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묘사에서 시작해서 진술로 끝난다고 합니다.
< 진술과 묘사의 어울림 >
진술형의 시에도 묘사가 사용된다. 시적 진술을 이끌어나가는 과정에 서경적 요소나 서사적 요소, 심상적 요소가 필요할 때나, 대상을 구체화하여 들려주고 싶을 때 묘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진술이나 묘사만으로 이루어진 시는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묘사형의 문장에 진술을 섞어 쓰는 연습을 하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
-묘사와 진술로 된 작품 읽기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산다는 것이 때론/한 두릅의 굴비 한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
- 곽재구, 「사평역에서」
< 일상언어와 시의 언어 >
I.A. 리처즈에 따르면 언어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고 본다.
<정서적 용법에 의한 언어> 즉 시의 언어와, <과학적 용법에 의한 언어>가 그것이다. 시의 언어는 관련대상을 지시하는데 효과적인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정서를 빚어낼 수 있는 가를 염두에 두고 쓰여 질 뿐이다.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일상 언어는 그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인데, 리처즈는 이를 진술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시에서는 말이나 문장형태를 과학에서처럼 증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시의 언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관련대상의 적절한 지시가 아니라 충동과 태도를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일이 되는데, 이것을 의사진술이라고 명명한다.
리처즈가 말하는 진술과 의사진술의 구별을 좀 더 명확히 해두기 위해서,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의 뜻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리처즈는 관련대상 내지 사실에 부합하기를 기하면서 쓰이는 언어를 진술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시의 언어는 그와는 다른 입장에서 쓰인 것이기 때문에 의사진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예를 들어 <나무>, <강물>, <학교 건물>, <법령>, <제도>는 사실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추고 있거나 문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갖게 되는 기분이나 감정은 <나무>나 <강물>, <학교 건물>처럼 뚜렷한 윤곽으로 나타나는 실체가 아니다. <법령>이나 <제도>처럼 그 의미 내용이 정확하게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혀 없다고 하지도 못할 뿐더러, 기분이나 감정은 엄연한 사실이다. 의사진술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 관계되는 언어형태이다.
* 진술하는 단계
'무엇을 말하는 단계'가 묘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하는 단계가 진술이다. 서술이나 묘사가 객관적인 것이라면 진술은 주관적이고 철학적인 것을 포용한다. 배롱나무 꽃의 아름다움을 나열하면 설명이나 묘사가 되지만 그 배롱나무의 꽃 이미지가 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말하는 단계가 진술이다. 진술의 단계부터 시라고 봐 줄 수는 있다.
< 감정적 진술과 감정환기적 진술 >
1) 개요
① 시는 주관적(감정적, 정서적) 진실의 표현이다.
(이성 - 객관적, 합리적, 보편적. 감정 - 주관적, 직관적, 순간적.)
② 시는 고조된 감정의 함축적 표현이다.
2) 감정적 진술
① 감정을 직접 드러내 보고하거나 설명한다.
② 전달적이고 직접적이며 일방적이고 강제적이다. - 산문 영역.
3) 감정환기적 진술
①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청자(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환기(느끼게) 시킨다.
② 의미생성적이고 간접적이며 다가적(多價的)이고 자율적이다. - 시 영역.
③ 애매한 진술이다.
'감정이 드러난 시는 실패한 시 이지만
자기 주장이 없는 시는 죽은 시'라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 묘사시와 진술시의 차이점 >
시의 초보자임을 금방 알 수 있는 글들의 구분법은 간단하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쓴 글들은 거의가 초보자들이 쓴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사물을 본 대로 느낀 대로 쓴 것, 인간사에서 누구나 겪었음직한 일상사를 써 놓은 것이 시가 된다면야 우리가 무슨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글은 보통 서술에 머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일기와 같은 것이다.
시는 본 것이나 느낀 것에다 시적인 정서와 시적인 언어, 언어 뒤에 숨어있는 의미를 조합하여 감동을 창조하는 말로 그리는 그림이다.
또한 이 말 그림은 다른 사람이 똑같은 표현을 한 적이 없는 것이어야 시로서의 생명과 감동이 더하게 된다.
현대 시에서의 서술(敍述)이란 생각이나 사건을 차례대로 말하는 것인데 묘사(描寫)와 비슷한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서술과 묘사에는 시적 화자(話者/진술하는 사람)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에서 자기 주장이 없는 약점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감정이 드러난 시는 실패한 시 이지만 자기 주장이 없는 시는 죽은 시'라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시적 화자가 없다는 것은 시에 진술이 없다는 뜻이다.
시의 전개는 진술을 하기 위해 묘사를 하는 것인데, 묘사는 사진과 같은 것이라면 진술은 나의 생각이 담겨있는 말로 그린 그림이다.
진술에는 자기 주장, 즉 자기 철학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가 더 깊어지도록 하려면 다의적(多義的) 진술을 넣을 수 있어야 비로소 시를 잘 쓰는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묘사만으로도 시는 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묘사는 정물화와 같고 진술이 들어간 시는 작가의 생각을 곳곳에 숨겨놓은 추상화 같은 것이다.
묘사시와 진술시의 차이점을 비교해보자.
낡고 외진 첨탑 끝에 빨래가
위험하게 널려 있다
그곳에도 누가 살고 있는지
깨끗한 햇빛 두어 벌이
집게에 걸려 펄럭인다
슬픔이 한껏 숨어 있는지
하얀 옥양목 같은 하늘을
더욱 팽팽하게 늘인다
주교단 회의가 없는 날이면
텅 빈 돌계단 위에 야윈 고무나무들이
무릎 꿇고 황공한 듯 두 손을 모은다
바람이 간혹 불어오고
내 등 뒤로 비수처럼 들이댄
무섭도록 짙푸른 하늘.
- 노향림, <어떤 개인 날>전문
위 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묘사 시인으로 꼽히는 노향림 시인의 시다. 송재학, 김기택 시인과 더불어 묘사시의 전형을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은 진술시 두 편이다.
안 가고 보지 않아도
뒤안의 목단꽃은
내 발 아래 뚝뚝 떨어지는데
해 지고 산그늘 내리면
차마 뒤안에 나는 못 가오
행여, 행여나
나 볼 때 꽃잎이라도
내 발 아래 뚝뚝 떨어진다면
참말로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 꽃 본다요
두 눈 뜨고 그 꽃 못 보오
그 꼴 나는 못 보오
- 김용택, <그 꽃 못 보오>전문
1
정충보다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휴지에 싸서 더럽기 그지없는 쓰레기통에
냄새나는 무책임한 하수구에
때로는 변기속에 머리를 처박고
죽음의 유영을 할 것이다
폐기된 욕망의 찌꺼기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법
의심하지 마라
세상에서 가장 큰 쓰레기 통이
그대 머리 위에 있음을
2
정충보다 안락한 곳에 놓이는 것도 없을 것이다
따뜻한 양수 속에
자잘한 물방울들이
이유도 없이 뽀글거리며
산소를 터뜨려 주는 어머니의 자궁,
골고다의 언덕보다 단단한 골반이
생명을 보장하는 그곳
태고의 미역줄기들이 하염없이 떠도는 그곳
따서 먹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그곳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한 몸뚱어리를
안심하고 터억 맡길 수 있는 그곳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깊은 잠을 잘 수 있는 그곳
3
봄비를 맞으면서
정충처럼 남산을 걸어갈 때
나는 보았다
하늘 아래 가장 많은 십자가들이 반짝이는 서울의 붉은 밤을. 신생의 아침은 혼돈 속에 오는 것. 세상은 좀더 썩어야 할 것이다. 역사도 사랑도 이데올로기도 좀더 썩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썩을 것이 없을 때, 혼돈의 종결자가 더 이상 두드릴 배신의 뒤통수가 없을 때, 신생의 아침이 정충처럼 꿈틀거리며 서울의 자궁을 두드릴 것이다
아,
어느 님이 버리셨나
하루가 천 날 같은,
천 날이 하루 같은, 혼돈의 꽃다발을…….
- 원구식, <서울야곡>전문
두 종류의 시를 비교해 보면 묘사와 진술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묘사도 시적 감성을 잘 입히면 좋은 시로 기억 될 수는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시단엔 넘쳐나는 시인으로 인하여 다층적, 중첩적, 자신의 철학을 내포하지 않은 시는 살아남기 어려운 구조로 가고 있다는점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위 김용택 시인의 시는 전달하려는 내용과 느낌을 시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꽃은 피었을 때는 아름답지만 낙화가 되어 바닥에 뒹굴다가 사람에게 짓밟히는 가엾은 존재가 될 때면, 그 초라한 모습이 민망하여 차라리 보지 않겠다는 시인은, 꽃이라는 대상의 관찰을 통해 자기의 생각, 생명 철학적 사상을 담아내고 있는데 이런 것이 바로 진술이다.
본 대로 느낀 대로 쓴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형상화를 통해 시적인 짜임새가 단단하고 감흥을 불러오는 자리에 놓이게 하는 이런 진술의 기법은 시 창작에서 꼭 익혀야할 기법이다.
원구식 시인의 시는 좀더 입체적이고 다층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시는 서정적이면서도 현대시가 요구하고 있는 사유(思惟)의 깊고 넓은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데, 가장 더러운 곳에 버려지는 것이 가장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역설, 혼돈스런 서울의 밤은 더 타락할 것이고 도저히 더 썩을 것이 없을 때, 결국 신생의 아침이 어머니의 자궁에 착상하듯 올 것이라는 광야의 소리처럼 예언되고 있다. 시인은 시대의 선각자이자 예언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렇게 말의 덩어리를 형상화 시킨 중층묘사와 철학적 진술은 산속 옹달샘에서 물이 솟아나듯 퍼내어도 또 새로운 맛으로 시가 고이게 되는 것이다.
-이어산, <생명시 운동>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