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22 /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막10:32-40)
프랑스의 카르멜 수도회에 로렌스라고 하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정식 수도사는 아니었고 수도원의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고 식기를 설거지하는 일만 했던 평수사였지만 정식 수도사들을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식사를 준비했고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항상 흐뭇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기도 하기를 쉬지 않았는데 그의 제목은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 이 부엌이 천국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힘든 수도 생활로 지친 수도사들이 식당에 들어서기만 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모든 수도사가 매일 식당에 갈 때마다 그런 감동을 느끼다 보니 언제부턴가 로렌스가 일하는 식당은 수도원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가 되게 되었습니다.
이유가 뭐였을까요? 그곳의 위치가 특별히 좋아서 신기한 영적 기운이라도 흐른 걸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 영혼이 자기가 있는 부엌이 천국 되기를 기도하면서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며 헌신하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이 그가 있는 부엌에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유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오직 하나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랬기에 로렌스 신부가 자기가 있는 부엌이 천국이 되기를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자 그 자리에 찾아와 계셔 주셨기에 그가 있는 곳이 천국이 될 수 있었던 거고 식당이 천국이 되다 보니 누구라도 그 안에 들어서면 천국의 평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것이, 내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어떨까요?
천국일까요? 지옥일까요?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나 계시기에 내가 있는 자리는 늘 천국입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거기는 사탄도 활동하는 곳이기에 내가 있는 자리는 언제라도 지옥이 될 위험이 항상 있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내가 사는 자리가 천국일지 지옥일지는 ‘나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내가 사는 모든 곳을 천국 같은 곳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천국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따라서 내가 천국에서 사는 비결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서 내가 살아야 합니다.
혹 기억하시나요? 예전엔 노방전도 하시는 분들에게서 많이 보았던 문구지만, 원조는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최권능 목사님이신데, 그분의 평생 신조이자 전도 구호가 이거였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자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신 자리가 아니라면 어떤 모양으로든 인생 지옥을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에서의 좋은 자리는 누구라도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갈등과 다툼이 많아집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싸우는 이유를 봐도 대부분이 자리다툼이나 욕심 다툼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제자들 사이에서조차 그런 다툼의 모습이 있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왜 반목하는가를 보니 결국엔 서로 좋은 자리를 얻겠다고 하다가 다투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도 사람인지라 그럴 수도 있겠다 할지라도 문제는 좋은 자리를 얻겠다고 예수님 앞에서조차 그렇게 반목하던 그들이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는 다들 어디에 있었던가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앉으려고 싸우는 자리는 언제나 만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과 함께 있길 원하시는 자리는 항상 비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계시는 자리는 세상적으로 좋은 자리가 아닐 수도 있고, 내가 원했던 자리가 아닌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믿는다는 이유로 포기해야 할 것도 많고, 참아야 할 것도 많고, 손해 볼 수도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37절에서도 보면 좋은 자리를 요청하는 요한 형제를 향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냐?”라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시는 잔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잔만을 마시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젠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란 것을. 진정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리는 당연히 복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닌 말로 주는 이가 없는데 어디서 뭘 받겠단 말입니까?
이런 이유로 인생을 살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린 어디, 어떤 곳에 있든 나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시는 삶을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을 했느냐보다 무엇이 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무엇을 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뭔가를 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는 사람부터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세상 것은 없어도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예수님 없이 세상 것만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지옥 같은 내 인생에도 예수님께서 내게 있어야 할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보면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믿는다.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혼자서만 믿고, 혼자서만 기도하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예를 들어 정한수 앞에서 비나이다 하는 이미지를 떠올려 보세요.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은 없고 혼자서만 빌고 비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점검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일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내가 듣고, 또 내가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래서 내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순간만큼은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동시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자 하는 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굳이 순서를 정해 말씀드리자면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전에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먼저 행하는 것이 은혜받는 비결입니다.
두 번째로 인생을 천국 같은 자리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를 믿어야만 합니다.
이단 중에 여호와증인에서는 말씀에는 다 짝이 있어 성경을 다 읽지 않아도 여기저기에서 필요한 짝만 찾아서 읽으면 된다면서 증거 본문으로 이사야 34:16을 인용하는데,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아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그들 주장대로 말씀에 짝이 있다면 성경을 굳이 66권으로 만들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그냥 짝 맞는 성구들만 추려서 모아놓으면 들고 다니기도 편하고 일독하기도 쉬울 텐데요.
그런 게 아닙니다. 이사야 34장은 장차 있을 만국을 향한 여호와의 진노와 심판을 예언하는 중에 에돔 심판을 예로 들면서 앞으로 에돔 땅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될 것이며 사람 대신 각종 짐승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성경은 그때 에돔에 있게 될 각종 짐승을 열거하는 중에 이 짐승들이 서로 짝이 없는 것이 없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이들을 창조하셨고 그의 영으로 모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님은 왜 에돔 땅을 차지할 짐승들을 굳이 짝이 있게 모으셨을까요?
짝이 있다고 함은 번식할 거라는 의미입니다. 즉 짐승의 수가 계속 늘어남으로써 에돔 땅은 영구히 짐승들의 소굴일 뿐 다시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는 무서운 심판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사야 34장의 말씀이 이런 내용인데 여호와증인에서는 말씀을 짜깁기하여 자기들 입맛에 맞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말씀을 말씀대로 믿지 않은 여호와 증인은 이단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같은 이치로 말씀을 말씀대로 믿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불신자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임할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도 요한 형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35절에서 보듯이 오로지 자기들이 원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을 뿐입니다.
우린 어떤가요? 확인차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날 위해 믿는 겁니까? 예수님을 위해 믿는 겁니까?
중요한 내용입니다. 꼭 명심하세요.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과 나. 둘 다를 위해 믿는 겁니다. 그럼에도 날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거라고 오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잘못된 겁니다. 날 위해 믿는 것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세상엔 온갖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 안에서 사람들은 ‘날 위해 믿는 믿음’을 믿습니다. 쉽게 말해 그들의 믿음은 날 위해 신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는 게 믿음인 줄로 아는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나만을 위해서 믿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위함과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보면 요한 형제는 예수님을 종교 교주인 양 대하고 있습니다. 즉 나를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본문 40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우선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가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질 믿음은 하나님이 얻게 하실 때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나도 받을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주실 때 나도 얻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 6:33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앞에 나온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믿어야 할 부분이라면 뒤에 이어지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이 우리가 나를 위해 믿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는 것은 금방 알겠는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건 어떻게 하라는 건지요?
답을 구하기 전에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예수님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못 믿게 하는 데 목적이 있으실까요? 믿게 하는 데 목적이 있으실까요?
당연히 믿게 하는 데 목적이 있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예수님은 우리가 쉽게 믿게 하실까요? 어렵고 힘들게 믿게 하실까요?
쉽게 믿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며 세상에서 어렵고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십자가는 예수님이 대신 져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은 거창하거나 어려운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을 사는 나의 모습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믿음의 삶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 확인해야 할 것이, 우리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도 요한이 요한삼서 2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했던 축복의 권면을 생각하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무릇 성도라면 육신이 잘 되기를 구하기 전에 먼저 영혼이 잘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때 영혼이 잘 된다고 하는 것은 나 역시 매사에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할 때 하나님도 나 때문에 기뻐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우리 믿음은 하나님을 위해 믿는 것인 동시에 나를 믿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내게 응답하실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은 내게서 영광 받으실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자면, 실화인지는 몰라도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한 교회에 존이라는 이름의 믿음 좋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성가대에서 사역했고, 총각임에도 교회학교 부장으로 봉사했으며, 각종 선교회의 임원으로도 충성과 헌신을 다하는 교인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런 그를 위해 늘 축복기도를 해줬으며 특히 그가 막 시작하는 사업을 위해서도 많은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이렇듯 목사님 기도도 있었고 본인의 믿음과 기도로 인해 그는 하는 사업마다 번창하여 십일조가 그 당시에도 한 주일에 몇천 불씩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이후부터였습니다.
벌여 놓은 사업이 너무 바쁘다 보니 그간 교회에서 맡았던 일들을 하나둘씩 그만둬야 했고 ,다른 도시에 지점을 내다보니 출장도 잦아져서 자연스레 주일 성수는 물론이고 본 교회 출석과 봉사도 거의 못 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수입은 늘어나는 데도 십일조는 간신히 현상 유지만 하는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하루는 목사님이 심방을 가서 권면을 했습니다. “존, 나는 자네를 걱정하고 있네. 자네는 예배에 계속 불참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일에도 흥미를 잃어가고 있고 온전한 십일조도 못하고 있네.”라고 하자 존은 “목사님, 한 주일에 몇백 불도 많은 돈인데 그만큼 십일조 하면 됐지, 뭘 더 하라 하십니까? 게디기 사업이 너무 바빠 주일을 꼬박꼬박 지키기가 힘이 드네요.”라고 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을 알겠다고 하며 함께 기도하자고 하시더니 기도하기를 “사랑하는 주님, 주께서 존에게 지나친 번영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너무 많은 사업을 주셨습니다. 존은 너무 성공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존으로 하여금 그렇게도 당신을 위해 충성스럽게 일하던 옛날의 믿음으로 되돌아오도록 그의 사업의 얼마를 빼앗아 가 주시고 그의 영혼을 위하여 상점 몇 개는 문을 닫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다음이 어땠을까요? 목사님이 기도를 마치고 나자 존은 눈물로 회개했으며 존의 요청으로 목사님은 다시 용서의 중보기도를 드려주었다고 합니다.
인생에서는 육신의 일보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자니 어찌해야 할까요?
흔히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다가 안 되면 ‘몸으로라도 때운다’라고들 하는데, 믿음이 그렇습니다. 생각이 많고 계획이 많고 계산이 많으면 믿기 힘듭니다. 그래서 믿음 중에 가장 좋은 믿음은 ‘몸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라는 복음성가의 5절 끝 가사를 보면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고 하는 가사가 나옵니다.
진정한 효도는 100통의 전화를 드리는 것보다 단 한 번일지라도 직접 찾아 뵙는 것을 부모는 더 기뻐하듯이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때론 가진 게 없고 드릴 게 없고 할 게 없다 할지라도 속된 말로 여러분이라면 몸으로 때우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도 드리러 나오고 기도의 무릎도 꿇고 필요하면 금식도 하고 전도며 봉사며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믿음을 하나님께 보이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린 하나님이 복 주실 때가 언제인 줄 알고 준비했다가 받을 건가요?
혹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에게 응답하실 시간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응답받을 때가 언제쯤인지를 여러분은 알고 계시나요?
아무도 모릅니다. 모르기에 우리에겐 하나님이 언제 주시든 즉각 받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니 예수님이 비유로 드신 ‘열 처녀 비유’에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때와 시간은 모를지라도 우리가 매 순간 믿음으로 준비되어 있고 기도하면서 기다림으로 인해 결국엔 하나님이 준비하셔서 얻게 하시는 그 복을 나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런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복을 받아 하나님이 함께 계셔 주시는 천국 같은 나날과 자리에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