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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2 - 파키스탄의 컴퓨터 천재소녀 아르파 카림(Karim, Arfa) 사망 카림 [Karim, Arfa, 1995.2.2~2012.1.14] 16살 '컴퓨터 천재' 잃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의 최연소 달인이 16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세계 곳곳에서 젊은 컴퓨터 천재, 파키스탄의 아르파 카림 란드하와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메시지가 밀려들었다. 이 컴퓨터 천재는 지난 14일 간질발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숨졌다. 카림의 치료비를 전담해 온 빌 게이츠는 카림의 가족들에게 슬픔을 전했다. 카림은 파키스탄의 라호르 군 통합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 왔다. 카림은 2005년 9살의 나이에 마이크로 소프트의 모든 프로그램을 마스터, 이 회사가 공인한 최연소 달인에 선정돼 세계적 유명세를 타게 됐다. 마이크로 소프트 홈 페이지는 지금도 기술 분야에서 특기할 업적이 있는 어른들을 달인이라며 발표하곤 하지만 카림은 언제나 예외였다. 인증을 받고 나서 카림은 마이크로 소프트 빌 게이츠의 초대로 미국 본사를 방문한다. 당시 10살 밖에 안 된 소녀는 프로그래밍에 관한 해박한 지식으로 빌 게이츠를 비롯한 마이크로 소프트 임원들을 경탄케 했다. 한 TV 방송이 카림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자 뒤늦게 알게 된 빌 게이츠는 카림의 가족에게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치료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빌 게이츠는 아울러 파키스탄의 군 병원보다는 미국으로 옮겨 치료하는 게 좋겠다는 제안도 했으나 의료진들이 카림은 당장 산소호흡기가 필수라고 반대해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 카림은 2006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5000여 명의 개발자 회의에 파키스탄 사람으로선 유일하게 참석해 기조연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를 기리는 동상도 설립됐다. 카라치에 있는 IT 미디어 시티는 개명해 ‘카림 IT 미디어 시티’로 불릴 예정이다. /[위키트리] 12.01.17 13:27
- '마 을' 1973
2011 - 갤러리 현대, 장욱진 20주기 회고전(1.14~2.27) 동심의 필치…화폭 가득 ‘한국 서정’ <앵커 멘트> 미술계 거장! 고 장욱진 화백이 작고한지 20년이 됐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맑고, 밝은 한국적 서정에 빠져 보시죠. 김석 기자입니다. <리포트> 황금빛 들판 사잇길을 유유히 걷는 연미복 차림의 신사. 6·25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평화롭고 풍요로운 농촌의 삶을 꿈꿨던 화가 자신의 모습입니다. 마치 어린아이 그림 그리듯 새와 나무를 그려놓고, 키 큰 나무 위에 마을을 만들고는, 그 속에서 유유히 자전거를 타고, 밤이 되면 모기장 안에 누워 단잠을 청하는, 가진 게 없어도 행복하고 여유로운 농촌 생활의 소박한 정감이 화폭에 가득합니다. 오로지 그림 그리는 게 좋았기에 가족의 생계는 늘 뒷전이었지만,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의 벽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한국적 서정세계를 개척한 화가 장욱진. 작고 20주기를 맞아 고인이 남긴 대표작 70여 점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인터뷰>장경수(장녀) : "저희 아버지는 쟤는 나는 신용하지 않아도 내 그림은 신용한다, 그렇게 얘기를 하세요. 근데 저희 아버지는 정말 당신 그림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하셨던 분입니다." 좀처럼 보기 힘든 먹그림과 드로잉은 유화와는 또 다른 멋이 살아 있고, 경기도 용인에서 그대로 옮겨온 손때 묻은 작업실은 일생 동안 돈 모르고 살았던 고인의 삶을 엿보게 해줍니다. KBS 뉴스 김석입니다. 김석 기자 /KBS 뉴스 2011.01.12 (22:17) http://news.kbs.co.kr/culture/2011/01/12/2225641.html
2011 - 튀니지 대통령, 민주화시위 피해 사우디로 도피 튀니지 ‘재스민 혁명’ SNS의 힘 지난해 12월 17일. 튀니지 중부에 있는 인구 4만명의 소도시 ‘시디 부 지드’가 지구촌에 조용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노점상을 하던 26세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의 분신 소식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한달이 채 안 된 지난 14일(현지시간).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튀니지의 23년 독재 체제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인구의 18%가 페이스북 가입자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부아지지는 독재정부가 망쳐 놓은 경제난 탓에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과일 노점상으로 겨우 생계를 꾸렸다. 노점 단속에 나선 경찰이 그의 뺨을 때리고 과일 수레를 부순 뒤 외상으로 구입한 과일 200달러어치를 압수했다. 시청을 찾아가 사정했지만 소용없었다. 자기만 바라보는 가족과 아직 갚지 못한 빚, 암울한 내일…. 부아지지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정부 청사 앞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겼다. 그의 희생은 그러나 헛되지 않았다. 살인적 실업률에 신음하던 튀니지 국민들은 부아지지의 분신 소식에 들고 일어났다. 튀니지의 공식 실업률은 14%. 하지만 이 숫자를 믿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튀니지 경제는 바닥을 헤매고 있다. 특히 15~29세 청년 실업률은 30%에 이른다. ●위키리크스도 혁명 성공 한몫 혁명 성공의 또 다른 열쇠는 내부고발 사이트 위키리크스가 제공했다. 대통령 일가의 과도한 재산 축적과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담은 외교 문서들이 튀니지 민주화 운동가들이 만든 ‘튀니리크스’(Tunileaks)를 통해 확산되면서 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더욱 북돋았다. 시위가 열흘 넘게 계속되자 독재자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은 뒤늦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사경을 헤매던 부아지지는 지난 4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성난 민심은 더욱 달아올랐고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자가 잇따라 발생하자 항의 시위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매개로 한 정권 퇴진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87년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로 인권 탄압과 부정부패 등 독재의 전형을 보여 온 벤 알리는 결국 사우디아라비아로 달아났고, 철옹정권은 무너졌다. 전 세계 언론은 튀니지의 민중 봉기를 ‘SNS가 꽃피운 재스민 혁명’이라 불렀다. 튀니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스민처럼 평범한 민초들이 SNS를 통해 하나로 뭉쳐 거둔 승리라고 평가했다. 튀니지는 인구의 60%가 25세가 채 안 되는 ‘젊은 국가’다. 이 때문에 페이스북 가입자가 18%에 이를 만큼 SNS 이용률이 높다. 튀니지 독재를 무너뜨린 SNS는 이제 이웃 중동과 아프리카, 남미의 독재국들을 겨냥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년층 비율이 높고 경제 사정이 열악한 예멘(70%), 알제리(75%)가 다음 타깃이 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서울신문 2011-01-17 1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117001009
[백승종의 역설] 재스민 혁명을 넘어 역사에는 꽃다운 이름의 혁명이 있다. 1974년 포르투갈의 좌파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시민들은 혁명군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꽂아주며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우파 살라자르 독재정권이 봄 안개처럼 사라졌다. 명예로운 이 무혈혁명을 우리는 카네이션 혁명이라 부른다. 2003년 조지아(그루지야)에서도 무혈혁명이 일어났다. 부패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퇴출 대상이었다. 본래의 그는 유능한 정치가였다.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미하엘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을 온 세상에 알렸고, 그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중심인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생국 조지아의 대통령 노릇에는 완전히 실패했다. 셰바르드나제를 권좌에서 몰아낸 조지아 시민들은 장미 혁명을 외치며 환호했다. 지난 연말연시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민주화 물결이 거셌다. 만성적 인플레이션과 벤 알리의 철권통치에 실망한 민심이 요동치자, 24년 만에 정치적 물갈이가 성사되었다. 그 파도가 이집트를 포함한 중동 전역을 강타중이다. 산유국 리비아가 지금 폭풍의 한가운데 있다.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유혈사태까지 불사하며, 끝내 역사의 물결을 막아선다. 서방 매체는 튀니지발 정권교체를 재스민 혁명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칭호다. 재스민 혁명이란 문제의 벤 알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하비브 부르기바를 쫓아내고,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려고 꾸민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튀니지 시민들은 자신들의 민주화 운동을 온라인 혁명, 또는 페이스북 혁명이라 일컫는다. 이번 혁명의 일등공신은 인터넷이었기 때문이다. 이름부터 엇나간 재스민 혁명은 그 앞길이 첩첩산중이다. 남의 일이라며 간단히 웃어넘길 일은 결코 아니다. 혁명의 이름 뒤에 들어서는 정부는 “고장난 민주주의”체제이기 쉽다. 한국은 그런 일 겪고 또 겪었지만, 아직도 인권이 곤두박질치는 남루한 이 현실은 도대체 무엇인가. 마을공동체문화연구소 대표 /한겨레 2011-02-25 오후 07:43:1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65407.html 2010 -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李泰錫) 신부 선종 이태석 [李泰錫, 1962.9.19~2010.1.14] [어제의 오늘]2010년 ‘수단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 선종 ㆍ阿 오지 봉사의 삶 ‘현재진행형’ 지난해 오늘, 한국발 뉴스 하나가 아프리카를 울렸다. 수단에서 의사이자 교사로 활동하며 ‘수단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이태석 신부가 선종했다는 소식. 우는 것을 불명예로 여겨 좀처럼 울지 않는 수단의 아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날은 신학자이자 철학자, 음악가, 의사로 아프리카 원시림 가봉공화국에서 인술을 펼쳤던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우선 당장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 진흙과 대나무로 움막 진료소를 만들고 이후 맨손으로 벽돌을 구워 병원을 지었다. 이 신부는 하루에 보통 200~300명의 환자를 돌보며 인근 80여개 마을의 순회진료와 예방접종에도 나섰다. 송현숙 기자 song@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1-13 21:22: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1132122305&code=100100&s_code=ap005
2009 - 횡성 스노보드 세계선수권대회 개막 (17일 개회식, 24일 폐회식) ‘눈밭 서커스’ 보러 가자, 설레는 강원 스노보드 세계선수권 14일 횡성 개막…특급 선수 총출동 겨울 종목 중 가장 늦은 1996년 1회 대회(오스트리아)가 시작됐지만 전 세계 젊은이들에겐 최고 인기를 얻고 있는 스노보드 세계선수권대회가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강원도 횡성 성우리조트에서 14일부터 열린다. 격년제로 열려 올해 8회째를 맞는 세계대회는 2005년 캐나다를 빼고는 6번 모두 유럽에서 열렸을 정도로 유럽세가 강하다. 45개국 627명의 선수단 중 유럽이 31개국 413명으로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2007 세계선수권 우승자 델레루 자비아와 마튜 크레펠(이상 프랑스) 린지 자코벨리스(미국) 록 플란더(슬로베니아) 하이디 오이루어(오스트리아) 등이 출전한다. 한국은 지난 12일 곤지암리조트에서 열린 FIS(국제스키연맹)스노보드국제대회 하프파이프에서 나란히 1, 2위를 차지한 안태환과 정진욱 등 남자 13명, 여자 8명 등 모두 21명이 출전하지만, 세계 수준과는 실력 차가 크다. 가장 격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스노보드크로스, 두 명의 선수가 기문을 빠르게 통과하는 것을 가리는 대회전과 회전, 그리고 거대한 반원통형의 얼음벽에서 펼치는 하프파이프 등이 펼쳐진다. 한번의 점프로 공중에서 회전과 묘기를 자유자재로 펼치는 빅에어는 위험도가 높아 남자만 진행한다. 14일부터 16일까지는 공식연습을 하고, 17일 스노보드크로스 예선부터 시작해 24일 빅에어 결승으로 막을 내린다. 권오상 기자 kos@hani.co.kr /한겨레 2009-01-13 오후 07:15:22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333061.html
- 금제사리호 (높이 13cm, 어깨 폭 7.7cm) (민형기 님 자료제공)
2009 - 미륵사지 석탑서 백제 사리장엄구 출토 국보 제11호 익산 미륵사지석탑 해체 작업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은 지난 14일 석탑 1층 중심기둥 윗면 중앙의 사리공에서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은제관식(銀製冠飾) 등 500여 점의 유물을 수습하고, 19일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유물을 공개했다. 금제사리호는 높이 13cm, 어깨 폭 7.7cm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이 덮였다. 사리호 표면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보여주며, X선 투시결과 내외함의 이중구조로 돼있음이 확인됐다. 또 가로 15.5cm, 세로 10.5cm 크기의 금제사리봉안기는 금판에 음각하고 주칠을 해 글씨가 선명하다. 봉안기에는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자,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기록돼 있는데,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93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을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금석문 자료로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종류가 일괄로 출토됐고 가공수법도 정교하고 세련돼 국보 중의 국보”라고 가치를 높이 샀다. 이어 “이번 사리장엄구의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고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됐다”며 “백제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 2009-01-19 오전 9:40:28 http://www.ibulgyo.com/archive2007/200901/200901191232357525.asp
2009 - 가장 온전한 공룡 화석 시화호서 발견 백악기 초식공룡 트리케라톱스, 발 꼬리뼈 등 100여개 나와 현재 대전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으로 옮겨 화석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트리케라톱스는 한반도 공룡의 전성기인 백악기(1억4000만년∼6600만년 전)에 살았으며, 공룡시대의 거의 마지막까지 생존해 진화하다가 멸종한 공룡류의 하나다. 초식 공룡으로 보통 뿔 셋이 있다고 해서 트리케라톱스로 불리운다. 화성/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한겨레 2009/01/15 09:44 http://ecotopia.hani.co.kr/board/view.html?board_id=ep_report2&uid=67
2000 - TV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헐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오르다 《심슨 가족》은 작가인 맷 그레이닝이 성장해온 미국 오레건주 스프링필드를 배경으로 유머, 미국 전통의 문화, 전반적인 사회, 텔레비전 문화와 같은 다양한 부분을 풍자한다. 심슨 일가는 맷 그레이닝이 또다른 협력자인 제임스 L. 브룩스와 손을 잡기 전에 만들었다. 맷 그레이닝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은 가족인 심슨 가족을 만들어내고 큰아들 바트를 제외하고 심슨 가족 구성원에 자신의 진짜 가족 구성원의 이름 등을 붙여주었다. 《심슨 가족》은 시리즈물로 데뷔한 이래 23개의 에미상, 24개의 애니상과 한 개의 피버디상을 비롯해 수십 개의 상을 받았다. 1999년 12월 31일 발행된 타임지는 《심슨 가족》을 20세기 최고의 텔레비전 시리즈물로 선정했으며, 2000년 1월 14일에는 할리우드의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심슨 가족》은 미국 시트콤 사상, 미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장기간 방영되고 있으며 호머 심슨이 자주 쓰는 말인 “D'oh!”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이를 영화화한 《심슨 가족 더 무비》는 2007년 7월 26일과 7월 27일에 전세계에서 동시 개봉하여 5억 262만 달러의 수익을 벌었다. /위키백과
- '98 사진영상의 해 기념 (1998.7.2. 발행)
1998 - ''98 사진영상의 해' 개막 선포식 '98 사진영상의 해 1997년 말에 결성된 `‘98 사진영상의 해 조직위원회’는 1998년 1월 14일 오전11시 문예회관대극장에서 송태호 문화체육부 장관 및 임응식 조직위원장, 사진계, 예술계를 총망라하여 1,000여 명이 참석했으며 한국사진의 기반조성과 한국사진사 120년의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며 한국적 사진영상의 독창성을 모색하고, 21세기 한국 사진문화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사진영상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인식변화의 전기를 마련하며 제3영상 시대에 대비하고 온 국민이 참여하는 축제의 한마당을 펼치는 데 있다고 강조하며 개막 선포식이 열렸다. 조직위원은 임응식, 이봉하, 이명동, 이경모, 홍순태, 한정식, 이철규, 이봉섭, 양세민, 유경선, 조유성, 주명덕, 강봉규, 박현기, 최민, 임동일, 하진규, 김용문, 집행위원은 구성조, 김영수, 김종호, 박성복, 박재건, 박주석, 백현기, 심동주, 오강석, 오형근, 이병훈, 이성우, 이원곤, 정인숙, 조의헌, 조태병, 최인진, 최재영, 홍계인이다. 사업개요는 「’98 사진영상의 해 선포식」이 1월 14일에 한국 문화예술진흥원 대강당에서 개최되었고, 「사진의 날 기념대회」가 4월 15일에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조병화 예술원장, 하진규 문화관광부 예술진흥국장, 임응식 조직위원장, 조직위원, 집행위원, 사진인 등 1,000여 명이 참석, 「’98 사진영상 축전」은 5월 28일∼8월 7일 테크노마트 종합홍보전시장 및 드림랜드 야외마당에서 한국 사진가 1,000명이 참석, 외국 사진가전이 있었고, 사진영상 모델 선발대회, 보디 페인팅 촬영대회, 추억의 웨딩사진 촬영대회가 있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진전」은 7월 2일부터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정부수립 50년간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275점의 사진이 전시되었다. 「남북 산하 사진전」은 9월 7일부터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전시실에서 개최되었으며 남한 사진가의 작품 130점, 북한 사진가의 작품 110점이 전시되었고 지방 순회전도 가졌다. 「21세기 사진영상 학술대회」는 9월 25일부터 26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으며 주관은 ‘한국사진학회’, 발표자, 토론자 포함하여 150여 명이 참석, 일반인은 900명이 참석했다. 전국민 사진 찾기 운동은 묻혀 있는 중요한 사진사적 자료를 수집하고자 발간하고 사진 문화재를 데이터베이스화할 예정이다. 「한국 사진역사전」은 11월 20일부터 12월 19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으며 무려 3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사진의 시각적 확장전」은 12월 22일부터 99년 1월 24일까지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되었고, 새로운 장르의 수용에 의미가 있었다. 전국민 사진축제로는 사진 공모전, 지방 지원행사가 있었다. 筆者 : 홍순태 (사진작가) http://www.arko.or.kr/yearbook/1999/misul/pic.htm
방송-통신위성 `무궁화2호`가 1996년 1월 14일 미국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발사됐다. 무궁화2호는 크기와 성능면에서 1호위성과 똑같지만 1호위성이 발사실패로 수명이 4년6개월 밖에 되지 않는 반면 2호위성은 10년 이상 사용할 수 있게 제작됐다. 무게 약 6백12Kg으로 12개의 통신용 중계기와 3개의 방송용 중계기가 실렸다. 방송용 중계기는 각각 4채널을 확보할 수 있어 2호위성으로만 12개의 디지털 위성방송이 가능하게 됐다. 2호위성의 위치도 적도위 동경 1백16도 보르네오 상공 3만6천Km지점으로 1호위성의 바로옆이었다. 1호위성과 거리는 35-50Km를 유지했다. /조선
1990 - 미국 폭스 TV에서 <심슨 가족>이 정규시리즈로 편성되어 방영되다 《심슨 가족》(The Simpsons)은 만화가 맷 그레이닝이 처음으로 제작한 미국의 TV애니메이션 시리즈이다. 미국에서는 매주 한 편씩 미국의 FOX TV를 통해 방송중이다. 현재 시즌 21이 2009년9월 27일부터 시작하여 방영중이다. 대한민국에서는 MBC에서 1994년 시즌 1과 시즌 2를 더빙하여 방영했으나 이질적인 문화 차이로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종영되었다. 2000년7월에는 EBS에서 월,화 오후 6시 55분에 시즌 3부터 시즌 11까지 다시 더빙 방영하여 대한민국에서 많은 팬을 확보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국어 자막으로 투니버스에서 시즌 11이 방영중이다. 유래 1987년4월 19일 FOX TV에서 방영한 버라이어티 쇼 《트레이시 울먼 쇼》에 삽입된 30초짜리 단편 시리즈로 시작되었다. 3번 방송된 후에 시청자들로부터 반응이 좋자, 스케치 기법도 더 좋아지고 방송 분량도 30분으로 늘어났다. 이후 1992년 ~ 1993년 시즌에서 미국에서 제작된 전체 방송프로그램 중 가장 인기가 높은 30개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이 때 선정된 것은 FOX TV에서 제작한 프로그램 중 최초였다. 1989년 12월 17일성탄절 특집 시사회를 가졌으며, 1990년 1월 14일 FOX TV에서 에피소드 "Bart the Genius"를 시작으로 정규시리즈로 편성되어 방송되었다. /위키백과
1988 - 소련의 정치가 말렌코프(Malenkov, Georgy) 사망 말렌코프 [Malenkov, Georgy Maksimilianovich, 1902.1.13~1988.1.14] 소련의 저명한 정치가, 공산당 관리. 스탈린의 측근으로 스탈린이 죽은 뒤 총리를 지냈다(1953. 3~1955. 2). 1917년 10월혁명 뒤에 일어난 내전 기간에 적군(赤軍)에 들어간(1919) 말렌코프는 1920년 공산당에 입당하여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스탈린과 매우 가깝게 지내면서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에 깊이 관여했다. 1941년 정치국의 후보위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중 전쟁을 지휘하는 소수의 조직인 국가방위위원회에서 일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정치국의 정위원이 되었고, 중앙위원회의 제2서기 겸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전후 기간에 말렌코프는 A. A. 주다노프와 앙숙이 되었는데, 그의 고발로 인해 자신의 당직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다(1946). 그러나 2년이 채 못 되어 그는 스탈린의 부관직책을 되찾았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그는 각료회의 의장직(총리)은 물론 당서기장직도 맡았다. 비록 몇 주 뒤에 흐루시초프에게 당서기장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그뒤 2년 동안 군비충당금을 줄이고, 중공업에 할당될 비용으로 소비재 생산을 늘리며, 집단농장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장려금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들은 다른 당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1955년 2월 그는 총리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57년 흐루시초프를 몰아내려는 반당집단의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상임간부회와 중앙위원회로부터 축출되기 전까지, 그는 당 상임간부회(이전의 정치국)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었다. 1961년 그는 공산당에서 쫓겨났다. 그뒤 거의 30년 동안 카자흐 스탄의 수력발전소 관리인으로 일했으나 끝내 복권되지 못했다. /브리태니커
크록 [Kroc, Ray, 1902.10.5~1984.1.14] 본명은 Raymond Albert Kroc. 미국의 실업가.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업체인 맥도널드를 설립해 패스트푸드 산업을 주도했다. 크록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15세의 나이로 구급차 운전사로 일했으며 시카고에 돌아와서는 재즈 피아니스트, 부동산 판매원, 릴리튤립컵회사의 종이 컵 판매원 등을 전전하다가 1940년대 초반에 5가지의 밀크셰이크를 동시에 섞을 수 있는 혼합기인 '멀티믹서'의 독점 유통업자가 되었다. 1954년 크록은 8개의 멀티믹서를 사용하던 캘리포니아 샌버나디노에 있는 한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머리스 맥도널드와 리처드 맥도널드 형제가 운영하고 있던 그 음식점은 일괄작업 방식을 도입하여 햄버거·프렌치프라이·밀크셰이크 등을 대량으로 조리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크록은 맥도널드 형제의 방식에 기초한 드라이브인 레스토랑의 체인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맥도널드 형제에게 총수입액의 5%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1955년 4월 15일 일리노이 주 데스플레인스에 첫번째 맥도널드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고, 같은 해 2개가 더 개점되어 총판매액이 23만 5,000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크록은 소유주가 경영을 전담한다는 조건하에 독점판매권을 판매함으로써 맥도널드점을 계속 확대해나갔다. 그는 가맹점 경영자들을 위한 교육과정을 마련했으며 맥도널드점 운영의 표준화와 자동화를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크록은 1961년 맥도널드 형제의 이권을 270만 달러에 매입했다. 그가 죽을 당시 전세계적으로 맥도널드점은 7,500여 개에 달했고 그 가운데 3/4가량이 독점판매권 소유자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크록은 1955~68년에 맥도널드사의 사장으로, 1968~77년에는 대표이사로, 그리고 1977년 이후 죽을 때까지는 회장으로 재직했다. /브리태니커
1978 - 영화배우 최은희 홍콩서 북한에 납치 [책갈피 속의 오늘]1978년 영화배우 최은희 납북 배우 최은희가 ‘증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최은희는 1월 14일 오후 바닷가를 거닐다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됐고 배편으로 황해도 해주까지 끌려갔다. 공작원이 말했다. “최 선생, 우리는 지금 장군님의 품으로 갑니다.”
[오늘의 경제소사/1월14일] 긴급조치 3호 갈수록 상황이 나빠졌다. 1973년 10월 발발한 4차 중동전 이후 아랍권의 석유무기화로 전세계가 휘청거리자 한국경제는 늪으로 빠져든다. 석 달 사이에 4배나 뛴 원유가격이 악순환의 시발점. 화력발전의 단가 상승으로 전기 값부터 올랐다. 공산품도 뛰었다. 비료와 농약 가격 인상으로 쌀 값도 올라갔다. 1974년 도매 물가상승률은 전년 대비 44.6%. 한국전쟁 이후 최고치다. 파동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기름을 구하지 못해 국내선 여객기의 발이 묶였고 시내버스의 운행중단으로 출퇴근 시민이 고통을 겪었다. 기업들은 기계를 돌려봐야 손해라며 문을 닫았다. 주유종탄(主油從炭)이던 에너지 정책은 주탄종유(主炭從油)로 되돌아왔다. 매점매석 행위도 성행했다.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꺼냈다.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긴급조치’, 즉 긴급조치 3호가 1974년 1월14일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선포됐다. 골자는 서민 조세부담 경감과 사치성 품목에 대한 중과세, 수곡가 인상 및 에너지절약책 강력 추진. 특히 영세민 지원에 초점을 맞췄다. 국민들은 이를 반겼다. 야당도 협조하고 나섰다. 긴급조치 3호는 모두 9개가 발동된 긴급조치 시리즈와는 성격 자체가 달랐다. 유신독재체제 유지를 위한 국민탄압용이라는 악명과 달리 경제위기 대응책이어서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약발이 바로 들었다. 무엇보다 질서가 회복됐다. 대부분 국가의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피할 수 없었던 1974년, 한국은 8.1%라는 성적을 거뒀다. 치솟는 물가 속에서도 그 해 수출은 전년보다 38.3%나 늘어났다. 한국경제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혹독했던 31년 전 겨울의 위기를 우리 국민은 절약과 단결로 뛰어넘었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서울경제 2005-01-13 18:28 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501/e2005011318263063820.htm
긴급조치 3호(1974.1.14) http://historia.tistory.com/1276
프레데리크 9세 [Frederik Ⅸ, 1899.3.11~1972.1.14] (영)Frederick Ⅸ. 덴마크의 왕. 제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의 점령에 대항해서 덴마크의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부왕인 크리스티안 10세와 함께 독일군에게 감금(1943~45)되기도 했다. 백성과 왕실 사이에 신뢰감 있는 유대를 견지함으로써 인기가 높았던 군주였다. 장차 왕이 될 크리스티안 10세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알렉산드리네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난 프레데리크는 1912년 왕세자가 되었다. 1917년 덴마크 해군에 입대해 1935년경 부함장의 지위에 올랐으며, 1946년에는 해군 소장이 되었다. 스웨덴의 왕세자 구스타프 아돌프의 외동딸인 잉그리드와 결혼해(1935) 마르그레테·베네딕테·안네마리 등의 자녀를 낳았다. 1942, 1947년 부왕을 대신해 섭정을 맡기도 했으며, 1947년 4월 20일 부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1953년 6월 여성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한 신헌법에 서명했으며, 의회를 단원제로 축소했다. 1964년 딸인 안네마리가 그리스의 왕 콘스탄티노스 2세와 결혼했다. 1972년 1월 프레데리크가 사망하자, 딸인 마르그레테가 왕위를 승계했다. /브리태니커
코롤료프(코롤레프) [Korolyov, Sergey Pavlovich, 1907.1.12~1966.1.14] 오데사 건축직업학교, 키예프 기술학교,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에서 공부했는데, 이곳에서 유명한 설계자들인 N.Y.주코프스키와 A.N.투폴레프 밑에서 항공공학을 배웠다. 로켓 공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F.A. 찬데르와 함께 '모스크바 반작용운동 연구회'를 조직했으며, 1933년에는 이 모임에서 소련 최초의 액체추진제 로켓을 발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기술정지하에 있었지만 군용기에 사용되는 액체연료 로켓 부스터를 설계·시험하면서 이 기간을 보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독일의 V-2 미사일을 개조하여 사정거리를 약 685㎞로 증가시켰으며, 1947년 카프스틴 야르 시험장에서 노획한 V-2 미사일의 시험발사를 감독했다. 1953년 소련 최초의 대륙간탄도 미사일의 기초가 되는 일련의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원래 정치에 무관심한 그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에야 공산당에 입당했다. 소련의 우주발사체 및 우주선의 시스템 공학에 대한 책임자가 되었는데, 그는 코스모스·몰니야·존드 계열의 무인우주선을 비롯한 보스토크·보스호트·소유스 유인우주선에 대한 설계·시험·제작·발사를 지휘했다. 우주계획에서 그의 신분과 역할은 소련정부의 우주정책 때문에 그가 죽은 뒤까지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브리태니커
1959년 1월 14일 북한에서는 전인민의 무장화 방침에 따라 민간 군사조직인 노농적위대가 창설되었다. 북한의 군사조직은 크게 정규군인 조선인민군과 예비병력인 노농적위대, 교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으로 나누어진다. 1959년 결성된 노농적위대는 조선노동당의 당조직을 통해 지방 행정 및 직장 단위로 지역과 인구 등의 특수성에 따라 편성되어 있다. 1963년 이후 북한 지도부는 노농적위대에서 선발된 정예요원들로 각급 공장 및 기업소에 교도대를 조직했다. 일반기업소의 경우 젊은 층은 대부분 직장 교도대에 편성되어 있으며, 지방의 경우는 대부분이 노농적위대에 속해 있다. 또한 17~30세의 여성들도 노농적위대에 속해 있으며 일반적으로 북한의 정규군 체계와 비슷한 편성을 유지하고 있다. 1970년에는 15~16세의 남녀 학생들로 구성된 학생군사조직인 붉은청년근위대가 창설됨으로써, 북한은 전 인구의 약 30%를 동원 대상으로 하는 준군사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보가트 [Bogart, Humphrey, 1899.12.25~1957.1.14] `아프리카의 여왕`(1951년작)으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수상한 미국 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식도암으로 1957년 1월 14일 사망했다. 향년57세였다. 보가트는 1940~50년대 영화에서 거친 남성의 이미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망 3일 후 비버리 힐즈 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는 `아프리카의 여왕`을 연출한 존 휴스톤 감독이 간결하고 감동적인 조사를 읽어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영화 `탈출`에서 공연한 로렌 파콜과 4번 째 결혼했지만 `처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요트`라는 그의 뜻을 기려 관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요트 `산타나호`의 모형을 함께 넣어 묻었다. /조선
1956 - 서울시 주최 제1회 연날리기대회 개최 http://ssairen.tistory.com/43
1954 - 메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결혼 [어제의 오늘]1954년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결혼 ㆍ예정된 파경, 영원한 사랑 매력적인 금발과 백치미의 미소로 20세기 최고의 섹스심벌로 불렸던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가 야구영웅으로 추앙받던 조 디마지오와 결혼한다는 발표는 세계를 흥분시켰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최고의 결합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승에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보수적인 이탈리아계 디마지오와 12살이 어린 자유분방한 성격의 먼로는 언뜻 보기에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두사람 모두 재혼이었다. 1954년 1월14일의 결혼식은 세인들의 폭발적인 관심에 어울리지 않게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3분 만에 끝났다. 당시 디마지오는 통산타율 0.325, 홈런 361개,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56경기 연속안타 등의 기록을 남기고 은퇴한 상태였다. 그는 안정적이고 평안한 삶을 원했다. 그러나 영화배우로 본격적인 도약을 하려던 먼로는 그럴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사랑만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디마지오와 모든 사람의 사랑을 원하는 먼로의 파경은 예정된 것이었다. 유신모기자 /경향신문 2009-01-13 17:58:3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1131758355
1948년 유고가 코민포름으로부터 추방된 후 국내에서는 자주관리형 사회주의 노선을, 대외적으로는 비동맹중립외교를 추진해 온 유고슬라비아 수상 티토가 1953년 1월 14일 개정헌법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개표 후 티토는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내 "`인민 모두에게 권력을`이라는 슬로건이 달성된 지금 국가에 의한 강제관리는 이미 필요없다"고 연설했다. 회의장에 있던 선거인은 `우리들의 티토`라며 환호를 보냈고 밖에는 수만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노동자 출신인 티토는 2차 대전때 독일에 대항하는 빨치산으로 활약하다 유고가 독립하자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유고는 티토의 화합적 리더십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안정된 국가를 유지했다. 티토는 스탈린주의와 거리를 두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펼치며 냉전시대 양극대결에 휘말리지 않는 지혜를 보였다. /조선
- 공군사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 (1999.6.10 발행) 1949년 1월 14일에 설치된 항공사관학교는 3월 15일에 현역사병 중에서 우수한 자 45명을 제1차 소집학생으로 선발하여 입교시킴으로써 개교를 보았는데 동교는 5월 31일 김포 비행장 안으로 병사를 이동하고 6월 10일에 제1기 사관후보생 97명을 입교시켜 본격적인 군 간부요원 교육에 착수하였다.
역사속 오늘[1946년 1월 14일] 경복궁 태극기 게양식 첫눈이 서울을 하얗게 덮은 1946년 오늘, 경복궁 앞 미 군정청 건물에서 국기 게양식이 열렸다. /YTN 2010-01-14 목
카사블랑카회담 [Casablanca Conference] 1943년 1월 14∼26일 북아프리카 프랑스령(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개최된 미국 대통령 D.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W.처칠의 제3차 연합국 전쟁지도회의. 1943년의 연합국측 공동작전을 토의하여 구체적으로는 시칠리아섬 상륙을 결정하였다.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처음으로 이 전쟁을 추축국(樞軸國)의 무조건 항복으로써 종결시킨다는 방침을 명백히 하였다. 이 시기에 북아프리카에 본토의 비시 정권으로부터 독립해서 수립되어 있던 프랑스정권에는 드골과 H.H.지로의 양 지도자가 대립상태에 있어서 이 회담에 양 지도자를 참석시켜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충분한 해결은 보지 못하였다. /네이버
[책갈피 속의 오늘]1943년 F 루스벨트 업무차 비행기 첫 이용 ‘에어포스 원(Air Force One)’은 미국 대통령 전용기를 말한다. 해리슨 포드가 미국 대통령으로 나온 영화 ‘에어포스 원’(1997년)을 통해 국내에도 잘 알려졌다. 사무실을 고루 갖췄다. 응급 수술을 할 수 있는 수술대와 약국도 있다. 에어포스 원은 재급유 없이 1만2600km를 비행할 수 있다. 공중 급유를 통해 사실상 무제한 비행이 가능하다. 대당 가격은 3억2500만 달러(약 3047억2000만 원).
1906년 급진주의자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총리가 되었다. 1907년 그의 정부는 영국과 러시아에 접근하여 3국협상을 성립시켰다. 클레망소의 후계자들은 화해정책을 채택했고, 특히 조제프 카요 내각이 모로코 문제에 관하여 독일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자 프랑스의 애국자들은 분노했다. 1912년 카요 대신 독일에 대한 강경론자인 레몽 푸앵카레가 총리가 되었고 다음해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프랑스의 제3공화국) /브리태니커
- Photograph of Queen by C. Beaton, 1968
비턴 [Beaton, Cecil (Walter Hardy), 1904.1.14~1980.1.18] 영국의 사진가. 주로 유명인사들의 장식 인물사진들로 유명하다. 그는 소년시절 그림엽서와 일요신문 부록에 실려 있는 사교계 여성들을 비롯한 여배우들의 사진에 감탄하면서 사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유모가 그에게 사진기 다루는 법과 인화를 가르쳤으며 11세 때 처음 사진기를 갖게 되자 누이들에게 의상을 차려 입히고 포즈를 취하게 하여 장식 인물사진을 모방했다. 1920년대에 비턴은 그가 대부분의 작품활동을 하게 된 패션잡지 〈배너티 페어 Vanity Fair〉·〈보그 Vogue〉지의 수석 사진가가 되었다. 그는 알루미늄 은박이나 지점토 반죽 같은 재료로 특별히 제작되어 너무나 장식적이 되어버린 배경 때문에 그의 모델 또한 하나의 장식요소로 변하게 되는 초상화 스타일을 개발했다. 그결과 그의 사진들은 때로는 아주 섬세하고, 이국적이며, 때로는 기이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세련된 멋을 풍겼다. 그러한 사진들은 사진집 〈아름다움의 책 The Book of Beauty〉·〈호평받는 사람 Persona Grata〉·〈그것은 내게 커다란 기쁨을 준다 It Gives Me Great Pleasure〉 등에 실려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비턴은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아프리카와 극동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취재했다. 그러나 전시 사진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사진집 〈날개달린 비행중대 Winged Squadrons〉(1942)에 실린 영국의 포위공격 사진들이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인물사진을 시작했지만, 그의 스타일에는 현란함이 훨씬 줄어들었다. 또한 활동범위를 넓혀서 오스카 와일드의 연극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Lady Windermere's Fan〉의 재공연에 사용된 무대장치와 의상을 디자인했고, 뮤지컬 코미디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의 의상을 맡기도 했다. 1972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로물로 [Romulo, Carlos P(eña), 1899.1.14~1985.12.15] 필리핀의 외교관, 정치가, 국제연합총회 의장. 카밀링 출생. 필리핀대학과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한 후 언론계로 들어가 《트리뷴》지(誌) 주필, 《필리핀 헤럴드》 부사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에 참가하였다. 대전 후 극동자문위원회 대표, 샌프란시스코회의 수석전권으로 활약하였고, 1949년 국제연합총회 의장을 거쳐 외무장관이 되었으나 1952년 이후에는 다시 미국 주재 대사, 1956년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대표를 지냈다. 1962년 이후 필리핀대학 학장, 1969년 다시 외무장관이 되었다. /naver
1898 - 영국의 동화작가, 수학자 캐럴(Carroll, Lewis) 사망 캐럴 [Carroll, Lewis, 1832.1.27~1898.1.14] 영국의 동화작가, 수학자. 본명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 럭비학교에서 옥스퍼드대학교에 진학하여 수학을 전공하였으며, 훗날 모교의 수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 친구의 딸인 앨리스 리델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것을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1865)와 그 속편인 《거울 나라의 앨리스 Through the Looking-Glass and What A1ice Found There》(1871) 등의 유머와 환상이 가득찬 일련의 작품으로써, 근대 아동문학 확립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밖의 주요작품으로는 《스나크 사냥 The Hunting of the Snark》(1876) 《실비와 브루노 Sylvie and Bruno》(2권, 1889∼1893) 등과 시집이 있다. 그의 소설이나 시는 현대의 초현실주의 문학과 부조리문학의 선구자로 간주되며, 넌센스 문학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성직자의 자격을 얻었음에도 내성적인 성격과 말더듬이 때문에 평생 설교단에 서지 않고,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빅토리아왕조의 대표적인 기인(奇人)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naver
1892 - 독일의 반나치 신학자, 목사 니묄러(Niemöller, Martin) 출생 니묄러 [Niemöller,(Friedrich Gustav Emil) Martin, 1892.1.14~1984.3.6] 독일의 저명한 반나치 신학자·목사. 고백교회의 창설자이며 세계교회협의회 회장을 지냈다. 목사의 아들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독일 잠수함 함장이 되었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뮌스터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1931년 베를린 교외의 유행의 거리 달렘에서 목사가 되었으며, 2년 후 국가사회주의자들(나치당)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하여 목사긴급동맹을 만들었다. 그 그룹은 다른 활동들도 많이 했지만, 점점 늘어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차별에 맞서 싸우는 활동을 지원하였다. 광범위한 독일 개신교 교회(루터 교회와 개혁교회) 안에서 고백교회의 창설자이자 핵심요원이었던 니묄러는 나치와 '독일국가교회'(Deutschen Christen)가 독일 교회를 통치하게 하려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반대운동을 펴나가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고백교회의 저항은 1934년 바르멘 교회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선포되고 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니묄러는 독일 전역을 돌며 설교하다가, 1937년 히틀러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었다. 결국 작센하우젠에 수감되었다가 다카우 강제수용소로 옮겨지고 1945년에 티롤로 이감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바로 이곳에서 연합군에 의해 구출되었다. 그는 개신교 교회의 재건을 도왔으며, 1945년 해외국장이 되었고, 1948년에는 교회협의회의 임원이 되었으며 1947~64년까지 헤세-나소 지역교회의 총회장으로 봉사했다. 히틀러 시대를 겪은 니묄러는 독일인들의 집단적 죄에 책임을 느끼고 1945년의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 같은 독일 개신교 교회의 선언문을 작성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1961년 세계교회협의회의 6명의 의장 중 한 사람으로 뽑혔고, 1968년까지 재직했다. 독일과 세계의 비무장화에 대한 기대가 점점 절망적인 방향으로 흐르자, 니묄러는 논쟁적인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국제적 화해와 비무장을 주장하는 강연을 했고 독일연방공화국이 서방측으로 기운 것에 반대하면서 핵무기 경쟁에 대항해 싸웠으며 동구권 국가들과 접촉하고자 애썼다. 1952년에 모스크바, 1967년에는 북베트남을 여행하였다. 작품에는 여러 권의 설교집과 자서전인 〈U-보트에서 설교단으로 Vom U-Boot zur Kanzel〉(1934)가 있다. 그의 생애는 슈미트의 〈목사 니묄러 Pastor Niemöller〉(1959)와 슈타르트 다피트존의 〈하느님의 사람 God's Man〉(1959)에 기록되어 있다. 세계 평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7년에 레닌 평화상을 받았고, 1971년에는 독일 최고의 명예인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1875 - '원시림의 성자' 슈바이처(Schweitzer, Albert) 출생 슈바이처 [Schweitzer, Albert, 1875.1.14~1965.9.4]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을 치료하면서 평생을 보낸 선교의사이다. 그는 의사로 활동하기 전에는 신학과 철학 부문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았다. 음악가로서도 자질을 보여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박애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1913년 의학박사가 된 그는 아내 헬레네와 함께 아프리카로 건너가 선교의사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가봉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세우고 자신의 재산과 기부금으로 운영했다. 그러나 당시 가봉은 프랑스령이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적국 외국인(독일인)이라는 이유로 구금되기도 했다.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만이 문명의 존속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었다. 1952년 '인류의 형제애'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낙천주의자는 어디서나 청신호를 보는 반면에 비관주의자는 모든 곳에서 붉은 정지신호를 본다. 그러나 정말 현명한 사람은 마치 색맹처럼 색을 구분하지 않는다."
- 알베르트 슈바이처
라이스 [Reis, Johann Philipp, 1834.1.7~1874.1.14] 독일의 기술자, 전화 발명가. 겔른하우젠 출생. 전기식 전화를 최초로 발명했다. 프리드리히스도르프의 가르니어학교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하셀학교에서 공부하고 기능공수업을 받았다. 기능공으로 있을 때 수학과 자연과학을 독학하여 1858년부터 가르니어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전화 발명에 관심을 가지고, 1860년에 전화기를 발명하였다. 1861년과 1864년에 학회에서 공개실험을 시도하였으나 생전에는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1876년 미국의 A.G.벨의 실용적인 전화 발명보다 15년 앞섰다. /naver
아웃콜트 [Outcault, Richard Felton, 1863.1.14~1928.9.25] 미국의 풍자만화가. 연속만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연속 풍자만화 〈옐로 키드 Yellow Kid〉를 창작했다. 아웃콜트는 오하이오의 신시내티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880년대초에 발간된 유머 잡지 〈저지 Judge〉·〈라이프 Life〉에 원고를 기고했다. 1885년에 이르러서는 조지프 풀리처가 1883년에 사들여 활기를 되찾은 〈뉴욕 월드 New York World〉에 빈민가의 삶을 다룬 풍자만화를 그렸다. 1896년 2월 16일 〈뉴욕 월드〉가 실시한 컬러 작품 심사에서 그가 그린 잠옷 차림의 개구장이 소년의 그림이 뽑혔다. 밝은 노란색 옷을 입고 있는 그 소년은 널리 인기를 끌었으며 '옐로 키드'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 소년이 입고 있는 잠옷에는 의미있는 속어가 씌어 있었다. 아웃콜트가 그해말에 〈뉴욕 월드〉를 그만두자 〈뉴욕 저널 The New York Journal〉의 소유주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그를 고용했다. 경매에서 그 그림의 소유권을 놓고 풀리처와 허스트 사이에 경쟁이 붙었으나 결국 풀리처가 포기하고 조지 룩스를 고용해 '옐로 키드'를 그리게 했다. 아웃콜트의 고용을 놓고 벌어진 신문 전쟁과 야바위로 인해서, 그뒤 세상을 놀라게 하거나 무도한 출판업에는 ' 옐로 저널리즘'이라는 표현이 붙게 되었다. 〈옐로 키드〉가 성공하자 다른 많은 연속만화들이 나왔다. 1897년에 아웃콜트는 〈뉴욕 저널〉을 떠나 〈뉴욕 헤럴드 The New York Herald〉로 갔으며 1902년 2번째로 중요한 풍자만화 〈버스터 브라운 Buster Brown〉을 탄생시켰다. 버스터는 외모가 말쑥하고 깔끔했으며 〈옐로 키드〉의 거칠고 활기에 찬 빈민가와는 전혀 다른 상류사회를 무대로 짓궂은 장난을 치는 사람이었다. 이 연속만화는 그뒤 여러 제품 광고에서 버스터 브라운이라는 이름으로 쓰임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세상을 바꾼 최초들 89 - 만화의 선구자들 만화의 역사는 유구하다. 고대 이집트의 초상화, 그리스 신전의 소벽(消壁), 바유의 태피스리 등이 만화의 시조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통만화 즉, 연속적인 그림과 주인공의 생각과 대사를 담은 '풍선'이 등장하는 만화는 최근 탄생했다. 19세기의 인쇄술 발달은 현대 만화의 탄생을 부추겼다. http://www.taebaek119.or.kr/commu/Free_View.asp?WriteMode=Y&c_page=11&Seq=301&Findstr=&Field=
로티 [Loti, Pierre, 1850.1.14~1923.6.10] 프랑스의 소설가, 해군장교. 본명 비오(Louis-Marie Julien Viaud). 로슈포르 출생. 어려서부터 고독하고 몽상적인 성격으로 벵골만에서 죽은 형과 같은 선원이 되고 싶어했다.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를 시작으로 이스탄불 ·중국 ·일본 ·팔레스타인 등지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각지의 인상을 바탕으로 관능적이고 이국적인 작품을 썼다. 특히 본능과 습관 및 미숙한 사상으로써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을 동경했고, 브르타뉴의 어부들, 바스크의 밀수입자, 타히티 처녀들의 생활 등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거기에도 결국 공허감을 느끼고 새로운 다음 목적지를 향하였다. 그의 정신 밑바닥에 깔린 것은 페시미즘이다. 작품에 《아지야데 Aziyade》(1879) 《로티의 결혼 Le Mariage de Loti》(1880) 《아프리카 기병 Le Roman d’un Spahi》(1881) 《빙도(氷島)의 어부 Pecheur d’Islande》(1886) 《동방의 환영(幻影) Fantome d’Orient》(1892) 《라문초 Ramuntcho》(1897) 등이 있다. /naver
- 'Chase' - 'The Cradle' 모리조 [Morisot, Berthe, 1841.1.14~1895.3.2] 프랑스의 화가·판화가.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작품을 전시했으며, 친구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상파 화가들의 투쟁에 계속 참여했다. 정부 고위관리의 딸(그리고 중요한 로코코 화가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손녀)로 태어난 모리조는 일찍부터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진지하게 미술에 몰두했다. 1862~68년에 그는 코로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1868년에 만난 마네는 그의 작품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마네는 모리조의 초상화, 예를 들면 〈휴식 Repose〉(1870경,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 하로비던스 로드아일랜드 미술관 소장) 등 여러 점을 그렸다. 마네는 모리조의 작품을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모리조는 마네에게 야외에서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모리조의 작품은 마네와 같이 구도를 강조했으며, 동료 인상파 화가들처럼 광학적 색채실험에만 몰두하지는 않았다. 모리조의 그림에는 그의 가족들이 자주 등장했는데, 특히 여동생 에드마는 〈풀밭에 앉아 있는 화가의 여동생 퐁티용 부인 The Artist's Sister, Mme Pontillon, Seated on the Grass〉(1873,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소장)·〈화가의 여동생 에드마와 어머니 The Artist's Sister Edma and Their Mother〉(1870, 미국 워싱턴 D. C. 국립미술관 소장)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섬세하고 미묘하며 아름다운 색채(그는 차분한 에메랄드 빛이 섞인 빨강색을 자주 사용했음)로 모리조는 동료 인상파 화가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모리조의 작품도 많은 평론가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풍부한 교양과 매력을 갖춘 여성인 모리조는 말라르메와 드가, 르누아르 및 모네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는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했다. /브리태니커
- 'Jean Rimbaud' (1872) - 'Flowers in Vase'
- 'Still Life with Pansies' - 'Still Life'
1836 - 프랑스의 화가 팡탱 라투르(Fantin-Latour, Henri) 출생 팡탱 라투르 [Fantin-Latour, Henri, 1836.1.14~1904.8.25] 본명은 Ignace Henri-Jean-Théodore Fantin-Latour. 프랑스의 화가·판화가·삽화가. 꽃이 있는 정물화와 초상화, 특히 동시대 프랑스 미술계의 저명인사들을 집단으로 구성한 초상화로 유명하다. 유명한 초상화가인 그의 아버지가 그의 최초의 스승이었다. 후에 르코크 드 부아보드랑 학교와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다. 프랑스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했으며 1863년에 또한 그것에 반발한 '살롱 데 르퓌제'에도 출품했다. 아카데미즘을 따르기는 했지만 독자적인 양식을 사용했다. 당대의 주요화가인 J.A.D. 앵그르와 외젠 들라크루아, 카미유 코로, 에두아르 마네, 귀스타브 쿠르베 등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의 집단 초상화는 종종 17세기 네덜란드의 길드 초상화처럼 인물의 머리와 몸체를 일렬로 배열했는데 당대의 여러 문필가와 예술가들을 묘사했기 때문에 상당한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꽃 그림은 특히 영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제임스 맥닐 휘슬러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소개로 에드윈 에드워즈가 그를 후원했다. 부유한 아마추어 판화가였던 에드워즈는 팡탱 라투르의 정물화를 수년 간에 걸쳐 구입했다. 말년에는 주로 석판화를 제작하는 데 전념했다. 1876년 살롱에서 엑토르 베를리오즈를 기념하여 만든 〈기념일 L'Anniversaire〉을 전시했으며 그후 정기적으로 석판화 전시회를 가졌다. 그중 가장 독특한 작품은 리하르트 바그너와 베를리오즈 등 여러 작곡가들의 음악을 그림으로 나타낸 상상력 풍부한 드로잉과 우아한 초상화였다. 아돌프 쥘리앙의 〈바그너 Wagner〉(1886)·〈베를리오즈 Berlioz〉(1888)에 삽화를 그렸다. /브리태니커
토펠리우스 [Topelius, Zacharias(Zachris), 1818.1.14~1898.3.12] 핀란드의 시인, 소설가. 당시까지는 핀란드어가 문학에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스웨덴어로 저작을 하였으나, 조국애와 향토의 자연 등이 작품 깊숙이 스며 있어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1864년 헬싱키대학교 교수로, 1875∼1878년에는 같은 대학총장을 역임하였다.
토르베케 [Thorbecke, Johan Rudolf, 1798.1.14~1872.6.5] 19세기 네덜란드의 지도적 정치가로서, 총리를 지냈으며(1849~53, 1862~66, 1871~72) 1848년 헌법으로 수립된 의회제도를 공고히 했다. 독일·벨기에·네덜란드의 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했으며 역사와 법률에 관한 논문을 출판했다. 독일의 학자 프리드리히 카를 폰 자비니가 창시한 역사법학파의 영향을 받은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은 〈헌법 촌평 Aanteekening op de grondwet〉(1839)에 표현되어 있다. 그는 네덜란드의 정치체제를 변화시킨 1848년 헌법의 주요 기안자였다. 이 헌법으로 네덜란드는 독재권을 가진 왕과 제한적 권력을 지닌 의회가 통치하는 입헌군주국에서 의회가 입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국으로 변모했다. 그 자신은 1849년 자유당 당수로서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곧 선거권 확대, 지방정부 및 시정부 선출을 위한 직접선거제를 실시함으로써 이 헌법을 강화했다. 특히 제1·2차 내각에서는 항해법을 실시하고 물품세를 폐지함으로써 자유무역을 장려했고, 새 운하와 수로 건설을 후원했다. 이른바 학교논쟁(schoolstrijd)이 확산되자 그는 특정 종교와 관계없는 '중도적' 학교를 지지하면서 국가가 지원하는 교구학교 설립을 바라는 보수적 자유당과 로마 가톨릭 교단에 반대했다. 한편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했으나 원주민 농업의 착취제도는 유지시켰다. 또한 델프트에 종합기술학교를 세우고 중산층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중등학교를 설립했다. 정치활동시기 내내 그는 국왕 빌렘 3세와 대립했다. 1872년 그가 죽은 뒤, 자유당 내에서 진보파와 보수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결국 종교정당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 USA, 10 Dollars (Banknote) Alexander Hamilton
1790 - 공공채무 보고서 [오늘의 경제소사/1월14일] <1294> 공공채무 보고서 ‘국가채무 처리와 재정운용에 대한 계획안을 제출하시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에 임명된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하원이 내려준 첫 과제다. 3개월 이내 제출을 독촉 받은 해밀턴은 1790년 1월14일 ‘공공채무에 관한 첫번째 보고서’를 하원에 올렸다. 국채발행을 통해 미국은 빠르게 재정적 안정을 굳혔다. 국채의 대량 발행과 유통을 통해 월스트리트도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성공에 자신을 얻은 해밀턴은 모두 다섯 차례의 경제 관련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해 동의를 얻어냈다. 미국경제의 뼈대가 여기서 갖춰졌다. ‘역대 최고의 재무장관’으로 기억되는 해밀턴의 첫 작품인 공공채무 보고서는 14만여개 단어로 작성돼 초기 미국영어를 연구하는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권홍우 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01/13 17:47:44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01/e2009011317474397490.htm
1761 - 아흐마드 샤 두라니, 파니파트에서 마라타인의 대군을 격파 [역사 속의 인물] 아프간 최초의 민족 국가 세운 두라니 아프가니스탄은 외세의 침략과 종족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로 1747년에 아흐마드 한 아브달리가 최초의 민족 국가인 두라니 왕국을 세웠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왕 나디르 샤 휘하의 장군이었으나 그 해에 나디르 샤가 암살당하자 왕위에 올랐다. 파슈툰족 대표들은 전통 종족회의인 로야 지르가를 통해 9일간의 논쟁 끝에 그를 왕으로 추천했다. 1722년에 태어난 아브달리는 25세에 권좌에 오른 뒤 아흐마드 샤 두라니로 개명하고 통치에 나섰다. 두라니는 ‘진주 중의 진주’라는 의미였다. 그는 칸다하르를 수도로 정하고 주화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으며 인근 지역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세력을 넓혔다. 그는 거의 전 재위 기간에 걸쳐 전쟁을 벌였으며 인도를 9번이나 침략했다. 당시 인도의 무굴제국은 약세에 접어들었는데 무굴제국을 멸망시킬 생각까지는 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두라니 왕국의 최대 영토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인도와 이란, 타지키스탄 일부를 포함할 만큼 넓었다. 무굴제국뿐만 아니라 시크교도, 마라타인들과도 치열하게 싸웠다. 1761년 오늘, 델리 북쪽의 파니파트에서 마라타인들의 대군을 크게 격파하기도 했다. 50세인 1772년에 그가 숨진 후 후손들이 왕위를 이었으나 두라니 왕국은 115년 만인 1862년에 멸망했다. 김지석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4.01.14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940&yy=2014
1753 - 아일랜드의 철학자, 성직자 버클리(Berkeley, George) 사망 버클리 [Berkeley, George, 1685.3.12~1753.1.14]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년 3월 12일 – 1753년 1월 14일)는 아일랜드의 철학자이자,성공회주교이다. 버클리의 철학은 우리가 지각하는 것만이 실체이며, 지각하지 못하는 것의 실체는 없다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Esse est percipi)"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극단적인 경험론에 속한다.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끝에 1709년 발표한 《시각신론(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으로 처음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늘날 그의 결론은 기초적 광학이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 이론은 물질적인 것은 없고, 오직 정신적인 사건과 그것을 지각하는 사고방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쓴 글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것은 인지원리론(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1710)와 힐라스와 필로누스의 세 대화(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 1713)(필로누스(Philonous)는,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lover of the mind)의 뜻으로, 버클리 자신을 나타냄)가 있다. 1734년, 그는 이후 수학 발전에 영향력을 크게 끼쳤던, 과학의 기초에 대한 비평인 The Analyst를 출판했다. /위키백과
1742 - 영국의 천문학자 핼리(Halley, Edmund) 사망 핼리 [Halley, Edmund, 1656.11.8~1742.1.14] [오늘속으로(1월14일)] 핼리 1742년 1월14일 영국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86세로 작고했다. 핼리가 옥스퍼드 대학 천문학 교수로서, 그리고 만년에는 그리니치 천문대 대장으로서 이론과 관측에서 천문학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지구에서 본 항성의 천구상 위치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조금씩 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고유운동’은 핼리가 처음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26세 때 출현한 대혜성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핼리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고종석논설위원 aromachi@hk.co.kr /한국일보 2004-01-13 17:27
질버만 [Silbermann, Gottfried, 1683.1.14~1753.8.4] 대표적인 악기제조업자 가문인 질버만가(家)의 일원이다. 1710년 프라이베르크로 옮기기까지 슈트라스부르크의 이름난 악기 제조업자였던 형 안드레아스의 가게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스피넷·클라비코드·하프시코드를 만들었으며 피아노의 제작을 실험했다. J. S. 바흐는 그의 피아노 가운데 2대를 연주했는데 그 악기들의 구조를 비판했다. 그후 그는 자신의 피아노를 개량했고 결국에는 바흐조차도 파아노 판매에 있어 질버만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질버만은 바흐가 방문했던 해인 1736년 궁정 오르간 제작자가 되었으며 그 명성이 널리 퍼졌다. 바흐의 아들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질버만의 훌륭한 클라비코드를 버리는 슬픔을 표현 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753년 죽었으며 자신의 사업을 조카인 요한 다니엘 질버만에게 남겼다. 역시 건반악기 제작자이자 연주가인 또다른 조카 요한 하인리히도 독자적으로 폭넓은 명성을 얻었으며 인도와 같이 먼 곳에서도 주문이 쇄도했다. /브리태니커
1506 - 라오콘(Laocoon) 군상 발견 [이 주일의 역사] 라오콘 군상 발견 트로이의 신관 라오콘(Laokoon)은 트로이 전쟁 막바지 그리스군이 남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는 것에 반대하며, 숨은 음모를 경고한다. 그러나 이 행동은 그리스를 후원했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게 되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은 포세이돈이 보낸 두 마리의 독사에 칭칭 감겨 죽게 된다. 정광용 기자 kyjeong@ /부산일보 2009-01-12 [08:22:31] http://news20.busan.com/news/newsController.jsp?newsId=20090112000081
발데마르 1세 [Valdemar I, 1131.1.14~1182.5.12] 별칭은 발데마르 대왕(Valdemar den Store). 덴마크의 왕(1157~82 재위). 덴마크 선박을 위협하던 벤드족(슬라브계 종족)을 완전히 물리쳤고, 신성 로마 황제의 지배를 받던 덴마크를 독립시켰으며 교회로부터 자신의 왕조인 발데마르 왕가의 세습 통치권을 승인받았다. 남부 유틀란트 공작인 크누드 라바르의 아들이며 덴마크 왕 스벤 2세의 증손자인 그는 덴마크 왕위를 놓고 25년 넘게 벌인 내란을 끝낸 뒤 단독 통치자의 지위를 굳혔다. 곧이어 양형제(養兄弟)인 압살론의 도움을 받아 여러 차례 벤드족 정벌에 나섰고 압살론을 로스킬데 주교로 임명했다. 1169년경 벤드족의 요새 뤼겐(지금의 독일에 있음)을 점령해 로스킬데 주교구에 편입시켰으며 아르코나에 있는 벤드족의 사원을 파괴했다. 그러나 1년 뒤 동맹자인 작센의 사자공(獅子公) 하인리히에게 벤드족을 정벌해 얻은 이익을 나눠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성 로마 황제인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를 주군으로 인정했으며 대립교황 빅토르 4세(또는 5세)를 편들었는데 당시 룬드 대주교였던 덴마크의 최고 성직자 에스킬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대항할 수 없다고 여겨 망명했다. 발데마르와 압살론 주교가 1165년경 마음을 바꿔 알렉산데르를 교황으로 인정하자 에스킬은 돌아왔다. 에스킬은 발데마르의 아버지 크누드 라바르의 시성(諡聖)을 재가(裁可)했으며, 또 발데마르의 아들 크누드 4세를 공동통치자로서 축성했는데(1170) 이는 발데마르 왕가의 세습통치를 인정하고 프리드리히 1세의 종주권을 무효로 만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인의 공격에 대비해 미리 요새를 개선하고 군사력을 늘린 뒤에는 프리드리히 1세와 동등한 자격으로 동맹을 맺었고(1181) 자기 딸과 프리드리히의 아들을 결혼시켜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 강압통치 때문에 몇 번 반란이 일어났으나 곧 진압했다. 그중 가장 큰 반란(1180)은 1177년부터 룬드 대주교였던 압살론의 정책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으나 1181년 진압되었다. /브리태니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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