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진부한 작품이지만 고흥을 배경으로 했기에 올려봅니다.
1998년에 창작을 했으므로 지금의 녹동항 주변환경과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경계의 섬
1
송은 이른 새벽에 아반떼를 몰고 집을 나섰다.
어젯밤 잠자리에 들 때부터 K를 만나러 가겠다는 생각이 운명처럼 다가와 잠을 설치다시피 했다. 일탈을 꿈꾸고 있다는 생각에 송은 말할 수 없이 기분이 착잡했다. 서울을 벗어날 때쯤 아내한테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여름의 끝자락에 머물러 있던 더위가 한풀 꺾였는지 송의 기분과 달리 날씨는 쾌청했다. 송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순천을 조금 못 미친 주암 인터체인지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가끔씩 서행을 하면서 경직된 어깨와 허리, 허벅지 근육을 주먹으로 탁탁 치곤 했다.
송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길은 순식간에 구불구불한 2차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철제 난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논과 집들이 송의 시야에서 재빠르게 흩어져 갔다.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아도 좋을 만큼 도로는 한산했다. 폭설에 대비해 모래를 가득 집어넣은 간이 창고, 27번 국도와 송광사의 진입로를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휙 스쳐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길은 갈수록 험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 기습하기에 알맞을 정도였다. 사이드미러에 더 이상 차들이 따라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송은 콘솔 박스에서 지도를 꺼내 27번 국도에 눈을 박았다. 그 길이 끝나고 바다가 열리는 남도 땅 끄트머리에 <녹동>이 있고, K가 혼자 살아가는 <중간섬>이 녹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좌석 사이의 캐비닛에 지도를 접어 쑤셔 넣고 밖을 내다보니 주암호가 보인다. 은둔의 나라처럼 고요하다. 푸르른 산과 투명한 햇살과 파아란 하늘이 수면 위로 중첩될 뿐 호수 주변에는 인가도, 논과 밭도 없다. 낯선 풍광의 세계에 들어서면 늘 그렇듯 송은 원인 모를 회한에 시달린다. 조물주가 만들어놓은 세상은 무궁무진한데 자신의 일상은 답답할 만큼 단순하고 도식적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아반떼는 길이가 백여 미터쯤 되는 콘크리트 다리 위를 막 건너고 있다. 하중에 중량감을 주기 위해 꾸민 싱글 아치 건축물이 아름답다. 송은 핸들 바로 오른쪽 옆에 붙어 있는 디지털 시계를 본다. 12:05. 아침부터 먹은 게 아무것도 없지만 도무지 허기를 느낄 수 없었다. 장시간 차를 몰아 온몸이 무감각해질 정도로 피로가 쌓인 탓도 있지만 그런 건 문제가 안 된다.
박 부장, 그 개자식 때문이다. 진수성찬이 놓여 있어도 부장 생각을 하면 송은 식욕이 뚝 떨어진다. 떠남을 진작부터 준비해 왔지만 이게 드라이브인지 도피인지 선뜻 확신할 수 없었다. 한 인간의 권위 앞에 직원들의 존재감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오래전부터 느껴왔다. 송은 아반떼를 몰고 오롯한 남도 풍경을 보면서 K를 만나러 가는 이번 여정은 불가피했다고 스스로 느낀다. 단 하루만이라도 부장의 손아귀에서, 꽉 막힌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미칠 지경이었다. 넉 달 동안 켜켜이 쌓인 감정의 응어리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부장으로 승진하고 박의 눈은 오기와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밀폐된 공간에서 성폭행을 당한 미스 정이 떠난 뒤 그 욕망은 살기로 번득였다. ‘개새끼.’ 부장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송의 입술에 침이 더께처럼 묻어난다. 욕설은 부장의 인격을 모욕적이고 파멸적으로 몰고 가는 데 한껏 동조한다.
박 부장이 그림을 좋아했던가?
넉넉잡고 두 시간 후면 도착할 녹동이 미스 정의 고향이라는 생각에 송은 엉뚱하게 그림 한 점을 떠올린다. 편집부 한쪽 벽을 차지한 대형 그림은 승진을 하고 박이 걸어놓았다. 표구점을 운영하는 후배가 승진 기념으로 선물했다던 풍경화를 가훈액자처럼 걸어놓고 미스 정에게 물었다.
“저게 얼마짜리 같냐?”
워드 화면에 코를 박고 키보드 자판을 분주하게 때려대던 미스 정의 대답은 아무리 들어봐도 십만 원을 넘지 못한다.
“이것아, 네 눈에는 저게 싸구려처럼 보이냐? 자그마치 5백만 원짜리야.”
미스 정을 힐난하는 눈초리는 자기 딸을 대하듯 친근해 부장은 감정 표현의 괴짜라고 소문나 있다. 부장이 되고 박은 미스 정을 애완견처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원죄가 되어 저승길이 고달프다며 커피 심부름도 시키지 않았다. 서른 살 미스 정은 커리어 우먼을 꿈꾸는지 결혼에 관심이 없다. 그동안 한껏 차려입고 중매에 응한 것만 해도 자기 나이 수만큼 된다.
“어휴, 지겨워. 세상 남자들은 하나같이 왜들 그 모양인지….”
커피 한잔 마셔주는 인내와 예의를 보이고 미스 정은 회사로 달려와 남자 쪽에서 걸려올 전화에 무척이나 황망해 하는 눈치다. 한번은 부장이 주선한 중매 날짜에 미스 정이 나오지 않는다. 설 연휴 다음날인데, 그녀는 무단결근을 한다. 월간 관광 잡지 <풍광>의 타이핑은 미스 정이 떠맡는다. 이틀 후 인쇄소에 넘겨야 하는데 표지디자인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핸드폰이 먹통이라서 부장은 미스 정 고향집으로 전화를 건다. 061-834-261×. 열 개의 숫자를 찍어대는 부장의 검지가 중풍에 걸린 듯 몹시도 떨고 있다.
“아 글쎄, 그년이 서울 가기 싫다면서 밤새 내내 울었다요.”
미스 정 엄마의 말투보다 억양에서 남도 특유의 구수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사정은 무슨…. 설 연휴 잘 보내고 나서 즈그 아부지가 차부에 나가 서울행 차표 한 장을 사 오자 왜 사 왔냐고 땡깡을 부리는디…, 나 참 기가 막혀서.”
미스 정은 나흘 동안 결근을 하고 편집부에 모습을 드러낸다. 정오쯤 돼서 비실비실 나오는 모습이 꼭 사직서를 제출할 것만 같다. 그녀는 고향에서 가지고 온 유자차 선물 세트를 내놓으며 미안해요…, 어쩌고저쩌고 변명한다. 부장은 오후 내내 전화통을 붙들고 앉아 자기 후배에게 이번 중매는 없었던 걸로 하자고 살살 달랜다. 부장은 타이핑을 치고 있는 미스 정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본다.
“갑자기 서울 가기 싫은 거 있죠. 들에 나가 뼈 빠지게 일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너무 안 됐어요. 그래도 명절인데…. 어릴 적에는 찰떡을 하기 위해 가마솥에서 쪄낸 찰밥을 절구에 넣고 찧어댔는데, 그 시간 때에 밭에 갔다 오는지 채 패지도 않은 보리 잎을 뜯었고 와서 누렁소에게 던져주지 뭐예요.”
어젯밤에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고 그녀는 미칠 듯 얘기한다.
송은 퇴근 후 미스 정을 레스토랑으로 데려가 저녁을 사주기로 한다. 그녀에게 소녀 같은 순수함이 배어 있다는 사실에 송은 흡족함을 드러냈다. 무엇이 오래도록 좋을 것만 같던 박 부장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던가. 미스 정의 무단결근을 송은 내심 기뻐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부장의 권위를 일순 깔아뭉개는 처사였기를 바라면서….
“부장님과 동기라면서요?”
주문한 돈가스를 나이프로 먹기 좋게 자르면서 미스 정이 엉뚱한 질문을 한다. 송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오늘따라 유난히 질긴 돈가스에 칼질을 해보지만 번번이 허탕이다. 아예 포크로 찍어 통째 들어 올리며 한입 냉큼 베어 문다. 묵계처럼 간직했던 사실 하나가 탄로 나 치부를 드러낸 것마냥 부끄럽다. 박 부장과 동기라고 느껴본 적이 송은 한 번도 없었다. 송과 같은 대학에 들어가고, 같은 날 입대하고, 같은 잡지사에 이력서를 냈던 박의 소유욕은 그때쯤 완전히 식어 버렸다. 어릴 적부터 박은 모방의식에 길들어져서 송의 앵무새가 되어야 했다. 결석 일수와 등교 시간, 심지어 도시락 메뉴까지 송의 것대로 하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송의 분신으로 남을 것 같던 박의 행동이 나이를 먹어가고 승진이 되자 뒤바뀌기 시작했다. 마흔이 넘은 박에게도 송보다 우월해지려는 보상 심리가 존재할까. 별것도 아닌 일에 매일같이 부장이 핀잔을 줄 때면 송은 5년 전에 얻은 계장 자리에 아직까지 머물러 있는 자신을 저주했다.
회사는 이제 사양길에 접어들었는지 부서는 영업부와 편집부로 통일되었고, 얼마 전에 실시한 감원 조치까지 고려하자면 계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도 송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인지 모른다. 미스 정이 돈가스를 먹고 디저트로 나온 커피를 후룩 마실 때까지 송은 침묵했다. 사무실 안에서 부장과 대면할 때마다 느껴왔던 자괴감을 그 침묵 속에 감춘 것임을 미스 정은 모를 것이다. 갑자기 자신이 무능력하고 비굴해져 가고 있다는 생각에 송은 후식으로 나온 커피조차 입맛에 쓰다.
“자네도 날 무시하냐? 똑같은 나이에 누군 부장이고 누군 말뿐인 계장이고 해서, 그런 거야?”
“그런 게 아니구요. 난 계장님이 안 됐다 싶어서….”
“그래서 불쌍하다 이건가? 맨날 부장 앞에서 훈계나 듣고 창피당하는 내가 우스워 보여? 도대체 내가 부장보다 못난 게 뭐지? 항상 내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한심한 녀석인데…. 그 자식이 나한테 그럴 수 있냐구?”
“그런 말이 어딨어요?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에요. 설마, 부장님이 언제까지 계장님 분신으로 남아야 한다는 논리는 아니겠죠?”
“벌써 십 년이야, 이 회사에 몸담아온 지도. 그동안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그런데 지금의 내 꼴은 도대체 뭐지?”
“세상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윗사람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고지식하게 일에만 매달리고, 회사 공금 백 원도 빼돌리지 못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건 별로 보지 못했어요.”
“흥, 무단결근을 정당화하겠다는 건데…. 부장한테는 통해도 나한테는 안 통할걸.”
그러자 미스 정의 얼굴이 울상이다. 그제야 과민 반응으로 자신이 흥분하고 있다는 걸 송은 느낀다.
“나도 무책임하게 돌아가는 현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피해자예요. 왜 계장님만 힘들다고 넋두리죠? 집에 내려가서 생각 많이 했어요. 부모님 이마에 주름살은 늘어가고…. 명절에도 온종일 일만 하시고…. 틈만 나면 부장이 치근덕거리는 그놈의 직장이 뭔가 싶더라구요. 정말 상경하기 싫었어요.”
미스 정을 위해 마련한 식사가 송에게는 모래알을 씹는 맛이다. 돈가스와 커피가 김이 빠진 채 테이블에 놓여 있다. 송은 싸늘한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다. 씁쓸한 맛이 혀끝에서 맴돌 뿐이다. 송은 미스 정에게 칭찬을 하기는커녕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털어놓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송에게 해줄 수 있는 미스 정의 위로가 기껏 그런 식의 자기 합리화로 이어진다는 것도 요즘 회사 근황으로 보면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의 입장만큼 분위기도 썰렁하다. 이럴 때는 말을 아끼는 게 상책이라고 느낀 송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스 정도 따라서 일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