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0 대 한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Columbia Jays' - 'Long-billed Curlews'
2012 - 존 오듀본 <미국의 새들> 초판본 ‘89억’ 낙찰 19세기 조류책, 89억 원 크리스티스에 따르면 인쇄된 책의 낙찰가로는 사상 3번째로 높은 가격이라고 한다. <AP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새들> 다른 초판본이 2010년 12월 런던 소더비즈에서 1150만 달러(약 130억 6,400만 원)에 낙찰된 적이 있어 지금까지 중에 사상최고가라고 한다. <미국의 새들>은 전 4권이며 가로 약 1미터•세로 약 65센티 가량의 크기다. 19세기 당시 북미에 잘 알려진 조류 400종류 이상이 실물 크기로 그려져 있다. 1827년〜1838년까지 초판본 약 200부가 인쇄돼, 그 중 120부가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뉴욕 교도】 /교도통신 12/01/21 17:01 http://www.47news.jp/korean/international/2012/01/033519.html
2010 - 아이티에 또 규모 6.1 강진 또 규모 6.1 강진…아이티 ‘공포의 아침’ 아이티에서 20일 다시 규모 6.1의 강진이 발생해 공포에 빠진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은 현지시각으로 이날 아침 6시3분, 포르토프랭스의 북서쪽으로 59㎞ 떨어진 곳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진앙의 깊이는 9.9㎞라고 덧붙였다. 지난 12일 규모 7.0의 지진발생 이후 있었던 40여차례의 여진 가운데 최대규모다. <에이피>(AP) 통신은 이날 새벽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선 심하게 느껴지는 흔들림이 수초간 계속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거리로 뛰쳐나왔다고 보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흔들림이 멈추고 30초 정도 도시 곳곳에서 일련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며 다른 건물들이 무너지는 소리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지난주 지진 이후 포르토프랭스에선 상당수의 사람들이 텐트 등 임시거주지나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이번 추가지진으로 인한 피해상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날 낮 포르토프랭스의 사람들은 안정을 되찾은 표정이지만, 지진이 발생한 지역의 피해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남미 다른 지역에서도 지진이 잇따르고 있어, 불안감은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날 멕시코와 과테말라 국경에선 규모 6.5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니카라과 지진학자들이 전했다. 전날 새벽엔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각각 규모 4.6과 5.1의 지진이 발생했으나, 모두 별다른 피해는 보고되지 않고 있다. 잇따른 지진이 구조활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는 가운데서도, 각국의 지원과 재건활동은 강화되고 있다.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20일 “포르토프랭스의 항구가 1주 내지 2주 안에 다시 문을 열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앞서 블랙호크 헬리콥터에 나눠탄 미군 100여명은 19일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대통령궁에 주둔을 시작했다. 미군 약 1만2000명이 아이티에 배치됐으며, 해군 2000여명이 추가로 작전에 참여할 예정이다. . 과거 아이티를 지배했던 미국의 군인들이 대통령궁에까지 주둔한 것을 일부는 “점령”이라고 비난했으나, 무기력한 아이티 주민들은 정부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서 치안과 구호활동을 위해 대부분 환영하고 있다고 <데페아>(dpa) 통신 등이 보도했다. 유엔도 19일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군인 2000명과 경찰 1500명을 추가로 파견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이로써 유엔 안정화지원단은 모두 1만2000여명으로 증강됐다. 아이티 당국은 이날 현재 7만5000여명이 매장됐으며, 사망자는 10만~20만명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1700명의 국제구호대는 20일까지 모두 121명을 구조했다. 김영희 김순배 기자 dora@hani.co.kr /한겨레 2010-01-20 오후 10:36:44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00152.html
2009 - 버락 오바마 미국 제44대 대통령 취임식 오늘의 역사 (1월 20일)[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제44대 대통령 취임식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2009년 1월 20일(현지시간) 제 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오바마 신임 대통령은 이날 미 의회 의사당 앞에 마련된 취임식장에서 부인 미셸이 들고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성경에 손을 얹은 채 존 로버츠 대법원장의 안내에 따라 대통령 선서를 함으로써 정식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그는 미국 역사가 시작된 지 232년만에, 그리고 미국이 대통령을 선출하기 시작한 지 219년만에 최초로 흑인 대통령으로 새로운 미국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취임식직전 기도문을 전한 페트릭 워렌 목사는 "인종이나 종교를 초원한 한 국민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가수 에리사 크랭클린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선율에 맞춰 취임식 무대에서 영국 국가인 'long live the Queen' 노래에 맞춰 '신이어 미국을 보호하소서'를 흑인 영가풍으로 불렀다. 이날 선서는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부터 했으며, 오바마의 선서는 이작 펄만(바이올린)과 요요마(첼로),앤서니 맥길(오보에), 가브리엘 몬테로(피아노) 등이 영화음악의 거장 존 윌리엄스가 이번 취임식을 위해 특별히 편곡한 'Air and Simple Gift' 란 곡을 연주한 다음 이뤄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장 주변에는 새벽부터 역사적인 장면을 보기 위해 찾아나선 미 전역의 미국인들이 이날 영하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5-8시간 전부터 장사진을 치고 있었으며, 의사당앞 취임식장에서부터 네셔널 모뉴먼트가 있는 앞까지 개방된 몰에는 이미 150만명에 이르는 인파가 극심한 보안조치 속에서도 가드레일로 안내되는 워싱턴 시내 통행규칙에 따라 차분히 자리해 역사적인 장면을 지켜봤다. 취임식이후 의사당에서 백악관에 이르는 펜실베이니아 에비뉴에는 전통대로 취임식 퍼레이드가 이어졌으며, 미국의 역사를 상징하거나 자랑스런 미국인들이 연도에 마련된 좌석에 가득찬 시민들의 환호속에 백악관까지 행진해갔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90121_0001
2001 - 조지 W 부시, 미국 제43대 대통령에 취임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가 20일 정오 (한국시간 21일 오전 2시, 이하 현지시간) 취임선서와 함께 제43대 미국 대통령으로 정식 취임함으로써 8년간에 걸친 빌 클린턴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의 막을 올렸다. 워싱턴의 의회 의사당 앞에서 거행된 취임식에서 부시 대통령은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온 국민이 단결할 것을 호소하면서 교육개혁과 조세감면 등 대선 당시 제시했던 공약들을 성실히 추진해나갈 것을 다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여러분들에게 방관자나 피지배자가 아닌 시민(Citizens), 책임있는 시민이 돼 봉사의 공동사회와 품격있는 국가를 건설하기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부시 대통령은 "정중하게 내 신념을 실현하며 용기있게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더욱 큰 정의와 인정을 위해 이야기하며 책임을 요구하는 동시에 책임있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내 인생의 원칙이자 나라를 지도하는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부시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학교의 회복을 위한 행동 △사회보장과 의료보장의 개혁 △경제의 추진력 회복을 위한 감세와 근로 계층의 노력에 대한 보상 등 대선 공약사항의 추진을 재차 다짐했다. 외교·안보 정책과 관련해서는 "강한 군대로 도전을 물리칠 수 있는 방위력을 구축할 것과 새로운 세기에는 새로운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대량파괴무기에 대처할 것"을 약속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국경안으로 퇴보하지 않고 국제문제와 세계무역에 계속 관여할 것을 다짐하고 잠재적 적국들에 대해서는 "우리 동맹국들과 우리의 이익을 방어할 것이며 공격과 불신에는 단호함과 힘으로 맞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부시 대통령은 일부 미국인들의 야망이 실패한 학교와 숨겨진 편견, 출생의 환경들로 인해 제한되고 있다면서 "때로는 차이가 너무나 깊어져 우리가 한 국가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대륙에 공존하고 있을 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같은 실정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으며 허용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나는 정의와 기회의 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퇴임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해 "국가에 대한 봉사"에 감사의 뜻을 나타냈으며 대선에서 접전을 벌인 앨 고어 부통령에게는 "정열로 수행했으며 품위로 끝냈던 선거전"에 대해 사의를 표명했다. 이날 취임식은 상하 양원 의원, 대법관, 외교사절 등 귀빈 1천여명과 일반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날 오전 11시30분부터 의사당 앞에서 거행됐으며 워싱턴시 일대에는 축하 시민들 뿐만 아니라 시위대도 대거 몰려들었으나 큰 불상사는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조지 부시 전 대통령(41대)의 장남으로 존 애덤스(2대) 및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6대)에 이어 176년만에 미국 역사상 두 번째의 부자 대통령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의 측근들은 부시 대통령이 취임 직후 전임 클린턴 대통령의 마지막 조치들을 취소하거나 연기시키는 등 대통령의 권한을 지체 없이 행사할 것이라고 전했다. (워싱턴/연합뉴스 이도선 특파원) /한겨레 2001-01-20 http://www.hani.co.kr/section-007100001/2001/007100001200101210205011.html
오늘의 역사 (1월 20일)[2001년] 필리핀 에스트라다 대통령 사임-아로요 부통령, 대통령 승계 뇌물 수수 혐의로 퇴진 압력을 받아오던 조지프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이 ‘피플 파워’에 밀려 2001년 1월 20일 마침내 사임했다. 이에따라 그동안 반(反) 에스트라다 운동을 이끌어온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부통령이 이날 신임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날 오전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15만명의 시위군중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말라카냥 대통령궁을 향해 평화적 시위를 벌이자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국민통합과 질서회복을 위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사임이 발표되자 시위군중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리고 깃발을 흔들며 ‘승리’를 자축했으며, 필리핀 전역은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사임 후 취임한 아로요 대통령은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필리핀 최고의 인기 정치인이다. 마닐라 도심에서 수천명 여성 시위를 선도하는 등 반 에스트라다 진영의 선두에는 항상 아로요가 있었다. 아로요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필리핀 대통령을 지낸 고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의 딸이다. 아버지는 1965년 대선에서 마르코스 전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마르코스를 축출한 ‘피플 파워’는 마침내 그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대학교수 경력의 아로요는 원래 아키노 정부의 무역산업부 차관보로 공직을 시작한 경제전문가. 1992년 아키노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필리핀 민주투쟁당(LDP)의 공천을 받아 상원의원에 당선됐고 1998년엔 필리핀 역사상 최대인 700만표차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311_0004 2000 - 새천년민주당 창당 (총재 김대중, 대표 서영훈) 오늘의 역사 (1월 20일)[2000년] 새천년민주당 창당 (총재 김대중, 대표 서영훈) 20일 서울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새천년 민주당 창당대회는 ‘4·13 총선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치사를 꿰뚫는 주제는 ‘총선 승리’였다. 김 대통령은 ‘총선’ 또는 ‘이번 선거’라는 단어를 9번 사용하면서 4·13 총선이 “도약이냐, 좌절이냐의 기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기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다섯 가지 대국민 약속을 제시하면서 ‘총선에서 승리한다면’이라고 전제 조건을 달았다. 선거를 앞둔 집권 여당의 단골 메뉴인 ‘안정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총선 결과 여당의 안정 의석 확보가 이뤄지지 않으면 노사불안, 외국투자 이탈 등이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김 대통령은 국민회의가 ‘3분의 1밖에 안되는 의석’, ‘지역적 한계’, ‘수적 열세’ 등의 제약 조건 때문에 지난 2년 동안 “뜻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신당 창당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뒤 “남은 3년 임기 동안 이 나라를 나에게 맡겨달라. 내가 일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달라”고 호소했다. 이날 공식 인준을 받은 이인제 선대위원장도 “당과 나라의 운명이 결정될 선거일이 불과 83일 앞으로 다가왔다”면서 “패배는 혼란이며 국가와 국민의 불행으로 직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식전-식후 행사로 나눠 2시간 반 동안 진행된 이날 행사에는 멀티비전과 레이져쇼 등 첨단시설이 등장했으며 전 과정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생중계됐다. 행사장은 민주당 대의원과 참관인, 시민-사회단체 대표, 신 지식인 대표, 주한 외교사절 등 1만2000명으로 가득 메워졌다. 그러나 민주당 강령에서 내각제가 삭제된 데 반발, 자민련에서 김종필 명예총재와 이한동 총재권한대행이 모두 불참, 주최측은 외빈 소개를 생략했다. 이에 앞서 역도 경기장에서는 국민회의 전국 대의원회의가 열려 민주당과의 합당을 결의했다. 5000여명이 참석한 행사는 30분 동안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이어 열린 중앙당 후원회 총회는 모든 권리와 의무를 민주당에 이관할 것을 결의하면서 5분여 만에 끝났다. 양쪽 행사 참석자가 겹치는 바람에 어색한 장면도 연출됐다. 오전 국민회의 행사에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쉽고 섭섭하다”고 말한 이만섭 총재권한대행은 오후 민주당 행사에서는 “민주당이 살아야 우리 나라가 산다”고 목청을 높였다. /조선닷컴 2017-01-20 1996 -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역사적인 총선거, 자치정부 수반에 아라파트 당선 오늘의 역사 (1월 20일)[1996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역사적인 총선거, 자치정부 수반에 아라파트 당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위한 역사적인 총선거가 1996년 1월 20일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및 가자지구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이번 총선에서는 1백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유권자들이 자치정부 수반 겸 자치회의 의장과 88명의 의원들을 선출했다. 수반 선거에는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과 무명의 여성운동가 등 2명의 후보가 출마했으나 88%의 압도적 지지로 아라파트 의장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과 이스라엘과의 평화 완결을 위임받은 자치정부 수반(대통령격)으로 당선됐다. 아라파트는 이날 실시된 자치정부 수반 선거결과 총 유효투표의 88.1%를 얻어 9.03%를 얻은 샤미아 할릴 후보를 누르고 자치정부 수반으로 당선됐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총리는 이번 팔레스타인 총선의 성공적인 실시는 평화에 대한 지지를 표로 나타내 보인 것이라면서 환영했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910_0056
현재 유통되는 10,000원권은 3종으로 83년 10월 8일부터 발행된 「다」10,000원권,
헵번 [Hepburn, Audrey, 1929.5.4~1993.1.20] 오늘의 역사 (1월 20일)[1993년] 오드리 헵번 사망 `로마의 휴일`에서 청순한 모습으로 전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1993년 1월 20일 장암과의 오랜 투병 끝에 63세를 일기로 스위스 로잔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1929년 3월 4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은행가와 네덜란드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헵번은 1951년 영화계에 데뷔, `로마의 휴일`(1953년)에서 깜찍한 연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과 함께 `할리우드의 요정`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헵번은 이후 `사브리나`(1954년) `전쟁과 평화`(1956년)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년) `마이 페어 레이디`(1964년) `어두워질 때까지`(1967년) 등을 통해 1950∼60년대 최고 인기여배우로 활약했다. 26편의 작품을 통해 티없이 맑고 순진한 여성상을 표출해 온 헵번은 1960년대 이후 이따금 단역으로 스크린에 모습을 비춘 것을 제외하고는 은막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1988년 유니세프의 친선대사 제의를 흔쾌히 수락해 인도적 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특히 말년의 4년간을 국제아동기금 순회대사로 세계 각지를 돌며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아동들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을 헌신적으로 전개, 전세계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1992년 9월 투병 중에도 헵번은 기아와 질병의 땅 소말리아를 직접 방문, 전세계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호소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503_0002
1989 - 조지 부시, 미국 제41대 대통령에 취임 조지 부시(Bush, George, 1924~ )는 매사추세츠주(州) 밀턴에서 출생했다. 예일대학교 재학 중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1942∼1945년 항공모함 탑재 뇌격기 조종사로 종군하였고, 1948년 예일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53년 자파타석유회사를, 1954년 자파타원양회사를 공동창설, 이사장으로 있었고, 1959년 공화당에 입당하여 1964년 상원의원선거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한 후 1966년 텍사스주(州) 제7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0∼1973년 국제연합 주재 대사, 1974∼1975년 국무성 베이징[北京]연락사무소 소장으로서 대(對)중국과의 국교정상화에 힘썼으며 1976∼1977년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냈다. 1980년,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R.W.레이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여 두 차례 부통령을 지냈으며, 1989년 제4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후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B.클린턴에게 패하여 재선에 실패하였다. 1982년, 1989년, 1992년, 2001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네이버
1986 -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 첫 미국 수출 역사속의 오늘-현대차 첫 미국 수출 자동차 제작은 부의 상징 이루기 힘든 꿈이였다. 하지만 자동차 선진국의 핵심기술을 어깨너머로 보고 하나 하나 기록한 노력과 열정이 오늘날 자동차 신화를 만들었다. 가장 큰 결실은 1986년 1월20일. GM, 포드, 클라이슬러가 버티고 있는 미국땅에 “현다이(현대의 영어 발음)”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첫 수출을 하면서 부터다. 첫 해 20만대를 팔며 수입차 최다 판매 기록을 갱신하며 미국10대 상품에 선정됐다. 차종은 포니엑셀. 영어로 “예쁘고 귀여운 작은말”을 뜻하는 자동차 “포니”는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이 됐고 한국은 세계 16번째,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고유모델을 갖는 나라가 됐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선 흐름이 수려한 차”라고 평가했다. 또한 현대자동차는 미국수출을 계기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기 시작 한국도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공업국가란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자동차 신화 뒤에는 현대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이 있었다. 1967년 현대자동차를 창립하고 독자모델 개발을 위해 특유의 뚝심을 발휘해 “포니 정”으로 까지 불리며 자동차 외길을 살았던 덕분. 이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현대차가 지난해 미국시장 점유율 3%를 넘었다. 앨라배마 현지 공장이 노조가 없어 안정적인 생산을 한 덕분이라 전한다. 정보관리부 /매일신문 2007년 01월 2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282&yy=2007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일리노이주(州) 출생, 1932년 유레카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아나운서로 일하였다. 1937년 할리우드에 들어가 1964년까지 《Kings Row》(1942) 등 약 50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으나,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1947년 미국노동총연맹 산하 영화배우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처음에는 민주당의 대통령 F.D.루스벨트를 지지하였으나, 1950년대 초부터 차츰 보수적 입장으로 기울어졌다. 첫 부인과 이혼하고 1952년 낸시와 재혼하였다. 1962년 미국공화당에 가입하고,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후보 골드 워터에 대한 찬조연설로 호평을 받았다.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어 조세감면, 복지제도의 확대, 고등교육정책에 힘을 쏟았고, 주(州) 재정을 적자에서 흑자로 바꾸었다. 1976년 공화당 대통령후보지명대회에서 대통령 G.포드에게 패하였으나, 1980년에는 지명되어 민주당의 J.카터를 누르고 제4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강하고 풍족한 미국’을 구호로 내걸고, 보수적이고 강경한 국내외정책을 펼쳐 1984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W.먼데일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조세감면과 사회복지지출을 억제한 ‘레이거노믹스’의 결과 재정 및 무역 적자를 초래하였고, 대외정책에서 레바논 파병 ·리비아 폭격 ·그라나다 침공 ·니카라과 반군 지원 등으로 제3세계에 위협을 주었다. 1986년 이란-콘트라사건으로 인기가 떨어지자 대소(對蘇)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G.부시를 도와 공화당 재집권에 성공하였고, 1989년 퇴임하였다.
1981 -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52명 석방 오늘의 역사 (1월 20일)[1981년] 이란, 미국인질 52명 석방 1979년 11월 4일 이란 회교 학생들에 의해 억류되었던 52명의 미국 인질들이 4백44일 만인 1981년 1월 20일, 레이건 대통령 취임직후 풀려났다. 미국과 이란간의 중개역할을 한 알제리 정부가 미국이 합의해 준 인질해방의 전제조건으로 이란의 동결자산 해제와 영국은행으로의 송금을 이란정부에 약속함으로써 극적으로 타결된 데 따른 것이었다. 또한 인질들의 이용가치가 없어진데다 對이라크전에 전념하기 위한 이란측의 계산도 작용했다. 석방된 인질전원은 알제리를 경유, 서독의 미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카터행정부는 인질구출을 위해 무력구출작전과 경제봉쇄 등을 단행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퇴임직전의 마지막협상에서 성공, 인질들을 돌려받았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411
영국,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서방 국가들은 선수를 파견했으나, 소련의 무력 외교에 항의, 국기 대신 오륜기 또는 각국 올림픽 위원회기를 들고 입장했다. 입장식에서 차기 개최국인 미국 국기 대신 로스엔젤레스 시기가 게양됐고, 폐회식에서도 <로스엔젤레스에서 다시 만납시다>로 표시됐다. 올림픽 강국 미국, 서독, 일본이 불참하자 경기는 소련과 동독의 독무대였다. 이 두 나라는 전체 메달의 51%를, 금메달의 60%를 차지했으며, 소련이 80개의 금메달로 종합1위를, 동독은 47개의금메달로 2위를 했다. /naver
- Guinea Bissau, 1000 Pesos (1978, Banknote)
1973 - 기비니사우의 민족해방운동가 카브랄(Cabral, Amilcar) 피살 카브랄 [Cabral, Amilcar, 1924.9.12~1973.1.20] 기비니사우의 민족해방운동가이자 농업경제학자. 바파타 출생. 중등교육을 마치고, 1948년 포르투갈로 건너가 리스본대학에서 농학 ·수력학을 공부하였다. 1952년 귀국하여 1954년까지 식민지정부에 근무하였고, 그 후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리스본을 거쳐 앙골라로 가서 앙골라해방인민운동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그후 귀국하여 1956년 아프리카기니-카보베르데독립당(PAIGC)을 동생인 L.A.카브랄과 창설, 서기장이 되었다. 1963년 PAIGC를 지도하여 무장투쟁에 돌입, 국토의 4분의 3을 해방시키는 등 큰 성과를 올렸으나, 독립 직전에 PAIGC 본부가 있던 코나크리에서 암살당하였다. /naver
리처드 닉슨(Nixon, Richard, 1913~1994)은 1913년 캘리포니아주(州) 요버린더에서 출생하였다. 휘티어대학교와 듀크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1937년 개인법률사무소를 개설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해군 소령으로 참전하였으며, 종전 후인 1946년 캘리포니아에서 연방의회 하원의원에 공화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하원시절에는 비미활동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에서 알자 히스 등의 대소협력(對蘇協力)을 고발하여 반공주의자로 이름을 떨쳤다. 1950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1952년 D.D.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56년 재선되었다. 1960년 대통령선거에 공화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당후보 J.F.케네디에게 패하였고, 1962년 캘리포니아의 주지사선거에서도 실패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나 변호사 생활을 하였다. 1968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H.험프리를 누르고 당선되었고, 1972년 재선되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개선을 위하여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외교적 성과를 올렸고, 1969년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하여 발표한 ‘닉슨독트린’은 유명하다. 그러나 ‘워터게이트사건(Watergate Case)’으로 말미암아 1974년 8월 대통령직을 사임함으로써 미국 사상 처음으로 임기 중에 사임한 대통령이 되었다. 1981년부터 1994년 뇌졸중으로 사망할 때까지 국제문제 관련 집필과 국제문제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정부의 국제문제 자문에 대한 조언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naver
1962 -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법 통과 오늘의 역사 (1월 20일)[1962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법 통과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법이 1962년 1월 20일 만들어졌다. 이 영화법의 주요 골자는 검열제도를 비롯 영화제작신고, 상영허가, 상영정지 또는 중지권 부여, 그리고 영화업의 허가제도 등 규제적 측면 위주였다. 영화법으로 1965년 이만희 감독은 ‘7인의 여포로’ 로 용공혐의를 받아 입건된 바 있으며, 한국 영화사상 최초의 성인영화라 할 수 있는 ‘춘몽’(1965년 제작, 유현목 감독, 신성일-박수정 주연)은 적나라한 정사 장면으로 유현목 감독이 외설죄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1969년 박종호 감독의 ‘벽 속의 여자‘, 신상옥 감독의 ‘내시’ 역시 외설 혐의로 검찰에 입건됐다. 그러다 1996년 10월 4일, 영화법에 대해 위헌제청 및 헌법소원 등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을 내렸는데,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와 관련된 내용은 헌법에 위배된다’ 는 내용이었다. 이에따라 영화진흥법이 개정(1997.10.11 시행)되었고, 그동안 영화 사전심의를 감독했던 공연윤리위원회는 자율성과 독립성이 강화된 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바뀌었으며 영화심의도 삭제나 수정하는 조치를 금지하고 등급분류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121_0006
오늘의 역사 (1월 20일)[1961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 취임 “조국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으십시오” 1961년 1월20일, 제35대 미국 대통령 존 F.케네디가 취임연설을 통해 자유를 수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국민들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비전을 제시했다. 국민시인 프로스트도 취임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하며 신정부 출범을 축하했다. 풀어야 할 난제들이 많이 쌓여있었지만, 미국인들에게 이 날은 희망의 날이었다. 2개월 반 전 43세 케네디와 47세 닉슨의 대결이 박빙의 선거전이었음을 상기하면 통합의 날이기도 했다. 아일랜드계에 북부출신, 더구나 가톨릭이라는 약점을 안고 선거전에 뛰어든 케네디는 ‘뉴 프런티어’ 정신을 내세워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더구나 영화배우 재클린을 아내로 맞아 이미 매스컴의 스타로 부상한 상태였다. 이에 반해 닉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보수층이 뒤를 떠받치고 있었지만 눌변이었다. 미 대통령 선거 사상 처음 실시된 TV토론은 두 사람의 정책비교를 위해 마련된 자리였지만, 결과적으로 케네디를 위한 자리가 됐다. 자신만만한 태도와 젊음 그리고 세련된 외모와 달변이 시청자들을 매료시키고 있었지만, 닉슨은 오히려 케네디의 젊음과 경험부족을 탓하며 스스로 표를 깎아내리는 우를 범한다. 결과는 케네디의 승리. 하지만 닉슨보다 11만표 정도 많았을 뿐이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405
Scott Base History:
1954 - 반공포로 7700여명, 인도군 포로수용소에서 모두 석방 1954년 1월 20일, 이 날이 중립국 관리위원단의 포로 억류 기간이 6개월이 되는 마지막 날인데 인도가 마지막 선택의 기회를 줬어요. 포로수용소 마당에 삼거리를 만들어놓고 똑바로 가면 남한, 왼쪽으로 가면 북한, 오른쪽으로 가면 제3국으로 가는 거예요. 이 삼거리에서 운명의 선택을 하는 거지요. 여기서 인도행을 선택한 사람이 40명이나 나왔어요. 이렇게 해서 인도 캠프에 모인 숫자가 약 1백명 되었는데 여기서 또다시 탈출자가 생기더군요. 하여간 포로들은 수없이 저울질했던 거지요. (최인훈 '광장') 김현숙 기자 /시사저널 90/6/17 http://www.woorimal.net/hangul/hyundai-fiction/kwangjang.htm
1953 - 아이젠하워, 미국 제34대 대통령에 취임 [책갈피 속의 오늘]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이다.
1952 -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 첫 입교 한국 육군사관학교는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를 거쳐 1946년 5월 남조선국방경비대 사관학교로 발족(태릉에서 개교), 그 해 6월 조선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가 1948년 9월에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건군 초기에는 주로 외국군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청년을 입교시켜 단기교육을 실시하였고, 1949년 정규과정으로 개편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하여 일시 휴교하였다가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에서 재개교하고 1952년 1월 수학기간 4년의 정규육사과정 생도 11기의 입교식을 가졌다. 육군본부에 직속되어 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 17∼21세의 대한민국 미혼 남녀 중에서 선발된 생도에게 만 4년의 교육을 실시하고 육군소위로 입관시킴과 동시에 이학사(理學士)·문학사·공학사의 학위를 수여한다. ... /naver
-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나만의 우표)
1952 - 한국의 정치인, 사업가 진대제(陳大濟) 출생 진대제 [陳大濟, 1952.1.20~ ] 진대제(陳大濟, 1952년 1월 20일 경상남도 의령군~ )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사업가이다. 제 9대 정보통신부 장관이었다.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였다. 삼성전자 반도체 임원으로 근무한 바 있으며, 2006년 4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가 2006년 10월에 IT기업 전문 펀드운용인 업체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대표이사로 취임하여 현재 대표로 있다. 2005년 미국 비즈니스위크 아시아 스타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책 《열정을 경영하라》를 집필하기도 했다. 2008년 3월 7일, 2009 인천 세계도시축전 조직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위키백과
1947 - 미국의 프로 야구선수 조시 깁슨(Gibson, Josh) 사망 깁슨 [Gibson, Joshua "Josh", 1911.12.21~1947.1.20] 조시 깁슨(Josh Gibson)은 미국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했던 선수였다. 니그로 리그에서 17년동안 선수생활을 했다. 대표적인 홈런타자로 손꼽히며, " 검은 베이브 루스" 로 불렸고 투수 사첼 페이지와 더불어 니그로 리그를 대표하였던 선수였다. 생애 /위키백과
1942 - 반제회의 오늘의 역사 (1월 20일)[1942년] 반제회의 1942년 1월 20일 아침, 독일 베를린 근교 반제가에서 나치의 차관급 인사 13명이 조찬회동을 가졌다.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유대인 절멸'이 안건으로 상정된 회의였던, 이른바 '반제회의'가 열린 것이다. 회의는 국가보위부 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초대로 이루어졌다. 하이드리히와 친위대 소속의 아돌프 아이히만까지 포함해 모두 15명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안이 결정됐다. 회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고, 이의제기와 토론도 없는 회의였다. 반제회의 이전에도 강제수용소에서는 독가스가 사용되고 있었으기 때문에 반제회의 이후로 홀로코스트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반제회의 이후로 '유대인 절멸'이 나치의 공식적인 뜻으로 확인되었고 대량학살이 죄의식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회의로 여겨지고 있다. 지금도 반제회의는 독일 교과서에 명기돼 독일인들의 참회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30127_0045
1937 -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2번째 취임 [책갈피 속의 오늘]1937년 美루스벨트 대통령 2번째 취임 “나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내 능력을 다해 미국 헌법을 지지하고 수호하고 보호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이는 수정헌법 20조에 따른 것. 1933년 발효된 수정헌법 20조는 대통령과 부통령의 임기는 만 4년이 되는 해의 1월 20일 낮 12시에 끝나며 후임자의 임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고 규정했다.
1936 - 영국 왕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즉위 에드워드 8세(Edward VIII, 1894~1972) - 리치먼드 출생. 윈저공(Duke of Windsor)이라고도 한다. 조지 5세의 맏아들이다. 조부 에드워드 7세를 닮아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황태자 시절에 세계 각지를 여행하여 상하 각층의 사람들과 널리 사귀었으며, 사회문제에도 조예가 깊어 인망이 높았다.
올드린 [Aldrin, Jr., Edwin Eugene, 1930.1.20~ ] 선외활동(船外活動) 기록을 세웠으며, 달에 2번째로 발을 디뎠다. 1951년 뉴욕 웨스트포인트의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공군 조종사가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66회의 전투비행을 했고, 그뒤에는 독일에서 근무했다. 1963년 궤도역학(軌道力學)에 관한 논문으로 케임브리지의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해말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었다. 올드린은 1966년 11월 11일 제임스 A. 러벨 2세와 함께 4일간의 제미니 12호 우주비행에 참여하여, 5시간 반 동안 우주유영을 함으로써 인간이 진공인 우주에서 효과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1969년 7월 16일 닐 A.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을 향해 떠났다. ... /브리태니커 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된 아폴로 11호는 닐 암스트롱 , 에드윈 올드린 주니어, 마이클 콜린스를 태우고 달 궤도로 진입했다. 그리고 1969년 7월 20일(한국 시간 7월 21일)에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에 21시간 30분 동안 체류하면서 21.7kg 표본을 채취하고 여러 가지 탐사 장비를 설치한 후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이것은 달 탐사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인류의 우주 탐사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naver
- 한국방송 60주년 기념 (1987.2.16. 발행)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 이듬해인 1927년 2월 16일 오랜 기간의 시험방송을 거쳐 마침내 본 방송이 개시되었고, 6월에는 최초로 무선 중계방송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방송 사업의 발전을 위해 전력이 증강되었고 한국어와 일본어가 별도의 채널을 통해 이중방송 됨에 따라 정동연주소가 증설되고, 연희방송소가 착공되었다. 1935년에는 방송망의 규모가 팽창함에 따라 경성방송국의 명칭이 경성중앙방송국으로 바뀌었고, 2년 후에는 주파수 변경과 아울러 제2방송이 출력을 증강함으로써 간이수신기로도 전국청취가 가능하게 되었다. 수신기도 고급화되어 스피커가 달린 수신기가 생산됨으로써 라디오 방송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20 - 경성방송국 시험방송 개시. http://museum.kbs.co.kr/history/history01.php
- 孫 文, 李大釗
1920 - 이탈리아 영화감독 펠리니(Fellini, Federico) 출생 펠리니 [Fellini, Federico, 1920.1.20~1993.10.31] [역사 속의 인물] '악몽의 저주'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길' '8과 2분의 1'과 같은 영화로 유명한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는 1966년 악몽을 꾼다. 꿈풀이를 해 준 마법사로부터 그는 "지금 구상 중인 작품을 영화화하면 죽는다"는 말을 듣는다. 마침 구상 중이던 작품이 있었다. 자기가 죽은 줄 모르는 한 남자의 여행 모험담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펠리니는 이 작품의 영화화를 포기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 30년간 그를 괴롭혔다. 펠리니는 결국 '묘안'을 짜냈다. 탈출구는 만화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저명한 만화가인 밀로 마나라를 찾아갔다. 초현실적이며 탐미적인 판타지이자 펠리니의 미완성 유작이 된 만화 '페르네라 불리는 G. 마스토르나의 여행'(Il Viaggio di G. Mastorna Detto Fernet)은 이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마법사의 예언이 적중한 것일까. 첫 연재만화가 출판되고 6개월 후인 1993년 10월 31일 펠리니는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지병인 심장 발작이 원인이었다. 영화를 통해 '휴머니즘의 좌절 혹은 구원'을 천착한 이 거장은 1920년 오늘 이탈리아의 시골마을 리미니에서 태어났다. 김해용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2년 01월 2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876&yy=2012 "나의 보다 진정한 직업은 내 눈에 보이는 것, 나를 감동시키고 매혹시키는 것, 놀랍게 하는 것을 표현하는 일인 듯싶다."
- 페데리코 펠리니
1914 - 영국의 라디오 방송 진행자, 작가 로이 플럼리(Plomley, Roy) 출생 플럼리 [Plomley, (Francis) Roy, 1914.1.20~1985.5.28] Roy Plomley Birth: Jan. 20, 1914 Death: May 28, 1985 Francis Roy Plomley, author and broadcaster, was educated at King's College School. He began his career in 1936 as an announcer on Radio Normandy, and managed to escape to Great Britain during the Dunkirk evacuation of June 1940. The following year, he had the idea for the radio programe "Desert Island Discs", in which, each week, a guest is asked which eight records he or she would take if they were a castaway on a desert island. After the programme had continued for a few years, they were allowed to choose, in addition, one luxury (of no practical use), and a book. As everybody asked for either The Bible or The Complete Works of Shakespeare, the rules were modified so as to assume that both of these tomes were awaiting the castaway on the island. The programme was first broadcast on the 29th. January 1942, and has continued ever since, making it the longest-running programme in the world. Roy Plomley had hoped that the first guest would be Bernard Shaw, but the playwright refused with a terse postcard stating that he had better things to do, so Vic Oliver (husband of Sarah Churchill, and son-in-law of Sir Winston) was exiled instead of G.B.S. Roy Plomley continued to present the programme until his death, after which Michael Parkinson took over ; after a couple of years, he was replaced by Sue Lawley. Roy Plomley is survived by his wife, Diana Wong ; they have one daughter. In 1975, Plomley was awarded the O.B.E. In addition to his broadcasting, he was the author of sixteen plays. Note the words, "He was a joyous man" at the foot of his grave. (bio by: Iain MacFarlaine) http://www.findagrave.com/cgi-bin/fg.cgi?page=gr&GRid=6820959
- 'Don Quixote' - J. G. Posada 1913 - 멕시코의 판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Posada, José Guadalupe) 사망 포사다 [Posada, José Guadalupe, 1851.2.2~1913.1.20] 멕시코의 판화가. 내용과 양식에서 종종 표현주의적인 성향을 띤 작품들로 20세기 멕시코 미술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린시절 농장 및 도기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잠깐 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주로 '레아 서커스 단'의 포스터에서 착상을 얻었다. 점점 판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일종의 그림을 통한 언론인이 되었으며, 수천 개에 이르는 비판적 내용의 삽화 및 대중서적과 가요집의 표지를 발표했다. 작품은 대체로 활자 합금에 인그레이빙이나 에칭으로 새긴 것이다. /브리태니커
- William Morris, Walter Crane, Eleanor Marx, John Ruskin Avalon Post Stamps for an imagined city-state based on William Morris's ideas about art, craft and Socialism. William Morris; Walter Crane; Eleanor Marx; John Ruskin http://eleanorwinter.blogspot.com/2011/12/avalon-post.html
1900 - 영국의 비평가, 사상가 존 러스킨(Ruskin, John) 사망 러스킨 [Ruskin, John, 1819.2.8~1900.1.20] 오늘의 역사 (1월 20일)[1900년] 영국 비평가 존 러스킨 사망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이 1900년 1월 20일 사망했다. 런던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캘빈주의자인 모친의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모친의 종교적인 신심으로 그는 한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려 했으나 부친의 예술적 취향에 영향받아 문학의 길을 선택했다.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이듬해 낭만파 풍경화가인 터너를 옹호한 `근대 화가론`(1843)이 큰 성공을 거두자, 평론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이 평론에서 `훌륭한 예술이란 자연의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이것은 이후 그의 미학적 토대가 되었다. 삶의 후반기에는 경제와 사회문제로도 활동영역을 넓혀 전통적인 경제학을 비판하고 인도주의적 경제학을 주창했다. `예술의 정치경제학`(1857) `최후의 사람에게`(1860) 등은 사회개혁에 대한 그의 관심을 표명한 작품이었다. 이상론에 머물지 않고 현실속에서도 사회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부친의 유산을 희사해 `성 조지조합`을 설립했다. 왕성한 저술과 사회활동으로 건강을 헤쳐 1878년에는 정신이상을 일으켜 사망할 때까지 자주 착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와중에 저술한 미완의 자서전 `지나간 일마저`(1889)는 그의 저서 중 가장 뛰어난 명문으로 평가받았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10206_0012 1894 - 미국의 만화가 그레이(Gray, Harold) 출생 그레이 [Gray, Harold (Lincoln), 1894.1.20~1968.5.9] 인기 연재만화 〈고아 소녀 애니 Little Orphan Annie〉의 작가이다. 1917년 인디애나 주 라파예트에 있는 퍼듀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 트리뷴〉의 직원으로 일하다가 도중에 잠깐 군복무를 하고 다시 돌아왔다. 1919년 〈트리뷴〉을 그만둔 뒤 상업미술에 종사하면서 5년간 시드니 스미스가 〈뉴욕 데일리 뉴스〉에 만화 〈The Gumps〉를 연재하는 일을 도왔다. 편집자인 조지프 메딜과 함께 〈고아 소녀 애니〉를 창안해냈는데,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특이한 일이었다. 주인공 애니는 그레이가 알고 지내던 시카고 거리의 명랑한 고아 소녀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만화 속에서 애니는 모험을 할 때면 동그란 눈이 더 커지고 곱슬머리가 바짝 일어서곤 한다. 나이는 10~12세 정도로 용감하고 결단력있고 정직한 성격이다. 늘 샌디라는 개를 데리고 다니며 위험에 처할 때마다 억만장자인 대머리 아저씨 대디 와벅스가 구해주는데, 이 인물을 통해서 그레이는 자신의 보수적 정치성향을 곧잘 드러냈다. 그가 죽을 무렵에는 만화 〈애니〉가 미국·캐나다 등은 물론 해외의 400여 개 신문에서 연재되고 있었다. 1977년 이 만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코미디 〈애니 Annie〉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브리태니커
1892 - 한 팀에 9명씩, 전후반 15분씩을 뛰는 농구 경기가 열리다 농구-역사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비나 눈이 오거나 추운 겨울에도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스포츠 연구에 골몰하였다. 그리하여 1891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스프링필드 소재의 YMCA 체육학교 대학부 교사인 캐나다인 제임스 네이스미스 박사가 농구를 고안하였고, 이때 정한 규칙이 현재의 농구의 원형이 되었다. 네이스미스는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는 겨울이 길어 야외에서 미식 축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실내에서 격렬하게 몸을 부딪힐 수 있는 경기를 만들고자 하였다. 처음의 농구는 실내 벽에 빈 복숭아 바구니를 달아 놓고 축구공을 던져 넣었다가 꺼내곤 하는 방식이었다. 인원 제한을 정하지 않아 100명 가까이 참가하는 경기를 가진 고등학교도 있었고, 바구니를 걸어놓은 2층에 있던 관객이 골을 방해하는 일도 있었다. 이후 1892년 1월 20일에 한 팀에 9명씩, 전후반 15분씩을 뛰는 농구 경기가 열렸고, 1904년 제1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때 미국 선수들에 의해 시범 경기가 펼쳐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때에는 여자 농구도 정식 종목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07년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대 총무 질레트가 처음으로 소개하게 된 이래 해를 거듭하면서 발전해 왔다. 1920년 3월 20일에 일본 도쿄에서 처음으로 국제 경기를 치렀다. 한국 내의 농구는 1983년 농구대잔치가 출범하자 크게 인기를 끌며 농구 인구의 저변 확대에 기여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2월 프로농구가 출범함으로써 농구대잔치는 순수 아마추어경기로 남게 되었다. /위키백과
- 'The Winnower' - 'The Gleaners'
- 'Landscape with Sheep' - 'The Sower'
밀레 [Millet, Jean-Francois, 1814.10.4~1875.1.20] 오늘의 역사 (1월 20일)[1875년] 프랑스 화가 밀레 사망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가 1875년 1월 20일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에서 세상과 작별했다. 61세였다. 노르망디의 그레빌에서 태어난 밀레는 셀부르와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한 뒤 1837년 파리로 이주해 들라로슈에게 사사했다. 35세인 1849년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농민들의 삶과 자연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이 시절에 루소, 코로 등과 친교를 맺고, 빈곤과 싸우면서 진지한 태도로 농민생활에서 경험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여 독특한 시적 정감과 우수에 찬 분위기가 감도는 작풍을 확립,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가 되었다. 바르비종파는 19세기 중엽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활동한 풍경화가들을 지칭한다. 밀레, 루소, 코로, 뒤프레, 트루아용 등의 화가가 대표적이다. 만년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1868년 프랑스 최고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수상했다. /조선닷컴 2017-01-20 http://srchdb2.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5_0395
옌센 [Jensen, Johannes V(ilhelm), 1873.1.20~1950.11.25] 덴마크 파르쇠 출생. 코펜하겐대학교에서 약학을 전공하였다. 작가가 된 뒤에도 과학에 흥미를 가져, 인간의 무한한 진화에 기대를 걸었다. 향토작가로 출발하여 향리의 풍토와 인정을 유머를 섞어가며 발랄하게 묘사한 《히메를란 단편집 Himmerlandsfolk》(3권, 1898∼1910)으로 지위를 확립하였고, 《잃어버린 대륙》에서 시작하여 《콜럼버스》로 끝나는 문화사 소설 《긴 여행 Den lange Rejse》(6권, 1908∼1922)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것은 원시시대에는 빙하나 화산의 폭발과 싸우고, 민족이동이며 바이킹 활동을 거쳐, 다시 대양을 가로질러 미지의 세계를 찾아나서는 인간의 불퇴전(不退轉)의 모습을 그린 대서사시이다. 그 뒤로는 《신화(神話)》(6권, 1907∼1944)가 유명하다. 그 밖에 《왕의 몰락 Kongens Fald》(1901) 《마담 도라 Madame d’Ora》 《차 Hjulet》(1905) 《색다른 이야기 Exotiske Noveller》(1907∼1909) 등의 소설이 있다. 194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 'Yvette Guilbert Singing "Linger Longer, Loo" ' by Toulouse-Lautrec
1867 - 프랑스 파리 물랭루주의 가수, 배우 길베르(Guilbert, Yvette) 출생 길베르 [Guilbert, Yvette, 1867.1.20~1944.2.4] 파리 하층사회의 생활상을 노래하여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외설적인 노래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호소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어렸을 때 낭송학교를 다녔으며 희극배우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으나 1896년부터 카바레 가수로 크게 성공하였고(물랭 루주와 앙바사되에서 7년간, 폴리-베르제르에서 9년간 일했음), 1920년대 중반부터는 음반을 발표하여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 중에서는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1933)·〈아이슬란드의 어부 Pecheurs d'Islande〉(1934)가 유명하다. 1895년부터는 이탈리아·미국·영국에서 순회공연을 하여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길베르의 음악적 성공은 대부분 작곡가 레옹 푸르노와 아리스티드 브루앙 덕택이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그녀 특유의 노란 드레스와 검은색의 긴 장갑을 낀 포스터도 유명하다. 〈가창법 L'Arte de chanter une chanson〉(1918)과 2편의 소설 〈스타 La Vedette〉(1920)·〈노파들 Les Demi-Vieilles〉(1920), 자서전 〈내 인생의 노래 La Chanson de ma vie〉(1929)를 썼다. /브리태니커
- Joubert, Kruger, Pretorius
주베르 [Joubert, Petrus Jacobus, 1831.1.20~1900.3.27] P. 크뤼에르의 동료이자 경쟁자였다. 주베르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민 선교사로 1837년 가족을 이끌고 북부로 이주해 나탈 지방에 정착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그의 가족은 트란스발에 있는 한 농장(루스트폰테인)에 정착했다. 공식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그는 독학으로 변호사 및 부동산 대행업자가 되어 상당한 성가를 올렸다. 1860년 의회(Volksraad)에 진출해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고 대통령인 토마 프랑수아 뷔르제가 1875~76년에 유럽을 방문하는 동안 부통령으로 일했다. 1877년 영국이 트란스발을 병합하자 그는 트란스발의 독립을 쟁취하기로 결심하고 크뤼에르와 함께 남아프리카와 런던에서 다양한 직책의 영국 관리들과 만나 보어인 차별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독립을 쟁취하기가 어려워지자 보어인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1880년 12월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고 이를 옹호했다. 크뤼에르가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진력하는 동안 주베르는 군사령관으로서 지역 주민들을 이끌고 랭즈넥과 잉고고, 그리고 마후바힐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트란스발의 독립을 승인한 프리토리아 회의(1881)에도 참가했다. /브리태니커
1813 - 독일의 소설가, 시인 빌란트(Wieland, Christoph) 사망 빌란트 [Wieland, Christoph Martin, 1733.9.5~1813.1.20] 계몽주의 시대에 활약하였던 독일의 소설가 ·시인. 비베라흐 근교 오버홀츠하임 출생. 계몽주의 시대에 활약하였으며, 독일어 문체에 평이하고 우아한 어조를 도입하고, 클로프슈토크가 경시하였던 운율에 올바른 위치를 되찾아 주는 등 독일문학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또한 유머나 위트의 요소를 독일문학에 도입하였고, 이국취미(異國趣味)나 역사소설을 개척함으로써 후일 낭만파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작품 중 유명한 소설은 《아가톤의 이야기》(1766∼1767)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이상주의에 심취한 주인공이 갖가지 체험을 한 끝에 결국은 이상과 현실의 타협인 일종의 체념에 도달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밖에 《돈키호테》를 모방한 《로잘바의 돈 실비오》(1764), 금욕주의가 여성의 아름다움에 무릎을 꿇는 운문(韻文) 이야기 《무자리온》(1768), 기지(機智)에 찬 소설 《압데라의 사람들》(1776) 등의 작품이 있다. /네이버
앙페르 [Ampère, André-Marie, 1775.1.20~1836.6.10] 리옹 출생.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809년 파리이공과대학 교수가 되고, 1814년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으며, 1824년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가 되었다. 여러 방면의 연구에 종사하여, 특히 전자기(電磁氣)현상과 전기역학(電氣力學)의 연구에 공헌하였다. 가동도선(可動導線)을 사용, 두 전류 간의 상호작용을 조사하여 앙페르의 법칙을 확립하고, 원형(圓形)전류와 자석과의 동등성(同等性)에서 분자(分子)전류에 의해 물질의 자성(磁性)을 설명하는 가설(假說)을 세웠다. 수학에도 뛰어나, 물리법칙을 수학적으로 정식화(定式化)함과 동시에 독자적인 수학 연구도 진행하여, 미분방정식에 관한 논문 등을 남겼고, 과학철학에도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 《전기역학 실험보고집》(1822) 《과학철학시론(試論) Essai sur la philosophie des sciences》(1834∼1843)이 있는데, 후자는 데카르트적(的) 이원론(二元論)에 의한 학문분류서이다. 아들 장 자크(1800∼1864)는 평론가 ·문학사가로서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지냈다. /naver
톤 [Tone, (Theobald) Wolfe, 1763.1.20~1798.11.19]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를 타도하기 위해 싸웠으며, 1798년 아일랜드 봉기 때 프랑스 지원군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건너갔다. 마차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법률을 공부하여 1789년 아일랜드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1791년 아일랜드인 연합 설립에 참여했다. 프로테스탄트가 다수를 차지했던 이 협회는 보통선거권 획득과 로마 가톨릭교도의 해방과 같은 의회개혁을 위해 활동했다. 1792년 그는 더블린에서 로마 가톨릭 의원들의 모임을 조직해 의회가 1793년 가톨릭 구제법을 통과시키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자신은 교회에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아일랜드가 정치적 자유를 획득한 뒤에는 종교적 교의에 반대하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려고 했다. 이듬해 아일랜드인 연합의 동료들과 함께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를 타도하기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서 파리의 공안위원회에 보내는 소개장을 얻었다. 1796년 2월 파리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의 아일랜드 침공안을 제시해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어 총재정부는 프랑스의 뛰어난 젊은 장군 라자르 오슈를 원정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고 톤을 프랑스군의 부관으로 임명했다. 1796년 12월 15일 43척의 배에 약 1만 4,000명의 병력을 태운 원정대가 브레스트를 출발했다. 그러나 함선들은 항로를 잘못 잡았고 코크와 케리 서안에 도착한 뒤 폭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797년 톤은 다시 아일랜드 침공안을 가지고 파리에 갔지만 당시 프랑스의 최고 군지휘관이던 나폴레옹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798년 5월 아일랜드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는 아일랜드 해안의 몇 군데를 소규모 습격할 수 있을 정도의 약간의 프랑스 병력만을 얻었다. 그해 9월 그는 3,000명의 병력으로 다니골의 러프스윌리에 들어갔으나 사로잡혔다. 11월 10일 더블린에서 열린 재판에서 그는 영국에 대한 끝없는 적대감과 '양국의 분리를 위한 공정하고도 공개적인 전쟁'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도전적으로 선언했다. 교수형 집행일인 11월 12일 이른 아침 그는 주머니칼로 자신의 목을 잘랐고 7일 뒤에 죽었다. /브리태니커
카를로스 3세 [Carlos Ⅲ, 1716.1.20∼1788.12.14] 나폴리 왕(1734∼1759), 에스파냐 왕(1759∼1788). 24년 동안 나폴리 왕으로 있다가 이복형 페르난도 6세가 죽은 뒤 에스파냐 왕위를 계승하였다. 계몽전제군주로서 근대화를 목표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여 개혁을 시도하였다. 특히 군직정비를 비롯하여 해군 개혁 및 공공사업에 공적을 남겼는데 현재 마드리드의 역사적 건축물의 대부분은 이 시대에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이면서 중앙·남아메리카를 포함한 에스파냐 영토에서 예수회를 추방하였으므로 바티칸과 긴장을 초래하였다. 또한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1761년 프랑스와 가족협약을 맺었고 7년전쟁 종결을 위해 1763년 파리조약에서 영국에게 플로리다를 양도하였으며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양도받았다. 식민지정책에서는 페루를 비롯한 중앙·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독립운동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yahoo
- Crown of Rudolf II
1612 -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 사망 루돌프 2세 [Rudolf II, 1552.7.18~1612.1.20]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1576~1612 재위). 병약하고 인심을 잃어 종교적 충돌을 막지 못했으며 이것이 결국 30년전쟁(1618~48)으로 이어졌다. 황제 카를 5세의 딸 마리아와 황제 막시밀리안 2세 사이에서 살아남은 아들 중 맏아들로 1572년 헝가리 왕(루돌프), 1575년 보헤미아 왕(루돌프 2세)이 되었다. 1576년 10월 12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대공(루돌프 5세) 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심한 우울증 발작 때문에 곧 프라하로 물러나 은둔생활을 하면서 예술과 과학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첫 치세 20여 년 동안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파당들의 싸움으로 제국의 정부는 기능이 마비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루돌프는 막시밀리안 2세의 종교관용정책을 뒤엎고 프로테스탄트 신분의회(귀족과 도시 대표들)의 정치특권을 제한하려 했다. 1598년 이후 황제의 정신상태는 더욱 안정을 잃었으며, 그의 정치적 무능에 오랫동안 불만을 품어온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제후들은 1605년 헝가리 국사를 그의 동생 마티아스에게 맡기도록 강요했고, 결국 1606년 마티아스를 자기들의 지도자이며 루돌프를 계승할 후보자로 인정했다. 2년 뒤 루돌프는 마티아스에게 헝가리·오스트리아·모라비아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고 보헤미아의 계승권도 약속했다. 그러나 1611년 레오폴트 대공이 지휘하는 황제군이 루돌프의 지원을 받으며 보헤미아를 약탈하자 보헤미아 신분의회는 마티아스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티아스의 군대는 루돌프를 사실상 프라하에 가두어놓았다. 그해 5월 루돌프는 마티아스에게 보헤미아를 넘겨주고 풀려났다. 그는 마티아스가 로마 왕(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 지명받은 사람)에 선출되지 못하게 손을 썼지만 마티아스는 그가 죽은 뒤 5개월 만에 황제가 되었다. /브리태니커
- Germany, 100 Mark (1980. Banknote)
1488 - 독일의 지리학자, 히브리어학자 뮌스터(Münster, Sebastian) 출생 뮌스터 [Münster, Sebastian, 1488.1.20~1552.5.23] 히브리의 학자·수학자·지도제작자·세계지리학자(→ 지리학). 그의 〈세계지리학 Cosmographia〉(1544)은 처음으로 세계를 독일어로 기술한 것이며, 16세기 유럽의 지리학적 사조를 엿볼 수 있는 주요작품이다. 1527년 바젤대학의 히브리어 교수로 임명되어 히브리 성서 2권(1534~35)을 편집했으며, 여기에 라틴어 직역과 많은 주석을 달았다. 1540년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 Geographia〉의 라틴어판을 출판했으며, 여기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목판 지도 27개와 자신이 만든 21개의 지도가 있다. 독일에서 인쇄된 〈세계지리학〉의 40여 개의 판 중에서 1550년판은 초상화·도시전경·의복삽화가 들어 있는 가장 가치있는 것이다. 다른 저서로는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로 된 〈3개 국어 사전 Dictionarium trilingue〉(1530)과 〈유럽 지도 Mappa Europae〉(1536)가 있다. /브리태니커
- St. Stephen's Hall, Westminster Hall and Abbey, Engraving by Wenceslaus Hollar
1265 - 영국 최초의 의회가 몽포르 백작에 의해 소집 [참고] (1965.6.21) 영국 의회 7백주년 기념식 1965년 오늘, 영국 웨스트민스터 의사당에서 영국 의회 개원 7백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됐다.
Important Dates Captured King at Battle of Lewes: May 14, 1264 /http://historymedren.about.com/library/who/blwwsimon.htm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