가운데 하나이다.
(중략)
즉 스미스는 단지 생산자본 (생산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자본)에만 타당하고 의미를 갖는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을 생산자본과 유통과정에 속하는 자본형태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의 구별과 혼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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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가 사회 전체의 부를 직접적인 소비재원, 고정자본, 유동자본으로 분류
한 것은 그의 중대한 오류에 해당한다.
이에 따르면 부는 부분적으로 끊임없이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지만, 기능하고 있는 사회적 자본에서는 어떤 구성 부분도 이루지 않은 소비기금과 자본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이 분류에 의하면 부 가운데 한 부분은 자본으로 기능하고 다른 한 부분은 비 자본 혹은 소비기금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마치 포유동물이 암컷이든 숫컷이든 둘 가운데 하나이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모든 자본 역시 그것이 고정자본이든 유동자본이든 둘 가운데 하나라야만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적 필연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고정적인 것과 유동적인 것 사이의 대립은 단지 생산자본의 요소에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들 외에 매우 많은 자본 - 상품자본과 화폐자본 - 은 고정적인 것도 유동적인 것도 아닌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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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산물 가운데 판매나 구매를 거치지 않고 개별 자본주의적 생산자가 직접 현물형태로 다시 생산수단으로 사용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는 사회적 생산물의 전량이 시장에서 상품자본으로 유통되기 때문에 생산자본 가운데 고정적인 요소와 유동적인 요소는 물론 소비재원의 모든 요소도 상품자본을 통해 조달되는 것이 분명하다.
실질적으로 이 말의 의미는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이 나중에 다시 생산수단이나 소비수단으로 사용된다 할지라도 처음에는 상품자본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노동력도 이와 마찬가지로 상품자본이 아니면서도 시장에 상품으로 등장한다.
이것 때문에 애덤 스미스는 다시 다음과 같은 혼동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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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물 가운데 생산자가 직접 계속해서 생산수단으로 소비하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다음과 같은 일반 명제가 자본주의적 생산에 적용된다.
즉 모든 생산물은 상품으로 시장에 등장하고 따라서 자본가에게는 그의 자본의 상품형태 (즉 상품자본)로 유통된다.
이것은 이들 생산물이 그 현물형태 (즉 그 사용가치의 속성)에 따라 생산자본 (생산과정)의 한 요소 (즉 생산수단, 다시 말해 생산자본의 고정적 요소나 유동적 요소)로 기능해야 하거나 기능할 수 있는지와는 상관없다.
또한 그것은 이들 생산물이 생산적 소비가 아닌 개인적 소비의 수단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생산물은 상품으로 시장에 투하된다.
따라서 모든 생산수단과 소비수단,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의 모든 요소들은
상품으로의 구매를 통해서 다시 시장에서 조달되어야 한다.
이것은 너무도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생산자본의 유동적 요소뿐만 아니라 고정적 요소 (즉 모든 형태의 노동재료와 노동수단)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여기에서는 이들 외에도 생산자본의 요소 가운데 천연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생산물이 아닌 것도 있다는 사실이 잊혀지고 있다)
기계도 면화처럼 시장에서 구입된다. 그러나 이 점 때문에 모든 고정자본이 원래 유동자본에서 유래한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는 단지 유통자본과 유동자본(즉 비고정자본)을 혼동한 스미스의 개념에서나 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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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관점에서 본다면 상품자본 가운데 노동수단으로만 사용될 수 있는 생산물로 이루어진 부분은 조만간에 - 그것이 어디에도 쓸모가 없어서 판매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 역시 노동수단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 (즉 만일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토대 위에서 상품이기를 중단할 경우에는 그것이 사회적 생산자본 가운데 실질적인 고정적 구성부분 (만들어질 때 이미 그렇게 예상되었듯이)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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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생산과정에서 가장 확실하게 고정되는 것이어서 일단 거기에 한번 투입되고 나면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서 수명을 다하는 그런 물품 가운데에도 생산자본의 유동적 구성 부분을 이루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생산과정에서 기계의 운전을 위해 소비되는 석탄, 조명을 위해 공장 건물 내에서 소비되는 가스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들 물품이 유동자본인 까닭은 그것들이 생산물과 함께 현물상태로 생산과정을 떠나 상품으로 유통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가치가 자신들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치 속에 완전히 들어가고 따라서 상품의 판매를 통해 전부 보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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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는 노동자의 생활수단을 고정자본과 대립하는 유동자본으로 규정하는데 그 까닭은
첫째, 그가 고정자본과 대립하는 유동자본을 유통부문에 속하는 자본의 형태 (즉 유통자본)와 혼동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혼동은 스미스 이후에도 계속 무비판적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그는 상품자본을 생산자본의 유동적 구성 부분으로 혼동하였다.
그리고 그럴 경우 사회적 생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취할 때는 노동자의 생활수단도 비노동자 (생산수단)의 생활수단인 재료나 노동수단과 함께 모두 상품자본에서 공급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그러나 스미스에게는 중농학파의 견해도 - 물론 중농학파의 견해가 스미스 자신의 논의 가운데 심오한 (참으로 과학적인) 부분과 모순되기는 하지만 - 일부 섞여 있다.
일반적으로 선대된 자본은 생산자본으로 전화한다.
즉 그것은 그 자체 과거 노동의 산물이기도 한 생산요소 (여기에는 노동력도 포함한다)의 형태를 취한다. 선대자본은 단지 이 형태로만 생산과정에서 기능할 수 있다.
이제 만일 자본의 가변 부분이 전화된 노동력을 노동자의 생활수단으로 대체해버린다면 이 생활수단은 가치형성에서 생산자본의 다른 요소 (즉 원료와 역축의 생활수단)와 전혀 구별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 점에 기초하여 스미스는 위에서 인용한 문장에서 중농학파의 방식을 따라 노동자의 생활수단을 다른 요소들과 같은 범주에 포함시킨 것이다.
생활수단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식할 수 없다.
즉 자신의 가치에 잉여 가치를 부과할 수 없다.
생산자본의 다른 요소들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생활수단의 가치도 생산물의 가치 속에 재현될 수 있을 뿐이다.
생활수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가치를 생산물에 부과할 수 없다.
원료, 반제품 등과 마찬가지로 생활수단은 노동수단으로 이루어진 고정자본과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 구별된다.
즉 생활수단은 (적어도 그것을 지불하는 자본가에게는) 생산물을 만드는 데 관여하면서 모두 소비되고 따라서 생산물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모두 보전해야 하는 반면 고정자본은 이런 소비와 보전이 점차 조금씩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제 생산자본 가운데 노동력 (혹은 노동자의 생활수단)에 선대된 부분은 생산자본의 다른 소재적 요소들과 소재적으로만 구별될 뿐이며 노동과정이나 가치증식과정과 관련해서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물을 만드는 객체의 한 부분과 함께 유동자본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으로 고정자본의 범주에 들어가는 다른 부분들과 구별될 뿐이다.
자본 가운데 임금에 투하된 부분이 생산자본의 유동적인 부분에 속하고, 이 유동성을 (고정적인 부분과 대립된 형태로) 원료 등과 같은 생산수단의 일부와 공유한다는 사실은 이 가변자본 부분이 불변자본 부분과 대립하여 가치증식과정에서 수행하는 역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단지 선대된 자본가치 가운데 이 부분을 유통을 매개로 생산물의 가치로 부터 어떻게 보전되고, 갱신되고 따라서 재생산되어야 하는지 그 방법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노동력의 반복적 구매는 유통과정에 속한다.
그러나 노동력에 투하된 가치는 생산과정 내부에서 비로소 (노동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일정한 불변적 크기에서 가변적인 크기로 전화하며 바로 이런 전화를 통해서 비로소 선대된 가치는 자본가치 (즉 자본, 다시 말해 자신을 증식하는 가치)로 전화한다.
그러나 스미스처럼 노동력에 투하된 가치 대신에 노동자의 생활수단에 투하된 가치를 생산자본의 유동적인 구성 부분으로 규정하게 되면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구별 (즉 자본주의적 생산 일반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리하여 물적 생산요소에 투하된 자본 부분이 회전의 관점에서 생산자본의 유동적인 부분에 속한다는 개념에 의해 매몰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매몰작업은 결국 생산자본의 요소로 노동자의 노동력 대신 노동자의 생활수단을 대체해버리는 것으로 완결된다.
노동력의 가치가 화폐로 선대되는가 아니면 직접 생활수단으로 선대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의 토대 위에서 후자는 단지 예외적인 형태일 뿐이다.
이처럼 스미스는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가치를 유동자본의 개념으로 완전히 고정시켜버림으로써 - 중농학파의 전제가 결여된 중농학파적 개념 - 그의 후계자들이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 부분을 가변자본으로 인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그가 다른 부분에서 전개한 심오하고 올바른 논의들은 널리 보급되지 못했지만 이 커다란 오류는 널리 보급되었다. 실제로 후대의 저자들은 스미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동자본 - 고정자본과 대립되는 - 을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 부분으로 정의를 내리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에게 필요한 생활수단에 투하하는 것을 유동자본의 본질적인 개념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학설이 결합되었다. 즉 이 학설에 의하면 필요한 생활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노동기금은 크기가 일정하고 한편으로는 사회적 생산물 가운데 노동자들에게 배분될 몫의 규모를 결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력의 매입에 전액이 지출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리카도에게서 고정자본은 노동수단과 같고 유동자본은 노동에 투하된 자본과 같다.
노동을 유지시키는 자본이란 애덤 스미스를 계승한 잘못된 표현이다.
여기에서는 한편으로는 유동자본이 가변자본 (즉 생산자본 가운데 노동에 투하된 부분)과 혼동되어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 자본의 구별이 가치증식과정에서 도출되는 것 -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 이 아니라 유통과정에서 도출되기 때문에 (스미스에게서 비롯된 낡은 혼동) 두 가지 잘못된 개념이 만들어진다.
첫째, 고정자본의 수명 차이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성비율 차이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후자는 잉여가치 생산의 차이를 결정하는 반면 전자의 차이는 가치증식과정에서 볼 때는 단지 어떤 주어진 가치가 생산수단에서 생산물로 이전되는 방식하고만 관계가 있을 뿐이고, 유통과정의 관점에서 볼 때는 투하자본의 갱신 주기 - 다시 말해서 자본이 선대되는 기간 - 와 관계가 있을 뿐이다.
만약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 내재된 메커니즘을 깊이 통찰하지 않고 주어진 현상에만 의존하는 시각에서 보면 이들 둘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사회적 잉여가치를 여러 사업부문에 투하된 자본들 사이에 배분할 때는 각 자본의 선대기간 차이 (예를 들어 고정자본의 경우 수명의 차이)와 자본의 유기성 구성의 차이(즉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유통 차이)가 일반이윤율의 균등화와 가치의 생산가격으로 전화에 똑같이 작용한다.
둘째, 유통관점의 과정에서 보면 한편에는 노동수단 (즉 고정자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노동재료와 임금 (즉 유동자본)이 있다.
반면 노동과정 내지 가치증식과정의 관점에서 보면 한편에는 생산수단(노동수단과 노동재료)(즉 불변자본)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노동력 (즉 가변자본)이 있다.
자본적 유기적 구성에서는 동일한 가치크기의 불변자본이 많은 노동수단과 적은 노동재료로 구성되어 있든 혹은 많은 노동재료와 적은 노동수단으로 이루어져 있든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오로지 생산수단에 투하된 자본과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의 비율에 좌우된다.
역으로 유통과정의 관점 (즉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을 구별하는 관점)에서도 주어진 가치크기를 갖는 유동자본이 어떤 비율에 따라 노동재료와 임금으로 나누어지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전자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재료는 노동수단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며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가치와 대립된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 부분은 노동재료에 투하된 자본 부분과 동일한 범주에 속하여 노동수단에 투하된 자본 부분과 대립된다.
이 때문에 리카도에게는 자본 가운데 노동재료 (원료와 보조재료)에 투하된 가치 부분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은 우선 고정자본으로 분류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유통방식에서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 부분과 완전히 일치되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은 유동자본으로 분류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는 스미스에게서 물려받아 암묵리에 널리 통용되어버린 개념 (즉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대립을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대립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개념)을 스스로 폐기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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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변자본의 특징은 일정하게 주어진 (즉 그 자체 불변인) 자본 부분 (즉 주어진
가치액 (물론 여기에서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와 같은지 어떤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노동력의 가치와 동일하다고 가정된 가치액))이 자신을 증식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힘 - 자본가로부터 지불된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잉여가치 (즉 예전에 존재하지 않던 가치로서 다른 등가물을 통해 매입된 것도 아닌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력 - 과 교환된다는 점에 있다.
임금에 투하된 자본 부분의 이런 특별한 속성은 이 자본 부분을 모든 점에서 불변자본과는 완전히 다른 가변자본으로 구별 짓는 것이지만 이 속성도 임금에 투하된 자본부분이 단지 유통과정의 입장에서만 고찰되어 노동수단에 투하된 고정자본과 대비되는 유동자본이 되는 순간 금방 사라져버린다.
이것은 곧 다음 사실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즉 그리 될 경우 이 자본 부분은 불변 자본의 한 구성 부분 (노동 재료에 투하된 부분)과 같은 범주 (유동자본이라는 범주)에 포함되고 불변자본의 다른 구성 부분 (노동수단에 투하된 부분)과는 대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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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임금에 투하된 자본 부분이 원료에 투하된 자본 부분과 전혀 구별되지 않고 단지 형식적으로 - 생산물을 통해서 조금씩 유통되는지 모두 함께 유통되는지에 따라 - 불변자본하고만 구별될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 (따라서 자본주의적 착취)의 실제 운동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는 단번에 매몰되어버린다.
그리하여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선대된 가치의 재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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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변자본의 관점에서 (즉 일정 가치액의 자본으로의 전화에서) 본질적인 것은 자본가가 일정하게 주어진 (그런 의미에서 불변인) 가치량을 가치를 창조하는 힘과 교환한다는 점이다.
즉 어떤 가치량을 가치생산 (가치의 가기증식)과 교환한다는 점이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화폐로 지불하든 생활수단으로 지불하든 그것은 이 본질적인 개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자본가가 선대하는 가치의 존재양식 (즉 전자의 경우 그것은 화폐형태로 존재하고 노동자는 이를 가지고 시장에서 스스로 생활수단을 구매해야 하고 후자의 경우 그것은 생활수단 형태로 존재하고 노동자는 그것을 직접 소비한다)에 영향을 미칠 뿐이다.
사실 자본주의가 일반적으로 유통과정을 통해 매개되는 생산과정 (즉 화폐경제)을 전제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발전된 자본주의적 생산은 노동자가 화폐로 지불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창출 (따라서 선대된 가치액의 자본화)은 임금 (즉 노동력의 구입에 투하된 자본)의 화폐형태나 현물형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치와 가치를 창출하는 힘의 교환 (즉 불변적 크기를 가변적 크기로 전환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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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금속이 어떤 때는 고정자본 범주에 들어가고 어떤 때는 유동자본 범주에 들어가는 까닭은 소재적, 물리적 성질 때문도 아니고 그것이 마모되는 속도 때문도 아니다. 이 구별은 오히려 생산과정에서 금속이 수행하는 역할이 어떤 때는 노동대상이고 어떤 때는 노동수단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노동대상은 유동자본, 노동수단은 고정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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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자본과 생산자본의 구별을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의 구별과 혼동하는 경제학자들에게는 같은 소재 (같은 기계)가 생산물로서는 유동자본이고 노동수단으로는 고정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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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 투하된 자본의 실제 소재는 노동 그 자체이다. 이 노동은 가치를 창출하고 움직이는 노동력으로서 자본가가 죽은 물적 노동과 교환하여 자신의 자본에 합체시키고 이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수중에 있던 가치를 스스로 증시가는 가치로 전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본가는 이러한 자기증식력을 판매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가의 노동수단과 마찬가지로 항상 그의 생산자본의 한 구성 부분을 이루며 예를 들어 완성된 생산물처럼 그가 판매하는 상품자본이 아니다.
노동수단은 생산과정 내부에서 생산자본의 구성 부분으로, 노동재료와 보조재료가 노동력과 함께 유동자본이 아닌 것처럼 노동력에 대해서 고정자본으로 대립하지도 않는다. 노동과정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력은 인적 요소로서 물적요소인 이들 양자와 대립한다.
혹은 여기에서 만일 유통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소재적인 차이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면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화된 노동에 지나지 않는 가치 (그리고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노동에 지나지 않는 활동 중인 노동력)의 성질에 따라 노동력은 그 기능이 계속되는 동안 끊임없이 가치와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또한 노동력의 입장에서는 가치창출로 나타나는 것이 그 생산물의 입장에서는 정지
한 형태 (창출된 가치)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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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력이 일단 그 기능을 수행하면 자본은 이제 더는 한편으로는 노동력,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으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가치는 이제 (잉여가치와 함께) 생산물에 부가된 가치가 된다.
과정을 반복하기 위해서 생산물은 판매되어 그 대금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노동력을 구매하여 생산자본에 합체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것은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 부분에 - 노동재료 등에 투하된 자본 부분에도 그러했듯이 - 유동자본의 성격을 (노동수단에 고정된 채로 남아 있는 자본에 대립하여) 부여한다.
그러나 만일 이 유동자본의 이 부차적인 개념이
(이것은 불변자본 가운데 일부 (원료와 보조재료)도 함께 공유하는 개념이기도 하며, 말하자면 유동자본에 투하된 가치는, 고정자본처럼 그 소비를 통해 만들어진 생산물에 천천히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모두 이전되고 따라서 그 보전도 생산물의 판매를 통해 한꺼번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개념을 가리킨다)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 부분의 본질적인 개념이 된다면, 임금에 투하된 자본 부분도 소재적으로 활동 중인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자가 그의 임금으로 구매하는 소재적 요소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즉 사회적 상품자본 가운데 노동자의 소비로 들어가는 부분(생활수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 되면 고정자본은 보다 느리게 마모되어, 보다 느리게 보전되는 노동수단으로 이루어지고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은 보다 빠르게 보전되는 생활수단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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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같은 크기의 자본에서 사업부문에 따라 달라지는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비율이 가치법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특히 이런 조건의 결과 발생하는 임금의 상승 혹은 하락이 가격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것으로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이처럼 국한된 연구 범위 내에서도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을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혼동하기 때문에 대단히 심각한 오류를 범하며 사실상 완전히 잘못된 토대 위에서 연구를 시작한다.
즉 자본 가운데 노동력에 투하된 가치 부분이 유동자본의 범주에 속하는 한 유동자본 그 자체의 개념이 잘못 전개된다. 특히 그 오류는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 부분을 이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 있다.
노동에 투하된 자본 부분에 대해서 가변 자본이라는 개념과 유동자본 (고정자본에 대립하는) 이라는 개념 사이에서 혼동을 일으킨다.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을 유동적이라고 보는 것은 부차적인 개념이며, 이 개념은 명백히 생산과정에서 이것이 갖는 독특한 성격을 소멸시켜버린다. 왜냐하면 이 개념에서는 우선 노동에 투하된 자본이 원료 등에 투하된 자본과 같은 범주에
(이 범주에서는 불변자본의 한 부분이 가변자본과 동일한 것으로 분류됨으로써 불변자본과 구분되는 가변자본의 독특한 성질이 사라져버린다)
포함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 개념에서는 또한 노동에 투하된 자본 부분과 노동수단에 투하된 자본 부분이 대립하지만 이런 대립은 이들 두 자본 부분이 가치생산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양자가 자신들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이 다르다는 점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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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화폐로 지불되는 임금의 경우에는 생산수단의 경우 - 가치뿐만 아니라 소재도 함께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 와는 달리 화폐 그 자체가 생산과정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으로 구매하는 생활수단이 원료 등과 함께 유동자본의 소재적인 형태에 따라 곧바로 같은 범주로 분류되어 노동수단과 대립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즉 이 물품 (생산수단)의 가치는 노동과정에서 생산물에 이전되고 다른 물품 (소비수단)의 가치도 그것을 소비하는 노동력으로 재현되어, 바로 이 노동력의 활동을 통해 똑같이 생산물에 반복적으로 이전되는 것이다.
이들 모든 경우에서 똑같이 중요한 관심사는 생산과정에서 선대된 가치가 생산물을 통해서 단지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
(중략)
여기에서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의 형태로 생산에 선대된 자본가치가 생산물의 가치 속에 똑같은 크기로 재현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은 완벽하게 신비화되고 생산물 속에 존재하는 잉여가치의 기원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또한 이것은 부르주아 경제학 특유의 물신숭배 - 사회적 생산과정을 통해 각 물품들에 각인된 사회적 경제적 성격을 이들 물품의 소재적 성질에서 비롯된 자연적 성격으로 전화시킨 것 - 를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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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 투하된 자본’이라는 개념이 생활수단 그 자체가 항상 가지고 있는 속성으로 간주된다면 “노동을 유지한다”는 개념 또한 이 유동자본의 속성이 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생활수단이 자본이 아니라면 그것은 노동력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생활수단이 자본이 아니라면 그것은 노동력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생활수단이 자본이 되는 순간 그것은 바로 타인의 노동을 통해 자본을 유지하는 속성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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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가 일으킨 혼란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1)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을 생산자본과 상품자본의 구별과 혼동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독같은 기계가 상품으로 시장에 있을 때는 유동자본으로 간주되고 생산과정에 합체되었을 때에는 고정자본으로 간주되었다. 이때 왜 한 종류의 자본이 다른 종류의 자본에 비해 더 고정적이거나 더 유동적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2)모든 유동자본을 임금에 투하된 (혹은 투화될) 자본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 등이 바로 그러했다.
3)이미 바턴, 리카도 등에게서 나타난 혼동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별을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과 혼동)이 마침내 완전히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로 고착되었다. 예를 들어 램지에게는 원료든 노동수단이든 모든 생산수단은 고정자본이고 단지 임금에 투하된 자본만이 유동자본이었다. 그러나 혼동이 이런 형태로 고착화함으로써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실제 구별은 이제 불가능해져버리고 말았다.
4)매클라우드, 패터슨 등과 같이 은행원과 같은 극단적으로 편협한 관점으로 모든 것을 바로보는 최근 영국 (특히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들은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을 요구불예금과 통지예금의 구별로 바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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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기간이 상당히 긴 대규모 상업이 비로소 완전히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가 되는 것은 자본의 집적이 이미 상당히 이루어지고, 또 한편 신용제도의 발전 덕분에 자본가가 자신의 자본 대신에 다른 사람의 자본을 편리하게 선대할 수 있게 (따라서 역으로 쉽게 위험해질 수도 있게) 되었을 때이다.
그러나 물론 생산에 선대된 자본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소유인지 아닌지는 회전속도나 회전기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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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노동기간의 단축은 대부분 단축된 기간에 선대되는 자본이 증대되는 것과 결부되어 있고, 그 결과 선대기간의 단축에 따라 선대되는 자본의 양도 커지지만 이때 다음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
즉 이때 중요한 것은 현재 존재하는 사회적 자본의 양과 상관없이 생산수단과 생활수단 (혹은 그것들을 처분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로 분산되어 있는지 (즉 개별 자본가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는지, 다시 말해 자본의 집중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신용이 한 사람의 수중으로 자본이 집중되도록 도와주고, 그것을 촉진하고 심화하면 할수록, 그것은 노동기간 (따라서 회전기간)의 단축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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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의 지연은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에 각기 다르게 작용한다.
자본의 회수가 빠르든 느리든 상관없이 고정자본은 계속해서 기능한다.
반면에 만일 유동자본이 판매되지 않은 채 (혹은 미완성 상태라서 아직 판매가 불가능한) 생산물의 형태로 묶여 있고 그것을 현물로 갱신하기 위한 추가자본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동자본은 회수가 지연될 경우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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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분량의 잠재적 생산자본 (즉 생산에 사용하기 위한 생산수단)이 필요한데 이 생산자본은 상당한 양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조금씩 순차적으로 생산과정에 투입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때 언급했던 것처럼 주어진 어떤 사업채에서 갖추어야 할 이런 생산용 재고의 크기는 그것이 갱신되기 쉬운지 어려운지, 구입시장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운송 및 교통수단은 어느정도 발전해 있는지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모든 요인들은 생산용 재고의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 자본의 최소량에 영향을 미치고 따라서 자본이 선대되어야 하는 기간의 길이와 한 번에 선대되어야 하는 자본량의 크기에 영향을 미친다.
회전에도 영향을 미치는 이 자본량의 크기는 유동자본이 생산용 재고 (잠재적인 생산 자본)의 형태로 묶여 있는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또 다른 한편 이 묶여 있는 기간 그 자체는, 그것이 보전되는 기간이나 시장 상황 등에 영향을 받을 경우, 다시 유통기간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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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들은 사업에 필요한 자본 가운데 일부가 화폐자본, 생산자본, 상품자본의 세 단계를 차례로 경과할 뿐 아니라 동일한 자본의 각기 다른 부분들이 - 비록 그 상대적 크기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 계속해서 나란히 이들 세 가지 형태를 취한다는
점도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경제학자들이 잘 잊는 것은 계속해서 화폐자본으로 존재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 부분이야말로 부르주아 경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며 현실에서도 또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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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간 중에 이처럼 생산을 위해 풀린 유동자본과 선대된 총유동자본 사이의 비율은 유통기간과 회전기간 사이의 비율과 같다.
이미 서술한 것처럼 이것은 단지 노동과정이 매주 동일한 규모로 수행되는 생산분야 - 예를 들어 농업처럼 다양한 농업기간 동안에 각기 다른 자본량이 투하되지 않는 생산분야 - 에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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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간 동안에도 생산이 연속되기 위해 필요한 추가자본은 한 해 동안 유통기간의 합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회전기간에 대한 유통기간의 비율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물론 이때 모든 회전은 똑같은 조건하에서 이루어진다고 전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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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기간이 노동시간보다 더 긴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다루는 상황들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물론 그것 때문에 총회전기간이 연장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과정을 위한 추가자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추가자본은 단지 유통기간에 의해 발생하는 노동과정의 공백을 메우는 데 쓰일 뿐이다. 즉 그것은 유통과정으로부터 발생하는 생산의 중단을 막기 위한 것이다.
(중략)
작업이 단지 간헐적으로 주문에 따라 수행되는 사업이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노동기간과 노동기간 사이에 휴지기가 있을 수 있으며 그런 경우에는 추가자본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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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이렇게 자본이 최초의 생산자본과 추가자본으로 나누어짐으로써 노동기간은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선대자본 가운데 일부가 동일한 크기로 계속 생산자본으
로 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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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회전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분명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못하는 경제학자들은 항상 이 중요한 사실, 즉 생산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려면 산업자본 가운데 일부만 실제로 생산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산업자본 가운데 일부는 생산기간에 있어야 하지만 다른 일부는 항상 유통기간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자본 가운데 일부가 생산자본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일부가 상품자본이나 화폐자본의 형태로 생산과정에서 떨어져 나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하면 화폐자본의 중요성과 역할이 완전히 무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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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자본이 생산과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은 자본 가운데 일부만이 생산에 이용될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생산이 중단 없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자본 가운데 일부는 생산기간에 다른 일부는 유통기간에 있는 방식으로 자본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산자본이 계속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양이 회전기간에 대한 유통기간의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는 바로 그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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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된 총자본의 노동기간 횟수는 선대된 두 자본 부분의 연간 생산물 가치의 합계를 선대된 총자본으로 나눈 것과 같다.
총자본의 회전수는 회전된 두 자본액의 합계를 선대된 두 자본의 합계로 나눈 것과 같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두 자본 부분을 마치 서로 완전히 독립적인 회전운동을 수행하는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간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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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간에 사용된 유동자본은 그 회전을 완료할 (즉 먼저 상품자본으로 전화하였다가 다시 화폐자본으로 전화한 다음 거기에서 다시 생산자본으로 전화할) 때까지는 새로운 노동기간에 사용될 수 없다. 따라서 첫 번째 노동기간을 위해 선대된 유동자본의 유통기간 때문에 발생한 공백을 메우기에 충분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동자본의 노동기간 길이는 노동과정의 규모와 선대자본의
분할 (추가되는 새로운 자본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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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본 가운데 일부가 유통과정에 있는 동안 다른 일부가 계속해서 노동기간에 있기 위해서는 자본이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져야 하는데 이 부분들이 각기 독립된 개별 자본처럼 서로 교대하는 경우에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1)노동기간이 유통기간과 똑같고 따라서 회전기간이 똑같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경우
(2)유통기간이 노동기간보다 길지만 노동기간의 단순 배수라서 한 번의 유통기간이 n배의 노동기간과 같은 경우. 단 이때 n은 정수여야 한다.
이들 두 경우에는 차례로 선대된 자본 가운데 어떤 부분도 풀려나지 않는다.
[2]이해 반해
(1)유통기간이 노동기간의 단순 배수가 아니면서 노동기간보다 더 긴 경우와
(2)노동기간이 유통기간보다 더 긴 경우에는
총유동자본 가운데 일부가 두 번째 회전 이후부터 매 노동기간이 끝날 때마다 계속 주기적으로 풀려난다.
그리고 이렇게 풀려난 자본은, 노동기간이 유통기간보다 더 긴 경우에는 총자본 중 유통기간을 위해 선대된 부분과 같고, 유통기간이 노동기간보다 더 긴 경우에는 노동기간(혹은 노동기간의 배수)을 넘는 유통기간의 초과분을 보충해야만 하는 자본 부분과 같다.
[3]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사회적 총자본에서는 그 유동적인 부분에 관한 한 자본 가운데 일부가 따로 풀려나는 경우가 통상적인 일이며 생산과정에서 연속적으로 기능하는 자본 부분들이 단지 교대만 하는 경우는 예외적일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노동기간과 유통기간이 똑같거나 유통기간이 노동기간의 단순 배수와 똑같다는 것 (즉 회전기간의 두 구성 부분이 규칙적인 비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과 아무 관련도 없고 따라서 그런 경우는 거의 예외적으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년에 여러 번 회전하는 사회적 유동자본 가운데 상당히 큰 부분은 연중 회전순환이 이루어지는 동안 주기적으로 따로 풀려난 자본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른 조건이 불변일 경우 이 풀려난 자본의 크기는 노동과정의 규모 (또는 생산의 규모,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적 생산일반의 발전)와 함께 증대된다는 사실이다.
[2]의 (2)는 총선대자본이 증대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2]의 (1)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에 따라 유통기간의 길이가 늘어나기 (따라서 노동기간과 유통기간 사이에
아무런 규칙적인 비례관계 없이 노동기간이 길어져서 회전기간도 길어지기) 때문에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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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회수된 화폐 가운데 얼마만큼이 현재의 노동기간에서 여분의 것으로 자유롭게 풀려날 것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정에 따라 생산은 현재의 규모대로 중단 없이 지속될 것이고 따라서 화폐가 ‘풀려나든’ 않든 화폐의 존재해야 하고 회수되어야 한다.
만일 생산이 중단된다면 자본이 풀려나는 일도 마찬가지로 중단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화폐가 자유롭게 풀려나는 일 (즉 화폐 형태의 잠재적인 자본이 형성되는 일)은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에서 말한 특별한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발생한다. 더구나 그것은 본문에서 가정한 규모보다 더 커다란 규모로 발생한다. 유통자본 1과 관련하여 산업자본가는 매번 회전이 끝날 때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와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
자본가는 그것을 모두 그의 수중에 가지고 있지만 단지 조금씩만 그것을 생산자본으로 전화시킬 수 있다.
본문의 요점은 한편으로는 산업자본 가운데 상당히 큰 부분이 항상 화폐형태로 존재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보다 더욱 큰 부분이 일시적으로 화폐형태를 띠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추가로 보충한 부분은 이 요점을 실례로 설명한 부분을 조금 보강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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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물 가격이 하락하면 자본 가운데 일부가 상실되고 따라서 그 부분만큼이 화폐자본의 새로운 선대를 통해 보충되어야만 한다.
판매자의 이런 손실은 구매자에게 이익으로 환수될 것이다.
이런 회수가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생산물의 시장가격이 단지 우연적인 변동에 의해 떨어졌을 뿐, 나중에 다시 정상적인 수준으로 회복될 경우이다.
또한 그것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가격변동이 이전의 생산물에도 영향을 미치는 가치변동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 생산물이 생산요소로 다시 다른 생산 부문에 투입되어 거기에서 그만큼의 자본을 분리시킬 경우이다.
어떤 경우든 자본가가 사실한 자본 (또한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그가 화폐시장에 압막을 가하는 자본)은 그의 거래 상대에게 새로운 추정자본으로 공급될 수 있다.
그럴 경우 그것은 단순한 이전에 불과하다.
반대로 만약 생산물가격이 상승하면 선대되지 않았던 자본 부분이 유통으로부터 취득된다. 그것은 생산과정에서 선대된 자본의 유기적인 일부가 아니고 따라서 만일 생산이 확장되지 않으면 자유롭게 풀려난 화폐 자본이 된다.
여기에서는 생산물이 상품자본으로 시장에 등장하기 전에 생산물요소의 가격이 이미 주어졌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현실의 가치변동이 가격의 상승을 가져오는 것은 단지 그것이 소급해서 작용한 경우 - 예를 들어 원료 가격이 나중에 오르는 경우 - 에만 국한된다.
그렇게 되면 자본가는 상품자본으로 유통하는 자신의 생산물과 수중에 있는 자신의 생산용 재고로부터 모두 이득을 얻을 것이다.
이 이득은 생산요소 가격의 상승 때문에 이제 그가 사업을 계속 경영하기 위해서 추가로 필요해진 자본 부분을 공급해줄 것이다.
때로는 가격상승이 단지 일시적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자본가의 생산물이 다른 사업부문의 생산요소를 구성한다면, 추가자본으로 필요한 부분은 다른 자본가에게서 풀려난 자본으로 나타날 것이다.
한쪽이 상실한 것을 다른 한쪽이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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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정에서 지출된 가변적 유동자본은, 자신의 가치가 재생산된 생산물이 판매되어, 노동력의 지불에 다시 투하되어야만 유통과정에서 다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생산과정에 투하된 불변적 유동자본 (생산재료, 이 생산재료의 가치는 생산물가치의 한 부분으로 다시 나타난다.)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부분 (유동자본 가운데 가변 부분과 불변 부분)의 공통점 (즉 고정자본과 구별되는 점)은 생산물에 이전된 이들의 가치가 상품자본에 의해 유통된다는 점 (즉 생산물이 상품으로 유통된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산물의 가치 속에는 항상 고정자본의 마모 부분 (즉 생산과정에서 생산물로 이전되는 고정자본의 가치 부분)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과 고정자본 간의 차이점은 오히려 다음과 같다.
즉 고정자본은 유동자본 ( = 불변적 유동자본 + 가변적 유동자본)의 회전기간이 여러 번 반복되는 동안에도 원래의 사용형태 그대로 생산과정에서 계속해서 가능하지만 유동자본은 매번 회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모두 새로 보전된 다음 생산부분에서 유통부문으로 (상품자본의 형태를 띠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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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된 가변자본가치와 연간 생산된 총잉여가치 사이의 비율을 우리는 연 잉여가치율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예에서 이 연 잉여가치율은 연간 총잉여가치 / 선대된 가변자본가치, 5,000/500 = 1,000%이다.
이 비율을 좀더 자세히 분석해보면, 연 잉여가치율은 한 번의 회전기간에 선대된
가변자본이 생산한 잉여가치율에 가변자본의 회전수 (전체 유동자본의 회전수와 같다)를 곱한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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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파운드스털링의 가변자본이 1년에 10번 회전하여 5,000파운드스털링의 잉여가치를 생산함으로써 연 잉여가치율이 1,000%인 경우 이것을 자본 A라고 부르자.
이제 5,000파운드스털링의 또 다른 가변자본 B가 1년에 전체 기간 (여기에서는 50주일)동안 선대되고 그것이 1년에 단 한 번만 회전한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연말에 생산물이 완성되면 그날 곧바로 지불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유통기간은 0이며 회전기간은 노동기간과 같은 1년이 될 것이다.
자본 A의 경우와 노동과정에서는 매주 100파운드스털링 (따라서 50주일에 5,000파운드스털링)의 가변자본이 존재한다. 거기에다 잉여가치율도 100%로 똑같다.
즉 노동일의 길이도 같고 노동일의 절반은 잉여노동으로 이루어진다.
만일 노동일의 길이가 5주일이면 이때 투하된 가변자본은 500파운드스털링이 될
것이고 잉여가치율은 100%이므로 5주일 동안 생산된 잉여가치량은 500파운스털링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착취되는 노동력의 양과 착취도는 가정에 따라 자본 A의 경우와 똑같을 것이다.
매주 투하되는 100파운드스털링의 가변자본은 100파운드스털링의 잉여가치를 생산하며 따라서 50주일 동안 투하된 자본 50*100 = 5,000파운드스털링은 5,000파운드스털링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연간 생산된 잉여가치량은 앞의 경우와 똑같이 5,000파운드스털링이지만 연 잉여가치율은 전혀 다르다
자본 B의 잉여가치율은 1년에 생산된 잉여가치를 선대된 자변가본으로 나눈 5000/5000 = 100%이다.
반면 자본 A의 경우에는 5,000/500 = 1,000%이다.
(중략)
이 현상은 잉여가치율이 가변자본에 의해 가동되는 노동력의 양과 착취도뿐만 아니라,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설명할 수 없는 온갖 요인들에 함께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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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정에서 실제로 투하된 자본만이 잉여가치를 창출하며 단지 이런 자본에 대해서만 잉여가치와 관련된 모든 법칙 - 잉여가치율이 주어져 있을 때 잉여가치량은 가변자본의 상대적인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는 법칙을 포함하는 - 이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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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가치율이 일정할 때 선대된 가변자본과 사용된 가변자본 간의 비율의 차이는 일정기간 동안 실제 사용될 수 있는 가변자본의 양이 달라질 경우에만 잉여가치의 생산에 영향을 미친다.
선대된 가변자본은 그것이 실제로 사용될 경우에만 (즉 실제로 사용되는 기간 동안만) 가변자본으로 기능하며, 사용되지 않은 채 선대된 상태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가변자본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대된 가변자본과 사용된 가변자본 간의 비율 차이는 결국 회전기간의 차이 (노동기간이나 유통기간의 차이 혹은 두 가지 모두의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로 요약된다.
잉여가치 생산의 법칙은 잉여가치율이 같을 때 같은 양의 가변자본은 같은 양의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본 A와 자본 B가 잉여가치율이 같고 같은 노동시간 동안 같은 양의 가변자본을 사용한다면, 일정한 시간 동안 사용된 가변자본과 같은 시간 동안 선대된 가변자본 간의 비율 (따라서 실제로 사용된 가변자본이 아니라 선대된 가변자본 총량에 대한 잉여가치 생산량의 비율)이 어떻든, 그 자본들은 같은 시간 동안 같은 크기의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 비율의 차이는 잉여가치 생산에 대하여 지금까지 서술한 법칙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법칙들을 확인해주는 것이며 그것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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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한 두 가변자본의 상대적 크기와 상관없이 이 자본들의 연 잉여가치율은 각 자본이 사용된 평균기간 (예를 들면 1주일 평균 또는 1일 평균)의 잉여가치율에 의해 결정된다.
(중략)
이제 1년 동안 선대된 자본 / 선대된 자본 (가변자본만을 고려함)이라는 비율은 1년 동안 선대된 자본의 회전수를 표현하고 있다.
(중략)
연 잉여가치율 = 실질 잉여가치율 * 선대된 가변자본 * 회전수 / 선대된 가변자본 = 실질잉여가치율 * 회전수
실질 잉여가치율 = 잉여가치량 / 선대된 가변자본
(중략)
자본가치는 순환의 여러 국면을 통과한 다음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그것도 잉여가치로 증식되어)는 점에서 선대되는 것이지 지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선대된 자본가치의 특징이다. 자본가치가 출발한 때로부터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기간은 그것의 선대기간이다. 자본가치가 통과하는 (선대된 시점에서 되돌아오는 시점까지) 전체순환은 자본의 회전을 이루며 그 회전의 지속기간이 회전기간이다. 이 기간이 모두 지나면 순환의 종결이고 동일한 자본가치는 동일한 순환을 새로 시작 (즉 자신을 증식하고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
자본 A의 경우와 같이 가변자본이 1년에 10회 회전한다면, 동일한 가변자본을 1년 동안 선대하여 생산할 수 있는 총잉여가치량은 한 번의 회전 기간에 생산할 수 있는 양의 10배가 될 것이다.
선대의 본질은 자본주의 사회의 관점에서 해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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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보전이 화폐 (즉 가변자본이 선대되는 형태)로 전화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잉여가치의 생산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잉여가치의 생산은 사용된 가변자본의 크기와 노동착취도에 달려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요건 (가치보전이 화폐로 전화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1년 동안에 일정량의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선대되어야 하는 가변자본의 크기를 변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연 잉여가치율에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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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회전기간이 짧을수록 - 따라서 1년 동안에 자신의 재생산기간이 반복되는 간격이 짧을수록 - 자본가가 처음에 화폐형태로 선대한 가변자본 부분은 노동자가 이 가변자본의 보전을 위해 창출한 가치생산물의 화폐형태로 보다 빨리 전화한다.
또한 그에 따라 자본가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화폐를 선대해야 할 기간은 더 짧아지고 그가 선대하는 총자본은 주어진 생산규모에 비해서 더 작아진다.
그리고 잉여가치율이 주어져 있다면 1년 동안 그가 뽑아낸 잉여가치의 양은 그만큼 더 상대적으로 커진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노동자들 자신이 만들어낸 가치생산물의 화폐형태를 가지고 그만큼 더 자주 노동자를 구매해서 노동자들의 노동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산규모가 일정하다면 선대된 화폐형태 가변자본의 (따라서 유동자본 일반의) 절대적 크기는 회전기간의 단축에 비례하여 감소하고 연 잉여가치율은 그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재생산기간 단축에 의해 연 잉여가치율이 증가하면 선대자본의 크기가 주어져 있을 때 생산규모는 증대되고 따라서 (잉여가치율이 일정하다면) 한 번의 회전기간에 생산되는 잉여가치의 절대량도 마찬가지로 증가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분석한 것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회전기간의 길이가 달라지면 그에 따라 같은 양의 생산적 유동자본과 같은 양의 노동을 동일한 노동착취도로 움직이기 위해 선대되어야 할 화폐자본의 규모도 매우 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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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생활수단의 판매자에게 화폐를 공급하긴 하지만 그 화폐로 판매자가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을 공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본 A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하여 노동력과 이 노동력을 위한 생활수단, 그리고 B에서 사용된 노동수단의 형태를 갖는 고정자본과 생산원료 등이 모두 시장에서 사들여지고 이를 보전하기 위해서 등가의 화폐가 시장에 투입된다.
그러나 그 1년 동안 시장에서 빠져나온 생산자본의 소재적 요소들을 보전하기 위한 어떤 생산물도 시장에 투입되지 않는다.
만일 자본주의가 아닌 공산주의 사회라고 한다면 화폐자본은 모두 사라지고 또 화폐자본 때문에 거래를 통해 발생하는 온갖 가면들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모든 문제가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집약될 것이다.
즉 예를 들어 철도 부설과 같이 분명히 연간 총 생산물에서 노동, 생산수단, 생활수단 등을 끌어 쓰면서도 상당 기간 동안 (1년 혹은 그 이상) 어떤 생산수단이나 생활수단 그리고 사용가치도 공급하지 않는 산업부문에 대하여 사회는 아무런 중단 없이 얼마만큼의 노동, 생산수단, 생활수단 등을 조달할 수 있을지를 미리 계산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오성이 오로지 사후 약방문으로 발현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대혼란이 끊임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첫째, 화폐시장에 대해 압력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대규모 화폐자본의 장기간 선대가 필요하기에 화폐시장이 항상 압박을 받는다. 이것은 산업자본가나 상인이 화폐자본을 철도 투기와 같은 곳에 투자하고 정작 사업에 필요한 화폐자본은 화폐시장에서 차입하는 그런 행위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둘째, 사회 전체적으로 이용 가능한 생산자본에 대해 압박이 일어난다.
생산자본의 요소들이 끊임없이 시장에서 빠져나오고 그에 해당하는 화폐등가만이 화폐로 시장에 투입되기 때문에 아무런 공급요소도 제공하지 않는 유효수요만 증가한다. 따라서 생활수단뿐만 아니라 생산재료의 가격도 함께 상승한다.
거기에다 이런 시기에는 또 사기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자본이 대규모로 이동하는 일이 발생한다. 투기꾼, 청부업자, 기술자, 변호사 등 일군의 무리가 부유해진다.
이들은 시장에서 강력한 소비수요를 발휘하고 그로 인해 임금도 상승한다.
그럼으로써 식료품과 관련하여 농업도 자극을 받는다.
그러나 식료품은 1년의 기간 내에 갑자기 증가할 수 없으므로 외국에서 식품과 사치품의 수입이 함께 증가한다.
그리하여 이런 수입업 부문에서 과잉수입과 투기가 발생한다.
반면 생산을 급속하게 증대할 수 있는 산업부문 (엄밀한 의미의 제조업, 광산업 등)에서는 가격상승으로 급격한 생산의 확대가 발생하고 그런 다음 곧바로 붕괴가 뒤따른다. 노동시장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즉 잠재적인 상대적 과잉인구와 심지어 이미 고용되어 있는 노동자들 가운데에서도 상당수가 새로운 사업부문으로 흡수된다.
철도와 같은 대기업부문은 일반적으로 노동시장에서 일정량의 노동량을 흡수해 가는데 이런 노동력은 오직 건장한 젊은이만 필요한 농업 등과 같은 부문에서만 공급될 수 있다.
이는 심지어 새로운 기업이 이미 확정된 사업부문을 혀성하고 거기에 필요한 이주노동자계급이 이미 형성된 후에도 일어난다.
따라서 임금은 지금까지 노동시장에서 고용사정이 양호하던 부분에서도 전반적으로 상승한다. 이 경향은 불가피한 붕괴와 더불어 산업예비군이 다시 떨어져 나감으로써 임금이 다시 최저 수준 또는 그 이하로 낮아질 때까지 계속된다.
(중략)
영국에서 공황이 발생하면 인도에는 즉각 팔리지 않는 면제품이 쌓이게 되며 (즉 상품자본에서 화폐자본으로의 전화가 실현되지 않게 되고 - 그런 점에서 과잉생산이 이루어지고) 반면 영국에는 팔리지 않는 인도 생산물의 재고가 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판매되고 소비된 생산물의 대부분이 제대로 지불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따라서 화폐시장에서 공황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생산과정과 재생산과정 자체가 비정상 상태임을 의미한다.
셋째, 사용되는 유동자본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모두 포함)의 경우 회전기간의 길이는 그것이 노동기간의 길이에서 비롯되는 한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낳는다.
즉 1년에 여러 차례 회전이 이루어지는 경우 유동자본 가운데 어떤 요소는 석탄 생산이나 의복 제조 등의 경우처럼 자신의 생산물을 통해서 공급될 수 있다.
다른 경우에는 (회전이 1년에 여러 차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적어도 1년 동안에
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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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문제로 삼는 것은 잉여가치의 형성이 아니다. 이 물음에 대한 유일한 비밀의 열쇠인 이 부분 (잉여가치의 형성)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투하된 가치총액은 잉여가치로 자신을 증식시키지 않고는 자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이미 가정에 따라 그 가치총액이 자본이라고 했으므로 잉여가치의 존재도 당연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질문은 ‘잉여가치는 어디에서 나오는가?’가 아니라,
‘잉여가치를 화폐화하기 위한 화폐는 어디에서 나오는가?’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잉여가치의 존재는 자명하다. 따라서 잉여가치의 존재는 이미 전제된 것이며 또한 그와 함께 다음과 같은 것도 전제되어 있다.
즉 유통에 투입된 상품량 가운데 일부는 잉여생산물로 구성되어 있고, 따라서 그것은 자본가가 자신의 자본으로 유통에 투입하지 않은 가치를 표현하며, 자본가는 자신의 생산물로 자신의 자본 이상의 초과분을 유통에 투입하고, 이 초과분을 유통에서 다시 끌어내 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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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가운데 일부는 끊임없이 화폐자본의 형태로 존재하며 또한 잉여가치의 일부도 항상 화폐형태로 그 소유자의 손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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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별도로, 화폐의 순환 (즉 화폐가 그 출발점으로 복귀하는 것)은 자본회전의 한 국면이므로 화폐의 유통 (즉 화폐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출발점에서 멀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현상이다.
그럼에도 회전이 빨라지는 것은 유통이 빨라지는 것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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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든 수단으로도 부족할 경우에는 금의 추가 생산이 이루어지거나 혹은 추가 생산물 가운데 일부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금과 교환되어야 한다.
유통수단을 위한 금, 은의 연간 생산에 지출되는 노동력과 사회적 생산 수단의 총량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일반적으로 상품생산에 기초한 생산양식)의 부대비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항목을 이룬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추가 생산 및 소비 수단에서 그만큼을 공제해버
린다. 생산규모가 불변 (혹은 확장되는 비율이 일정)일 경우 이 값비싼 유통기구의 비용은 그것이 감소하는 만큼 사회적 노동생산성을 높이게 된다.
따라서 신용제도와 함께 발달하는 보조수단들이 이런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들은 직접적으로 자본주의적 부를 - 사회적 생산과정과 노동과정 가운데 보다 많은 부분이 사실상 아무런 화폐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혹은 현실에서 사용되는 화폐의 유통능력을 향상 시킴으로써 - 증가시키게 된다.
이것은 또한 현재 규모의 자본주의적 생산이 신용제도 없이도 (즉 금속화폐만의 유통에 의해서) 가능할 것인가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해결해준다.
그것은 명백히 불가능하다.
신용제도가 없으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그 대신 귀금속의 생산량에서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반면 신용제도가 화폐자본을 공급하고 유통시킨다면, 우리는 신용제도의 생산력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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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 위에서 화폐축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화폐의 유통이 정체 - 보통 때보다 더 많은 화폐량이 축장화폐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 - 되었거나 회전을 위해 화폐가 적립되었거나 혹은 생산자본으로 기능할 화폐가 잠깐 잠재적인 형태의 화폐자본을 이루고 있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만일 한편에서 화폐로 실현된 잉여가치의 일부가 유통에서 빠져나와 축장화폐로 적립된다면 잉여가치의 다른 부분은 그와 동시에 계속해서 생산자본으로 전화한다. 자본가계급 사이에서 추가로 귀금속이 배분되는 상황을 제외한다면 모든 곳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화폐 적립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연간 생산물 가운데 잉여가치를 상품형태로 표현한 부분에 대한 위의 이야기는 연간 생산물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그래도 적용된다.
그것을 유통시키기 위해 일정량의 화폐액이 필요하다.
이 화폐액은 연간 생산물 가운데 잉여가치를 나타내는 부분과 꼭 마찬가지로 역시 자본가계급에 속한다. 이 화폐는 처음에 자본가계급 자신에 의해서 유통에 투입된다. 그리고 바로 그 유통을 통해서 다시 자본가들 사이에 끊임없이 배분된다.
일반적인 주화유통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화폐액도 계속 번갈아 가며 일부는 정체되고 일부는 유통된다. 이렇게 적립되는 부분이 의도적으로 화폐자본을 형성하기 위해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여기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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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생산은 상품유통을 전제로 하고 상품유통은 상품이 화폐로 표현되는 것 (즉 화폐유통)을 전제로 한다.
상품이 상품과 화폐로 이중화하는 걳은 생산물이 상품으로 표현되는 법칙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새로 시작하는 모든 사업에 시동을 거는 동력이면서 동시에 지속적인 동력이기도 한 화페형태의 자본 (즉 화폐자본)을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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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는 여러 생산요소가 합체되어 있는데, 이들 요소의 팽창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선대된 화폐자본의 크기와 관계가 없다.
노동력에 대한 지불이 변하지 않더라도 노동력의 착취는 외연적으로나 내포적으로나 더욱 심화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착취가 강화되면서 화폐자본이 증가 (즉 임금이 인상)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결코 비례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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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자본에 대한 수요가 노동기간이 길어짐으로써 발생할 경우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조건 때문이다.
첫째, 일반적으로 화폐는 모든 개별 자본이 (신용을 무시한다면) 생산자본으로 전화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형태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상품생산 일반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 필요한 화폐 선대액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비교적 오랫동안 화폐로 전화될 수 있는 생산물을 사회에 공급하지 않은 채로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사회에서 계속 끌어다 쓰기만 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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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농학파의 학설은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이론이다.
산업자본의 대표자 (차지농업가 계급)가 경제의 전체 흐름을 주도한다.
농업은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즉 대규모의 자본주의적인 차지농의 기업형태로) 경영된다. 토지의 직접적인 경작자는 임금노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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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애덤 스미스의 편협성은, 그가 불변자본의 가치가 갱신된 형태로 재현되는 것을, 이미 케네가 정확하게 봤던 것처럼 재생산과정의 중요한 계기로 보지 못하고 단지 유동자본과 고정자본의 구별에 관한 설명으로만 (그것도 잘못된 설명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스미스가 ‘최초의 선대’와 ‘매년 이루어지는 선대’를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으로 번역
하면서 진전을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본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중농학파에서처럼 농업부문에만 특별히 사용한 것이 아니라 훨씬 일반화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반면 퇴보해버린 부분은 고정과 유동을 결정적인 구별로 고착화하여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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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논리는 이렇게 정리된다.
1)각 개별 자본가의 고정자본과 그 고정자본의 재생산(그는 이 기능을 잊고 있다) 및 유지에 필요한 유동자본이 그러하듯이 소비수단의 생산에 사용되는 그의 유동자본도 모두 그의 순수입에서 제외되며, 그의 순수입은 오로지 그의 이윤만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의 상품생산물 가운데 그의 자본을 보전하는 부분은 그의 수입을 구성하는 가치 부분들로 분해될 수 없다.
2)각 개별 자본가의 고정자본과 꼭 마찬가지로 그의 유동자본도 사회적 유동자본의 일부를 이룬다.
3)사회적 유동자본은 그것이 비록 개별 유동자본의 총합이긴 하지만, 각 개별 자본가의 유동자본과는 성격이 다르다. 개별 자본가의 유동자본은 결코 자본가 자신의 수입의 한 부분을 이룰 수 없다. 반면 사회적 유동자본의 일부분 (즉 소비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은 사회적 수입의 일부를 이룰 수 있다.
혹은 스미스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반드시 사회의 순수입에서, 연간 생산물 가운데 그 부분만큼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스미스가 여기에서 유동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년 생산되는 상품자본 (즉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자본가가 매년 유통에 투입하는 상품자본)이다.
이들 자본가의 연간 총상품생산물을 소비될 수 있는 물품으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사회의 순수입 (임금을 포함하여)이 실현되거나 지출되는 재원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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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스미스가, 앞에서 그가 고정자본이라고 부른 것의 재생산을 고찰하고 지금 그가 유동자본이라고 부른 것의 재생산을 고찰하면서 머리에 떠올린 갖가지 단상들을 모두 연결했더라면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1)사회의 연간 생산물은 두 부문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생산수단, 두 번째는 소비수단을 포괄한다. 두 부문은 분리해서 다루어야만 한다.
2)연간 생산물 중에서 생산수단으로 이루어진 부분의 총가치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첫 번째 부분은 이들 생산수단의 생산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 (즉 갱신된 형태로 재현되는 자본가치) 이다.
두 번째 부분은 노동력에 투하된 자본의 가치 (혹은 이 생산영역의 자본가가 지불한 임금의 합계) 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분은 이 생산영역에 속하는 산업자본가들의 지대를 포함한 이윤의 원천을 이루는 부분이다.
3)두 번째 부문의 자본가들 (즉 직접적인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자본가)의 수중에서이다. 이 가치 부분은 두 번째 부문의 자본가들에게 그들이 소비수단의 생산을 위해 소비한 자본을 (이 자본이 노동력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즉 이 두 번째 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의 합계가 아닌 한) 보전해준다.
반면 이 소비된 자본 (즉 이제는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자본가들의 수중에 소비수단의 형태로 존재하는 자본)은 그 자체로는 (즉 사회적 관점에서는) 첫번째 부문의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수입을 실현하는 소비재원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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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회적 자본은 오직 개별 자본의 합계와 같을 뿐이고, 따라서 사회의 연간 상품생산물 (혹은 상품자본)도 이들 개별 자본의 상품생산물의 합계와 같다.
따라서 모든 개별적인 상품자본들에서 상품가치를 그 구성 부분들로 분해한 것은 모든 사회적 상품자본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 구성 부분이 사회적 재생산의 총과정에서 보여주는 현상형태는 다른 형태이다.
둘째, 단순재생산의 기초 위에서도 임금(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생산은 물론 새로운 고정자본 가치의 직접적 생산도 함께 이루어진다.
이것은 노동일이 두 부분으로만 이루어지고 한 부분은 가변자본을 보전하고 (사실상 노동력의 구매를 위한 등가 부분을 생산하고) 다른 한 부분은 잉여가치 (이윤, 지대 등)을 생산하는 것인데도 그러하다.
즉 생산수단의 재생산에 지출되는 매일매일의 노동 - 그것의 가치는 임금과 잉여가치로 나누어진다 - 은 소비수단의 생산에 지출된 불변자본 부분을 보전하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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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도그마, 즉 모든 개별 상품 (따라서 사회의 연간 생산물을 구성하는 모든 상품의 합계 - 그는 언제나 자본주의적 생산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의 가격(혹은 교환가치)은 세 가지 구성성분으로 이루어진다 (혹은 임금, 이윤, 지대로
분해된다)는 그 도그마는, 결국 상품가치가 선대된 가변자본가치에 잉여가치를 합한 것과 같다는 것으로 환원할 수 있다.
더욱이 이처럼 이윤과 지대를 우리가 m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공통단위로 환산하는 것은 스미스가 명시적으로 승인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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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품 (따라서 연간 상품생산물)의 가격이 임금 + 이윤 + 지대로 분해된다는 도그마는, 스미스 자신의 저작 곳곳에 숨어 있는 심오한 부분들에서, 각 상품의 가치가 v+m (즉 노동력에 투하되어 노동자가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자본가치 +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으로 부가한 잉여가치)과 같다는 형태를 취한다.
스미스의 이러한 최종적인 결론은 동시에 상품가치의 구성성분에 대한 그의 일면적인 분석의 근원을 보여준다.
이들 구성성분이 생산에 참여하는 각 계급의 수입의 원천을 이룬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크기 결정이나 가치총액 규모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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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는 모든 수입과 교환가치의 세 가지 원천이다. 다른 모든 수입은 궁극적으로 이들 원천 가운데 어떤 것에서 파생된 것이다.”
여기에는 온갖 착각이 포개져 있다.
1)노동을 하든 않든 직접 재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연간 상품생산물 가운데 자신들의 몫 (즉 그들의 소비수단)을 일단은 생산물을 처음 할당받는 계급 (생산적 노동자와 산업자본가와 토지소유자)의 수중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수입은 실질적으로 (생산적 노동자의) 임금, 이윤 및 지대에서 파생되며, 따라서 이들 본원적 수입에 대응하는 파생적 수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런 의미의 파생적 수입을 얻는 사람들은 왕, 성직자, 교수, 창녀, 병사 등 자신들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서 이 수입을 얻는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이런 기능을 자신의 수입의 원천으로 간주할 수 있다.
2)바로 여기에서 스미스의 우스꽝스러운 오류는 그 절정에 이른다. 상품의 각 가치구성 부분들과 그것들 속에 구체화된 가치생산물의 총액을 정확하게 결정하고 그런 다음 이들 구성 부분들이 그만큼의 다양한 수입원을 이룬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에서 시작한 다음 (즉 이렇게 가치로부터 수입을 파생시키고 난 다음) 그는 정반대로 방향을 틀어 - 이것은 언제나 그의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이다 - 수입을 ‘모든 교환가
치의 구성 부분’에서 ‘모든 교환가치의 원천’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속류경제학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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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는 여기에서 단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고 있다.
즉 이 생산수단의 가격은 그들의 생산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격으로도 분해된다는 점이다. 그는 한 생산부문에서 다른 생산부문으로, 그리고 다시 제3의 생산부문으로 옮겨 간다. 상품의 총가격이 ‘직접적으로’(혹은 궁극적으로) v+m으로 분해된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이 논증되는 경우에만 공허한 핑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즉 가격이 직접적으로 c(소비된 생산수단의 가격)+v+m으로 분해되는 상품생산물도 궁극적으로 이 소비된 생산 수단을 완전히 보전해주는 다른 상품생산물에 의해 보상되고, 반면 이 다른 상품생산물은 가변자본 (즉 노동력에 투하되는 자본)을 통해서만 생산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논증된다면 이 후자의 상품생산물의 가격은 직접적으로 v+m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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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스미스는, 자신의 모순을 의식하지 못한채 나중에 자신의 이론을 뒤집었다. 그런데 그의 모순의 원천은 바로 그의 이론적 출발점에서 찾아야만 한다. 노동으로 전환된 자본은 자신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생산한다.
어떻게?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가공하는 사물에, 자신의 매입가격의 등가 외에 그들의 사용자의 (그들의 아니라) 몫이 되는 잉여가치 (이윤과 지대)만큼의 가치를 새겨넣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노동자들이 하고 있는 (또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하루 동안의 산업노동에 관한 이야기는 1년 동안 자본가계급 전체가 움직이는 노동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따라서 사회적 연간 가치 생산물의 총량도 단지 v+m(즉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구매가격으로 지출된 자본가치의 보전 부분과 그들의 사용자에게 양도해야 하는 추가가치)으로만 분해된다.
그러나 상품의 이들 두 가지 가치요소는 동시에 재생산에 참가하는 각 계급의 수입원을 이루기도 한다.
첫째 요소는 노동자들의 수입인 임금을 이룬다.
둘째 요소는 잉여가치를 이루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산업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보유하고 또 다른 일부는 토지소유자의 수입인 지대로 떨어져 나간다.
연간 가치생산물이 v+m이외의 다른 어떤 요소도 포함하지 않는다면 가치의 나머지
한 부분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단순재생산을 가정하고 있다. 연간 노동의 총량이 노동력에 투화된 자본가치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과, 잉여가치의 창출을 위해 필요한 노동으로 분해된다면, 노동력에 투하되지 않는 자본가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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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1)스미스는 상품의 가치를 임노동자가 노동대상에 부가하는 노동량에 의하여 규정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재료에’ 부가하는 노동량에 의한 것인데, 이는 그가 노동생산물을 가공하는 제조업을 고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본질과 아무 관련이 없다.
노동자가 어떤 사물에 부가하는 (이 ‘부가한다’는 표현은 스미스의 것이다) 가치는, 가치가 부가되기 전에 이미 이 대상이 자신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는지의 여부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결국 노동자는 상품형태로 가치생산물을 만들어낸다.
스미스에 의하면 이 가치생산물의 일부는 그의 임금의 등가이며, 따라서 이 부분의 크기는 그 임금의 가치액에 의해 결정된다. 이 임금가치의 크기에 따라서,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가치와 동등한 가치를 생산하거나 재생산하기 위해 부가해야 하는 노동의 크기도 변화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동자는 이런 범위 이상의 노동을 부가하는데, 그것은 그를 고용한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형성한다.
이 잉여가치가 자본가의 수중에 모두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그 일부가 제3자에게 양도될 것인지의 문제는 임노동자가 부가하는 잉여가치의 질적인 성격 (그것이 일반적으로 잉여가치라는)이나 양적인 성격 (크기) 어디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물의 다른 모든 가치 부분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가치이긴 하지만, 노동자가 그 등가를 받지 못하고 나중에도 역시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히려 이 가치가 아무런 등가도 없이 자본가에 의해서 취득된다는 점에서 다른 가치 부분과 구별된다.
상품의 총가치는 노동자가 그것의 생산에 지출한 노동량에 의해서 정해진다.
이 총가치 가운데 일부는 임금의 가치 (즉 임금의 등가)와 같은 크기로 결정된다.
그에 따라 둘째 부분 (즉 잉여가치)도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해진다.
즉 그것은 생산물의 총가치에서 임금의 등가인 가치 부분을 공제한 것과 같으며 따라서 상품 생산과정에서 만들어진 가치생산물 중에서 거기에 포함된 임금의 등가부분을 초과하는 부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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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첫 번째 오류는 연간 생산물가치를 연간 가치생산물과 동일시하는 점
이다. 후자는 단지 전년도의 노동생산물일 뿐이다.
전자는 거기에다 연간 생산물의 생산에 소비된 가치요소도 함께 포함한다.
즉 그것은 단지 그 가치가 재현될 뿐인 생산수단 - 그 가치로 보면 그해에 지출된 노동으로 생산되거나 재생산된 것이 아닌 - 의 가치를 포함한다.
이런 혼동 때문에 스미스는 연간 생산물 가운데 불변가치 부분을 쫓아내버렸다.
이 혼동은 그의 근본적인 견해 속에 내재한 또 다른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노동 그 자체의 이중적 성격, 즉 노동력을 지출함으로써 가치를 만드는 노동과 구체적인 유용노동으로 사용대상 (사용가치)을 만드는 노동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구별하지 않는다.
연중 생산되는 상품의 총액 (즉 연간 총생산물)은 전년도에 사용된 유용노동의 생산물이다. 이들 상품이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은 오로지 사회적으로 사용되는 노동이 다양한 유용노동 부분들에 나누어 지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상품의 생산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가 새로운 현물형태로 재현되는 방식을 통해서 이들 상품의 총가치 속에 보존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바로 이 점 (사회적 노동이 다양한 유용노동부문에 나누어 지출되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연간 총생산물은 그해에 지출된 유용노동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연간 생산물가치 가운데 단지 일부분만 그해에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그해에 사용된 노동 총량을 나타내는 연간 가치생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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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상품 (따라서 연간 생산물)의 가치 가운데 임금의 등가를 이루는 부분은 자본가가 임금으로 선대한 자본 (즉 그의 총선대자본 중 가변적인 구성 부분)과 같다.
자본가는 선대자본가치의 이 구성 부분을 임노동자가 새로 생산하여 공급한 상품의 가치구성 부분을 통해서 회수한다.
아직 판매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혹은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판매하지 않은 생산물 속에 포함된 노동자의 몫을 자본가가 화폐로 지불한다는 의미에서 가변자본이 선대되든 혹은 노동자가 만든 상품의 판매를 통해서 이미 획득한 화폐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든 그렇지 않으면 신용을 통해서 자본가가 그것을 지불하든, 이들 세 경우 모두 자본가는 가변자본 - 노동자들의 수중에 화폐형태로 흘러들어간다 - 을 지출하고, 다른 한편 이 자본가치의 등가를 자신의 상품가치 가운데 일부 - 즉 노동자가 자신의 몫 (상품의 총가치 속에 포함된)으로 새로 생산한 부분, 다시 말해 노동자가 자신의 임금가치를 생산한 부분 - 로 갖게 된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이 가치 부분을 노동자 자신의 생산물인 현물형태로 주는 대신 화폐로 지불한다.
따라서 자본가에게는 그의 선대자본가치 가운데 가변적 구성 부분이 이제 상품형태로 존재하게 되는 반면, 노동자는 그가 판매한 노동력의 등가를 화폐형태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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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노동자의 상품 (그의 노동력 그 자체)은 단지 그것이 자본가의 자본에 합체되어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한에서만 상품으로 기능한다.
다른 한편 자본가가 화폐자본으로 노동력의 구입에 지출하는 자본은 노동력의 판매자 (즉 임노동자)에게 수입으로서 기능한다.
여기에는 스미스가 구별하지 못한 다양한 유통과정과 생산과정이 서로 얽혀 있다.
첫째, 유통과정에 속하는 행위,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한다.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입하는 화폐는, 그의 관점에서는 가치증식을 위해 투하된 화폐(즉 화폐자본)이다. 그것은 지출된 것이 아니라 선대된 것이다.
(이것이 선대의 참된 의미이며, 이때 자본가가 생산과정의 목적을 위해 지불하는 모든 가치는 이 지불이 언제 이루어졌든 상관없이, 그의 관점에서는 선대된 것이다. 그 가치는 생산과정 그 자체에 선대된 것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모든 상품판매에서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다. 판매자는 사용가치 (여기서는 노동력)를 주고 화폐로 그 가치를 받는다 (가격을 실현한다). 구매자는 자신의 화폐를 주고 그 대신 상품 그 자체 (노동력)을 얻는다.
둘째, 이제 생산과정에서는 구입된 노동력이 기능자본의 일부를 이룬다.
그리고 노동자 자신은 여기에서 단지 이 자본 가운데 생산수단의 현물 형태로 존재하는 요소와 구별되는 하나의 특수한 현물형태로만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지출함으로써 자신이 생산물로 전화시킨 생산수단에, 자신의 노동력 가치와 같은 크기의 가치를 (잉여가치는 무시한다) 부가한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자본가가 자신에게 임금으로 이미 선대하였거나 혹은 선대할 자본 부분을 자본가를 위해 상품형태로 재생산 (즉 이 자본 부분의 등가를 생산)한다.
셋째, 상품이 판매될 때 그 판매가격의 일부는 자본가에게 그가 선대한 가변자본을 보전해주고, 그리하여 한편으로 자본가는 다시 노동력을 구입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다시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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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자본 가운데 생산적 노동의 유지를 위해 투하되는 부분은, 그것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의 기능을 수행하고 나면, 노동자들의 수입을 이룬다.”
자신이 구입한 노동력의 대가로 자본가가 지불하는 화폐가 ‘그를 위해 자본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그가 노동력을 자신의 자본 가운데 물적인 구성 부분들과 합체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자본을 비로소 생산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내용을 구별하자.
노동력은 노동자의 수중에서는 자본이 아니라 상품이다.
그리고 노동력이 노동자에게 수입을 이루는 것은, 그가 끊임없이 노동력을 반복해서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력은 판매되고 나면 자본가의 수중에서 생산과정 동안 자본으로 기능한다. 여기에서 노동력은 두 번의 기능을 수행한다.
즉 노동자의 수중에서는 가치대로 판매되는 상품으로, 그리고 또 그것을 구매한 자본가의 수중에서는 가치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힘으로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화폐를 받는 것은, 그가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하게 한 다음 (즉 노동력이 이미 노동생산물의 가치 속에 실현된 후) 에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자본가는 그것을 지불하기 전에 이미 이 가치를 자신의 수중에 갖고 있다.
따라서 두 번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화폐 (처음에는 가변자본의 화폐형태로, 그 다음에는 임금으로)가 아니다.
두 번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노동력이다.
즉 그것은 처음에 노동력이 판매될 때 상품으로 기능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로 그것은 생산과정에서 기능하는데 이때 노동력은 자본가의 수중에서 자본 (즉 사용가치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요소)으로 기능한다.
노동력은 노동자에게 지불할 등가를, 자본가가 그것을 노동자에게 화폐형태로 지불하기 전에, 이미 상품형태로 공급한다.
즉 노동자는 자본가가 자신에게 지불할 지불재원을 자신이 직접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노동자는 자신이 받은 화폐를 자신의 노동력 (즉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총체적인 관점에서) 자본가가 자본가로 머물 수 있게 만드는 도구)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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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노동력의 끊임없는 구매와 판매는 한편으로 노동력을 자본의 요소로 영속화한다. 이를 통해서 자본은 상품의 창조자로 나타나고 또한 노동력을 구매하는 자본 부분은 노동력 자신의 생산물에 의해 끊임없이 생산됨으로써 결국 노동자는 자신에게 지불되는 자본재원을 스스로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셈이 된다.
또 다른 한편 노동력의 끊임없는 판매는 계속 갱신되는 노동자의 생계 원천이 되며, 따라서 그의 노동력은 그가 살아가기 위한 수입을 얻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수입은 단지 어떤 한 상품(노동력)의 끊임없이 반복되는 판매로 이루어지는 가치의 취득을 의미할 뿐이고 이때 이 가치는 오로지 판매되어야 할 상품의 끊임없는 재생산을 위해서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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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스미스의 설명 가운데 옳은 부분 - 즉 사회의 연간 상품 생산물 (각각의 개별 상품 혹은 하루나 일주일간의 생산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에 포함된 가치(연간 노동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는 선대된 가변자본의 가치 (노동력을 새로 구입하는 데 사용될 가치 부분)와 잉여가치 (다른 조건이 불변이고 단순재생산의 조건이 유지될 경우 자본가가 자신의 개인적 소비수단을 통해 실현할 수 있는)의 합과 같다는 것 - 을 우리가 잊지 않고, 또한 스미스가 가치를 만드는 (즉 노동력이 지출되는) 노동과 사용가치를 만드는 (즉 합목적적인 유용한 형태로 만드는) 노동을 혼동한다는 것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미스의 전체적인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모든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생산물이다. 따라서 연간 노동생산물의 가치 혹은 연간 사회적 상품생산물의 가치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모든 노동은
1)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구입하는 데 선대된 자본의 등가를 재생산하는 부분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시간
2)자본가에게서 아무런 등가도 지불받지 않고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가치 (잉여가치)에 해당하는 잉여노동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모든 상품 가치는 다지 이 구성 부분으로만 분해될 수 있고, 이것들은 궁극적으로 노동자계급에게는 임금의 형태로, 자본가계급에게는 잉여가치의 형태로 각자의 수입을 이룬다.
그러나 불변자본가치 (즉 연간 생산물의 생산에 소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와 관련하여, 이 가치가 어떻게 해서 새로운 생산물의 가치에 들어가게 되는지는 (자본가가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면서 그것을 구매자에게 부담시킨다는 말 외에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가치 부분도 생산수단 그 자체가 노동의 생산물이기 때문에 역시 가변자본의 등가와 잉여가치 (즉 필요노동의 생산물과 잉여노동의 생산물)로만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이 생산수단의 가치가 그 사용자들의 수중에서 자본가치로 기능한다고 해서, 이 가치도 처음에는 (그 근원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다른 사람의 수중에서) - 비록 과거이긴 하지만 - 역시 이들 두 가치 부분 (즉 서로 다른 두 소득원천)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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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은 생산적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팔고, 그런 다음 이 노동력이 자본가의 수중에서 단지 그의 생산자본의 한 요소로만 기능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유통에 속하는 이 거래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는 생산과정을 준비할 뿐만 아니라, 암묵적으로 생산과정의 특수한 성격을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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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산과정의 내부에서 불변자본가치의 단순한 유지, 선대된 가치 (노동력의 등가)의 현실적인 재생산, 그리고 자본가가 과거에 등가를 지불한 적도 없고, 앞으로 지불하지도 않을 가치 (즉 잉여가치)의 생산 사이의 구별이 이루어진다.
잉여가치 (자본가가 선대한 가치의 등가를 초가하는 가치)의 획득은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를 통해서 시작되긴 하지만 사실상 생산과정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고 또한 그 생산과정의 본질적인 계기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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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로 전화되기 전의 상품생산물을 살펴보자.
그것은 모두 자본가의 것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또한 유용한 노동생산물 (사용가치)로서 전적으로 과거 노동과정의 생산물이다.
하지만 그 가치는 그렇지 않다. 이 가치 가운데 일부는 상품의 생산에 지출된 생산수단의 가치가 새로운 형태로 재현된 것일 뿐이다.
이 가치는 생산과정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산수단은 생산과정 이전에 이미 그것과 무관하게 이 가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은 이 가치의 담지자로서 생산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새롭게 변한 것은 단지 이 가치의 현상형태일 뿐이다. 상품가치에서 이 부분은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선대한 불변자본가치 가운데 상품생산과정에서 소비된 부분의 등가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는 생산수단의 형태로 존재했고 이제 그것은 새로 생산된 상품가치의 구성부분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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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으로 선대된 가변자본을 보전하는 가치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 잉여가치도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새로 만든 가치 (응결된 노동)이다.
단지 이것은 생산물 전체의 소유자인 자본가가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은 것일 뿐이다. 바로 이런 성격 때문에 자본가는 이것을 사실상 모두 자신의 수입으로 소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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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리카도는 상품가격이 임금과 잉여가치 (혹은 가변자본과 잉여가치)로 분해된다는 스미스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한다.
스미스와 그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1)잉여가치의 구성 부분과 관련된 견해에서 그는 지대를 잉여가치의 필수 요소로 인정하지 않는다,.
2)리카도는 상품가격을 이들 성분으로 쪼갠다. 즉 가치의 크기는 이미 주어져 있다. 말하자면 각 구성부분들의 합이 주어진 크기로 전제되고 그것이 출발점이 되는데 이것은 스미스가 종종 자신의 심오한 견해를 거슬러 가면서 정반대 방향으로 말했던 내용, 즉 상품가치의 크기는 나중에 구성 부분들을 합해서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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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사상적 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그의 교의는 경제학의 정통 교리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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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간 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 가운데 자본을 보전하는 부분 (즉 사회적 재생산)을 포함하는 동시에, 소비재원으로 노동자와 자본가가 소비하는 부분도 함께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 모두를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재생산(즉 유지)를 포함하며, 따라서 총생산과정의 자본주의적 성격의 재생산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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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정에서 소비되는 자본은 어떻게 해서 그 가치가 연간 생산물에 의해 보전되는가, 그리고 이 보전의 운동은 자본가에 의한 잉여가치의 소비 및 노동자에 의한 임금의 소비와 어떻게 얽혀 있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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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변자본과 불변자본 각각에서 이 자본의 도움에 의해 생산된 연간 총생산물의 가치
는 생산과정에서 소비되면서 자신의 가치를 생산물에 이전하기만 하는 불변자본 c를 나타내는 가치 부분과 연간 총노동액에 의해 부가된 가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이 두 번째 부분은 다시 선대된 가변자본 v의 보전분과 그것을 넘어서서 잉여가치 m을 형성하는 초과분으로 나누어진다.
개별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각 부분의 연간 총생산물의 가치도 c+v+m으로 나누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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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생산수단의 생산
자본 : 4,000c+1,000v = 5,000
상품생산물 : 4,000c+1,000v+1000m = 6,000은 생산수단으로 존재한다.
2.소비수단의 생산
자본 : 2,000c+500v = 2,500
상품생산물 : 2,000c+500v+500m = 3,000의 소비수단으로 존재한다.
(중략)
두 경우 모두에서 이루어진 일은 단지 2 부분의 불변자본이 생산물형태에서 다시 생산수단이라는 현물형태 (즉 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로 전환된 것과 1 부문의 가변자본 부분이 화폐형태로 전환되고 생산수단 1의 잉여가치 부분이 소비할 수 있는 형태의 수입으로 전환된 것만이 아니다.
(중략)
그들은 결국 각자의 상품등가를 교환함으로써 서로 완전히 지불을 끝낸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상품가치액 외에 이 상품교환의 수단으로 유통에 투입한 화폐는 그들 각자가 유통에 투입한 비율에 따라 유통에서 각자의 부문으로 되돌아간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한 푼도 더 번 것이 없다.
2부문은 소비수단의 형태로 불변자본 2,000과 화폐형태로 500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그것은 2,000을 생산수단의 형태로, 그리고 500은 여전히 화폐형태로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1부문도 1,000의 잉여가치와 화폐형태 500을 가지고 있다.
-이를 일반적으로 말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산업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상품유통을 매개하기 위해 유통에 투입하는 화폐는, 그것이 상품의 불변적 가치를 염두에 둔 것이든, 혹은 상품에 포함된 잉여가치 가운데 수입으로 지출될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이든, 언제나 그들이 화폐유통을 선대했던 액수만큼 각자의 수중으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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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a : 400v+400m => 생필품 생산 공장
IIb : 100v + 100m => 사치품 생산 공장
(V:가변자본, m:잉여가치)
1)노동자 IIa는 400v(a) 생필품 구매에 400v(a)를 소비함
=> 자본가 IIa에게 400파운드스털링의 화폐가 들어옴 (즉, 자본가 IIa가 노동자 IIa에게 지불한 가변자본가치 400파운드스털링이 돌아옴)
=> 자본가 IIa는 돌아온 400파운드스털링을 가지고 노동력을 재구입가능하게 됨
2)노동자 IIb는 100m(a)라는 생필품 구매에 100v(b)를 소비함
=> 자본가 IIa에게는 100v(b)라는 수입이 발생함
=> 자본가 IIa는 사치품 100v(b)를 구입함
=> 자본가 IIb는 노동자 IIb에게 지불한 가변자본가치 100파운드스털링이 돌아옴
=> 자본가 IIb는 돌아온 100파운드스털링을 가지고 노동력을 재구입가능하게 됨
3)두 자본가는 각자의 수입을 지출할 때, 평균적으로 사치품에 40프로, 생활필수품에 60프로의 비율로 지출한다고 가정함
따라서 잉여가치 즉 자본가의 수입에 대하여 이 소비 분포를 적용하면
자본가 IIa는 생활필수품에 240파운드스털링, 사치품에 160파운드스털링을 소비예정이며, 자본가 IIb는 생활필수품에 60파운드스털링, 사치품에 40파운드스털링을 소비예정임
현재 소비 상황을 점검하자면
자본가 IIa : 100m(a)의 돈을 가지고 사치품 100v(b)를 소비함
자본가 IIb : 소비없음
노동자 IIa : 400v(a)의 돈을 가지고 생활필수품 400v(a)를 소비함
노동자 llb : 100v(b)의 돈을 가지고 생활필수품 100m(a)를 소비함
앞으로 추가될 소비 상황을 점검하면
자본가 IIa : 300m(a)의 돈을 가지고 사치품 60m(b)과 생필품 240m(a) 소비예정
자본가 IIb : 100m(b)의 돈을 가지고 사치품 40m(b)과 생필품 60m(a) 소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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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재생산의 조건에서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1)생산수단의 현물형태로 만들어진 연간 노동의 새로운 가치생산물 (v+m으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은 연간 노동의 다른 부분에 의해 소비수단의 형태로 재생산되는 생산물가치 중에서 불변자본가치 c와 동일하다.
2)소비수단의 형태로 재생산되는 연간 생산물에서, 화폐형태로 선대된 가변자본 v는 그것을 수령하는 사람들이 사치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일 경우, 생필품 중에서 우선 일차적으로 그 부문의 자본가들을 위한 잉여가치를 구현하는 부분만 이 노동자들에 의해 실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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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황은 일시적으로 사치품의 소비를 감소시킨다.
그것은 가변자본을 화폐자본으로 재전화하는 것을 늦추거나 정체시키고, 부분적으로만 재전화하도록 만들며 따라서 사치품 생산부분의 노동자 가운데 일부를 실업상태로 빠뜨린다. 그와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필요소비수단의 판매도 정체되고 감소한다. 여기에서 함께 해고된 비생산적 노동자들은 모두 배제 되었는데 이들 노동자는 봉사의 대가로 자본가들의 사치적 지출 가운데 일부를 받고 (그런 점에서 이들 노동자 그 자체가 사치품이기도 하다) 생활필수품의 소비에도 대거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호황기 특히 투기의 전성기에는 그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시기에는 이미 갖가지 다른 이유로 상품으로 표현되는 화폐의 상대적 가치가 하락하며, 따라서 상품가격은 자신의 가치와 무관하게 상승한다.
생활필수품의 소비가 증가할 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 노동자 계급도 평소에는 누릴 수 없었던 사치룸을 함께 소비하게 되고 이것도 또한 물가의 상승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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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은 지불능력이 있는 소비 (혹은 소비자)의 부족으로 인해 생겨난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체제에는, 가난한 사람과 도둑놈의 소비를 제외하면, 어떤 다른 지불하는 소비도 알려져 있지 않다. 상품이 판매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상품에 대한 지불능력이 있는 구매자(즉 소비자)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누군가가 노동자계급이 자신이 생산한 것 가운데 너무 적은 부분만 받고 있고 이들의 몫을 늘려주면 (결과적으로 임금이 상승하면) 이 해악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동어반복에 보다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하려고 한다면 그에게는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답변이 될 것이다.
즉 공황은 임금이 전반적으로 상승하고, 노동자 계급이 연간 생산물 가운데 소비용 부근에 대한 자신들의 몫을 보다 많이 받게 되는 바로 그 시기에 준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건전하고 단순한 상식을 가진 흑기사의 관점에서는 거꾸로 바로 그런 시기야말로 공황이 더욱 멀어지는 시기가 될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선의나 악의와는 상관없는 조건 (즉 노동자계급의 그런 호황기를 오직 잠깐 동안만, 그나마도 언제나 공황의 전조로만 허용하는)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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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가치의 획득이 개별 자본가의 유인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단순재생산은 사실상 소비를 목적으로 한다. 즉 잉여가치는 이 경우 궁극적으로 단지 자본가의 개인적 소비에만 사용된다. 단순재생산이 확대된 규모의 모든 연간 재생산 가운데 일부이고, 또한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이 유인은 항상 자기증식 동기를 동반하면서 또한 그것과 대립하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약탈물 (자본가의 잉여가치)을 나누어 갖는 동업자들이 자본가로부터 독립된 소비자로 나타났기에 더욱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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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본가가 화폐를 소비수단에 지출한다면, 그 화폐는 그에게서 없어져버린다.
모든 육신이 가는 소멸의 길을 간 것이다.
그가 그것을 상품과 교환하여 (즉 자신의 상품자본을 통해) 유통에서 끌어낼 경우에만, 그것은 다시 그에게 회수된다.
그의 연간 총상품생산물 (그에게는 상품자본)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 각 요소 (즉 개별상품)의 가치도 그에게는 불변자본가치, 가변자본가치, 그리고 잉여가치로 분해될 수 있다. 따라서 각 상품 (상품생산물의 요소를 구성하는)의 화폐화는 동시에 총상품생산물에 포함된 일정량의 잉여가치의 화폐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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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자본가계급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가계급이 자신의 잉여가치 실현을 위해 (또는 자신의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유통을 위해서)스스로 화폐를 유통시켜야 한다는 명제는 전혀 역설적인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전체 메커니즘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단 두 계급, 즉 자신의 노동력밖에 처분할 것이 없는 노동자계급과 사회적 생산수단과 화폐를 독점하는 자본가계급만 있기 때문이다.
상품 속에 포함된 잉여가치의 실현에 필요한 화폐를 맨 처음에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재원으로 선대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개별 자본가는 단지 구매자로 행동하는 (즉 소비수단의 구입에 화폐를 지출하거나 자신의 생산자본요소(노동력과 생산수단)를 구입하면서 화폐를 선대하는)형태로만 이 선대를 수행한다. 그는 항상 등가와 교환할 때만 화폐를 양도한다.
그는 자신의 상품을 선대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만 화폐를 유통에 선대한다.
두 경우 모두 그는 이들 유통의 출발점으로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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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산물 1과 2의 합계 (즉 생산수단과 소비수단의 합계)는, 사용가치 (구체적으로는 그 현물형태)의 측면에서 보면, 올해 노동의 생산물이지만, 그것은 단지 이 노동이 노동력의 지출 (즉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이 아니라 구체적 유용노동으로 간주될 경우에만 그렇다.
그러나 그것도 단지 생산수단이 살아 있는 노동 (생산수단에 부가되어 그것을 움직이는) 에 의해서만 새로운 생산물 (즉 올해의 생산물)로 전화한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그렇지만 거꾸로 올해의 노동도 독립된 생산수단 (노동수단과 생산재료)이 없이는 생산물로 전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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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 동안 1부문에서 생산되는 가치생산물 (즉 1부문에서 생산되는 가변자본가치 + 잉여가치)은 2부문에서 소비수단으로 재현되는 2부문의 불변자본가치와 같다. 따라서 그것들은 서로 교환되어 현물로 보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소비수단 2의 총가치는 1부문과 2부문의 새로운 가치생산물의 합계와 같다. 혹은 2(c+v+m) = 2(불변자본가치+가변자본가치+잉여가치) = 1(가변자본가치+잉여가치) + 2(가변자본가치+잉여가치) 이다.
즉 소비수단의 총가치는 연간 노동에 의해 ‘가변자본가치 + 잉여가치’의 형태로 생산된 새로운 가치의 합계와 같다.
다른 한편 1의 생산수단의 총가치는 1의 생산수단과 2의 소비수단의 형태로 재현되는 불변자본가치의 합계와 같으며, 따라서 사회의 총생산물 가운데 재현되는 불변자본가치의 합계와 같다.
이 총가치는 1부문의 생산과정 이전에 지출된 4/3노동일과 2부문의 생산과정 이전에 지출된 2/3노동일의 가치표현과 같으며, 따라서 합계 2노동일의 가치표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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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적 총자본의 생산물에서는 이렇게 되지 않는다.
재생산의 모든 물적 요소는 현물형태로 이 생산물의 각 부분을 이루어야만 한다.
소비된 불변자본 부분이 총생산에 의해 보전될 수 있는 경우는, 단지 재현되는 불변자본 부분의 총체가 실제로 불변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수단의 현물형태로 생산물을 통해 재현될 경우뿐이다.
따라서 단순재생산을 가정할 때, 생산물 가운데 생산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의 가치는 사회적 자본의 불변가치 부분과 같아야만 한다.
또한 개별적으로 보면, 자본가가 새로 부가된 노동에 의해 자신의 생산물가치로 생산하는 것은 단지 ‘가변자본 + 잉여가치’뿐이며, 불변가치 부분은 새로 부가된 노동의 구체적인 성격에 의해 생산물로 이전된다.
사회적으로 보면, 사회적 노동일 가운데 생산수단을 생산하는 부분(따라서 생산수단에 새로운 가치를 부가할 뿐만 아니라 그 생산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그것에 이전하는 부분)은 새로운 불변자본 (낡은 생산수단의 형태로 1부문과 2부문에서 소비된 불변자본을 보전해야 하는)이외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단지 생산적 소비에 들어가는 생산물만 생산한다.
그러므로 이 생산물의 모든 가치는 오로지 불변자본으로 새롭게 기능할 수 있는 (즉 현물형태의 불변자본만을 다시 구입할 수 있는)가치일 뿐이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보면 가변자본이나 잉여가치로 분해되지 않는 가치이다.
다른 한편, 사회적 노동일 가운데 소비수단을 생산하는 부분은 사회적 자본에서 어떤 보전 부분도 생산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1부문과 2부문의 가변자본가치와 잉여가치를 실현할 현물형태를 갖춘 생산물만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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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고찰방식에 대해서 말할 때 (즉 사회적 자본의 재생산과 개인적 소비를 모두 포함하는 사회적 총생산물을 고찰할 때), 우리는 프루동이 부르주아 경제학을 모방하면서 저지른 오류처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토대로 한 사회도, 하나의 전제로 고찰할 경우에는, 마치 그것이 갖는 특유의 역사적, 경제적 성격을 상실하는 것처럼 고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총자본가를 대상으로 해야만 한다.
총자본은 모든 개별 자본가들을 합친 주식자본으로 나타난다.
이 주식회사에서는 다른 많은 주식회사들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자신이 투입하는 것은 알지만 자신이 얼마를 끌어낼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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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에 따르면 사회적으로 볼 때 자본은 오직 고정자본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가 고정자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변자본 (즉 생산수단으로 존재하는 가치량)이며, 이 생산수단은 노동수단이나 노동재료 (원료, 반제품, 보조재료 등)를 가리킨다. 그는 가변자본을 유동자본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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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연간 노동 가운데 보다 많은 부분을 생산수단(즉 불변자본)의 생산에 사용하는데, 이 부분은 임금이나 잉여가치의 형태를 통해 수입으로는 분해될 수 없고 단지 자본으로서만 기능할 수 있을 뿐이다.
2)미개인은 활, 화살, 돌망치, 도끼, 바구니 등을 만들면서 자신이 여기에 사용한 시간을 소비수단의 생산에 지출하지 않았고, 단지 생산수단에 대한 자신의 필요만 충족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거기에다 미개인은 시간 낭비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함으로써 심각한 경제적인 죄악을 저지르고, 예컨대 타일러의 설명처럼 때때로 화살 한 개를 완성하는 데 한 달을 모두 소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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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정 동안에 자본가는 가변자본을 주어진 크기의 가치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하며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력으로 수중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는 항상 노동력이 일정 기간 동안 활동하고 나서야 비로소 노동자에게 지불하기 때문에, 그는 ‘노동력이 창출하는 자신의 보전가치 + 잉여가치’를 그가 노동자에게 지불하기 전에 이미 수중에 가지고 있다.
가변자본은 어떤 형태로든 항상 자본가의 수중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수입으로 전환된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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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으로 수취된 화폐가 노동자계급의 수중에서 겪는 여러 번의 형태변화는 가변자본의 형태변화가 아니라, 화폐로 전화된 이 계급의 노동력가치의 형태변화이다.
그것은 마치 노동자가 만든 가치생산물의 전환이 단지 자본가가 소유하는 상품의 전환일 뿐 노동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본가 (그리고 그의 이론적 해설가인 경제학자)는 노동자에게 지불한 화폐가 여전히 자신 (자본가)의 것이라는 망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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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고정자본의 수명이 다하여, 결과적으로 그것이 모든 가치를 생산된 상품에 이전해버려서, 새로이 현물로 보전되어야만 할 때까지의 고정자본 (혹은 그것의 각 요소들)가치의 재산이며 적립 (화폐형태의) 이다.
그러나 이 화폐는 고정자본의 죽어버린 요소를 보전하기 위하여 새로운 요소로 재전화할 때 비로소 그 축장화폐의 형태를 상실하고, 따라서 그때서야 비로소 다시 능동적으로 유통에 의해 매개되는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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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즉각 현물로 보전되지 않고 일단 화폐로 전환되는데, 이 화폐는 고정자본이 현물형태로 갱신될 기한이 도래할 때까지 조금씩 적립되어 결국 총액에 도달하게 된다. 매년 각 개별 사업들 (혹은 산업부문들)에서는 폐기연한에 도달하여 보전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정자본들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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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본가들에게는 고정자본이 전부 현물로 보전되어야 할 시기에 도달해 있고 또 어떤 자본가들에게는 고정자본이 아직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남아 있다. 이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모든 자본가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자신들의 고정자본을 실제로 재생산하지 않고 (즉 현물로 갱신하지 않고, 다시 말해 같은 종류의 새로운 물품으로 교체하지 않고) 그 가치를 계속해서 화폐로 적립해나간다는 것이다. 전자의 부류에 속하는 자본가들은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화폐자본을 가지고 시장에 나타나서, 그것을 일부는 불변자본(고정 및 유동)으로 전화시키고 다른 일부는 노동력(즉 가변자본)으로 전화시킬 때와 완전히 똑같은 상태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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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0c+1,000v+1,000m
2. 2,000c +500v+500m
우리는 방금 2부문이 1부문에 2,000의 상품을 판매하고, 1부문에서 1,800의 상품만 구입한다고 가정하였다.
상품가치 2,000c 속에는 화폐로 적립되어야 하는 마모 보전분 200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가치 2,000c는 1부문의 생산수단과 교환되는 1,800과 화폐 상태로 (1부문에 2,000c를 판매한 후에) 보존되어야 하는 마모 보전분 200으로 나누어진다.
이것을 가치로 나타내면 2,000IIc = 1,800c+200c(d)가 될 것이고, 여기에서 d는 마모분이다.
1.1,000v+1,000m
2. 1,800c +200c(d)
1부문은 노동력에 지불되는 임금으로 노동자의 수중에 들어간 1,000파운드스털링을 가지고 1,000IIc만큼의 소비수단을 구입한다.
2부문은 그 1,000파운드스털링으로 생산수단 1,000Iv를 구입한다.
따라서 자본가 1에게는 화페형태로 자신의 가변자본이 회수되고, 그는 이것을 가지고 다음해에 동일한 가치액의 노동력을 구입 (즉 그들의 생산자본 가운데 가변 부분을 현물로 보전)할 수 있다.
또한 2부문은 선대한 400파운스털링으로 생산수단 Im을 구입하고, Im은 그 400파운드스털링을 소비수단 IIc를 구입한다.
그리하여 2부문이 유통에 선대한 400파운드스털링은 자본가2의 수중으로 돌아오지만 그것은 단지 판매한 상품의 등가일 뿐이다.
1부분은 선대한 400파운드스털링만큼의 소비수단을 구입하고 2부문은 1부문에서 400파운드스털링의 생산수단을 구입한다.
그리하여 이 400파운드스털링은 1부문으로 돌아온다.
이제 남은 것은 1부문에 200m(생산수단의 형태로), 2부문에 200c(d)(소비수단의 형태로)이다.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1부문은 200파운드스털링으로 가치액 200의 소비수단 IIc(d)를 구입한다. 그러나 2부문은 이 200파운드스털링을 그대로 쥐고 있다.
왜냐하면 200c(d)는 마모분을 나타내고, 따라서 곧바로 다시 생산수단으로 전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0Im은 판매될 수 없다.
보전되어야 할 잉여가치 1 가운데 20프로는 실현될 수 없다.
즉 그것은 생산수단의 현물형태에서 소비수단의 현물형태로 전환될 수 없다.
200Im은 어쨌든 결국 마지막에는 2부문의 산업자본가에게 인도되어야 한다.
(중략)
여기에서 알수 있듯이 사회적 재생산과정을 복잡하게 뒤얽힌 구체적인 형태로부터 곧장 분석할 경우 겉으로만 그럴듯한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는 오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 우리의 본래 목적이 아니더라도 - 재산과정을 그 기본형태 (거기에서는 모든 것을 모호하게 만드는 조건들이 제거된다) 속에서 고찰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리하여 재생산과정이 정상일 경우에는 자본가 생산자가 유통에 선대한 화폐가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는 법칙은 200IIc(d)가 1부문이 선대한 화폐에 의해 화폐화한다는 가정을 결정적으로 배제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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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0c+1,000v+1,000m
2. 2,000c +500v+500m
따라서 이 400파운드스털링으로 1부문에서 인출되는 것은 고정자본의 요소들로만 이루어지는 200파운드스털링의 상품들과 2부문 불변자본 가운데 유동 부분의 현물요소만 보전하는 200파운드스털링의 상품들이다.
이제 1부문은 자신의 연간 총상품생산물 가운데 2부문에 판매해야 할 부분을 모두 팔았다. 그러나 그 20프로의 가치 (즉 400파운드 스털링)는 이제 화폐형태로 1부문의 수중에 있다.
그러나 이 화폐는 잉여가치가 화폐로 실현된 것이고 수입으로 소비수단에 지출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1부문은 이 400으로 2부문의 상품가치 400을 구입한다
이리하여 이 화폐는 2부문의 상품을 끌어냄으로써 다시 2부문으로 되돌아온다.
이제 3가지 경우를 가정해보자.
그리고 자본가 2 가운데 고정자본을 현물로 보전하는 부류를 1부분
고정자본의 마모가치를 화폐형태로 적립하는 부류를 2부분으로 부르기로 하자
세 가지 경우는 다음과 같다.
1)2부문의 상품으로 아직 남아 있는 400 가운데 일정량이 1부분과 2부분을 위해 불변자본의 유동 부분 가운데 일정 부분 (가령 절반씩)을 보전해야 하는 경우
2)1부분은 이미 자신의 모든 상품을 판매하였고, 따라서 2부분이 400을 판매해야 하는 경우
3)2부분이 마모분의 가치를 가진 200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판매했을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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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상품의 분배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아직 2부문의 수중에 있는 상품가치 (400c)가운데 100은 1부분이, 300은 2부분이 각각 가지고 있다. 이 300 중에서 200은 마모분을 나타낸다.
이 경우 이제 1부문이 2부문의 상품을 얻기 위해 반환하는 400파운드스털링의 화폐 가운데 300은 처음에 1부분이 지출한 것이다.
즉 200은 고정자본요소를 현물로 1부문에서 구입하면서 투하한 화폐이며,
100은 1부문과의 상품교환을 매개하기 위해 투하한 화폐이다.
반면 2부분은 400의 25프로 (즉 100)만 선대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1부문과의 상품교환을 매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400의 화폐 가운데 300은 1부분이, 100은 2부분이 선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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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400은 다음과 같이 회수된다.
1부분에는 100 (즉 1부분이 선대했던 화폐의 1/3)만 회수된다.
그러나 1부분은 나머지 2/3 대신 200의 가치를 가진 갱신된 고정자본을 가지고 있다. 1부분은 이 200의 가치를 가진 고정자본요소와 교환하여 1부문에 화폐를 주었고 그 뒤에 상품을 주지는 않았다.
이 200과 관련해 1부분은 1부문에 대하여 단지 구매자로만 나타나고 나중에 다시 판매자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 화폐는 1부분으로 회수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회수된다면 1부분은 1부문에서 고정자본요소를 공짜로 받은 셈이 될 것이다. 자신이 선대한 화폐 가운데 이 1/3과 관련해 1부분은 처음에 자신의 불변자본의 유동적 구성 부분에 대한 구매자로 나타났다.
바로 그 화폐로 1부문은 1부분에 100의 가치를 가진 1부분의 나머지 상품을 구입한다. 따라서 이 화폐는 2부문의 1부분으로 다시 흘러들어간다.
왜냐하면 1부분은 구매자로 나타났다가 곧바로 다시 상품판매자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만일 이 화폐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2부문의 1부분은 1부문에게 100만큼의 상품과 교환하여 처음에는 화폐로 100을 주고, 다음에는 상품으로 100을 줌으로써 자신의 상품을 1부문에게 공짜로 준 셈이 될 것이다.
반면 화폐 100을 투하한 2부분에는 300이 화폐로 회수된다.
그중에서 100은 2부분이 구매자로서 처음에 화폐 100을 유통에 투하했다가 판매자로서 그것을 다시 회수한 것이며, 200은 2부분이 200의 가치를 가진 상품의 판매자로만 기능하고 구매자로는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수중에 남은 것이다.
따라서 이 화폐는 1부문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리하여 고정자본의 마모분은 2부문의 1부분이 고정자본요소를 구입하면서 유통에 투하한 화폐에 의해 모두 정산된다.
그러나 이 화폐는 1부분의 화폐가 아니라 1부문의 화폐로 2부분의 수중에 들어간다.
그리고 자본가 2 가운데 고정자본을 현물로 보전하는 부류를 1부분
고정자본의 마모가치를 화폐형태로 적립하는 부류를 2부분으로 부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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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자본의 보전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주의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다.
만일 - 다른 모든 조건 (즉 생산규모는 물론 특히 노동생산성도)이 불변이라고 가정한다면 - IIc의 고정요소가 작년보다 더 많이 소멸되고, 따라서 더 많은 부분이 현물로 갱신되어야 한다면, 고정자본 가운데 아직 소멸과정에 있으면서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일단 화폐로 보전되어야 하는 부분은 같은 비율로 감소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에 따라서 2부문에서 기능하는 고정자본 부분의 총액 (그리고 가치총액)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조건을 수반한다.
첫째, 만일 상품자본 1가운데 IIc의 고정자본요소로 이루어진 부분이 더 커지면 그만큼 IIc의 유동적 구성 부분으로 이루어진 부분은 더 작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IIc를 위한 1부문의 총생산량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부분이 증가하면 다른 부분은 당연히 감소할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가정에 따라 2부문의 총생산량도 역시 변함이 없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의 원료, 반제품, 보조재료 등 (즉 불변자본 2의 유동적 요소)이 감소할 경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둘째, 화폐형태로 회복된 고정자본 IIc가 화폐형태에서 현물형태로 재전화하는 데 필요한 부분보다 더 많이 1부문으로 유입된다.
이 과잉화폐는 상호 간의 상품교환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구매수단으로만 기능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IIc가운데 마모된 가치보전분에 해당하는 상품량 (즉 1부문의 상품이 아니라 1부문의 화폐와 교환되어야할 상품량 2)은 거기에 비례하여 감소할 것이다.
2부분에서 1부문으로 유입되는 화폐 (단순한 구매수단)는 더 늘어갈 것이고, 구매자인 1부문을 상대할 2부문의 상품은 더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Im가운데 더 많은 부분이 - 왜냐하면 Iv는 이미 2부문에서 상품들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 2부문의 상품으로 전환될 수 없어서 화폐형태로 계속 남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의 경우, 즉 2부문의 고정자본 가운데 소멸된 부분의 재생산이 줄어들고 반면 마모분이 늘어나는 경우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리하여 단순재생산인데도 공황 (생산공황)이 발생할 것이다.
요컨대 다른 조건 (특히 생산력과 총노동량, 노동강도)이 불변인 단순재생산에서 소멸해가는 (갱신되어야 하는) 고정자본과 낡은 현물형태로 여전히 계속해서 기능하는 (자신의 마모분을 보전하는 가치만을 생산물에 부과하는) 고정자본 사이의 비율이 불변이라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한편으로는, 재생산되어야 할 유동적 구성 부분의 양은 불변인데 재생산되어야 할 고정 부분의 양은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1부문의 총생산이 증가해야만 하거나 아니면 화폐 관계를 무시하더라도 재생산의 부족이 발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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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무역은 그것이 단순히 자본요소 (그리고 그 가치)만 보전하는 것이 아닐 경우, 단지 모순을 보다 넓은 지역으로 이전하는 (모순의 범위를 보다 넓히는)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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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자본주의적 재생산 형태가 폐지되면, 고정자본 (여기에서는 소비수단의 생산에 기능하는 고정자본) 가운데 소멸해가는 (따라서 현물로 보전되어야 하는) 부분의 크기가 매년 달라진다는 문제만 남는다.
만일 어느 해에 그것이 매우 컸다면 (인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평균 사망률을 초과한다면) 그 다음 해에는 분명히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연간 소비수단 생산에 필요한 원료, 반제품, 보조재료 등의 양이 (다른 조건이 불변이라면) 감소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결국 생산수단의 총생산은 어떤 경우에는 증가하고 어떤 경우에는 감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직 상대적인 과잉생산이 지속됨으로써만 해결될 수가 있다.
한편으로는 고정자본이 당장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고 특히) 원료 등의 재고가 그해에 당장 수요를 초과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특히 생활수단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된다)
이런 종류의 과잉생산은 사회가 자신의 재생산에 필요한 물적 수단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는 그것은 무정부 상태의 한 요소이다.
고정자본에 대한 이런 사례 (단순재생산의 조건하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고정자본과 유동자본 생산의 불비례는 경제학자들이 공황을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근거의 하나이다
그러나 고정자본이 단순히 유지만 되는 경우 (그리고 이미 기능하고 있는 사회적 자본의 단순재생산의 조건에서 생산이 매우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가정할 경우)에도 그런 불비례가 발생할 수 있다는 (또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사실은 그들 경제학자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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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업자는 자신의 상품을 항상 팔아치울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곧바로 교환될 수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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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미에서의 축적 (즉 확대재생산)이 아닌 단순재생산에서도 필연적으로 화폐의 적립(혹은 화폐축장)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매년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고찰을 시작하면서 상정한 가정 (즉 재생산이 시작할 때 상품교환에 상당하는 화폐량이 자본가의 수중에 있다는 가정)이 그것을 통해 해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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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곳곳에서 축적되는 화폐량은 늘어갈 것이고 이 화폐량 가운데 새로운 금 생산이 부가하는 금은 (비록 절대량은 증가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인 비중으로는 점차 감소할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서 투크에 대해 제기된 다음의 반론을 일반적인 관점에서 한 번만 더 살펴보기로 하자. 즉 궁극적으로 유통에 투입되는 모든 화폐의 원천은 자본가계급 자신일 수 밖에 없는데 도대체 모든 자본가가 연간 생산물에서 잉여가치를 화폐형태로 끌어내는 것(즉 그가 유통에 투입한 것보다 더 많은 화폐를 유통에서 끌어내는 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단 말인가?
1)여기에서 필요한 유일한 가정 (즉 일반적으로 연간 재생산량의 각 요소들을 교환하는 데 필요한 화폐가 충분히 존재한다)은 상품가치 가운데 일부가 잉여가치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총생산이 노동자들 자신의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잉여노동이 자본가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유통되는 상품가치의 양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조건이 불변이라면) 이들 상품의 유통에 필요한 화폐량도 똑같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 경우 모두 문제는 결국 이들 상품가치의 총량을 교환하는 데 필요한 화폐가 어디에서 오느냐는 것일 뿐 잉여가치를 화폐화할 화폐가 어디에서 오느냐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가서 말하자면, 개별상품은 모두 c+v+m으로 구성되어 있고, 따라서 총상품량의 유통을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자본 c+v의 유통을 위한 일정량의 화폐가,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가들의 수입(잉여가치) m의 유통을 위한 또 다른 화폐량이 필요하다.
개별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자본가계급 전체의 경우에도 그들이 자본으로 선대하는 화폐는 그들이 수입으로 지출하는 화폐와 다르다.
후자의 화폐는 어디에서 오는가?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자본가계급의 수중에 있는 화폐량 (사회내에 전반적으로 존재하는 화폐총량) 가운데 일부가 자본가의 수입으로 유통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위에서 보았듯이, 새로운 사업체를 설립하는 모든 자본가는 과거에 자신의 생계를 위해 소비수단에 지출했던 화폐를 일단 사업체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자신의 잉여가치를 화폐화하는 데 사용되는 화폐로 도로 낚아 올린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 전체적인 어려움은 다음의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된다.
첫째, 우리가 단지 자본의 유통과 회전만 분석한다면 (즉 자본가를 자본주의적 소비자이자 향락가로서가 아니라, 단지 인격화된 자본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자본가가 끊임없이 잉여가치를 자신의 상품자본 구성요소로서 유통에 투하하는 것은 알 수 있지만 그의 수중에서 수입의 형태를 취하는 화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즉 우리는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소비하기 위해 유통에 투하하는 화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둘째, 자본가계급이 수입의 형태로 일정량의 화폐를 유통에 투하하면, 그것은 마치 그가 연간 총생산물 가운데 그만한 부분에 대한 등가를 지불하는 것처럼 보이고 따라서 이 부분이 잉여가치를 나타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나타내는 잉여생산물은 자본가계급에게 아무런 비용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자본가들은 계급적으로 그것을 공짜로 소유하고 향유하는데 화폐유통은 여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화폐유통이 매개하는 변화는 단지 각 자본가가 자신의 잉여가치를 현물로 소비하는 대신 (대부분 현물로 소비하지 않는다) 사회의 연간 총잉여생산물 가운데에서 자기 몫의 잉여가치에 해당하는 액수만큼 온갖 종류의 상품을 끌어내어 갖는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유통 매커니즘은 자본가계급이 수입을 지출하기 위해 화폐를 유통에 투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화폐를 유통에서 다시 끌어냄으로써 동일한 과정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 (즉 자본가계급이 - 계급적 관점에서 볼 때 - 여전히 잉여가치의 화폐화에 필요한 화폐액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만일 자본가가 자신의 소비재원으로 상품형태의 잉여가치를 상품시장에서 구입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 상품의 구입에 사용된 화폐를 도로 회수하기도 하였다면 그는 명백히 그 상품들을 아무런 등가도 지불하지 않고 유통에서 끌어낸 것이다. 자본가는 이들 상품에 화폐를 지불했지만 그 상품은 그에게 아무런 비용도 물리지 않는 것이다. 만일 내가 1파운드스털링을 주고 어떤 상품을 사는데 그 상품의 판매자가 다시 나에게 1파운드스털링을 잉여생산물 (나에게 아무런 비용도 물리지 않는)로 도로 돌려준다면 나는 분명히 공짜로 그 상품들을 얻은 것이다.
이런 행위가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해도 내가 계속해서 상품을 끌어내고 1파운드스털링을 소유한다 - 내가 상품 구입을 위해 그 1파운드스털링을 일시적으로 타인에게 양도하면서도 - 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도 발생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아무런 비용도 물리지 않았던 잉여가치를 화폐화하여 그 화폐를 다시 손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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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업자본은 사업을 시작할 때 고정식 구성 부분 모두에 대해 한꺼번에 화폐를 유통에 투하하고 그런 다음 이 고정적 구성 부분을 수년간에 걸쳐 매년 연간 생산물의 판매를 통해 조금씩 유통에서 회수해나간다.
따라서 처음에는 유통에서 회수하는 화폐보다 더 많은 화폐가 유통에 투하된다.
이런 과정은 총자본을 현물로 갱신할 때마다 (그리고 수리가 있을 때마다, 즉 고정자본을 조금씩 갱신해나갈 때마다) 반복된다.
그리하여 어떨 때는 유통된 것보다 더 많은 화폐가 유통에서 회수되고 또 어떨때는 그와 정반대의 일이 진행된다.
생산기간이 긴 모든 산업부문에서 자본가 생산자들은 그 기간 동안 일부는 고용된 노동력에 대한 지불을 위해, 또 일부는 소비된 생산수단의 구입을 위해 끊임없이 화폐를 유통에 투하한다. 따라서 생산수단은 직접적으로, 소비수단은 간접적으로 (일부는 그가 지불한 임금을 지출하는 노동자들에 의해, 일부는 자본가 자신의 소비(중단 없이 이루어지는)에 의해) 상품시장에서 (자본가들이 등가의 상품을 시장에 투입하지 않은 채) 회수된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이 유통에 투하한 화폐는 상품가치 (그 속에 포함된 잉여가치도 함께)를 화폐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한 곳에서 주식회사 등이 수행하는 장기간의 사업들 (철도, 운하 등등)의 경우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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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된 (즉 임노동제도가 지배적인) 조건에서는 화폐자본이 분명 주된 역할을 수행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변자본을 선대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임노동제가 발전함에 따라 모든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화하고, 따라서 그것들 전체는 화폐로의 전화를 자신의 운동 가운데 하나의 국면으로 거쳐야만 한다.
유통되는 화폐량은 이들 상품을 화폐로 전화시키기에 충분해야 하고 이 화폐량 가운데 대부분은 임금 (즉 산업자본가가 노동력에 대한 지불을 위해 가변자본의 화폐형태로 선대한 화폐, 그리고 노동자들의 수중에서 대부분 유통수단 (구매수단)으로만 기능하는 화폐)의 형태로 공급된다.
이것은 현물경제(모든 예농제(농노제를 포함)에서 지배적인 형태이며 어느 정도 원시공동체에 가까운 경우 (노예제나 예농제의 경제적 관계가 들어 있든 않든 상관없이)에는 훨씬 더 지배적인)와 정반대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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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자본가들은 노동자와의 거래에서도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것을 더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부를 늘려야 하는 것이다. 훌륭하다!
“그들은 임금을 지불한다. 그리고 이 모든 임금은 자본가들이 임금으로 지불한 비용보다 생산물을 더 비싸게 사가는 이 모든 노동자들의 지출을 통해서 그들에게 회수된다.”
(중략)
그가 자본가에게서 100파운스스털링의 임금을 받는다면 그는 120파운드스털링이 아니라 100파운드스털링어치만 구입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은 잘못된 설명방식이다. 그런데 아직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서 100파운드스털링의 상품을 구입하는데 실제로 그가 손에 넣은 상품은 80파운드스털링어치뿐인 것이다.
이 경우 노동자는 20파운드스털링을 사기당한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해서 사실상 그 가치보다 20% 적게 지불했거나 혹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명목임금을 20% 공제함으로써 20파운드스털링을 번 것이 틀림없다.
(즉 해당 사업의 자본가에게 속한 해당 노동자가 해당 생산 제품을 구매할 경우 잉여가치로 두 번에 걸쳐 자본가에게 사기 당하는 것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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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해서 자본가계급이 그들의 이윤을 벌어들이는 원천은 정상 임금의 공제분을 통해서 (즉 노동력을 그 가치보다 더 적게 지불함으로써, 다시 말해 임노동자의 정상적인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보다 더 적게 지불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 임금이 지불된다면, 산업자본가들은 물론 놀고 먹는 자본가들에게도 이윤을 벌어들일 어떤 원천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중략)
따라서 노동자들의 화폐임금이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계급적 수준에서) 소비수단의 가치로 환원되는 모든 나라에서는 자본가들을 위한 어떤 소비재원이나 축적기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자본가계급을 위한 생존기금은 물론 자본가계급 자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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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공제할 경우에도 자본가가 부를 늘리는 것은, 그가 먼저 노동자에게 100파운드스털링의 화폐를 지불한 다음 이 100을 받고 80파운드스털링어치의 상품을 주기(사실상 80파운드스털링어치의 상품을 그보다 25% 더 많은 100파운드스털링의 화폐액을 통해서 유통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노동자의 생산물 가운데 잉여가치(생산물 가운데 잉여가치를 나타내는 부분)외에 노동자가 마땅히 임금형태로 받았어야 할 생산물의 25%까지도 모두 가져가기 때문이다.
데스튀트가 생각했던 어떤 방식으로도 자본가계급은 수익을 얻을 수 없다.
자본가계급은 임금으로 100파운드스털링을 지불한 다음 이 100파운드스털링을 다시 받고 그 대신 노동자에게 자신의 생산물 가운데 80파운드스털링의 상품가치를 돌려준다.
그러나 다음 거래에서도 자본가계급은 다시 똑같은 과정에 대하여 100파운드스털링을 선대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본가계급은 80파운드스털링의 화폐를 선대하고 거기에 80파운드스털링의 상품을 주는 대신, 100파운드스털링의 화폐를 선대하고 거기에 대해 80파운드스털링의 상품을 주는 쓸모없는 장난을 하는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자본가 계급은 아무런 쓸모 없이 자신의 가변자본의 유통을 위해 끊임없이 25% 더 많은 화폐자본을 계속 선대하는 셈인데 그것이 바로 부를 늘리는 독특한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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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단순하다.
즉 그들의 지대, 이자는 산업자본가들에 의해서 100파운드스털링이라는 화폐로 그들에게 지불된다. 이 100파운드스털링을 가지고 그들(놀고먹는 자본가들)은 소비수단을 직접(혹은 간접)적으로 산업자본가들에게서 구입한다.
즉 그들은 산업자본가들에게 다시 100파운드스털링의 화폐를 지불하고 그들로부터 100파운드스털링어치의 소비수단을 끌어낸다.
산업자본가들이 놀고먹는 자본가들에게 지불한 100파운드스털링의 화폐는 이렇게 하여 모두 회수되었다.
이런 화폐의 회수가 데스튀트가 생각했듯이 산업자본가들의 부를 늘리는 수단인 것일까?
(중략)
이 훌륭한 산업자본가들은, 그들이 서로에게나 노동자들에게 대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놀고먹는 자본가들을 대한다.
즉 모든 상품을 보다 비싸게 (예를 들어 20% 비싸게) 판매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놀고먹는 자본가들이 매년 산업자본가에게서 받는 100파운드스털링 이외의 또 다른 화폐수단을 가지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 산업자본가들은 그들에게 100파운드스털링의 상품가치를, 말하자면 120파운드스털링의 가격에 판매한다.
그리하여 상품을 판매했을 때 그들은 놀고먹는 자본가들에게 지불한 100파운드스털링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이루는 20파운드스털링도 함께 회수한다.
이제 계산이 어떻게 될까?
그들이 자신들의 상품에 대해 부분적으로 지불받은 화폐 100파운드스털링은 그들 자신의 화폐이기 때문에 그들은 상품 100파운드스털링을 공짜로 넘겨주었다.
따라서 그들은 100파운드스털링을 상실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밖에 다시 가치를 넘어서는 초과분의 가격 20파운드스털링을 받았다. 즉 20파운드스털링의 수익을 얻었다.
그 결과 손실은 100파운드스털링에서 80파운드스털링으로 줄었으나 여전히 손해는 손해다. 결코 이익이 아니라 손해다.
놀고먹는 자본가들에게 써먹은 사기는 산업자본가들의 손해를 줄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통해 그들의 부의 감소가 부의 증가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나마 이런 방법은 오래 계속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놀고먹는 자본가들이 매년 화폐를 100파운드스털링만 획득한다면 그들은 매년 120파운드스털링의 화폐를 결코 지불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방법이 등장한다.
즉 산업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놀고 먹는 자본가들에게 지불했던 100파운드스털링의 화폐와 교환하여 80파운드스털링의 가치만 가진 상품을 판매한다.
이 경우에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지대, 이자 등의 형태로 80파운드스털링을 양도한다.
이런 사기를 통해 산업자본가들은 놀고먹는 자본가들에 대한 자신들의 공물을줄였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것은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놀고먹는 자본가는, 가격이 판매자의 의지에 따라 정해진다는 바로 그 논리에 따라, 자신의 토지와 자본에 대해 지금까지의 100파운드스털링 대신에 앞으로 120파운드스털링의 지대와 이윤을 요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훌륭한 분석은 바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그 심오한 사상가에게 전적으로 걸맞는 것이다. 즉 사상가는 한편으로는 애덤 스머스의
“노동은 모든 부의 원천이다.”
라는 말고 산업자본가들이
“자본과 함께 이윤을 재생산하는 노동자들에게 지불하기 위해 자신들의 자본을 사용한다.”
라는 말을 그대로 따랐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자본가들이야말로
“다른 모든 이들을 먹여 살리고 공공의 부를 증가시키며 우리들의 모든 향락수단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사람들”
이며 또한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자본가들이 먹여 살린다고 결론을 내렸다. 특히 그는 그에 대해 노동자들에게 지불되는 화폐는 그들의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생산한 상품의 지불을 통해 자본가들에게 끊임없이 회수되기 때문이라는 기막힌 이유를 갖다 대었다.
“노동자들은 단지 한 손으로 받아서 다른 한 손으로 반환할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소비는 그들을 고용한 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화폐유통에 의해서 매개된 사회적 재생산과 소비에 대해 이처럼 철저하게 해부한 다음 데스튀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이것이 곧 부의 영원한 운동 (유통)을 완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하나의 순환으로서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생산이 완료되는 지점이다.”
대단히 뛰어난 문필가이자 프랑스학술원과 필라델피아 철학협회의 회원이며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상 속류경제학자들 가운데 군계일학이기도 했던 데스튀트는 마침내 사회적 과정의 진행을 서술하면서 그가 보여준 놀랄 만한 명석함 (즉 연구대상을 환하게 비춰준 명석함)에 대해서 독자들이 경탄하도록 만들면서, 친절하게도 이 환한 빛들이 모두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도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원문으로 직접 읽어봐야만 한다.
“부의 소비에 관한 이런 고찰방식이 부의 생산과 분배에 관해 우리가 말한 것들과 모두 어떻게 일치하는지,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사회 전체의 운동을 얼마나 명료하게 밝혀주는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일치와 이런 명료함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진리를 찾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것은 거울의 작용을 생각나게 하는데, 즉 거울 앞에서 올바른 위치에 서게 되면 사물이 명료하고 올바른 모양으로 보이지만, 거울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서거나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거울 속에서 헝클어지고 비틀어진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완전한 행복에 빠진 부르주아의 백치증을 목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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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화폐형태로 적립된 잉여가치는, 그것이 결코 새로 추가되는 사회적 부는 아닌데도, 적립된 목적 때문에 새로운 잠재적인 화폐자본을 나타낸다.
상품을 판매한 다음 곧바로 구매를 하지 않음으로써 화폐는 유통에서 회수되어 축장화폐로 저장된다. 그러므로 이런 행위가 일반적인 형태로 (사회 전반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구매자들이 어디에서 나와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과정에서는 - 모든 개별 자본이 축적과정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은 일반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모두가 화폐를 축장하기 위해 판매만 하려고 하고 구매는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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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생산물의 계속적인 생산은 그의 화폐축장의 전제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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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자본 IIc의 주기적 갱신은 (총자본가치 IIc는 I(v+m)의 가치를 가진 요소들과 교환된다) 한편으로는 화폐형태에서 현물형태로 재전화하는 IIc의 고정 부분의 단순구매와 그만큼의 IIc의 단순판매를 전제로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IIc 쪽에서의 단순판매 (즉 IIc 가운데 화폐로 적립된 고정(마모)가치 부분의 판매)와 그만큼의 Im의 단순구매를 전제로 한다.
이 교환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IIc 쪽의 단순구매가 가치의 크기에서 IIc 쪽의 단순판매와 같고, 마찬가지로 IIc의 1부분에 대한 Im의 2부분에서의 단순구매와 같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재생산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단순재생산에서는 한쪽의 단순구매가 다른 한쪽의 단순판매에 의해 상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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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생산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형태라는 사실은, 이미 화폐가 그 속에서 유통수단뿐만 아니라 화폐자본의 역할도 수행한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또한 그 화폐가
이 생산양식에 특유한 조건, 즉 정상적인 교환 (즉 재생산 (단순재생산이든 확대재생산이든)의 정상적인 진행)을 위한 조건을 만들어내고, 이 조건들은 다시 (이 생산의 자연발생적인 모습에서는 균형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우연일 뿐이기 때문에)그만큼 재생산의 비정상적인 진행조건 (즉 공황의 가능성)으로 전환한다는 사실을 모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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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재생산에서 확대재생산으로 이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1부문의 생산이, 2부문을 위한 불변자변요소는 더 적게 생산하면서 1부문을 위한 불변자본요소는 그만큼 더 많이 제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이행은 항상 상당한 어려움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1부문의 생산물 가운데 상당후가 두 부문에서 모두 생산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비교적 쉽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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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 나라에서 이미 기능하고 있는 생산자본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력을 포함하여)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한 노동생산력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와 함께 생산수단의 생산을 급속하게 확대하기 위한 기술수단도 발전하면 할수록), 그리하여 잉여생산물의 크기가 그 가치와 현물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에서 모두 더욱 커지면 커질수록, 수중에 잉여생산물의 형태로 존재하는 잠재적인 추가적 생산자본과 화폐로 전화된 잉여생산물의 크기 (즉 수중에 있는 잠재적인 추가 화폐자본의 크기)도 더욱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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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인 화폐자본으로 적립되어가는 이 잉여가치를 수입이나 이윤으로 이용하려는 열망은 신용제도와 유가증권을 토해서 비로소 그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그것들을 통해 화폐자본은 또 다른 형태로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의 진행과 맹렬한 발전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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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화폐량도 많아야 하는데 그것은 다음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자본주의적 생산에서는 모든 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즉 화폐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는 상품자본의 양과 그 가치크기가 절대적으로 물론
상대적으로도 훨씬 더 빨리 증가하기 때문이다.
셋째, 계속 팽창해가는 가변자본은 항상 화폐자본으로 전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새로운 화폐자본의 형성은 생산의 확대와 보조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생산이 확대되는 만큼 축장화폐의 재료도 더 많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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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신용 메커니즘은 온갖 조작과 방법, 그리고 기술적인 장치 등을 이용해 현실의 금속화폐 유통을 상대적으로 계속해서 최소한의 수준으로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데, 바로 이런 것들과 함께 전체 신용 메커니즘의 인위적인 조작 가능성과 그것의 정상적인 진행을 교란할 가능성도 그만큼 증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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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금속화폐의 유통을 가장 단순하고 본원적인 형태로 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화폐의 유출과 회수, 차액 부분의 정산 (즉 신용제도에서 화폐유통의 진행을 의식적으로 규제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모든 계기)이 신용제도와 독립된 것으로 나타나고, 문제가 사후에 조정된 형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본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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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는 잉여가치 가운데 일부분만 수입으로 지출되고 다른 일부분은 자본으로 전화한다. 현실에서의 축적은 이것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
축적이 소비를 희생시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질과 모순된 허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목적과 추동력이 잉여가치의 획득과 그것의 자본화(즉 축적)이 아니라 소비에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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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가 자신의 잉여생산물 가치를 소비수단에 지출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잉여생산물을 생산적으로 소비할 수는 (즉 자신의 생산자본에 합체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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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재생산 (여기에서는 단지 보다 큰 자본투하로 운영되는 생산을 의미할 뿐이다)이 생산물의 절대적 크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확대재생산은 상품량이
주어져 있을 때 주어진 생산물의 각 요소 편성 (혹은 용도)의 차이를 전제하는 것일 뿐이고 따라서 가치량에서는 단순재생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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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단순재생산 표식
1.4000c+1000v+1000m=6000
2.2000c+500v+500m=3000
합계 = 9000
B.확대재생산의 출발 표식
1.4000c+1000v+1000m=6000
2.1500c+750v+750m=3000
합계 = 9000
표식 B에서 1부문 잉여가치의 1/2이 축적된다고 가정하면,
일단 1부문의 1000v+500m은 2부문의 1500c에 의해 대체된다.
그러면 1부문에는 4000c+500m만 남게 되는데 500m이 바로 축적되는 부분이다.
2부문의 1500c에 의한 1부문의 1000v+500m의 대체는 단순재생산의 한 과정이다. 1부문의 500m 가운데 400은 불변자본으로, 100은 가변자본으로 전화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400m은 그대로 1부문의 고정자본에 합체될 수 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4400c+1000v+100m (이 100m은 100v로 전화되어야 한다)
2부문 쪽에서는 축적을 목적으로 1부문에서 100m을 구매하고 이것은 이제 2부문에 불변자본을 형성하고, 반면 2부문이 여기에 지불한 화폐 100은 1부분에 추가 가변자본의 화폐형태로 전화한다.
그리하여 1부문의 자본은 다음과 같이 된다.
4400c+1100v(이 후자는 화폐) =5500
2부문의 불변자본은 이제 1600이다. 2부문은 이것을 운용하기 위해 추가로 화폐 50을 새로운 노동력의 구입에 투입해야만 하고, 따라서 2부문의 가변자본은 750에서 800으로 증가한다.
2부문의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확대된 부분 (합계 150)은 2부문의 잉여가치에서 조달된다. 따라서 자본가 2의 연간 생산물은 이제 다음과 같이 배분된다.
1600c+800v+600m=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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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축적을 목적으로 변경된 새로운 편성은 다음과 같다.
1.4400c+1100v+500m=6000
2.1600c+800v+600m=3000
합계 = 9000
(중략)
그런데 현실의 축적이 이것을 토대로 이루어진다면, 다음 해 말에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1.4400c+1100v+1100m=6600
2.1600c+800v+800m=3200
합계 = 9800
==
이와 관련해 덧붙여 말해둘 것이 있다. 즉 자본가와 그들의 언론은 노동력이 자신들의 화폐를 지출하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노동력이 이 화폐를 실현하는 상품 2와 관련하여 종종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면서 자본가들은 예를 들어 워싱턴 주재 영국 대사관의 서기관인 드리먼드처럼 철학과 문학, 그리고 박애를 들먹이곤 한다.
‘네이션’은 1879년 10월에 드리먼드의 흥미있는 논설을 실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노동자들은 문화적으로 발명의 진보에 보조를 맞출 수 없다. 많은 것들을 새롭게 만나긴 하지만 그 사용법을 몰라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는 것이 많다.
노동자들이 그들만큼 수입을 올리는 변호사, 목사, 의사들과 똑같은 수준의 안락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들을 합리적이고 건전한 방법으로 소비자로 끌어올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모든 열망은 자신의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 이상을 넘지 못하고, 선동가들도 그들의 정신적 도덕적 능력을
개선하여 그들의 상태를 끌어올리는 문제보다 노동시간의 단축 문제에 더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합리적이고 건전한 방법 (즉 정신적, 도덕적 능력의 진보를 통해 노동자들의 상태를 끌어올리고 그들을 합리적 소비자로 만드는 바로 그 방법)의 비밀은 장시간 노동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자본가의 상품에 대한 합리적 소비자가 되기 위해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그런데 선동가들이 이것을 방해하고 있다!)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들이 비합리적이고 건강을 해치는 방식으로 소비하도록 허용하는 데서 시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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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인하와 장시간 노동이야말로 노동자를 당당한 합리적 소비자로 끌어올리고 문화와 발명의 진보가 노동자들에게 쏟아놓은 많은 발명들을 위한 시장을 만들어내는 합리적이고 건전한 방법의 핵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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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에서는 뭣보다도 먼저 축적률이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1부문의 축적률이 1부문의 잉여가치의 50프로이고 연도가 바뀌어도 축적률은 불변이라고 가정하였다.
단, 이 축적된 자본이 가변자본과 불볍자본으로 분할되는 비율만은 변동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 경우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1)1부문의 가변자본가치 + 1부문의 잉여가치의 50프로 = 2부문의 불변자본가치이고 따라서 2부문의 불변자본가치는 1부문의 가변자본가치와 1부문의 잉여가치의 합보다 작다. 이것은 항상 그래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1부문의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2)1부문의 가변자본가치 + 1부문의 잉여가치의 50프로가 2부문의 불변자본가치보다 크다. 이 경우에는 이 차액만큼 2부문의 잉여가치 가운데 일부가 2부문의 불변자본가치에 추가되어 그 총액이 1부문의 가변자본가치와 1부문의 잉여가치의 합과 갑도록 보전이 이루어진다.
이 경우의 경환은 2부문에서 불변자본의 단순재생산이 아니라 이미 축적(즉 2부문의 잉여생산물 가운데 1부문의 생산수단과 교환되는 부분만큼 2부문의 불변자본가치가 증가하는 것)이다.
이 증가는 동시에 거기에 따른 2부문의 가변자본의 증가 (2부문의 잉여생산물로부터 조달되는)를 포함한다.
3)1부문의 가변자본가치 + 1부문의 잉여가치의 50프로가 2부문의 불변자본가치보다 작다. 이 경우 2부문은 교환을 통해 자신의 불변자본을 완전히 재생산하지 못하고 부족분을 1부문에서 매입하여 보전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 2부문의 가변자본이 추가로 축적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2부문의 불변자본은 양적으로 위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겨우 본래의 크기로 완전히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 교환을 통해서 자본가 1가운데 추가 화폐자본을 적립한 자본가는 이미 그만큼 축적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