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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향기 스크랩 ☞ 중독에서 벗어나는 비결은 무엇인가?
blessgirl 추천 0 조회 13 08.09.05 16: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 세상에는 참 중독이 많다.

묶임이 많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리고 후회하면서도 계속 같은 것을 반복하는

행위 말이다.

로마서 7장에 언급된 말씀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는 말씀은

곧 중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좋아서 화를 내는 사람이 있겠는가?

좋아서 죄를 짓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들 알기는 알면서도 그것이 제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노예처럼 산다.

이것이 중독자의 삶이다.


  사실 이렇게 중독.. 하고 이야기하면 알콜 중독이나 도박 중독같이

심각한 증상의 중독을 흔히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들의 상태를 연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심각한 중독 외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중독과

묶임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또한 동일한 행동을 되풀이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런 증상이 오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면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인터넷 바둑 사이트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사이버 머니에 대한 것이었다.

사이버 머니란 가상의 돈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그냥 인터넷 상으로만 재미 삼아 돈으로 인정하고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이버 머니가 몇 억이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껌 한 통도

살수가 없는 것이다.


  사이버 머니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둑을 둘 때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한 쪽에 사이버 머니를

거는 것이다.

이것을 베팅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건 쪽이 이기면 사이버 머니를 받게 된다.

그렇게 해서 돈을 늘려 가는 것이다.
  처음에 작은 액수의 사이버 머니를 지급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머니를 가지고 베팅을 해서 돈을 따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사이버 머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이었다.

그것은 정말 놀라왔다.

 

  사람들은 배팅을 해서 돈을 많이 따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는데 그것은 바둑을 두고 그것을 구경하면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승부에 집착을 하고 사이버 머니를 많이

따려는 데에 몰두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가 배팅을 한 쪽이 지면 온갖 욕을 퍼부었다.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 담기 어려운 욕들을 하는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런 쓸데가 없는 머니 때문에 사람들은 욕을 하고 미워하고 인신 공격을 하고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이른바 앵벌이라고 해서 사이버 머니를 구걸하는 이들이 있었다.

온갖 사연을 늘어놓으면서 머니를 달라고 구걸하는 것이다.

나이는 40대인데 직장도 안 되고 힘든데 여기서 배팅을 할 수 있는 것이 낙인데 조금만

도와달라는 것이다.

시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구걸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구걸을 하다가 지친 사람은 실제로 돈을 주고 그 머니를

구입하기도 했다.

아무 짝에도 쓸 수 없는 머니를 그들은 구걸하고 사고 얻고 그리고

액수를 불려나가는 데에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다.
  사이트를 운영하는 이들은 운영하는 과정에서 수입원이 필요할 테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해서 머니를 팔아서 수입을 올려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이 윤리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말이다.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와 같은 어린애 장난에 그대로

넘어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이버 머니라는 하나의 틀을 만들었을 때 그 틀 속에 들어가서

그것의 포로가 되어서 그 틀 속에, 게임 속에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틀을 만들어낸 사람의 함정 속에 들어가 아우성을 치면서

헤엄 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틀과 함정을 만들어 놓기만 하면 그것이 실제인양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비단 그러한 사이트뿐이 아닐 것이다.
  한 예를 더 들어보자.

네이버나 엠파스 같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지식 검색과 같은 기능이 있다.

 

정치 문제든 사회문제든 역사든 컴퓨터든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거기에

올리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충실하게 답을 올린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상당히 많은 분야에서 올라와 있고 그것은 지식에

많은 도움을 준다.


  내가 놀란 것은 답을 하는 이들의 성실성이었다.

자기와 별로 상관도 없는 문제에 대해서, 해봤자 아무런 이익도 없는 데도

사람들은 아주 헌신적으로 친절하게 최상의 지식과 답변을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운영하는 시스템을 살펴본 후에 이것도 운영자들이 만들어낸

작은 함정에 사람들이 빠지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질문에 대해서 적당한 대답을 한다면 그래서 자기의 질문이

답으로 채택을 받게 된다면 그는 지식의 점수가 올라가게 된다.

내공이 올라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질문하는 사람은 내공 몇 점을 드리겠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게 지식의 점수가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가?

거기에도 등수가 매겨진다.

그리고 점수가 아주 많아지면 명예 지식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렇게 점수가 높아지고 명예 지식인이 되면 뭐 하는가?

그렇게 얻은 내공이나 점수로 껌 한 통이라도 살 수 있는가?

물론 이것도 사이버 머니와 똑같이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도 사람들은 빠진다.

일단 숫자가 들어가면 사람들은 거기에 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점수를 높이려고 애를 쓴다.
  지식에 대해서는 단순히 점수를 따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해두자.

거기에는 자기의 지식으로 남들을 도울 수 있다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원리는 분명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의 틀을 만들고 게임을 만들고 함정을 팔 때 반드시 거기에

빠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예가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어떤 틀을 만들고 함정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틀이나 함정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함정을 만든 이들은 그 안에 있는 포로들에게서 많은 이득을 취한다.

그리고 그 함정에 빠져 있는 이들은 그 함정 속에서 좀 더 좋은 위치를 얻고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며 돈과 열정과 몸과 마음의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희생한다. 

 

  자, 우리가 한번 도구와 함정을 만들어보기로 하자.
  어떤 교회에서 이러한 도구를 만든다. 각 사람에게 전도에 대한

점수를 매긴다.

전도에 성공했을 때 몇 점, 처음 말을 거는 데 성공했을 때 몇 점, 처음으로

교회에 데리고 왔을 때 몇 점, 구역 모임에 데려왔을 때 몇 점, 두 번 이상

교회 예배에 참석했을 때 몇 점, 그런 식으로 틀을 만든다고 하자.

전 교인의 점수는 매달 한 번씩 발표된다.

그리고 점수에 따라 전 교인의 순위가 매겨진다.


당신은 어떤 결과가 생기리라고 생각하는가?

아마 적지 않은 사람이 이것을 비판할 것이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틀과 함정의 노예가 될 것이다.

사람이란 항상 경쟁의식이 있으며 남들보다 나아지려고 한다.

그들은 자기의 점수와 순위를 올리려고 온갖 희생을 자초할 것이다.

 

  이런 틀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영성의 단계를 만든다.

한 일곱 개 정도의 단계를 만든다.

각 사람에게 점수를 매기며 각 사람의 단계를 지정해준다.

당신은 1단계이며 당신은 2단계이다.

물론 각 단계마다 좀 더 정교하고 세부적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많은 사람들이 더 깊은 단계로 올라가려고 아우성을 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성이 깊어지기를 원하니까 그들을 틀 속에

집어넣는 것은 아주 쉽다.

그들은 열심히 자기의 점수를 올리려고 할 것이다.

점수가 높아지고 단계가 올라갈 수만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든지

하려고 할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게임들은 이러한 단계를 만들어놓고 있다.

항상 아주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첫 번째 단계..

여기서 점수를 얻고 그 단계를 넘어서면 좀 더 고난도의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일단 거기에 빠진 사람은 좀 더 높은 단계에 올라가기 위해서 컴퓨터에

매달려서 미친 듯이 씨름을 한다.


  일단 한번 거기에 발을 들여놓으면 정상의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거기서

발을 빼는 것은 어렵다.

높은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그것을 긍지처럼 자랑스럽게 여기고

친구들에게 뻐긴다.

 

  비가 몹시 쏟아지고 있었을 때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지나가면서 조그만 구멍가게 옆에 있는 작은 게임기 옆에서 비를

맞아가면서 미친 듯이 게임기를 두드리고 눌러대는 아이들을 본 적이 있다.

너무나 불쌍했다.

아이고. 저러다가 감기가 들면 어쩌려고.

저러다 아이 잡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시대의 노예들은 형편없는 사료를 먹으며 그것이 최상의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세뇌되어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이 사회의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배후에 있는 어두움의 통치 세력이 영혼들을 그들의 수중에 넣는 방법이다.
  정치도, 교육도 그러한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

조금 더 좋은 성적, 점수를 얻기 위해서 그 틀과 함정 속에서 몸부림을 친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대학에 가도 행복이 오는 것은 이다.

그 때가 되면 또 다시 다른 함정에 빠져서 아우성을 치고 몸부림을 친다.

자격증, 시험, 직장 구하기, 부동산 투기..

이런 일들도 다 어떤 이들이 만든 함정과 틀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틀을 만든 이들은 주인이 되고 틀 속에 들어가는 이들은 노예가 되는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사람들은 그 숫자의 게임에 빠져 있다.

저금 통장에 잔금의 숫자가 올라가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 사람은 생각한다.

탐심을 물리치라고?

형의 재산을 내가 반만 받을 수 있다면 숫자가 많이 올라가는데..

그것을 버리라고?

 

  주님은 선한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우리 안에 있으나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서

산과 들을 헤맨다.
  이것이 계산에 맞는가?

99마리를 내버려두고 한 마리를 찾아다니는 것이 계산에 맞는가?

그것은 합리적인가?

너무 숫자를 우습게 아는 것은 아닌가?


  한 마리는 혼자서 헤매는 것을 보니 멍청하고 하는 짓이 답답해서 왕따를

당한 것이 분명한데 그 한 마리를 위해서 그렇게 시간을 낭비해야 하는가?

오히려 똘똘하고 가능성이 보이는 99마리를 잘 관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만약에 99마리의 양이 그 소식을 듣고 격분해서 노조를 만들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투쟁을 하면 어떻게 하는가?


  분명한 사실은 이것이다.

주님의 숫자 계산법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아니,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이 중요한 것이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왜 사람들이 중독에 빠지는가?

왜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것에 빠져서 집착하는가?


그것은 중독의 배후에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함정에 빠져서 고통 하는 것은 누군가가 그 함정과 감옥을 만들어서 그 안에 집어넣고

이득을 취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인가?

바로 사탄이다.


  사탄이 그러한 틀을 만든다.

사탄이 세상의 조직과 틀과 탐심과 욕망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사탄의 작전에 넘어간 이들은 즐거이 사탄이 주는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 그 감옥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그들은 탐닉에 빠지고 게임에 빠지면서 숫자를 늘리고 점수를

높이려고 하고 예금 통장의 잔고를 높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점수를 높이려고 아우성친다.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 탐심을 만들어 내는 것, 그럴 듯한 체계와 틀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그 속으로 집어넣는 것..

바로 그것이 사탄이 하는 짓이다.
  사이버 머니에 빠져서 화내고 미워하고 하루 종일 거기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 웃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생각해보니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들 쓸데없는 욕망에 빠져서 숫자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이버 머니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는 껌 한 통도

살 수 없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서로 미워하고 온갖 욕을 하고 집착한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아무리 예금통장의 잔고가 높아도 아무리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영원한 생명의 차원에서 그것은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것들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희생하며 집착한다.

그 두 가지가 무엇이 다른가?

 

  사람들에게 멋진 꿈을 심어주기만 한다면 그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사람들에게 그럴 듯한 욕망을 심어주는 것은 그들을 다 사로잡는 것이다.

사람들은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

이들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주님께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나에게

경배를 하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이 네 것이 될 것이라고 유혹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다.

주님은 잃어버린 세상을 다시 얻기 위해 숫자 놀음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셨다.

 

기억하기 바란다.

욕망을 가지는 것은 노예가 되기 시작하는 길이다.

헛된 욕망은 그처럼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욕심이 없는 이들에게는 사탄의 그러한 함정이 통하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동화를 보면 사탄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종으로 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가 유일하게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바보 이반이었다.

그는 바보이기 때문에 아주 단순하다.

그래서 사탄의 속임수가 통하지가 않는다.

더구나 그는 욕심이 없다.

그래서 사탄이 돈으로도 무엇으로 유혹해도 욕심이 없으니 통하지 않는다.

아마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으리라.

바보와 욕심이 없는 사람, 단순한 사람이 사탄의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십 여 년 전쯤에 동원 예비군 훈련을 간 적이 있었다.

아마 한 주일 정도 갔다온 것 같다.

오랜만에 군복을 입고 훈련소에 입소하기는 했지만 훈련은 형식적이어서

별로 힘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소대대항 축구 시합도 하는 등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


  한 주일동안 같이 훈련을 받다보니 우리는 서로 친해졌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온갖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었다.

더러 종교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내 자랑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복잡한 삶의 사연을 나누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참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엉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훈련이라는 것을 받다보니 배가 고팠고

그래서 역시 식사시간은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작은 문제가 생겼다.

  우리 소대는 열 몇 명이었는데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대원의 숫자보다

숟가락이 하나가 적게 지급되었다.

그러니까 전대 소대원 중에서 한 사람은 숟가락이 없던 것이다.

그는 식사시간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식사가 끝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숟가락 하나가 부족하다는 것 - 이것은 사소한 일인가?

사실 그랬다.

하지만 그 파급효과는 작지 않았다.  
  숟가락이 없는 사람은 가만히 다음의 식사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틈을 보아서 다른 사람의 숟가락을 슬쩍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가만히 있는가?

또 다른 사람의 숟가락을 슬쩍했다.

결국 숟가락 한 개가 부족했지만 모든 사람이 긴장을 하고 있어야 했다.

누구의 숟가락이 없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기의 숟가락을 아무 데나 팽개치고 다녔다.

그러나 나중에는 옷의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래도 잊어버리게 되자 어떤 사람은 속옷의 속에 집어넣고 다녔다.

어떤 이는 목걸이를 만들어서 숟가락을 거기에 매달고 다녔다.

   정말 웃기는 일이다.

우리는 항상 서로 경계를 하면서 다녔다.

훈련을 받을 때도 자기의 숟가락이 무사히 있는 지 확인을 했다.

결국 숟가락 하나 때문에 우리 소대의 화기 애애한 분위기는 깨지고 말았다.


  식사시간이 되면 여기 저기서 고성이 들렸다.

당신은 아까 아침에 숟가락이 없지 않았느냐, 근데 지금 어디서 생긴 거냐.

당신 솔직히 이야기해봐라.

내 것을 언제 슬쩍 한 것 아니냐..

아이고. 이 사람이 사람잡네.

내가 아침에 멀쩡하게 내 숟가락으로 밥 먹는 것 당신도 봤지?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다.

치사하게..

뭐 치사? 누가 할 말을..

뭐 이런 식의 대화가 많이 오고 갔다.

너무 유치하다고?

바로 그렇다.

그렇게 유치한 것이 인생이고 사람이다.

 

  그런데 이 숟가락 사건을 통한 갈등이 끝나는 시간이 왔다.

어떻게 끝이 났는지 아는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숟가락을 잊어버리다가 드디어 나에게까지

차례가 온 것이다.

내 숟가락도 없어진 것이다.


  왜 문제가 끝났는가?

나는 거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까짓 밥 한끼 먹으나 굶으나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밥을 늦게 먹어도 되는 것이고 또 손가락으로 먹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호시탐탐 숟가락을 다시 슬쩍할 기회를 엿볼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더 이상 숟가락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화기애애하고 의리로 똘똘 뭉친 소대원으로 돌아갔다.

 

  이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 두 사람이 욕심이 없다면 그것은 전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가 이상한 길을 가도 한 두 사람이 좋은 길을 가면 그것은 전체를

상쇄할 수 있다.

온 도시가 악해도 몇 명만 바르게 살면 그것은 도시 전체의 악을 바꿀 수 있다.
  욕심이 없다면 우리는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다.

그 어떤 마귀도 그들의 화려한 제안과 유혹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마귀가 바보에게 유혹한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세계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줄게."
  바보는 대답한다.


  "그게 좋은 건가요?"
 "그럼. 모든 사람들이 너를 알아줘."
  "그럼 그들과 같이 노는 건가요?"


  "아니. 놀다니. 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는 데 아무 하고

놀 시간이 어디 있어.

너는 바쁜 몸이야.

가족들과 지낼 시간도 없어."
  "에이. 난 그거 재미없어요. 안 할 래요."
  마귀는 저런 무식한 놈 같으니! 하고 혀를 차고 조금 말귀가 통하는

똑똑한 사람들에게 간다.

 

  똑똑한 사람이 마귀를 이길 것 같은가?
  지혜롭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 마귀를 이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단순한 사람이 마귀를 이긴다. 바보가 마귀를 이긴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 마귀를 이긴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똘똘한 사람이 있는가?

똘똘한 사람은 다들 잘 나가는 바람에 바빴다.

 촌에서 온 목수를 따르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들 띨띨하고 답답한 사람들뿐이었다.

무엇을 가르쳐도 도무지 알아먹지를 못 하고 이해가 느렸다.

한 가지를 알려주면 열 가지를 잊어먹었다.

주로 나누었던 대화는 동문 서답이었다.
  그래도 그 중에서 똘똘한 제자도 한 사람 끼어있었다.

그래도 머리가 좀 돌아가는 편이었기 때문에 제정을 맡겼다.

그 사람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는 당신도 잘 알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마귀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외국에서 신학 박사학위 몇 개쯤 따온 사람이 마귀를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시장에서 장사하고 파출부를 하시는 단순한 할머니들이 마귀를 이긴다.

욕심 없고 야망이 없는 바보들이 마귀를 이긴다.

  이제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보자.

왜 사람들은 허탄한 숫자 놀음에 중독되는가?

마귀가 만들고 사람들이 만든 함정의 틀 속에 그리도 쉽게 빠지는가?

그것은 그들의 속이 허무하기 때문이다.

비워져 있기 때문이다.

허전하기 때문이다.

 

그 비워진 부분 때문에 남들의 시선을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어하고 세계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비워진 부분 때문에 예금 잔고를 높여서 이것을 사고 저것을 사고 싶어한다.

사 봤자 쓰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것을 사려고 하겠지만 깊은 속이 비워져 있기 때문에

그래도 계속 사야한다.


  왜 카드로 돌려 막기를 하면서도 필요하지도 그리 중요하지도

않는 것을 사는 것일까?

자기 월급보다 비싼 옷을 카드 빚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럴까?

속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아주 간단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당신의 비워진 그 속, 우리의 빈 마음은 오직 주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주로 채우고 주를 모실 때 우리는 만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나면 사이버 머니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숟가락도 필요 없고 옷도 필요 없다.

그 다음부터는 오직 주님만 구하면 된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과 교제하고 인도 받으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이다.

 

  이 결론을 기억하기 바란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중독에 빠지게 된다.

사람을 미친 듯이 사랑하여 연애중독이 되고 그 사람의 노예가 되든지

돈의 노예가 되든지 숫자의 노예가 되든지 명예의 노예가 되든지

당신은 노예가 된다.


  왜 그런가?

사람은 오직 주님을 섬기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를 진정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은 귀신들을, 마귀를 섬기며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물론 자기가 섬기는 것이 마귀인지는 모르는 상태로 말이다.

다만 그 노예상태에서 한숨을 쉬면서 이 세상은 피곤한 거야.. 하고

푸념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말할 것이다.

나, 이제 이 함정에서 벗어날 거야.

다시는 이 함정에 안 들어 올 거야.

날마다 그렇게 말하며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날마다 그 함정 속으로 다시 들어올 테니까 말이다.
  하기야 그렇게 고민하는 것은 그나마 나은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 함정 속에 있는 것이 좋다고 아예 나올 생각을 하지도 않는

이들도 있으니까.

빛으로 나왔을 때에야 사람들은 그 이전의 자기 상태가 얼마나 끔찍한

상황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해방을 원하는가?
  참된 자유를 원하는가?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라.
  말로 하는 것말고 실제로 말이다.


  실제로 주님이 당신의 주인이 되게 하라.
  날마다 주님을 모시고 살라.
  그분의 당신의 주인임을 고백하고 주인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라.
  당신은 그래야만 그 감옥과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라.
  그리고 욕심을 버리며
  단순 무식하게 살라.
  당신은 진정한 승리자, 자유인,
  모든 멍에와 억압을 떨쳐버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고 행복한 그리스도인 2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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