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해 뛰고 싶었다.
단 한 번밖에 없는 내 삶을 멋지고 조화롭게 경작하고 싶었다.
나만의 기도는 아닐 것이다.
모든 이들의 소망이자 바람일 것이었다.
열심히 사는 건 좋지만 매 순간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과 휴식, 투자와 소비, 도시와 자연, 감성과 이성, 도전과 겸손, 예술과 무감, 해태와 열정, 욕망과 성찰, 소유와 나눔, 삶의 들머리와 날머리에 대한 밸런스 등등 생각할 부분이 참으로 많았다.
사는 게 별거냐고 얘기들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평범한 여로일지라도 그 안에서 소중한 '일상의 무늬'를 건져올리고 삶의 '의미와 품격'을 고양시키려는 노력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일종의 책무라고 믿었다.
소천하신 부모님은 3남2녀의 자식들이 어렸을 적부터 '돈의 활용'에 대해 가끔씩 이르곤 하셨다.
"애먼 데 쓰지 말고 꼭 가치있는 곳에 써야 한다"
모태신앙이었던 나도 사춘기가 되고 세상에 조금씩 눈을 뜨면서 그리 살겠노라고 기도했었다.
시골 촌놈이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고 '해병대 특수부대'를 다녀왔으며 대학졸업 후엔 직장을 잡았다.
8년 연애했던 여친과 결혼해 아이도 둘을 두었고 용광로처럼 뜨겁게 세상과 맞짱을 뜨며 좌충우돌했다.
그렇게 이십대 10년과 삼십대 중반까지 내 주변과 세상을 경험하면서 다양한 케이스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보기에 세상엔 '암'이나 '역병'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 있었다.
살아갈수록 새롭게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은 '관계의 절망'이었다.
특히 가족이나 친구 등 가까운 사이에서 더욱 그랬다.
참혹하고 암담한 현실을 주변에서 꽤 여러번 목도했다.
역설이지만 내겐 인생현장의 여과 없는 가르침이자 교과서였다.
애들 4-5살 때 아이들을 그 당시 신혼이었던 '처제'에게 맡기고 일주일 간 아내와 함께 '하와이'에 갔었다.
내 나이 서른두 살 때였다.
그때 '선셋비치'에서 광대한 태평양의 낙조를 보면서 아내에게 얘기했었다.
"주변에서 많은 케이스를 보았다"고.
"미래의 행복은 너무 막연하고 불확실하니 그런 미래를 위해 현재의 '소공추'(소통, 공감, 추억)를 희생시키지 말자"고 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과의 '소공추'에 힘쓰며 살자"고 했고 우리는 그리 다짐했다.
앞으로 20년이나 30년 후에 우리는,
'저질렀던 일'보다 '저지르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더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실천과 행동의 근육에 의욕과 정열을 불어 넣자고 했다.
물 한 방울로 사막을 다 적실 수는 없지만 그 한 방울을 빼놓고 사막을 적시기 위해 고민한다면 이게 어찌 가당키나 한 발상이겠는가 싶었다.
"우리가 꿈꾸는 행복도, 소중한 사람들도, 값진 소공추도 늘 가까이에 있음을 잊지 말자"고 했다.
삶의 변화는 언제나 작은 실천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었다.
다짐했다면 진득하게 실천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는 새 1997년 연말에 'IMF 사태'가 터졌고 나는 2년 반 동안 '구조조정 책임자' 역할을 한 뒤에 옷을 벗었다.
그리고 삼십대 후반에 연거푸 두 번이나 사업을 말아먹었다.
용기는 가상했으나 시대흐름보다 너무 빠르게 주사위를 던진 게 화근이었다.
작금의 '쿠팡' 같은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인생의 무서움과 가혹함 그리고 피눈물을 제대로 맛봤다.
이래저래 세상과 과감하게 부대낄수록 나의 사유는 깊어졌고 길어졌다.
그리고 눈물겨운 기도가 끝없이 이어졌지만 우리가 한번 세웠던 원칙을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순 없었다.
애들이 아장아장 걷기시작하자 내가 첫번째로 데려간 가족 산행지는 '한라산'이었다.
한국에서 제일 높은 곳이었으니까.
당연한 선택이었다.
지금도 그때 사진들을 보면 미소가 흐르고 웃음이 터지지만 우리에겐 매우 상징적인 결정이었고 실천이었다.
내 자녀들에게 일렀다.
"국영수도 좋고, 학원도 좋지만 아름다운 자연의 진정한 주인이 되라"고 했다.
"이 멋진 지구라는 별에 잠간 소풍을 왔는데, 짧은 인생을 살면서 그냥 스쳐가는 객체가 아니라 환희와 감동을 제대로 만끽하며 무한 감사를 표하는 주체가 되라"고 했다.
"일생 동안 떠남과 돌아옴, 도전과 감동, 자연과 문화를 더 사랑하며 살라"고 했다.
딸은 이미 대학에 들어갔고 아들이 고3 여름방학 때, 수능 100여 일을 앞두고 있는데 나는 가족들을 데리고 6일 간 '세부'에 갔었다.
담임교사의 엄청난 반대와 비난이 있었지만 우리도, 아들도 그리 괘념치 않았다.
내 가까운 지인들도 "미쳤냐"고 했지만 지금 서른한 살인 아들은 '해병대 기습특공대'를 나왔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지금은 '롯데그룹'에서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우리가 걷고 경험한 만큼, 딱 그 만큼만의 풍경과 파노라마가 우리네 가슴에 쌓이는 법이다.
나는 지금도 새벽마다 큐티를 한다.
삼십 년도 넘은 오래된 습관이다.
깨닫고 다짐했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믿으며 한결같이 그리 기도하고 있다.
삶은 '앎'이 아니라 '행'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대동소이하다.
싯점이 문제지 '고통총량의 법칙'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
인생 행로에 행복과 감사도 많지만 비루와 고통도 적잖다.
'삶의 비참을 이기는 칼 한 자루'는 누구든지 다 갖고 있다.
어떤 이에겐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문학, 음악, 운동, 봉사, 도전, 특기, 여행, 권력, 직업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자신이 정한 원칙대로 흔들림 없이 가면 된다.
언제 단 한 순간이라도 인생길이 '미로'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광명대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레서 삶이 공평한 거다.
이번 여름휴가 때 '텐산산맥'에 다녀왔다.
처음 가본 '키르기스스탄'은 우리의 70년대 또는 80년대 초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형언할 수 없는 대자연이 있었고, 그 속에서 겸손과 감사 그리고 감동을 하나 가득 담아왔다.
만년설에 뒤덮힌 고봉들과 옥빛 '아라콜 호수'의 비경도 압권이었지만, 전 세계 다양한 국가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진지한 열정과 도전을 보았다.
그리고 만났다.
그런 이들의 순수, 겸손, 배려가 고산보다 더 아름답고 훌륭했음을 고백한다.
내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내 인생'이다.
사람들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 '이순'이다.
남은 생이 그리 길지 않았음을 절감한다.
6시간 동안 직항을 타고 돌아오는 하늘길.
나는 계속 깊은 사유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좌석 등받이 테이블을 내려 메모지에 이렇게 적었다.
'memento mori', 'carpe diem', 'amor fati'.
나의 영원한 큐티 주제이기도 했다.
서두에서도 얘기했지만 삶의 '밸런스'를 최대한 유지해야 한다.
나이가 든 만큼 균형을 현명하게 잘 유지하되, 그 속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열심히 노크해야 한다고 믿는다.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면서 각자의 인생 후반무대를 향기롭게 연출했으면 좋겠다.
모두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태풍 '카눈'이 지나간 일요일 오후.
편안하고 달콤한 휴일이길 빈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도전하는 시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